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형과 나와 내 반 친구 (21/22)

외전 2: 형과 나와 내 반 친구

알파와 오메가의 격세 유전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는가?

격세 유전이란, 조부모 혹은 수세대 전 선조의 형질이 변형되거나 아예 사라졌다가, 몇 세대를 걸러서 다시 나타나는 유전적 현상을 가리킨다.

알파와 오메가는 대부분 알파나 오메가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다. 그러나 드물게 매우 낮은 확률을 뚫고 베타 사이에서 알파나 오메가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의 격세 유전이다.

덧붙여 격세 유전의 당사자들은 대부분 오메가이다. 드물게 알파인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자신도 알고 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인 만큼, 모르려야 모르기도 힘들었다. 화면 안에서 수많은 주인공들은 갑자기 베타에서 알파가 되거나, 오메가가 되거나 했고, 그걸로 사랑이 이뤄지거나 방해받고는 했다.

하지만 제집에서 일어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직접 겪어 본 현실은 드라마보다 덜 극적이면서도, 훨씬 더 당황스러웠다. 평범한 베타 가족에게 닥친 태풍, 지진, 화산 폭발이었다.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보통의 가족이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 가정주부인 어머니, 그 아래에서 평범하게 자라온 자신들 형제.

사실 평범한 것치고는 유복한 집안이긴 했다. 두 아들들을 무리 없이 발레와 유도를 전공시킬 정도였으니까. 사실 살면서 돈 걱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무엇보다 넷 모두 베타였다. 친척들 중에도 알파나 오메가는 전혀 없었다.

그 모든 평화가 그날 이후로 깨어졌다.

자신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등교 시간, 교문 앞이었다.

차라리 집이거나, 좀 더 은밀한 장소거나, 하다못해 시간대라도 사람이 적을 때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그 수치스러운 순간의 목격자라도 줄어들고, 소문이라도 늦게 날 수 있도록.

“아, 흣, 유호야. 나, 몸이. 선생님을, 진아 선생님을…….”

이유호의 하나뿐인 두 살 위의 형, 이유신은 그렇게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히트로 쓰러졌다.

당시 유신은 16살, 만으로는 15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유호는 14살, 고작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 현상은 전문 용어로는 오메가의 발현이라고 한다고 했다. 의사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저 의학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평범한 베타인 유호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전문가가 뭐라고 하든 주변의 다른 베타들이 계속 수군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집 큰 애가 사람들 앞에서 ‘오메가’가 됐다고.

가장 큰 문제는 유호가 보기에도 (자신을 포함해) 평범한 베타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수군댈 만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분명 며칠 전부터 낌새가 있었을 텐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냥 집에서 쉬면 좋았을 것을, 16세의 유신은 지나치게 성실했다. 중1짜리 꼬맹이 유호는 그런 형이기에 좋아했고, 또 존경했지만, 적어도 그날 한정으로는 형에 대한 수치스러움에 원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발레를 하는 형을 두고 주변에서 신기하게 여기기는 했다. 하지만 유호에게 유신이 발레를 하는 것은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대에서 예쁜 누나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형을, 멋지다고 동경했다.

당시 유신은 이미 키가 170을 넘어, 160이 아슬아슬한 꼬맹이였던 유호보다 10cm 이상이 컸다.

항상 멋있고 의지가 되는 형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올려다보던 상대였다.

단 한 번도 그가 자신과 같은 베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메가가 될 거라고는 더더욱.

당시 유호는 왜 형이 그의 발레 강사인 한진아 선생을 불러 달라고 했는지 몰랐다. 애초에 그녀가 오메가인 것도 몰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후 전후 사정을 알게 되고는, 솔직히 배신감을 느꼈다.

형은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예감하고 있던 거였다. 그렇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우월감을 가진 채 즐기고 있었겠지. 수많은 베타들 사이에서, 자신만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무엇보다 유신의 형질 검사 결과는 우성 오메가였다. 격세 유전이라 하더라도 실제는 거의 베타에 가까운 열성이 보통이다. 오메가의 격세 유전 중에도 보기 드문 사례라고, 뉴스에서도 열심히 떠들어 댔다.

통계적으로 전 세계 인류 10명 중 1명은 알파와 오메가이다. 나머지 9명은 베타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얼핏 알파와 오메가가 매우 소수 같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적은 수는 아니었다. 비율적으로 따졌을 때, 100명이 모이면 10명이 알파나 오메가라는 의미니까.

하지만 실제는 훨씬 적었다. 평범한 베타가 주위에 알파나 오메가가 거의 없다고 체감하는 것은,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유신과 유호가 다니는 고등학교만 해도 그랬다. 전교생의 수가 500명이 조금 못 되니, 비율로만 따지자면 50명의 알파나 오메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교생 중 오메가는 단 2명뿐이었다.

1학년에 한 명, 3학년에 한 명. 물론 3학년의 오메가는 바로 유호의 형인 유신이었다. 그나마 오메가는 있기라도 하지, 알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다른 알파와 오메가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알파는 알파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고, 알파는 배우자로 오메가를 선호했다. 거기다 알파와 오메가는 대부분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난다. 사회적으로 알파와 오메가가 많은 직업군 또한 따로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게 알파와 오메가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덕분에 서울 강남 어디 학교는 알파와 오메가 비율이 80%가 넘는다고 했다.

반대로 일반 학교에는 유신 같은 예외 한두 명 빼고는 모두 베타였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와 친분 없이 살다가 죽는다는 통계도 있었다.

그나마 학창 시절에야 알음알음 소문으로 형질이라도 알고 지내지, 사회인이 된 이후는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형질에 대해 대놓고 물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만큼,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는 상대방이 알파나 오메가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평범한 베타인 유호의 가족들이, 그냥 오메가도 아닌 우성 오메가가 된 유신을 앞에 두고 얼마나 낯설었을지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로부터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유호는 아직도 제 형이 낯설었다. 그 발현의 날 이후 줄곧 그랬다.

“오늘은 늦게 가도 되니?”

하품을 하며 식탁에 앉는 유호를 향해 어머니가 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요즘 골프에 한창 빠져 매일같이 새벽부터 바쁘셨다. 재밌는 건 저렇게 다니는 것이 은근히 사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다.

유호는 목에 걸친 교복 넥타이로 잠시 고민하다, 귀찮은 듯 뽑아서 바지 뒷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보통 체육복이나 생활복만 입고 다니다 보니 간만에 각 잡은 교복이 어색했다.

“응, 대회 끝나서 일주일은 아침 연습 없어.”

“맞다. 유호 너, 유도 전국 체전 지난주에 끝났지?”

식탁 맞은편에 이미 앉아 있던 유신이 맞장구를 쳤다. 그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반짝 미소를 흩뿌리며 보란 듯이 자체 발광 중이었다.

식탁에는 2인분의 아침 식사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단, 유호 쪽의 밥 양이 배는 더 많았다. 백미는 한 톨도 없는 현미밥이다.

반찬은 된장국에 생선구이까지는 같았지만, 유호 쪽에만 제육볶음과 과일이 추가되어 있었다. 대신 유신의 앞에는 한 대접의 샐러드가 있었다. 물론 소스 없이. 참고로 제육볶음은 어제 저녁 먹다 남은 거다.

유신도 180에 가까운 결코 작지 않은 키였지만, 얼마 전 유호가 180이 되면서 형의 키를 넘겨 버렸다. 유호 쪽은 한창 성장기인 만큼 최종적인 키 차이는 분명 더 벌어질 터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키가 비슷한데도, 유호 쪽의 체격이 훨씬 좋다 보니 실제보다 더 차이 나 보였다. 유호는 유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성장기와 맞물려 체격이 확 커졌는데, 반대로 유신은 발레 때문에 계속 식사량을 조절해 더 그랬다.

사실 유호가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 삼아 하던 유도를 목숨 걸 기세로 하게 된 계기는, 형인 유신이 우성 오메가로 발현한 사건이었다. 지칠 지경으로 몸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복잡한 머릿속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가볍게 전국 체전 메달권일 줄은 본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현재 유호는 고등학교 유도계에서 나름 기대주로, 향후 국가 대표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집으로 오면 그의 성과는 왠지 빛이 바랬다. 아무리 그래 봤자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턱턱 상을 받아 오다 못해, 이미 군 면제 자격도 취득한 우성 오메가님께 비할 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밀 검사 후, 유신이 우성 오메가가 됐다는 결과지를 받고도 가족들 중 누구도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다. 그냥 막연히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는 정도였다. 당사자인 유신 본인조차 처음에는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과 각종 후원 제안을 보고서야, 이게 평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막연히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나 무용계는 예전부터 오메가의 비중과 영향력이 높은 대표적인 분야인 만큼 시너지 효과는 더 컸다. 그 결과가 바로 집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많은 국내, 국제 대회 상패였다.

