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4권) (18/22)

어느 우성 오메가의 개인적인 우울 4권 (완결)

제3부 제2장

“안녕, 니카.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유신을 닉이 어이없다는 듯 돌아보았다.

멋진 베이지색의 롱 트렌치코트가 큰 키에 잘 어울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는 여전했지만, 밝은 금발은 헝클어져 있고, 뺨이 퀭한 것이 평소보다 초췌해 보였다.

유신은 밀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급하게 서둘러 출발했다더니, 비행기에서라도 푹 자면 됐을 텐데 못 그랬나 보다.

문득 블라다 생각에 슬쩍 돌아보니, 그녀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관계없는 척,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세상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유신과 제 동생을 보고 있었다.

정말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저러는 걸 보니 닉하고 꼭 닮았다.

그나저나 그녀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같은 사람들이 슥 나타났다 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슬슬 당신이 올 것 같아서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하도 안 와서 없는 셈 쳐 버릴까도 했지만요.”

유신은 괜히 주머니에 든 봉투를 옷 위에서 꾸욱 눌러 보며, 일부러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닉이 애가 타는 듯 발을 굴렀다.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아니면요?”

“너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쪽지 한 장 남겨 놓고 사라진 거지? 내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안달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유신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은 좀 더 닉에게 시치미를 뗄 작정이었다. 좀 더 초조하게 만들어서, 못 견디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흐물흐물 약한 쪽은 굳이 따지자면 제 쪽이었다. 유신은 살랑살랑 웃으며 그대로 닉을 껴안아 버렸다.

“뭐 어때요? 무사히 만났잖아요.”

“아, 진짜! 내가.”

“와 줘서 기뻐요, 니카.”

가슴에 턱을 댄 채, 별을 박은 듯한 눈동자가 안경 아래에서 반짝반짝 닉을 올려다보았다.

“쳇.”

사실 흐물흐물하기라면 이쪽도 지지 않았다. 결국 닉도 포기하고 유신을 마주 껴안았다. 애써 찌푸리고 있던 입가가 유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는 것에 따라, 저도 모르게 슬슬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잠시 둘만의 세상에 빠져들 때였다.

“잠깐, 너희 두 사람! 지금 둘이서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사람을 앞에 놓고, 지금 장난치는 거야?!”

차마 그 꼴을 못 보겠다는 듯, 방금까지 시비 걸던 불량배가 끼어들었다. 따지고 보면 딱히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방금까지 부딪힌 걸로 제가 시비 걸던 상대가, 갑자기 나타난 알파와 끌어안고 하트를 흩뿌리며 정작 자신은 모른 체하고 있으니 말이다.

“잠깐, 지금 우리 둘이서 대화 중이거든!!”

“됐으니까, 갈 길 가세요!”

그러나 닉과 유신은 남자를 향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그들로서는 겨우 만난 만큼, 둘 사이를 방해받는 것을 참을 이유가 없었다.

닉의 험악한 기색에, 유신의 칼같은 거절까지. 평범한 열성 알파가 견디기에는 과도한 자극이었다. 순간 불량배는 견디지 못하고 휘청댔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빙빙 돌아간다 싶더니, 살기등등하던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이만 갈 길 가 보겠습니다.”

다음 순간 불량배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비틀거리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해꾼도 사라지고. 이제 닉과 유신은 거칠 것 없이 찰싹 달라붙었다. 닉이 유신의 이마에 이마를 댄 채 가볍게 비벼 오자, 유신이 간지럽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좀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좀 더 오래 있다 올 걸 그랬어, 유샤?”

“아뇨. 실은 안 그래도 슬슬 보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나도 보고 싶었어.”

유신의 양손이 닉의 등을 끌어안고, 닉의 양손이 유신의 뺨과 귓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쓸어내렸다. 아닌 척 슬그머니 닉의 입술이 유신의 코끝에 닿았다 떨어진다.

“몸은 괜찮고? 어디 아프거나 한 덴 없고?”

“응, 괜찮아요.”

사실 닉은 여태까지 계속 방문을 미루던 러시아에 이렇게 쉽게 돌아오게 될 줄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유신이 자신을 얼마나 뒤흔드는지, 얼마나 소중한 상대인지 새삼 실감했다. 잠시 떨어진 사이 아무 일 없이, 이렇게 무사히 그를 다시 볼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정말 다행이야, 유샤.”

닉은 저도 모르게 유신에게 페로몬을 풀고 있었다. 보지 못한 며칠 사이에 임신 중인 유신이 자신의 페로몬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무의식적으로 페로몬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정작 유신은 닉이 입던 옷으로 캐리어를 채워 왔기에 하루 정도로는 까딱없었다. 사실 닉도 제 옷이 사라진 것을 모르진 않았으나, 거기까지 연결 짓지는 못했다. 물론 알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산뜻한 베르가못 향에 유신은 기분 좋게 노글노글 녹아내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답하듯, 닉에게 제 페로몬을 풀었다. 덕분에 닉도 유신의 레몬 향에 새콤하게 젖고 있었다.

아까부터 둘만의 세상에 빠져 있긴 했지만, 이제 완전히 서로에게 빠져서 주변은 아예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우성답게 페로몬 조절에 둘 다 능숙해, 서로에게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만이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 불량배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가 쏠린 상황이었다. 거기다 빼어난 외모의 두 사람은 원래도 주변의 눈길을 끈다. 이쯤 되면 주변에서 눈치채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들인데.”

“혹시 저 금발, 닉 메드?!”

“할리우드 유명 스타가 이 도시에 왜 있어?”

“원래 러시아인이잖아요. 고향에 왔나 보죠.”

슬금슬금 닉과 유신의 주변으로 벽처럼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둘의 분위기 때문에 다들 한발 물러서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만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진 찍을래.”

“나도.”

“저도요!”

결국 참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먼저 깨달은 쪽은 유신이었다. 그는 닉이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당겨 그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는, 아직 제 향기에 빠져 얼떨떨해 보이는 닉을 재촉했다.

물론 다음 순간 닉도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트렌치를 뒤집어쓴 채 유신을 제 품으로 끌어안고 가리듯 감추었다.

마침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들이 사람들과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둘은 그대로 반대편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

아까의 소란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만큼 강도 관광지도 멀어졌지만, 주변도 조용해져 차분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이쪽이 더 좋았다.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날씨가 좋아 창을 다 열어 놓아 마치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둘 다 크게 배가 고프지 않아 주문은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햄버거로 했다.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음료가 먼저 나왔다.

닉은 중간에 어디선가 산 야구 모자를 푹 뒤집어써서 화려한 금발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보라색 바탕에 초록색 러시아어로 ‘최고’라고 적힌 꽤나 야단스러운 모자였다. 꽤나 세련된 복장이 그 모자 하나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정작 웃기는 모자를 쓴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다. 잔뜩 힘을 준 청록색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났다.

그 모습이 안 어울리게 귀여워 슬금슬금 웃음이 배어 나와, 유신은 아닌 척 핸드폰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응, 유샤? 뭐야?”

“블라다인데요, 우리 둘이서 데이트 잘하고, 끝나고 연락하면 차 보내 주겠다는데요?”

중간부터 블라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안 보인다 했더니, 아예 이럴 생각으로 뒤로 빠진 듯했다. 닉이 괜히 툴툴거렸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간다 해. 하여간에 참견이야.”

“그녀는 우리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오래간만에 만난 남동생이잖아요?”

“어련하겠어.”

닉은 아직 마음을 다 풀지 않았다는 듯 싸늘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웃긴 야구 모자를 쓰고 그래 봤자,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유신은 괜히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닉의 손에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단정한 검지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제 손끝으로 긁는다. 닉은 잠시 유신이 그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더니, 갑자기 덥석 손가락에 손가락을 얽었다.

“유샤.”

“네, 니카.”

“난 모르겠어. 왜 갑자기 혼자 여기로 온 거야?”

“초대장을 받았거든요.”

제 손에 손깍지를 끼는 닉의 손을 유신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초대장? 그게 그 국제 우편 안에 들었던 건가?”

“아아, 역시 그 봉투 발견했군요. 찾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거기 껴 두긴 했는데.”

“실은 발견한 건 내가 아니고, 에밀이야.”

