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1화 (11/113)

11화

한편, 병실에 남은 한차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결국 나를 노리는 놈이 나타났군.’

낮은 확률이었으나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작 한차수의 성격을 보아하니 입사 전에도 사고를 여럿 치고 다녔을 것 같았으니까.

문제는 본체의 기억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그게 누구일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거였다.

‘일기를 꼼꼼히 쓴 걸로 봐서는 옛날 일기장도 있을지 몰라.’

“집에 가서 찾아봐야 하나….”

그러고 보니 서재 말고 다른 큰 방에 상자들이 쌓여 있던 게 기억났다.

한차수가 기억을 떠올리려 인상을 쓰는데 어디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흠흠!”

“…….”

“저, 저기.”

“?”

한차수는 그제야 변호사가 아직도 병실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존재감이 없던 터라 까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르신 걸 못 들었네요.”

한차수의 사과에 최철민 변호사가 어색한 얼굴로 말을 붙였다.

“괜찮으시면 제가 갔다 올까요?”

“예? 어디를….”

“그, 댁에.”

집에 대신 다녀와 주겠다는 말인가.

눈을 깜빡인 한차수가 단칼에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치만 방금 전까지 집에 가 보셔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변호사는 의외로 끈질겼다.

그는 사력을 다해 한차수의 점수를 따 보려는 것처럼 굴었다.

“제게 맡기세요. 이래 봬도 발이 빠른 편이라 집 주소만 알려 주시면 후딱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최철민이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뙤약볕 아래 한 시간도 서 있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 한차수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고-.”

아니, 당신을 내 집에 들여보내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한숨을 쉰 한차수가 경호팀을 부르려던 때였다.

똑똑.

“환자분, 식사 드리러 왔어요.”

“아. 들어오세요.”

트레이와 함께 식사가 도착했다.

한차수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최철민을 돌아보았다.

“죄송하지만 다음번에 뵙도록 하죠.”

“예, 그럼 다음번에!”

기죽지도 않는지, 최철민은 씩씩한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

“식사 갖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차수는 언제나처럼 풍족한 식사를 행복한 마음으로 먹지 못했다.

“…고독.”

약에 벌레를 넣은 새끼라면, 식사에는 뭔 짓을 했을지 모르니까.

“빌어먹을.”

한차수에 빙의되고 유일하게 좋았던 게 식사였는데. 언제나 담담했던 회색 눈에 격렬한 분노가 일었다.

***

다행히도 식사는 천령 길드 측에서 제공되는 걸로 바뀌었다. 그래도 떨어진 식욕을 회복하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깨작거리기를 며칠. 소식을 들은 백담이 싱글거리며 그를 놀리러 왔다.

“제가 당신을 위한 실험체가 되어 드리죠.”

…이 새끼가 미쳤나.

한차수는 새삼 주인공 패거리 중 제대로 된 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S급 힐러가 제 기미 상궁을 자처하다니. 이런 인력 낭비가 또 없었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백담이 자신의 치료를 위해 방문하는 걸로도 심히 부담스러웠다.

당연히 자신이 부탁한 건 아니었고, 백선의 고집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완벽히 치료하고 말겠다나 뭐라나…. 물론 딱히 효험은 없었다.

상처는 나은 지 오래였고, 근본부터 망가진 몸은 힐링으로 낫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저 백선의 버리지 못한 미련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미련이 이렇게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았고.

“백담씨가 왜 그런 일을 합니까?”

“그야 나는 병약한 한차수 씨와 달리 뭘 먹어도 안 죽으니까요.”

확실히, 그는 세계에 몇 없는 S급 힐러답게 자체 해독 스킬을 가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화 스킬이라고 봐야겠지만.

한차수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왜요? 벌레가 무서워서 밥도 못 먹으면서.”

“…….”

“줘요.”

백담은 음식을 일일이 검사하느니 자기가 직접 먹어 보는 게 낫다며 손을 내밀었다.

“얼른.”

투정 부리지 말라는 듯한 눈빛에 한차수는 매우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이라도 된 것 같군.’

배식판에서 벌레를 봤다며 우는 아이라도 된 기분이다. 과거에는 자신이 그런 아이를 혼내는 역할이었는데.

역전된 역할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길 잠깐. 한차수는 어느새 멀어져 가는 식판 끝을 붙들었다.

하마터면 정말로 빼앗길 뻔했다.

“주십시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선이가 매일같이 전화해서 당신 안부를 묻는단 말이에요.”

성의 없이 중얼거린 백담은 손쉽게 한차수의 식판을 빼앗아 갔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꺾으려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빌어먹을 유리 몸!’

