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불규칙 게이트란 문자 그대로 생성 패턴을 파악할 수 없는 게이트였다.
갑자기 날아와 부딪히는 소행성이나 다름없는 재앙.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불규칙 게이트에는 S급이 둘이나 휘말렸다는 점이었다.
한 명은 제 곁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는 S급 저주술사 금명결.
다른 한 사람은.
“금명결 길드장.”
선 굵은 손이 뻥 뚫린 창틀을 가볍게 붙잡았다.
우득.
“내 길드원한테 볼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연락을 넣었어야죠.”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오른쪽 문짝마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화르륵!
이글거리는 화염구 수백 개가 새파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게 아니라.”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열기에 한차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나 진짜 조진 거 같죠?”
네 비서 두고 나한테 친한 척하지 마라.
기대 오는 금명결을 밀어내며 한차수가 고개를 돌렸다.
***
신경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지진과도 같은 땅 울림.
차체가 덜그럭거릴 정도로 강한 진동에 네 사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초원을 가로지르는 집채만 한 황소들.
그들이 땅을 박찰 때마다 꽉 찬 근육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고, 지나간 자리엔 흉측한 상흔만이 가득했다.
“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금명결이었다.
“저게 소야 공룡이야.”
한차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의한 순간이었다.
[ 철갑황소(군단)이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합니다. ]
[ 철갑황소(군단)이 적의 존재를 포착합니다. ]
[ ‘멈추지 않는 철갑황소’가 당신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성난 울부짖음이 대기를 흔들었다.
우우우우-!
선두에 선 황소가 뿔을 치켜들며 뒷발로 땅을 쿵쿵 내리찍었다.
족히 50마리는 넘는 황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쏠렸다.
잔뜩 달궈진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초원의 공기가 일렁였다.
번쩍.
한차수는 느꼈다.
선두에 선 황소의 붉은 눈은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한차수는 무의식중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덜컹. 그는 자연스레 일그러진 차체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 ‘멈추지 않는 철갑황소’가 동료들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
[ 철갑황소(군단)의 목표가 변경됩니다. ]
[ 철갑황소(군단)이 ‘질주’를 사용합니다! ]
정이흔의 손이 허공을 가로지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무심한 손짓 한번에 수백 개의 화염구가 유성우처럼 초원을 덮쳤다.
콰앙, 쾅, 콰앙!
지글지글, 살점이 익어 가는 소리와 함께 황소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바람에 실려 오는 탄내에 한차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금명결 길드장, 하던 이야기 마저 하죠.”
정이흔이 무심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건 한차수였다.
“한차수 씨?”
“아직 안 끝났습니다, 길드장님.”
한차수의 눈이 검게 그을린 초원 너머를 응시했다.
그를 따라 정이흔이 고개를 돌렸다.
산처럼 쌓인 철갑황소의 시쳇더미 사이.
붉은 눈의 황소가 상체만 남은 몸을 일으켜 입을 쩍 벌렸다.
쌔액!
허공을 가른 정이흔의 손가락을 따라 황소의 머리가 툭, 잘려 나갔다.
그러나 철갑황소 대장이 남긴 마지막 울부짖음은 핏물과 함께 허공을 적셨다.
삐이이!
귀를 파고드는 섬뜩한 경고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밀려들었다.
[ 경고! ]
[ 네임드, ‘멈추지 않는 철갑황소’의 마지막 절규가 들판을 울립니다! ]
[ 절규가 ‘끝나지 않는 들판’ 전역에 퍼집니다! ]
[ ‘끝나지 않는 들판’의 몬스터들이 당신들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
“와, 황소 주제에 어그로 끄는 솜씨가 수준급인데.”
감탄인지 조롱인지 모를 금명결의 말과 함께 초원 끄트머리가 어두워졌다.
수십, 수백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의 행렬.
어림잡아도 천 마리는 넘는 몬스터들의 떼가 초원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쿠웅, 쿵, 쿵…!
“옆에서 또 온다! 이번엔 오른… 아니, 위, 위야!”
“마스터, 현장 중계할 시간이 있으면 나 대신 운전이나 해요!”
“나 면허 없는 거 알면서…. 어어, 한차수 씨, 조심해.”
문짝 없는 차가 덜컹, 크게 튀어 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한차수는 안전벨트 대신 자신을 붙잡는 손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얼결에 같은 편이 된 납치 미수범 두 명은 말이 많다 못해 시끄러웠다.
