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17/22)

제3부 제1장

끈적이는 더운 공기가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제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닉은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물론 그 머리통의 주인은 유신이었다.

드디어 어제부로 유신의 기말고사가 마지막 한 과목까지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닉의 촬영은 벌써 일주일 전에 끝이 난 상황이었다.

그동안 유신은 시험을 이유로 닉이 제게 손도 못 대게 했지만, 페로몬 때문에 계속 옆에 있어 주기를 은근히 원했다. 물론 닉은 당연히 그렇게 했고, 덕분에 계속 참느라 지금 폭발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한 적도 없다면 거짓말이고, 현실적으로 거의 일어날 리 없다고 넘겼더랬다. 일어나더라도 훨씬 더 훗날에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지.

대신, 닉은 둘만의 여행을 계획했다. 어딘가 한적한 해변에서 단둘이 느긋하게 여름휴가를 즐기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리브해의 외딴섬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유신이 임신 중이다 보니 일부러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가 오케이만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납치 사건 이후, 닉의 펜트하우스로 이사한 유신이었다. 닉은 침실 중 하나를 온전히 유신이 쓰도록 내어 주었지만, 잠은 항상 여기 마스터 침실을 함께 사용했다.

이 펜트하우스에서 제일 넓은 방으로, 별다른 가구 없이 덜렁 놓인 침대는 더더욱 터무니없을 정도로 컸다. 덕분에 키가 큰 성인 남성 둘이 누워 마구 뒹굴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제일 큰 욕실과 닉의 옷으로 가득 채워진 넓은 드레스 룸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어 편했다.

“윽.”

유신이 깊게 성기를 문 채 혀로 발기한 귀두를 핥자, 닉은 충동적으로 부드러운 감색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었다.

닉의 코끝을 맴도는 레몬과 민트가 뒤섞인 상큼한 향이 확 짙어졌다. 유신의 페로몬이었다.

여전히 닉의 성기를 입에 머금은 채, 유신이 눈만 들어 닉과 시선을 맞추었다. 안경은 벗은 큰 눈에서 커다란 눈동자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섬세한 속눈썹은 흥분으로 조금 젖어 있었다.

닉의 성기가 워낙 크다 보니, 유신의 입으로 다 물기는 쉽지 않았다. 뺨 한쪽에 튀어나온 성기의 윤곽이 적나라했다. 언젠가 닉이 유신이 입으로 해 주는 상상을 했을 때와 같은 모습, 아니 더 야했다.

그대로 시선을 맞춘 채 유신이 상긋 미소 지었다.

“하, 유샤.”

닉의 신음 같은 속삭임과 함께, 유신의 입 안에서 그의 성기가 한층 더 커졌다. 원래도 버거웠던 부피감에 그의 속눈썹이 당황한 듯 살짝 아래로 휘었다.

하지만 유신은 고개를 뒤로 빼는 대신, 오히려 슥 시선을 아래로 하고는 좀 더 깊게 물어 왔다. 닉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우.”

지금 닉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은 채였고, 유신은 침대 아래에 깔린 러그에 앉아 있었다. 아직 눈에 띌 정도는 아니라도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한 유신이 닉의 성기를 입에 물기 위해서는 이 자세가 제일 편했다.

물건이 워낙 커서 그렇게 물어도 반 정도도 입 안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신은 서툰 대로 열심히 닉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행위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버거운 크기에 본능적으로 혀를 쓰자, 크게 벌어진 입술과 성기의 틈 사이로 의도치 않게 츄윱츄윱 빨아 당기는 야한 소리가 났다. 유신은 점점 몰입하며 핥는 것에 집중했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성적 자극에 닉의 흥분도 높아져 갔다. 안 그래도 한껏 쌓인 상태였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유신이 공부할 때 쓰는 방에서, 수줍게 시험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닉은 이제 슬슬 여름휴가에 대해 말을 꺼낼 생각이었다.

방 여기저기에 유신이 예전 집에서 쓰던 물건들이 보였다. 특히 원래 침대 앞에 붙여 두었던 닉의 포스터 3종 세트가 여기서도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아니, 방이 예전보다 더 커지면서 벽이 환해져서 오히려 더 존재감을 과시했다.

막 시험이 끝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상 위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교재나 참고 자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닉은 그 사이에서 유신의 여권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면 이사할 때 썼던 커다란 캐리어도 마치 짐을 새로 넣은 듯 빵빵했다. 그런 것치고 방 여기저기 보이는 유신의 짐은 전혀 줄어든 기색이 없었지만.

여권과 여행 가방을 보고, 닉은 유신이 제 여행 계획을 눈치챘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그도 어서 여름휴가를 가고 싶은 게 틀림없다고. 하지만 닉이 휴가에 대해 미처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신이 닉의 손목을 끌고 마스터 침실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다음이 자연스럽게 지금 이 상황이다.

솔직히 평소 유신의 행동을 생각했을 때 갭이 너무 크긴 했다. 하지만 닉은 지난 일주일 동안 만지지 못하게 한 데 대한, 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했다. 원래부터 본인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뭣보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거부하기에 너무 커다란 유혹이었다.

유신은 대놓고 수줍어하면서도 일단 시작하니 더 이상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서툰 것이 감춰지지 않는 것이 더 사랑스러웠다.

깊게 숙인 고개를 타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뺨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유신은 깨닫지 못한 채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닉은 그 머리칼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 좋아.”

상상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 유신은 입을 움직이며 직접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현실은 상상과 같으면서도 확실히 달랐다. 좀 더 서툴고, 풋풋하고, 더 야하고,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더 흥분되었다.

“제길.”

닉은 자각도 없이 점점 더 거칠게 유신의 입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과격한 행위에 유신의 고개가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언제 유신의 입 안에 해 버릴지 몰라, 닉은 허리를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신호를 읽지 못한 건지, 빠는 행위에 몰입했는지, 아니면 그저 닉이 허리를 빼게 해 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유신은 오히려 더 세게 빨아 왔다.

어차피 시작하기 전부터 닉은 이미 한계였다.

“읏!”

결국 유신의 입으로 닉의 정액이 폭발했다. 간만의 사정은 쉬이 끝나지 않고 꿀렁꿀렁 이어졌다. 닉은 뱉으라고 할 작정이었지만, 유신은 빨아 당기던 흐름에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콜록콜록. 익숙지 않은 비릿한 점도와 맛에 유신이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잔기침을 해, 닉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유샤, 괜찮아? 입 아프진 않고? 미안해. 내가 뺐어야 했는데.”

하지만 유신은 오히려 해맑았다. 그는 씩씩하게 옷소매로 싹 입을 닦고는, 닉의 허리를 껴안았다.

“니카, 좋았어요?”

“으, 응.”

오늘 유신이 대놓고 평소와 너무 다르게 적극적이다 싶긴 했지만, 이쯤 되니 슬슬 닉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말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설마 기말고사를 망쳐 버린 걸까? 그래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이번 학기를 다시 한번 더 다녀야 한다거나.

닉이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들 때였다.

“흐응, 대답이 좀 애매한데.”

유신이 아랫배에 부드러운 뺨을 문질러 왔다. 닉의 하반신은 방금 사정해 놓고 염치도 없이 다시 힘이 들어갈 것만 같았다.

“당연히 너무너무너무 좋았지!”

닉은 유신을 안아 들어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시선이 마주치자 예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역시나 꽤 흥분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사랑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닉이 쪽 입술에 입 맞추자 유신이 짓궂게 물었다.

“방금까지 당신 다리 사이를 핥던 입인데 괜찮아요?”

“물론 괜찮지.”

닉이 오늘 들은 것 중에서 제일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다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바로 떨어진 방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금방 키스가 진해졌다. 달콤한 호흡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섞였다.

이미 몇십 번은 겹쳤을 입맞춤이었다. 닉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유신의 팔이 익숙했다.

힘이 빠진 유신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닉은 자연스럽게 그를 침대에 기대도록 했다. 불편하지 않도록 등 뒤로 베개와 쿠션을 몇 개나 받쳐 푹신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도 해 줄게.”

닉의 손이 당연하다는 듯 유신의 바지로 파고들었다. 그가 집에서 항상 입는 낡은 조거 팬츠는 허리 고무줄이 헐렁해 바로 벗겨졌다. 유신이 마른 편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말라서 가냘프기까지 한 느낌을 주는 상체에 비해 다리 쪽은 상대적으로 근육이 잘 잡혀 있었다. 특히 엉덩이와 허벅지가 눈에 띄게 단단했다.

