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다행히도 정이흔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지 않았다.
죽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아, 젠장.”
환각의 영향으로 아직도 시야 언저리에 검은 너울이 아른댔다.
수많은 대원들을 잡아먹었던.
“한차수 씨.”
불씨 같은 목소리가 한차수의 정신을 건져 올렸다.
“길드장님.”
덜거덕 고개를 든 한차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바다에 가라앉은 잿더미처럼 잔잔한 회색 눈동자가 정이흔을 응시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장신의 사내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을 유지하던 사내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할 생각은 없나요?”
아.
그제야 한차수는 정이흔이 그 난장판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낭패였다.
‘일찌감치 생각해 뒀어야 하는데.’
환각의 여파가 너무 강했다. 둔해진 제 머리를 깨달은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각성자용 수갑을 채우는 대신, 죽을 갖다 준 걸 보니 다행히 일기장을 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큼큼.
물로 목을 축인 한차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짐 정리를 하다가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보통 짐 정리를 하다 사람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진 않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것이지.
정이흔이 호구기는 해도 눈치가 없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대충 말하기 싫다고 에둘러 말하는 걸 왜 따박따박 반박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쉰 한차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집에서 연구하던 시약들 중 오래되어 성질이 변한 게 있었나 봅니다.”
한차수의 집에는 진짜로 연구실이 있었다.
비록 포션이 아니라 독약을 제조하던 연구실이었지만.
“시약들을 분류하고 버리는 작업을 하다 연기를 잘못 흡입했습니다. 그 때문에 기도가 상해 피를 좀 흘린 거고요.”
“…….”
“그 외에는 잘못된 곳이 없습니다. 길드장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너 어차피 의사 불러서 나 진찰했잖아.
‘아니면 이렇게 평화롭게 죽이나 갖다 줬을 리가 없지.’
한차수가 물끄러미 정이흔을 응시하자, 그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정곡을 찔렸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정말 다시 입원할 생각은 없습니까?”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한차수의 표정을 보며 정이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물어봤자겠죠. 알고 있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정이흔은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실제로 그는 조금 의기소침해 있었다.
퇴원에 대한 한차수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백담까지 동원할 줄이야.’
한차수에게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동생을 살리느라 몸이 바스러진 사람이다.
정이흔은 그를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가 다른 방법을 고민할 때.
“상황 판단 능력이 정확하고 빠르시군요. 역시 길드장님이십니다.”
한차수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정이흔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길드장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을 텐데. 뛰어난 능력을 제게 낭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
‘나 좀 내버려 둬라, 제발.’
그는 정말 이놈의 호구 주인공이 지긋지긋했다.
책임감도 책임감 나름이지.
동생 살리는 대신 몸이 좀 안 좋아졌다고 인생을 책임지려는 놈이 어디 있느냔 말인가.
“얼마 전에 제주도에서 나타난 1급 게이트의 뒤를 이어 던전 브레이크가 산발적으로 나타난 걸로 압니다만.”
마침 오늘도 도심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걸로 알고 있었다.
한차수가 그 일을 언급하자, 정이흔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길드장님?”
그 미묘한 변화에 한차수가 위기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고개를 내저은 정이흔이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외투 하나를 들고 왔다.
“기사를 시켜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채비하세요.”
한차수는 그 자리에서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정이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챙겨 가세요.”
현관에서 그가 내민 건 낯익은 계약서였다.
종신 계약서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는 지옥행 티켓.
“…….”
설마 지금 이걸 선물이랍시고 주는 건가.
한차수는 진심으로 딱 한 번만 정이흔의 명치를 갈기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지만.
“길드장님, 정말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한차수 씨가 부담스러워하던 조항을 바꿨으니 한 번 봐 줬으면 합니다.”
한차수의 말을 끊으며, 정이흔이 부드럽게 강권했다.
“연봉도, 집도, 차도 포기할 테니 다시 한번 훑어보세요.”
말만 들어서는 자신이 정말 대단한 희생이라도 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한차수로서는 기가 찰 뿐이었다.
누군가는 못 받아서 펄쩍 뛸 종신 계약서겠지만, 제게는 지옥행 티켓일 뿐이니까.
“살펴는 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한발 물러섰으니 자신도 이쯤은 양보하는 게 맞았다.
