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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6화 (16/113)

16화

금명결이 한차수의 차를 박아댄 이유를 찾으려면 대략 3주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엑실리스의 길드장 금명결은 여느 때처럼 자유분방하게 출근했다.

저녁 8시에 출근했다는 소리였다.

‘커피나 사 올 걸 그랬나.’

주변 사람들이 들었으면 또 뭐라 잔소리했겠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자면서도 수련을 하니 일찍 일어나는 게 오히려 손해야.’

사람은 각자에게 맞는 삶의 방법이 있다.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일상 패턴에 맞춰 생활해야 하냐?

그는 그만의 신조를 피력했다.

물론 그때마다 잔소리만 미친 듯이 들었지만.

오늘도 금명결은 느지막이 일어나 남들이 저녁이라 부르는 아침을 먹고 길드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길드장실로 가는 길. 여기저기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 사이 평소와 다른 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비서였다.

“기, 길드장님…! 허억, 헉.”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굼벵이. 어쩐 일로 날 마중하러 나왔지?”

금명결이 일견 쾌활한 보이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하지만 목소리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졸음 섞인 짜증은 어찌할 수 없었다.

원래 8시에 일어나려는 걸 앞당겨 6시에 일어났으니 당연했다.

“날 일찍 깨운 게 미안해서 그러나?”

흔한 투정을 못 들은 체하며 비서는 체면 불고하고 달려온 목적을 꺼냈다.

“서리거인 던전 일입니다.”

낮게 속삭이는 말에 나른하게 풀려 있던 금명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 제가 보시기 편하게끔 정리해 왔습니다.”

그는 비서가 건네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

그곳엔 여러 뉴스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헤드라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 폭주! 서리거인 던전, 00동 주민들 두려움에 떨어 ]

[ 침묵하는 천령 길드…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 탓? ]

[ “그 사람은 영웅이었다” 익명의 제보자, 서리거인 던전의 진실을 밝히다! ]

금명결이 주목한 건 마지막 뉴스 기사였다.

올라온 지 채 10분도 안 되어 삭제당한 유명 온라인 신문사의 기사.

[…제보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서리거인 던전에서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몬스터였습니다. 정신체 아니면 유령 계열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제 생각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나타나는 히든 보스였었던 것 같아요.”

통화기 너머로 그의 짙은 한숨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이렇게 통화도 못 하고 있었겠죠.”

제보자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부디 그 사람의 업적이 지워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본 기자 또한 그의 심정에 동의하는 바이다.]

“어떻게 할까요, 길드장님.”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태블릿을 끈 금명결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서, 얘 이름이 뭐라고?”

잔뜩 휘어진 금빛 눈동자에선 졸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금명결의 생각과 달리 한차수는 제법 만나기 힘든 상대였다.

일단 일어나지를 않았다.

“…아직도 안 깨어났어?”

“예. 아직 혼수상태라고 합니다.”

“S급 힐러의 치료를 받고도 그 상태라니. 얼마나 약해 빠졌기래 그런데?”

백담의 치료를 받고도 그 모양이라니.

금명결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비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은 두고 봐. 깨어나야 뭐라고 말이라도 붙이지.”

하지만 깨어난 뒤로도 그는 한차수를 만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안 된답니다.”

면회 신청을 넣는 족족 정이흔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에는 대체 왜?”

“심리 상태가 많이 불안정하답니다.”

“나랑 말 몇 마디 한다고 걔가 쇼크 먹어서 죽지는 않을 거 아냐!”

비서는 대답 없이 시선을 회피했다.

“빌어먹을….”

하지만 금명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병원 내부 인사를 매수해 드디어 한차수와의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그때, 정이흔이 고독을 발견해 버렸다.

금명결이 매수한 내부 인사는 그대로 정리 해고당했다.

“어억.”

“여기서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카펫 청소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안 쓰러져!”

뒷목을 붙잡은 채 신음하는 그의 눈이 투지로 불타올랐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그렇게 금명결은 병원 내부 대신 병원 외부에 정보원을 촘촘하게 깔아 두었다.

혹시라도 무슨 이변이 생기면 즉각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오늘.

마침내 금명결은 고대해 마지않던 한차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보닛에서 뛰어내린 금명결이 거침없이 뒷자리를 향해 갔다.

그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정이흔이 싸고돈 B급의 얼굴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게 되다니.

흥분한 사내의 억센 손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빠각.

“…….”

“…….”

“음.”

마디가 굵은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차 문은 꼭 장난감 같았다.

금명결은 가만히 제가 쥐어뜯은 차 문을 바라보다 한차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늑대의 털 같은 회색 눈.