오른쪽 골반에서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를, 닉은 보면서도 모른 척 넘겼다. 유신이 그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닉은 유신의 발등에 입 맞추었다. 춤을 그만둔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엄지발가락에는 훈장처럼 변형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발레 댄서의 발이다.

“니카, 안 돼. 하지 마요, 하지 마.”

방금까지 그렇게 적극적이던 것이 거짓말처럼 유신이 다시 수줍어했다. 하지만 거부하는 말과 달리 그의 양손은 닉의 어깨를 오히려 끌어당기고 있었다.

성기가 반쯤 선 채, 속옷 앞쪽에 젖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바지를 벗기기 전부터 이런 상태였다.

닉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발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엄지를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리자 유신은 어쩔 줄 몰라 허리까지 들썩거렸다.

“빨면서 느낀 거야? 귀엽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알면서.”

겨우 입술을 뗀 닉의 말에 유신은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댄 채 부끄럽다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오늘은 내가 당신한테 해 주려고 했는데.”

힘이 빠진 유신의 허벅지가 무방비하게 벌어지고, 다리 사이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이제 거의 완전히 발기한 남성기에 속옷 앞쪽은 완전히 팽팽해져 아플 정도였다. 거기에 엉덩이 골까지 축축하게 젖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버둥거린 덕에 스웨트 셔츠는 허리 위까지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아랫배는 얼핏 봐서는 임신한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편평하다 못해 힘을 주지 않아도 근육이 그대로 만져질 지경이던 예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조금 둥글어져 있었다.

닉으로서는 저 안에 우리 둘의 아기가 자라고 있다니 마냥 신비로울 따름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 섹스는 서로 해 주는 거야, 유샤.”

단숨에 무릎까지 속옷을 내리자 유신의 남성기가 튕기듯 솟아올랐다. 완전히 발기한 채 배꼽에 닿을 기세로 끝에서 투명한 물을 흘렸다. 좀 더 안쪽의 엉덩이 구멍도 움찔거리며 젖어 있었다.

“흣, 으응.”

닉은 바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지나친 자극에 유신의 온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동시에 닉은 망설이지 않고 혀를 움직이며, 유신의 엉덩이 사이로도 손을 가져갔다. 촉촉해진 입구를 가볍게 훑자, 닉의 입 안에 있던 성기가 더 단단해졌다.

유신은 손으로 제 입을 막으려 했지만, 닉이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한번 흘러나오자 신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 안 돼, 응.”

닉은 충동대로 마구 쑤시는 대신, 신중하게 유신의 주름을 지분거렸다. 앞과 뒤를 한꺼번에 공략당하는 쾌감은 강렬했다. 유신의 달콤한 목소리는 의지와 다르게 점점 높아져 갈 뿐이었다.

곧 유신은 닉의 입 안에서 절정에 닿았다. 아까 그가 했던 대로 닉도 그의 정액을 단번에 꿀꺽 삼켰다.

유신의 마른 가슴이 거친 호흡과 함께 크게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그는 아랫배에 손을 얹은 채 여운을 느끼는 듯 크게 숨을 내뱉기를 반복했다.

사랑스러워 참기 힘들다는 눈빛을 한 채, 닉이 그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

닉은 잠결에 뭔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 뺨에 닿는 것을 느꼈다.

한 박자 늦게 그것이 유신의 입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제 뺨에 입을 맞춘 거였다.

그렇구나. 이건 꿈이었다. 꿈이라면 참 기분 좋은 꿈이다.

부드러운 손이 닉의 뺨에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 넘기고,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울렸다.

“니카, 빨리 데리러 와야 해요. 너무 늦으면 내가 화낼지도 몰라요.”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한 채, 닉은 알 수가 없었다. 뭘 데리러 오라는 걸까? 우린 이제 드디어 같이 있게 되었는데.

그리고 그는 반짝 눈을 떴다.

어젯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먼저 제 손을 이끌어, 입으로 성기를 애무해 주는 유신이라니. 물론 자신도 그대로 이자까지 붙여 되돌려주었지.

유신이 평소답지 않았던 건, 역시나 기말고사가 끝나서일까? 시험이 끝난 학생들은 가끔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곤 한다. 물론 그가 그러는 타입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모를 일이지.

닉은 버릇처럼 몸을 돌려 나란히 누운 따뜻함을 찾았다. 보통 제 쪽이 먼저 일어나기 때문에 침대에서 나가기 전 잠든 유신을 실컷 보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웬일로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 차가운 것이 마치 밤새 비어 있기라도 했던 것만 같았다. 바깥은 아직 어스름해서, 이미 일어났다면 일찍 일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니카, 빨리 데리러 와야 해요.’

문득 꿈에서 들은 유신의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아니, 꿈은 맞았나?

뭔가 모를 불길함에 벌떡 몸을 일으키는 닉의 눈에,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작은 메모가 보였다. 혹시라도 날아갈까 봐 장식품으로 잘 눌러 두기까지 했다.

「당분간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 당신의 유샤 -」

약간 오른쪽 위로 치우친 그 필체는 누가 봐도 유신의 글씨였다.

***

“어서 오세요, 미스터 리.”

“환영합니다. 좋은 비행 되세요.”

강렬한 다홍색 유니폼을 입은 남녀 승무원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새하얀 피부에 밝은 머리색을 한 전형적인 러시아 미남 미녀였다.

“안녕하세요.”

유신은 승무원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제일 먼저 비행기에 탔다. 그가 오늘 이 항공편의 유일한 일등석 승객이기 때문이었다. 초대한 상대방이 일부러 신경 써서 비싼 표를 준비해 준 거였다.

덕분에 유신은 애매하게 이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출발 시간까지 일등석 전용 라운지에서 푹 쉴 수 있었다. 비즈니스 좌석까지는 유신도 타 본 적이 있었지만 일등석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라운지부터 사람이 적어,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있을 수 있어 편했다.

오늘을 위해 새로 산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왔다. 나름 브랜드로 큰맘 먹고 산 거였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걸 본인만 몰랐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리. 오늘 비행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오늘 비행의 전담 승무원입니다.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불러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조금 나이가 있고 베테랑으로 보이는 스튜어디스가 유신을 좌석까지 안내해 주었다. 창가 좌석으로 의자도 크고 앞뒤 간격도 넓어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듯했다.

“웰컴 드링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각종 주스나 탄산음료, 커피 모두 가능합니다.”

분명 술도 가능할 텐데 스튜어디스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유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유신은 왠지 쑥스럽다고 생각하며, 사과주스로 요청했다.

비즈니스도 어릴 때나 타 봤지, 미국에 건너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최근엔 비행기 탈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간만의 호화롭고 널찍한 좌석이 유신은 편하면서도 영 어색했다. 너무 간격이 넓다 보니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면 창밖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멍하니 푹신한 시트에 고개를 기대고 있으려니 꾸벅꾸벅 졸려 왔다. 어제 새벽 거의 제대로 잠을 못 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유신은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니카.”

다이아몬드가 몇 개나 박힌 백금 팔찌는, 닉이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실제로 차고 나온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길고 헐렁한 소맷자락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실 이건 유신의 의도대로였다.

잠든 닉의 뺨에 키스를 남기고 나오며 유신이 제일 늦게 챙긴 물건이기도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지금 기분으로 보면 결국 챙기길 잘했다 싶었다.

잊지 않도록 여권은 책상 위에 꺼내 두고, 캐리어는 미리 싸 두었다. 방에 닉이 처음 들어왔을 때 빤히 보길래 설마 눈치챘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다행히 조금 대화해 보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았지만.

사실 유신은 닉이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섬 같은 장소에 가고 싶어 하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즐겁게 따라나섰을 수도 있었지만.

“미안해요, 니카. 난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유신은 팔찌를 만지던 손을 빼고 소맷자락을 내려 다시 완전히 감추었다.

참고로 캐리어를 꽉꽉 채운 내용물에 유신의 물건은 거의 없었다. 짐의 대부분은 닉이 입었던 옷으로, 빨래 바구니를 거의 털어 온 수준이었다. 임신 중인 유신이 닉의 페로몬이 필요할 때를 대비한 대책이었다.

마침 승무원이 사과주스를 가지고 왔다. 유신이 새콤달콤한 주스를 마시면서 비치된 항공사 잡지를 뒤적이려니, 슬슬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슬슬 닉도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 일어나서 자신이 없는 것을 알면 그는 놀랄까, 화낼까, 당황할까? 하지만 유신은 이렇게 가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조금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콩알아, 너도 기대되지?”

유신은 아랫배를 양손으로 감싼 채 작게 속삭였다. 이제 곧 이륙이었다.

