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정말로 내가 부축해 주지 않아도 되겠어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집까지 같이 가 주겠다는 백담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한차수는 무사히 귀가에 성공했다.
“후.”
겨우 두 번째 보는 집이지만 그래도 내 집이라고 마음은 편했다.
한참이나 바닥에 늘어져 있던 한차수는 몸을 추슬렀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침실이 아니라 서재였다.
“일기장, 일기장….”
천령 길드에 들어간 이후의 일기는 저번에 훑었으니 제외하기로 했다.
꼼꼼히 읽지는 못했으나 어차피 일기의 98%가 정이흔의 욕이었으므로 다시 볼 필요가 없었다.
한차수는 꼼꼼하게 서가의 아래부터 위까지 훑었다.
“이상한데.”
책으로 꽉꽉 차 있는 서재를 뒤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서재의 삼 면을 가득 채운 서가 어디에서도 일기장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빙의한 날 바로 일기장을 찾은 게 무색하리만치 허무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턱 하고 책상에 걸터앉은 한차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3년간의 일기는 강박적이었어.’
천령 길드 입사 후에 쓴 일기들.
지분의 98%가 정이흔에 대한 욕설이었으나 한차수는 거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정이흔의 존재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한차수’는 일기 쓰는 걸 관두지 않았다.
매일매일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써 내려간 일기들.
그건 습관보다는 강박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강박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몸에 새겨진다.
한차수는 어딘가에 과거를 기록해 놓은 일기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들어가지 않았던 방이 하나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서재를 나와 복도를 걸었다.
제법 긴 복도는 벽에 걸린 그림 하나 없이 황량했다.
한차수는 침실에서 가장 먼 방 앞에 멈춰 섰다.
‘창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협소한 방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발 하나 내딛기도 힘들어 보여, 빙의 첫날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문당하다 살해되는 악역에 빙의했다는 정신적 충격이 컸으니까.
‘만약 치워 놓았다면 여기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한차수는 천천히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콜록!”
먼지 가득한 공기가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어찌나 청소를 안 하고 살았는지 불을 켜자 뽀얀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였다.
“쯧.”
그는 손을 휘둘러 먼지를 치우고서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복도까지 먼지 소굴로 만드느니, 그냥 방 안에서 끝장을 보는 게 낫다고 여겨서였다.
“어디 보자….”
한차수는 하나하나 쌓여 있는 상자들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되도 않는 크리스마스 흉내라도 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드드득.
이상한 글씨가 새겨진 붉은 줄로 묶인 상자를 열었을 때였다.
키히힉, 키힉!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찌르고, 연이어 펑! 하고 전구가 터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공백을 채웠다.
제 키보다 높은 상자들에 둘러싸여, 한차수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타다닷!
“…….”
머리 위에서 어린애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끼야아아아아아-!
입술이 귀까지 찢어진 악귀가 팔을 휘두르며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
정이흔이 백선을 발견한 건 막 차에서 내린 무렵이었다.
“저 녀석이 여긴 왜….”
한차수의 앞에서와 달리 백선을 부르는 그의 호칭은 친근했다.
동생인 정서흔의 오랜 친구인 탓에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기 때문이었다.
한차수의 아파트 앞에 서 있는 백선은 몹시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따금 아파트 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돌아서서 입술을 짓씹고는 위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
정이흔을 그 꼴을 가만히 응시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차수가 퇴원한 걸 알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백담이 또 성질을 건드렸나 보군.’
백선에 대한 백담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만큼 동생을 아끼는 형이 또 있을까. 문제는 그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었다.
S급이 되지 못해 좌절하는 동생에게 그가 뭐라고 했던가.
‘어차피 S급이 되어 봤자 피곤하고 귀찮은 일만 많아지니 B급이 딱 좋다고 했었다지.’
그렇지 않아도 상심한 아이한테 위로 대신 그런 말을 하다니. 누가 봐도 성질을 돋우려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 놓고 동생이 집에 안 들어온다며 징징대는 꼴이라니.
정이흔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선아.”
“어, 형?”
정신이 팔려 있던 백선은 뒤늦게 그를 알아차렸다.
