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15/22)

제2부 제5장

유신이 사라졌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에도 없었다. 원래 출석하기로 했다는 대학의 보강 수업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집을 나선 흔적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공용 현관 앞에 그의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배터리는 방전 상태였는데, 이건 단순히 닉이 전화를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이었다.

“유신이 수업에 가겠다고 해도, 내가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훌쩍이며 말하고, 밀리는 소파에 앉은 채 코를 팽 풀었다.

“밀리, 울지 말고 진정해요.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치만, 가브. 유신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저라고 하잖아요. 제가 너무 죄책감이 들어서, 흥. 오늘 오후는 회사에 일도 없어서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왜 바로 집에 안 와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 옆에서 가브리엘이 어쩔 줄 모르며 밀리를 위로하느라 바빴다.

닉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까 스튜디오에서 유신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닉은 지금이 생방송인 것도 상관 않고 바로 아이잭이 맡고 있던 핸드폰을 찾아 전화부터 걸었다.

전화의 상대방은 물론 유신이었지만, 당연하다는 듯 신호만 가고 받지 않았다. 닉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하필.

협박범은 왜 하필, 지금 폭로 글을 올린 것일까? 시간대조차 그가 평소 활동하던 때와 다르다. 항상 늦은 밤이나 새벽, 적어도 출근 시간대 전에는 글을 올려서, 분명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종에 근무 중일 거라는 분석이 있었다.

이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이 가슴의 두근거림. 유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닉, 왜 그래? 지금 생방송 중인 거 몰라? 어서 자리로 돌아가.’

아이잭이 대놓고 당황하며 자신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넋이 나가 횡설수설해 버렸다.

‘아이잭, 부탁이 있어. 아니, 올가가 나으려나. 아냐, 역시 내가.’

이쯤 되니 아이잭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유샤가 전화를 안 받아.’

‘요즘 한창 낮잠이 늘었잖아. 그냥 자나 보지.’

‘이번 달부터 안 그래. 그리고 지금 내가 나오는 코넬 쇼가 시작했는데, 자고 있을 리 없어. 깨어 있어야만 해.’

제풀에 안달 나 어쩔 줄 모르는 닉에게, 아이잭이 말도 안 된다고 단칼에 잘랐다.

‘제발, 닉.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이잭, 지금 난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냐! 이건 여태까지와 느낌이 전혀 다르단 말야!!’

하지만 닉은 전혀 진정할 수가 없어, 마지막엔 생방송 중인 것도 잊고 거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열애설이 터진 날도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아니, 유신의 히트가 시작됐을 때조차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불안하게 가슴이 조이는 감각은 아니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닉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 유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였다.

하지만 링컨이나 경호 쪽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 그것은 즉 유신이 건물을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결국 닉은 그대로 녹화를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 뛰쳐나왔다.

그 뒤로 쇼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 결론이 지금 이 수많은 경찰이라니, 더더욱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밀리와 유신이 사는 좁은 집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닉이나 가브리엘은 그렇다 치자. 닉의 회사 관계자부터 경호 인력에다, 경찰들까지. 관련된 사람들은 죄다 여기 모인 듯했다. 너무 붐비다 못해 안에서 쉽게 움직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위쪽에서도 이 건을 제일 신경 써서 최대한 빨리 해결하라고 난리도 아니에요.”

“워낙 유명인이잖아.”

“배우 아니더라도 워낙 부자라며.”

그중 제일 젊은 경찰이 팔꿈치로 슬쩍 구석에 선 닉을 가리켜 보였다.

“그나저나 연예인 실물은 처음 보는데. 진짜 잘생겼네요, 닉 메드.”

“안 그래도 우리 딸이 사인 받아 오랬는데. 이거 뭐 좀 해결이 돼야 말이라도 꺼내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닉은 대놓고 온몸에서 날카로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제길, 왜, 어떻게 이런.”

불안감에 넋이 나갈 지경이라, 주변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덕분에 방심한 나머지 빼어난 미모가 그대로 드러나 주변을 압도하는 것은 덤이다.

현관 밖에서는 호기심에 찾아온 일반인들을 경찰들이 계속 쫓아내는 중이었다. 물론 쫓아내도 쫓아내도 계속 찾아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외부에서 보기에 대단히 흥미진진한 사건이기는 했다. 할리우드 유명 스타 배우의 약혼자가 뉴욕의 낡은 월세 집에서 사라졌는데, 정황상 납치당한 것 같다니.

같은 날 오전, 그 배우와 약혼자가 산부인과 로비에서 크게 싸운 것과 오후에 둘의 관계에 대한 폭로문이 올라온 것까지,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가뜩이나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결합으로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커플이었다. 거기다 약혼자는 지금 임신 초기다.

물론 그중 최고로 흥미진진한 부분은 배우가 생방송 토크 쇼에서 폭로문과 관련해 약혼자에게 공개 고백을 하던 중, 갑자기 스튜디오를 뛰쳐나간 순간이었다. 정황상 납치를 알게 되어 그런 것이 분명했기에, 방송 사고에도 불구하고 토크 쇼의 시청률과 화제성이 오히려 엄청나게 올라 버렸다.

여하튼 지금 인터넷 연예 커뮤니티는 죄다 이 일로 시끌벅적했다. 다른 화제가 죄다 묻힐 정도였다.

물론 당사자로서 원하는 전개는 아니었다. 괜스레 범인을 자극할 위험만 크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닉의 넋이 나가 있는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마지막에 토크 쇼에서 했던 고백도, 그 말을 한 데는 일말의 후회도 없지만 같은 이유로 그의 걱정을 키웠다.

아마도 유신은 수업 시작에 맞춰 집을 나섰을 것이다. 따라서 납치 자체는 토크쇼 시작보다 훨씬 이전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유신의 이변을 방송 직전에야 깨달았을까?

그에 대해 경찰은 정신을 잃었던 유신이 그때 깨어났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알파-오메가 사이의 이 불가사의한 연결은, 의외로 범죄 케이스에서 자주 다뤄지는 내용이라고 한다. 물론 범죄 케이스라는 단어에 닉의 눈빛은 바로 어두워졌다. 그 케이스를 겪은 오메가가 무사히 알파에게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경찰이 답을 얼버무리자 닉의 불안감은 더해졌다.