거기에 유호의 유도 전국 체전 메달을 더해 봤자 딱히 티도 나지 않았다. 덧붙여 유호가 군 면제를 받으려면 올림픽 메달이나,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필요했다. 아니, 그 전에 우선 국가 대표가 되는 것이 먼저다.

“맛있겠다. 제육볶음.”

유호 쪽으로 놓인 빨갛게 양념된 돼지고기를 보며 유신이 군침을 흘렸다. 한창 수저를 움직이다 말고, 유호가 대놓고 귀찮아하며 대꾸했다.

“먹고 싶으면 형이 먹든지. 난 어제 저녁에도 먹어서 꼭 안 먹어도 돼.”

“아냐, 진아 선생님께 들키면 죽는다고. 어제도 몰래 초콜릿 까먹다가 들켜서 혼났는데.”

말과 달리 유신은 대놓고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는 아직 음식에 집착하는 성장기로, 지금 모습만 본다면 훗날 음식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 완전히 거짓말만 같았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 한국인치고 밝은 편의 눈동자, 흰 피부와 반듯한 콧날까지. 마주 보고 있는 두 형제는 꽤나 닮았다.

안 그래도 우성 오메가인 유신은 항상 소문의 중심에 있곤 했다. 거기다 우성 오메가 특유의 반짝거림에 발레까지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모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눈에 띌 뿐, 사실 유호도 꽤 준수하게 잘생겼다. 본인은 딱히 관심도 없어서 몰랐지만, 여자들 중에 은근히 팬이 있었다.

“아, 약 먹어야지.”

식사를 하기 직전, 유신은 익숙하게 알약을 까서 입에 넣었다. 오메가용 억제제였다.

알파와 오메가는 매일매일 한 알씩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주기적으로 히트가 찾아오게 된다. 약 자체는 비타민보다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호는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당사자인 유신이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렇다 쳐도, 어머니까지 당연하다는 듯 나서서 저런 약을 챙겨 주는 분위기가 특히 불편했다.

“다 먹었어요.”

갑자기 속에서 욱하고 올라와, 유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아들을 위해 정체 모를 녹색의 건강 음료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황급히 쫓아왔다.

“더 먹어야지, 유호야. 배고프잖아.”

“됐어요. 어차피 수업 내내 잘 건데.”

사실 유호는 밥그릇은 싹 비운 뒤였다. 어머니는 건강 음료를 말하는 거거나, 아니면 단순히 입버릇일 뿐일지도 몰랐다.

“아휴, 저 녀석도.”

뚜벅뚜벅 그대로 욕실로 향하는 유호의 등을 향해 어머니가 혀를 찼다. 유신이 죽상을 한 채 소스도 없는 샐러드를 아작아작 씹다 말고, 그런 어머니를 위로했다.

“이해하세요. 유호는 지금 한창 사춘기잖아요.”

“유신이 넌 그런 거 없었잖니. 역시 우성 오메가라 그런가?”

“하하, 글쎄요.”

자신이라면 분명 성질부터 부렸을 텐데, 유신은 어머니를 향해 여유롭게 얼버무리고 있었다. 상긋 웃는 기척으로 보아 분명 또 꽃 같은 웃음을 자각도 없이 날려 대고 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며, 유호는 형의 그런 부분이 제일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유신이 우성 오메가가 된 이후, 그들의 부모는 항상 어느 정도 그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유호는 그럴 때마다 유신이 곤란한 얼굴로 반짝반짝 웃는 것이 웃기지도 않았다. 본인도 자신이 상대를 홀리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약간 가증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유신이 노력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유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노력으로 몇 개나 되는 국제 대회 상을 받아 오지는 못했겠지. 힘든 경쟁을 하는 만큼 나름의 괴로움이나 고통이 있을 거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짜증 나는 건 변함없다.

“유호야, 잠깐만!”

“다녀올게요.”

유호는 후다닥 양치를 끝내자마자, 뒤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것도 못 들은 척 황급히 집을 나섰다. 만에 하나 붙잡혔다가, 유신과 같이 등교라도 하게 된다면 최악이었다.

만약 유신이 오메가가 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훨씬 더 나았을까? 유호도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거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 형의 얼굴을 볼 때마다 종종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이런 기분은 겪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다.

그것이 순수하게 유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유호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다시 형을 향했다. 어쩌면 그저 이 불만 가득한 현실에 대해 이유를 찾고 싶을 뿐인 건지도 모르지만, 질풍노도의 마음은 다른 선택지를 아직 몰랐다.

***

“이유호, 네가 웬일로 제시간에 등교를 다 했냐?”

“오오, 우리 반 국가 대표 예비군.”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로 엎어져 잘 자세를 잡는 유호에게, 친구들이 모여들며 한마디씩 했다.

맨날 듣는 소리에, 맨날 하는 대화다. 유호는 고개만 살짝 들어 툴툴거렸다.

“대회 끝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수업 시간 좀 채워야지.”

시대가 달라져 예전처럼 운동한다고 수업을 등한시해서는 곤란했다. 만에 하나 운동을 그만뒀을 때 진로가 제한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솔직히 다들 공부하기 싫은 거 아닌가? 미래 따위 모르겠고, 그냥 운동만 하고 싶은 유호였다. 하루 종일 알차게, 1년 12달 365일 그럴 자신이 있는데.

“일단 지금은 졸리니까 잘 거야.”

“이 새끼 진짜 시간만 채우려고 교실에 오는구나.”

“집에서 게임한다고 안 자는 잠을 여기서 보충하죠.”

수업 따윈 모르겠고 잠이나 자겠다는 유호를 두고, 제일 친한 친구 세 놈이 둘러싼 채 키득거렸다.

다들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몸을 잘 쓰고 덩치가 좋았다. 운동도 하나씩은 하고 있었는데, 그중 성과가 뛰어난 걸로 따지자면 단연 유호였다.

“야, 야, 나 오늘 등교할 때 유호네 형님하고 나란히 왔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기 직전, 유호는 친구 한 놈이 추가로 끼어들며 하는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여 버렸다. 못 들은 척 계속 눈은 감고 있었지만, 이미 잠은 싹 달아난 뒤였다.

그나저나 만난 것도 아니고, 나란히 온 건 또 뭐냐? 설마 우르르 등교하는데 앞뒤로 섰다거나, 그런 레벨은 아니겠지? 왠지 진짜 그럴 거 같아서 좀 불안한데.

“오오오, 진짜?”

“어케, 오늘도 이쁘시더냐?”

친구들이 한 놈만 빼고 속도 없이 한심하게 난리 치는 꼬라지 때문에라도 더 그랬다.

“응, 머리도 찰랑찰랑하고, 하얗고, 뽀얗고, 눈 엄청 크고.”

“와, 죽인다.”

“나도 가까이서 보고 싶다.”

“야, 그래 봤자 남자 새끼 상대로. 다들 그러고 싶냐?”

“유호네 형이 어떻게 그냥 남자 새끼냐. 그분은 우성 오메가라고!”

“맞다. 그냥 남자 새끼는 아니지.”

친구 놈들은 사춘기의 혈기 왕성한 남고생답게 지들끼리 시시덕댔다.

“옆에 잠깐 서 있었는데, 냄새 엄청 좋아서.”

“오오.”

“그게 말이 되냐고. 그냥 샴푸 냄새겠지. 베타가 오메가 냄새를 어떻게 맡아?”

“그거 말인데. 잠깐만.”

거기서 갑자기 녀석들의 목소리가 확 작아졌다. 유호도 바로 옆이 아니었으면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다.

“그거 알지? 오메가랑 그거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던데.”

“그래 봤자 베타인 우리랑은 상관없지.”

“왜 상관이 없어? 베타 남자라도 여자랑 하는 것보다 오메가랑 하는 게 더 좋다는 건데.”

“그거 도시 전설 같은 거 아니냐? 솔직히 일반 베타가 어디 가서 오메가랑 한다고.”

아슬아슬 선을 넘기 시작하는 대화에 유호는 일부러 더 그냥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단순히 흥미 위주로 말하는 것뿐, 딱히 별다른 의도나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신들이 지금 화제로 삼고 있는 대상이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의 형이라는 자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딱히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놈들도 아니었다.

