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니스에서의 일주일 (20/22)

외전 1: 니스에서의 일주일

프랑스인 자산가이자 알파인 마리 르노와 그녀의 오메가 남편인 올리비에는 슬하에 삼남 일녀를 두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세 아들인 장 미셸, 티에리, 가브리엘, 그리고 막내딸 레아였다. 장 미셸은 오메가, 티에리는 알파였고, 가브리엘과 레아는 아직 어려서 형질을 알기 전이었다.

니스 근교에 있는 르노가의 별장은 아침부터 부산했다. 마리의 오랜 러시아인 친구가 자기 자녀들과 함께 여름휴가 겸 일주일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크냐즈와 만나는 거 되게 오래간만이네.”

“진짜 이게 몇 년 만이야?”

“티에리, 넌 네 약혼녀를 보겠구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장 미셸? 걔 이번에 알파로 발현했다는데. 안 그래도 그거 땜에 겸사 인사차 오는 거잖아.”

나이 차이 나는 두 형들은 가브리엘은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수군대느라 바빴다.

이미 형질도 결정된 십 대 중후반의 그들에게 아직 아홉 살의 가브리엘은 함께 놀기에는 너무 어렸다. 반대로 가브리엘도 형들이 말하는 알파니 오메가니, 연애니 약혼이니 하는 이야기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원래도 살갑게 놀아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마 전까지 같이 게임이나 축구 이야기를 하던 형들이었다. 요즘 들어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심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는 괜히 눈치를 보며, 들고 있던 휴대용 게임기나 만지작댔다.

삼 형제는 셋 다 또래에 비해 큰 키에 셋 다 인물이 좋았다. 볕에 잘 그은 피부에 비슷비슷한 갈색 머리였지만 장 미셸만 곱슬인 것이 달랐다.

“가브는 크냐즈를 만난 적이 없나?”

둘 중 그나마 다정한 장 미셸이 그런 가브리엘의 기척을 눈치채고 물어 왔다. 티에리가 빈정댔다.

“있어도 기억을 못 할걸, 애기 때라. 그나마 최근에 봤을 땐 또 쟤 혼자 감기로 앓아누워 있었고. 의사 선생님이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해서 꼼짝없이 침대에 갇혀 있었지.”

“맞아, 그랬었지?”

정작 당사자인 가브리엘은 기억도 안 나는데 오히려 장 미셸이 아는 체를 했다.

“그때 그 집 애들은 안 왔었지?”

“어쩔 수 없었지, 뭐. 거기도 이래저래 큰일이었으니.”

“아, 맞다. 가브!”

“왜, 티에리.”

저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형들이 가브리엘은 짜증이 났다. 덕분에 절로 뚱해지는 대답에도, 티에리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너 그 집 애들 앞에서 걔네들 엄마 이야기 꺼내면 안 된다.”

“어차피 형들하고 놀겠지, 나랑 말이나 하겠어.”

“왜? 그 집 둘째는 네 또래일 텐데.”

하지만 장 미셸의 이야기에 바로 가브리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 내 또래도 있어?”

장 미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인 블라다는 티에리보다 한 살 적지만, 둘째인 니콜라이는 너와 거의 같을걸. 올해 생일이 지났을 테니, 너보다 한 살 많겠다.”

“우와!”

맨날 다섯 살 이상 나이 차 나는 형들에게 치이던 가브리엘에게, 한 살 차이의 친구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왜 티에리가 그 애들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유를 듣는 것을 깜박했지만 셋 다 어느새 그 화제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둘 다 진짜 예쁘게 생겼어. 원래 이쪽이랑 그쪽 부모님들끼리 블라다랑 티에리랑 약혼시키자 그랬어서, 얘 속으로 은근 엄청 좋아했었잖아.”

“그때는 걔가 틀림없이 오메가가 될 줄 알았단 말야.”

갑자기 장 미셸이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것에 이번엔 티에리가 입을 삐쭉댔다. 하지만 얼굴이 빨개진 것으로 보아 아예 없던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자길 놀리던 작은형이 큰형에게 놀림받는 걸 보고 가브리엘은 살짝 신이 났다.

물론 약혼이라 해서 심각한 것은 절대 아니고, 부모들끼리 친구인 데다 집안도 잘 아는 사이니 자식들끼리 그러면 좋겠다고 장난삼아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오늘 가브의 약혼자도 오겠네.”

티에리는 자신만 무슨 소리 들은 게 억울했는지, 갑자기 가브리엘을 걸고넘어졌다. 장 미셸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직 모르잖아. 니콜라이도 걔 누나처럼 알파일 수도 있는데.”

“그럼 왜? 가브가 오메가일 수도 있지.”

“얜 알파일걸.”

“뭐,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확신에 찬 형의 말에 의외로 티에리도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제 동생을 놀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아마도 제 누나와 다르게 오메가일 거야. 그의 오메가 엄마처럼 발레 신동인 데다가 소문에 그렇게 예쁘게 생겼다잖아. 블라다는 예전에도 그렇게 말괄량이였는데, 니콜라이는 반대로 엄청 얌전하다던걸. 가브는 좋겠네.”

“뭐, 뭐가?”

“예쁜 약혼자가 생겨서.”

“티에리, 동생 그만 놀려.”

보다 못한 장 미셸이 티에리를 말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가브리엘은 형이 그런 걸로 놀리든 말든 별 상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전 세계 인류 10명 중 1명일 정도로 그 수가 적지만, 알파는 알파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고, 알파는 배우자로 오메가를 선호했다. 거기다 알파와 오메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높은 비율로 알파나 오메가였다.

르노가도 그런 경우였고, 네 아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알파나 오메가가 될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위의 두 아이들은 이미 발현한 상태기도 했다.

