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저도 모르는 사이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더군요.”
그 말과 함께 정이흔은 아이템을 인식하자마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800마리를 더 죽이면 게이트 클리어인가 봅니다.”
불규칙 게이트에는 간혹 이렇게 숨겨진 조건들이 있고는 했다.
다행이라며 정이흔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한차수는 그와 다른 의미로 안도했다.
‘그러면 걱정 없이 금명결을 처리해도 되겠군.’
습격받은 때부터 내내 한차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 금명결은 게이트에 들어온 뒤로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었다.
“천령 길드장님 성질 건드리지 마세요. 불에 탄 저주받은 고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알았다고.”
사람들이 잔뜩 널린 반설 대교라면 모를까, 이곳은 불규칙 게이트 안이었다.
이미 정이흔의 길드원을 건드려서 미운털이 박힌 상황.
괜스레 상황을 악화시켜 타다 만 반시체 꼴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시키는 일은 또 잘하잖아.”
“안 시키는 일도 잘해서 문제죠.”
“에헤이, 또 말 그렇게 한다.”
꼰대 같은 비서와 투닥거리면서도 금명결은 한차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막 정이흔을 붙들고 뭔가를 묻는 도중이었다.
“혹시 아까 전 ‘멈추지 않는 철갑황소’가 죽은 후에 드롭된 게 있었습니까?”
금명결은 정이흔과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구원이라더니 머리가 좋군.’
아니나 다를까, 정이흔은 곧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800마리를 더 죽이면 게이트 클리어인가 봅니다.”
그런 종류의 게이트였군. 금명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투에 나설 채비를 했다.
‘800마리야 껌이지.’
그럼 다 죽이고 나서 어떻게 할까….
‘역시 정이흔부터 치워야겠지?’
검은 머리칼 아래, 금안이 낮은 온도를 띠고 두 사람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엑실리스 길드장님.”
기다렸다는 듯 한차수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정이흔과는 이야기가 끝났는지, 손에는 포션 병을 들고 있었다.
“마스터라고 불러 주면 더 좋은데.”
금명결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엑실리스에서는 길드장이 아니라 길드 마스터라고 부르거든.”
놀리는 듯한 어조에도 한차수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럴 시간이 있느냐는 듯한 태도에 금명결은 호기심이 동했다.
‘정말 날 무서워하지 않네.’
납치 미수범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담대한 건 성격일까, 아니면 정이흔이 함께 있어서일까.
금명결은 궁금증을 삭이며 한차수에게 물었다.
“길드장이 입에 더 붙으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어. 그래, 그건 나 주려고 가져온 건가?”
“예. 서리거인 던전에서 다 쓰지 못한 체력 포션입니다. 미리 마셔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한차수가 어깨 너머를 턱짓했다. 정이흔이 방금 받은 포션을 마시고 있었다.
“S급 두 분에게 몬스터 800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래도 장기전이 되면 지치기 마련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금명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션을 받아 들었다.
“비서분도 드세요. 운전하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것 참…. 감사합니다.”
잠시 뒤, 네 사람은 방비를 끝내고 불의 장벽 너머를 응시했다.
붉게 어른거리는 벽 너머로 새까만 그림자들이 보였다. 어느새 모여든 몬스터들이었다. 비서가 깊이 한숨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빨리 돌아가도록 하죠.”
나지막한 음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불꽃이 내려앉았다.
후우욱-!
거센 바람과 함께 짐승을 닮은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귓전을 때렸다.
쿠우우우!
키에에엑!
“어이쿠, 우렁차기도 해라.”
웃음을 머금은 금명결이 손을 뻗었다.
살갗을 태워 버릴 듯 이글거리는 공기가 손등을 스쳤다.
스슥. 순식간에 뻗어 나간 검은 실이 단번에 몬스터 수십의 목을 꿰었다.
그들의 목이 초원 위를 구른 건 금명결이 무심한 얼굴로 손을 거둬들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무자비한 학살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를 남겨 둘 때까지 이어졌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정이흔이 마지막 남은 몬스터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불꽃을 터트렸다.
주변을 살핀 금명결은 더 이상 몬스터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정말로 깔끔하게 천 마리를 잡으니 더 이상 안 나오네. 이것 참,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쾅!