“그래도 실제로 해 본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 아냐?”

“말도 안 돼. 베타는 오메가를 만날 일이 없다니까.”

“왜 못 만나? 우리 반에도 있잖아. 오메가 하나.”

거기까지 말하고, 세 놈들의 시선이 마치 짠 듯이 동시에 교실 반대편, 창가 제일 앞자리에 앉은 쬐끄만 녀석을 향했다. 자는 척 엎드려 있던 유호도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그쪽을 살폈다.

원래도 또래보다 작고 마른 편인 체구가 구부정하게 숙인 어깨 때문에 더 작아 보였다. 대부분 생활복이거나 교복을 입더라도 대충 걸친 아이들 사이에서, 타이까지 갖춰 메고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이 오히려 튀었다. 머리가 직모라 그런가 뒤에서 보는 머리통이 유난히 동그랗다.

“엑, 김민재?!”

“맞잖아. 우리 학년의 유일한 오메가.”

“에이, 쟤는 좀 아니지. 열성하고 우성하고 같나?”

“쟨 진짜 그냥 남자 같잖아. 별로 예쁘지도 않고.”

“안 예뻐도 여자애면 꼬셨을 텐데. 오메가잖아.”

“으이구, 정신 차려. 오메가든 알파든 베타든 여자애도 눈이 있지, 누가 너 같은 놈하고.”

“뭐? 니 얼굴은 괜찮고?!”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다른 아이들도 힐끔힐끔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얼굴로 치면 우리 유호 씨가 잘생겼지.”

“맞아. 완전 정석 미남.”

“아, 난 또 왜 끌고 들어가? 그냥 잠이나 자게 냅둬 주라.”

이놈들은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이름을 부르며 날 걸고넘어지는 거야? 하지만 대놓고 일으켜 세우는데, 안 자는 거 뻔히 들켜 놓고 이제 와서 자는 척하기도 좀 그랬다.

“너희들 여기가 어딘 줄은 아니? 교실이거든?! 아침부터 모여서 이상한 소리나 하지 말고, 다음 수업 준비나 잘하지?”

도저히 못 듣고 있겠다는 듯 마침 반장이 참견했다.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깐깐한 인상의 여자애다. 따박따박 따지는데 공부를 잘해서 그런지, 유호로서는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한마디도 못 받아치고 쭈굴해지는 건 다른 친구들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교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유호를 불렀다.

“유호야! 너희 형님.”

“안녕.”

아니, 타이밍은 오히려 나빴는지도 모른다. 뒷문 앞에서 나풀나풀 손을 흔드는 유신을 발견하고, 유호의 표정이 단번에 썩었다.

“우와아아, 유호네 형님이다.”

“유신이 형, 안녕하세요!”

“누추한 1학년 교실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유호의 친구들은 이미 유신의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 있었다. 뭐가 어쨌다고 다들 얼굴이 벌게진 채 설설 기는 중이었다. 방금까지 오메가가 어쩌고 여자애가 저쩌고, 택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놈들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놈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부러워하며 보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애들까지 뺨을 붉히는 중이었다.

“반장아, 말 좀 걸어 봐.”

“얘는, 용건도 없는데 어떻게 그래.”

웃기는 건 자신들 무리에게는 바락바락 화만 내던 반장까지 거기 포함이라는 사실이다. 방금 전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저기요, 형님! 오늘 아침에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아까 등교할 때 유신과 나란히 왔다던 녀석이 시뻘게진 얼굴로 수줍게 물었다. 유신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유호랑 같은 반이었구나. 너한테 부탁했어도 됐을 걸 그랬네.”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도와드렸으면 좋았을걸.”

“말이라도 고마워.”

정작 유신 쪽은 익숙한 태도로 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이 유호를 제일 거슬리게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용건을 끝내고 돌려보내는 게 제일이다. 유호는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

“자, 여기. 네 체육복.”

유신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유호에게 체육복이 든 보조 가방을 건넸다.

“감사히 여겨. 네가 체육복 놓고 가서, 이 형님이 손수 갖다 주러 왔잖아. 너 오늘 체육 수업 있는 거 맞지?”

이게 바로 아침에 엄마가 나가는 자신을 계속 불러 댄 이유라는 사실을 깨닫고, 유호의 미간 주름이 더 진해졌다.

“뭘 이런 걸로 교실까지 찾아와. 이 정도야 없으면 친구한테 빌려 입으면 된다고.”

“그래도 엄마가 기껏 빨아 놨잖아. 그리고 나도 어차피 등교하는 김에 잠깐 들르면 되는걸.”

실은 그게 제일 불편한 걸 정말 모르나? 안 그래도 지금도 바로 뒤에서, 자신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친구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진짜 빈말이 아니고, 유신이 형 좋은 냄새 나지 않냐?”

“그치? 오, 잠깐. 그렇다는 건 너랑 내가 알고 보면 알파?!”

“캬, 그거 죽인다. 알파면 유신 형하고 사귈 수 있나?”

친구들이 서로를 향해 키득댔다.

“이 새끼들이!!”

선을 넘는 대화에 유호는 충동적으로 버럭 화를 냈다. 정말 진지하게 좋아해서 사귄다는 것도 아니고, 딱히 친구 형한테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앗, 유호야.”

“아니, 우리 말은 그게 아니라.”

지들 생각에도 찔리기는 했는지, 놈들이 모두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유호야,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정작 대화를 못 들은 유신만 무슨 일이냐고 화사하게 웃었다. 물론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니 저런 반응도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유호도 저딴 상황 따위 설명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억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누명을 쓰고, 친구 대신 벌을 서게 된 딱한 초등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럼, 체육복도 전해 줬으니까 난 이만 가 볼게.”

“형님, 잘 들어가십시오!”

“담에도 또 놀러 오세요.”

용건이 끝나 웃으며 돌아서는 유신의 등을 향해, 다른 녀석들이 대놓고 아쉬워하며 몇 번이고 커다랗게 인사를 했다.

“유신 오빠, 귀엽다. 너무 예뻐.”

“사람이 반짝반짝하지?”

“둘러싸고 있는 주변 공기부터가 완전 상쾌해.”

“오늘 봐서 운이 좋았어.”

그들만이 아니었다. 정작 유신에게 말도 걸지 못한 반의 다른 녀석들이 이제 와서 얼굴을 붉히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쨌든 유신은 유호에게는 어릴 때부터 하나밖에 없는 형이었다. 항상 의지가 됐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제일 멋진 형이었다.

애초에 유도도 형을 따라 시작했었다. 시작은 마침 집 근처에 태권도장보다 유도장이 가까이 있었고, 태권도장 개념으로 운동 삼아 유도를 시작한 유신을 따라 유호도 형이랑 같이 하고 싶다며 부모님을 졸랐던 것이다. 어느 순간, 유신만 쏙 빠져 발레로 바뀌어 있었을 뿐.

돌이켜 보면 애초부터 유신은 유도장과 나란히 있던 발레 학원이 목적이었던 듯했다. 지금은 유호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항상 뒤에서 올려다보던 커다란 등을 가진 형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야, 안 들었냐? 너희 형님께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라시잖아.”

“아, 몰라.”

대놓고 친구들을 툭툭 치고 지나가는 유호에게 친구 중 한 놈이 뭐라 했지만, 그는 되레 더 짜증부터 냈다. 욱하다 못해 성질을 못 이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받아 든 체육복은 대충 사물함에 던져두고, 유호는 보란 듯이 쿵쿵 걸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친구들도 그의 심기가 불편한 걸 깨달았다.

“유호 저 새끼, 왜 저러냐?”

“냅둬. 저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고 싶은데 못 자서 그런 거 아냐?”

그중 딱히 제대로 짚은 추측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대로 유호는 쿰쿰한 기운을 흩뿌리며, 책상에 엎어져 다시 잠을 청했다.

***

아침 연습이 쉰다고, 방과 후 연습까지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아침에 쉬어서 그런지 오히려 더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한껏 땀을 뺀 유호가 애매하게 늦은 시간에 하교하는데, 교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호, 잠시 시간 돼?”

의외의 얼굴을 발견하고 유호는 눈을 크게 떴다. 김민재였다.

같은 반이자, 우리 학년의 유일한 오메가.