***

「당분간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 당신의 유샤 -」

닉은 넋이 나간 듯 쪽지를 바라보았다. 뭐랄까.

당신의 유샤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 유신이 저걸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고 생각하니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와 버렸다.

물론 당연히 현실 도피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잠시 엉뚱한 것으로 주의를 돌리는 거였다. 혼자 휴가를 다녀오겠다니!

어젯밤까지 한적한 섬에서 단둘이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겠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지금 어디로 휴가를 갔다는 거야?”

닉은 그대로 침실을 박차고 나왔다. 목적지는 물론 유신의 방이었다. 어쩌면 지금 그저 자신을 놀리는 것뿐이고, 방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힌 탓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은 당연하다는 듯 텅 빈 채 아무도 없었고, 어제까지 책상 위에 있던 여권도, 방 한쪽에 놓여 있던 커다란 캐리어까지 보이지 않았다.

닉은 벌컥 유신의 옷장부터 열었다. 대충 살펴봐도 거의 그대로였다. 아무리 봐도 그 큰 캐리어 속을 빵빵하게 채울 만큼 빠진 물건이 없었다.

왠지 모를 촉에 그는 자신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역시, 이쪽이구나. 제가 한 번 이상 입은 옷들이 귀신같이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유신이 챙겨가 버렸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필요한 이유는 빤했다. 둥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저 정도로 준비했다는 것은 바로 근처에 다녀올 생각은 아니라는 뜻이다.

“작정한 거로군.”

이제 어디로 갔는지가 문제였다. 힌트라고는 휴가 다녀오겠다는 쪽지 하나뿐인데, 저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 박자 늦게 핸드폰의 존재를 기억해 내고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돌아왔다. 처음에는 대놓고 연락받기 싫어서 전화를 껐나 생각했다가, 다음 순간 비행기 모드에서도 같은 안내가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지금쯤 대서양이나 미 대륙 한가운데를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야 하나? 아니, 뉴욕에는 공항만 세 개, 정확히는 네 개나 있었고, 새벽 비행기를 탔다면 이미 늦었다.

차라리 공항의 CCTV를 확보하는 쪽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며, 닉은 제일 먼저 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라도 유신이 누군가와 미리 의논을 했다면, 밀리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유신이요? 아뇨, 이쪽에 없는데요.

혹시 유신과 같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살짝 떠봤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연락도 없었고? 최근 별다른 이야기 한 거 있어?”

- 아뇨, 딱히. 저도 유신의 기말고사 때문에 한동안 못 만났거든요.

“그래, 알겠어.”

무엇보다 이쪽은 유신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진 닉은 바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평소와 전혀 다른 성급한 태도에 밀리가 바로 이상을 눈치챘다.

- 잠시만요! 둘이 싸웠어요? 뭘 했길래 유신이 주말 아침부터 집을 나가요.

“안 싸웠거든!”

이 점에 대해서는 닉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어젯밤만 해도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 헐, 집을 나간 건 맞나 보네.

“나간 거 아니야. 그냥 휴가를 간다고.”

- 임신해서 몸도 무거운 애가 휴가는 무슨 휴가예요? 제가 지금 당장 거기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그대로 있으세요.

거기까지 말하고 밀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럴 때만 더럽게 눈치가 빠르지.”

닉은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비밀로 하기는 글렀다. 그는 아이잭과 올가에게도 알렸다.

- 닉, 뭐?! 유신이 없어졌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찾으러 나서야지!

- 미스터 심슨, 일단 진정하시고요. 우선 이 펜트하우스 보안 팀에 연결해 CCTV부터 확보하도록 하죠. 정상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입구에서 무엇을 타고 갔는지부터 확인하는 거예요.

- 오오, 올가. 그거 좋은 생각이야.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올가는 바로 아파트 보안 팀에 연락해 펜트하우스 현관 쪽 CCTV를 확보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쪽에는 유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멋대로 확대해서 결별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면 도둑이라도 들었나 생각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사인 링컨을 계속 고용하고 있을 걸 그랬다고, 닉은 후회했다. 물론 제안했어도 어차피 링컨이 거절했을 터였다. 그는 유신을 찍은 사진이 호평을 받으며 주가가 올라, 파파라치가 아니라 정식 잡지 화보를 찍는 큰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사심 없이 축하했었지만, 이제 와서 괜히 아쉬웠다. 펜트하우스에 들어온 이상 보안은 확실하니 외출할 때나 외부 침입에만 신경 썼지, 이렇게 제 발로 나가 버릴 줄 알았겠냐고.

초조한 닉이 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사이, 밀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도착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나 했더니, 가브리엘이 함께였다. 그가 차를 태워 줘서 빨리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간만에 휴일이라서 하루 종일 느긋하게 쉬려고 했거든.”

밀리의 바로 뒤에서 왜인지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제 친구를, 닉은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대체 당신이 유신한테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좀 들어 볼까요, 닉?”

어차피 밀리가 험악한 기세로 퍼붓고 있었기에, 닉으로서는 가브리엘까지 따로 상대할 여력도 없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요?”

“아니 그게, 정확히 말하자면.”

***

아무리 일등석이라도 장거리 비행은 힘들다. 들뜬 기분도 잠시, 유신은 곧 지겨워졌다.

자다, 깨다, 중간에 영화도 봤지만 결국 별거 없다. 호화로운 기내식도 여러 번 나왔지만, 닉이 없어서 그런지 식욕이 안 돌아서 죄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말았다. 괜히 사과주스만 몇 잔이나 마셨다.

그렇게 유신이 거의 죽어 갈 즈음, 비행기는 드디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어떻게 된 건지 입국장까지 내내 승무원이 동행했다. 이번에는 힘을 잘 쓰게 생긴 스튜어드였다. 대체 뭔가 물어봐도 일등석 서비스입니다 하고 얼버무릴 뿐, 정확한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다.

물론 진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유신은 순진하지도, 비행기 탑승 경험이 없지도 않았다. 그저 이 또한 초대한 상대방이 편의를 봐준 덕분이려니 짐작하기는 했다.

입국 심사도 승무원이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끝이었다. 덕분에 유신은 러시아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국장에 서 있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 온 낯선 공항에서 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히나 수화물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슬슬 몸이 무거워지다 보니, 예전처럼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 아, 벌써 가셨네.”

승무원은 러시아 억양이 강한 유창한 영어로 인사하고는, 유신이 채 감사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유신은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마중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붉은 금발 머리의 여성이, 한국어와 영어로 유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사실 붉은 머리라면 기분 나쁜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있었지만, 광택부터 선명함까지 조금도 비슷할 것이 없었다. 그쪽은 빛바랜 낡은 빗자루 같은 붉은 머리였다면, 이쪽은 타오르는 불꽃 같은 붉은 금발이었다.

거기에 닉과 똑같은 청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유신은 그녀가 누군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블라디미라!”

풀 네임은 블라디미라 세르게예브나 메드베데바.

바로 닉의 네 살 많은 누이였다. 블라디미라도 사진을 미리 본 듯, 유신을 바로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블라디미라 세르게예브나 메드베데바입니다. 유신 리 맞죠?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하며, 유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반짝반짝 빛났다.

“유신이라고 부르세요. 저야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블라다라고 불러 주세요.”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바로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미국도 기본적으로 그렇지만 러시아에서는 특히나,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쉽게 애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오기 직전까지 환영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만큼, 유신은 그녀가 쉽게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해서 내심 놀랐다.

참고로 닉의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메드베데프.

남매지간인 두 사람의 성이 다른 이유는, 러시아에서는 성별에 따라 성씨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이름은 이름, 부칭, 성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칭과 성은 남성형과 여성형이 서로 달랐다. 가끔 동일한 경우도 있지만, 그쪽이 오히려 예외에 가까웠다.

닉의 부칭인 세르게예비치는 세르게이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블라다의 부칭인 세르게예브나는 세르게이의 딸이라는 뜻이었다. 블라다의 성인 메드베데바는 메드베데프의 여성형이었다.

블라다는 여자치고 손이 크고, 키도 매우 커서 낮은 단화를 신고 있는데도 유신과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불타는 듯한 붉은 금발은 길게 뒤로 땋아 내리고, 큰 키에 깔끔한 바지 정장이 잘 어울렸다.

사실 그녀는 앞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 닉의 팬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인이었다. 눈동자의 빛깔 외에 서로 닮은 구석은 없는 남매였지만, 무척 미인이라는 점만은 같았다. 여자 알파이자 능력 있는 사업가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인상부터가 똑 부러졌다.