다행히 닉이 느끼기에 유신은 그렇게 생명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절대 편안한 상태는 아니겠지만, 지금 그는 유신이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어디에 있는지까지 정확히 알면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무리였다. 페로몬이 닿는 좁은 범위 내라면 거의 정확히 찾아낼 수 있어도 이렇게 도시 레벨로 짚어 낼 수는 없었다. 이전 유신의 히트 때는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제일 먼저 찾아갔던 것이 다행히 들어맞았던 거고.

이쯤 되니 아이잭 쪽에서도 경찰에게 기존에 회사 쪽으로 도착한 협박장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유신의 책상 위에서도 비슷한 봉투가 발견되었다.

“유샤, 왜 나한테 이야길 안 했던 거야!”

그랬다면 절대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닉은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 역시 유신에게 회사에 온 협박장에 대해 결국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둘 다 똑같았던 거다.

“이 건물을 안 나간 건 확실합니다. 제가 계속 공용 현관 앞에서 죽치고 보고 있었거든요.”

링컨이 한 손에 커다란 카메라를 든 채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다. 경찰이 밀리에게 물었다.

“이 건물에 출입구는 거기뿐인가요?”

“실은 하나가 더 있긴 한데, 보통은 잠가 둬서 다들 어떻게 여는지도 몰라요. 원래 저 공용 현관도 잠가 놓아야 하는 건데, 여긴 반대로 자물쇠가 고장 나서요. 다들 열쇠 없이 그냥 이쪽만 사용하고 있었죠.”

그 대답은 경찰들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 듯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입구 쪽은 한동안 열렸던 흔적조차 없다고 하네요.”

“일단 공용 현관을 찍은 영상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보죠. 드나든 사람의 면면을 분석하다 보면 뭔가 힌트가 잡힐지도 모르잖아요.”

이 건물 내부에는 CCTV가 없었다. 법적인 최소한의 기준에 맞춰 설치는 되어 있었지만, 관리 부실로 고장 난 지 오래였다.

대신이라면 이상하지만, 닉이 고용한 보안 요원들이 외부에서 공용 현관을 찍어 둔 촬영분이 존재했다. 원래라면 법적인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지만, 일단 유신부터 찾은 뒤 생각하기로 했다. 대응이 늦어질수록 생명이 위험했다.

경찰 한 명이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늘 오후 촬영분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닉이 그 뒤로 섰다. 링컨도 현장에 있었던 만큼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진짜 흔적도 없군.”

“그죠! 제가 말씀드렸잖슴까? 아무도 안 나갔다니까요.”

링컨의 이야기대로, 닉이 한번 돌아갔다 다시 급하게 찾아온 사이에 유신이 자기 발로 건물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애초에 평일 오후라 드나드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알 수 없네. 설마 아직 건물 안에 있나.”

경찰관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닉이 링컨에게 화면 재생을 멈추게 했다.

“이거로군.”

그가 화면 한가운데를 손으로 짚어 가리킨 것은,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가방이었다.

챙이 달린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가 제 몸만 한 커다란 가방을 끌고 현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난 머리칼은 붉었다.

“여행용 캐리어 가방?”

“캐리어가 어쨌다고…… 아!”

이해를 못 하는 링컨의 옆에서, 뭔가를 깨달은 경찰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노트북으로 쏠렸다. 가브리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니키, 설마!”

“아, 나 저 사람 알아요. 저 빨간 머리. 유신은 그를 본 적이 없을 테지만, 전 몇 번 마주쳤거든요. 얼마 전부터 윗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이사 오는 걸 못 봐서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리가 남자를 알아보았다. 모자 때문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닉도 그를 어디선가 본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저 캐리어 안에 나의 유샤가 있었을 거야.”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닉은 덧붙여 설명했다. 경찰이 그럴듯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저기 넣어 옮겼다면 안 보이긴 했겠네요.”

“와, 미스터 메드! 어떻게 그리 신박한 생각을 다 하셨어요?”

링컨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지만, 닉은 그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무언가 불편한 듯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가브리엘이 예상했다는 태도로 그런 닉의 등을 두드리며 물을 마시게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오히려 밀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실 놀란 건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이 곤란한 듯 눈을 찡그렸다.

“이 녀석, 저거 경험자거든요. 니키, 내가 말해도 돼?”

“……맘대로.”

“얘가 어릴 때 캐리어에 숨겨져서 유괴당한 적이 있어서요. 그래서 폐소 공포증이 생겨서, 어둡고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발작을 일으키는데요.”

“아, 저도 유신이 말해 줘서 들은 적이 있어요. 폐소 공포증. 딱히 비밀은 아니랬는데.”

밀리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프로필에도 다 적혀 있어요. 보통은 별문제 없어서 다들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만. 이번에 니키가 그때 일을 떠올리는 상황을 보고, 비슷하게 발작을 일으킨 거 같네요.”

“딱히 심한 건 아냐.”

어느새 회복한 닉이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아직 창백한 안색에 조금 땀이 밴 이마가, 없던 일이 아니라고 도리어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밀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을 닉은 애써 모른 척했다. 바로 옆에서 오랜 친우인 가브리엘이 비슷하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더 그랬다.

사실 과거의 끔찍한 경험은 아직도 닉 자신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서 닉이 일으킨 발작은 유신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유신은 유괴 사건에 대해서까지 모두 다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만약 정말로 그도 캐리어로 옮겨졌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우연의 일치일까?

어쨌든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이걸로 어서 빨리 추적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그들은 현관문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소란을 미처 알지 못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제 제자를 만나러 왔다니까요. 무슨 일인지 전화도 메일도 연락이 안 돼서 그렇지, 이 집에 사는 사람과 아주 잘 아는 사이라고요.”

“안 됩니다.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

현관 앞을 막아선 경찰의 완강한 거부에 방문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어후, 친절한 분의 도움도 받아 가며 여기까지 겨우 찾아왔는데, 집에도 못 들어가 보네. 대체 유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가느다란 체구에 키가 크고 우아한 동양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쓰는 영어에는 진한 외국인 억양이 섞여 있었고, 젊어 보이는 외모에 비해 목소리에서는 제법 연배가 느껴졌다.

“짐이라도 맡아 줄 순 없을까요?”

“안 됩니다.”

“하아, 그럴 줄 알았어요.”

