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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3화 (3/113)

3화

빛을 받으면 갈색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칼. 우묵한 눈썹뼈 아래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

주인공답게 한순간에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외모였다. 한차수 또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정이흔의 외모에 충격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이 얼굴을 하고 날 그렇게 고문한다, 이 말이지.’

눈이 마주친 순간, 자연스레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죽음에 돌아 버린 모습이.

“으음….”

비록 지금은 흑화하지 않아 호구라 불릴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일 테지만 그래도 꺼려졌다.

한차수는 슬그머니 그에게서 한걸음 멀어졌다.

그사이 백선은 길드장을 만난 게 기쁜지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왈왈 짖어 댔다.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으세요!”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내가 백선 씨의 휴가를 망치는 없을 겁니다. 그보다 제조팀에서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정이흔이 한차수를 바라보았다. 답을 듣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여튼 은근히 감이 좋다니까. 주인공이라 그런 걸까. 한차수는 한숨을 삼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포션 제조 1팀, 한차수입니다. 새로 연구 중인 포션에 필요한 재료가 서리거인 던전에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습니다.”

상자로 가득한 손을 보이며 말하자 정이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새 연구 재료요?”

“네. 곧바로 채취해 약품 처리를 해야 하는 시료여서 부득이하게 참여하게 됐습니다. 공략팀의 발목을 잡지 않게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차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 했으면 그냥 넘어가라.’

지금 그에겐 빨리 끝내고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대단하지 않아요, 길드장님? 제조팀에서 이렇게 의욕적인 분은 처음 봐요.”

“그러게.”

정이흔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이런 분이 우리 길드에 계셨을 줄은 몰랐네.”

말만 들어서는 칭찬인데, 낮게 중얼거리는 꼴이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목덜미가 섬뜩했다. 한차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바닥에 시선을 처박았다.

다홍색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흥미가 깃든 듯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미치겠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한차수는 태연을 가장했다.

설마 이 몸이 저지른 짓거리를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제법 무거운 시선이었다.

‘다정한 호구라 하더라도 역시 S급은 S급이라는 건가.’

어쩐지 소설 속 고문 장면이 떠올라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도 정이흔의 관심은 곧 떨어져 나갔다.

“알겠습니다. 포션 제작자가 지원팀으로 합류한다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오늘 공략, 잘 부탁해요.”

“예에….”

즉석에서 포션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가 있으면 공략이 무척이나 편해진다.

정이흔은 제 동생의 공략이 수월해진 게 마음에 든 듯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정말 동생에 한해서는 엄청난 팔불출이군…. 그걸 이렇게 피부로 느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한부라서 그런지 동생에 대한 애정이 엄청났다.

한차수는 차게 식은 눈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선은 어느새 다시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럼 길드장님은 안녕히 가세요. 저희는 가서 장비부터 받을게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이흔한테 또 붙들릴까 싶어 한차수는 재빨리 백선과 함께 자리를 떴다.

‘아, 빨리 끝내 버리고 퇴사하고 싶다.’

보조팀은 이쪽으로 모이라는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며, 한차수는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등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콕콕 박히는 기분이었지만, 아마 제 착각일 것이다.

***

정이흔은 멀어지는 리무진 버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부길드장이 팔짱을 낀 채 혀를 차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다섯 살 어린애 두고 온 줄 알겠어.”

“서흔이가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

정이흔이 부드럽게 맞받아치자 부길드장이 고개를 저었다.

“떠나는 거 봤으면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지금 유세 부리는 거냐고 다른 길드 쪽에서 지랄하기 시작했어.”

정이흔은 한동안 부길드장의 투덜거림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리고 버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툭 하고 뱉었다.

“포션 제조 1팀 사람들 기억해?”

“제조 1팀? 임 팀장이랑 연구원 몇 명은 알지.”

그건 갑자기 왜 묻냐며 부길드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그건 왜. 말 돌리는 거냐?”

슬쩍 가늘어진 눈이 정이흔을 응시했다.

정이흔이 발걸음을 떼며 흘리듯 말했다.

“한차수라는 사람이 오늘 보조팀에 지원했더라.”

“한차수? 그게 누구… 아!”

부길드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겁지겁 뒤따라온 그가 사실이냐는 듯 정이흔을 향해 물었다.

“사내 식당에서 맨날 너랑 부딪히려고 용쓰던 그 더벅머리 안경?”

“그래.”

오늘은 그 촌스러운 안경을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맨얼굴이었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쥐고 있던 붉은 구슬을 품에 넣으며, 정이흔이 중얼거렸다.