“……!”
섬광 같은 불꽃과 함께 금명결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상사를 향해 손을 뻗던 비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커헉…!”
뚜벅, 뚜벅.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비서를 지나치며 정이흔이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불꽃이 시퍼런 하늘을 꽃송이처럼 뒤덮었다.
“정이흔, 이, 미친놈이….”
금명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윽!”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무겁게 느껴졌다.
몸이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정신이 부유했다.
‘이건…!’
금명결은 그제야 헛웃음을 흘리며 한차수 쪽으로 날 선 시선을 던졌다.
“아까부터 왜 자꾸 남의 길드원한테 추파를 던지는 겁니까, 금명결 길드장.”
“윽!”
“징그럽게 굴지 마세요.”
콱, 금명결의 등에 한쪽 발을 올린 정이흔이 상냥한 얼굴로 한차수를 돌아봤다.
“자, 그럼 이제 파렴치한 납치 미수범의 변명을 들어 보도록 할까요.”
일련의 폭력적인 과정을 평온하게 지켜보던 한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이흔의 발밑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차수 씨,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당신을 지켜 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악! 척추 밟지 마!”
어디서 난 배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금명결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수면 패턴이 일반인과 정반대라더니, 정신머리도 반대로 놨습니까?”
정이흔이 혀를 차며 등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으아악, 하고 체통 없는 비명이 울려 퍼지기를 잠깐.
“알겠어, 알겠다고.”
긴 한숨과 함께 결국 금명결은 백기를 들었다.
***
“아야, 요령 없긴. 이렇게 묶으면 아프기만 하다고.”
“소름 끼치는 소리 좀 그만하시죠.”
금명결이 저항도 못 하고 정이흔에게 제압당한 건 그가 마신 포션 때문이었다.
물론 정이흔에게 건넨 포션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처음부터 금명결과 그 비서만 제압하기 위한 덫이었으니까.
“저쪽엔 마비약을 드릴 테니 타이밍을 봐서 제압하세요.”
위장 신분의 페널티를 받지 않고 금명결을 제압하는 데는 이게 최선이었다.
괜히 직접 몸을 움직이거나 뒷공작을 부릴 필요 없이, 포션 제작자의 특성을 이용할 것.
“마지막 몬스터를 쓰러트릴 때쯤 몸이 굳을 겁니다.”
한차수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말하자, 정이흔은 아주 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이 얼마나 착한 호구인가.
정이흔은 제게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꺼내야 하는 이야기인데 상황 때문에 잊고 있었다며 사과까지 했다.
‘너무 사람이 좋아서 걱정이군.’
한차수는 혀를 찼지만, 그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대신 당부를 전했다.
“한낮의 대로변에서 B급 헌터를 위협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눌러 주세요.”
정이흔은 믿음직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 한차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네.”
초원 위에 나동그라진 금명결이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는 헌터 제압용으로 만든 밧줄에 결박된 상태였다.
그 옆에선 비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도 금명결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러길래 제가 하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거기서 불규칙 게이트가 뜰 줄 누가 알았어.”
자유로운 게 입뿐이라 그런가, 금명결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금명결 길드장님.”
“응?”
“몸이 아니라 입까지 마비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한차수가 건조한 눈빛으로 시약병을 흔들었다.
작게 출렁이는 액체를 본 금명결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엑실리스 길드장님의 요청이라면 제대로 된 마비약은 언제든 만들어 드릴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무덤덤한 목소리에 금명결이 질린 낯빛을 했다.
천령 길드 사람들은 어찌 된 건지 잘난 생김새에 비해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금명결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됐네. 어차피 왜 습격했냐고 물으려던 거잖아. 에휴, 나가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데. 다들 마음만 급해선…. 악!”
정이흔에게 한 번 더 등을 밟힌 금명결이 본론을 토해 냈다.
“한차수 씨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때문에 그랬어!”
“예?”
“서리거인 주술사의 망령 말이야.”
금명결이 말을 이었다.
“히든 보스를 해치웠으면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아이템을 얻었을 텐데… 내가 그게 필요하거든.”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제게 쏠리는 시선들에 한차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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