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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2화 (2/113)

2화

퇴사, 답은 그것뿐이다.

사지 멀쩡한 상태로 빙의한 걸 보니 아직 주인공 동생이 죽기 전인가 본데….

그렇다 해도 한차수가 지금까지 저질러 온 일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일단 집부터 정리해야겠지.’

아무리 비틀린 악역이라지만 가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나 한차수가 가장일 경우에 대비해 가족과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집구석 어디에도 가족에 관한 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서재처럼 꾸며 놓은 방에서 일기 하나를 발견했다.

“간도 큰 새끼.”

일기장을 펼친 나는 기함했다.

이건 정말, 정이흔을 괴롭히지 못해서 돌아 버린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23X5년 X월 12일.

또다, 또 정이흔이 사내 식당에 나타났다. 대가리 빈 새끼들은 또 정이흔을 빨아 주러 몰려들었다. 부모 잘 만난 것밖에 없는 새끼가 뭐가 좋다고. 다들 눈깔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틀림없어.]

[23X5년 X월 15일.

내가 왜 정이흔이 쓸 포션을 만들어야 하지? 씨발, 내가 왜 하는 것도 없는 S급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냔 말이야!]

[23X6년 X월 22일.

명줄이 질긴 놈이다. 티 나지 않게 하려고 약효를 너무 조금 떨어트렸나?

그래도 피 칠갑을 한 꼴이 퍽 어울렸다. 시체도 못 찾게 뒈져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번에는 지속 시간도 손봐야겠어.]

미친놈이 뭐 이렇게 사방팔방 일을 벌려 놨어.

심지어 작중에는 나오지 않은 일도 있었다.

“엑스트라 주제에 내부 정보는 또 어떻게 팔았어?”

간 큰 한차수는 심지어 천령 길드의 내부 정보까지 팔아넘겼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손으로 두 눈을 꾹 짓눌렀다.

[23X7년 9월 3일.

빌어먹을 새끼. 서리거인 하나 잡으러 가는데 무슨 빙결 저항 포션을 이렇게 많이 준비하라고 지랄이야, 씨발!

X빠지게 만들어 봤자 다 처먹지도 않는 주제에.

어차피 보조 스킬 둘둘 두른 채 싸우는 주제에 씨발 욕심은 존나 많아요, 겁쟁이 새끼들.]

나는 가만히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23X7년 9월 4일, 수요일.

“어제 쓴 일기네.”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입사 3년 차, 가을, 서리거인 던전.

그리고 저주 같은 그 이름, 빙결 저항 포션.

이것들이 가리키는 바는 딱 하나다.

“씨발, 한차수…!”

악역에 빙의한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사지 절단 체험 쇼가 목전이었다.

***

“손님, 다 왔습니….”

“여기 카드요! 결제 빨리 부탁드립니다!”

“어, 어…. 돼, 됐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뒤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튀어 온 천령 길드는 빌어먹게 컸고, 욕이 나오게 높았다.

다행인 건 한차수가 A급 헌터라는 거였다. 평소보다 느리긴 했지만 20층이 넘는 계단을 뛰는 게 힘들진 않았다.

“지나가겠습니다.”

“어, 어…?”

대형 길드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싫은 건지 나처럼 계단을 이용하는 헌터가 꽤 많았다.

그중 몇 명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지금 당장 공략팀에 합류해야만 했다.

나는 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팀장과 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어? 차수 씨,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안 하던 전화를 하고… 응? 빙결 저항 포션? 그거 어제저녁에 공략 1팀에서 다 들고 갔지. 왜, 무슨 일 있어요?

듣자마자 온몸의 피가 싹 빠지는 소리였다.

공략팀에 이미 넘긴 시점에서 포션을 회수하는 건 포기해야 했다.

제조팀에서 생산과 검수까지 마치고 보낸 포션이었다. 대체할 여분조차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이제 와서 잘못 만들었다고 변명한다.

‘먹힐 리가 없어.’

제작 보고서와 검수 도장까지 내 손으로 찍었다. 그래 놓고 잘못 만들었다고 한들 누가 믿겠는가.

변명해 봤자 잘해야 징계, 삐끗하면 전수 조사가 시작되고 철창행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간단했다. 모르는 척 이대로 사직서를 내고 잠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국내 10위권 길드를 이끄는 굴지의 S급이었다. 어디로 튀든, 당장에 사로잡혀 사지 절단 인체 해부 파티가 열릴 게 뻔했다.

결국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쾅!

책상 앞에 서 있던 공략 1팀 팀원이 동그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오, 오늘… 허억. 서리, 거인 공략팀! 보조팀, 신청, 콜록…! 하러 왔는데요.”

직접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살리는 수밖에.

***

천령 길드 던전 공략 1팀 소속 백선은 아침부터 죽상이었다.