키가 작아 시선이 유호보다 10cm는 더 아래에 있다. 딱히 모나게 못생긴 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별 두드러지는 부분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너무 단정하게 입고 있는 교복 쪽이 더 튀었다. 목 바로 아래까지 완전히 잠근 셔츠 단추와, 바짝 끌어당겨 메고 있는 교복 타이까지. 가까이서 본 머리통은 의외로 그렇게 동그랗지는 않았다.

“밋밋하네.”

별생각 없이 툭 내뱉는 유호를 향해, 민재의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밋밋해서 미안하네!”

아니, 아무 특징 없다는 말은 취소다. 바로바로 바뀌는 저 표정은 마치 바락 화내는 말티즈 같다고, 유호는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애, 애초에 모든 오메가가 다 너희 형 같지는 않으니까! 난 그냥 열성이라서, 베타랑 거의 다를 바 없고.”

“아, 그래?”

“진짜! 자기가 좀 잘생겼다고.”

민재는 욱해서 쏘아붙이더니, 본인이 한 말에 본인이 당황해 삐걱댔다. 유호가 능글맞게 되물었다.

“내가 잘생겼어?”

“됐어!”

아, 얼굴 더 빨개졌다.

부릅뜬 눈은 이제 보니 은근히 눈꼬리가 길었다. 갑자기 화내는 건 말티즈 같더니,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은 마치 고양이 같았다. 엄청 예쁜 새끼 고양이 그런 거 말고, 길에 흔히 보이는 보통 고양이. 무엇보다도 눈을 흘기며 노려보는데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점에서 제일 그랬다.

이렇게 보니 또 그렇게까지 밋밋한 외모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그 사실에 대해 본인에게 이야기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상대가 당황하든 말든 유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꺼냈다. 민재가 곤란한 듯 다시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저러니까 눈꼬리 길게 찢어진 게 더 티가 났다.

“아니, 그냥. 유호 너 아침에 하는 거 보니까, 너희 형하고 친한 거 같아서.”

“아침에?”

유호는 저게 갑자기 무슨 헛소린가 했다가, 아침에 유신이 제게 체육복을 가져다줬던 일을 간신히 기억 한구석에서 끄집어냈다. 민재가 어딘가 필사적인 폼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나랑 너희 형 연결 좀 해 달라고.”

“왜?”

“왜긴, 학교에 둘밖에 없는 오메가잖아!”

이유를 몰라 하는 유호에게, 민재가 이제 와서 뭔 소리냐며 반박했다. 하지만 유호는 여전히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학교에 오메가가 전 학년 통틀어서, 너랑 우리 형밖에 없는 건 나도 아는데.”

“그러니까 친해지고 싶은 거지. 나는 부모님 중 어머니 쪽이 오메가기는 하지만, 친척 중에 다른 알파나 오메가도 거의 없어서 관련된 고민을 나눌 사람이 거의 없는걸.”

“그렇게 알파나 오메가를 원하면 그쪽 학교를 가지, 왜 베타 천지인 우리 학교에 왔는데?”

“나도 연줄 있으면 그런 쪽 학교엘 갔지. 정작 엄마는 속 편하게 그런 학교 가 봤자 별거 없다고, 넌 거의 베타 같은 열성이니 여기가 차라리 낫다 그러기나 하고.”

민재는 진심으로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 마른 뺨에 공기가 들어가 동그랗게 부푸니 뭔가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유호는 문득 또 형인가 싶어 못마땅해졌다.

사실 이렇게 유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굳이 본인도 아니고 동생인 유호를 찔러 온 사람은 민재가 처음이 아니었다.

유호로서는 본인에게 말하면 될 걸 굳이 둘러서 부탁하는 심리가 전혀 이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신을 보고 있으면 아주 어렴풋이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싶을 때도 있었다. 워낙에 현실에 발끝만 갖다 댄 듯한 사람이었다.

물론 모르는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 의리도 의무도 없었기에, 항상 들은 척도 않고 무시해 왔다.

하지만 그중 오메가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제 주변 오메가라고 해 봤자, 형과 이 녀석 정도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훤히 들여다보이는 흑심보다도, 동경과 찬사가 뒤섞인 저 분위기가 유호는 더 못마땅했다. 자신을 빤히 앞에 두고서 형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역시나 거슬렸다.

“싫어.”

유호의 단답에 민재는 세상 다 무너졌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왜?”

“무엇보다 네 이야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는데.”

“오류? 두 가지?”

무슨 소리냐고 고개를 갸웃하는 민재를 향해 유호는 두 손가락을 들었다가, 그중 하나를 접어 보였다.

“첫째로, 일단 나는 우리 형하고 안 친하고.”

그 한마디에 민재의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말끔하지만 심심한 얼굴이 실망으로 찌푸려지자, 유호는 괜히 즐거워졌다.

“형하고 안 친하다고? 그런데 아침에 체육복을 가져다줘?”

“그냥 엄마가 부탁한 거지. 뭣보다 정말 친했으면 말도 없이 바로 교실로 갖다주기보다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내가 받으러 중간까지 나갔을걸?”

“것도 그런가?”

뭔가 설득당한 듯 민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호는 나머지 한 손가락도 마저 접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에 하나 내가 형하고 친하다 하더라도, 내가 네 편의를 봐줄 이유가 있나?”

사실 열성이라는 이 오메가가 왜 제 형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지, 유호도 그 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우성 오메가 형을 가족으로 둔 탓에, 유신이 발현한 이후로 몇 년 동안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들을 보고 여러 상황에 마주쳐 온 자신이었다.

주변에서 유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제 유호도 대충은 알았다. 그저 유호가 보기에는 다 쓸데없을 뿐이었다. 애초에 다들 추켜세우느라 바빠서 정작 당사자는 어떤 생각인지 무슨 문제를 껴안고 있는지 전혀 볼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다 거절하는 이유는 그런 형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꼴랑 그렇게 대단찮은 형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었던 탓이다. 그런 일로 엮여서 자신이 귀찮아지는 게 짜증 나서는 더 컸고 그건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너! 나한테 너희 형 소개해 주기 싫다고 거짓말하지 마.”

하지만 민재는 유호의 그런 의도를 확실히 반대로 읽은 듯했다. 아까 밋밋하다고 놀릴 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화가 나 새빨개지는 얼굴을, 유호는 역시나 이쪽이 안 심심해서 더 재밌다고 생각해 버렸다.

“진짜거든.”

유호의 대답에는 조금도 거짓은 없었다. 형과 안 친하다는 것도, 네 말대로 할 의지가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일부러 뻔뻔하게 능청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민재는 뭘 또 오해했는지 혼자 못 견디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동동 발을 굴러 유호를 다시 즐겁게 했다.

“와, 저 잘난 척하는 것 좀 봐. 자기는 키 크고, 외모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인정받는다 이거지.”

뒷부분은 딱히 상대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 분을 참지 못해서 혼자 웅얼웅얼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면 아까도 잘생겼다고 그랬던가?

유호는 자신이 키가 작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딱히 못났다고도 생각한 적 없었다. 주변에서 뭐라 하는 걸 듣다 보니, 대충 나쁘지 않구나 싶기는 했다.

비슷하게 생겨서 워낙에 반짝반짝하는 인간과 계속 같은 집에 살다 보니,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평가가 박했다. 하지만 칭찬을 듣고 기분 나쁠 건 없다.

“그럼 난 간다.”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휙 몸을 돌리는 유호를 향해, 민재가 발끈해 소리쳤다.

“뭐, 간다고? 나 아직 이야기 안 끝났거든.”

하지만 유호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만하게 대꾸했다.

“네가 아까 잠시 시간 되냐고 해서, 잠시 시간 내 줬으니 됐잖아.”

“아, 씨! 이유호.”

뒤에서 민재가 다시 바락바락 화를 내는 기척이 솔직히 즐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배고프다. 빨리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야지.

유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

중간에 민재와 마주치는 바람에 예정보다 좀 늦긴 했지만, 덕분에 꽤나 즐거웠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뭘까? 현관문을 열 때만 해도 유호는 기분이 좋았다.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집이 휑했다. 거실 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유신이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방이나 부엌 쪽은 죄다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가족들은 집에 없는 듯했다.

“어, 왔어?”

유신이 유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에 고개를 고정한 채 건성으로 인사했다.

뭘 보고 있나 했더니, 그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러시아 발레리노의 영상이었다. 보아하니 텔레비전에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를 연결한 듯했다.

이름이 니콜라이 뭐시기던가? 러시아 사람답게 엄청 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키가 크고 밝은 금발에 하얀 피부를 한, 눈에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무슨 토크 쇼인지, 여기서는 타이츠와 토슈즈가 아니라 양복 차림이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긴 팔다리와 넓은 어깨, 꽉 조인 허리에 고급스러운 맞춤 양복이 잘 어울렸다.