유신은 밀리에게 이미 들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말없이 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생각해 보면 당신은 계속 나와 한국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했잖아요. 초대장을 받고 보니 문득, 나도 러시아에 있는 당신 가족들을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초대에 응한 건 조금 충동적이었어요. 마침 그때 당신이 영화 촬영으로 바빠서 계속 얼굴을 못 보고 있었거든요.”

그 바로 뒤에 닉이 촬영이 끝나면서 계속 같이 있으며 신경 써 주는 바람에 살짝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초대에 응한 걸 무르기도 이상했고.

“그랬었군.”

왜인지 닉이 뭔가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유신이 대고 있던 머리를 어깨에 비비자, 닉이 품으로 안아 왔다. 깍지를 낀 손에 슬쩍 힘이 들어와, 유신은 아직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서로의 약지가 괜히 신경 쓰였다.

“니카, 실은 살짝 고백하자면요. 당신의 팬으로서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흘려보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덧붙인 대답에 조금이지만 닉이 몸에서 긴장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되묻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어땠어? 실제로 눈으로 본 감상은.”

“음, 뭐랄까. 집이 정말 크던데요! 어릴 때 정원에서 길 잃은 적 없어요?”

“실은 있어.”

고백 아닌 고백에 유신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잠시 둘은 그렇게 어깨를 맞댄 채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연 쪽은 유신이었다.

“있죠, 니카.”

“응.”

“실은 싫은데 여기까지 오게 돼서 곤란한 건 아니죠?”

“아니야. 어차피 조만간 와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의외로 닉은 선뜻 대답했다. 사실 유신이 납치당했을 때 도움을 받은 시점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은 가야 한다고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다. 단, 이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오게 되는 상황만은 완전히 예상외였지만.

이 또한 다 아버지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속이 쓰리면서도, 눈앞에서 웃고 있는 유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적어도 지금은 다 상관없어졌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래도 당신이 싫다면 내일이라도 뉴욕으로 돌아가도 돼요.”

“아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원래 며칠 정도 생각하고 왔는데?”

“일주일이나 열흘? 오픈티켓인데 아직 확정은 안 했어요.”

“그럼 이왕 왔으니까 구경은 제대로 하고 가자. 나도 간만에 고향에 왔는데 좀 더 있고 싶어.”

“니카, 무리할 필요는.”

“괜찮아. 여기까지 이미 왔는걸, 뭐.”

“그럼 다행이고요.”

그때 먼 곳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까 떠나온 네바강 쪽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야 기간 내내 네바 강변을 폭죽으로 수놓고, 최상급의 오페라와 발레 공연, 가요제가 벌어지는 백야 축제로 유명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오늘은 아직 축제 기간 전이었지만, 주말이라 폭죽을 터트린 듯했다.

두 사람은 잠시 건물 사이의 하늘에서 멀리 폭죽의 잔향 같은 반짝이는 흔적을 눈으로 훑었다. 꽤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하늘은 연한 푸른빛으로 밝았다.

그때 유신이 멈칫하며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유샤,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고 닉이 깜짝 놀랐다. 유신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그냥 배 속에 아기가 움직인 거 같아서요.”

“뭐 정말?!”

깜짝 놀라는 닉에게 유신이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뭘 그리 놀라요? 슬슬 그럴 때도 됐잖아요.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원래 이때쯤 슬슬 태동이 시작한대요.”

정작 닉은 너무 놀라다 못해 흥분해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차마 유신의 배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 그 앞에서 손가락만 꼬물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원래 남자 오메가의 경우 임신을 해도, 만삭이 다 돼서야 옷 바깥으로 티가 날 정도로 배가 안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원래도 헐렁한 옷을 즐겨 입는 유신은, 지금도 커다란 스웨터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지도 않은 배 앞에서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는 닉의 모습은 확실히 변태 같았다. 웃기는 야구 모자를 쓴, 조각처럼 잘생긴 변태랄까.

마침 슬슬 음식들이 나왔다.

적당히 찾아온 식당답게 막 맛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도 아니었다.

유신이 감자튀김을 몇 개 깨작이는 사이, 닉은 커다란 수제 버거 반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뭘 먹어도 깔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햄버거를 먹어도 그림 같은 남자는 흔치 않다.

빤히 자신이 먹는 모습을 보는 유신의 시선에,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변태, 아니 닉이 흠칫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되물었다.

“잠깐, 태동 설마 이번이 처음 맞지, 유샤?”

“아닌데요?”

유신의 평온한 대답에 닉이 일단 손에 든 햄버거부터 내려놓았다.

“진짜야? 그 처음이 언제였는데? 그런 중요한 일을 나한테 아무 이야기도 안 했다고?”

그런 닉에게 유신이 냅킨을 건네며 방긋 웃었다.

“처음 느낀 건 어제 자기 직전이에요. 근데 뭐, 그 전에 느끼고도 내가 예사로 지나갔을 수도 있고요. 여하튼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줄 몰랐어요. 애는 계속 크고 있으니까, 당연한 임신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섭섭해! 나도 알고 싶었다고.”

“미안해요. 앞으로는 나도 우리 콩알이의 변화에 대해 당신과 최대한 공유하도록 할게요.”

유신은 닉의 의견에 바로 동의했지만, 그와 별개로 닉이 다시 놀랐다.

“잠깐만, 유샤. 우리 콩알이?”

“배 속에 있는 아기 애칭이요. 뜻은 작은 콩이에요.”

“아, 귀엽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까 나만 모르는 우리 아기 태명이라는 거로군.”

“이건 사연이 있어요. 전에 검진 가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그날 싸워서 말할 기회를 놓쳤지 뭐예요.”

유신의 설명에도, 닉이 과장스럽게 테이블로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첫 태동을 시작한 줄도 몰랐는데, 알고 봤더니 태명도 계속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요. 앞으로는 잘 이야기할게요.”

유신이 웃으면서 그런 닉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닉이 장난치는 중이라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작은 콩이라니. 이제 콩치고 너무 커진 것 같은데?”

“앞으로도 점점 더 쑥쑥 커질걸요. 아, 맞다.”

뭔가 생각났다는 유신의 태도에 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아마 이제 병원 가면 슬슬 성별을 알 수 있을 걸요. 남자앤지, 여자앤지. 니카, 당신은 콩알이가 남자애면 좋겠어요? 아니면 여자애?”

“아,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하지만 닉은 방금 전 태동 때와 다르게, 의외로 이 이야기에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 궁금해요?”

“난 사실, 딱히 상관은 없어. 아기가 남자애든, 여자애든.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도.”

그리고 그 대답에 유신이 잠시 멈칫할 차례였다. 특히 뒷부분.

본인부터 우성 오메가면서도, 베타 집안에서 자란 그는 아이의 형질이 알파나 오메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초음파로도 확인할 수 있는 남녀 성별과 달리, 알파와 오메가, 베타는 형질이 발현하기 전까지 알 방도가 전혀 없었다. 어떤 의미로 자신도 닉도, 주변의 기대 혹은 예상과 형질이 달랐던 케이스였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발현하기 전에도 신체적인 정신적인 각종 특성으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너무 사람을 겉핥기로 분류한다는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우습게도 그 정확도는 꽤나 높았다. 조금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사람의 성향이 어디까지 성별과 형질에 좌우되는지는 최근 발달 의학에서 꽤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닉이 갑자기 기운이 빠져 보여서, 유신은 이제 제 쪽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맞아요, 니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그냥 잘 키우면 되죠.”

평소와 달리 닉은 유신의 품에 얌전히 안겨 왔다.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손이 마냥 다정했다.

확실히 여기 고향까지 오면서 이 잘난 알파가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고, 유신은 가만히 그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

저녁에는 닉의 고집대로 블라다에게 부탁해 차를 부르는 대신,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중간에 택시 기사가 닉을 알아봐서 유신은 살짝 당황했지만, 닉은 오히려 태연히 악수까지 해 주었다. 메드베데프 저택 안까지 들어가자 기사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팁을 듬뿍 주고 빨리 돌려보내야만 했다.

도착하고 닉은 당연하다는 듯 뒷문으로 올라갔다. 덕분인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하지만 유신이 지내는 3층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왜인지 그는 짧게 신음했다.

“니카, 이 방이 왜요?”

“아니, 뭐랄까? 왜 하필이면 여기로 한 건지. 아니지, 생각해 보면 굳이 다른 방일 이유도 없긴 한데.”

