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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화 (1/113)

프롤로그 + 1화

한차수는 800화가 넘는 현판 소설, <헌터명가 시한부 천재맏이>에 등장하는 쩌리 악역이었다.

주인공인 S급 헌터 정이흔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열등감의 화신 같은 악역.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었어. 나도, 너처럼 다 가지고 태어났다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너처럼 운 좋은 인간은 나같이 불쌍한 사람의 고통을 몰라!]

대사처럼 진부한 캐릭터였으나 의외로 많은 독자가 이 녀석을 끝까지 기억했다.

왜냐고?

얘 때문에 주인공 동생이 갑자기 소설 초반부에 허무하게 죽거든.

정이흔한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대신 들어간 던전 안에서 죽어서 시체도 못 찾는다.

[거긴 서흔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어. 누구 짓인지 찾아. 당장.]

그걸 계기로 천상 호구였던 주인공이 갑자기 싸패 주인공이 되더니….

[한차수?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포션에 장난질을 쳐 놔서 서흔이가 죽었다, 이 말인가?]

[죄송합니다. 사전에 철저히 검사했어야 하는데….]

[…사지를 자르고 던전에다 던져 넣어.]

[예?]

[목숨 가지고 장난질 치는 일. 나도 한번 해 보게.]

한차수를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살리고, 다시 고문하고 죽인다.

“씨발….”

그러니까, 내가 빙의한 이 몸한테 말이다.

***

낯선 방에서 눈을 뜬 지 한 시간 째.

역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엔 분명히 쉘터의 내 방에서 소설을 읽다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처구니가 없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소설에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 하필이면 악역 빙의라니.

한숨을 쉬는 내 눈에 도둑이 든 것처럼 헤집어진 방 안 꼴이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낯선 몸에 놀라서 뭐라도 찾으려고 뒤진 결과였다.

“한차수, 하필이면 한차수에 빙의했다 이거지….”

신분증을 튕기며 멍하니 읊조렸다. 얼룩 하나 없는 하얀 천장이 낯설었다.

머릿속에서 어제까지 읽었던 소설 내용을 다시 복기했다.

천령 길드 소속 포션 제조 1팀 연구원, 한차수.

사내 평판이랄 게 없는 평범한 아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승진도 못 하고 매일 야근하는, 이러다 만년 평사원으로 퇴직할 것 같은 인생.

“근데 실은 열등감에 찌든 미친놈이고.”

참 피곤하게 사네.

“도대체 왜 이렇게 비틀린 거야?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녀석이.”

포션 제조 스킬이 있는 헌터는 웬만한 대기업 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는다.

그건 천령 길드 소속인 한차수 또한 마찬가지.

‘그러고 보니 한차수가 B급이었던가?’

그 부분은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아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난 김에 확인도 할 겸 상태창을 불러 봤다.

그리고 난 곧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 이름: 한차수 (A급)

칭호 : 실패한 암살자, 숨죽인 별, 반항아

특성 : 암살계, 전투

스킬 : 위장 신분(A) : 활성화

재생(B)

소리 없는 발걸음(B)

그림자 장막(C)

독약 제조(A)

존재감 희석(A)

반항(A)

* 스킬 ‘위장 신분’이 활성화 중입니다.

* 특정 정보가 타인에게 다르게 표시됩니다.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포션 제조사라며.”

***

한참을 앉아 상태창을 들여다보다 보니 감이 잡혔다.

암살계 특성부터 시작해 독약 제조까지.

얘는 포션 제조하러 들어왔다가 열등감에 미친 게 아니라, 그냥 타고나기를 그런 놈인 듯싶었다.

“이래서 저지른 짓이 많았는데 그동안 안 잡혔군.”

효과를 살펴보니 흔적을 지우는 데 딱인 스킬이었다.

어쩐지 연구원으로 들어온 사람이 겁도 없이 미쳐 날뛴다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거네.”

혀를 차며 생각해 보니, 열등감 폭발 악역답게 한차수의 빌런 짓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포션에 장난질 치는 건 예삿일이오. 알고 보니 주인공 일행 장비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안 걸리다가 왜 갑자기 걸렸냐?

그건 뭐, 전개상 그게 필요했나 보지.

나는 가만히 상태창을 끄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무튼 작중에서 한차수의 개짓거리가 걸리게 된 건 순전히 운이 나빠서였다.

한차수가 장난질한 포션들은 대개 효능이 아주 애매하게 떨어지는 데서 그쳤으니까.

이를테면 회복용 포션의 약효를 6퍼센트 정도 낮춘다든지.

아니면 상태 이상 저항 포션의 지속 기간을 4.5퍼센트 짧게 만든다든지.

S급 헌터인 정이흔이라면 본신의 능력으로 커버하고 지나갈 수 있는 수작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차수는 점점 대담해졌다.

‘그러다 사고가 터진 거지.’

A급 화염계 헌터 정서흔.

그는 서리거인에 맞서 싸우다, 한차수가 만든 빙결 저항 포션 때문에 사망한다.

겨우 지속 시간과 약효를 8% 낮춘 포션이었다. 공략이 순조로웠다면 별일 없이 넘어갔을 만큼 사소한 차이였다.

하지만 그날, 서리거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한다.

공략팀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퇴각하려 했다.

비록 서리거인이 내뿜는 냉기가 기존의 세 배는 넘었지만 포션만 제때 먹으면 괜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포션이 문제였다.

8%라는 숫자는 그저 단순히 보았을 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 일 초의 판단으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

손발이 얼어붙고 점차 몸이 둔해지는 사선 속에서 그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숫자였다.

결국 공략팀은 예상보다 빨리 동이 나 버린 포션 때문에 설원에 발이 묶여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 대신 동생을 보냈던 주인공, 정이흔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자신이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허무하게 몰살당할 상황이 아니었다.

공략팀은 폭주한 서리거인을 퇴치할 수는 없을지언정 무사히 퇴각하기엔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이흔은 동생의 죽음을 철저히 수사했고… 그 결과 한차수라는 인물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가 저지른 온갖 치졸하고 비열한 악행까지 모두.

거기까지 생각하자 금방 내가 뭘 해야 할지 답이 나왔다.

“안 되겠다.”

퇴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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