금발에 빨간 투피스 차림의 진행자와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웃긴 건 자막도 없이 그 러시아어를 다 알아듣고,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 웃고 있는 형 쪽이었다.

“형 혼자야?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는 퇴근 늦으신다고 하고, 엄마는 급하게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어.”

그 태평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유호는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까 형만 찾던 민재 녀석은 형이 집에서 저러는 걸 절대 모르겠지.

뭔가 짜증이 나서 유호는 텔레비전 바로 앞에 섰다. 유신이 답답해했다.

“화면 가리지 마. 니카가 안 보이잖아. 여기서부터 제일 재밌는 부분인데.”

“뭘 난리야. 어차피 열 번도 더 봤을 거면서.”

사실이긴 했는지, 유신은 리모컨을 조작해 화면 정지를 했다.

“너 배고프구나? 엄마가 식사 준비는 해 놓고 가셨으니까, 이제 먹을까?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생각보다 늦어서 슬슬 어머니 오실 때 된 거 같기도 한데.”

솔직히 유호는 어머니도 없이 형과 둘이 먹을 바에야 혼자 먹는 쪽이 훨씬 나았다. 유신도 그런 제 마음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래도 동생이니까 나름 좋은 뜻으로 배고픈 것을 참고 기다린 거였다. 물론 유호가 보기엔 전혀 쓸데없는 배려였다.

“쓸데없어. 그냥 먼저 먹지.”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엄마도 우리가 같이 먹는 걸 더 좋아하실 거야. 국만 데우면 되니까, 어서 씻고 나와.”

“그럼 형은?”

형은 나랑 같이 먹고 싶어? 어머니와 상관없이, 그저 본인의 마음만 딱 봤을 때, 나랑 같이 먹는 거 좋아?

유신이 질문의 속뜻을 눈치챘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소파에서 일어나 유호의 앞을 크게 가로질렀다.

“내일 저녁은 다 같이 외식하는 거 알지? 아버지 일부러 시간 내셨으니까 빠지면 안 돼. 나도 내일은 발레 연습하고 늦으니까, 학교 앞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

저도 모르게 유호가 인상을 썼다.

“그거 내일이야? 원래라면 훨씬 뒤잖아.”

“맞아. 원래라면 날짜가 좀 남았는데, 내 콩쿠르 때문에 당겼어. 본격적으로 콩쿠르 준비 들어가면 한동안 보기 힘들 테니까.”

“또 해외 콩쿠르 가나 봐?”

“으응, 어디냐면.”

유호는 비꼴 생각이었는데, 유신이 눈치도 못 채고 해맑게 알려 주려 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 유호가 그 말을 잘랐다.

“뭐, 어디 유럽 쪽 고상한 도시겠지.”

이쯤 되면 아무리 유신이 혼자 좋게 넘어가려 해도 쉽지 않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형을 향해 유호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유학 가는 거지? 내년에.”

“아무래도 그렇지. 진아 선생님도 계속 추천하시고. 한국에서 계속 발레 할 거라도 한 번 정도 해외 경험 쌓고 오는 쪽이 훨씬 유리하니까.”

가면 돌아올 생각은 있어? 실은 그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은 핑계를 찾는 거 아니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의문을 유호는 속으로 꿀꺽 삼켰다. 소리 내 말했다가는 진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생의 반응을 유신이 멋대로 좋게 해석했다.

“너 실은 형이 유학 가서 섭섭했구나. 그런 거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근데 알고 보면 너도 금방 선수촌 들어가는 거 아냐? 부모님 두 분만 이 집에 계시면 적적하시겠다.”

봐, 지금도 끝까지 자신이 돌아온다고는 말하지 않잖아?

하지만 유호가 그에 대해 언급할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어머 얘들아! 거기 서서 둘이 뭐 하니? 세상에 아직 둘 다 밥도 안 먹었고!”

마침 어머니가 돌아온 거였다. 그녀는 아직 밥 먹은 기척이 없는 부엌을 보자마자 아들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직 둘이 밥을 안 먹은 이유 따위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는 어머니의 태도가 유호는 괜히 맥이 풀렸다. 웃으며 그녀에게 듣기 좋은, 입에 발린 말만 하는 형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유호가 굳이 둘의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해 봤자 유치해 보이기만 할 것이다.

유호는 아침에 유신이 제 교실에 들렀을 때부터,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던 불쾌감이 자신의 안에서 점점 더 부피를 더하는 것을 느꼈다.

***

“너, 오늘은 나랑 제대로 이야기 좀 해.”

유호가 방과 후 연습을 끝내고 교문을 나서는데, 오늘도 민재가 불러 세웠다.

마침 유호는 캔 콜라를 마시던 중이었다. 부실에서 굴러다니던 걸 얻어 와서 영 미지근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가족 외식에 갈 생각을 하니, 속이 타서 이거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벌써 거의 다 마시고 캔 바닥에 조금 남은 정도였다. 주변에 마땅한 쓰레기통이 없어, 부실에서 다 마시고 버리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다시 나타날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 했다. 어제 충분히 질리게 만든 줄 알았는데.

“나는 할 이야기가 없는데.”

“아이, 참. 너무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고. 진짜 형을 얼마나 좋아하면 그렇게 비싸게 구는 거야?”

“비싸게?”

자신이 형을 좋아해서 비싸게 굴다니, 영문을 알 수 없는 표현에 유호는 얼빠지게 되물었다. 정작 민재는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너희 형하고 인사만 하게 해 주면 돼, 인사만.”

“인사 정도야 그냥 가서 하면 되잖아. 같은 학교 후배 인사를 안 받아 줄 성격도 아니고.”

“그건 알지만, 그러니까 더 그렇지. 너희 형한테 그럴 후배가 한둘이야? 난 그냥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인상을 남기고 싶단 말야. 동생인 너라도 끼고 가야 그나마 기억에 남아서 나중에 알은체라도 하지.”

말하면서 흥분했는지 민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유호는 순간 그 기세에 밀려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반대였다.

“나 끼고 간다고 해서, 뭐 달라질 줄 알아.”

쓱 고개만 돌려 입 속으로 웅얼거리는 유호에게, 민재가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쓸데없는 기대 말고 그냥 집에나 가라고.”

유호는 고개를 저으며, 민재를 쓱 밀어 냈다. 물론 이런 태도는 더 역효과일 뿐이었다. 작은 체구만큼 힘이 없어 미는 대로 팔랑팔랑 밀려가면서도, 민재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진짜 너무하네! 같은 반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나 같으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겠다.”

분명 유호는 사실을 있는 대로 이야기하는 건데, 민재는 그가 연결해 주기 싫어서 둘러대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첨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더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그런 민재의 태도가 짜증 나면서도, 유호는 칼같이 끊어 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저 같은 반이기 때문일까? 자기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여서 괜히 신경 쓰이는지도 모른다.

“너랑 내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에이,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그리고 대체 우리 형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우성 오메가인 건 맞지만, 정작 형도 격세 유전으로 발현한 거라, 정보 면에서는 딱히 큰 도움은 안 되지 않나?”

유호는 접근법을 바꿔 보았다. 의외로 답은 금방 돌아왔고, 또 열렬했다.

“아니, 도움 돼!”

“같은 오메가끼리라서 그렇다고? 겨우 그거 때문에?”

“왜, 그러면 안 돼?”

여태껏 바락 화를 낼 때도 민재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듯 대답한 적은 없었다. 필사적인 그 태도가 베타인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아 유호는 못마땅했다.

“아니, 안 된다기보다.”

사실 유신이 오메가가 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놀랍고 당황스러운 감정과 별개로, 유호는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기대했다.

형이 오메가가 됐다는 것은 자신들의 선조 어디엔가 알파나 오메가가 존재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자신도 알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물론 헛된 기대였다. 아직 완전히 포기할 만한 나이는 아니라지만, 슬슬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결국 자신은 열 명 중 한 명의 특별한 인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형이나, 지금 눈앞의 저 녀석과 반대로.

교과서나 뉴스에서는 알파나 오메가가 베타보다 우월하다는 생물학적 증거는 없다고 항상 강조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알파와 오메가가 메인으로 등장하곤 할까?

물론 그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고 하고, 민재는 자신이 그중 가장 하위라고 제 입으로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아예 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왜, 왜 그렇게 골똘히 봐?”