닉의 애매한 태도에 유신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이스 커튼도 그렇고 확실히 지나치게 소녀스러운 방이긴 했다. 그래도 밝고 넓어서 지내는 데에 불편한 건 없었다. 욕실과 화장실도 이 방에 따로 붙어 있어서 사용하기도 편했고.

사실 유신으로서는 그런 것보다 침대 위에 닉의 옷으로 만들어 둔 둥지 쪽이 더 신경 쓰여, 그의 이야기에 대해 찬찬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들키기 전에 빨리 치워야만 하는데.

뭣보다 닉 또한 딱히 심각하게 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헉, 이게 뭐죠?”

하지만 유신은 방문을 열자마자, 방 한가운데 쌓인 몇 개나 되는 대형 캐리어를 보고 조금 놀랐다.

“응, 내 짐인데?”

“난 당신이 급히 오느라 짐이 없는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전혀 없을 수는 없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쪽으로 보냈어. 유샤, 이거 봐. 실은 이런 것도 챙겨 왔거든. 이런 거랑, 이것도.”

웃긴 건 그 사이에서 유신의 옷가지나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이 하나하나 튀어나온다는 점이었다. 둥지를 만들겠다고 닉의 옷만 챙겨 온 유신과 딱 정반대였다.

지금 닉은 캐리어에서 유신의 실내용 카디건을 꺼내는 중이었다. 저녁에 쌀쌀할 때 입기 좋긴 하지만, 지금 계절에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거기서 유신은 중요한 문제를 하나 깨달았다. 이건 닉도 오늘 이 방에서 잔다는 건가?

사실 여기 침대는 성인 둘, 아니 셋이 써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다. 방도 어지간한 호텔의 더블 룸보다 훨씬 넓었다. 물론 이 저택은 엄청나게 크고 넓어, 이 정도 되는 빈 침실이 여기 말고도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닉과 자신이 굳이 다른 방을 쓰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애초에 닉의 캐리어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은, 저택의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둘이 같은 방을 쓴다고 생각했다는 거고.

“저게 뭐야?”

그때 닉이 침대 위에 있는 덩어리를 발견했다. 아침에 빠져나간 그대로, 닉의 옷으로 만들어 둔 둥지였다.

“앗!”

한 박자 늦게 상황을 깨닫고 유신은 후다닥 옷가지를 옆으로 쓸어 버렸다.

물론 닉은 죄다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잘생긴 입가가 명백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은 뺨을 붉힌 채 일단 욕실로 도망치기로 했다.

“씨, 씻고 올게요!”

“응, 먼저 씻어.”

닉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런 제 뒤를 향해 속삭였다.

“역시 하려나?”

욕실에서 유신은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에 샴푸로 거품을 내다 말고, 제풀에 뺨을 붉히며 파드득 놀랐다.

생각해 보면 뉴욕에서도, 닉이 집에 있을 때는 같은 침실에서 같은 침대를 썼었다. 그 방에서는 거의 잠만 잤었고(섹스도 조금은 했고), 그 침실 말고도 따로 방이 있었고, 낮에 생활은 거의 거실에서나 했지만.

하지만 여긴 닉이 자란 집이다. (저택이 워낙 커서 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같은 지붕 아래 닉의 아버지와 누나도 있고. 있고, 있지만.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뉴욕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신도 전혀 안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가족들도 어차피, 신경 안 쓸 거 같은데.

“난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유신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본의 아니게 샤워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지고 말았다. 유신은 일부러 머리도 꼼꼼하게 말리고, 옷도 다 입고 나왔다.

팔다리가 다 가려지는 긴 티셔츠와 긴 조거 팬츠 차림이다. 평소와 똑같은 옷인데 이상하게 괜히 쑥스러웠다.

“유샤, 괜찮아?”

지나치게 긴 샤워에 평소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유신을 보고, 닉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게 더 부끄러워 유신은 바로 닉의 등을 떠밀었다.

“나, 난, 괜찮아요. 당신도 어서 씻고 와요!”

“응, 먼저 침대에서 쉬고 있어.”

닉이 그대로 욕실로 사라지자마자, 유신도 침대에 일자로 누웠다.

배 속의 아기가 기분이 좋은지 안쪽에서 콩콩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그게 기쁘면서도 새삼스럽게 더 부끄러웠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길게 목욕해서 그런지 온몸이 나른하긴 했다.

“하암.”

하품과 함께 유신의 몸도 점점 침대로 가라앉고 있었다. 슬슬 눈이 감기는 것을 본인만 몰랐다.

따지고 보면 샤워가 아니더라도 피곤할 만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다 끝난 것도 아니고, 낮에 많은 일도 있었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거의 감긴 눈을 비볐다.

“응?!”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레이스 커튼 사이로 햇살이 길게 방 안 침대 가까이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뭔가 불편한데. 왜 이렇게 온몸이 꽁꽁 묶인 느낌이지? 별생각 없이 몸을 돌리다가, 유신은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켰다.

헉! 코앞에 잠든 닉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밝은 아침에 보니 하얀 얼굴은 더 하얗게 빛나고, 금발이 반짝여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닉이 잠든 것을 기회로, 유신은 그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은 눈을 감고 있어도 그저 예술이었다. 닿을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자, 감긴 눈 아래 짙은 금빛 속눈썹이 그늘을 만든 것까지 다 보였다.

목욕 가운 차림이었는데, 완전히 흐트러져 안 입은 것만 못했다. 그나마 가운 아래로 아래 검은색 브리프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속옷은 입고 있었다. 물론 착 달라붙어서 안쪽의 두툼한 부피감이 그대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자면서 그랬는지 어쩌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찰싹 끌어안은 채였다. 닉의 팔은 자신의 등을 단단하게 감쌌고, 두 쌍의 다리는 자연스럽게 뒤엉켜 있었다.

덕분에 제 허벅지와 닉의 브리프 가운데 툭 튀어나온 윤곽이 마치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닉이 아직 깊이 잠든 상태라 브리프 아래는 크긴 해도 아직 발기 전인 듯했다.

물론 자신은 씻고 나왔을 때와 같은, 긴팔 티셔츠와 긴 바지 차림이다.

여하튼 생각도 못 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유신이었지만, 다음 순간 자신이 왜 잠에서 깼는지 알게 되었다.

똑똑.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일어나셨나요?”

유신이 흠칫 숨을 죽이는데, 문 바깥에서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진하게 러시아 억양이 섞이긴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영어였다.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은 유신이 러시아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아예 고려조차 않는 듯했다.

닉은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채였다. 원래 예민한 사람인 만큼 평소라면 진작에 눈을 떴을 텐데, 시차가 무섭긴 무섭다. 유신은 자신을 끌어안은 그를 조심스럽게 떼어 내려 시도하며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일어났어요.”

드디어 닉도 슬슬 잠에서 깨려는지 금빛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 하실 건지, 블라다 아가씨께서 여쭤보셔서요.”

“아, 아침요? 네, 네에, 먹어요.”

“그러면 30분 뒤에 식당으로 내려오셔요.”

하녀는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끝내더니 곧 문에서 멀어져 갔다. 유신은 결국 잠결에도 계속 저를 끌어안아 오는 닉을 세게 밀어 냈다.

“니카, 일어나요!”

“으응.”

드디어 잠이 깼는지 닉의 눈이 반짝 떠졌다. 청록색의 보석 같은 눈동자에 천천히 빛이 돌아왔다.

“유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마냥 달았다. 예쁜 얼굴이 비몽사몽에 자신을 발견하고 정말로 기쁜 듯이 웃으며 끌어안아 오자, 유신도 저도 모르게 그런 그에게 다정하게 답하고 말았다.

“응, 니카. 왜요?”

“지난 며칠간 네가 없어서 외로웠어.”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입술과 입술이 맞대어졌다. 잠도 덜 깬 것 같은데 키스의 기세만은 꽤나 열렬해, 당연하다는 듯 바로 혀가 파고들었다. 유신의 목 안쪽에서 달뜬 신음이 울렸다.

“으, 응.”

뜨거운 혀가 능숙하게 입 안의 기분 좋은 곳을 흠뻑 자극해, 유신이 마치 취한 것처럼 멍하니 그 감촉을 즐길 때였다. 파자마 아래로 닉의 손이 파고들어 왔다.

“어젯밤에 못 한 거 마저 하자. 어젯밤에는 누구 씨가 슬리핑 뷰티가 되는 바람에.”