닉의 집안은 대대로 사업을 한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국영 산업과 매우 관련이 있다 정도만 알려져 있다.

마침 어디선가 덩치가 큰 베타 남자가 나타나 미하일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더니, 당연하다는 듯 유신의 짐을 들어 주었다. 무뚝뚝하게 생긴 전형적인 러시아인이다. 닉보다는 키가 작을 듯했지만, 워낙 근육질이라 다른 느낌으로 마치 벽 같았다.

자동차 앞에 도착하고서야 유신은 미하일이 운전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무진은 아니었지만 거의 흡사한 고급 대형 승용차였다. 블라다는 유신을 자신과 같은 뒷좌석에 앉혔다.

마치 잘 부서지는 사탕 과자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태도에 유신은 블라다가 제 임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며,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 익숙지 않은 배려가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유신은 그 마음이 고마워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미하일은 인상보다는 정중하게 운전했지만, 꽤나 쉽게 쉽게 액셀을 밟는 타입이었다. 주변의 다른 자동차나 블라다의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특이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으니 유신은 절로 눈이 감겼다. 비행기에서 잤다고는 하지만 깊게 잠들지 못했고, 시차 문제도 있었다.

“피곤하죠? 도착할 때까지 자도 괜찮아요.”

하지만 블라다가 선뜻 그렇게 말하는 데는 조금 놀랐다. 그만큼 자신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나 해서였다.

운전석에서 미하일이 러시아어로 말했다.

“아가씨, 대공 각하께서는 오늘 늦으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알겠어. 그럼 저녁은 같이 못 드실 수도 있겠네.”

크냐즈라는 흔치 않은 호칭에 유신은 살짝 놀랐다. 공작이나 대공을 가리키는 러시아어였다. 그 호칭이 닉과 블라다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물론 러시아는 이제 신분제 사회가 아니니, 그저 비유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뿐일 터였다. 무엇보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에서 꽤나 흔한 성씨인 만큼, 공작 가문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집안과 관련해서는 워낙 수상쩍은 소문도 많았고, 그중에는 혁명 시절 성을 바꿨다는 내용도 있다.

“유신, 원래라면 오늘 저녁 다 같이 저녁 만찬을 열 생각이었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아무래도 위쪽 분들께 붙잡히신 듯하네요. 아무래도 뵙는 건 내일에야 가능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블라다가 유신에게 영어로 고쳐 한 번 더 설명했다. 방금 미하일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였다. 물론 유신은 전혀 상관없었다.

“네, 물론 괜찮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분께서 당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저도 그렇고 말이죠.”

“아닙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안 그래도 오늘은 좀 피곤하기도 하구요.”

“맞다! 아무래도 장거리 비행을 했으니까요. 일단 오늘은 푹 쉬어요.”

초대받은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는 건 예상 이상이었다. 뭔가 모를 긴장이 풀리자, 그다음은 역시 졸려 왔다. 유신은 반쯤 눈이 풀린 채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국적인 러시아의 거리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니,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계기는 닉의 아버지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에서 온 수상한 국제 우편이었다. 그걸 받은 날 마침 폴에게 납치당해, 그 내용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은 지나서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여름에 해가 거의 지지 않는 밝은 밤, 즉 백야 현상이 일어난다. 그에 맞춰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백야 축제’가 열리는데, 그걸 보러 오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건 구실이고, 실은 그저 제 자식의 상대를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유신이 알기로 미국에 건너온 뒤로 닉은 한 번도 러시아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자신도 사고 이후로 한국에 간 적이 거의 없으니 남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닉에게 죄다 이야기를 하고, 그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닉은 계속 촬영으로 바빴고, 같은 집에 사는데도 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자 유신은 문득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자신까지 시험 기간에 들어서자, 그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무엇보다 닉 메드의 팬으로서 그의 본가를 방문하고, 가족들까지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유신이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초대장에 동봉된 회신 봉투로 가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이메일로 항공권이 도착했다.

그 뒤에 닉이 촬영을 끝내고, 계속 같이 있으며 신경 써 주는 바람에 너무 충동적이었나 살짝 후회하긴 했지만. 뭐, 이미 저지른 건 어쩔 수 없다.

유신은 일단 러시아에 다녀오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닉은 계속 한국에 가자는데, 자신도 러시아에 좀 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덜컹. 마침 차가 흔들려, 유신은 졸다 말고 자세를 바로 했다. 마침 엄청나게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철제 현관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문을 지나고 긴 정원을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건물이 보였다.

미하일이 당연하다는 듯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유신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우며 블라다가 윙크를 했다.

“유신, 왜 아버지 이야기만 하고 어머니 이야기는 안 하는지 안 궁금해요? 우리 니카가 이야기했을 리가 없는데.”

그녀는 닉을 유신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원래도 가족들끼리 쓰는 애칭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같은 이름이 들리자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독점욕이 샘솟았다.

덧붙여 명색이 열렬한 닉의 팬인 유신은 직접 듣지는 않았더라도, 블라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저 이미 알고 있어요. 저기, 니카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거.”

“그러게, 이미 알고 있었네요.”

블라다는 너무도 오래된 일이라 감상에 빠질 필요도 없다는 듯 가볍게 넘겼다. 대신 차에서 내리는 유신을 향해 양팔을 크게 벌려 보였다.

“유신, 메드베데프가의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밀리는 닉이 보여 준 쪽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자발적으로 사라진 게 확실하네요.”

물론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유신이 침실에 남기고 간, 당분간 휴가 다녀오겠다고만 적힌 바로 그 메모였다.

「당분간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 당신의 유샤 -」

닉의 생각도 같았다. 미리 여권을 꺼내 놓은 것도 그렇고, 캐리어를 싸 놓은 것만 봐도 더더욱 그러했다.

“뭐, 뭐야?”

갑자기 밀리가 벌떡 일어나 닉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밀리는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일단 유신의 방부터 찾아보면 어떨까요? 그 성격에 저 쪽지만 덜렁 남겼을 리 없어요. 분명 뭔가 힌트를 남겼을 게 틀림없다구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주인도 없는 방을 마구 뒤지기가 좀 그래서.”

“닉, 무슨 이야기예요? 지금은 유신이 어디 갔는지를 빨리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구요!”

망설이는 닉을 두고 밀리는 이미 복도 저쪽까지 가 버렸다. 그 뒤를 가브리엘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밀리는 거침없이 유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구는 몰라도 놓인 물건들은 죄다 같이 살던 시절부터 보던 거라 익숙했다. 그렇다고 서랍부터 막무가내로 뒤지진 않았고, 일단 책꽂이나 책상 위에 놓인 물건 따위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정도는 해도 괜찮은 사이라는 서로 간의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닉 혼자였다면 아마 여기까지 오는 것부터 한참은 더 걸렸을 게다.

“이거다!”

곧 밀리는 책꽂이 사이에서 빳빳한 편지 봉투 하나를 찾아냈다.

누가 봐도 국제 우편이었다. 보내는 사람은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적혀 있고, 이국적인 우표에도 외국 소인이 몇 개나 찍혀 있었다. 이미 확인했는지 봉투 한쪽이 뜯긴 채 안은 비어 있었다.

덧붙이자면 영어로 적힌 받는 주소는 밀리와 유신이 같이 살던 예전 집이었다. 이 또한 밀리의 주의를 끈 부분이기도 했다.

“응, 응, 알겠어. 그래, 올가. 계속 조사해 줘.”

마침 닉은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여전히 편지 봉투를 위로 높게 든 채, 밀리가 뭔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를 끊는 닉을 향해 가브리엘이 물었다.

“올가야? 뭔가 알아냈대?”

“펜트하우스 정문 CCTV에서 확인했는데, 유신이 새벽에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예약해 둔 듯한 콜택시를 타고 떠났다네. 이제부터 택시 회사와 연락해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를 알아본다는군.”

그리고 닉이 한 박자 늦게, 밀리가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깨달았다.

“그건 뭐지?”

“유신의 책꽂이에서 발견했어요. 책 사이에 딱 보이게 끼워 놨더라고요. 국제 우편 같은데, 발송일도 여기 찍힌 걸로 보면 딱 한 달쯤 전이네요.”

“국제 우편?”

밀리의 대답에 닉이 바로 봉투를 낚아챘다. 무슨 짓이냐고 밀리가 항의할 새도 없이, 보낸 사람을 확인한 닉의 얼굴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가브리엘이 쭉 목을 빼서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러시아어네.”

“맞아. 거기다 이 이름과, 주소는.”