형질 발현은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만 15-17세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 전까지는 의사도 어떤 형질인지 알 수 없었다. 아홉 살의 가브리엘이 알파인지 아닌지 판명되려면 아직 5년은 족히 남았고, 그것이 그가 형들과 달리 눈앞의 휴대용 게임기 쪽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이유였다.

어느새 형들은 다시 가브리엘을 내버려 두고,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이야기로 떠들기 시작했다. 최근 장 미셸에게 알파 애인이 생겼고, 티에리는 알파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그런 듯했다.

관심 없는 화제에 다시 시시해진 가브리엘이었지만, 그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브, 놀자.”

조심스레 옷소매를 당기는 기척에 내려다보니 여동생 레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가슴께도 오지 않는 작은 여자아이를 향해 가브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아?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네 보모는?”

“아빠는 없어. 보모도 같이 갔어.”

어른들이 다들 손님맞이로 바쁘다 싶더니, 레아의 보모까지 불려 간 듯했다. 덕분에 잔소리가 없어진 건 좋지만 제가 그 역할을 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레아는 올해 다섯 살, 가브리엘보다는 네 살이나 어렸다. 형들을 뭐라 할 게 아닌 것이 자신도 레아와 놀면 솔직히 재미없었다. 그렇다고 다섯 살짜리를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아하니 형들은 이제 핸드폰까지 꺼내 들고 있는 것이 SNS에 사진이라도 올리는 폼이었다. 내버려 두면 아마 하루 종일 저러고 있겠지.

“에휴, 그래. 같이 놀자.”

가브리엘은 대놓고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좀 더 크면 자신처럼 갈색 머리가 될 것이 틀림없는 여동생의 금발을 쓱쓱 쓰다듬었다.

***

레아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바닷가에 가고 싶다고 했다. 별장에서 정면 현관으로 나가 주차장을 가로지르면 바로 해변으로 통하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원래라면 가브리엘도 수영을 즐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곧 손님들이 도착할 텐데 머리가 젖어서 나타나면 형들이 분명 애 같다고 비웃을 테고 그게 싫었다. 그리고 아직 수영에 서툰 레아와 물에 들어가면 제대로 놀 수도 없었다.

“레아, 물에 들어가면 안 돼. 잠깐 놀다가 손님들 오시기 전에 돌아가자.”

“응.”

가브리엘의 말에 레아는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빤히 보였는데도 가브리엘은 눈치채지 못한 척을 했다.

“수영하시나요, 도련님?”

바닷가를 관리하고 있던 관리인이 그들을 발견하자 알은체를 했다. 그는 여름철 별장에 딸린 이 개인 해변을 관리하고, 가족들이 물놀이를 할 때면 안전 요원 역할도 했다.

“아뇨, 금방 돌아가려고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여기 개인 해변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니스의 해수욕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조용한 분위기였다. 자갈이 아니라 모래사장이 짧게 펼쳐져 있었는데, 매년 돈을 써서 모래를 퍼붓고 있다는 이야기는 가브리엘도 들은 적 있었지만 딱히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관리인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갖다주었다. 레아는 바닷가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놀았고, 가브리엘은 선베드에 늘어져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그런 여동생을 지켜보았다.

레아는 잠깐씩 재밌는 것을 발견하면 다가와서 보여 주었고, 그때마다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가끔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는 표시를 다시 하기도 했지만, 가브리엘이 안 된다고 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동생은 기본적으로 얌전한 여자아이여서 맨날 놀려 대는 까다로운 형들에 비하면 편하긴 했다.

“레아, 돌아가자!”

슬슬 점심때가 다가왔다. 곧 손님들이 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가브리엘은 레아를 불렀다.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나란히 별장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커다란 고급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브, 손님들이 도착했나 봐!”

“그러게.”

쭈욱 고개를 뻗는 가브리엘의 눈에 차례로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첫인상은 그들이 무척이나 하얗다는 것이었다. 제 가족들과 비교하면 머리 위에서 밀가루를 뿌린 듯이 하얀 사람들이었다.

제일 먼저 내린 남자가 아버지의 친구인 크냐즈가 분명했다. 붉은 기운이 도는 금발을 뒤로 넘기고, 멋진 맞춤 양복 차림이었다. 귀한 우성 알파라고 했던가? 누구나 생각하는 이상적인 알파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같은 붉은 금발을 뒤로 길게 땋아 내린, 흰 원피스 차림에 키가 크고 날씬한 소녀가 내렸다. 아마도 저 사람이 블라다겠지. 최근에 알파로 발현했다는데, 만약 오메가였다면 그녀가 티에리와 결혼해서 자신의 가족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녀석이 차에서 내렸다. 형들이 말했던 제 또래의 남자애, 니콜라이였다.

셋 중 가장 밝은 빛의 금발이 햇볕에 부서져서 거의 흰색으로 보였다. 남자아이치고 애매하게 길어 거의 단발에 가까웠다.

아래위로 흰 반소매 세일러복 차림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적도 없는 것 같은 새하얀 피부에 흰색 옷깃. 온통 하얀 가운데, 크고 넓은 깃에 둘린 검은색 세 줄이 선명했다.

가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세상에, 뒤에 반짝이를 두른 거 같은 녀석이네!”

“우와, 왕자님이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레아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작은 어린 여자애의 뺨은 대놓고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기서 인사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둘 다 그렇게 멍하니 보는 사이 하얀 가족들은 그대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가브리엘이 새로 도착한 러시아 손님들과 정식으로 인사한 것은 점심 식사 자리였다.

“장 미셸과 티에리는 이미 알 테고. 가브리엘, 레아, 인사드리렴. 마리의 오랜 친구인 세르게이 씨와 자녀들인 블라디미라와 니콜라이란다.”