여자는 들고 있던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가방을 경찰에게 보였으나,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럼, 메모라도 전해 주세요. 한국에서 이유신의 발레 선생님인 한진아가 왔었다고.”

“알았으니, 일단 돌아가세요.”

경찰은 딱히 믿음직스러운 구석은 없었지만, 진아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급히 수첩을 꺼내 재빨리 몇 글자를 휘갈겨 경찰에게 건넸다.

“꼭이에요! 잊으시면 안 돼요.”

한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나 다그치고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

얼핏 본다면 유신은 그저 소파에 똑바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여전히 까맣게 꺼져 있었다.

높게 쌓인 잡동사니가 사방을 빼곡하게 채운 좁고 더러운 방이었다. 낡은 텔레비전 맞은편에 놓인 소파 커버는 빛바랜 꽃무늬였다. 유신의 손목과 발목을 각각 하나로 모아 둘둘 감아 놓은 테이프가, 그가 좋아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나마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는 떨어져 있었지만, 뺨 한쪽이 얻어맞은 듯 부어 있었다. 쓰고 있던 안경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다시 같은 상황을 겪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정작 유신은 놀랐다기보다 침착해 보였다. 소파에 앉은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바른 것도 그랬지만, 상황에 맞지 않게 차분한 표정이 더더욱 그리 보였다.

“…….”

유신은 노트북 앞에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폴의 옆모습을 흘끗 살폈다. 방 반대편 구석에서 한창 키보드를 쳐 대느라 바빠 보였다. 맹하게 벌어진 입은 어딘가 넋이 나가 보였지만, 중간중간 위험한 눈빛으로 소파에 앉은 유신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시나 유신이 받았던 익명의 편지는 모두 폴이 보낸 것이었다. 유신은 미처 몰랐지만 인터넷에도 비슷한 느낌의 글을 한동안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닉의 회사에도 협박장을 보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오늘 닉이 묘하게 걱정이 많고, 아이잭이 이상하게 발끈하며 전화를 건다 했다. 그쪽도 협박장을 받아서 그랬다고 생각하니 앞뒤가 맞았다.

자신이 수상한 편지에 대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처럼, 비슷하게 닉도 타이밍을 재다 결국 이야기하지 못했던 거다.

참고로 유신이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폴 쪽에서 알아서 가볍게 입을 놀렸다. 그럴수록 유신이 겁에 질려 시킨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정작 유신 쪽은 폴이 저렇게 나올수록, 오히려 말하는 쪽이 안달복달해 그렇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아마도 여행용 캐리어로 여기까지 운반된 듯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방 안이었던 것으로 보아 거의 틀림없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리라. 더러운 유리창 밖의 풍경으로 보아 원래 있던 집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솔직히 유신은 캐리어로 옮겨진 사실에 별 감흥은 없었다.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단, 이 사실을 닉이 알게 되면 괜히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지나 않을지, 그쪽이 더 걱정이었다.

유신은 닉이 어릴 때 같은 수법으로 유괴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영화배우 닉 메드의 팬이라면 몰라도, 발레리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니카의 팬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었다.

기분 나쁜 부분은 오히려 닉이 낮에 집에 들러서 둘이 관계를 가진 사실을 폴이 알고 있다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달라질 것은 딱히 없었지만.

사실 유신은 지금 방금 전 닉이 출연한 코넬 쇼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를 음미하느라 바빴다.

『신이 도왔다고, 내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정말 운명이로구나, 하고.』

폴은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캐리어 안에 갇힌 채로도 바깥의 소리는 대부분 꽤나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 전부터 알던 사이였거든요. 제가 배우로 데뷔하기도 전의 일이죠.』

『네, 제가 지금과 전혀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죠.』

덕분에 유신은 닉이 한 말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봐, 가식적인 저 모습을. 역시 짜증 나잖아.”

이렇게나 투덜거리는 폴은 역시 모르는 거다. 닉이 한 말들이 유신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아니, 사정을 잘 모르는 다른 이들은 닉의 뜬구름 잡는 말에 대부분 오히려 폴과 같은 반응을 보일 터였다.

“걱정 마. 앞으로 넌 나와 있으면 되니까.”

옆에서 폴이 뭐라고 중얼대고 있었지만, 솔직히 유신의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안경이 없어 그의 모습도 주변도 살짝 흐릿했다.

감정이 북받쳐서일까, 멍하니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을 향하는 유신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 따위 상관없었다. 고백이란 원래가 단 한 명을 위하면 족한 것이다.

“잠깐,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폴은 유신이 조용한 것이 못마땅했다. 고분고분한 것 같으면서도, 저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자각 없는 무시가 의도한 무시보다 더 기분 나쁜 법이다.

“대답 좀 해 보라고.”

“응, 뭐죠?”

갑자기 어깨를 붙잡혀 유신이 흠칫 몸을 굳혔다. 마치 이제야 제 존재를 인식한 것 같은 무심한 반응에, 폴의 표정이 좀 더 험악해졌다.

“역시 너 안 듣고 있었구나!”

그의 오른손이 가차 없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

이제 사건은 경찰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원래라면 거기서 닉이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제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 나라에 넘어온 뒤로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 없는 행동이었지만, 유신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니키, 진짜 괜찮겠어?”

“가만히 있다가 후회하는 것보다 나아.”

그런 제 집안 사정을 다 아는 오랜 친구 가브리엘이 걱정스레 물어 왔지만, 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쪽에서 너무 쉽게 허락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는 더 불안했다. 마치 전후 사정을 죄다 알고 있는 것 같다랄까. 유신에 대해서 설명부터 해야 할 거라고 진득하게 각오하고 있었는데.

“주소 확보했습니다!”

눈에 띄는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이동하는 젊은 남자를 일단 지목하자, 그의 자취를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도시라면 골목마다 CCTV와 블랙박스가 넘쳐 나는 세상이었다.

남자의 목적지는 유신의 집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집주인은 폴 에반스, 27세. 철없이 어려 보이는 외모에 비해서는 의외로 나이가 있다. 그리고 코스모 종합 병원의 직원.

망할, 책임지고 비밀 엄수한다더니, 대체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었던 거야?!

닉은 이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이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병원에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울컥했다.

빠르게 영장 작업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베테랑 경관 두 명이 선발대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뒷좌석에 생각도 못 한 VIP를 태워야만 했다.

