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빌어먹을 유리 몸 특성이 생겨난 뒤로 백선은 병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차수는 그가 없는 적막한 병실에서 책을 뒤적거리다 탁하고 접었다.
“하,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시트를 두드리는 한차수의 손이 빨라졌다.
유리 몸이고 뭐고 일단 차치하고. 두 녀석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디서 이상한 짓 하다가 다치면 큰일이야.’
다른 이유도 아니고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촐싹대다 다치면 그 뒷감당은 모조리 제 몫이었다.
[…사지를 자르고 던전에 던져 넣어.]
[여기서 당신 걱정을 해 주는 건 나밖에 없어. 감사하죠?]
미친 브라콤 주인공들이 벌이는 혈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안 돼, 그 꼴을 당할 수는 없다.
한차수가 가만히 허공을 노려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일어나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한차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이흔에게 인사를 건넸다. 길드장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몹시 무도했지만 정이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로 다섯 번째. 계약서를 들고 올 때마다 같은 반응이었으니까.
“제 사직서 받아 주시러 오셨습니까?”
“하하. 인사하세요, 이쪽은 최철민 씨.”
한차수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정이흔이 누군가를 소개했다. 뿔테 안경을 쓴 마른 체격의 사내였다.
“오늘 계약서 작성을 도와주실 분이예요.”
정이흔과 한차수 모두 제 할 말만 내뱉는 가운데, 가운데 끼인 변호사 최철민이 식은땀을 흘렸다.
“최…철민입니다.”
“계약서 작성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 어 그러면.”
“사인하지는 않을 거지만요.”
최철민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한차수는 고개를 돌려 이 사태의 원인을 바라보았다.
정이흔은 최철민에게 일을 맡겨 놓고 딴청을 피우는 중이었다. 긴 손가락이 협탁 위에 놓인 불투명한 유리병을 건드렸다.
정갈한 라벨이 붙은 유리병들은 이틀 전 정이흔이 공수해 온 회복 물약이었다.
‘해외의 S급으로부터 받아내 온 물건이라고 했던가.’
회복이 느려도 너무 느리니 어쩔 수 없다며, 정이흔은 약을 꼭 챙겨 먹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물약을 먹을 때마다 식도가 쓰라린 게 꼭….
그때, 정이흔이 도열되어 있는 유리병 중 하나를 잡고 흔들었다. 장난감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길드장님 제 말 듣고 계십….”
화르륵!
애꿎은 포션이 병째로 불타올랐다.
“…….”
“…….”
“…….”
침묵 속에서 한차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뚜껑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그을린 병에서 펄떡거리는 지네가 튀어나왔다.
“으악!”
변호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펄쩍 물러섰다. 새파란 지네가 정이흔의 손안에서 몸부림쳤다.
한차수가 소리 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게 뭡니까.”
하루에 세 번씩, 한 번에 한 병.
꼭 시간에 맞춰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이라 식사 때마다 간호사가 다 먹었는지 체크까지 하고 가는 물약.
그런데 거기서 나오면 안 될 게 튀어나왔다.
정이흔의 손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저거… 그건가.’
사두지네의 유충, 헌터들이 편하게 부르기로는 ‘고독’.
무협에 나오는 고독처럼 숙주의 몸에 기생해 숙주를 죽이거나 움직임을 조종하는 몬스터였다.
‘어떤 미친놈이 그걸 약에 넣은 거야.’
애초에 사두지네의 유충은 구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몬스터의 숨을 붙인 채 던전 밖으로 끌고 나와야 했으니.
‘그런데 그걸 나한테 써?’
한차수는 기가 막혔다.
겨우 정서흔을 구해서 죽을 위기를 넘겼더니, 이런 식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삼킨 그가 정이흔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드장님, 이제와 숨기셔도 소용없습니다.”
“…….”
“보여 주십시오.”
일단 진짜 저게 고독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먹을 뻔한 거 아닙니까.”
정이흔은 말없이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다른 포션병을 열어 내용물을 쏟아붓고는 거기에 발버둥 치는 지네를 넣었다.
“한차수 씨, 너무 많은 걸 신경 쓰다 보면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예?”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해요.”
툭.
정이흔은 지네 대신 종신 계약서를 그의 손에 놓았다.
“나머지는 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한차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길드장의 머리를 후려갈길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애꿎은 서류를 괴롭히는 대신 정이흔을 괴롭히기로 했다.