“형이 여기 웬일이야.”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너 울릉도에 있었잖아.”
울릉도의 녹색 등급 던전에서 회복에 좋은 아이템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날아간 게 바로 어제였다.
헛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차분히 생각해 보라며 타일렀으나 두 녀석은 들어먹질 않았다.
“갈 거야.”
“나도 갈 거야!”
초등학생도 안 이러겠다. 타박에도 불구하고 둘은 바로 떠나 버렸다.
정신 연령처럼 몸도 초등학생이었으면 그리 쉽게 떠나지는 못했을 텐데.
정이흔은 아쉬움에 새삼 혀를 찼으나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까웠다.
그들이 한차수에게 진 마음의 빚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백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서흔이는 어디 두고 왔어.”
“걔는 아직 울릉도에 있어. 같이 온다고 했는데…. 그냥 내가 거기 있으라고 했어. 순서 밀리면 또 한참 기다려야 되니까.”
어딜 가나 녹색 던전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안전성이 입증된 데다 꾸준히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팀을 짜기도 수월한 탓이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정이흔이 툭 하고 물었다.
“그래서 몇 층 사는지는 알아?”
“…어?”
“백담한테 한차수 씨 퇴원했다는 말 듣고 온 거지?”
백선의 귓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크흠, 큼!”
정이흔이 피식 웃었다. 그가 백선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어?’
백선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비린내는 아파트 입구에서 풍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들어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곳에서.
피비린내의 정체를 깨달았을 땐 이미 정이흔이 저 앞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다급한 뒷모습과 함께 저 멀리, 그림자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인영이 보였다.
일반인에 비해 조금 큰 키, 그러나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살짝 마른 체격.
창백한 안색에 흐린 회색 눈동자가 언제나 무심한….
“한차수 씨!”
“아….”
“괜찮습니까? 한차수 씨, 정신 차리세요!”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던 한차수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
욱신거리는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차라리 깔끔하게 팔다리가 잘리는 게 나을 정도로 지저분한 통증.
“으….”
땀범벅이 되어 신음을 흘리던 한차수는 어느 순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떴다.
활짝 떠진 눈에 익숙지 않은 정경이 들어왔다.
차라리 익숙한 풍경이었으면 덜 착잡했을 텐데.
누가 봐도 병실이 아닌, 단정하고 온화한 침실의 모습에 한차수는 탄식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군.’
제 안에 피어오른 의심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한차수는 아무리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제게 달려오던 사내의 얼굴을 봐 버렸으니까.
“일어났군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이흔이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아, 움직이지 말아요. 백선 씨가 치료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백선? 백선이 함께 있었나?
한차수가 그를 찾자, 정이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만 하고 떠났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는….”
“우리 집이에요.”
역시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한차수는 가만히 그가 주는 죽을 받아 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환청인가.’
방금 전까지 죽어라 싸워 댔던 영체계 몬스터의 영향이 남은 것 같았다.
끔찍했던 꼴이 떠올라,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신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영체계 몬스터는 말 그대로 처참한 꼴이었다.
뒤틀린 사지와 지저분하게 엉킨 머리, 게다가 입술은 귀까지 찢어진 채 천장에 달라붙어 손을 휘둘러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가요. 제발. 같이 가, 대장. 날 버리지 말아요!”
그것은 불쾌하게도 죽은 이를 흉내 내며 자신을 조롱했다.
어떻게 겨우 스킬을 써서 쫓아내기는 했다만, 마지막에 녀석의 환각에 걸려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
귓가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잔음. 그건 어쩌면….
“한차수 씨.”
정이흔이 귀를 문지르는 그의 손을 붙잡아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피를 많이 토했습니다. 속이 허할 테니 남김없이 먹어요.”
“입맛이 없습니다.”
“환자가 입맛으로 밥을 먹나요?”
한차수는 그릇을 조용히 밀어내려다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어느새 정이흔의 손에 종신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먹어요.”
“…….”
“퇴원한 날 다시 입원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이게 죽이 아니라 정이흔의 면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푹.
한차수가 인상을 쓰며 죽 그릇에 숟가락이 인정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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