빤히 쳐다보는 유호의 시선에 왜인지 민재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아니, 다시 봐도 진짜 밋밋하다 싶어서. 외모만 보면 오메가라고 생각도 못 하겠는걸.”

이어지는 유호의 대답에 더 빨개진 건 덤이다.

물론 이번에 화가 나서다. 어제와 똑같은 패턴이라는 사실을 당사자만 깨닫지 못한 듯했다.

사실 유호는 이제 민재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밋밋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눈이 자세히 보면 눈꼬리가 은근히 길다는 것도 알고, 작은 코가 코끝이 살짝 들려 귀여운 것도, 다물고 있으면 작아 보이는 입이 이야기할 때면 은근히 커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냥 이 반응이 재밌는 거다.

“씨, 진짜 예의 밥 말아 먹었어!”

짜증이 난 민재가 유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유호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몸을 뒤로 뺐지만, 의외로 민재의 팔이 길었는지 그 손에 유호가 들고 있던 콜라 캔이 부딪혔다.

공교롭게도 캔에는 아직 한 모금 정도의 미지근한 콜라가 남아 있었다. 거의 뒤집힌 캔에서 튀어나온 콜라가 민재의 교복 타이와 흰 셔츠로 튀었다.

“윽, 어떡해.”

“미안.”

생각보다 선명한 얼룩에 당사자인 민재보다 유호가 더 어쩔 줄 모를 때였다.

“유호야!”

마침 딱 유신이 나타났다.

안 그래도 가족 회식 때문에 오늘 각자 연습 끝나고 학교 앞에서 보자고는 했었다. 슬슬 올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기다렸어? 마침 나와 있었구나. 어제 그래서 엇갈릴까 봐 걱정했는데. 아, 친구야?”

유신은 당연히 유호의 그런 고민 따위 전혀 몰랐다. 곁에 선 민재를 발견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유호랑 같은 반 친구인 김민재입니다.”

민재가 한껏 기합이 들어간 태도로 예의 바르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보였다.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이 의외로 꽤 똘똘했다.

“민재구나. 난 유호네 형인 이유신이야.”

“넵, 선배님. 알고 있습니다.”

“형이라 불러. 친구 형인데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민재야.”

유신은 처음 보는 후배를 향해서도 언제나와 같은 꽃 날리는 미소를 보냈다. 마지막에 이름을 불러 주자 민재가 수줍게 좋아했다.

유호는 민재는 친구 같은 거 아니라고 깐죽대고 싶었지만, 대놓고 기뻐하는 상기된 그 얼굴을 보니 왠지 그러질 못했다.

그래도 민재가 대놓고 형을 향해 눈을 빛내는 걸 보자니 괜히 짜증 났다. 뭐, 인사만 시켜 달라고 했으니 목적은 이뤘단 건가.

“물티슈 줄까?”

콜라에 젖은 민재의 셔츠를 보고 유신이 묻자, 민재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와, 형님께선 물티슈도 들고 다니시나 봐요. 준비성 있으셔.”

“아냐, 지나가다 전단지를 받았는데 거기 붙어 있었어. 마침 잘됐다.”

“넵, 감사합니다.”

민재는 유신이 건네는 물티슈를 정중하게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하지만 몇 번 문지르기도 전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유신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셔츠 얼룩이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선배님, 아니, 형님! 사실 저도 오메가거든요.”

“아, 네가 1학년에 있다는 오메가로구나.”

“네, 맞아요. 아시네요!”

그대로 유호의 앞에서 둘이 살랑살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다 자신과 대화할 때보다 훨씬 느긋하고 안정감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유신이야 항상 느긋하고 여유로운데, 그 영향인지 민재까지 그렇게 보이는 거였다.

묘한 소외감에 유호는 아랫배 깊은 곳부터 치밀어 오르는 초조함을 느꼈다. 저는 없어도 된다는, 없는 쪽이 오히려 더 나은 것 같은 분위기가 왠지 불쾌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말도 안 하고 몸을 돌려 훅 앞으로 나선 뒤였다.

“유호야, 같이 가야지.”

뒤에서 급히 유신이 쫓아왔다. 유호는 대답 없이, 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유신이 다시 물었다.

“반 친구한테 그게 뭐야? 그러지 마.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친구 아니거든.”

“왜 갑자기 짜증이야?”

의아하다는 형의 반응이 유호에게는 더 거슬렸다.

“아, 몰라.”

자신과 그들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 듯한 이 불쾌감의 정체를, 유호는 아직 정면으로 볼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제 감정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알지 못했다. 아직, 그 정도로 분명하지 않기도 했다.

***

주가 바뀌고, 본격적으로 해외 콩쿠르 준비에 들어가며 유호보다 유신의 귀가가 더 늦어지기 시작했다. 유호 또한 다시 아침 연습을 시작하며,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몇 달 지내다 보면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것이고, 유학을 가고, 돌아오거나, 아마도 높은 확률로 돌아오지 않거나 할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부모님은 여전히 형에 대해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 집에서는 무엇도 변하지 않은 채, 자신도 그냥 그렇게 있을 것이다.

사실은 가족 모두 다 너무도 신경 쓰여 숨이 막힐 것 같은 주제에, 굳이 신경 쓰지 않는 체, 잘 지내고 태연한 척을 하면서.

그 와중에 유호는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민재와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민재의 핑계는 유신과 친해질 기회를 잡고 싶다는 거였다.

하교 시간이 서로 달라서 중간에 공부하고 일부러 돌아오는 듯했다. 정확히 어쩌는지는 분명치 않았는데, 아마도 독서실에 다녀오는 게 아닐까 유호는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번잡하다고 유호는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지적했다가 괜히 민재가 안 올까 싶은 마음에, 일부러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느새 은근히 민재가 오기를 기다리게 된 그였다.

“너희 형 항이 되게 좋더라!”

유신과 만난 뒤, 민재는 뜬금없이 유신의 향기에 대해 감탄했다.

처음 유호는 그게 무슨 소린가, 샴푸나 바디 클린저 냄새를 말하나 생각했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샴푸와 바디 클린저를 쓰는 만큼, 제게서 나는 냄새를 에둘러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조금 수줍기도 했다. 하지만 곧 페로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신 형이 무슨 향인지 알려 줄까?”

민재는 유호에게 유신의 페로몬이 무슨 향기가 나는지 말해 주고 싶어 했다.

“아니, 완전 필요 없어. 절대 몰라도 돼.”

물론 유호는 바로 기겁했다. 친형의 페로몬 따위 조금도 관심 없었다.

“네 향이면 몰라도.”

“응, 내 향?”

하지만 민재의 페로몬 향에 대해서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라고, 적어도 당시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알려 주기 싫으면 안 알려 줘도 돼.”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알려 줄게.”

민재도 별거 아니라며 쉽게 대답했다.

“내 페로몬은 바닐라 향이야.”

우연찮게 그때 둘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이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 해도 대부분 우유 향이고, 솔직히 유호는 거기서 우유와 바닐라를 구별해 낼 자신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딱히 바닐라 향을 구별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것도 벌써 며칠이나 전의 일이었다.

“네가 혼자 늦게 집에 가니까. 친구 없이 심심할까 봐, 내가 같이 가 주는 거야.”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민재에게 유호가 어이없어했다. 키도 덩치도 저에 비하면 한참 쪼그만 게, 자신이 뭐 대단한 거나 된 것처럼 저래서 새삼 웃겼다.

“그러면서 우리 형한테서 점수 따려는 거 아니고?”

“에이, 물론 그런 맘 전혀 없지는 않지.”

“그럼 완전 헛짚었네. 형은 요새 해외 콩쿠르 때문에 바빠서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거든. 그날 우연히 마주친 게 완전 특이한 상황이었다고.”

“와, 그럼 내가 그날 만났던 게 진짜 운이 좋았구나!”

실망시키려던 유호의 의도와 반대로, 민재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아, 뭔가 반박하기도 귀찮아진다.

“그래, 그래. 좋을 대로 생각해.”

성큼성큼 앞서 걷는 유호를, 민재가 쪼르르 뒤쫓아 왔다. 딱히 의도했다기보다 다리 길이가 다르다 보니 보폭 차이가 커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까웠다. 유호도 막 혼자 먼저 가기보다 반 블록 정도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왜, 이유호? 다시 봐도 내 얼굴이 그렇게 밋밋해?”

“뭐, 그렇지.”