“그 포션, 길드장님께서 가져오신 걸로 아는데요.”
“…….”
“설마 제게 벌레 든 약을 먹일 생각이셨습니까?”
정이흔이 곤혹스러운 눈빛을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닙니다.”
뒷골이 심하게 당겼다. 한차수는 징징 울리는 머리를 짚으며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저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차수가 거침없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지네가 든 병만 가져오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래 습관대로 그의 허점을 노리며 손목을 비틀려 한 탓일까. 아니면 상대가 상대여서 그런 걸까.
돌연 시야가 뭉그러졌다.
[ 경고! ]
[ 체력이 소모됩니다. ]
[ 체력이 소모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이명’에 걸렸습니다! ]
삐이이-!
“이게… 또, 윽!”
한차수는 울컥했다. 이게 아주 제멋대로 체력을 깎아 대고 있었다.
그사이 정이흔은 빠르게 지네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최철민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본 그가 말했다.
“최철민 씨, 한차수 씨를 부탁합니다.”
“예!”
최철민은 한차수를 재빨리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정이흔은 기다렸다는 듯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
“…….”
“저, 음료수라도 드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최철민의 떨리는 호의를 거절하며 한차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퇴원하고 싶다.
***
쾅!
병실을 나와 걸음을 옮기는 정이흔의 뒤로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성 한 명과 단단한 체격을 가진 남자 둘.
하나같이 정제된 기도를 가진 것이 일반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엄격한 분위기의 여성이 정이흔의 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물었다.
정이흔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뒤로 누가 병실에 드나들었습니까?”
“백선, 정서흔, 그리고 필로소의 부길드장이 정기 치료차 다녀갔습니다. 그 외 공략 1팀과 포션 제조 1팀이 병문안 요청을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방문자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보고에 정이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노이르가 제 물건에 헛짓거리를 했을 리는 없어.’
그렇지 않아도 이제 재료가 없어 만들 수 없다는 걸 억지로 털어 온 참이었다.
어딘가에 고이 숨겨 놓고 애지중지하면 모를까, 제가 아끼는 물건에 개수작을 부렸을 리는 없었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의료진 중에 누군가 한차수가 먹을 약에 손을 댔다.’
도대체 왜? 정이흔의 낯에 의문이 서렸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이다. 숨 쉬는 것 하나하나가 버거워 도움이 필요한 남자.
‘아직 마음을 돌리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꽈악. 정이흔은 저도 모르는 사이 주먹에 힘을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마터면 병을 깨 버릴 뻔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억지로 긴장을 풀었다.
“길드장님.”
달라진 기색을 은연중에 느낀 듯, 두 남성 중 뺨이 움푹 팬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환자분께 무슨 변고라도 있으신 겁니까.”
정이흔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적막한 복도 한가운데, 깊은숨을 내쉰 그가 몸을 돌렸다.
“보세요.”
세 사람은 처음엔 이게 뭔가요,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어 정이흔이 뚜껑을 열자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게 뭡니까?”
“벌레…인 듯한데 색깔이 기묘하군요.”
“고독(蠱毒)입니까.”
마지막 음성은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의 것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본 정이흔이 고개를 까딱였다.
“분석팀에 넘길 테니 결과 나오면 바로 내게 말하도록 해요.”
여성에게 고독을 넘기면서도 정이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고독이라 불리는 사두지네의 유충. 그것은 액체화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일정 시간 물이나 음료에 담가 두면 녹아내린다.
문제는 녹아내린다는 게, 유충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액체와 일체화되어 숙주의 몸에 자리 잡고 나면 피를 빨아 다시 제 형태를 되찾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넘겨받은 벌레를 보는 경호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환자분의 병실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노이르의 물약 안에 들어 있더군요.”
“그럴 수가.”
세 사람은 크게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 의심이 가는 건 의료진입니다.”
말은 추측이었지만 여성은 확신하고 있었다.
정이흔 또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제 손에서 직접 한차수의 담당 의사에게 넘어간 포션이었다.
중간에 누군가 헛짓거리를 했다면 그건 분명 이 병원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수색에 들어갈까요?”
“…그래요, 그리고 만약 꼬리가 잡힌다면 그대로 내게 데려오도록.”
벌레를 보며 정이흔이 말을 이었다.
“목숨 가지고 장난질 치는 녀석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낯짝을 봐야겠습니다.”
붉은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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