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기사는 구구절절 시끄러웠으나 의도는 단순했다.
‘야, 그 생산계 B급 헌터 얼굴이나 좀 보자!’
입원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왜 인터뷰 하나 안 받아 주냐고. 감싸는 것도 작작 하라는 신문사의 속내가 훤히 드러났다.
심지어 공략 대원 중 몇 명을 비밀리에 취재했다며 후속 기사까지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A씨와 함께 있었던 공략 대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 덕분에 힐러 B씨도 목숨을 건졌어요. 그런데 길드에서는 여태 입막음만 하고….”]
다음 단락에서 기자는 신이 나서 힐러 B씨에 대해 캐물었다.
[“힐러 B씨는 그럼 던전에서 아무것도 못 했다는 거네요?”
기자의 질문에 공략 대원은 답하지 못했습니다….]
한차수는 슬쩍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백담이 싱긋 웃었다.
한차수는 확신했다. 여기서 언급된 힐러 B씨는 백선이라는 걸.
그리고 백담은 제 동생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빡돌았다는 걸 말이다.
“아, 기사는 올라오자마자 내렸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올린 새끼도 다시는 올릴 생각 못 할 거예요.”
두 손 다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활짝 웃으며 읊조리는 게 공포스러웠다.
“…기자를 반 죽여 놓는 건 길드장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그냥 그렇다고요.”
한차수는 슬쩍 시선을 빗기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새삼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어부지리지만 백선이 살아서 다행이군.’
그가 죽었다면 정서흔을 살려 놓은 건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담도 정이흔만큼이나 동생을 아꼈으니까.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며 파고들었겠지.
하여튼 동생한테 미친 놈들이 문제였다.
***
다행히도 동생한테 미친 놈들 덕분에 화제는 금세 가라앉았다.
“인터뷰한 놈도 돌은 새끼지. 입 다물고 있으란 말이 그렇게 어려웠나?”
오늘 그를 찾아온 건 정이흔이 아니라 이진렬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열심히 녹즙을 쪽쪽 빨아 먹었다.
자기가 다 먹을 거면 왜 사 왔는지 모르겠다.
한차수는 반 이상 거덜 난 녹즙 상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한차수 씨는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어딘가 아쉬워하는 느낌에 한차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인사는 아까 했다. 뭘 더 원하는 걸까…. 아.
“종신 계약서라면 저기 있습니다. 가지고 가세요.”
탁자 위에 쌓인 계약서는 벌써 일곱 부를 넘어섰다. 정이흔이 찾아올 때마다 새로 갱신된 계약서를 가져온 탓이었다.
“가는 김에 길드장님께 여덟 번째 버전은 필요 없다는 말도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진렬의 눈빛이 허망해졌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등 뒤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차수가 부탁한 핸드폰이었다.
“됐습니다. 가져가세요.”
왜 실망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받자. 한차수는 바로 핸드폰을 켰다. 화면의 밝은 빛이 그의 얼굴에 빛을 흩뿌렸다.
화면을 쓱쓱 넘기던 한차수를 보던 이진렬이 툭 뱉었다.
“그 기자에 대한 말은 없을 거예요.”
시사 란을 살피다 말고 한차수가 이진렬을 응시했다. 그걸 찾으려는 게 아니었냐는 듯 이진렬이 어깨를 으쓱했다.
“퍼져 봤자 좋을 일 아니니까. 병원도 그렇고.”
하긴, 병원 측에서 기를 쓰고 숨겼을 가능성이 컸다. 한차수는 금세 납득했다.
그렇게 이진렬이 돌아가고 한차수는 혼자 남아 생각을 정리했다.
‘슬슬 병원에서 나갈 때가 되었군.’
고독에 잊혔던 퇴원 욕구가 기자로 다시금 끌어 올려졌다.
고독을 보낸 이와 기자. 각자 다른 의도를 가진 이들. 하지만 노리는 대상은 같았다. 바로 한차수, 본인 말이다.
문제는 자신의 처지였다. 병원 안에 처박힌 상태로 뭘 어떻게 대응하란 말인가?
심지어 지금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놈은 원작 주인공이었다.
한차수의 악행이 드러나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을 견디며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악역에 빙의한 이상 제 몸은 제가 지켜야 했다.
그러니 답은 하나였다.
‘집에 가자. 가서 일기장이든 수첩이든 뭐든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자.’
지금 자신은 원작 한차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들 만한 놈이 누군지 대충 범위라도 좁혀야 하는 상황. 그를 위해서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야만 했다.
“좋아, 그럼….”
퇴원하자고.
한차수는 어느새 정든 병실을 둘러보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정갈하고 맛있는 밥도 이젠 끝이었다.
***
“예? 퇴원이요?”
뜻밖에 반응이 격렬했다.
한차수는 한순간이지만 제 담당 의사가 실은 헌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
이곳에서 저렇게 높이 뛰는 의사를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허벅지에 스프링이라도 달았나.’
