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 둘은 내가 맡고 있을 테니 한차수 씨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친절한 정이흔의 배려에 한차수는 적당한 거리에서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확인 메시지의 세례에 적잖이 당황해야만 했다.
[ 히든 보스 ‘서리거인 주술사의 원념’이 처치되었습니다. ]
[ ——던전 공략 완료—— ]
[ 알림! ]
[ 공략 기여도에 따른 보상을 책정합니다. ]
[ 기여도 산정 중… ]
[ 산정 완료 ]
[ 축하합니다. ]
[ 공략 기여도 1위 : 한차수 ]
[ 기여도를 공개하시겠습니까? Y/N ]
밑으로는 시간이 지나 기여도 공개를 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정신을 잃을 때 눈앞이 시끄럽더니, 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나 보네.’
보통 던전들은 공략을 완료했다고 이렇게 기여도 순위를 알려 주지 않는다.
고로,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한차수는 차분하게 지나간 메시지를 훑었다.
“어때, 내가 말한 대로지?”
금명결이 바닥에 드러누워 칭얼거렸다.
그러든 말든 한차수는 스크롤을 내렸다.
회색 눈동자가 먼지처럼 가볍게 허공을 훑었다.
‘그나저나 이상한데, 인벤토리 창을 봤을 땐 보상처럼 보이는 건 없었어.’
“아.”
메시지 창을 쭉 훑어 내리던 그의 눈에 무언가 걸렸다.
[ 한 시간 이내로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
[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임시 보관함에 들어가게 됩니다. ]
[ 임시 보관함에 들어간 아이템은 30일 후 소멸하니 주의하세요. ]
[ 소멸 예정 아이템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임시 보관함이라.
메시지 창을 치운 한차수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창의 하단 오른편.
칙칙한 회색 아이콘 위에 붉은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 놓으니 안 보이지. 아이콘을 누른 한차수는 가득 찬 보관함에 눈을 찌푸렸다.
“웬 잡동사니가 이렇게….”
조용히 읊조리던 말이 자연스레 멈췄다.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는 한 쌍의 아이템을 발견한 탓이었다.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때깔이 좋은 게 누가 봐도 히든 보스를 처치하고 얻은 보상이었다.
귀걸이를 인벤토리로 옮기고 정보를 열람하자, 곧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불길한 신을 모시던 사제가 착용하던 귀걸이. 소유주의 핏물이 말라붙어 있다.
자세한 효과는 전문 감정 스킬이 필요해 보지 못했지만 저걸로 충분했다.
한차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귀걸이의 설명을 본 순간,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떠올렸던 원작의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이흔 천령 길드장으로부터 도착한 소식입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금명결에게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역신의 귀걸이가 깨진 게 그 새끼 짓이라고.”
한차수, 천령 길드를 갖고 논 그 미천한 종자가 제 목숨에도 손을 댔던 것이다.
“죽어서도 지옥을 보게 해 주지.”
S급 저주술사 금명결의 눈에 잔혹한 빛이 어렸다.]
‘어차피 아이템은 넘겨줄 생각이었어.’
금명결이 이쪽에게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도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무고한 B급 포션 제작자로 남을 생각이었으니까.
모든 걸 정리하고 사라질 훗날을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원한은 만들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차수는 느리게 숨을 들이쉰 뒤 티 나지 않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명결이 이쪽을 향해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나.’
금명결을 차분히 훑은 한차수는 손을 내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사내놈의 귓불 같은 걸 살피는 취미가 없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S급 저주술사 금명결.
그는 원작의 한차수가 망가트린 ‘역신의 귀걸이’를 대신할 아이템을 갖기 위해서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다.
‘역신의 귀걸이를 손에 넣고 나서 전투력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고 했지. 아쉬울 만도 해.’
금명결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금명결이 자신의 범행을 알아차리고서 죽이러 찾아온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에 대교 위에서 목숨을 잃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심장이 제멋대로 펄떡거리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목 뒷덜미가 뻐근해졌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는 걸까.
뒷목을 주무르며 담담히 상황을 반추하던 한차수는 곧 원인을 파악했다.