올리비에가 가브리엘과 레아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목덜미로 흩어진 갈색 곱슬머리는 장 미셸과 같았다.

“가브리엘, 레아, 안녕. 난 블라다라고 불러. 니카, 너도 인사해야지.”

“안녕, 난 니콜라이야. 잘 부탁해.”

역시나 금발을 땋아 내린 소녀는 블라다였고, 단발머리에 세일러복을 입은 남자애 쪽은 니콜라이가 맞았다. 니콜라이는 가족들 사이에서는 니카라고 불리는 듯했다.

둘 다 프랑스어가 매우 능숙했는데, 어떻게 들으면 남프랑스 사투리를 쓰는 가브리엘의 가족들보다 더 유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장 미셸과 티에리가 입을 모아 예쁘다고 하더니 정말 도자기 인형 같은 남매들이었다. 멀리서 볼 때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하얗고 더 반짝반짝했다. 블라다는 하얀 원피스를, 니콜라이는 흰 세일러복 차림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왕자님이다, 그치?”

레아가 가브리엘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그녀는 대놓고 니콜라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정원에서 저 가족들과 마주친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였다.

나이 순서로 앉다 보니, 가브리엘의 자리는 딱 레아와 니콜라이의 중간이었다. 덕분에 가브리엘은 본의 아니게 꽤나 어색해져 버렸다.

“레아, 조용히 해. 아버지께서 뭐라시겠다.”

“그치만, 저런 예쁜 사람은 첨인걸.”

솔직히 가브리엘도 여동생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무엇보다 누나 쪽인 블라다가 뭔가 명랑한 분위기라면, 니콜라이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확실히 왕자님이란 말이 어울렸다. 둘 다 외모가 빼어났지만, 이목구비만 보자면 니콜라이 쪽이 더 섬세하게 예쁘기도 했다.

사실 여동생과 같은 급으로 보이기 싫어 아닌 척하고 있을 뿐, 가브리엘도 니콜라이를 보자마자 바로 친해지고 싶었다. 같은 또래에다 저렇게 예쁜 애인데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었다. 하지만 아직 안 친하다 보니 어색해 말을 걸기는커녕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괜히 레아만 나무라는 것이었다.

“블라다! 오래간만이야.”

“그새 알파가 되었다며. 티에리가 아쉬워하던데.”

“장 미셸, 내가 언제?”

“흥, 너희 둘은 간만에 봐도 여전히 참 정신없고, 시끄럽구나.”

이미 아는 사이라는 올리비에의 말대로, 두 형들은 이미 블라다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정확히는 두 소년들이 예쁜 블라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정작 그녀는 귀찮다며 적당히 받아치는 중이었다.

그 옆에서는 부모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리, 올해 르노가 농장의 포도 작황은 어때?”

“그렇게 좋진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날씨가 괜찮으면 아슬아슬하게 평년 정도는 유지할 거 같아.”

“세르게이 씨, 와인 더 들겠어요?”

“감사합니다, 올리비에 씨. 안 그래도 여기 와인이 그리웠답니다.”

“안 그래도 돌아갈 때 잔뜩 선물해 주려고 준비해 뒀어, 세르게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로군.”

러시아 신사와 마리가 가볍게 건배를 했다. 문득 가브리엘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세르게이 씨였구나! 크냐즈가 이름인 줄 알았네.”

“그건 그냥 별명이야.”

문득 옆에서 지저귀는 것 같은 프랑스어가 들려와 가브리엘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니콜라이가 제 말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러시아 말로 대공 각하라는 의미야.”

니콜라이가 고개를 까딱하며 덧붙였다. 살짝 눈을 내리뜨자 하얀 뺨 위로 풍성한 금빛 속눈썹이 하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고 보면 가브리엘은 니콜라이와 처음으로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다. 제가 망설이는 사이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브리엘은 살짝 부끄러워졌다. 친구가 되고 싶으면 자기가 먼저 말을 걸었어야 했는데.

왕자님이 자신들에게, 정확히는 막내 오빠에게였지만,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에 흥분한 레아가 가브리엘의 팔에 반쯤 매달려 왔다.

“으, 윽, 레아. 무거워!”

“진짜 왕자님이었어?”

대공이란 아홉 살의 가브리엘에게는 아직 어려운 단어였다. 다섯 살인 레아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대공 각하는 아니야. 별명이니까.”

니콜라이가 정말 왕자처럼 웃으며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레아에게 내용은 딱히 상관없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은 이미 대놓고 하트였다.

“레아 르노, 자세.”

결국 그런 레아를 보다 못한 마리가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했다.

“레아, 오빠에게서 떨어지고, 똑바로 앉으렴. 그래, 팔꿈치 식탁에 대지 말고.”

“네, 엄마, 아빠.”

올리비아가 급하게 레아를 바로 앉게 했다. 입을 내밀면서도 시킨 대로 바로 앉는 작은 여자애를 향해 세르게이가 미소를 보냈다.

“쟤가 너희 막내지? 이제 다섯 살? 정말 귀여워.”

마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겨우 다섯 살이야.”

“늦둥이이기도 하고, 마리가 고생이 많았어요.”

올리비에가 머쓱해하며 덧붙였다. 세르게이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어때? 둘이 사이가 좋았던 덕분에 귀여운 막내도 생기고, 잘됐지.”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하는 저 알파 쪽이 정말로 멋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키가 크고 몸통도 두꺼운데, 팔다리가 길어서 둔해 보이지 않는 점이 제일 멋졌다.

“그러고 보니 넌 레아를 처음 보지?”

마리가 세르게이에게 물었다.

“아주 갓난아기 때 보고 거의 처음이지. 내가 바깥출입을 줄인 게 그즈음이었으니.”