어젯밤 자신이 잠들어 버린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거였다. 유신도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허벅지에 닿아 오는 뜨겁고 단단한 감촉까지.

아무리 유신이라도 그게 뭔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명확한 의도를 가진 음흉한 손길을 대놓고 찰싹 쳐 냈다.

“아파.”

닉이 손등을 문지르며 맥없이 항의했지만, 유신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지금은 안 돼요!”

저도 모르게 시선이 닉의 다리 사이로 향하려는 걸 애써 무시하며 유신은 딴청을 피웠다. 어느새 가운 아래 닉의 검은색 브리프 앞쪽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유신이 허벅지에서 느끼던 커다란 부피감이 바로 저것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되는 거야?”

“그, 그건.”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유신은 반사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방금까지 자신과 키스하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대놓고 야했다.

저 눈빛에 홀려 키스를 허락하던 때처럼, 순간 유신은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대답해 버릴 뻔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그의 말대로 자신이 잠들어 버린 잘못이 컸다.

그래도 휩쓸려 버리기 직전, 유신은 방금 전 자신이 하녀에게 대답을 했다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어, 어쨌든 지금은 밥 먹으러 가야 해요.”

그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 닉을 꾸욱 제게서 밀어 냈다.

“윽, 유샤.”

“됐으니까, 어서 준비나 해요. 아침 식사까지 30분밖에 없다고요.”

“좋네. 30분이면 충분히.”

“난 당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탁에 늦고 싶지 않아요. 방금 섹스했습니다, 하는 얼굴로 내려가고 싶지도 않고요.”

닉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거나, 끌어안고 두 번째 키스를 시도하는 등 잠시 이 상황에 대해 가벼운 반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애초에 유신이 아침 먹으러 가겠다고 하녀에게 대답한 시점에서, 그에게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아, 유샤. 제발.”

“어서 준비하고 나와요. 10분 드릴게요.”

결국 닉은 유신에게 떠밀리듯 욕실로 쫓겨나고 말았다.

***

닉과 유신은 아침부터 티격태격했다는 것을 감추지도 않고, 서로 툴툴거리며 식당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란히 선 둘은 자각도 없이, 사이에 다른 사람이 쉽게 끼어들기 힘든 노골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신. 좋은 아침, 니카.”

먼저 인사하는 유신을 블라다가 웃으며 맞이했다. 오늘 그녀는 하나로 땋아 내린 붉은 금발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왕관처럼 머리에 둥글게 말고 있었다.

어지간한 집의 거실보다 넓은, 호화로운 식당이었다. 스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듯한 긴 테이블이 한가운데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뉴욕에 있는 닉의 펜트하우스에서 지내며 유신은 자신이 넓은 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층 빌딩 안의 아파트였던 게다. 넓은 부지를 통으로 사용하는 저택과 비교하니, 펜트하우스조차 상대적으로 아담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하는 인원은 자신들을 포함해서야 겨우 네 명, 평소에는 고작 두 명일 터였다. 매일의 식사를 왜 굳이 이렇게 넓디넓은 식당에서, 그것도 많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는 건지, 평범한 소시민인 유신이 보기에는 그저 낭비였다. 물론 여기 있는 다른 세 명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길쭉한 식탁의 좁은 면에는 한 자리만 있고, 넓은 면은 양쪽으로 길게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좁은 한쪽 끝, 제일 상석에 이 집의 주인인 세르게이가 앉아 있었다. 의자 등받이조차 다른 자리에 비해 배는 높고 화려했다.

블라다의 자리는 그런 세르게이의 왼편이었다. 그녀의 맞은편으로 나란히 두 쌍의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는데, 이쪽이 닉과 유신의 자리인 듯했다. 자연스럽게 닉이 블라다와 마주 보는 제 아버지의 바로 오른편 자리에, 유신은 그 옆으로 앉았다.

제 누이가 콕 집어 자신을 부른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닉은 자리에 앉도록 꿋꿋이 별다른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유신은 처음에는 형제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유치하게 저러나 생각했지만, 한 박자 늦게 식탁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깨달았다.

“시간이 다 되어 가도 안 오길래 먼저 먹고 있었다.”

세르게이가 서늘한 시선을 닉에게 향했다. 닉이 냅킨을 펴다 말고 애매하게 웃었다.

“네, 괜찮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꼭 늦은 건 아니니까.”

닉이 바로 사과하자, 세르게이는 오히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유신이 처음 보았을 때와 거의 같은 가운 차림이었는데, 아마도 집에 있을 때는 보통 저리 입고 있는 듯했다. 중후한 외모도, 주변을 압도하는 날카롭고 인상적인 분위기도 여전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유신은 지난번 봤을 때보다 긴장감이 덜했다. 상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쪽은 내적인 친밀감이 훨씬 올라갔달까.

그제야 유신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세르게이가 가볍게 눈인사를 해 왔다. 유신을 무시해서라기보다, 제 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본인부터 혼란스러워 여유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나란히 놓고 보니 새삼, 두 부자는 전혀 닮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매우 닮았다. 이목구비는 많이 달랐지만 분위기나 표정을 쓰는 법이 고대로 쏙 뺐다. 지난번 대화로 봤을 때, 세르게이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주변에 흩뿌리는 분위기와 별개로 나란히 두면 눈의 호강인 부자였다. 취향의 얼굴이 두 개, 그것도 한눈에 들어오니 유신은 기분이 좋았다. 배 속의 콩알이도 좋은지, 막 식욕이 도는 듯했다.

마침 하녀가 바로 앞의 접시에 뜨거운 카샤(러시아식 죽)를 덜어 주었다. 식탁 가운데에는 과일이나 팬케이크, 딱딱해 보이는 빵과 소시지 따위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달걀 드시겠어요? 어떻게 해서 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난 스크램블.”

죽이면 충분할 듯해서 거절하는 유신과 반대로, 닉은 죽은 거절하고 달걀만 요청했다. 그리고 검은 빵을 한 조각 집어 두껍게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유신은 죽을 한 술 뜨고 조금 놀랐다. 생각 외로 우유 맛도 진하고 살짝 달콤했기 때문이다. 잣죽과 비슷하기도 했는데, 보이는 것만큼 걸쭉하지는 않았다. 따뜻하고 고소한 게 은근히 먹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천천히 몇 술 더 뜰 때였다.

“그러고 보니.”

세르게이가 러시아어로 닉을 향해 운을 뗐다. 정작 닉은 들은 척도 않고, 버터 바른 빵만 크게 베어 먹었다.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세르게이는 말을 이었다.

“어제 도착했다고, 블라디미라에게서 들었다. 집에 오면 당연히 인사부터 하러 올 줄 알았더니.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처음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닉은 천천히 손에 든 빵을 먹어 치웠다. 입 안에 든 것을 꼭꼭 다 씹어 삼키고, 무릎에 올려 둔 냅킨에 살짝 손까지 닦은 뒤에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딱히 절 보고 싶어 하시는 줄 몰랐네요. 늦은 시간이면 더 불편하실까 봐, 굳이 사용인들까지 피해 가며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갔는데 말이죠.”

“말을 재미있게 하는구나. 내가 너에게 그럴 리 없지.”

“사실 저는 오늘 아침 이렇게 여기서 마주친 것만으로도 놀라서요. 절 탐탁잖아 하신다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근 10년을 절 안 찾으시나 했죠. 제가 먼저 올 때까지.”

닉은 대놓고 일부러 속을 긁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세르게이 또한 만만치 않아 무슨 말을 하든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7년이겠지. 네가 여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때를 기준으로.”

유신은 닉이 할리우드에서 데뷔한 때를 속으로 거슬러 계산했다. 영화 캐스팅 작업이나 촬영 일정 등을 감안했을 때, 영화 개봉보다 1년 전에 먼저 러시아를 떠났다면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저한테는 10년이나 다름없어서요. 아니, 제 평생!”

순간 닉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유신이 제대로 놀랄 틈도 없이, 다음 순간 그는 바로 다시 차분해졌다.

“됐어요. 이제 와서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세르게이가 천천히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그의 앞에 놓인 접시는 이미 거의 비어 있었다.

“네가 알파로 발현한 게 몇 살이었더라.”

“그게 당신에게 상관있었을까요?”

“맞아, 18살이었지. 벌써 10년도 더 지났어.”