“어떻게 저 사람이 같이 가는 거지? 유명인이긴 하지만 일반인이잖아.”

“몰라. 위에서 허가가 나왔다는데? 데리고 가라고.”

“그게 허가가 나면 가능하고 그런 거였어?”

앞좌석에서 대놓고 쑥덕거리는 대화를 닉은 건성으로 넘겼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른 그는, 어떤 의미로 상황에 매우 걸맞은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다.

지금 닉은 그저 유신의 무사만을 빌 뿐이었다. 불안감에 그의 표정이 점점 썩어 가는 것을, 경관들은 자신들의 대화에 기분이 상한 것으로 오해했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경찰차가 출발했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겨울이었으면 완전히 깜깜해졌을 시간이다. 어스름한 그늘에 세상의 윤곽이 모두 불분명했다.

걸어서도 충분히 가까운 만큼, 차를 타니 그야말로 코앞이었다. 하지만 고작 한두 블록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유신이 살던 거리와는 대놓고 분위기가 달랐다.

어차피 집이 낡은 것은 거기나 여기나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쪽이 훨씬 더 스산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나 이 단독 주택은 좁은 정원에 높게 쌓인 잡동사니부터 대놓고 방치된 느낌이었다.

경찰차는 집 맞은편 골목에 섰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분위기에 경관들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는 무전과 함께, 그들이 일단 차에서 내릴 때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겉옷도 걸치지 않고 뛰쳐나왔다.

부스스한 빨간 머리, 창백한 안색과 코끝에 있는 주근깨. 아까 사진으로 본 폴 에반스 본인이 틀림없었다.

“뭐,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작스런 상황에 경찰들이 총을 뽑아 들었다.

폴은 무슨 충격적인 장면이라도 본 듯, 눈이 풀리고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양손은 가슴 가까이까지 들어 올리고, 손가락 사이를 크게 펴서 움찔거리는 채다.

경찰차를 보면 도망칠 줄 알았는데, 왜일까? 그는 오히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멈춰라.”

“허튼짓하면 쏜다.”

두 개의 총구가 가차 없이 폴을 겨눌 때였다.

“자, 자수합니다!”

갑자기 그가 양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다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텅 빈 눈동자 어디에도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 제가 한 짓입니다. 유신 리를 납치한 것도, 협박문을 보낸 것도 모두 접니다. 반성합니다. 어서 저를 잡아가 주세요.”

경찰들은 당황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경관 중 한 명이 미란다 원칙을 읊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닉은 홀린 듯 길을 건넜다. 경찰들의 주의가 자연스럽게 폴에게 쏠린 바람에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폴이 뛰쳐나온 현관문은 아직 여전히 열린 채였다. 닉의 시선이 혼란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집을 살폈다. 그럼, 유신은?

솔직히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저 새끼가 혼자 나온 거지? 게다가 저 꼴,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감각은, 제 본능은, 지금 유신에게 큰 문제가 없다고 알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정확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애초에 돌아가는 매커니즘 자체를 아무도 모르는데.

“제길, 유샤는 괜찮은 건가?”

만약 자신이 이미 늦었다면. 유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다음이라면.

닉은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에 비틀거리며 건물 벽에 손을 짚었다.

“안 돼.”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그를 잃는다면.

그와, 그의 배 속에 있는 자신의 아이와.

아니, 아이까지 지금 생각할 순 없다. 부디 너만 무사할 수 있다면. 아아, 나의 유샤.

“니카,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유신이 닉을 불렀다.

***

조금 전, 폴의 오른손이 유신을 내리치기 위해 가차 없이 치켜 올라갔을 때였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이건가요?”

손이 휘둘러지기 직전, 유신은 폴을 향해 물었다. 눈 안에 별을 박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납치한 상대를 향했다.

“강제로 절 데려오고,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고. 정말 이런 걸 원했나요?”

우성 오메가는 상대를 홀리고, 우성 알파는 상대를 압박한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우성 오메가도 우성 알파도 본능적으로 평소엔 어지간해서는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신은 지금이 바로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물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상관없었다.

애초에 폴은 유신에게 홀려 있지 않았던가?

“아, 내가 무슨 짓을.”

역시나 눈을 마주친 것으로 이미 게임은 끝이다.

폴은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유신은 아무 말도 않고 그가 다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딱히 길게 걸리지도 않았다.

“전, 말이죠.”

곧 폴이 유신의 앞에 선 채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마치 고백 같았다.

“네, 말씀하세요.”

유신은 이미 다 예상 범위 안이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당신과 그저.”

“알고 있어요.”

어느새 두 사람의 힘의 구도도, 서로를 향한 태도도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맞다. 자신은 원래 이런 캐릭터였다. 여태까지가 조금 지나치게 휘둘린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유신은 조금 느긋해졌다.

따지자면 요 몇 주간이 본인답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애초에 그런 허술한 공작에 납치당할 리 없었는데, 입덧이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일단 테이프 좀 풀어 주세요.”

유신은 폴에게 테이프로 둘둘 감긴 손목을 내어 보였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큰 잘못을 했네요.”

그는 유신이 시킨 대로 손목과 발목에 감긴 테이프를 조심스레 잘라 냈다. 발목은 옷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손목에는 테이프의 접착력에 발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목을 문지르며 유신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됐으니 어서 자수하세요.”

“자, 수.”

“당연하죠. 잘못을 했으면 죗값을 받아야 하니까요. 나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경찰한테 가서 자수하세요.”

“……네, 자수, 하겠습니다.”

폴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휙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꽤 불안해서 넘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문을 나서도록 그런 일은 없었다.

“흠, 괜찮겠지?”

저런 인간이 거리를 나돌아 다니도록 해도 괜찮을지 조금 걱정이었지만, 거리를 지키는 선량한 경찰을 믿어 볼 생각이었다. 뭣보다 제 쪽이 저놈하고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말야.

노린 건 아니지만 안 그래도 바깥에 마침 경찰차가 서 있다. 안경이 없어서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차 위에 붙은 저 빨강과 파랑 등불을 보아 거의 확실했다.

설마 자신을 구하려 찾아온 걸까 잠깐 생각했다가,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경우가 좋을 수 있겠어?