“하아, 그땐 다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정말 놀랐어. 지금은 많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세르게이는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대체 무슨 일인지 니콜라이가 대놓고 몸을 굳혔다. 노골적으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형들의 모습에, 가브리엘은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니콜라이도 못 보는 사이에 많이 컸네요. 마지막에 봤을 때 우리 가브리엘보다 동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았는데.”

올리비에가 무거운 분위기를 날리고 싶었는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니콜라이와 제 이름이 나오는 데에 가브리엘은 귀를 쫑긋 세웠다. 세르게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봤자 이 녀석 오메가일 텐데. 얼굴 보면 알겠지만 제 엄마랑 꼭 닮았잖아. 아마 저기서 얼마 더 크지도 않을걸.”

의학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형질의 정확한 예측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덕분에 실제로 발현하기 전까지,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여부는 의사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묘하게 확신에 차 있었다. 원래도 위압감 넘치는 우성 알파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었다.

“그거 좋은데. 진짜 그렇게 되면 우리 가브리엘과 결혼시키자.”

마리는 그저 재밌어하고 있었다. 아마 티에리와 블라다에 대해서도 딱 저런 식으로 결혼이니 약혼이니 농담처럼 던졌을 것이 빤했다.

자신은 아직 어려서 그럴까? 가브리엘로서는 그저 이 일련의 대화가 참으로 어색하고,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문득 니콜라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디저트 드실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 소년의 표정을 확인하기보다 먼저, 디저트가 도착했다.

“우와!”

“맛있겠다.”

마카롱, 에클레어, 프랄린 초콜릿. 주방장이 한껏 솜씨를 발휘한 화려한 디저트 플레이트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단번에 시선을 빼앗겼다.

***

오후에는 다 같이 근처 관광지를 둘러보고 왔다. 가브리엘은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 차를 나눠 탈까 궁금했는데, 걱정할 필요 없이 마리가 미리 미니 리무진 버스를 빌려 두었다.

어른들은 맨 뒷좌석에서 어른들만의 이야기를 나눈다고 바빴고, 형들은 평소처럼 가브리엘은 빼놓고 저희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거기에 블라다가 추가됐다는 점만이 달랐다.

솔직히 점심때 마리가 반쯤 장난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낸 이후, 가브리엘은 더더욱 니콜라이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워졌다. 아까 식사 중에 잠시 한두 마디 나눈 일이 오히려 환상만 같았다.

레아 쪽이 오히려 그에게 이리저리 말을 걸었지만, 딱히 긴 대답을 받아 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조차 멋있고 왕자 같다고 좋아했지만, 가브리엘이 보기에는 그저 웃기는 소리였다.

확실히 니콜라이는 아버지가 몇 마디 한 뒤로 영 풀이 죽은 느낌이라 좀 신경 쓰였다. 그렇대도 대놓고 말을 걸어도 단답밖에 돌아오지 않는 데는 방법이 없다. 뭔가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가브리엘은 오후 내내 관심 없는 척 괜히 휴대용 게임기만 만지작거렸다.

“……그거, 유괴.”

“쉿, 티에리. 그 이야기는 여기서 하면 안 돼.”

그 와중에 딱 한 번 두 형들의 이야기가 가브리엘의 귀에 콱 박힌 적이 있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유괴’라는 단어를 기억해 버리고 말았다.

저녁에 아이들은 별장에 남겨 두고 어른들끼리 극장에 갔다. 무슨 발레인지 오페라인지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별장에는 레아의 보모를 포함 다른 사용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이 계실 때와는 확실히 긴장감이 다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서 쉬게 되자마자, 가브리엘은 몰래 별장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별장에 딸린 개인 해변이었다. 수영복 위에 반소매 집 업을 걸친 간단한 차림의 목적은 딱 하나뿐일 것이다.

여름의 긴 해가 슬슬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점점 걸음을 빨리하던 가브리엘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집 업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하루 종일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죽지 마!”

하지만 외마디 외침과 함께 갑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빨간색 구조 튜브에 왠지 흥이 식어 버렸다. 바다에 둥둥 뜬 채 이게 뭔가 하고 해변을 바라보니, 새하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가브리엘은 순간 귀신인가 하고 깜짝 놀랐지만, 다음 순간 그 정체를 깨닫고 안심하면서 동시에 이번엔 의외라서 놀랐다. 바로 니콜라이였다.

밝은 금발이 이마와 귓가에서 찰랑거리고, 놀란 듯 하얀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목까지 단추를 단정하게 잠근 셔츠에 짙은 색 바지 차림이었다.

저 녀석은 평범한 티셔츠나 청바지 같은 옷은 없는 건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가브리엘은 천천히 해변으로 돌아갔다. 물론 제 옆에 떠 있는 빨간 튜브는 무시하고 직접 수영해서.

그제야 그가 물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니콜라이가 당황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바다에 빠진 거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난 그냥 수영 좀 하려던 것뿐이야.”

“이렇게 어두운데?”

“뭐, 물론 밤에는 위험하니까 어른들은 당연히 하지 말라지만.”

가브리엘은 아직 바다에 떠 있는 구조 튜브에 연결된 밧줄을 당겨 해안까지 끌어와서는, 니콜라이 쪽으로 휙 던졌다. 튜브에서 떨어진 바닷물이 머리카락과 셔츠로 튀자 니콜라이가 눈을 찌푸렸다.

“아, 뭐야. 다 젖잖아!”

누가 할 소릴. 짜증이 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가브리엘은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은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틱틱거렸다.

“흥, 그래서 착한 아이인 니콜라이 군은 밤 수영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 보셨다는 거군?”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여름에 밤이 없는데, 어떻게 밤 수영을 했겠어?”

니콜라이는 튜브를 옆의 모래사장으로 던져 버리고는 흠뻑 젖은 셔츠에서 물을 짜냈다. 전혀 예상 못했던 대답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가브리엘이었다.