한차수는 의심 섞인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이전 세계에서는 그런 이들이 제법 있었다. 주로 퇴역 날짜를 미루고자 하던 이들이었는데….
고성이 생각 사이를 파고들었다.
“환자분 깨어나신 지 이제 겨우 2주 넘으셨어요!”
의사는 단호하다 못해 엄격한 얼굴이었다. 차트를 들이미는 손길이 과격했다.
“여기 보세요. 바로 이틀 전에도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지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퇴원이세요?”
그건 페널티 때문이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노릇. 한차수는 대신 백담을 방패로 내세웠다.
“S급 힐러가 공인했습니다.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하다고.”
매일같이 백담이 들려 아무 의미 없는 힐링을 하고 가는 참이었다.
“더 이상 치료할 곳이 없다고, 치료 스킬을 써 봤자 아무 소용 없다던데요.”
백담의 말을 전하자 의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한차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S급 힐러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시겠죠.”
“아니, 그건 아닌데 말이죠. 아시다시피 환자분은 특별 케이스예요. 그러니까, 부상은 완치되었는데, 다 나은 건 아니잖아요?”
완치는 되었는데 다 낫진 않았다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의사는 상황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한차수는 너그럽게 그의 헛소리를 모두 들어 주었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몸이 너무 연약해서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모르니 그냥 계속 입원해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는 없고요. 그저 어디까지나 안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지요.”
한차수의 눈썹이 날카로운 산을 그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인력에 자원을 소모하다니.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런 호구 같은 판단을 누가 내렸는지는 보나마나였다.
‘정이흔의 입김이겠군.’
종신 계약을 해 줄 때까지 감금이라도 하겠다, 이건가?
‘요 며칠 안 오길래 포기한 줄 알았더니….’
백담이 창밖에서 염탐하던 기자를 잡아낸 뒤, 정이흔의 기세는 한껏 수그러들었다.
매일같이 계약하자며 조르던 인간이 어느 순간 발길을 뚝 끊은 것이다.
이상한 책임감 때문인지, 다른 일이 바빠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차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으니까.
‘그 녀석이 올 때마다 악몽을 꾼단 말이지.’
정서흔을 구하지 못한 자신이 정이흔에게 붙잡혀 동굴로 끌려가는, 끔찍한 꿈.
다행히도 고문당하기 직전에 깬다만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건 자명했다.
“환자분, 일단 검사를 한 번 더 진행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집에 가셨다가 또 쓰러지시면.”
의사의 어색한 목소리에 한차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때 가서 통원 치료라도 하죠.”
“그, 그건….”
“어찌 되었든 의사 선생님 말씀은 알겠습니다. 길드장님과 제가 따로 대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하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상적인 웃음과 함께 의사는 일이 바쁘다며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홀로 남은 한차수는 머리를 긁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장과 따로 대화해 보기는 무슨.
“그 호구 자식이 날 놔줄 리가 있나.”
툭 던진 시선 끝에 아직도 사인하지 않은 두꺼운 종신 계약서가 걸렸다.
존재 자체로 압박감이 드는 계약서였다.
언제든 제 목을 조를 놈한테 제 모가지를 평생 맡기라니.
원작을 아는 입장에서는 소름 끼칠 따름이었다.
한차수가 저질러 온 짓이 들키는 순간 저건 종신 계약서가 아니라 신체 포기 각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역시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지는 게 좋겠어.”
자신을 죽이려는 놈마저 등장한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모습을 감추고 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고민을 끝낸 한차수가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널찍한 복도 양 끝에 듬직한 체격의 헌터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정이흔이 특별히 고용한 경호 전문 헌터들. 일전에 기자가 붙잡힌 뒤로 충원된 인력이었다.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차수는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일단 한 번 시도해 봐야겠군.’
부딪히지 않고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다.
“후우….”
회색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 존재감 희석(A) ]
“음.”
몸을 조였다 푸는 긴장감과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옅어졌다.
병실 안을 울리던 옅은 숨소리마저 점차 희미해져 적막이 드러난 순간.
[ 그림자 장막(C) ]
흐릿한 장막이 그 위를 덮더니 단단한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불투명한 존재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커헉!”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각혈’에 걸렸습니다! ]
배 속이 빠르게 뜨거워졌다.
두꺼운 칼날로 긁어내리는 듯한 고통에 한차수의 몸이 뒤틀렸다.
실전에 사용하기에 앞서 시도해 보길 잘했다.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면 체력도 빠르게 깎이는군.’
한차수는 비척이며 무너진 몸을 추스르려 애썼다.
그가 바닥에 한 움큼 토해 낸 핏물을 바라보며 뒤처리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들어갈게요, 한차수 씨.”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망설임 없이 활짝 열렸다.
“…….”
“…….”
싸늘한 침묵 아래, 채 닦아 내지 못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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