“어, 왜? 누가 보냈길래, 니키?”

당황한 듯한 닉을 향해 가브리엘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닉은 대답 대신 멍하니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냐, 하지만 유샤는 러시아어는 모를 텐데. 아니, 상관없으려나. 안의 편지는 영어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읽지도 못할 외국어로 된 발신자가 적힌 편지를 왜 굳이 뜯어본 건지.”

밀리가 영문을 알 수 없다며 되물었다.

“유신이 왜 러시아어를 몰라요? 전에 보니까, 러시아어로 된 잡지도 잘만 읽던데.”

발레 잡지 같기는 하던데. 웅얼웅얼 덧붙이는 밀리에게 닉이 다급히 달려들었다.

“그거 무슨 이야긴지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

사자 머리 조각과 담쟁이덩굴 모양의 장식이 달린 철제 현관문과, 그 안에서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넓디넓은 정원에서 대충 눈치를 채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거대한 저택을 눈앞에 두자, 유신은 저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보통 외국 저택 하면 떠올릴 만한 화려한 4층 건물이었다. 높은 지붕에 커다란 창, 벽은 온통 대리석을 발라 놓았고, 고풍스러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 규모였다. 저택이 아니라 궁궐이라고 해도 납득 갈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러니 제정 러시아 귀족이 성씨만 바꾼 거라는 소문이 나도는 거지. 사용인들이 집주인을 대공 각하라고 부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게 저택의 규모에 정신을 빼앗긴 채 유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들떠서 열 명도 넘는 사용인들이 길게 늘어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자신이 닉 메드의 본가에 와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들떠 있었다. 잡지나 기사에서나 보던 내 스타의 누나의 안내로,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스타가 자란 집을 보고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크고 멋지고 그럴듯한 저택이다. 열성 팬으로서 흥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전적인 외장과 다르게 안쪽은 완벽하게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장식이 극도로 배제되고 채도가 낮은 편안한 인테리어는, 닉의 펜트하우스와도 어딘가 분위기가 닮았다. 어쩌면 닉의 취향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유신은 무심히 생각했다.

“유신, 당신의 방은 3층에 준비해 두었어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면 된답니다. 오늘은 다른 일정이 없으니 저녁까지 푹 쉬도록 해요.”

거기다 인테리어만 현대식이 아니라 무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블라다의 말에 유신은 미하일이 들고 있던 제 짐을 돌려받으려 했다.

“여기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옮길게요.”

“아닙니다. 이건 제 일입니다.”

하지만 미하일은 서툰 영어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잠시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신이 셔츠 소매 안에 숨기듯 차고 있던 팔찌가 드러났다. 블라다가 바로 눈을 빛냈다.

“유신, 그거! 그 팔찌 제 동생이 선물한 거 맞죠?”

바로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유신은 괜히 쑥스러워 뺨을 붉혔다.

“하하, 맞아요.”

“그럴 줄 알았어! 백금에 다이아몬드까지, 딱 그 아이 취향인걸요. 약혼반지는 없나요?”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내는 블라다의 질문에 유신은 반사적으로 15캐럿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 추정) 18억 원짜리를 아무렇게나 끼고 다닐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었다. 시사회 때 마지막으로 끼고 나서 돌려줬는데, 뭐 아이잭 쪽에서 금고 같은 데다 잘 보관해 뒀길 바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유신은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를 새삼 떠올렸다. 자신은 지금 팬으로서 스타의 본가를 구경하고 감탄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 실제는 다를지 몰라도, 겉보기는 일단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유신은 제가 너무 팬심에 들떴다는 것과, 저택의 규모에 지나치게 위축된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는 웃으며 미하일과 눈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미하일. 하지만 짐은 내가 가지고 갈 수 있어요.”

홀린 듯 미하일이 유신에게 짐을 건넸다. 그가 베타였으니 그걸로 끝났지, 알파였다면 뺨을 붉혀 버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유신은 딱히 거기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그대로 블라다에게 다시 한번 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유신은 이미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야, 블라다가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심호흡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냥 보내 버렸네.”

“아, 저도 뭐가 뭔지 잘.”

미하일도 당황한 듯이 방금까지 짐을 들고 있던 제 손과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문득 블라다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미하일.”

“넵, 아가씨.”

“내 동생이지만, 정말 얼굴 밝히는 거 같지 않아?”

그 말에 미하일의 얼굴이 왜인지 갑자기 벌게졌다. 블라다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런 그를 향해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유신은 무사히 방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3층의 어느 방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 이미 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 앞에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꽤나 의외의 방이 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넓고 빛이 잘 들어 환한 건 좋았지만, 누가 봐도 여자아이가 사용할 법한 샤랄라한 소녀풍의 방이었다. 장식이 많이 달린 원목 가구에, 등받이에 자수가 새겨진 소파, 레이스 커튼, 아기자기한 장식품 등등. 하지만 그중 제일 놀라운 것은 방 절반은 족히 차지하고 있는, 네 모퉁이의 기둥에 연결된 천장이 있고 화려한 레이스 커튼이 달린 거대한 원목 침대였다.

벽에 걸린 그림 중에는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의 초상화가 있었다. 연한 하늘색 프릴 블라우스를 입고, 밝은 금발은 단발로 잘랐다. 이 방의 주인이었을까? 닉과 많이 닮은 것이, 친척이나 가까운 사이 같았다. 아예 닉을 그린 거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방을 잘못 온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테이블 위에 막 가져다 둔 듯한 과일 바구니와 주스를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사실 유신은 씻고 잘 수만 있으면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씻고 나오자마자 짐부터 풀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 됐다.”

유신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침대 위에 쌓아 올린 닉의 옷가지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오메가 둥지였다.

이러려고 닉이 입었던 옷을 캐리어에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랬다. 이미 몇 번 만들다 보니 제법 능숙해져서, 이젠 쉽게 완성해 낼 수 있었다.

꼬물꼬물 안으로 파고들자, 기분 좋은 베르가못 향에 절로 기분이 느긋해졌다. 물론 옷에 남은 닉의 페로몬이다. 소녀스러운 레이스 커튼 따위,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콩알아, 아까 그 사람이 네 고모야. 걱정했는데 친절해서 다행이야. 그지?”

유신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아랫배에 말을 걸어 보았다. 닉의 누이와 반대로 제 동생이 닉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렇게 친절하면 딱 좋겠다고 멍하니 생각한다.

물론 당연히 배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니, 있나? 지금 순간 뭔가 꼬물 움직이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기분 탓인지 아닌지 영 아리송했다.

“그래, 슬슬 태동이 시작할 때도 되긴 했지.”

유신은 닉이 들으면 섭섭해서 울 만한 소리를 별 감흥 없이 태연하게 했다. 양손이 버릇처럼 아랫배를 감싼 채, 오른손으로 왼손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블라다가 반지 이야길 했었다. 약혼반지. 결혼반지. 반지, 반지라.

아마도 비행기 여행과 시차 때문일 것이다. 피곤했던 유신은 어느새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

올가는 유신이 호출했던 콜택시가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그를 내렸다고 확인해 주었다. 닉은 바로 목적지를 확정했다.

“지금 당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야겠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닉의 고향이었다.

밀리가 발견한 국제 우편은 그 도시에 있는 닉의 본가에서 온 것이었다. 내용물이 비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이번 상황에 관련이 큰 것만은 거의 확실했다.

안 그래도 유신의 납치 사건 때, 그쪽의 도움을 받았던 닉이었다. 당시에는 상황이 너무 급해 선택지를 고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이상하게 대응이 빠르다 했더니, 이미 이런 계획이 진행 중인 줄은 몰랐다.

그 일을 빌미로 바로 관여해 올 줄 알았는데, 이후로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좀 수상하긴 했다. 그래도 괜히 들쑤시기 싫어서 굳이 되묻지 않고 흐린 눈을 했더니, 이미 뒤에서 수를 써 놓은 거였다. 돌이켜 보면 그쪽과 관련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아닌 듯 휘말려 버리곤 해서 영 찝찝해진다.

“혹시 한국에 간 건 아닐까?”

가브리엘이 신중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지만 닉은 동의하지 않았다. 유신과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가 이제 와서 자신도 없이 혼자서 고향에 갔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그랬다면 ‘휴가’라는 단어를 썼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닉이 부정하기보다 먼저, 밀리 쪽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요. 유신이 한국엘 갔다면 저한테 먼저 이야기를 안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 편지 봉투를 굳이 바로 보일 만한 위치에 두고 갔을 리 없어요.”