“알겠니, 콩알아. 너무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유신은 괜히 멋쩍어져서 제 아랫배에 대고 말을 걸었다. 별일 다 겪은 것치고 아이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문도 활짝 열려 있고, 팔다리의 테이프도 풀렸다. 멍때릴 때가 아니라 이제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유신은 재빨리 안경부터 찾았다. 다행히 소파 아래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안 부서져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안경을 고쳐 쓰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

“아.”

큰 키에 지나칠 정도로 곧은 자세, 눈에 띄는 백금발과 화려한 이목구비. 그 와중에 눈에 안 띄려고 그랬는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튀었다.

참지 못하고 다가가는 유신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트렌치코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을 때는, 이미 거의 뛰고 있었다.

“니카,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보고, 닉은 너무 놀란 나머지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당황했다.

“유샤? 어떻게, 저놈이 먼저 나왔는데?”

“안경 찾아 쓴다고 좀 늦었어요.”

유신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닉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안경을 찾아 써?”

“네, 어쩌다 보니 바닥에 내팽개쳐져서. 안 부서져서 천만다행이죠.”

“하지만 어떻게.”

“약간 실력 발휘를 했죠. 당신도 전에 봤잖아요. 나 약하지 않다니까요.”

당황하는 닉을 향해 유신은 양팔 소매를 걷어 올리는 척을 해 보였다.

실력 발휘라. 그러고 보면 예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도중 취객이 나타났을 때도 혼자서 유도 기술로 날려 버리고, 말 한두 마디로 설득시켜 조용히 돌려보냈던 유신이었다.

물론 닉도 우성 알파인 만큼,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딱히 이상할 것 없는 흐름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각한 상황이다 보니 영 미심쩍었기에, 닉은 한 번 더 확인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유샤?”

“네, 다 끝났어요, 니카. 난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신이 그런 알파의 손을 끌어당겨 제 아랫배로 가져갔다.

“아기도 괜찮은 거 같아요.”

한번 닿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닉은 그대로 유신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다행이야.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의 유샤.”

“응.”

그대로 둘은 끌어안고 키스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니, 조금은 닉이 더 급했는지도 몰랐다.

가쁜 숨결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뒤섞였다.

“응.”

닉의 뜨거운 혀가 입천장의 점막을 훑어 내리자, 유신의 허리에서 힘이 풀렸다.

고작 반나절 전, 몸을 섞었던 알파다. 아직 상대의 페로몬이 몸 안에서 다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이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땅히 돌아와야 할 곳에 안겼다고 외치는 듯했다.

닉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매던 몸과 영혼이 드디어 와야 할 곳에 도착한 것만 같았다.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 상대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오메가였다. 이제 놓칠 수 없다. 정신없이 혀를 섞으며 닉은 으스러지듯 유신을 껴안았다.

유신 또한 밀어 내는 대신, 오히려 기뻐하며 목에 팔을 둘렀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에 하얗게 자국이 생길 지경이었다.

덕분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둘 다 꽤나 숨이 찬 상태였다. 그래서 유신이 평소와 달리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이게 뭐야?”

닉이 한 박자 늦게 유신의 뺨 한쪽이 부은 것을 발견했다. 물론 몇 시간 전에는 없던 이 상처를 만들었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폴.

닉은 발끈해 경찰차 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뒷좌석에 갇혔는지, 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새끼가! 지금 당장 뼈라도 몇 개 분질러 버려야.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가려는 닉을 유신이 말렸다.

“쉿. 그만둬요, 니카.”

“하지만, 저 자식이 감히 너에게 상처를.”

“날 봐요. 이미 끝난 일이에요. 나 지금 무사해요.”

유신은 닉의 뺨을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시선이 맞닿은 채, 안경 아래에서 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닉을 향해 반짝였다.

“우리 아이도 무사하고요. 이 정도 일에 이만하면, 괜찮은 게 아닐까요?”

유신의 허리를 껴안은 닉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유샤.”

“그리고 아마, 이젠 정말로 괜찮을 거예요. 내가 확실하게 했거든요.”

“응?”

여전히 눈을 맞춘 채 유신이 방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 같던 눈빛이 순간이지만 묘하게 차가워, 닉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떨렸다.

유신의 양손이 여전히 닉의 뺨을 감싼 채였다. 그는 가볍게 닉의 턱을 끌어당겨 그 입술에 쪽 입 맞추었다. 바라보는 눈빛은 다시 달콤해져 있었다.

“슬펐나요?”

닉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신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닉의 목에 팔을 두르며 유신이 다시 물었다.

“두려웠어요?”

“유샤.”

“이상한 말이지만, 니카. 난 당신의 두려움을 느꼈어요.”

닉은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느끼는 거야. 나도 너의 공포를 느꼈어.”

“맞아요. 나도 두려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에게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끌려갔으니까, 당연하게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웠던 건가요?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나요?”

“나는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웠어. 너를 지키지 못하고 눈앞에서 놓친 것이 너무도 후회돼서.”

닉은 한 손으로는 여전히 유신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은 채,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의 유샤,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달콤한 한숨 같은 탄식이었다. 아직 이마와 이마를 맞댄 채라,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유신이 닉의 크고 단정한 손에 뺨을 비볐다.

“이상해요. 고작 나 때문에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두려웠다니. 당신은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이잖아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아. 다시 만난 이후로 항상 그랬어.”

“다시 만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뒤로 빼는 유신을, 되레 제 품으로 더 끌어당기며 닉이 대꾸했다.

“설마 내가 발레 콩쿠르에서 널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 그중 분명 한 번은 대놓고 인사도 했었다고.”

“그거, 내가 17살 때, 체코 국제 콩쿠르.”

닉이 한마디 하자마자, 유신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닉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서랍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맞아. 그때야.”

닉은 유신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유신은 제가 말하고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거기에 자신이 포함되는 상황은 그의 가정 외였던 것이다.

“아뇨,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야.”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코넬 쇼에서. 네가 그 토크 쇼 본다고 해서 일부러 대놓고 이야기한 건데.”

“맞아요. 그런 말을 하긴 했었죠.”

뭔가 급 피곤해진 듯 맥이 풀려 보이는 유신의 뺨에, 코끝에, 닉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쪽쪽 입 맞추었다.