“어차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당신의 머릿속에 난 계속 보호하고 지켜 줘야 할 어린 막내에 불과했을 텐데.”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그것은 닉의 러시아식 이름이자, ‘세르게이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싶은 듯한 아직 강한 아버지를 향해, 젊은 아들 또한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아버지, 아세요? 어차피 같은 우성 알파끼리, 지금은 제가 아버지보다 더 강할걸요?”

식탁 위에서 두 우성 알파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둘 다 화를 낸다기보다, 마치 서로 위협하듯 견제하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상대에게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두 마리의 맹수였다.

달그락.

그때 유신의 손에서 들고 있던 스푼이 미끄러졌다. 놀랐다기보다 지나치게 집중하다 그만 손에서 힘이 풀린 쪽에 가까웠다.

그저 주변이 조용한 탓에 예상외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세르게이와 닉이 동시에 흠칫 유신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우성 알파 둘이 한꺼번에 쳐다보니 압박감이 상당했다. 이거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배시시 웃었다. 사실 우성 오메가인 그 정도 되니 가능한 일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무서워서 울었을 거다.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꽃이 피는 듯한 화사한 미소에 알파들은 맥이 풀려 버렸다. 분위기도 한결 느긋해졌다.

“아, 두 분 하던 이야기 계속하세요.”

정작 유신은 왜인지 다들 멀뚱멀뚱 자신만 보는 분위기가 어색해 아무 말이나 했다. 왜인지 세르게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했다.

“아버지, 저의 유샤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요.”

“네, 발레로 러시아에 유학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공부했어요. 말하는 건 좀 서툴지만요.”

유신의 설명은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반만 이야기한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중년 신사에게, 발레 댄서인 당신 아들의 극성팬으로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러시아어 읽기와 듣기가 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말하기도 충분히 훌륭해.”

세르게이는 정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저 놀란 얼굴은 절대 꾸며 낸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리저리 이어지던 심각한 대화가, 스푼이 미끄러진 이후로 이어질 기미가 없었다.

나름 엄청 중요한 대화였던 거 아닌가? 막 10년 만에 부자가 상봉해서, 싸우는 뭐 그런 분위기였는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유신은 자신이 잘못한 건가 미안해 괜히 안경 아래서 눈만 굴렸다.

닉은 다시 빵에 버터를 발라 먹기 시작했다. 그게 좋다기보다 본인도 어색해서 그런 듯했다.

갑자기 세르게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다 먹었다.”

놀란 블라다에게 딱 한마디만 대답하고, 세르게이는 식당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의 앞에 있던 접시는 다 비어 있었다.

“나도 다 먹었어.”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마침 빵을 다 먹은 닉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은 진짜 다 먹었다기보다, 원래도 크게 배가 안 고팠는데 입맛도 뚝 떨어진 듯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침 하녀가 아까 닉이 요청한 달걀 스크램블 접시를 가지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하는 닉을 대신해 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내가 먹을게요.”

하녀는 반사적으로 아직 김이 오르는 접시를 유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 맛있겠다. 나도 몰랐는데, 니카는 내가 먹고 싶어질 걸 어떻게 알았을까?”

유신은 포크를 들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당황한 듯한 닉을 향해 눈으로 괜찮다며 신호를 보냈다.

“니카, 다 먹었으면 먼저 올라가요. 난 천천히 먹고 갈게요. 그렇게 서 있으면 신경 쓰이거든요?”

“알았어. 고마워.”

닉은 잠시 고마움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을 나갔다.

그렇게 두 부자가 차례로 사라지고, 이제 식당에는 블라다와 유신만 남았다.

“와, 이거 맛있다.”

근데 빈말이 아니라 갓 만든 스크램블은 진짜 맛있었다. 케첩을 안 뿌려도 간이 딱 맞았다.

마침 블라다가 맞은편에서 유신에게 케첩을 건네려고 팔을 뻗은 참이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마요네즈 병도 함께였다. 달걀 스크램블에 마요네즈라니 좀 이상하긴 했지만.

“유신, 괜찮아요?”

“네, 이거면 소스 없이도 먹을 수 있겠어요. 사실 달걀은 별로 안 먹고 싶었는데, 막상 먹으니까 엄청 맛있네요.”

“아뇨, 달걀 말고요. 아휴, 내가 물어 뭘 해.”

태연한 유신을 보고 블라다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일반 알파인 그녀는 아까 두 우성 알파의 다툼에 식은땀이 등에 밸 정도였던 것이다. 역시 괜히 우성 오메가가 아니었다.

정작 유신은 태연히 나머지 스크램블만 냠냠 먹어 치울 뿐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본인들만 모르지 정말 닮았다고, 역시나 둘의 다툼은 일종의 동족 혐오가 아닐까 생각했다.

***

유신이 식사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창밖의 정원이 너무 아름다웠다.

날씨는 화창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기분 좋다. 여기서 햇살이 너무 강했다면 오히려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위도가 높아서 그런지 햇살 자체가 부드럽고 선선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닉하고 산책이나 할까.”

그러고 보면 식사 중에 블라다가 오늘은 좀 멀리 나가 보자고 했다. 바다 근처에 있는 궁전에 가자는 거였다.

러시아 황제가 여름휴가 때 들르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그 궁전은, 유신도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관광지였다. 넓은 정원에 황금 분수를 비롯한 수많은 분수들이 특히 유명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닉과 같이 가면 재미있을 듯해, 일단 블라다에게는 간다고 해 놓았다. 물론 닉에게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가게 되면 중간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도 슬쩍 떠봐야지.

그나저나 닉도 무사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는데, 밀리한테 그와 무사히 만났다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실은 어제 일찍 잠든 이후로, 핸드폰을 방 어딘가 던져둔 채 확인조차 안 하고 있었다. 좀 귀찮아져서 어차피 늦은 거 아예 관광까지 다녀오고 나서, 좀 더 정리되면 연락할까 유신이 생각하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대공 각하.”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생각도 못 한 상대에게, 유신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처음에는 순간 닉이라고 생각했다. 늘어진 그림자의 체형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햇살에 부딪혀 거의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에서 붉은 기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닉의 머리라면 이 정도 빛에서는 거의 흰색으로 반짝였을 게다. 물론 그 붉은 금발의 주인은 닉의 아버지 세르게이였다.

“대공 각하라니. 그냥 세르게이라고 불러.”

“네. 출근하세요?”

그새 옷을 갈아입어, 지금 세르게이는 멋진 스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저 긴 팔다리에 꼭 맞는 것으로 보아 맞춤이 분명했다. 늘씬하면서도 남성미 넘치는 몸에, 재킷 아래 단추를 완전히 채운 조끼가 아주 잘 어울렸다.

유신은 닉의 턱시도 차림도 좋아했지만, 이런 정장도 나쁘지 않다고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언젠가 닉도 딱 저런 풍으로 입혀 봤으면 좋겠다.

“그래, 지금 나가는 길이야. 오늘 네 일정은 어떻게 되지?”

이제 유신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것을 아는데도, 세르게이는 여전히 영어로 말을 걸어 왔다. 아무래도 유신에게 러시아어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 것을 알기 때문인 듯했다. 꽤나 사려 깊은 배려지만, 정작 본인은 딱히 자각하고 하는 행동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블라다가 같이 가자고 해서, 여름 궁전에 갈 것 같아요.”

“거기 좋지. 잘 다녀와.”

“물론 니카도 같이요.”

유신이 살짝 덧붙인 이름에 세르게이가 잠시 멈칫했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여, 유신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신기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아내도 우성 오메가였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내 아들이 우성 오메가를 결혼 상대방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어서 말야. 사실 아내 말고 우성 오메가는 거의 처음 봐.”

“어떻게, 절 보니 사모님이 생각나세요?”

유신은 장난스레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은 쓸데없이 단호했다.

“전혀.”

제 어깨 너머, 훨씬 더 먼 어딘가를 향하는 녹색 눈동자에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유신은 자신은 본 적 없는 그 누군가를 세르게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르게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곤란한 듯 덧붙였다.

“하나도 안 닮았어.”

“그분이 훨씬 미인이셨구나.”

“당연하지!”

저렇게 버럭 하는 모습은 정말 닉하고 똑같다고 유신은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연상의 어른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좀 귀엽다.

“니카랑 닮았다니, 진짜 아름다우셨을 거 같아요. 옛날에 잡지에서 사진을 본 적 있는데 그때도 미인이시다 생각했는데.”