“그런 거면 내가 러시아 쪽에 연락해 봐? 블라다 누님하고는 아직 메일 연결이 가능해.”

가브리엘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며 조심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닉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는 이상할 정도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자신이 정답을 골랐다는 사실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불확실성조차, 밀리에게서 유신이 러시아어를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모두 날아가 버렸다.

밀리에 의하면 유신은 러시아어로 된 잡지 정도는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물어본 적도 있는데, 듣기와 읽기는 꽤 되고, 말하기가 약하다고 했단다.

다들 잘 몰랐지만, 언어가 다른 해외 스타의 팬인 경우 종종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유신의 경우, 본인이 알아서 공부하지 않으면 정보를 얻기가 매우 힘들다 보니 빠르게 실력이 늘어났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러시아와 미국 중 어디로 유학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제 닉은 지금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비행기 예약을 위해 올가와 전화를 하며, 바로 그 기세가 꺾여 버렸다.

“뭐가 문제래요?”

“오늘 뉴욕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직항이 더는 없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밀리를 향해, 가브리엘이 소곤소곤 설명해 주었다. 정작 닉은 마음만 급했다.

“그래, 전세기! 올가, 어서 전세를 준비해 줘.”

- 무슨 말씀이세요, 미스터 메드? 당신의 전용기는 작년에 이미 처분이 끝났어요. 전용기 운행이 환경에 악영향을 준다는 캠페인을 보고 바로 없애자고 하셨잖아요. 환경에도 좋고, 당신은 별로 상관없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닉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당시 자신이 너무 짜증 났다. 묵묵한 반응을 올가가 오해했다.

- 바로 전세기 대여 진행하도록 하죠.

“전세기든 환승이든 뭐든 상관없어. 현재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수 있으면 돼.”

- 네, 알겠습니다.

올가는 속으로, 그쪽이 전세기 없애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역시 성격 더러운 놈, 유신 때문에 봐줬다 등등 구시렁구시렁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며 사무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정작 닉은 핸드폰을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한 채, 멍하니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제 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게 될 줄이야.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계산해서 노린 거라면, 어떤 의미로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는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단지 그 남자가 유신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물론 유신이 그렇게 만만히 당할 사람이 아닌 것은 자신도 이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자꾸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머리로 그렇다고 아는 것과, 걱정돼서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사실 닉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동요시키는 상대가 처음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신과 관련되면 항상 이성적으로 잘 판단이 되지 않는다.

“기다려, 유샤. 내가 금방 갈 테니.”

닉은 결의에 찬 채 이렇게 속삭였다. 마치 첫사랑을 앓는 수줍은 사춘기 소년과도 같이.

아니, 따지고 보면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

다음 날, 닉의 아버지 세르게이가 유신을 부른 것은 의외로 점심도 한참 지나서였다. 홍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대공은 유신의 상상 이상으로 인상적인 남자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금발, 원숙미가 흐르는 서늘한 이목구비. 특히 깎은 듯한 턱이 잘생겼다.

나이를 쉽게 읽을 수 없는 외모였는데, 백인인 것을 감안했을 때 매우 동안인 것만은 분명했다. 확실히 서른 전후의 딸과 아들을 가진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인상적인 미모는 굳이 말하자면 블라다와 꼭 닮았다. 눈동자만 선명한 녹색이었다. 닉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딸은 아버지를, 아들은 어머니를 닮은 듯했다.

새삼 생각하지만 딱히 러시아인다운 외모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스웨덴이나 독일인 같달까. 러시아 황실은 독일 쪽 피가 진했다는데, 혹시 그쪽과 혈연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 있어서 그런지 실내복 위에 편안한 가운 차림이었다. 유신은 고전 영화 말고 그런 걸 입은 사람을 처음 보았지만, 그게 또 그럴듯하게 잘 어울렸다.

블라다를 쏙 뺀 얼굴과 달리, 체격은 닉과 똑같았다. 180 중후반의 큰 키에 긴 팔다리를 한 늘씬한 체형이었다. 단, 몸통의 두께가 닉보다 훨씬 두꺼웠다. 닉도 아직 20대라 그렇지, 저런 느낌으로 나이 들 것 같았다.

“네가 유신이로군.”

거만한 말투였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예의 바르거나 겸손했다면 어색하게 느껴졌으리라. 외국어라 한 번 더 필터를 거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난 세르게이 유리예비치 메드베데프다. 니카 놈의 애비지.”

“반갑습니다. 유신 리입니다.”

유신은 세르게이와 악수를 했다. 그는 유신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는 대신, 조심스럽게 손가락만을 쥐어 왔다. 아들의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예의를 지키는 느낌이라 유신은 오히려 좋았다.

그나저나 블라다도 그렇고 이쪽도 그렇고, 유신을 위해 일부러 영어를 사용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원래 이렇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우아한 발음이 혀에서 구르는 듯했다. 완벽한 영국 상류층 억양은 닉과 매우 흡사했다. 블라다가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혈연이라 그런지 부자의 목소리가 비슷하게 낮고 달콤해, 둘이 대화를 나눈다면 귀가 호강할 것 같다고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와 줘서 고마워. 오는데 힘들진 않았고?”

“아니요, 비행기 티켓까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편하게 왔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들놈의 상대인데, 내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부족한 우리 아들하고 어울리느라 고생이 많아.”

“아니에요. 얼마나 잘해 주는데요.”

“그놈이 잘해 줘 봤자, 상대 입장 생각 안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매번 밀어붙이기나 해서 귀찮게 만들겠지. 안 그래? 내가 젊을 때 애들 엄마하고 다 해 봐서 아주 잘 알아.”

거기서 유신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풋 웃어 버렸다. 세르게이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덕분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닉은 제 아버지가 유신과 만나면, 심하게 구박하고 면전에서 홀대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세르게이는 자신의 아버지면서 동시에, 가차 없고 잔혹한 한 집안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들며 더 꼬장꼬장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유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닉의 비관적인 예측과 달리, 지금 세르게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상냥하게 유신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유신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유신, 커피나 차는 카페인 때문에 불편할까 봐, 카모마일 티로 준비했는데 괜찮을까요? 혹시 다른 걸 원하면 따로 준비하죠.”

자리에 앉는 유신에게 블라다가 상냥하게 제안했다.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블라다. 감사해요.”

얼마 전부터 입덧도 많이 좋아져, 사실 지금은 커피도 가끔은 한 잔 정도 마시곤 했다. 커피 향만 스쳐도 울렁거리던 시절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래도 신경 써서 자신을 위해 준비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신은 고마웠다.

테이블에는 이미 꿀 케이크, 잼이 올려진 쿠키, 구멍이 뚫린 동그란 빵, 슬라이스한 레몬, 각설탕 따위가 잔뜩 차려져 있었다. 블라다는 금빛이 번쩍이는 멋진 러시아식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유신에게 카모마일 차를 우려 주었다.

“유신, 카모마일이 사실 러시아의 국화인 거 아세요?”

“아뇨. 몰랐어요. 해바라기가 아니었어요?”

향긋한 풀내가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가며,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세르게이가 제 찻잔에 레몬 슬라이스를 넣으며 대답했다.

“해바라기였던 적도 있었는데 바뀌었어.”

“그래도 다들 해바라기씨를 많이 먹는 건 변함없어요. 지금도 길거리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답니다.”

“그렇군요.”

“전 사실 해바라기일 때가 더 좋았어요. 해바라기 꽃말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

블라다는 유신에게 케이크를 권했지만, 유신은 거절하고 빵만 달라고 했다. 베이글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더니, 식감도 비슷한데 대신 꽤 달았다. 차와 잘 어울릴 듯했다.

“맞다. 어제 바로 못 봐서 미안해. 원래는 저녁부터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윗분들이 부르셔서 말이야.”

문득 세르게이가 유신에게 사과했다.

저런 남자가 윗분이라고 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일까? 유신에게는 감도 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피곤해서 일찍 잠들어서요. 시차에 적응하는 중이라 그랬나 봐요.”

“저런, 지금은 괜찮아?”

“네, 푹 잤더니 한결 나아졌어요.”

전날 새벽부터 움직이고, 장시간 비행을 한 데다, 간만에 제대로 만든 둥지까지. 잠이 안 올 수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낮에는 계속 집에 있었나? 블라다와 같이 뭐라도 구경하고 오지.”

“실은 좀 늦잠을 자 버려서요.”

“뭐, 피곤하면 좀 그래도 되지.”