***

리무진 버스는 서울 근교의 야산에서 멈췄다. 한차수는 신기한 듯 창밖을 바라보다 사람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끝나고 갈비나 먹으러 갈래?”

“됐어. 오늘 집에 내려가야 돼. 엄마가 왜 이렇게 안 오냐고 들들 볶더라.”

한가하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한 대화.

공략 1팀은 긴장감 없이 저들끼리 어깨를 치며 웃기 바빴다.

왜 이렇게 군기가 빠졌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차수는 이내 깨달았다.

‘아, 이 사람들은 모르는군.’

하긴 서리거인의 폭주는 그만큼 믿기 힘든 사고였다.

앞선 공략에서도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 사람들이 대비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한차수는 던전을 따라 줄지어 이동하는 행렬 끄트머리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걷는 동안 지원팀 쪽으로 간 백선이 자꾸 이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으나,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차수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가는 사내 한 명이 보였다.

듬직한 체격에 훤칠한 키, 형보다 조금 날렵한 생김새를 가진 그는 정서흔.

화염계 A급 헌터이자 오늘 공략팀의 대장인 랭커였다.

그에게 서리거인의 폭주에 대해 넌지시 운을 떼어 볼까도 했었다. B급 생산계의 대책보다 공략팀 대장의 방비가 더욱 믿을 만할 테니까.

하지만 곧 그 계획은 접었다.

‘퇴사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눈에 띄면 안 돼.’

어차피 목표는 정서흔을 살리는 거지,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다.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포션 제작자가 갑자기 던전의 미래를 예측해서 경고를 한다니.

대놓고 날 의심하고 경계하라고 외치는 격 아닌가.

‘잘못하면 스파이라고 의심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예지 스킬이 있다든가, 아니면 다른 루트로 던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고 의심받을 여지가 있다.

최대한 조용하게 퇴사하고 사라지는 게 목표인 한차수에겐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인벤토리를 열었다.

형형색색의 시약이 찰랑이며 제 존재를 뽐냈다.

훈련관까지 백선과 함께 들고 온 상자에 담겨 있던 물건이었다.

색색의 시약병을 보는 한차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어찌 되었든 정서흔만 살리면 된다.’

그러면 퇴사할 수 있어.

퇴사에 대한 의지를 가다듬는 사이 어느새 산 중턱에 다다랐다.

나무를 베어 내 인위적으로 만든 공터 한가운데, 녹색으로 빛나는 게이트 입구가 보였다.

‘주황색도 아닌 녹색. 그러니 다들 폭주가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거겠지.’

던전의 위험 정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단순화하면 크게 셋으로 분류된다.

붉은색, 노란색, 녹색.

그중 녹색은 폭주 위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던전. 상주 던전 중에서도 안전한 곳에 주어지는 표식이었다.

우웅-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략 1팀은 서리거인 던전에 순조롭게 진입했다.

이미 몇 번이고 와 봤던 던전이기에 긴장감은 없었다.

그렇게 설원을 지나 침엽수림을 뚫고 서리거인의 거주지로 향했을 때였다.

“저게 뭐야?”

처음엔 침엽수림 위로 튀어나온 산봉우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일행의 작은 속삭임에 두 귀를 움찔거리는 순간, 사람들은 그게 몬스터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번들거리는 두 눈이 똑똑히 보일 만큼, 거대한 체격을 가진 몬스터.

“미친…!”

누군가의 욕설과 함께 대지를 울리는 포효가 고막을 꿰뚫었다.

캬우우우-!

공기를 뒤흔드는 파동음.

뒤이어 30미터가 훌쩍 넘는 털북숭이 거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 튀어.”

“다들 후퇴해!”

땅을 뒤흔드는 지진과 함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도주는 곧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휘이잉-!

“블리자드?”

고개를 치켜든 정서흔의 눈에 특이하게 생긴 서리거인 한 마리가 보였다.

해골을 줄줄 꿴 목걸이를 걸치고 크리스털이 달린 지팡이를 휘두르는.

“서리거인 중에 주술사가 있다고?!”

경악 서린 외침과 함께 블리자드가 일행을 휩쓸었다.

“아악!”

“다들 피해!”

싸아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얼음이 방어구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 광분한 서리거인 주술사가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

[ 블리자드의 냉기가 온몸을 파고듭니다! ]

[ 체온이 떨어집니다! ]

[ 체온이 떨어집니다! ]

[ 체온이 떨어집니다! ]

경고 메시지가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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