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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3화 (13/113)

13화

거지 같은 아침이었다.

필로소의 부길드장, S급 힐러 백담의 기분은 오늘따라 저조했다.

딱히 동생이 집에 온다고 해 놓고 다른 놈한테 정신이 팔려 던전 순회에 나섰다거나, 매일같이 그 원흉을 치료해야 된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고, 오늘따라 일정이 많았고.

그래서 B급의 치료를 못 갈 수도 있다는 제 말에 동생이 벌컥 화를 내서였다.

그러니 문을 열자마자 본 피투성이 남자의 모습은 그의 기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제가 직접 무릎을 꿇고 핏물을 닦아 주는데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저 멍청한 남자는 제게 아무 의미도 아니란 뜻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느낀 것일까, B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바빠서 못 오신다고….”

“입 다물어요. 피 냄새 나니까.”

“…….”

입 다물고 있는 꼴이 아까보다는 나았다.

한편, 한차수는 백담의 행태에 당황한 상태였다.

‘왜 성질인지 모르겠군.’

바닥을 닦는 게 싫어서 그런가? 하지만 제가 가져온 걸레를 빼앗은 건 저쪽 아닌가.

하긴 쉘터에 있을 때도 저런 녀석들이 가끔 있었지. 한차수는 새삼스럽게 추억에 젖었다.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면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다 부리면서 한바탕 폭언을 쏟아 놓지를 않나.

그래 놓고서는 나중에 슬쩍 다가와 드링크를 건네주고는 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결벽증 같은 게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 설마.’

한차수는 백담도 그런 타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주 미약한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힐러라면 누구보다 피를 많이 볼 텐데 저렇게 결벽증이 심해서 어쩌나 싶어서.

하지만 다른 사람을 걱정해 주기엔 제 사정이 더 급했다.

“오면서 얘기 들었어요.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다면서요.”

더러워진 걸레를 쓰레기통에 던진 백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차수의 앞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손에 턱을 괴었다.

옅은 갈색 눈이 가늘게 뜬 눈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해부하는 듯한 시선에 한차수는 미간을 모았다.

“병원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퇴원?”

“평생 살 곳도 아닌데 잘 적응했다고 해서 무슨 의미입니까.”

“흠,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백담의 눈이 탁자 위에 놓인 종신 계약서를 훑었다.

“그런데 걔가 쉽게 놔줄 것 같지는 않은데.”

시선의 방향을 알아차린 한차수가 얼굴을 굳혔다.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흐음….”

“그리고 계약에 관해서는 외부인인 백담 씨에게 말을 들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한차수는 부드럽지만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단호한 태도였다.

“그래요. 내가 괜한 걸 말했네.”

백담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어여쁜 미소 뒤, 울컥 치솟는 감정은 지저분했다.

‘…짜증 나.’

비틀린 속에서 자그마한 심술이 튀어나왔다.

한차수의 헐거운 옷자락을 눈에 담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퇴원시켜 줄까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래진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백담은 웃었다.

“매번 소용도 없는 치료나 하러 여기까지 헛걸음하는 것도 귀찮고.”

어디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어 버리면 선이도 미련을 버리겠지.

백담이 해사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때요, 퇴원시켜 줘요?”

***

물론 한차수는 그 웃음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 녀석, 혹시 나한테 원수진 거라도 있나.’

갑자기 퇴원시켜 준다니.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싶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자신을 치료하러 오는 내내, 백담은 아니꼬운 심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동생이 아니었다면 통성명도 못 했을 사이.’

S급 힐러 백담에게 있어 B급 포션 제작자인 자신은 겨우 그 정도 위치였다.

그래서 치료받는 내내 그는 틱틱 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한차수는 그의 오만함이 오히려 기꺼웠다.

적어도 정이흔처럼 제게 쓸데없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호의를 베푼다라….

제 딴에는 오가는 게 귀찮아서라지만 그를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한차수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피 토하더니 귀까지 멀었나.”

조용한 뇌까림과 함께 서늘한 손이 다가왔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꺾으려다 멈췄다.

햇살처럼 다정한 빛깔과는 다르게 체온보다 낮은 온도.