그래도 점심때가 다 돼서 일어난 건 제가 생각해 봐도 좀 심했다. 어떤 의미로 세르게이가 이렇게 오후에나 불러 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유신은 미처 몰랐지만 원래는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깨우려 했는데, 둥지 안에서 너무 달게 자는 바람에 아무도 못 깨웠던 거였다. 그렇게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 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대신 점심 먹고 정원을 산책했어요.”

“오, 잘했어. 어때? 괜찮던가?”

“네, 너무 커서 반 정도 밖에 못 둘러봤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 멋지더라고요. 숨바꼭질하기 딱 좋아 보였어요.”

동시에 여기서 길을 잘못 잃었다가는, 출구를 못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지.

블라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후후, 니카도 어릴 때 거기서 숨바꼭질을 많이 했었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덧붙여 유신이 정원에 다녀오는 사이, 누가 다녀간 듯 방 청소가 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 만들어 둔 둥지만 손도 대지 않았을 뿐이었다.

유신은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블라다의 관리 아래인 것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정황상 그녀는 유신이 침대에 알파, 즉 제 남동생의 옷으로 둥지를 만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딱히 무슨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왠지 부끄러워, 유신은 괜히 빵만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그나저나 자신이 지금 닉을 니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유신은 새삼 여기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고, 닉이 자란 집에, 그의 가족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만끽했다.

닉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결합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둘 다 원래부터 유명인이었다. 아버지는 우성 알파이자 도시에서 한 손 안에 드는 부를 가진 사업가였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우성 오메가면서 전설적인 발레리나였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그저 운이 나빴다는 말 외에 할 수 없었다.

우성 오메가야 워낙에 희귀하다지만,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흔한 우성 알파도 일반인은 살면서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유신도 닉 말고 우성 알파를 만나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세르게이는 닉과 같은 우성이라 그런지, 그저 부자 관계라선지, 분위기나 눈빛에서 비슷한 느낌이 많았다. 이목구비는 확연히 다르지만,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인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거기다 거만하고, 자기 잘난 거 잘 알고, 재밌게도 다정한 태도 어딘가에서 주변과 벽을 치는 점까지도 같았다.

유신은 닉이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서로를 향한 동족 혐오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왜 그러지?”

그 바람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빤히 세르게이를 보고 있었나 보다. 유신은 아차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뇨, 그냥 니카가 아버지와 많이 닮았구나 싶어서요.”

“닮기는 무슨. 그놈은 나하곤 하나도 안 닮았어. 제 어미를 쏙 뺐지.”

왜인지 세르게이가 진심으로 아니라며 혀까지 찼다. 글자만 본다면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유신은 이상하게 기분이 쎄했다.

“니카의 얼굴이 돌아가신 어머님과 많이 닮았죠? 그래서 발레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고요.”

이건 닉이 발레를 하던 시절의 팬들은 죄다 아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검색 사이트에서 다 지워져 전혀 찾을 수 없는 정보기는 했지만.

“맞아. 그랬었지. 우린 모두 걔가 오메가가 될 줄 알았거든. 어차피 후계자로는 우성 알파는 아니지만, 충분히 번듯한 알파인 블라다가 이미 있었으니까 말야.”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오자 블라다가 멈칫했다. 어색하게 웃는 딸의 반응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세르게이가 한숨을 쉬었다.

“알리나는, 그러니까 죽은 아내 말이야. 그녀는 항상 알파 아이 하나와 오메가 아이 하나를 갖고 싶어 했거든. 날 닮은 알파는 내 뒤를 가문을 잇게 하고, 자신을 닮은 오메가에게는 자신을 뒤따라 발레를 시키고 싶어 했지.”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자 자신도 아차 싶은 듯했다.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버렸군. 젊은 사람은 이런 거 지루하지?”

“아니에요. 저도 니카의 발레 무대를 정말 좋아했는걸요. 재밌어요.”

좋아했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사실 벽에 항상 소중하게 붙여 두는 포스터 중에도 그 시절 사진이 있었다. 당시에 닉은 머리가 길어서, 무대에 올라갈 때면 그걸 항상 복잡하게 땋아 올리곤 했다.

세르게이는 유신이 빈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진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저도 예전에 발레를 했었거든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안 하지만요.”

“아아, 맞아. 그랬었지. 오메가니까, 발레를 계속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야.”

“미스터 메드베데프, 발레를 하는 데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대부분 오메가가 하잖아. 베타는 몰라도 알파가 하기는 좀 어색하지 않나? 니카도 제 어미를 닮은 얼굴대로 오메가로 발현했으면 딱히 문제없었을 텐데 말야. 아쉬운 노릇이지.”

꽤나 차별적인 발언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당연한 소릴 한다는 태도였다. 당사자가 직접 들으면 상처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유신은 그의 태도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같은 부모라는 점에서 더더욱.

제 부모도 자신을 볼 때 저 비슷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세르게이는 닉이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대놓고 말하고, 그들은 반대로 유신이 자신들과 다르게 베타가 아니라는 점을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크게 다를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유신은 생각했다.

***

그렇게 유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세르게이는 사라졌다.

그가 나가자 그것만으로 한껏 팽팽하던 주변 공기가 한결 느슨해졌다. 역시나 인상적인 사람이라고 유신은 생각했다.

“어때요, 유신? 오늘 저녁에 관광 갈래요?”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으려니, 블라다가 나가지 않겠느냐 물어 왔다. 어떻게 보면 뭐라도 구경하고 오라는 아까 제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관광이요?”

“네,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낮이 긴 백야를 맞아 여름 축제 기간이거든요. 한밤중까지 이것저것 볼만할 거예요.”

유신은 뭔가를 계산하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침 적당한 시간이네요.”

지금 유신의 그 대답이 닉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의 블라다는 전혀 연결 짓지 못했다.

사실 유신은 오늘 일어나고부터 밀리와 SNS로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다. 닉한테야 말 안 하고 온 거지만, 그렇다고 밀리하고 굳이 연락을 안 할 이유도 없었다.

☞ 닉 메드 출발.

무엇보다 이 메시지를 보자, 궁금해서라도 말을 안 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번 답해 버리고 나니, 당연하다는 듯 줄줄 계속 대화를 이어 가게 되었다.

지금 어디냐는 밀리의 질문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닉의 본가라고 선뜻 대답해 주었다. 밀리는 메시지의 글자로도 느껴질 만치 호들갑스럽게 놀랐다.

☞ 헐, 자기야! 왠지 그럴 거라고 다들 짐작하긴 했지만. 진짜 거기 간 거로구나.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근데 니카가 출발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 사실 닉이 말야. 네가 거기 있을 거라며 이미 비행기로 가고 있어.

밀리는 유신에게 닉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했다고 알려 왔다.

바로 떠나는 직항이 없어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이 급해서 경유로 날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전세기는 비행기부터 구해야 하는 데다 각종 절차에 하루는 걸린다 했다. 계산해 보니 몇 시간 후 출발하는 모스크바행을 탄 뒤, 환승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쪽이 제일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닉은 결정되자마자 바로 짐을 꾸려 출발했다. 그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지금 열심히 하늘을 날고 있을 거란다.

☞ 아마 저녁쯤 거기 도착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 밀리의 의견이었다.

유신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긴 했다. 솔직히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듣자 하니 처음부터 밀리를 불러서 의견을 구한 것이 큰 역할을 한 듯했다.

☞ 자기야, 화 안 내?

☜ 내가 왜, 밀리?

☞ 자기가 일부러 목적지 어디라고 말 안 하고 갔는데, 내가 닉이랑 같이 자기 어딨는지 찾아봤던 거.

☜ 그게 왜?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도왔을 거야. 그리고 나, 어차피 금방 찾아올 줄 알고 있었어.

실은 이제 유신도 슬슬 닉이 보고 싶던 참이었으니, 차라리 잘됐는지도 몰랐다. 선뜻 돌아온 대답에 밀리도 안심했다.

☞ 그럼, 다행이고!

☜ 거기다, 밀리. 지금 대화한 내용을 네가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것도 아니잖아.

☞ 당연하지, 자기야. 지금 이렇게 너랑 대화한 거, 닉하고 가브리엘한테는 절대 이야기 안 해.

☜ 그럼 괜찮지.

유신은 괜찮다고 답을 쓰면서도, 닉은 그렇다 쳐도 가브리엘은 여기서 왜 나올까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그리고, 자기야. 어차피 닉 메드는 지금 비행기 타고 있어서, 내가 하고 싶다고 연락도 못 해.

☜ 하하, 그것도 그렇네.

☞ 실은 정말 걱정했단 말야. 결혼도 알고 보면 이것저것 사정이 있었다며. 그래도 다 잘 풀린 거 같아서 잠시 안심했더니, 갑자기 사라지기나 하고.