기다리다 눈이 마주치면, 이젠 웃으며 이런 농담도 지껄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어쩔 수 없잖아. 모든 오메가가 다 니네 형 같지는 않다니까.”

민재가 유호를 스쳐 지나가며 눈을 흘겼다. 유호가 바로 그를 따라잡았다.

“우리 형이 그렇게 특이한가?”

“그렇긴 할걸.”

“할걸?”

“나도 알파나 오메가를 그렇게 많이 만나 본 건 아니라서 잘 몰라. 우리 엄마가 오메가긴 한데, 나처럼 거의 베타 같은 열성 오메가라서, 거의 베타의 인생을 살고 있거든. 나도 뭐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을까?”

“진짜 웃겨. 거의 베타의 인생은 또 뭐야?”

“우리 엄마는 여자 열성 오메가인데, 베타 남자인 아빠랑 결혼했거든. 아마 나도 나중에 베타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까 싶은 거지.”

유호가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여자랑 결혼한다고?”

“그지, 아무래도 알파랑 잘되긴 힘들 거 같으니까. 앞으로 결혼을 꼭 할지 아닐지도 아직은 모르는 거지만. 응? 뭘 그렇게 놀라?”

정작 민재는 왜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문득 유호는 보건 수업 때 배운 내용을 기억해 냈다.

자신과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잊고 있었는데, 형질과 성별은 별도였다. 오메가도 남성이면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냥 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 안 해 봐서.”

수업 시간에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달릴 게 달렸으니 못 그럴 이유도 없겠다고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넘겼었다. 하지만 정작 민재가 그런다니까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뭐, 유도 국가 대표 유망주인 유호 네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민재가 제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이해해, 유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여자와 그런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기분이 이상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 일부러 유호는 화제를 돌렸다.

“혹시 우리 형도 베타 여자를 데려올 수도 있으려나?”

“유신 형은 나 같은 열성 오메가랑은 다르지. 아무래도 알파랑 맺어지지 않을까?”

의도가 불순한 것치고는 반쯤 희망 사항이 섞여 있었지만, 민재는 유호의 속을 모르면서도 단칼에 부정했다. 자신은 여자랑 결혼할 거라면서, 유신에 대해서는 당연하다는 듯 저렇게 단정하는 게 좀 웃기긴 했다.

“왜? 유신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뭐, 우리 형? 없어, 없어. 그 사람은 애초에 주변에 관심이랄 게 없는걸.”

“그래?”

유호는 대놓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거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 금발의 잘생긴 러시아 남자가 나오는 영상을 보며 시시덕거리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굳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무슨 니콜라이 어쩌고 하는 러시아 발레리노 정도? 팬이라면서 시간만 나면 거실 티비로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해서 보는데 아주 거슬려. 전에는 콩쿠르에서 실물 봤다고 얼마나 흥분을 하던지.”

“와, 역시 유신 형은 발레 말고는 관심 없구나. 그 분야면 그 사람도 오메가야?”

“아니, 알파라던데.”

유호의 한마디에 민재의 눈이 빛났다.

“어쩌면 그 사람하고 잘될 수도 있겠다! 서로 관심사도 비슷할 테고.”

“설마.”

말도 안 된다며 유호는 고개부터 저었지만, 문득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쓸데없이 꽃 날리는 유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 금발 러시아인의 과도하게 조각 같은 얼굴을 기억에서 끄집어낸 다음,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이게 또 은근 어울리는 거다.

말도 안 돼. 방금 전과는 좀 다른 의미로 유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맞다, 유호야. 어제 문득 깨달았는데, 나 네 번호가 없더라. SNS 계정도 몰라.”

마침 민재가 해맑게 물어 왔다. 유호도 그제야 자신들이 아직 서로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SNS 주소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안 하니까.”

“안 해? 이미지는 팔로워 완전 많을 것 같은데.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온다 했더니 안 하는 거였구나.”

“없어. 안 해. 전화기나 줘 봐. 핸드폰 번호 찍어 줄게.”

“좋아!”

혹시 마음이 바뀔까 걱정했는지 민재는 바로 핸드폰을 내밀고는, 유호가 전화번호를 찍어 건네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호는 제 핸드폰에서 짧게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너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면 돼, 유호야.”

“네에, 네에.”

묘하게 의기양양한 민재를 앞에 두고, 유호는 속으로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유호가 제 방에서 게임을 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깐 들어가도 되지?”

유신이었다. 뭘 하다 왔는지 손에는 서류로 보이는 한 뭉치의 A4 용지가 들려 있었다.

“뭐야?”

“엄마가 네 방에 있을 거라고 그러잖아.”

그는 유호의 눈앞에서 책장을 살피더니, 중간에서 얇은 책 하나를 빼냈다. 유럽에 대한 여행 에세이였다.

유호가 절대 살 리 없는 종류의 책으로 당연히 유신이 책의 주인이었다. 제 물건이 아닌 표지를 확인하고, 유호가 눈을 찌푸렸다.

“그 책이 왜 거기 꽂혀 있어?”

“정리하면서 엄마가 헷갈렸나 봐. 내가 찾아봐도 안 보여서 물어봤더니, 여기 꽂은 거 같다 그러시더라고.”

“아, 그래.”

자기 책이면 잘 챙기지, 유호는 괜히 입을 삐죽였다. 자신이 먼저 발견해서 돌려줬으면 됐을 걸, 본인부터 제 책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른 척이었다.

“이번에 유럽에서 열리는 콩쿠르 때문에 왠지 한 번 더 읽어 두고 싶어져서. 출발하려면 좀 남았지만 말야.”

유신이 애매하게 웃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막 들어와 씻었는지 아직 젖어 있었다.

그 축축한 머리를 보니, 유호는 괜히 오메가의 페로몬이 어쩌고저쩌고하던 것이 신경 쓰였다. 물론 민재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유신의 페로몬이 어떤 향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은데도 괜히 의식하게 된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자신은 앞으로도 평생 자력으로는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했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민재의 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집에 왔나 봐?”

“아무래도 콩쿠르 준비하다 보면 늦어지니까. 너도 대회 직전엔 비슷하잖아.”

“형처럼 국제적인 사람하고 같나.”

유호는 일부러 모나게 대꾸했지만, 유신은 걸려들지 않았다. 대신 모르는 척 말을 돌렸을 뿐이다.

“나는 책 찾았으니 이만 간다. 방해해서 미안.”

늘 그렇듯 유신이 항상 여유 만만한 것이 유호는 새삼 거슬렸다. 아마 이렇게 방을 나가면 당분간은 또 이야기할 일도 없을 터였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 보는 자체가 그때 가족 외식 이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아니, 그날도 정확히는 옆에 민재가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는 있었지만, 애초에 서로에게 대화할 의지가 없어서 그런 것을 둘 다 모르지 않았다. 바쁘지 않았어도 꼭 필요하지 않으면 서로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처럼 어머니가 잘못 정리한 책을 가지러 오는 정도의 볼일조차, 평소의 둘 사이에는 없다는 의미였다.

“잠깐만.”

나가려는 유신을 유호가 불러 세웠다.

“유호야, 왜?”

자신과 제법 닮았으면서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데가 있는 얼굴이었다.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유호는 왜 그렇게 민재가 형에 대해 목을 매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확실히 같은 오메가라도 주변 분위기에 쉬이 묻혀 버리는 민재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물론 이목구비 자체도 이쪽이 더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그냥 뭔가 그랬다.

“아니, 콩쿠르에 신경 많이 쓰는 거 같아서.”

“싱겁긴. 아무래도 국제 콩쿠르니까, 입상이라도 하면 유학 가서도 유리하게 적용될 거고.”

“역시 유학 가긴 할 건가 봐? 내년에?”

“아무래도 그렇지. 전에 말했었나? 진아 선생님도 계속 추천하시고, 한국에서 계속 발레 하더라도 아무래도 해외 경험 있는 쪽이 유리하니까.”

“하, 돌아올 생각이 있긴 해?”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고 유호는 조금 후회했다. 계속 거슬리던 내용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이렇게 물어볼 내용은 아니었다. 말한 자신이 더 볼품없어지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더더욱 짜증 나는 점은 유신에게서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실은 가장 돌아오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듯이.

그런 만큼 유호는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더 말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형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마음에, 혼자서 도망치는 거 아니냐고?”

대답 대신 유신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책은 간신히 떨어트리지 않았지만, 외국어가 적힌 하얀 A4 용지가 온 방으로 팔랑팔랑 흩어졌다.