‘차라리 내려서 싸우는 게 낫겠군.’
마음 같아서는 단검을 손에 쥐고 초원을 내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았다.
그것도 하나같이 원작에서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놈들.
한차수는 여기서 괜히 튀는 행동을 했다가 의심을 사느니 그냥 환자 행세를 하기로 했다.
“여차.”
구우우욱….
마침 소맷자락을 펄럭인 금명결에 의해 블랙웜 몇 마리의 몸이 두 동강나 버렸다.
그의 손에 걸린 묵빛 실타래가 검날처럼 빛났다.
금명결의 무기, 흑연사(黑聯絲)였다.
그러고 보니 저걸로 원작의 한차수를 동굴 천장에 매달아 놓고 고문했었지.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서 엉덩이를 떼어 앉았다.
그러자 귀신같이 금명결이 손을 뻗어 왔다.
“한차수 씨, 그러다가 튕겨 나가.”
망가진 안전벨트 대신 허리를 감싼 팔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에이. 차수 씨 아픈 거 여기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그래.”
금명결이 왼손으로 흑연사를 떨치며 한차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렇게 챙겨 줄 거면 애초에 차로 들이박지 말지 그랬니.
한차수가 유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금명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전해지고 나서 할게. 물론 사과도 하고.”
하여간 제멋대로인 작자였다.
한차수는 떨떠름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일단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상황이 안 좋아.’
돌발 게이트에 휘말린 지 두 시간 째.
어림잡아도 대략 200마리 넘는 몬스터들을 잡은 것 같은데, 뭔가 변화가 있기는커녕 몬스터들은 끝도 없이 리스폰되기만 했다.
‘뭔가 이상해.’
이쯤 되자 정이흔과 금명결도 이번 게이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했다.
휘오오오-
쾅!
“일단 근방에 있는 몬스터들은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반경 20M 일대를 완벽히 지져 버린 정이흔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키에엑-!
멀리서 몬스터들이 불에 타들어 가며 내지르는 단말마가 들렸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으니 상황을 정리해 보죠.”
정이흔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을 튕겼다.
곧 그들의 뒤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치솟아 올랐다.
“어우, 뜨거워.”
금명결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린 정이흔이 차를 세우게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이흔이 불의 장벽 너머를 바라보며 포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죽인 몬스터만 해도 웬만한 게이트 다섯을 합친 걸 넘어요. 평균을 따지자면 공략이 끝나고도 남았을 시점입니다.”
“나도 동의해.”
금명결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외쳤다.
“이대로 초원만 빙글빙글 돌다가는 결국 잡아먹힐 거라고.”
게이트를 나갈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이대로 싸움을 지속하는 건 자멸과 다름없었다.
끊임없이 리스폰되는 적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으니까.
무의미한 소모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한차수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무언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불규칙 게이트가 이렇게까지 불친절했었나?’
본디 불규칙 게이트란 다른 차원의 파편이 이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해 동기화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안전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시스템이었다.
한데 이번 불규칙 게이트를 공략하는 내내, 시스템은 이렇다 할 메시지를 던져 주지 않았다.
그저 몬스터들이 끝없이 리스폰될 뿐….
“아.”
한차수가 정이흔을 향해 몸을 틀며 손을 뻗었다.
“길드장님.”
더운지 단추를 풀던 정이흔은 놀라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어지러우십니까?”
“아뇨, 아닙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정이흔의 팔뚝을 붙잡은 그가 물었다.
“혹시 아까 전 ‘멈추지 않는 철갑황소’가 죽은 후에 드롭된 게 있었습니까?”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음, 잠시만요.”
한차수의 질문에 뭔가를 깨달은 정이흔이 바로 손을 휘저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에 한차수는 그를 더 채근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
이윽고 정이흔이 탄성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코앞에 길을 놔두고 헤매고 있었군요.”
“…….”
“역시 당신이 있어서 살았어요.”
진심 어린 감사 인사와 함께 정이흔이 한차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육각형의 무채색 보석 안쪽엔 희한하게도 작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 끝나지 않은 절규(미완성) ]
-미련을 놓지 못한 영혼을 모아 그들의 절규를 끝내십시오.
-영혼 수집 현황 ( 214 / 1000 )
-완성 보상 : ??? , 귀환석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