“응? 여름에 밤이 없다고? 안 어둡다는 거야?”

“그래, 내가 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름 내내 백야니까.”

“백야?”

“밤새도록 해가 지지 않는 거. 정확히는 새벽에 해가 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뜨는 거지만.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 나도 알아! 학교에서 배웠다고.”

그러고 보면 과학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북극에 가까워질수록 여름은 낮이 길어지고, 반대로 겨울에는 낮이 짧아진다고. 러시아는 북쪽에 있는 추운 나라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걸. 짧은 후회와 함께 찾아온 부끄러움에, 가브리엘은 괜히 발끈해 다른 화제로 넘겼다.

“근데 내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 놓고, 튜브만 던져? 너 수영 못하냐?”

“무슨 소리야? 엄청 잘하거든! 하지만 인명 구조는 상대가 정신을 잃지 않은 이상, 이렇게 튜브나 장대 같은 것을 물 밖에서 던져서 잡게 하는 게 원칙이라고. 함부로 직접 뛰어들면 구조하러 들어간 사람까지 휘말려 큰일 난단 말야.”

하지만 의외로 니콜라이는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반박해 왔다. 흥분했는지 상기된 얼굴에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 말만 잘하네. 역시 아까는 일부러 조용히 있었던 거였어.

낮과 사뭇 다른 모습에 가브리엘이 속으로 욱할 때였다. 갑자기 니콜라이가 맥이 풀린 듯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여하튼 죽으려던 거 아니면 됐어.”

“당연하지! 내가 왜 죽어? 죽을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그게 보통이지.”

“보통?”

“아니, 됐어. 내가 착각해서 미안해.”

순식간에 달라진 고분고분한 태도는 가브리엘이 오히려 얼떨떨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마주 선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니콜라이 쪽이 조금이지만 더 높았다.

작고 가늘다는 인상이었는데, 마른 편이라 실제보다 작게 느껴지는 듯했다. 옆에 서 있던 세르게이나 블라다가 워낙 커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하아, 이대로는 못 돌아가겠네. 조금 말리고 가야겠어.”

젖은 제 옷을 살피는 니콜라이를 보자 가브리엘은 괜히 찔렸다. 제가 던진 튜브 때문에 니콜라이가 저렇게 젖은 탓이었다.

사실 흠뻑 젖은 거라면 가브리엘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다시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이상했고 수영할 마음도 이미 식어 버렸다. 그는 던져둔 집 업을 다시 걸치고는 벌써 모래사장에 자리 잡고 앉은 니콜라이와 나란히 앉았다.

“뭐야, 가브리엘?”

“뭐긴? 나도 옷 좀 말리고 들어가려고.”

솔직히 가브리엘은 니콜라이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 살짝 놀랐다. 한 번도 안 부르길래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가브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면 더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무리겠지.

“근데, 나야 수영하러 왔다 치고. 너야말로 여긴 왜 왔냐?”

가브리엘의 질문에 니콜라이는 대놓고 귀찮아하면서도 다시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아까 말했듯이 내가 살던 도시는 이 계절에 해가 지지 않는단 말야. 여름인데 밤에 어두워지는 게 신기해서 몰래 산책 나왔다가, 어쩌다 보니 너무 멀리 와 버린 것뿐이야. 마침 바다가 보이길래 여기까지만 왔다 들어가려고 했는데, 누가 풍덩 빠지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도와주러 왔더니.”

“역시 너도 몰래 나온 거였구나! 그지, 부모님 안 계시면 이러고 싶다니까.”

“됐으니까 나중에 어른들한테 말하지 말아 줘. 나도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의외로 니콜라이는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곤란한 얼굴로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전혀 걱정 마.”

가브리엘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소리였다. 뭣보다 몰래 나온 게 들키면, 분명 니콜라이보다 제 쪽이 더 혼날 것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소년은 잠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별장을 나설 때만 해도 어둑어둑하던 주변이 이제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쏴아쏴아 파도 소리는 기분 좋았지만 가브리엘은 금세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저기.”

기세 좋게 한마디 던지고서 가브리엘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도 니콜라이를 그의 가족들처럼 니카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싶었지만, 솔직히 아직 그 정도로 친해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 왜?”

“나 뭐 좀 물어봐도 되나? 너 유괴당한 적 있어?”

그렇게 망설이는데 니콜라이가 먼저 되묻는 바람에 가브리엘은 엉겁결에 궁금하던 질문을 바로 이어서 내뱉고 말았다.

당연히 원래는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나서 다음 질문을 할 생각이었다. 느긋하던 니콜라이의 표정이 딱딱해지고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아니, 난 그냥 아까 형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길래, 그게 넌가 하고 궁금해 가지고.”

“응, 있어. 다섯 살 때.”

“역시 그렇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니콜라이의 대답에 가브리엘은 바로 만족했다. 한없이 가벼운 그 반응은 니콜라이의 눈에도 꽤나 의외인 듯했다.

“뭐야? 진짜로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정작 가브리엘은 마냥 해맑을 뿐이었다.

“응, 형들은 원래 나한테 제대로 된 설명 같은 거 절대 안 해 주거든. 맨날 지들 둘이서 알고 쑥덕쑥덕 재밌어해서 아주 답답해 죽겠어. 너네 누나도 그래?”

“블라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그래? 좋겠다. 여하튼 지금 괜찮다는 건 무사히 돌아왔다는 거네.”

“뭐, 일단은 그런 거겠지? 하도 옛날이라 나도 어차피 잘 기억도 안 나.”

솔직히 니콜라이로서는 가브리엘 같은 반응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보통 유괴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안타깝다거나 불쌍하다는 눈빛부터 보내왔던 것이다. 대놓고 위로의 말부터 건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랬구나. 굉장하다!”