계약서를 받아든 한차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몸 조심히 잘 가요, 한차수 씨.”
달칵.
문이 닫혔다.
***
-늑대가 차량에 탑승했습니다.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노이즈와 함께 들려온 음성에 정이흔은 고개를 까딱였다.
“놓치더라도 상관없으니 다치지 않게 유의하도록.”
-예. VIP의 경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정이흔은 인 이어를 빼고 몸을 돌려 창문을 열었다.
까마득히 높은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미니어처 같았다.
손을 휘저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작고 무의미한 세상.
“아.”
그때, 속도를 붙여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차수가 타고 있는 차였다.
그 뒤를 따르는 경호 차량을 확인한 정이흔은 그대로 몸을 물리려 했다.
콰앙! 콰앙, 쾅-!
세 대의 경호 차량을 정확하게 때려 박은 붉은 스포츠카.
그 빌어먹을 새빨간 차가 한차수가 탄 차를 향해 질주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
“안전벨트 꽉 붙잡으세요!”
운전기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외쳤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한차수는 말없이 벨트를 꽉 붙잡았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
이젠 놀라기도 지쳤다.
어째서 한 고비를 넘겼다 싶으면 다른 고비가 찾아오는 걸까.
‘악역에 빙의한 죄인가.’
그렇다기엔 바란 적도 없는 빙의거늘.
한차수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생각할 무렵, 강한 충격이 한 번 더 차를 흔들었다.
쾅!
“큭!”
새빨간 스포츠카는 도로 위의 무법자였다.
한차수는 어느새 넓은 대로에 보이는 차라곤 자신과 미친놈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운전기사도 같은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도 엄폐물로 쓸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제작된 차량…. 젠장, 저 미친놈이!”
콰앙!
“으악!”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한차수는 넋 나간 인형처럼 벨트에 매달려 휘청였다.
마침 창밖으로 대교 아래 푸르고 넓은 강이 보였다.
‘…뛰어내릴까.’
한차수의 눈이 간격을 쟀다.
보통 저렇게 대놓고 따라온다는 건 살해 의도가 없다는 뜻이었다.
기껏해야 납치, 감금. 그에 뒤따른 협박으로 뭔가를 얻어 내고자 하는 거겠지.
자신이 협박의 도구가 될 경우, 대상은 뻔했다.
‘두고두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주인공이야.’
정이흔. 아마 그 때문에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한숨을 쉰 한차수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떨어진다면 분명 타박상 정도로 끝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한차수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다치는 건 상관없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재생 스킬이 회복시켜 줄 테다.
생각보다 더 심하게 박살이 나 피치 못하게 재입원하더라도 괜찮았다.
‘길드장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제발 관심 꺼 달라 하면 되는 일이지.’
책임감 대신 죄책감을 건드린다.
어느 모로 보나 괜찮은 결말이었다.
대충 생각 정리를 끝낸 한차수가 기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
“제가 주의를 돌릴 테니 기사분께서는 여길 빠져나간 뒤 길드장님을 불러 주십시오.”
“무슨…. 절대로 안 됩니다!”
상대 차량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던 기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에겐 폭주하는 스포츠카보다 한차수의 덤덤한 말이 더욱 무서웠다.
“시내에 접어들면 저 녀석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쿠우웅!
하지만 거센 압력이 천장을 짓누르고.
“금명결, 이 개자식아!”
기사의 외침은 비명이 되어 터져 나갔다.
와장창!
기다렸다는 듯 차량 앞유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끼기긱-!
짙은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차는 결국 멈춰 서고 말았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지붕이 출렁이고, 누군가 보닛으로 뛰어내렸다.
역광에 가려진 사내는 훤칠하다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부족한 장신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기사가 비명을 지르자 사내는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오랜만이네, 민덕아. 익숙하지도 않은 운전하느라 힘들었지?”
“미친, 또라이 새끼야! 너 제정신이야? 이러고도,”
“잘 가고, 다음에 보자.”
작별 인사와 함께 사내는 기사를 가볍게 강으로 내던졌다.
“금명결, 이 개새끼야-!”
기사의 욕설 섞인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차수는 창백한 얼굴로 사내를 응시했다.
금명결?
‘저주술사 금명결이라고?’
도대체 저 녀석이 왜 나를 쫓아온 거지?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매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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