“옛날 잡지?”

“네, 러시아의 발레 잡지요.”

“그런 걸로 러시아어를 공부했나 보군.”

세르게이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그저 니카의 사진과 기사를 스크랩하기 위해서 잡지를 사고 모았던 유신은 괜히 찔려, 좀 야단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네, 맞아요!”

다행히 세르게이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긴 했다.

“혹시 그러면 우리 아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아는 건가?”

“네, 뭐, 그렇겠, 죠?!”

실은 하나하나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워 그렇다고 말은 안 할 거지만.

“네가 발레를 전공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게 우리 아들에 대해 잘 아는 줄은 몰랐군.”

“이상하게 대부분 그렇다고들 생각하시더라고요.”

어색하게 웃는 유신을 향해 세르게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까 식사 중에는 못 볼 꼴을 보여 미안해.”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러시아어를 알아듣는 걸 미리 말씀 안 드려서.”

“아니야. 아들의 결혼 상대인데, 당연히 모를 거라고 여긴 내 생각이 짧았지.”

거기까지 말하고 세르게이는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그 녀석은 알파가 된 이후로 이상하게 나한테 반항적이란 말야. 그 때문에 발레를 그만두게 돼서 속상한 건 알겠지만.”

“알파라서 발레를 그만둘 필요는 없어요.”

지나치게 단정적인 말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유신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도 세르게이는 비슷한 소릴 했더랬다. 그때는 대화의 흐름상 얼렁뚱땅 별다른 반박 없이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알파가 발레를 하는 경우는 없어. 지금 직업이 훨씬 낫지. 배우는 알파가 하기 좋은 직업이야.”

“물론 무용계에 오메가가 많긴 하지만, 요즘은 알파도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활동 가능해요. 실력이 더 문제죠.”

사고로 무용을 포기했던 유신으로서는 형질 따위로 그만두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오히려 배부른 소리 같았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계속 완고했다.

“사실 알파로 발현할 줄 알았으면 발레를 안 시켰을 거야. 어릴 때부터 워낙 작고 예쁘고 약해서, 분명 막내 녀석은 제 누나와 다르게 오메가일 거라고 나도 아내도 확신했었거든. 마침 얼굴도 우성 오메가인 아내를 쏙 뺐으니 말이지. 거기다 그런 일도 겪었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에 유신도 저도 모르게 한 사건을 떠올렸다.

“그거 혹시 유괴.”

하지만 말하고 제 쪽이 오히려 더 흠칫해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저런 대화로 조금 주의가 흐트러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니카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안다더니 그 유괴 사건도 포함인 건가.”

“아, 뭐, 어쩌다 보니.”

“아무래도 자식이 유괴 같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말이지. 부모로서는 좀 예민해지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공교롭게도 아내가 사고로 죽은 지 얼마 지나도 않은 때기도 했고, 나도 당시엔 참 필사적이었지. 아무 일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사실 닉은 그 일로 아직도 약하지만 폐소 공포증을 겪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 세르게이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지만, 부모로서 그 역시 힘들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의 말대로 어린 닉은 정말 인형같이 예쁜 아이였고, 성장기가 늦게 와서 또래보다 작은 만큼 더 사랑스러웠다. 당시의 사진은 정말로 구하기 힘들었지만, 물론 유신은 경력이 긴 열성 팬답게 잡지 스크랩은 물론 하드 디스크에 고화질 파일로 모두 가지고 있었다.

여하튼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부모로서 약간 과보호하게 된 거라면, 자꾸 보호하고 싶어 하는 저 마음도 전혀 이해 못 할 건 아니긴 한데 말이지.

“예정일은 8월 중순이던가?”

갑자기 세르게이가 화제를 돌렸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신도 냉큼 대답했다.

“네, 맞아요. 아기랑 만나려면 아직 좀 더 있어야 합니다.”

“아직 거의 티가 안 나는군. 옷이 헐렁해서 그런가?”

“그죠? 원래 남자 오메가는 임신해도 배가 많이 안 나온대요.”

“그렇군.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모르고?”

처음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궁금해할 만한 질문에, 별생각 없이 대답하던 유신이 멈칫했다. 너무 티가 나 세르게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아직 모르나?”

“네, 아직 모르기도 한데요. 실은 얼마 전에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니카는 자기는 오히려 상관없다고 했어서요.”

지금 눈앞에서 궁금하다며 대놓고 묻는 세르게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반응이었다. 그 차이가 유신에게는 이상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래? 상관없다고 했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르게이가 되물었다. 그도 그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생각하는 듯했다.

“네, 아기가 남자애든, 여자애든,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도 상관없이 잘 키우자고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베타는 좀.”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베타세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닐걸요.”

아까의 이야기도 있고, 유신은 일부러 구체적으로 대답했다. 세르게이는 뭔가 허를 찔린 듯했다.

“아니, 난 그저.”

그때 엘리베이터가 띵 하고 열리며, 닉이 내렸다.

“유샤!”

그는 주변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바로 유신을 향해 직진했다. 잘생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하도 안 와서 찾으러 왔잖아.”

아무리 기다려도 유신이 안 오니 직접 찾으러 내려온 듯했다.

그러고 보면 닉은 항상 유신을 쉽게 찾아내곤 했다. 펜트하우스에서 지낼 때도 그 넓은 집에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린 적이 없었다. 유신이 하도 신기해서 어떻게 아냐고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냥 알 수 있다던가? 하여튼 그냥 느껴진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어제 시내에서 거짓말처럼 딱 마주친 것도 그런 능력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창밖의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 정신을 뺏겼어요.”

자연스럽게 껴안아 오는 사랑하는 알파의 등에 유신도 마주 팔을 둘렀다. 그대로 닉이 당연하다는 듯 유신에게 키스하려던 때, 가만히 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결국 못 참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니카.”

“아버지.”

그제야 세르게이의 존재를 깨달은 닉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유신만 보느라 있는 줄도 몰랐던 듯했다. 유신 쪽에서는 닉의 어깨에 가려 세르게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유신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잠시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바라본다 싶더니, 누가 먼저인지 애매하게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유샤, 가자.”

“하지만.”

닉이 자신을 좀 더 세게 품으로 당겨 와, 유신은 일단 그에게 폭 끌어안겼다. 슬쩍 돌아보니 세르게이는 무심하게 신경 안 쓴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중후한 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웃기게도 그건 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자신이 계기였다지만, 결국 제 발로 여기까지 왔다는 건 닉도 나름대로 아버지와 갈등을 풀 생각이 있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날만 세우면 풀릴 것도 안 풀리겠다. 계속 안 보고 지내던 때야 그렇다 치고, 기껏 와서까지 굳이 저래야 하나, 싶은 것이 유신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조금만 더 솔직해지면 그래도 대화가 가능할 것도 같은데, 둘 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니 당연히 엇나갈 수밖에 없는 거지.

닉이 여전히 유신을 품에 안은 채 휙 몸을 돌렸다. 유신은 그 와중에도 세르게이에게 눈으로 인사하는 것을 빼먹지 않으며, 부자 둘이 정말 똑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

주차장에 도착하고서야, 블라다는 자신이 목적지를 잘못 정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름 궁전은 원래가 유명 관광지다. 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슈퍼스타다. 그녀도 그 두 가지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제대로 연결 짓지 못했다고나 할까.

뭣보다 뽈뽈 기어 다니는 시절도 기억하는 (실제로는 이미 20대 후반이지만) 남동생이 파괴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현실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갭이 있었다.

그녀도 눈이 있으니 제 남동생이 잘생긴 거야 알고 있었지만, 계속 보던 얼굴인 만큼 별다른 느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몇 년이나 떨어져 있다 보니 어릴 때로 인식이 고정돼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주차장 입구부터 드글드글 넘쳐 나는 관광객들을 보자, 그제야 덜컥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냥 돌아가자고 하는 것도 웃길 거 같고, 어떡하지?

블라다는 속으로 이런 걱정을 하며,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백미러로 살폈다.

그녀는 오늘 운전사 미하일 옆의 조수석에 앉았다. 임산부인 유신이 당연히 뒷좌석에 앉고 보니, 그 옆자리는 아무래도 아기 아빠인 닉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둘이 붙어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참으로 보기 흐뭇한 광경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이 옆구리가 시려서 그렇지.

