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21화 (21/113)

21화

“그래도 제 노력이 아예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군요.”

은은한 미소를 띤 정이흔은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받은 것처럼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기쁨에 차 있었다.

“한차수 씨의 마음에 들 수 있게끔 계약서를 여러모로 고친 보람이 있어요.”

주홍빛 눈동자는 햇빛에 예쁘게 물들어 반짝였다.

대놓고 흡족해하는 얼굴에 한차수는 말을 잃었다.

종신 계약을 할 거라는 건 오해라고 쳐도, 그걸 왜 이리 기뻐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놈의 정 씨 형제들은 얼마나 착해 빠진 거지.’

제 몸을 어떻게든 고쳐 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떠난 정서흔이나, 은혜를 갚겠다며 달라붙는 정이흔이나.

주인공이라기에는 너무 사람이 착하고 무르지 않나.

한차수는 내심 혀를 찼다.

만약 자신이 진짜 원작의 한차수였다면 정이흔은 바로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기존 연봉의 열 배가 다 뭐란 말인가. 그 녀석은 아마 정이흔의 목숨을 달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절대 안 되지.’

그런 면에 있어서는 차라리 자신이 한차수에 빙의한 게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덕분에 자신도 살고, 정이흔도 동생을 잃지 않고 저렇게 해맑은….

“하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마냥 기뻐하는 정이흔을 보며, 한차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길드장님.”

“네, 한차수 씨?”

“헷갈리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종신 계약서에 사인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습니까?”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정이흔의 눈이 커다래졌다.

“평생토록 천령 길드에 남아 제 곁에 있으시겠다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겠냐고.

시무룩하게 덧붙인 말에 한차수는 골이 아파 왔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다른 길드원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길드에 남아 있겠다는 소리였습니다.”

“흠. 조금 아쉽네요.”

말은 조금이라고 하지만 매우 아쉬운 얼굴인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이흔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한차수 씨가 퇴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겐 다행이죠.”

“그럼….”

드디어 그놈의 종신 계약을 포기하는 건가.

희망의 빛줄기가 눈앞에 드리워진 탓일까.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사실 어떤 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천령 길드는 한차수 씨가 남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모두 기뻐할 겁니다.”

세상에 이런 호구가 다 있나. 한차수가 깊이 탄복하던 때였다.

“얘기 다 끝났나?”

금명결이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커다란 체격과 장신이 맞물려 흡사 호랑이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럼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을 테고.”

능청스러운 말에 한차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금명결이 그를 향해 찡긋 눈웃음을 흘렸다.

“…….”

한차수는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하마터면 단검이 있는 안주머니에 다시 손을 찔러 넣을 뻔했다.

‘나참, S급이라 그런가 백담 못지않게 뻔뻔하군.’

뻔뻔함의 종류가 조금 다르긴 했으나 붙여 놓으면 거의 막상막하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자신이 정이흔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한차수는 금명결이 아닌 척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걸 느꼈다.

아마도 정이흔과 자신 사이에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면 바로 끼어들 생각이었겠지.

앞에서는 우리 길드에 오라며 꼬셔 놓고 실은 헌터용 계약서를 쓰게 하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참 방심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사이 돌아갈 준비가 끝났는지 정이흔이 손짓했다.

“불규칙 게이트는 다른 곳과 달리 직접 출구를 열어야 합니다. 멀리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서 계세요.”

“예.”

걸음을 옮기면서도 한차수는 바닥을 적시는 푸릇한 열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 마리의 몬스터를 학살하고 얻어 낸 귀환석이 원형의 진 한가운데에 있었다.

귀환석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잘게 몸을 떨었다.

우웅, 웅-

푸른 동심원이 진동에 맞추어 점차 영역을 넓혔다. 한차수는 신기한 눈으로 동심원이 제 몸에 닿는 걸 지켜보았다.

귀환진의 열기가 공기를 후끈 데웠다. 아래서부터 올라온 아지랑이가 시야를 가릴 무렵이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불규칙 게이트가 처음인 자신이 걱정되는지 정이흔이 곁에서 어깨를 잡아왔다.

한차수는 흘끗 그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는 시간 동안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보자, 아까 임시 보관함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여기 있군.

한차수는 임시 보관함에 들어 있던 ‘망령의 거죽’을 꺼내 들었다.

서리거인 주술사의 원념을 죽이고 습득한 아이템 중의 하나로 귀걸이와는 달리 잡템에 가까웠다.

그래도 제게는 귀걸이보다 훨씬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이름은 거죽이라지만 가면에 가까운 아이템을 탈탈 털고 있으니 정이흔이 슬쩍 물었다.