“나의 유샤, 결혼 이야기도 네가 도망갈 거 같아서 꺼낸 거야. 이혼 이야기도 그래야 네 부담이 없을 거 같아서 한 거고. 일단 혼인 신고 끝나고 나면, 절대 이혼 도장 찍어 줄 생각은 없었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하는 닉에게 안긴 채 유신이 얼빠진 신음을 흘렸다.

“하아, 왠지 그렇지 않을까, 순간순간 의심스럽긴 했지만.”

“내가 좋아서 내 취향으로 약혼반지를 선물하고, 협찬을 빌미로 이것저것 입혀서 여기저기 과시하듯 데리고 다녀서 미안해. 입덧만 아니었어도 좀 더 많은 곳에 함께 가고 싶긴 했지만.”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아무리 유신이라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만요. 협찬이라던 거 다 가짜였어요?”

“협찬은 맞아. 맨 처음은 살짝 끼워 팔기였지만. 두 번째부터는 네 매력 덕분에 진짜로 널 목적으로 협찬 제안이 들어왔거든. 내 취향으로 좀 걸렀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말야.”

닉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유신이 한숨을 쉬며 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아, 뭔가 화내기도 피곤해졌어요.”

“제발 화내지 마.”

“화내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남의 이야기 좀 들으라구요.”

“미안.”

살짝 짜증을 내는 유신에게 닉은 바로 사과했다. 유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런 그의 코끝에 다시 입 맞추었다.

“아직도 당신이 고작 나 때문에 그렇게 두려웠다니 믿기 힘들어요. 나 자신이 직접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도 못 믿었을 거예요.”

“이번만은 그 현상에 감사해야겠군. 네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난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데.”

유신이 곤란하다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자꾸 이것저것 꾸며 댄 건 당신이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진짜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맞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어차피 그때 병원에서 보기 전까지 날 까먹고 있었을 거면서.”

“그렇지 않아. 계속 마음 한구석에 널 두고 있었다니까.”

닉이 유신의 입술에 다시 쪽 키스를 했다. 누가 봐도 뽀뽀인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 난 아무래도 네가 내 첫사랑인 거 같아, 유샤.”

유신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다음 순간 피식 웃어 버렸다. 짜증은 나지만 싫지는 않다는 태도였다.

“진짜 바보 같아.”

“믿어 줘. 진심이니까.”

“됐으니까. 그냥 나한테 키스해 줘요, 니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하지만 제 말에 신이 난 닉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신은 이대로 그냥은 못 넘어간다는 듯 덧붙였다.

“잠깐, 그래도 난 다 용서하진 않았어요. 이대로 다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요. 좀 있다 나한테 어디까지 거짓말이었고, 어디까지 꾸민 거고, 어디까지 진실인지 다 이야기해야 할걸요.”

“그럼 지금 키스하지 마?”

“아니, 키스는 해요.”

그건 아니라고 유신이 부정했다. 닉이 바로 진한 키스를 시작했다.

“응, 읏, 흐응.”

방금 전의 입맞춤은 은근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 비교도 되지 않게 격렬한 키스였다. 보는 사람이 되레 부끄러워질 정도로 혀와 타액이 진하게 둘 사이를 오가자,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흘끗 돌아볼 정도였다.

길 반대편의 경관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열렬한 키스에 꽤나 감동받은 모습이었다.

지나가던 누군가 휘파람을 불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사진 정도는 진작에 찍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둘은 더 키스에 열중했을 뿐이었다.

시간도 공기도 멈춘 것만 같은, 두 사람만의 세계였다.

***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밀리는 망설임 없이 여자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아, 너무 무겁네요. 좀 들어 주세요.”

그녀, 한진아는 웃으면서 들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아이스 백이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닉이 슬쩍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마침 곁에 있던 가브리엘이 얼결에 그 아이스 백을 받아 들었다.

진아를 부른 것은 밀리였다. 유신을 무사히 찾았다는 소식에 다들 한숨 돌렸을 때, 경찰이 마침 그녀의 메모를 전해 준 것이었다.

지금 병원에서 검사 중인 유신을 대신해 닉의 확인을 거친 후, 밀리는 바로 진아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 역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지금 딱 시간이 비었다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찾아왔다.

마침 유신의 물건을 챙기러 잠시 들렀던 닉도 함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내일 출국인데, 그래도 이렇게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한진아는 존재감부터 꽤나 강렬했다. 쉽게 나이를 읽어 낼 수 없는 외모는 미인이라기보다 분위기가 독특했고, 특히 스타일이 좋았다. 무엇보다 등 뒤에 막대를 댄 듯 곧게 선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의식적인 동작이 아니라, 오랜 기간 많은 연습으로 몸에 밴 결과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다시 보면 전형적인 무용수의 체형이다.

밀리는 저런 실루엣을 분명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유신도 가만히 두면 저런 식으로 곧게 서 있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런 부분에선 확실히 스승과 제자가 맞았다.

“그 안에 든 건 빨리 냉장고로 옮겨야 해요.”

진아의 당당한 요구에 아이스 백을 들고 있던 가브리엘이 당황했다.

“이게 대체 뭐길래요?”

“유신의 부모님이 보내신 김치랍니다. 그 외에 간식도 몇 가지 있고요.”

하지만 이어지는 진아의 설명에 가브리엘의 눈빛이 단번에 초롱초롱해졌다. 그는 아이스 백을 식탁 위로 올려놓으며 지퍼부터 열었다.

“한국 가정집에서 만든 김치군요. 처음 봐요.”

아무래도 요식업자다 보니 관심이 많은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뚜껑을 열어 맛을 보고 싶다는 기세였다. 그가 아이스 백 안에 든 물건들을 급히 작은 냉장고 안으로 정리하는 것을 밀리가 도왔다.

진아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받는 사람이 저도 모르게 공손해지는 선생님의 눈빛이었다.

“그런데 유신은 어딨죠?”

“그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이요?!”

깜짝 놀라는 진아를 향해, 밀리는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그냥 혹시 몰라서 검사받는 것뿐이래요.”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진아는 대놓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여태껏 조용히 있던 닉에게로 슬쩍 시선을 향했다.

“안 그래요,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밀리의 옆에서, 가브리엘이 오히려 태연했다. 닉이 웃으면서 진아의 손등에 우아하게 입 맞추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지냐.”

“어머나, 그 애칭 간만이야. 그걸 당신이 기억해 줄 줄 몰랐어요.”