주저 없이 시선을 마주쳐 오는 상대의 눈빛은 생긴 것처럼 곧았다.

예상대로 평범한 생산 계열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역시 뭔가가 있는 놈이네.’

금명결은 상대를 향해 싱긋 웃어 주고는 손을 뒤로 날렸다.

풍덩!

멀리서 물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이민덕이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 뽑은 듯 빵빵한 쿠션에 몸을 묻은 금명결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혹시 운전할 줄 알아요?”

***

원작 한차수에게 면허가 있던가?

모르겠다.

‘아니, 그걸 떠나서….’

이놈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지랄일까.

한차수는 싱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금명결을 지그시 마주 봤다.

일단 정이흔을 협박하기 위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는 가설은 폐기했다.

엑실리스의 길드장 금명결은 그런 하찮은 짓에 목매는 놈팽이가 아니었다.

차라리 대놓고 정이흔의 목을 따러 가면 모를까.

“운전할 줄 몰라요? 그럼 그냥 우리 직원이나 불러야겠네.”

한차수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금명결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는 휑하니 뚫린 옆면에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다.

“이원아, 와서 운전 좀 해라!”

사내가 외치자, 곁에 정차해 있던 스포츠카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경을 쓴 사내가 묵묵히 다가와 운전석에 올라탔다.

“실례하겠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귀에 닿은 순간.

한차수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비서, 이원이 가져온 메시지는 금명결을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음? 갑자기 뭐지?”

“정이흔 천령 길드장으로부터 도착한 소식입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금명결에게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역신의 귀걸이가 깨진 게 그 새끼 짓이라고.”

한차수, 천령 길드를 갖고 논 그 미천한 종자가 제 목숨에도 손을 댔던 것이다.

“죽어서도 지옥을 보게 해 주지.”

S급 저주술사 금명결의 눈에 잔혹한 빛이 어렸다.]

엑실리스 길드의 S급 헌터, 금명결.

그는 한차수가 훼손한 장비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정이흔, 백담과 마찬가지로 한차수의 고문에 일조한 인물이기도 하고.

‘환장하겠군.’

이 세상은 한차수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는 걸까?

자신은 그저 아무 탈 없이 퇴사하고 평화롭게 사라지고 싶었을 뿐인데…

“이거 시동이 꺼졌는데요.”

“그럼 켜지게 해.”

심드렁한 태도의 금명결을 보며, 한차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건, 아직 장비 훼손에 대해 들키지 않았을 거란 점이었다.

‘들켰으면 내 곁에 앉는 게 아니라 내 팔부터 찢어 놨겠지.’

너덜너덜해진 차 옆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흐릿했다.

분명 다른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일 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 정말, 빠르기도 하지.”

금명결은 고개를 튼 채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차수는 그를 따라 눈을 돌렸다 눈썹을 찌푸렸다.

저 멀리 불길 같은 흔적을 남기며 이쪽을 향해 빠르고 달려오고 있는 건,

“정이흔….”

“이원아, 빨리 출발해라!”

금명결이 앞 좌석을 가볍게 걷어찼다. 비서는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차를 조작했다.

이쯤되자 한차수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심각한 이유로 자신을 쫓은 건 아닌 듯싶었다.

“이제 와 물어보는 겁니다만.”

“응? 목 아파서 말 못 하는 게 아니었네?”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군.

어쩐지 아무 말 않는 자신을 보고도 별말 않는다 했다.

한차수가 가볍게 눈매를 찡그리며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때였다.

치칙, 칙.

거친 노이즈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비현실적인 색채가 현실을 덮치고, 평범한 일상의 윤곽이 어그러진다.

폐허에서 가져온 정보 저장 장치에 들어 있던 구시대의 영화처럼, 지저분한 풍경.

감상에 젖어 있던 한차수는 퍼뜩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끼이이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붉은 메시지 창이 떴다.

[ ■■ ■■■의 파편이 본성과의 동기화를 완료했습니다. ]

[ 위치 지정 완료 ]

[ 구역 설정 진행 중… ]

[ 구역 설정 완료 ]

[ 지정 구역 격리 실행 ]

[ 불규칙 게이트 생성에 돌입합니다. ]

[ 주의! 게이트 생성 중의 돌발 행동은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조심하세요. ]

비처럼 쏟아지는 메시지의 행렬에 한차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어느새 세상의 축이 뒤바뀌어 있었다.

“하….”

너른 평원, 문짝이 뜯어진 차 안에 앉은 두 남자.

한차수의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금명결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졌네.”

사내의 욕설이 초원을 휩쓰는 바람과 함께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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