“오해야. 안 그래.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한 박자 늦게 유신이 더듬더듬 대답했지만, 종이를 줍는 손이 대놓고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유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정확히는 상대방이 저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형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놓고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애초에 자신의 한두 마디 정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 있게 넘기는 사람 아니었냐고.

“칫!”

무언가 견딜 수가 없어, 유호는 그대로 형에게서 몸을 돌려 제 방에서 뛰쳐나왔다. 상황도 모르고 어머니가 그를 반겼다.

“유호야, 배고프니? 곧 아빠 오실 텐데 우리 야식 먹을까? 아니, 얘? 어디 가니?”

하지만 유호는 못 들은 척 그녀를 지나쳤다.

마침 아버지가 현관문을 여는 중이었다. 등에는 골프 백을 메고, 라운딩 끝나고 술이라도 한잔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마냥 속 편해 보였다.

“오, 유호야. 아빠 마중 나온 거냐?”

“운동 좀 하고 올게요.”

“응? 응? 이 시간에?”

대충 둘러대며 유호는 어머니처럼 아버지도 스쳐 지나갔다.

분명 어머니의 저런 태도도, 아버지의 저런 모습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사이좋은 가족으로밖에 안 보일 거라는 사실이 제일 화가 났다. 겉으로는 적당히 사이좋고, 마냥 평화롭게 보일 것이다. 그런 부분이 더더욱 유호를 가만있을 수 없게 했다.

“아, 씨.”

하지만 사춘기 감성에 젖어 집을 나오자마자, 유호는 바로 후회했다. 결과적으로 자신만 춥고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이 성질머리부터 고쳐야지. 쌀쌀한 날씨에 부르르 몸을 떨며, 유호는 가슴 앞에서 팔을 교차해 팔짱을 꼈다. 안 그런 척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니 좀 나았다.

뭣보다 지갑도 없이 핸드폰만 달랑 가지고 나온 것이다. 핸드폰으로 뭘 사 먹을 방법이 있으려나. 저녁은 진작 먹었지만, 나오면서 야식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괜히 출출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놀이터였다. 아버지한테야 운동할 거라고 했지만, 물론 대충 둘러댄 거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커다란 덩치에 걸맞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두운 놀이터에서 여태껏 놀고 있던 초딩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초딩들의 부모가 고마워할 일이다.

유호는 시소와 그네 중 잠시 고민하다가 그네에 앉기로 했다.

이제야 자신이 괴로웠던 만큼 형도 괴로웠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자신이 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지만 새로운 메시지는 몇 개 있었다. 아까 게임하던 친구놈들한테는 오늘은 사정상 그만할 거라고 대충 연락을 보내는데, 그 중간에 다른 이름이 하나 있었다.

유호는 잠시 핸드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제 제게 연락하면 되겠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전화번호를 가져갔던 녀석은, 이후로 별다른 일이 없어도 매일 한두 번은 꼬박꼬박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잠시 망설이다, 유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엉덩이 안 껴?”

민재는 놀이터에 들어서자마자 그네에 앉은 유호부터 비웃었다. 눈으로 보니 도저히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유호도 딱히 그 부분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작아.”

“와, 이거 사용 제한도 있어. 50킬로 이상은 타면 안 된다는데? 나이 제한도 있다. 만 15세? 난 아직 생일 안 지나서 이건 아슬아슬 괜찮겠다.”

민재는 그네 옆에 붙은 사용 설명서를 보고 키득댔다. 그대로 제 옆의 빈 그네에 앉는 그를 보고 유호가 입을 삐죽였다.

“너도 어차피 앉을 거면서.”

“난 아슬아슬 괜찮다니까.”

“네에, 네에.”

유호는 자신보다 10cm는 작고 깡마른 민재를 훑어보고, 알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몇 번 그네를 앞뒤로 가볍게 움직였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응?”

“이 시간에 여기 온 데에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갑자기 허를 찔려 유호는 민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민재도 그네를 멈추고 있었다.

어느새 유호는 눈앞에 있는 이 얼굴의 세세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자른 검은 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외꺼풀의 눈은 눈꼬리가 살짝 들려서 고양이 같다. 잘못 뜨고 있으면 인상 사나워 보이지만, 웃으면 조금 귀엽다. 코끝이 살짝 위로 들린 작고 귀여운 코, 동그란 턱에 앙다문 입술까지.

방금까지 화내고 있다가도, 금방 표정이 바뀌어서 웃고 있거나 한다. 어느 때는 강아지 같았다가, 어느 때는 고양이 같고 그렇다. 특히나 기분 좋을 때면 그야말로 고롱고롱 우는 고양이였다.

“그냥, 집에 있기 싫을 때 있잖아.”

유호는 적당히 둘러대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가 신경 쓰였다. 마음속까지 다 읽히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가족들과 뭔가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다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지. 그럴 때가 있지.”

하지만 민재는 별다른 말을 얹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유호는 괜히 쑥스러워서 변명처럼 덧붙였다.

“사실 우리 집 정도면 밖에서 보면 정말 평범하고 사이좋은 가족이거든.”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어째선지 민재가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

“응, 뭐가?”

“유호 네가 형하고 사이 별로 안 좋다고 한 거, 나부터도 안 믿어 줬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묘하게 이해받는 기분에 유호는 괜히 기뻤다.

“뭐, 너만 그런 것도 아니고. 괜찮아.”

둘 다 여전히 나란히 그네에 앉은 채였다. 서로의 시선이 가만히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유호야, 평범하다는 건 뭘까?”

“글쎄, 그냥 모난 데 없이 무난한 거? 평범하게 대학 가서, 취직하고, 중간에 연애도 하고, 나중에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도 하고.”

뜬금없는 민재의 질문에 유호는 나름 성심껏 상상해 대답했다. 하지만 민재는 그 대답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넌 어차피 운동으로 대학 가서 국가 대표 되는 게 목표잖아?”

“그건 그런데. 내 말은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거 알아? 알 만한 대학에 가려면 성적만으로 상위 10프로 안에 들어야 한다? 근데 그렇다고 다 좋은 데 취직하고 잘사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따지면 상위 10프로의 삶도 어차피 별거 없다는 거지. 뭐, 넌 운동하니까 다를 순 있겠지만. 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좋겠다.”

민재의 느슨하게 기울어진 고개는 긴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호가 대답을 위해서라는 듯 슬그머니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 민재에게 좀 더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며, 유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중얼댔다.

“그것도 잘해야지. 경쟁도 얼마나 치열한데.”

“맞다. 그쪽도 그쪽대로 힘들겠지. 내가 보기엔 공부 말고 다른 걸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이는데 거기서도 또 경쟁하니까. 진짜, 크면 클수록 평범하게 행복한 게 제일 힘든 거 같…… ?”

그리고 민재는 유호의 얼굴이 제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유호는 거기서 눈을 감았기 때문에 정작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때 민재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애초에 형이 오메가인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는데, 그런 형과 싸우고 나서 같은 오메가인 민재를 불러낸 시점에서 이미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거나 다름없는지도 몰랐다. 울컥 짜증 나고, 곤란하고, 신경 쓰이고, 그래도 사랑스러운.

마지막 단어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눈앞의 이 녀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지, 지금 뭐 한 거야?!”

유호가 다시 그네에 바로 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민재가 한껏 당황해 물었다. 유호는 뻔뻔하게 아닌 척을 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했잖아! 멋대로 남의 첫 키스를 가져가 놓고.”

“나도 첫 키스니까 좀 봐줘.”

민재의 얼굴이 여태까지 봤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새빨개졌다. 그대로 익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와, 이유호. 좀 잘생겼다고 진짜 막 나가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거 입버릇이야? 아니면 내가 정말 그렇게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너도 거울 보면 알 거 아냐?”

“그래 봤자 그건 내 감상이지. 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자랑이야, 뭐야? 아주 잘생기셨습니다. 됐냐?”

벅벅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민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호가 긴 다리로 빠르게 그 뒤를 쫓아갔다.

“김민재, 늦었으니까 집까지 내가 바래다줄게.”

“왜?!”

“나 때문에 나왔잖아.”

민재는 딱히 납득한 기색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밀어내지도 않았다. 슬쩍 그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유호는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나 지갑 안 들고 나와서 그런데, 대신이라면 뭐하지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 주라.”

이 상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제안에 민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지만, 다음 순간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 없으니까 싼 거 먹어.”

“걱정 마. 원 플러스 원으로 고를게.”

물론 그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바닐라 맛일 것이다.

- 형과 나와 내 반 친구, 끝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