“그럼 전 근처에서 적당히 시간을 죽이고 있을 테니, 나오기 10분 전에만 연락해 주십시오.”

미하일은 안까지 같이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실 운전사로 따라왔으니 꼭 그럴 필요도 없긴 했다. 그대로 차에서 내리려는 그를 블라다가 황급히 붙잡았다.

“자, 잠깐, 미하일!”

“넵, 아가씨.”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꼭 여길 가야 할까? 다른 장소가 더 낫지 않을까?”

“1시간이나 걸려서 달려왔는데,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저.”

할 말이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횡설수설하는 블라다의 태도가 뒷좌석에서도 다 보였다.

“블라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유신. 그냥 잠깐.”

상냥하게 묻는 유신을 향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카, 너! 그 모자는 뭐니?!”

닉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보라색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전날 사서 잘 이용했던 바로 그 야구 모자였다. 보라색 바탕에 초록색 러시아어로 ‘최고’라고 적힌, 요상하게 야단스럽고 꽤나 촌스러운 바로 그 모자 말이다.

“니카의 금발이 좀 눈에 띄잖아요. 그래서 챙겨 왔어요. 머리카락만 가리면 다들 영 못 알아보거든요.”

당황하는 블라다와 달리 유신은 마냥 태연했다. 그 옆에서 최대한 꼼꼼하게 금발을 가리도록 모자를 조정하며, 닉이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안 그래도 여기 사람 많을 줄 알았어. 어때, 유샤? 선글라스도 낄까?”

닉의 질문에 유신은 살짝 고개를 뒤로 빼서 그의 모습을 살피고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은데요. 이 모자가 좀, 그렇잖아요.”

“잘됐군. 미국에 돌아갈 때도 챙겨 가야겠어.”

닉이 만족스럽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블라다도 순간 설득당해 버렸다. 그래, 당사자들이 괜찮다는데 그 말이 맞겠지, 자신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게다가 유신의 말대로 저 모자가 좀, 그렇긴 했다. 확실히 저걸 쓰고 있는 것만으로 반짝이는 미모의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그냥 길에 다니는 패션 센스 나쁜 키 큰 청년 1로 바뀌는 것이다. 무슨 변신 아이템 같달까?

정말 모자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세 사람은 별다른 소란 없이 느긋하게 관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실은 닉을 빼고 블라다나 유신만 해도 꽤나 눈길을 끄는 외모라,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보고 있었지만 둘 다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고 닉의 모자가 아무 소용도 없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닉이라도 가리고 있어서, 그냥 돌아보는 정도에서 끝났다고나 할까?

마침 날씨도 딱 덥지도 춥지도 않고 적당했다. 맑고 새파란 하늘 때문에 경치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궁전은 금박을 두른 지붕이 인상적인 멋진 건축물이었다. 커다란 건물이 작게 느껴질 만큼 넓디넓은 정원도 훌륭했다. 핀란드만까지 연결된다는 운하도 예뻤다.

하지만 제일 멋진 건 역시나 분수대였다. 물론 멋진 만큼 사람들도 넘쳐 났다.

“무슨 분수대마다 사람들이 줄 서 있어.”

“전 분수대 앞에서 사진 찍는 거 포기했어요.”

닉과 유신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만했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정원이 워낙 넓다 보니 전체적으로는 한가로웠다. 단, 포토 스팟인 분수대 근처만은 몰려든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관광지가 아니라 시장 바닥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신은 그조차 즐거웠다. 솔직히 그 이유 중 제일 큰 부분은 옆에 닉이 있어서였지만. 어제 자신과 같이 다녀 준 블라다에게 괜히 미안하기도 했는데, 정작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둘이 사이좋아서 좋다며 더 기뻐했다.

한동안 쉬엄쉬엄 구경하다, 마침 벤치가 보여 쉬어 가기로 했다. 블라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유신은 아침부터 신경 쓰이던 이야기를 슬쩍 흘렸다.

“저기, 니카. 당신 아버지와 관련해서 말인데요.”

“미안, 지금은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닉은 생각 외로 완고했다. 오래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으니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말은 안 하지만 도와줬으면 하는 거 같아서 묘하게 신경이 쓰인달까.

어쩌면 좋을까 유신이 생각하는데, 마침 블라다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콘 아이스크림 세 개가 들려 있었다.

“내가 먹고 싶어서 샀어. 먹기 싫은 사람 있으면 내가 다 먹을 거야.”

그러고 보니 저 앞에 아이스크림 가판대가 있었다. 유신은 이제야 발견했는데, 블라다는 벌써 계산까지 끝내고 사 온 거였다.

“잘 먹을게요.”

바로 감사 인사를 하는 유신의 옆에서, 닉이 블라다에게 투덜거렸다.

“레몬 셔벗은 없었어? 난 요새 레몬 맛이 좋더라.”

“니카,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

결국 유신은 바닐라, 닉은 딸기, 블라다는 초코를 골랐다.

“유샤, 바닐라 맛있어?”

“먹어 볼래요, 니카?”

“응. 그럼 딸기도 먹어 봐.”

자연스럽게 한 입씩 나눠 먹는 두 사람을 보고 블라다가 입을 삐죽였다.

“진짜 나도 다음엔 꼭 애인 데려와야지.”

닉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반응이었지만, 유신 쪽에서 바로 눈을 빛냈다.

“블라다, 애인 있어요? 어떤 사람이에요?”

“실은 아버지한테는 아직 이야기 안 해서 비밀인데.”

블라다는 말로만 비밀이라면서, 기다렸다는 듯 술술 자랑을 시작했다.

“응, 응, 그래서 내후년쯤에는 결혼까지 생각 중이고, 아이는 두 명 정도 낳고 싶어. 그래서 유신이 임신한 게 너무 부러워!”

그녀는 결혼 계획부터 자녀 계획까지 밝히더니, 급 유신에 대한 부러움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닉과 블라다는 금세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치웠고, 유신도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쪽이 깎은 듯이 경사져 있는 길이었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경치가 예술이라,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유샤, 조심해야 해. 너무 몸 내밀면 안 돼. 위험하니까.”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긴 했지만 유신은 아무 문제 없이 잘 걷고 있는데, 닉 혼자 앞서서 야단스럽게 걱정했다. 그렇게 자신을 보느라 아예 뒤만 보고 걷는 닉을 유신이 오히려 타박했다.

“남 이야기할 때가 아니거든요. 당신이나 앞을 잘 봐요.”

“나? 난 걱정하지 마. 아주 잘…….”

“앗! 니카.”

마침 혼자 툭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닉의 모자가 걸려, 보기 좋게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솔직히 닉 혼자서 그랬다면 그렇게까지 바로 눈에 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신과 블라다 때문에 안 그래도 시선을 모으고 있던 세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닉의 화사한 금발과 화려한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어, 아는 얼굴인데.”

“닉 메드잖아!”

당연히 그중에 닉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닉 메드라고? 어디?”

“와, 실물이다.”

“완전 잘생겼다.”

할리우드 스타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웅성댔다. 금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 인터넷에서 봤는데, 지금 이 도시에 있다 그랬거든. 진짜였구나.”

“옆에는 소문의 약혼자 아냐?”

아마도 어제 유신과 만나면서 찍혔던 사진이 이미 넷상에 다 퍼진 듯했다.

“사진 찍어 주세요.”

“악수해 주세요.”

“사인해 주세요.”

어제와 비슷한 패턴이었다. 이 도시 사람들이 유달리 연예인에 관심이 많은 건지, 닉 메드가 같은 러시아인이라서 흥분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좋은 흐름은 아니었다.

그나마 어제는 불량배와 시비 중이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거였다. 오늘은 대놓고 아예 닿을 정도로 가까이 몰려왔다.

동시에 사람들을 막아서는 검은 옷의 남자들을, 유신은 어제도 본 것 같았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몰라도, 역시 경호원이 맞는 듯했다. 덕분에 사람들이 닥치는 건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정신없이 밀리는 와중에 유신이 그만 발을 헛디뎠다.

“앗.”

원래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다. 그래도 평소라면 살짝 밀린 정도로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요즘에 운동을 좀 등한시했더니 결국 이렇다고 유신은 속으로 후회했다. 그대로 그의 몸이 옆으로 휙 넘어가려는 때였다.

“안 돼, 유샤.”