“나야말로 정말 본인이 맞나 긴가민가했어요. 갑자기 이런 유명인이 등장해서.”

“아무리 그래도 당신만큼 유명하겠어요.”

둘 다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가브리엘의 표정이 오히려 썩어 갔다. 서로 견제하는 의뭉스러운 대화를 어느 정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밀리는 저 니콜라이 어쩌고 하는 게, 유신이 제게 말해 준 적 있던 닉의 러시아 이름이라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 유신의 발레 선생님이 닉 메드를 러시아 이름으로 부르고, 러시아어로 대화를 하는 거죠?”

“그건 지냐가 내가 러시아 국립 발레단에 입단하기 전,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기 때문이지.”

의외로 닉이 선선히 대답했다. 진아가 쑥스러워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너무 원로 같잖아요.”

눈앞의 여성이 대단한 발레리나였다는 데에 밀리도 가브리엘도 놀랐다. 밀리가 예의 바르게 유신의 하우스메이트라고 자기소개를 한 뒤 물었다.

“정말로 유신의 발레 선생님이세요?”

“그럼,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기로 유학 오기 직전까지 가르쳤던걸요.”

“와, 유신이 무용을 그렇게 오래 했었군요.”

“네, 제가 은퇴하고 바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니까요.”

보통이라면 그 이야기를 듣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진아의 젊어 보이는 외모에 놀랐겠지만, 밀리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제 친구의 발레 경력에 놀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와, 대단한 발레리나분께 그렇게 오래 배웠다니, 유신도 춤을 잘 췄겠죠?”

그 말에 진아가 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제자가 춤추는 것을 본 적이 없나요?”

“네, 제가 유신을 알게 된 건 사고 이후라서요. 그때는 이미 춤을 그만둔 다음이었어요.”

“영상으로도?”

“영상이 있어요?”

깜짝 놀라는 밀리에게 진아가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듯 설명했다.

“그럼요. 유신이 한창 국제 콩쿠르에 나가던 시절은 이미 동영상 사이트가 활성화된 이후였으니까요. 몇몇은 해상도가 좀 낮긴 하지만, 대부분 지금 기준으로도 화질이 나쁘진 않아요.”

“우와, 콩쿠르요?”

이번에는 진아가 제 제자를 칭찬할 차례였다. 놀라워하는 밀리에게 그녀는 신이 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신이 얼마나 무용계의 기대주였는지, 콩쿠르에서 얼마나 많이 입상했는지, 그중에 우승이 몇 번이었는지. 그가 발레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 발레계가 매우 실망했고, 현대 무용계에서는 얼마나 환영했는지.

“와, 그렇게 대단했구나! 전 전혀 몰랐어요. 유신은 춤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얼버무리기만 했거든요.”

“이야기하기 싫었던 마음도 뭐 이해는 가네요. 본인이 원해서 그만둔 게 아니었으니까요.”

닉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신이 사고가 났을 때는, 무용계의 유망주가 타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뉴스에도 났었지. 기사를 본 사람도 제법 있을걸.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으니, 유신이 당사자인 것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밀리가 다시 놀라워했다.

“닉, 당신은 유신의 경력을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콩쿠르에서 마주친 적도 있는데. 같은 무대에 오른 적은 없지만. 같은 분야인데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들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둔다고. 난 몇 년이나 같이 살면서 전혀 몰랐던 네가 더 이상한데?”

“저한테는 진짜 전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만 말해서 생각도 못 했다구요. 뭣보다 유신은 본인은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지만, 그게 특이한 일인 것처럼 말하던데. 당신 쪽에서는 당연히 자신을 모를 거라고.”

밀리의 설명에 닉은 왠지 그럴 줄 알았다며 신음을 흘렸다.

“너무 있을 법해서 놀랍지도 않군. 물론 처음에는 나도 시간이 지나서 알아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런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은 적 없어.”

여태껏 가만히 듣고 있던 진아가 푸념했다.

“그런데 제가 올 걸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건가요? 유신이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요? 분명 제가 뉴욕 출장 중에 보러 들를 거라고 유신의 부모님께서 이야기하셨을 텐데 말이죠. 아니, 유신이 메일을 확인 안 한 거로 나오던데 진짜 메일을 확인 안 한 것뿐인가.”

“이해해 주세요, 지냐. 나의 유샤는 요즘 계속 이래저래 혼란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진아는 닉이 유신을 멋대로 애칭으로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제 이름도 바꿔서 부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굴었을지는 알 것 같아요. 분명 혼자 다 껴안고 본인은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야.”

“역시 그렇죠.”

“그래도 당신이 지켜 줬어야죠. 이왕 결혼하기로 결심한 거면요.”

그 이야기에 닉은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정면으로 지적당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죄송합니다.”

“뭐, 그 아이는 영리하고 현명하니까. 결국 자기가 알아서 해결했죠?”

진아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제자에 대한 약간 팔불출 같은 한마디에, 닉이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진아가 그대로 잘해 보라는 듯 닉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 정확히는 잘하는지 지켜볼 테니까 정신 차리라는 쪽에 가까웠다.

그대로 두 사람은 잠시 그녀가 내일 언제 유신의 병실에 들를지 의논했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어서 보호자인 가족 (여기서는 닉) 말고는 면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정하자마자, 진아는 아직 일이 남았다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가세요.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꼭 같이 식사라도 해요! 유신도 끼워서 셋이서요.”

가브리엘과 밀리의 인사와 함께, 닉은 그녀를 위해 손수 문까지 열어 주며 배웅했다.

“여기까지 온다고 힘들진 않으셨어요? 이 집이 메인 스트릿이 아니라 주소만으로 찾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맞아요. 택시도 근처까지밖에 데려다주지 않더라구요. 짐도 무거운 데다 특히나 지난번엔 처음 온 거라 거의 길을 잃을 뻔했답니다. 고맙게도 날 알아본 발레 올드팬이 있어서 친절하게 여기 바로 앞까지 안내해 줘서 살았죠. 그런데 그녀는 내가 유신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더라고요. 아니, 방금 전 유신의 하우스메이트 친구처럼 유신의 발레 경력 자체를 모르는 것 같길래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줬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크게 도움이 되었겠어요.”