치유 스킬을 발동시킨 백담이 한차수의 귀를 어루만지며 나무껍질 같은 눈을 굴렸다.

마치 한차수의 안을 보려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에 살짝 오한이 들 때 쯤, 백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손을 바라보던 한차수가 툭 하고 물었다.

“왜 갑자기 절 퇴원시켜 주신다는 겁니까?”

백담이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원하는 게 갑자기 손에 들어왔다고 마냥 기뻐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습니다.”

“…….”

“애초에 퇴원만을 바랐다면 진작에 종신 계약서에 사인했겠죠.”

한차수의 말에 백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대로 답해 주신다면, 저도 백담 씨의 도움을 기쁘게 받겠습니다.”

백담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수많은 선택지 중 정답을 골라내는 사람처럼.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요. 당신을 살린 건 이 병원 의료진이 아니라, 나라고.”

“그게 무슨 상관….”

“따지고 보면 걔네들은 당신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어.”

오만한 웃음이 부드러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살린 거, 내가 밖에 내보내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백담이 허리를 곧게 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아마색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그를 바라보는 한차수의 회색 눈동자가 잔잔히 가라앉았다.

***

정이흔이 한차수의 퇴원 소식을 접한 건 점심이 조금 지나서였다.

서울 도심에 나타난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고 난 뒤.

오랜만에 서흔이와 짧게 연락을 주고받는데,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서실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한차수 헌터 퇴원, 필로소 부길드장의 인도하에 이동 중입니다.]

“이흔아, 저쪽에서 너 좀 보자는데… 야, 얼굴이 왜 그러냐.”

“…….”

“이흔아, 정이흔!”

이진렬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불러 세웠으나 소용없었다.

몬스터를 때려잡을 때도 고요하기만 했던 붉은 눈동자에 광염이 일었다.

***

얼마만의 바깥 공기던가.

한차수는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자유를 폐부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언제 올 거예요? 지금?”

“…….”

“설마 이렇게 날 이용하고 버리는 건 아니겠죠?”

한 가지 흠이 있다면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따라오는 백담이라고 해야 할까.

한차수는 한숨을 쉬었다.

‘괜히 거래를 하자고 했나.’

방금 전, 그는 백담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나왔다.

그의 막무가내식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조건을 걸어서.

“내가 살린 거, 내가 밖에 내보내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런 대사를 내뱉어 봤자,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베푸는 호의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퇴원은 꼭 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만 했다.

그래서 한차수는 백담의 도움을 받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일방적 호의는 매우 부담스럽군요. 거래를 하죠, 우리.”

“거래?”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저도 백담 씨에게 뭔가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럼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당황하는 제게 백담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담 씨 집에요?”

한차수는 떨떠름한 기색을 참지 않았다.

“집 나가 떠돌아다니는 탕아를 돌아오게 하기엔 한차수 씨만 한 먹이가 없거든요.”

“탕아라니. 백선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사실 한차수 씨를 치료해 주는 대신 집에 돌아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약속을 어기고 던전 순회에 나서더라고요.”

회복에 좋은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나. 백담이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구나.’

한차수는 모르는 척 시선을 흘렸다.

“올 거죠?”

백담이 생긋 웃으며 아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뭐, 싫으면 말고.”

한차수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람 뒷목 잡게 하는 뻔뻔한 화법과 국내 유일 S급 힐러라는 권력.

그 둘의 조합은 정이흔 때문에 붙잡힌 자신을 충분히 자유롭게 해 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한차수는 백선을 꼬드기기 위한 미끼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럼 부탁드리죠.”

그리고 그의 선택은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거래가 끝난 뒤 백담이 이렇게 졸졸 따라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한 게 문제였지.

“…집에 안 가십니까?”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왜요.”

입술을 삐죽이며 졸졸 따라오는 반짝이 머리의 남자라니.

제법 부담스러웠으나, 굳이 공들여 떼 놓을 정도는 아니라 한차수는 무시했다.

더군다나 그는 제법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탈 거죠?”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리무진을 향해 백담이 눈짓했다.

한차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갑이 없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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