딱히 30분 전에 길드장이 공략 불참을 선언해서는 아니었다.

제주도 쪽에 1급 게이트가 갑자기 터졌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백선은 다음 달 주말로 예약된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위해서라도 길드장을 기꺼이 제주도에 보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길드장 대신 그의 동생이 투입되면서 자신도 함께 던전에 가게 되었다는 게 불만이었다.

“에휴.”

‘길드장님이었으면 인원을 여기서 반으로 줄여도 상관없었을 텐데.’

S급이 빠지고 그 자리가 A급으로 대체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력 보강이 필요했다.

백선은 한숨을 푹푹 쉬며 포션 제조 3팀에 남는 물약이 있으면 전부 보내 달라는 메일을 작성했다.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파티션에 몸을 들이박았다.

“으악!”

“허억, 헉….”

바닥에 고꾸라질 뻔한 남자가 파티션을 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 모양새에 백선은 화를 낼 타이밍도 잊었다.

격하게 숨을 내쉬는 남자의 목덜미가 땀에 젖어 있었다.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에 백선이 저도 모르게 목을 쭉 빼는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열기에 달아오른 하얀 피부와 흐린 회색 눈동자.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아슬아슬하게 눈매를 가렸다.

“후우, 하아….”

가만히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미남. 백선이 빠르게 남자를 훑을 때였다.

“오, 오늘… 허억. 서리, 거인 공략팀! 보조팀 지원, 신청 콜록…! 하러 왔는데요.”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백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예? 지원 신청이요? 아!”

어제저녁, 그는 전 사원에게 보조팀 지원 의사를 묻는 메일을 보냈다.

공략팀이 현장에 나갈 때마다 의무적으로 보내는 메일이었지만 실제로 참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랜만에 온 일손에 백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런데 어디에서 오셨….”

“아.”

사내는 숨을 고르다 말고 그에게 사원증을 내밀었다.

“포션 제조 1팀에서 왔습니다.”

<포션 제조 1팀 연구원, 한차수>

놀라는 백선을 향해, 한차수는 사력을 다해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보조팀 지원 메일 받고 직접 오시는 분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요?”

한차수가 품에 든 상자를 추켜올리며 의아한 눈으로 백선을 바라보았다.

옅은 베이지색 머리 아래, 노란빛 도는 부드러운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모르셨어요?”

“음…. 보조팀 지원자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한차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지금 백선과 함께 천령 길드 북동 훈련관을 향해 걷고 있는 중이었다.

“공략팀에 따로 지원팀이 딸려 있는데 굳이 보조팀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백선이 비밀을 말해 준다는 듯 속삭였다. 한차수는 장단을 맞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많아서 좋네.’

백선과의 대화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저번에 장비 관리팀이랑 제작팀이 한바탕 싸움판을 벌였다니까요? 자기들이 무슨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십대도 아니고.”

“호오.”

심지어 백선은 자신을 따라 포션 제조 1팀에 잠깐 들렀을 때조차 입을 쉬지 않았다.

덕택에 한차수는 천령 길드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게 되었다.

‘퇴사하기 전까지 자주 만나야겠군.’

악역에 빙의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본체의 기억 따위는 하나도 주지 않는 빌어먹을 소설보다는 훨씬 나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야.’

옆에서 조잘대는 백선을 내려다보며 한차수는 생각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운이 좋은 건가.’

공략팀이 현장에 나갈 때마다 보조를 모집한다는 건 팀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더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싶어 한차수의 핸드폰을 뒤지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작중에서도 몇 번 지나가듯 언급되었는데 딱히 중요하진 않아 잊고 있었다.

‘다행이야.’

만약 지원자를 모집하지 않았다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사지 분해 생고문쇼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형보다는 못 하지만 저도 힐러거든요. 이렇게 차출될지는 몰랐지만.”

백선의 뚱한 목소리에 한차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사무직이신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셨군요.”

“아, 평소에는 사무직으로 있어요. 오늘이 이상한 거죠. 현장 근무라니.”

백선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걸 보며 한차수는 턱을 쓸었다.

‘갑자기 차출된 힐러라.’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데 백선이 손을 번쩍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북동 훈련관. 지금 공략 1팀 대부분이 모여 있을 거예요.”

근처에서부터 이미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생기 넘치는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한차수가 조심스레 훈련관 안을 살피는데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꽂혔다.

“포션 제조팀에서 무슨 일입니까?”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한차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기척 없이 나타난 사내가 그를 향해 단단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한차수는 상대를 재빨리 훑었다.

단정한 검은 머리와 주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부드러운 미남이었다.

“길드장님!”

곁에 선 백선이 외쳤다.

그제야 한차수는 자신을 가리고 선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정이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향후 수틀리면 그의 사지를 잡아 뜯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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