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상태 이상, ‘동상’에 걸렸습니다. ]
[ 몸이 느려지고 공격의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
[ ‘동상’이 지속될 시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릴 만큼 강력한 주술이었다.
그리고 그 주술은 화염계 헌터인 정서흔마저 집어삼켰다.
“크윽!”
[ 패시브 스킬, ‘염화 강기’가 발동됩니다. ]
살았다는 감정이 몸을 지배한 것도 잠시.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가 제물을 바칩니다! ]
[ 강력한 냉기가 ‘염화 강기’를 뚫고 들어옵니다. ]
[ 상태 이상, ‘동상’에 걸립니다. ]
[ ‘동상’이 지속될 시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가까스로 움직인 정서흔은 엄폐물 뒤에 숨어 떨리는 손으로 빙결 저항 포션을 꺼냈다.
“후우, 후….”
블리자드는 아직도 휘몰아치고 있었다. 잠시 상황을 엿본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염화 강기마저 뚫을 정도라니.’
빙결 저항 포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텅 빈 포션병을 던진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급받은 B급 빙결 저항 포션의 지속 시간은 1분.
한 사람당 열 병씩 받았으니, 앞으로 10분을 버틸 수 있었다.
침엽수림을 빠져나가 설원에 도달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거기서부터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돼.’
정서흔은 광분한 서리거인들로부터 도망치면서 그들을 눈여겨봤었다.
몸집이 커진 만큼 힘은 좋아진 듯했으나 반대로 속도는 느려졌다.
충분히 따돌릴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린 정서흔이 팔을 떨치려던 순간이다.
“정서흔 씨.”
“?!”
“이거 드세요.”
가까운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한차수가 무언가를 굴렸다.
“이게 뭡니까?”
“제가 가져온 시약입니다. 불꽃골렘한테 뽑아낸 건데…. 아무튼, 버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길게 말하기 힘들다는 듯 한차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센 바람에 그의 뺨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붉은 시약병을 주워 든 정서흔의 눈이 번뜩였다. 불꽃골렘의 정수라. 화염계 헌터인 그에게 딱 필요한 물건이었다.
정서흔은 고민하지 않고 시약을 챙겼다.
“고맙습니다.”
한차수가 뭐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쑥스러운지 몸을 돌려 다른 사람을 향해 또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먹으면 좋은 겁니다. 아, 그리고 빙결 저항 포션 아끼지 말아요.”
목소리를 듣자 하니 백선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꽤나 친해 보이던데. 정서흔은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약을 마셨다.
휘이잉-
점차 블리자드가 멎어 들었다.
정서흔은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한 서리거인들을 노려보며 빠르게 왼손을 떨쳤다.
쾅-!
치솟는 화염과 함께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수십 마리는 되는 서리거인들의 목이 휙 하고 꺾였다. 무거운 발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달렸다.
쿵, 쿵, 쿵-!
“뛰어!”
잔뜩 힘을 준 낮은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동시에 뛰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잘 뛰네.”
까마득히 높은 침엽수림 꼭대기.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한 한차수가 등을 돌렸다.
폭발이 일어난 곳을 헤집던 거인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멍청한 털북숭이들은 슬슬 자기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고.”
그럼 시작해도 되겠군.
[ 스킬, 독약 제조(A) ]
손에 들린 십여 개의 시약병이 차가운 햇볕 아래 반짝였다.
***
그림자 장막 아래 몸을 숨긴 한차수는 가벼운 현기증을 참으며 시약병을 움켜쥐었다.
붉고 푸르고 노란 시약병들.
그건 단순히 보조팀에 합류하기 위한 핑곗거리가 아니었다.
정서흔에게 불꽃골렘의 정수를 전해 주기 위해서만도 아니었고.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라고.”
A안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언제나 차선책을 준비해 둬야 했다.
불꽃골렘의 정수를 복용한 정서흔은 아마 무사히 게이트 출입구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서리거인 중 몇 명이 그들을 따라잡는다면?
그래서 정서흔이 위기에 처한 팀원을 돕겠답시고 오지랖을 부리다 죽기라도 하면?
‘절대 안 돼.’
동생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정이흔은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샅샅이 조사한다.
그리하면 자신이 일부러 조악하게 제조한 포션이 걸리는 건 자명한 일.
던전 안에서 정서흔에게 도움을 줬다 하더라도, 눈이 돌아간 주인공한테는 그 모든 게 위선으로 비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가능한 모든 위험 변수를 제거해야만 했다.
‘빨리 퇴사하고 싶군. 자유로워지고 나면 이 몸을 쓰는 법도 연구해야겠어.’
‘한차수’의 특성상 독약보다는 암살로 서리거인들을 처치하는 게 더 순조로울 터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이 몸에 들어온 지 이제 딱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했다가 여기서 목이 떨어질 수는 없지.’