“응? 뭐, 뭐가?”

“그런 일을 겪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거. 엄청난 거 아닌가?”

하지만 어린 가브리엘에게는 그런 경험조차 뭔가 모험처럼 와닿았다. 정작 니콜라이는 여전히 가브리엘의 그런 반응이 얼떨떨할 뿐이다.

“글쎄 모르겠는걸.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해 봐서. 그 뒤로 아버지는 내가 작고 약해서 그런 일이 생겼던 거라고, 계속 나 혼자 밖에 못 나가게 하고, 아무나 못 만나게 하고 그러거든.”

아아, 그래서 점심 식사 때 그 우성 알파가 그렇게 확신에 차서, 제 아들이 오메가가 될 거라고 했던 거로구나. 가브리엘은 이제야 자신의 소소한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근데 자신이 보기에는 다른 알파들보다도 오히려 니콜라이 쪽이 더 알파 같은데 말야.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들조차, 왜 다른 사람들은 죄다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네 어머니는 뭐라고 안 하셔? 네 아버지가 그러는 거 아무도 안 말려?”

그런 건 원래 어머니들이 더 잘 아는 법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유괴되기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하지만 이어지는 니콜라이의 대답에 가브리엘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형들이 러시아 남매들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던 거였다. 이왕 이야기할 거면 이유까지 확실히 말해 줄 것이지, 티에리는 왜 이야기를 반만 해서.

“미안해. 난 전혀 몰랐어.”

“모를 수도 있지. 괜찮아. 여하튼 아버지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거 같아. 나야 뭐 아직 그의 보호하에 있는 어린애니까 시킨 대로 하는 수밖에.”

한숨처럼 푸념하는 니콜라이에게, 가브리엘이 흥분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얼마나 참견쟁이인데. 이렇게 휴가라도 올 때 아니면 게임기도 하루에 한 시간밖에 못 하게 한다니까. 응,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그냥. 이런 애를 바다에 빠져 죽으려 했다고 오해한 내가, 갑자기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서.”

“에이, 뭐 그런 걸로 그래. 너 바보 아냐. 오해인 거 알았으면 됐지.”

여전히 해맑은 그 태도에 니콜라이가 피식 웃었다는 것은 가브리엘에게는 비밀이다. 그는 한창 자신이 꽤 멋진 말을 했다고 뿌듯해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브리엘이 니콜라이에게 궁금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맞다. 니콜라이, 너 발레 한다며.”

“응, 하는데.”

“그럼, 공연도 해?”

“아직 나이 때문에 정식으로 발레단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특별 무대 같은 건 가끔.”

“와, 대단하다!”

거기서 가브리엘이 큰 소리로 감탄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니콜라이는 그만 움찔했을 정도였다. 너무도 열광적인 상대방의 반응에 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아직 그런 소리 들을 정도는 아냐.”

“에이, 아니긴 뭐가 아냐? 난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 말고는 무대란 건 나가 본 적도 없는데. 내가 집에서 하는 거라곤 고작 게임 정도? 그것도 형들이 더 잘하고. 아아, 나도 내세울 만한 특별한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특별하고 그렇진 않은걸, 아마.”

니콜라이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어차피 가브리엘도 딱히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공부 같은 건 안 하고, 매일 춤만 계속 추는 거야?”

“아니, 학교도 나가고 연습 사이사이 가정 교사가 과외 수업도 해 줘.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보다는 공부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 말에 가브리엘의 얼굴에 대놓고 실망의 표정이 스쳤다.

“뭐야. 좋다 말았네. 힘들겠다.”

“아냐, 익숙해지면 할 만해.”

“그게 힘든 거지. 나라면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다고 바로 울면서 어머니 바짓가랑이에 매달렸을걸. 너 진짜 대단하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니콜라이가 대단하다로 돌아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그야말로 맹목이었다.

엄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살면서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칭찬을 들은 적이 없는 니콜라이다. 막무가내로 칭찬해 오는 가브리엘이 마냥 싫을 리 없었다.

“으응, 뭐, 고마워.”

정작 당사자들만 깨닫지 못하는, 우정의 시작이었다.

***

결국 가브리엘과 니콜라이는 부모들이 돌아오기 직전, 아슬아슬한 시간에야 별장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두 소년들은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런 둘을 보고 장 미셸과 티에리가 함께 놀렸지만, 가브리엘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큼 더 니콜라이와 친해진 것 같은 느낌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둘째 날 낮에는 다 같이 바다로 갔다. 드디어 제대로 수영한다는 생각에 가브리엘은 한껏 신이 났다. 하지만 일단 물에 들어간 다음에는 다른 이유로 더 신났다.

“와, 너 진짜 빠르다!”

니콜라이의 수영 실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수영을 잘한다던 말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속도만 따진다면 자신보다도 더 빨랐다.

“그런가? 주변에 딱히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너 외출도 잘 못 한다더니, 거의 혼자 노는구나! 어떡해. 앞으로는 내가 같이 놀아 줄게.”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뭐 어때?”

생각해 보면 발레도 기본적으로 몸을 단련해 움직이는 행위다. 매일 시간 날 때마다 가만히 앉아서 게임이나 하고, 간식으로 뭐 먹을지나 궁리하는 자신보다, 니콜라이가 더 잘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가브리엘은 마치 제 수영 실력이 빨라진 것처럼 뿌듯해했다.

한편 가브리엘의 두 형들과 블라다는 굳이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뒤쪽 선베드에서 쉬면서 와인을 마시는 부모들과 비슷하게, 레모네이드와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거기서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빠, 저도 가브처럼 물에 들어가면 안 되나요?”