“그건 뭡니까?”

귀환하려던 차에 웬 천 달린 가면 같은 걸 꺼내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아, 이건….”

한차수가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새파란 메시지들이 기다렸다는 듯 시야를 가리며 떠올랐다.

띠링!

[ 불규칙 게이트(동기화) 클리어 확인 ]

[ 귀환 요청이 접수되었습니다. ]

[ 생존자의 귀환을 진행합니다. ]

[ 지정 구역 잔존률 탐색 중… ]

[ 지정 구역 잔존 확인 ]

[ 귀환 구역 일시적 격리 실행 ]

[ 격리 완료 ]

[ 귀환을 진행합니다. ]

[ 주의! 귀환 중의 돌발 행동은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조심하세요. ]

몸을 덮어씌우는 이질감과 함께 곧 초원의 바람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와아아악! 나왔다!”

“어디야, 저쪽? 아, 아냐 저기 있다! 자식아, 카메라 들고 빨리 와!”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터진 불규칙 게이트에 들어간 S급 두 명’이라는 특종에 잔뜩 달아오른 취재진의 열기였다.

***

“거기 누구야? 아, 젠장 가려서 안 보이잖아. 고개 좀 들어 봐요!”

“정이흔 씨, 정이흔 씨 맞습니까? 대답해 줘요!”

긴급 재난 안전국에서 둘러친 펜스와 가림막 너머, 출입 금지당한 기자진이 목청껏 그들의 이름을 외쳐 댔다.

대교에서 터진 불규칙 게이트에 S급 두 명이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도 무릅쓰고 바로 달려온 터였다.

심지어 그 두 명은 서로 싸우던 찰나에 휘말렸다고 하질 않나.

이런 특종을 쉽사리 놓아줄 기자는 없었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캐고 간다.’

카메라 렌즈를 든 사람들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펜스 안쪽에서 취재진을 슬쩍 건너본 정이흔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곁에는 어깨까지 덮이는 무채색의 가면을 쓴 사내가 있었다.

한차수였다.

“…….”

“왜 그러십니까?”

“…한차수 씨는 참.”

“?”

“여러모로 준비성이 좋군요.”

정이흔의 칭찬에 한차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화제의 B급이 S급들과 함께 불규칙 게이트에서 나왔다는 소식이 퍼졌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한차수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미래에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겨우 꺼져 가는 장작에 불쏘시개를 던질 수는 없지.

어깨까지 전부 가리는 천이 달린 가면 테두리를 매만지며 한차수가 말했다.

“길드장님은 저쪽으로 안 가셔도 됩니까?”

사람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대충 한차수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금명결이 있었다.

그는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직후부터 정부 부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게이트가 터질 걸 알고 있었냐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아니…. 내가 거기 있었던 건 다른 이유라니까?”

그제야 금명결 쪽을 확인한 정이흔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답지 않게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저대로 놔두죠. 저게 금명결 길드장 나름대로 우리에게 보내는 사과의 제스처니까요.”

“그런 겁니까?”

“예, 그런 겁니다.”

정이흔은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어차피 저 사람들도 나나 금명결 길드장 한 사람만 붙잡으면 되는 걸 알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하긴 금명결의 비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가하게 코코아나 마시고 있었다.

‘총알받이를 자처한 거라면야 이쪽이야 감사한 일이지.’

비서도 걱정하지 않는 S급을 자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차수는 금세 금명결로부터 관심을 거뒀다.

‘그럼 슬슬 빠져나갈 타이밍을 봐야 하는데….’

펜스는 게이트가 생겼던 크레이터 주위에 꼼꼼히 둘러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미친 취재진들이 거품을 물며 카메라를 흔들어 대고 있었고.

“쯧.”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이는데.

‘이대로 가만히 죽치고 있어야 하나.’

가면을 쓴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정이흔이 쓱 하고 곁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갈 생각이죠? 도와줄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알려 주기 전에 하나만 약속해 주면 좋겠습니다.”

“종신 계약은 안 됩니다.”

정이흔은 정곡을 찔렸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건 이제 없는 일로 취급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참 성실하신 분이라니까.”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쉰 정이흔이 단말기를 흔들며 말했다.

“불규칙 게이트는 알게 모르게 사람의 정신과 신체에 영향을 끼치곤 하죠. 저는 여러 번 경험해서 괜찮지만, 한차수 씨에겐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 말인즉슨.

“병원에 가자는 소리군요.”

아주 병원 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