경호원들도 움직였지만, 닉이 한 박자 더 빨랐다. 그와 유신이 바통 터치를 하듯 서로 위치가 바뀌었다. 아슬아슬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는 유신을, 마침 다가온 경호원이 부축했다.

“니카!”

하지만 닉의 몸은 그대로 크게 아래로 날았다.

***

누군가가 다급히 병원으로 뛰어들었다.

“어머, 당신은!”

너스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너무 급한 나머지 간호사의 존재는 깨닫지도 못했다.

목적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긴 다리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장소를 생각해 차마 뛰지 못할 뿐, 거의 바닥을 부술 기세였다.

그리고 그 뒤를 한 박자 늦게 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복도 제일 끝에는 그 병원에서 제일 넓고 좋은 특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제일 비싼 병실이다.

“이렇게 야단스럽게 입원실까지 잡을 필요는 없었는데.”

나란히 놓인 두 개의 환자용 침대 중 하나에서, 닉이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파란색의 빳빳한 환자복 차림이었는데, 촌스러운 환자복이지만 그가 걸치자 디자이너가 만든 실험적인 패션쇼 의상처럼 보였다.

“나도 너 멀쩡한 거 알아. 그냥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거지.”

블라다가 말도 안 된다며 닉의 투정을 바로 끊어 냈다.

“니카, 어때요? 지난번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내 심정을 이젠 좀 알겠어요?”

나란히 놓인 침대 중 나머지 하나에서 유신이 한껏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 역시 닉과 같은 파란색 환자복을 입고 있다.

“그치만 넌 임신 중이기도 하고, 만에 하나 모르는 거니까.”

“걱정되는 건 서로 똑같다구요. 얼결에 저도 검사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얌전히 검사 결과를 기다리자구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푹 쉬고 있자고, 유신은 이불까지 꼭꼭 덮으며 침대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반짝반짝 산뜻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 웃는 얼굴에 닉이 홀린 듯 자신도 침대에 몸을 기댔다.

지금 두 사람이 병원에서 제일 비싼 병실에 나란히 누워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 난리 통에 넘어질 뻔한 유신을 대신해, 닉이 언덕 아래로 크게 미끄러졌다. 그래 봤자 푹신한 잔디 때문에 딱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데굴데굴 몇 바퀴나 구르고 말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없다 보니 몸을 일으키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나지 않은 잔디밭 쪽이라 누군가 도우러 오는 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블라다가 호들갑을 떨며 구급차를 불러 놓은 것이었다. 닉은 일단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기 올라탔다. 하지만 그대로 정말 병원에 입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황하는 닉의 옆에서 유신도 남매가 행동이 꽤 비슷하다고 재밌어하며 구급차에 따라 탔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은 그 입원 대상에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닉은 굴러떨어지면서 다친 곳은 없는지 검사, 유신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으니 배 속의 아기에게 이상이 없는지 검사한다는 명목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심각하게 들리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순한 건강 체크 정도였다.

참고로 이 병실은 원래 독실인 것을, 블라다가 특별히 강요, 아니 요청해서 억지로 침대 하나를 급하게 추가해 2인실로 쓰고 있는 거였다. 닉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유신은 전혀 몰랐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다 보고 있어서 소문 다 났겠어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급차에 실려 왔잖아요.”

걱정스러워하는 유신의 말에 닉이 질색을 했다.

“정확히는 멀쩡히 내 발로 구급차에 올라탔거든. 다들 날 무슨 의식을 잃고 긴급히 실려 온 사람 취급이야.”

“실제로도 그렇게 아는 사람 많을 것 같아요.”

닉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아이잭하고 연락했어. 미디어랑 연락해서 대충 수습하겠대.”

“아, 정말요? 잘됐다.”

“솔직히 내가 딱히 잘못한 건 없잖아.”

“그렇긴 해요.”

영 억울해 보이는 닉에게 유신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닉은 SNS를 확인하는 듯 슥슥 핸드폰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SNS에 셀카라도 올릴까?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건 이미 소문 다 난 것 같은데.”

“셀카 좋죠.”

유신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눈동자는 닉이 의도한 것과는 좀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물론 닉은 이제 유신이 왜 저러는지 다 읽고 있었다.

“남 일처럼 말하지 말고. 셀카엔 당연히 너도 함께지.”

이어지는 닉의 말에 유신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나랑요? 난 다른 사람하고 찍은 거 말고 당신 혼자 찍은 셀카가 더 좋은데. 저장해서 다시 볼 때도 그렇고.”

“아니, 내 SNS 셀카가 그렇게 중요해? 실물이 지금 네 눈앞에 있다고.”

누가 봐도 딴 팬심으로 해맑게 뺨을 붉히는 유신에게, 닉이 어이없어했다.

정 단독 셀카를 원하는 거면 지금 당장이라도 100장은 보내 줄 수 있는데, 그걸 원하는 건 또 아니겠지. 닉이 정말 쓸데없는 부분에서 고민에 빠져들 때였다.

갑자기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디지? 내 아들은 괜찮은가??”

큰 키에 멋진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그 방문객은 물론 세르게이였다.

확실히 머리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아침보다는 좀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도 급히 달려와 그런 듯했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숨까지 거칠어져 있었다.

“아버지?!”

생각도 못 한 등장이었는지, 블라다가 한껏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 뒤로 한 무리의 검은 옷의 남자들이 헉헉거리며 뒤따랐다. 운전사 미하일이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고 그들을 말리고 있었다.

유신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세르게이는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닉의 침대 앞으로 갔다.

“뭐야? 멀쩡해 보이잖아.”

중후한 외모에 걸맞지 않게 세르게이는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닉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네, 멀쩡하니까요. 대체 어디서 무슨 이야길 들으신 겁니까?”

“사고가 났다고.”

“그냥 어쩌다 보니 비탈길에서 좀 미끄러진 것뿐이에요. 사실 꼭 병원에 올 필요도 없었는데.”

“유신은 괜찮고?”

세르게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나란히 있는 침대에 앉은 유신을 향했다. 유신은 괜찮다며 방긋 웃었다.

“저는 더 멀쩡해요. 아예 미끄러지지도 않은걸요. 그냥 옆에 있었는데 놀란 거 같다고, 함께 검사받은 것뿐입니다.”

“하아, 정말 다행이야.”

세르게이가 갑자기 긴장이 풀린 듯, 비틀비틀 침대의 철제 프레임에 손을 짚었다.

“나는, 알리냐처럼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알리나는 그의 죽은 아내이자, 닉과 블라다의 어머니였다. 무엇보다 그는 사고로 아내를 잃었던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머니의 이름에는 닉도 살짝 허를 찔린 듯했다.

“제가 언제 죽어도 당신은 신경 쓰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리 없잖아! 그래도 명색이 네 아버진데!”

닉의 말에 왜인지 세르게이가 버럭 화를 냈다. 두 부자는 빤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탁에서 서로를 노려볼 때에 비해, 왜일까? 유신은 그 눈빛이 한풀 누그러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유신이 호기심 가득한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누군가 톡톡 제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블라다였다.

“자아, 이제부터는 고집쟁이 둘이서 알아서 하도록 하고, 우리는 잠시 나갈까요? 날씨도 좋은데, 답답하게 병실에만 있지 말고 잠시 산책 어때요?”

블라다는 유신을 데리고 슬쩍 병실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는 뒤쪽에서 낮은 러시아어로 두 부자가 끊어질 듯 느리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로 정원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블라다는 우선 너스 스테이션 앞쪽의 자판기로 향했다.

“뭐 마실래요?”

“아뇨, 전 괜찮아요.”

“난 탄산 좀 마셔야겠어.”

그녀는 캔 콜라 하나를 뽑아서는 단번에 거의 다 들이켰다. 그리고 겨우 시원해진 표정으로 유신을 돌아보았다.

“정말 신경 쓰이게 하잖아요?”

“네?”

“저 두 사람 말예요.”

블라다는 입 안으로 투덜투덜 제 아버지와 남동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앞서 걸었다. 처음 말했던 대로 정원으로 나가는 듯했다.

그 뒤를 느긋이 따라가며, 유신은 부모와 자식 사이란 뭘까 생각했다. 자신 또한 부모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워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 한발 물러선 입장이 되고 보니 확실히, 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가족이란 어쩌면 굉장히 어렵고도, 굉장히 쉬운 관계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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