어린 레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올리비에는 대놓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 아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라 별걸 안 해도 항상 지쳐 있었다. 아니, 오늘은 거기에 손님으로 온 두 명까지 추가되어 무려 여섯이었다.

“좀 있으면 점심도 먹을 텐데, 그냥 모래성을 만들면 어떨까?”

“하지만 전 어제도.”

“젖으면 새로 씻어야 해서 귀찮을 거야.”

“네, 아빠.”

레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말을 듣지 않는 위의 세 아들들과 달리, 레아는 고분고분해 다루기가 편했다. 올리비에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는 채, 딸을 모래사장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레아가 혼자 꼬물꼬물 모래를 파고 있을 때였다. 마침 가브리엘과 니콜라이가 수영 중간에 잠시 쉬러 나왔다.

“가브! 왕자님!?”

레아는 제 오빠보다 옆에 있던 니콜라이를 보고 더 반가워했다.

“오, 레아. 모래성 만들어?”

“같이 할까?”

“네!”

가브리엘의 말에는 시큰둥하더니 니콜라이의 한마디에 대놓고 기쁨으로 얼굴을 붉히는 레아였다. 솔직히 그녀가 니콜라이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은 어제부터 노골적이었던 터라 가브리엘에게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잠깐 모래성 만드는 정도야, 뭐. 별생각 없이 니콜라이를 따라 레아의 앞에 쭈그리고 앉다 말고, 가브리엘은 문득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레아가 왕자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갔어. 넌 왕자님이라고 불려도 신경 안 쓰는 거냐, 니콜라이?”

“그게 왜? 예전부터 무대 올라가면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걸.”

“이런, 잠시 깜박했다. 이쪽은 아버지 별명이 대공 각하인 녀석이었어.”

확실히 저 반짝반짝한 외모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홀리는 태도도, 또래 여자애들이 보기에 왕자님 같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레아도 저렇게 쏙 빠졌겠지. 뭔가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 기분에 가브리엘은 잠시 고뇌했다.

물론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레아의 모래성 만들기를 돕는 중이었다. 본의 아니게 어제에 이어 또 여동생을 돌보게 된 그였다.

하지만 막상 여럿이서 만들기 시작하니 은근히 재밌어서 점점 몰입하고 있었다.

“바닷물 퍼 올게.”

마침 물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니콜라이가 바로 자진해서 일어났다. 허리를 곧게 편 체형은 늘씬하고, 금발은 반짝반짝. 햇살 아래 있는데도 온통 새하얀 것이 잘 타지도 않는 것 같았다.

레아가 왜 오빠가 먼저 안 나서서 ‘감히’ ‘왕자님’을 ‘오가게’ 만드냐고 도끼눈을 떠 보였다. 니콜라이가 돌아오기까지 저 시선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같이 다녀오고 말지.

가브리엘은 바로 일어나 니콜라이를 뒤쫓았다. 툭 어깨를 치자, 금빛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야?”

“같이 가자고.”

“몇 발짝이나 된다고.”

솔직히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야. 웃기다고 생각하며 가브리엘은 괜히 니콜라이의 어깨만 팡팡 두드렸다.

그렇게 두 소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도가 닿는 쪽까지 갔다. 양동이 가득 채우려면 조금 깊이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니콜라이가 바닷물을 모으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데,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노골적이라 상대도 모를 수가 없었다.

“왜, 가브리엘? 또 뭐가 이상한데?”

“아니, 어떻게 봐도 내 눈엔 네가 알파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야. 그것도 대단히 훌륭한.”

쓸데없이 진지한 목소리에 니콜라이가 오히려 피식 웃었다.

“뜬금없긴. 어차피 발현 전까진 형질은 아무도 모른다고.”

“물론 그거야 그렇지.”

겉으로는 긍정하면서도, 가브리엘은 여전히 어딘가 석연찮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발현 전까지 당연히 모르는 거면 더더욱 세르게이의 고집스러운 강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정도 되는 우성 알파가 우긴다면 반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저부터도 사실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저렇게나 대놓고 알파인데 왜 어른들은 아무도 모르는 체하는 걸까?

물론 얼굴은 엄청 예쁘고 발레를 해서 그런지 몸 선도 행동거지도 매우 아름답기는 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상대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구조 튜브를 던질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 녀석이다. 솔직히 저였다면 그 순간에 그렇게 침착하게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그 뒤로 찬찬히 지켜보니 반짝이는 화사한 외모에 가려서 그렇지 엄청나게 멋진 녀석인 거다. 레아가 보자마자 왕자님이라며 푹 빠져든 것도 결국은 멋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돌아가자.”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니콜라이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모래사장으로 향하는 그에게 가브리엘이 물었다.

“내가 들까? 아니면 같이?”

“괜찮아. 별로 무겁지도 않은걸. 그래서 내가 혼자 간다 그랬잖아, 가브리엘.”

“그거 사실은.”

이제 와서 여동생이 계속 째려봐서 쫓아왔다고 말하기도 좀 웃긴다. 가브리엘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다, 문득 지금은 이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

“응? 네 이름 가브리엘 맞잖아. 아니야?”

“가브라고 불러 줘. 친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

솔직히 가브리엘은 니콜라이가 거절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브.”

“좋아! 그럼 난 널 뭐라고 부르지?”

“아, 나? 너 편한 대로 불러. 일단 가족들은 니카라고 부르고, 발레단 선생님이나 단원들은 꼴랴라고 부르지만.”

역시나 러시아 이름은 어렵다. 가브리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했다! 난 이제부터 널 니키라고 부르겠어.”

“뭐?”

“니콜라이니까 니키가 맞지. 딱 적당한데, 왜?”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갑자기 튀어나온 새로운 애칭에 니콜라이는 어이없어했지만, 곧 상관없다며 넘겨 버렸다. 그냥 하나하나 따지기가 귀찮은 듯했다. 어쨌든 허락했다는 소리다.

