22화
제 건강에 대한 그의 집념에 한차수는 솔직히 감탄했다.
몇 시간 전에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퍽 다른 감상이었다.
이제 그가 제 퇴원을 막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계약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었으니까.
검사 한번 해 주는 대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알겠습니다. 병원에 가도록 하죠.”
이전과 달리 순순히 수락하자, 정이흔은 눈에 띄게 기쁜 눈치였다.
마치 자신이 거절할까 두려워했던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해 잠시 의문이 들려는 찰나.
두두두두-
머리 위를 찍어 내리는 듯한 풍압과 함께 거친 헬기 소리가 귓전을 찢었다.
“허락해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헛일에 돈 낭비를 한다고 부길드장에게 혼날 뻔했네요.”
정이흔이 웃으며 이쪽을 향해 내려오는 사다리를 흘끗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꽉 잡아요. 아, 불안하면 안겨도 괜찮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니까.”
“…….”
“한차수 씨?”
한차수는 대답 대신 이쪽을 향해 내려오는 검은 헬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호구가 아니라 미친 호구인 게 틀림없다고.
***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간다니. 생각만으로도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이목이 집중될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한차수는 곧 헬기의 이점을 깨달았다.
‘…귀가가 좀 더 빨라지겠군.’
그렇지 않아도 대교 한가운데서 터진 게이트 때문에 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막힘없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헬기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선택지.
결국 한차수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말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정이흔은 기쁜 얼굴로 자신을 헬기에 태웠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은 예상외로 몹시 시끄러웠지만….
“불규칙 게이트에서 방금 나오셨다고요. 혹시 전투 중에 상처를 입으신 거나 한 건 없습니까?”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몬스터와 접촉한 적도 없습니다.”
정이흔이 대신 보호자를 자처해 준 덕에 검사도 일찍 끝날 수 있었다.
머리와 몸에 붙은 뭔 어쩌고 측정기를 떼어 내며, 한차수가 물었다.
“결과는 나온 겁니까?”
“아! 네, 네. 한차수 씨…. 어디 보자. 차트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네요.”
이 병원에 와서 처음 보는 의사였다.
머리를 높게 틀어 묶은 의사는 전문가다운 톤으로 한차수에게 차트를 설명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 있는 구석은 거의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파장도 균일하고 뒤틀린 구석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친절한 의사는 환자의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한차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돌아가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곁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이흔이 분명했지만 한차수는 무시했다.
자신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빌어먹을 일기장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돼.’
어떻게 집에서 빠져나왔는지.
기절하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희미한 터라 확인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면 누군가 들어가 헤집어 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제법 비싼 아파트 단지기에 보안도 좋을 거라는 희미한 확신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 기대기엔 내 상황이 좋지 않지.’
한차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외투를 집어 들자 어느새 의사가 따라 일어났다.
보호자에게 마지막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환자분이 나중에 두통이나 환청, 환각 증세를 호소하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다시 이곳에 오면 됩니까?”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허리를 숙인 그녀가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그리고 작게 접은 종이를 정이흔에게 건넸다.
“각성자 관리국 본부 산하 국립 병원이 더 확실할 거예요. 쪽지에 적은 곳으로 가서 제가 보냈다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인걸.
미묘한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깐.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겠군요. 차를 대기시켜 놨으니 내려가도록 합시다.”
정이흔의 빈틈없는 배려에 한차수는 깊이 감동했다.
이런 호구라면 좀 미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영원히 곁에 있을 것도 아니고.’
금명결의 일이 해결되자마자 천령 길드를 떠날 생각인 건 변함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속 밀어내는 것보다 적당한 선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한차수는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무사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한차수 씨!”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한차수는 그를 보고 잠깐 눈을 깜빡였다.
금명결에 의해 한강 물에 빠졌던 기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앉아 있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 봬도 A급이니까요.”
“아…. 다행입니다.”
시트에 몸을 묻으며 한차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운전과 함께 차가 병원을 막 빠져나갔을 무렵이었다.
“길드장님.”
“응? 왜 그럽니까.”
“혹시 집에 가는 길에 잠시 아이템 거래소에 들러도 될까요.”
한차수가 진지한 얼굴로 정이흔을 바라보았다.
***
병원을 출발하고 몇 시간 뒤, 한차수를 태운 차는 이번엔 무사히 그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잠깐 앉아 있어요.”
정이흔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줬다. 한차수가 들고 있는 짐 때문이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길드장님.”
집에 오는 길에 잠깐 아이템 거래소에 들렀던 참이다.
한차수가 차에서 내리는 동안 봉투 안에 든 잡동사니가 덜그럭거렸다.
“손이 모자라 보입니다만. 괜찮으면 내가 도와줄게요.”
집 안까지 따라올 기세에 한차수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바닥에 잠깐 내려놓으면 되는걸요.”
“…그래요. 아픈 곳이 있으면 바로 내게 연락하고요.”
제법 열성적인 거절이었다.
하여튼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며 정이흔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푹 쉬어요.”
“예, 길드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어딘가 여운을 남기는 듯한 작별 인사와 함께 차가 떠났다.
“하, 드디어….”
한차수는 앓던 이를 뺀 사람처럼 뒤를 돌았다.
지긋지긋하면서도 동시에 반가운 집이었다.
“허억, 헉….”
‘저층이라 다행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도 이 정도로는 페널티가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차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빠져나와 복도에 들어섰다.
쿵, 쿵. 긴장감에 심장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한차수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하, 젠장….”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차수는 자연스레 벽에 몸을 기댔다.
그는 식은땀이 밴 이마를 훔치며 고개를 젖혔다.
뒷머리에 닿는 시멘트가 차가웠다.
‘앞으로는 문 앞에 바리케이드라도 만든 뒤에 짐 정리를 해야겠어.’
차에 타서 집에 오는 내내 얼마나 끔찍한 망상에 시달렸는가.
혹시 모를 침입자에 의해 한차수의 지저분한 과거가 다 폭로되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결국 정서흔을 살려 낸 보람도 없이 정이흔에게 잡혀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한차수는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문을 열었다.
삐빅, 하는 짧은 알림음과 함께 지저분한 내부가 드러났다.
상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귀신과 벌인 결투의 결과였다.
“쯧.”
혀를 찬 한차수가 현관에 널브러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창고 안에 있던 물건이었다.
“무슨 폭발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진 걸 보니 하나씩 확인하면서 일기장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한차수가 이삭 줍는 사람처럼 주섬주섬 물건을 주워 들 때였다.
복도 한가운데 반쯤 찢어진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
제목 없는 책등을 바라보다 훌떡 책을 반대로 뒤집은 순간이었다.
“아.”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강박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빼곡한 매일의 기록.
그가 발견한 건 그토록 찾던 원작 한차수의 과거 일기장이었다.
***
“음…. 이게 전부인가.”
한데 그러모은 일기장을 내려다보며 한차수가 턱을 쓸었다.
일기는 대략 다섯 권 남짓이었다.
귀신 녀석과의 전투 때문에 찢겨 나간 게 제법 있긴 했지만 괜찮았다.
남은 걸로도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무리 없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파악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었다.
“한차수 이 녀석, 제정신이 아니었군.”
가장 먼 과거인 6년 전 일기장을 집어 든 한차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적힌 글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난 실패작이 아니야.]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지만 정말 그 문장 하나밖에 없었다.
그 후의 일기는 그래도 좀 나았다.
[난 실패하지 않았어. 실패작이 아니라고 일이 잘못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처음부터 이상했어. 애초에 날 엿 먹이려던 거였어. 당연하잖아. 난 잘못한 게 없어. 그 병신 새끼가,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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