경고를 받는 기준이 뭐란 말인가?

‘나는 뭐 누워서 숨만 쉬라는 거야?’

결국 한차수는 힘겹게 디저트 하나만 겨우 사수해 냈다.

백담이 그걸 가만히 좌시할 리 없었지만.

“이리 내요.”

“…….”

“또 벌레 보고 쓰러지고 싶은 건가?”

“이건 시판 제품이라 괜찮습니다.”

한차수가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푸딩을 내보이며 말했다.

자신을 노리는 녀석이 음습한 성격이라는 건 대충 파악했다.

그냥 단순한 독이 아니라 고독을 넣다니. 이건 누가 봐도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지.

하지만 그런 놈이라도 푸딩 공장에 들어가 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한차수가 어디 한번 반박해 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흐음.”

백담의 옅은 갈색 눈이 가늘어졌다.

사락.

아마색 머리카락이 갑자기 폭포수처럼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한차수가 눈을 찌푸렸다. 백담이 허리를 숙여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그가 푸딩을 뒤로 숨기며 백담의 가슴팍을 밀어내려던 참이었다.

툭.

한차수의 몸을 가로지른 백담의 손끝이 창문에 닿았다.

그리고.

키이잉-!

까가가각!

창문 위로 금색의 원형진이 뻗어 나갔다.

황금 같은 빗살.

하늘을 향해 발사된 빛은 곧 무언가에 가로막혀 산화했다.

“으아악! 죄송, 죄송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에 숨어 이쪽을 엿보고 있던 남자에게 부딪혀서.

한차수는 푸딩을 꼭 쥐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꺼림칙한 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한차수 씨, 의외로 인기가 많네요.”

한가로운 목소리와 함께 백담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서져 흩어진 줄 알았던 금색 빛살이 그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먹이를 가지고 노는 거미처럼 그가 손을 튕겼다.

그러자 검은 옷을 껴입은 남자가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아아악!”

“…….”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한차수는 조용히 백담의 손에 푸딩을 얹었다.

“응?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어요?”

“…아닙니다.”

차마 원작에서 네놈이 사지가 찢어진 날 저렇게 거꾸로 매단 채 치료했다는 건 말할 순 없었다.

***

“기자라더군요.”

“예?”

“한차수 씨, 인터뷰하고 싶어요? 생각 있으면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 천령길드장이 곧 죽일 거 같거든.”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백담이 나타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길드장님이 오셨습니까?”

한차수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백선이 몰래 주고 간 과자 봉투가 힘없이 손에서 흘러내렸다.

백담이 봉투를 낚아채며 물었다.

“왜요. 얼른 나 쫓아내 달라고 하게?”

“백담 씨는 곧 가실 분인데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S급 힐러가 바쁜 건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었다. 한차수가 담담히 답하자 백담이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 그런데 기자가 반죽음당할 거라는 건 걱정 안 되나? 한차수 씨 동정심 많은 사람이잖아요.”

“안 그러실 겁니다.”

한차수는 정이흔을 알고 있었다. 남동생이 죽기 전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상냥한 호구였는지 말이다.

게다가.

“던전 안도 아니고 대놓고 잡힌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

한차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백담을 흘겨보았다.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정이흔이 할 수 있는 건 수사에 압박을 넣는 정도일 것이다.

“아, 그래요?”

정말로 놀릴 의도였나 보다. 한차수의 답을 들은 백담은 순식간에 심드렁해졌다. 와작. 과자를 씹는 모습이 영 성의 없었다.

한차수는 과자를 빼앗는 대신 너그럽게 물었다.

“그런데 기자는 왜 저를 찾아왔답니까?”

“한차수 씨, 인터뷰 관심 없다면서요.”

“관심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사람이 절 취재해서 뭘 하려던 건지고요.”

건조한 읊조림에 백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한차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툭 하고 내뱉었다.

“한차수 씨 인터넷 안 보고 살아요?”

“저 그날 핸드폰 박살 났습니다.”

어차피 연락 올 곳도 없어 새로 사지도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신세인데, 뭘.

한차수는 회사 사람들 외에 텅 비어 있던 주소록을 떠올렸다.

목표는 퇴사이니 이 기회에 다 끊어 내면 오히려 좋았다.

그런데 백담의 표정이 미묘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을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나는 또 나름대로 살길 마련해 두고 뻗대는 줄 알았는데.”

이 새끼가.

한차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백담이 한발 빨랐다. 그가 한차수에게 화면을 내밀었다.

[ 서락산의 작은 영웅, 그는 어디 있는가? ]

이게 뭐야.

한차수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