“레아, 들어봐! 니키가 말야.”

가브리엘은 한 발짝 앞서 여동생을 향해 달려가며 새로 정해진 애칭을 크게 소리 내어 외쳤다.

***

그 이후 별장에서 며칠간은 마냥 평화로웠다.

솔직히 가브리엘은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항상 나이 차이 나는 형들에게 치이기만 하다가 또래 친구인 니콜라이와 놀게 되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장 미셸과 티에리가 블라다에게 관심이 쏠려 그녀와 노느라 자신의 존재를 잠시 까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런 점까지도 좋았다.

“가브, 왕자님, 같이 놀자! 나도 끼워 줘.”

레아가 자꾸 따라와서 귀찮게 하는 것만 빼고는 완벽한 휴가였다.

돌이켜 보면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그녀가 그렇게 쫓아오는 것부터가 평범한 일은 아니었지만 가브리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딱히 이상하지도 않은 것이, 애초에 그 나이대 남자애들 중에 여동생에게 세심하게 신경 쓰는 애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벌써 내일이면 마지막이로구나. 너무 아쉽다.”

“가브, 나와 안 보는 게 슬픈 거야, 돌아가서 숙제할 생각에 끔찍한 거야?”

“에이, 둘 다지! 내 우정을 의심하지 마, 니키.”

“의심은 안 하는데. 믿음도 없다.”

어느새 서로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완전히 입에 붙었다. 관리인이 투닥대는 두 소년이 익숙하다는 태도로 청소를 하며 지나갔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뭔가 허전했다. 항상 있던 것이 없고, 보이던 것이 안 보이는 듯한 그런 감각이랄까? 대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가브리엘은 문득 시야 끝에서 나풀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정체가 레아이고, 나풀대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시시덕대는 사이, 여동생이 바다에 빠진 것이다.

“레아!!”

레아는 수영을 할 줄은 알았지만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자면 겨우 물에 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날보다 파도가 셌다.

그러고 보면 여기 온 이후로 그녀는 계속 물에서 놀고 싶어 했다. 자신도 어머니도 다들 귀찮아서 귀담아들어 주지 않았을 뿐이다.

“너도 위험해, 가브!”

당황해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려는 가브리엘을 니콜라이가 붙잡았다. 대신 빨간색 구조 튜브가 공기를 갈랐다. 묘하게 며칠 전 밤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에 가브리엘은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 발치에서 세차게 부서지는 파도가 느껴졌다. 방금 자신이 뛰어들었다면 저 파도를 뚫고 레아와 함께 무사히 해변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솔직히 아찔했다.

인명 구조를 위해서는 상대가 정신을 잃지 않은 이상, 튜브나 장대 따위를 물 밖에서 던져서 잡게 하는 게 원칙이라던 니콜라이의 말이 맞았다. 구조를 위해 함부로 뒤따라 바다에 뛰어들어서는 더 위험했다.

“레아, 붙잡아!”

몇 번의 시도 끝에 니콜라이는 튜브를 레아의 바로 옆으로 댔다. 그녀는 버둥대면서도 어떻게 튜브를 붙들 수 있었다. 하지만 파도가 세 열 살 아이의 힘으로는 쉽게 끌어당길 수가 없었다.

“가브, 어서 어른들을 불러와!”

“아, 알았어, 니키. 금방 올게!!”

니콜라이가 긴박하게 소리쳤다. 가브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다행히 이상을 발견한 관리인이 바로 다가왔다. 근육질의 어른인 그는 쉽게 레아를 해안으로 끌어냈다. 그즈음 이상을 느낀 다른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무사히 구조된 레아를 보자, 가브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니콜라이도 비슷했는지 웃으며 그의 옆으로 나란히 쓰러졌다.

“다행이다. 그지, 니키?”

“정말.”

그런 두 소년들에게 마리와 올리비에가 고맙다며 계속 칭찬을 했다.

“조금 놀란 것뿐이지 별 이상은 없습니다. 이대로 하루 정도 안정을 취하면 괜찮을 겁니다.”

매튜 테일러라는 영국인 의사는 러시아 가족의 주치의까지는 아니지만 매우 친밀한 의사 선생님이라고 했다. 마치 줄곧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세르게이가 전화 한 통을 하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마리와 올리비에가 레아를 끌어안고 다행이라고 울음을 터트렸고, 레아는 가브리엘과 니콜라이에게 고맙다며 뺨을 붉혔다. 가브리엘은 니콜라이의 순간적인 판단력에 새로이 감동하며 그가 훗날 멋진 알파가 될 거라고 새삼 확신했다.

다음 날, 예정된 휴가가 끝난 니콜라이의 가족들은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브리엘은 니콜라이와 친구로서 계속 연락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우정에 부모들은 은근히 둘이 결혼하게 되기를 기대했는지도 몰랐지만 정작 본인들은 둘 다 전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몇 년 후, 가브리엘은 모두의 예상대로 알파가, 니콜라이는 제 아버지인 세르게이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성 알파가 되었다. 레아는 결국 발현하지 않고 베타로 남았다.

가브리엘은 나중에 알게 되는 일인데, 니콜라이는 어디를 가더라도 레아 같은 여자애들을 만들곤 했다. 정작 본인은 의도는커녕 자각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발레단에서도 여자애들 몰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저런 녀석이 오메가일 거라고 확신하던 그의 아버지도 어지간하다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을 따름이다.

한편 가브리엘과 니콜라이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정확히는 니콜라이가 아버지와 연을 끊고 집을 나와 할리우드에서 닉 메드라는 예명으로 세계적인 스타 배우가 된 이후로도 계속 친한 친구로 남았다.

- 니스에서의 일주일,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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