‘이게 다 악역의 몸에 빙의한 탓이군.’
그것도 원작의 주요 악역이 아니라 하찮다 못해 찌질한 조연 악역에 빙의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얼 어찌하랴.
일은 이미 벌어졌고, 한차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만약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해도….
“한차수 씨.”
“아, 길드장님.”
“괜찮습니까?”
얘는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야.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한차수가 뒷걸음질 쳤다.
발치에서 타다 만 잔해가 튀었다.
“내가 놀라게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정이흔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숙였던 허리를 세우며 물러났다.
“슬슬 저쪽의 마비가 풀릴 것 같아서 알려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
고개를 빼 정이흔의 뒤쪽을 보니 금명결이 몸을 이쪽저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당장에라도 결박을 풀고 달려올 태세였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화륵, 불꽃이 머리 위를 밝혔다.
“대화는 가능한 상태로 둘까요, 아니면 항거 불능 상태가 좋은가요?”
스테이크는 웰던이 좋으냐 아니면 레어가 좋으냐는 느낌의 질문이었다.
“둘 다 필요 없습니다.”
한차수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하는 건 습격의 이유를 아는 것과 그에 대한 사과뿐이었으니까요.”
아직 제대로 된 사과는 못 받았지만 한차수는 거기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정이흔한테 밟히게 한 거로 됐어.’
어차피 육탄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었다.
자신은 A급이고 저쪽은 잘나신 S급이니까.
그냥 정이흔에게 신명 나게 당하는 꼴을 본 걸로 대충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직접 성질을 건드려 후환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지.’
그게 생존에 있어서도 훨씬 유리했다.
“그래요?”
정이흔은 그런 한차수의 결정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는 엄연히 한차수였다.
게다가 그는 웬만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걸 겪은 뒤니, 정이흔은 순순히 수긍했다.
“알겠어요. 한차수 씨 뜻이 그러하다면.”
어깨를 으쓱인 정이흔과 함께 한차수는 금명결에게로 다가갔다.
마침 그는 마비가 풀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으, 진짜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금명결 길드장님.”
“한차수 씨, 그렇게 단정한 얼굴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한차수는 그를 달래 주는 대신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시약병을 꺼냈다.
“금명결 길드장님. 먼저 절 습격한 사람이 누구죠?”
“으음.”
“그리고 지금 게이트 귀환석을 가진 분은 누구실까요.”
한차수의 뒤에서 정이흔이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
드디어 닥치게 만들었군.
정이흔의 위세를 빌려야만 했지만 당장은 이걸로 충분했다.
한차수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치켜뜬 금명결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걸 찾고 계셨다고 했죠.”
제법 단단한 손 위에는 한 쌍의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별다를 게 없는 심플한 모양의 귀걸이였다.
빗줄기처럼 이어지는 가느다란 은줄에 푸른 원석이 점점이 매달린 형태.
위기감 없이 손바닥 위에 덜렁 놓인 귀걸이를 향해 금명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다 주먹을 쥐었다.
한차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설마 하는 감정이 깃들었다.
히든 보스가 드롭한 희귀 아이템. 심지어 자신이 차를 들이박으면서까지 가지려 했던 물건.
그걸 이리도 쉽게 내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도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이렇게 되어 버려서요.”
절망하는 금명결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며, 한차수가 귀걸이 한 쌍을 금명결의 손에 올려놓았다.
당연하게도 귀걸이는 그곳에 가만히 놓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젠장, 어째서야.”
금명결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귀걸이가 하나뿐이라는 걸 발견했다.
나머지 한 짝은 어느새 한차수의 손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설마 그거 커플 아이템이야?”
금명결의 떨리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차수는 다시 한번 아이템 정보를 훑었다.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불길한 신을 모시던 사제가 착용하던 귀걸이. 소유주의 핏물이 말라붙어 있다.
아이템에 대한 기본 설명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커플 아이템(귀속)
서리거인 던전의 히든 보스 드롭 아이템,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는 두 사람이 나눠 껴야만 하는 커플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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