그러고 보니 밀리한테도 미안한 짓을 했다. 자신도 닉도 둘 다 정확한 설명도 안 해 주고 얼렁뚱땅 넘기는 바람에, 양쪽에서 휘둘리게 만들고 말았으니.

☜ 미안해, 밀리. 내가 너무 대충 설명했지.

☞ 됐어. 둘 사이는 둘이서 잘 풀면 되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말야. 거기서 다 풀고 와. 너넨 너무 대화가 부족해.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부끄럽다.

☜ 고마워. 노력해 볼게.

☞ 그치, 자기야. 나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라고. 그럼 난 데이트하러 간다.

☜ 데이트? 누구랑?

갑자기 답이 없었다. 데이트 간다더니, 말 그대로 잠시 어플 알람 자체를 꺼 버린 듯했다. 꽤나 진심이 분명했다.

유신은 그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밀리가 직접 말해 줄 때까지 잠깐은 기다려 줄 작정이었다. 조만간 뉴욕에 돌아가면 대놓고 물어봐야지.

그런 상태에서 세르게이가 티타임에 유신을 불렀던 것이다.

어쨌든 밀리에게서 얻은 정보로 보자면 오늘 안에 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다. 분명 이 저택으로 올 텐데, 굳이 기다렸다는 듯 여기서 맞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유신이 블라다의 권유에 따라 관광을 가겠다고 따라나선 이유였다.

***

그렇게 약간은 딴마음을 품고 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관광이었지만, 유신은 의외로 꽤나 즐거웠다. 무엇보다 블라다가 무척이나 친절하게 1일 현지인 가이드를 자처한 덕분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시는 거 아니세요?”

하지만 블라다에게도 본업이 따로 있을 터. 자신 때문에 일도 못 하고 괜히 시간만 뺏기고 있는 건 아닌지, 유신은 걱정이 되었다. 정작 그녀는 그저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걱정 말아요. 유신, 난 당신하고 있으려고 일부러 휴가도 냈거든요. 이럴 때 쉬려고 평소에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겠어요?”

“저를 위해, 소중한 휴가를!”

“그냥 좀, 뭐랄까요. 동생한테 평소 못 해 준 걸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실은 저만큼이나 아버지도 기대하셨는데, 휴가를 못 내셨답니다.”

“대공 각하가요?”

세르게이가 휴가를 내는 장면을 상상하고, 뭔가 어색해 유신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블라다가 대놓고 재밌어했다.

“아니, 그 호칭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어디서 배운 건 아니고, 어제 미하일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보니까 다른 고용인들도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건 사실 그냥 애칭이죠. 요즘 세상이 신분제 사회도 아니고, 진짜 공작인 건 아니에요. 뭐, 예전엔 어쨌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문장은 장난삼아 일부러 덧붙인 게 틀림없었지만, 유신에게는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보통 집안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막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적당히 선선해 걷기도 딱 좋았다. 블라다는 차를 타고 좀 더 나가면 더 멋진 곳이 많다고 했지만, 유신이 보기에는 시내만 해도 볼거리가 적지 않았다.

관광지로는 성당과 요새가 유명했다. 러시아는 천주교가 아니고 러시아 정교라, 성당의 형태가 다른 나라에서 보던 것과 달라서 흥미로웠다.

사실 유신도 전부터 이 도시에 관심이 많아서, 결국 오지 못했었지만 구체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을 정도다. 덕분에 블라다가 안내하는 장소 대부분은 어느 정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관광지였다. 하지만 잘 아는 현지인이 옆에서 설명을 해 주니, 확실히 더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중 멋진 돔 지붕에 황금을 두른 성당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속물적인 줄은 몰랐는데, 저 금색이 모두 진짜 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잊히지가 않는달까.

하지만 굳이 그런 유명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유신에게는 평범한 거리 풍경조차 충분히 이국적이고 멋졌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라 그런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도시 명물이라는 도개교가 올라가는 것을 보기 위해 시간 맞춰 네바강으로 가던 중이었다. 보고 나면 저녁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유신, 여기 있는 동안 한번 발레 보러 가요. 극장에 우리 집안의 박스석이 있거든요. 요즘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더라.”

“하하, 그러게요.”

블라다는 좋은 의도로 말했겠지만, 유신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발레 공연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직 그에게 좀 더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셔츠 소매 아래 차고 있던 다이아몬드 팔찌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블라다는 계속 유신에게 매우 친절했다. 혹시나 힘들지 않은지 계속 신경 써 주고,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무리하지 않고 잘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 블라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잠시 발을 멈추었다.

“오, 해바라기씨네.”

강가로 향하는 골목에 노점 거리가 있었는데, 그중에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해바라기씨 한 봉지를 사서 유신에게도 권했다.

“맛있죠?”

“그러네요.”

“근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날 수도 있어요. 근데 맛있단 말이죠.”

그런 말을 하면서도 블라다는 열심히 해바라기씨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유신이 아니라 제가 먹고 싶어서 산 것 같았다.

“유신, 해바라기의 꽃말을 아세요?”

“일편단심이던가? 해만 바라본다고 해서. 그렇죠?”

“맞아요. 그런데 몇 송이인지에 따라서도 꽃말이 또 다른 거 알아요?”

“아뇨, 처음 들어요.”

“3송이의 해바라기는 사랑 고백이고요, 4송이는 언제까지라도 당신을 바라본다. 11송이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리고 108송이는 결혼하자. 어때요? 우리 니카가 당신에게 해바라기 108송이를 줬나요?”

유신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큰 꽃다발을 좋아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보다.

“아뇨! 뭣보다 해바라기 108송이라니 너무 클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하죠. 그러면 999송이는 완전 싫겠다.”

“그, 그건 꽃말이 뭔데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유신은 어색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뭐 환생 이런 건가?

“그건 참, 뭐랄까. 굉장히 무겁네요.”

정작 블라다는 그런 유신의 대답이 이해 가지 않는 듯했다.

“로맨틱하지 않나요?”

“글쎄요. 999송이의 해바라기 무게만큼 그 마음이 대단한 건 대충 알겠어요.”

블라다는 생각한 반응이 아니라며 투덜거렸지만, 유신으로서는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슬슬 닉이 올 때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한참 전에 도착했으려나.

문득 유신의 시선 끝에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걸렸다. 줄지어 선 노점 중 하나가 골동품과 장신구 따위를 파는 가게였다. 유신은 옷소매 아래에 감추어진 팔찌의 존재감을 느꼈다.

이 팔찌를 보자마자 블라다는 약혼반지는 어디 있냐고 물었더랬다. 사실 그녀 정도 되니까 대놓고 물어본 거지, 다들 말은 안 해도 많이 궁금해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아무리 그렇대도 18억짜리를 평소에 낄 엄두는 나지 않아 그걸 끼고 다닌다는 건 선택지에도 없었지만.

슬쩍 돌아보자, 블라다는 바로 앞의 노점에서 뭔가를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유신은 아닌 척 슬그머니 장신구 노점으로 갔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그를 맞았다.

하지만 유신이 마음에 둔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좋아. 좋아. 아주 잘 골랐어, 젊은이. 그거 골동품이긴 하지만, 진짜 순금이라니까.”

정말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저렴했지만, 그것보다 비쌌으면 지금 유신이 가진 루블로는 사지 못했을 것이다. 유신은 블라다가 자신을 다시 찾기 전에 홀린 듯 계산까지 끝냈다.

할머니는 황갈색의 투박한 봉투에 유신이 산 물건을 넣어 주었다. 건성인 포장에 유신은 순금이라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대로 누가 볼세라 봉투를 잽싸게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몸을 휙 돌리다 그만, 유신은 지나가던 다른 사람과 보기 좋게 부딪히고 말았다. 솔직히 제대로 앞을 보지 않았던 건 사실이라, 그는 사과부터 했다.

“앗, 죄송합니다.”

“뭐야? 제대로 안 보고 다녀?”

하지만 우락부락해 보이는 남자는 껄렁한 인상만큼이나 바로 시비부터 걸어 왔다. 딱 동네 불량배랄까.

솔직히 유신이 하고자 한다면 이 정도야 혼자서도 어떻게든 처리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대응하는 대신, 뭔가를 기다리듯 잠시 멈칫했다.

“너 이 자식, 어딜 보는 거야!”

물론 그 태도는 상대의 화를 더 돋우었다. 드디어 소란을 깨달은 블라다도 황급히 다가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유신과 불량배 사이를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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