그래서 공략팀에서 지급해 준 B급 단검을 허리춤에 고이 모셔 둘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에 혀를 차는 한차수의 눈에 분노한 서리거인 주술사가 보였다.
“키이이-!”
설원쪽으로 지팡이 머리를 겨누며 소리 지르는 게, 여간 화나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윽고 녀석의 손짓에 서리거인 몇 명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뭘 하려는 거지?’
한차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술사가 얼어붙은 땅에 날카로운 지팡이 끝을 꽂았다.
써걱.
동시에 무릎 꿇은 서리거인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푸른 핏방울은 빠르게 퍼져 나가며 마법진을 그렸다.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가 두 번째 제물을 바칩니다. ]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가…. ]
주술사는 신이 나 팔을 휘두르며 무어라 지껄였다.
그때였다.
퍽!
“끼에엑-!”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흔들던 주술사의 머리가 퍽 하고 깨졌다.
주륵.
주술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머리를 더듬었다.
피와 더불어 부글거리는 녹색 액체가 그의 손바닥을 새카맣게 태웠다.
어느새 그림자 장막을 해제한 한차수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야, 이리 와.”
끼에에에에—!
주술사의 포효가 설원을 울렸다.
***
쿠웅, 쿵…!
중독되어 푸르게 변색된 서리거인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 느린 것들이 피통은 커서.”
줄지어 누운 서리거인들을 내려다보는 한차수의 얼굴이 창백했다.
두꺼운 방어구 위로 붉은 피가 얼어붙어 있었다. 전부 한차수가 흘린 피였다.
콰득!
땅에 누워 꿈틀거리는 서리거인의 머리를 밟아 부순 한차수가 설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주술사를 처치하고 남은 서리거인들을 데리고 다니며 시간을 끌기를 한참.
저 멀리 게이트 출입구 부분에 방어계 헌터의 배리어가 희미하게 보였다.
정서흔을 비롯한 팀원들이 다행히 안전하게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슬슬 날 찾을 때가 됐…. 쿨럭!”
갑자기 쏟아져 나온 피에 한차수는 짜증 어린 손길로 입가를 닦았다.
“씁, 귀찮게시리.”
한차수가 차게 식은 눈으로 제 몰골을 훑었다. 덕지덕지 말라붙은 핏물이 보기 흉했다.
다 죽어 가는 녀석들을 앞에 두고 한번 써 본 스킬이 문제였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그래, 페널티.
병약한 귀족 영애처럼 한차수의 피를 쏟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위장 신분’의 페널티였다.
“쓸데없이 설정에 충실하네, 이 세상은.”
한숨을 내쉰 그가 설원을 향해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위장 신분’은 포션 제작자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독약 제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몸이 ‘소리 없는 발걸음’을 쓰자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으니.
‘이름처럼 은신까지 되는 데다 속도도 빨라져서 제법 쓸 만했는데.’
아무래도 위장 신분을 집어치우기 전까지는 제대로 못 쓸 양이었다.
아쉬움에 침엽수림을 헤치고 나가는 한차수의 눈이 작게 찌푸려졌다.
사박, 사박.
어느덧 설원이었다.
얼어붙은 눈밭을 걸어가는 한차수의 입에서 새하얀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저 멀리 희끄무레한 배리어가 보였다.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게, 몇 겹을 둘러친 듯했다.
“…….”
한차수는 점점 가까워지는 배리어를 가만히 바라보다 단검을 꺼내 들었다.
서리거인에게 쫓긴 포션 제작자에게 상처 하나 없을 수는 없는 노릇.
은빛 칼날이 거꾸로 세워졌다. 한차수의 무심한 눈에 소매를 걷은 팔목이 비쳤다.
그때였다.
우우우-
“?!”
저 멀리, 몬스터 시체로 가득한 침엽수림 뒤편.
거뭇한 망령이 몸을 일으켰다.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의 원념이 몸을 일으킵니다. ]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의 원념이 복수의 대상을 찾습니다! ]
육체를 버린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설원을 가로질렀다.
소리 없이 뻗치는 살기에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콰가각!
원념이 지나간 자리가 거칠게 파였다. 얼어붙은 설원 위로 기나긴 흔적이 자리 잡았다.
우우우-
한차수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오는 망령의 손이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을.
“저게 눈깔을 어디다 팔아먹었나…!”
실제로 원념의 두 눈은 뻥 뚫려 있기에 적절한 말이었으나, 한차수는 식은땀이 흘렀다.
주술사의 원념은 어처구니없게도 배리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녀석을 죽인 건 정서흔이 아니라 자신인데도!
이를 악문 한차수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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