“그러니까요. 아, 오늘은 두 번째라 택시를 타고 건물 입구까지 바로 왔어요.”

대화는 그저 화기애애했다. 유신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서로 안심해서 더 그런 것도 없지 않았다.

둘 다 자신들이 나눈 대화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될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한 그들이었다.

그 올드 발레팬이 그날 이미 이 집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에게 붙들려, 진아가 해 준 유신에 대한 이야기를 죄다 불어 버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나불나불 말하다 못해, 원래 아는 지식까지 총동원해 잔뜩 살을 붙였던 것은 더더욱.

***

“니카, 내가 말했잖아요.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침대에 누운 채 환자복 차림으로 열심히 주장하는 유신의 뺨에 닉이 쪽 뽀뽀를 했다.

“응, 응, 검사 결과는 모두 확인했어. 정말 다행이지 뭐야. 아기도 아무 이상 없고. 내일까지 하룻밤 더 여기서 푹 쉬고 아침에 퇴원하자.”

매우 호화로운 1인실이었다. 채광도 좋아 한쪽 벽을 채우는 커다란 창으로 햇볕이 들어와 매우 밝고 환했다. 거기다 군데군데 놓인 엄청난 양의 꽃다발은 무슨 꽃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유신이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쯤 되면 닉이 꽃집하고 실수로 무슨 대량 계약이라도 맺은 게 틀림없었다. 그가 꽃만 가져오면 항상 이렇게 양이 많았다.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담긴 화병이나 화려한 꽃바구니 등등은 색깔도 크기도 가지각색이었지만, 죄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꽃밖에 없다는 점만은 통일성이 있었다.

원래라면 병실에 함부로 꽃다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지만, 혹시 몰라 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한 것뿐이라 상관없었다. 닉은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넓고 깔끔하다고 내심 감탄하는 유신의 옆에서 너무 삭막하다며 바로 꽃부터 주문했다.

실은 꽃다발만이 아니었다. 주문 목록에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몇 개나 되는 고급 과자 박스에다 초콜릿도 있었다. 생각나는 병문안 선물은 죄다 주문한 듯했다.

크고 작은 봉제 인형도 잊으면 안 된다. 꽃과 먹을 것까진 그렇다 쳐도, 이건 대체 뭐냐고 어이없어하는 유신에게, 닉은 조금 멋쩍게 ‘태교?’하고 대답했다.

그 모습에 유신은 이번 한 번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건 닉에게는 비밀이다. 하지만 유신이 제일 환영한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역시 부모님이 보낸 한국의 김치가 최고네요!”

연신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는 유신을 향해, 올가가 감격한 듯 양손을 모았다.

지금 유신은 도시락 통에 산더미같이 담긴 양념한 빨간 고기(제육볶음이다)와 꽉꽉 눌러 담은 하얀 쌀밥을 엄청난 속도로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 김치가 든 밀폐 용기가 수줍게 놓여 있었다.

항상 음식을 사다 나르던 올가는 이번에도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끼니마다 손수 뉴욕의 한인 타운까지 가서, 유신을 위해 이런저런 음식들을 포장해 왔다. 미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변형한 퓨전 한식이 아니라, 진짜 한식, 그것도 아저씨들이 주로 갈 만한 가게에서나 먹을 법한 한식이었다.

항상 무슨 음식을 갖다 내놔도 깨작거리던 유신이었지만, 이번만은 반응이 남달랐다. 마침 입덧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참이었다. 뭘 사 오든 유신이 바닥까지 싹싹 먹어 치우는 덕에, 올가는 사 온 보람이 넘쳐 났다.

사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닉이었고, 결제를 위해 블랙카드를 제공한 사람도 그였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강조하기보다, 슬그머니 올가의 공으로 돌렸다.

거기에 또 멋진 선물이 있었다. 한진아 선생님이 한국에서 미국까지 손수 가져온 아이스 백에 들어 있던, 유신의 부모님이 보낸 김치였다. 사실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 입맛을 돋우고 있었다.

간식으로 끼니 사이에 밥과 김치만 꺼내 먹고 있는 걸 보고는 닉도 깜짝 놀랐다. 정작 유신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미국 음식에 어지간히 질린 것이 분명했다.

오전 일찍 밀리가 가브리엘과 병문안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은 건 덤이다.

“맛있어, 유샤?”

“네. 고기 한 점 드려요, 니카?”

말과 달리 유신의 눈은 멸치볶음은 몰라도 고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강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닉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먹고 왔어.”

실은 안 먹고 왔지만. 닉은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기분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유신이 대놓고 눈에 띄게 안심했다.

“여기 엄청 맛있어요. 다음에 같이 먹으러 가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올가, 나중에 가게 이름 알려 줘.”

“물론이죠.”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올가를 향해, 유신이 수줍게 덧붙였다.

“올가, 설렁탕이요.”

“네, 바로 이어서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감사합니다!”

확실히 유신은 식욕이 도는지 예전보다 잘 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임신 중인데 지금까지 너무 못 먹긴 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사다 나르는 올가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보온 용기째 포장해 아직 뜨거운 설렁탕을 쇼핑백에서 꺼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당신이야말로 촬영장에 안 가 봐도 괜찮아요?”

남은 제육 양념에 마지막 남은 밥을 비벼 싹싹 비우며, 유신이 닉을 향해 물었다.

그 발치에는 아까 닉이 입고 온 겉옷이 돌돌 말려 공처럼 무릎을 덮고 있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무의식적으로 둥지를 만들기 시작한 거였는데, 옷이 다 구겨지는 것을 보고서도 닉은 귀여워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사랑하는 약혼자가 큰일 날 뻔한 건데, 지금 상황에서 촬영 때문에 오라고 하면 안 되지. 만약 진짜 그렇게 나온다면, 난 위약금 다 내고 영화 자체를 캔슬해 버릴 거야.”

“헉, 그러지 말아요, 니카!”

유신이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닉은 걱정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유샤. 그럴 일은 없을 거고, 만에 하나 진짜 그렇게 되더라도, 그 정도로 영화배우로서의 내 입지가 어떻게 될 일은 없…….”

“저 이번 영화 기대하고 있단 말이에요. 꼭! 꼭! 끝까지 무사 촬영 부탁드려요.”

“아, 그쪽?”

하지만 실제 유신이 신경 쓴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배우 팬으로서 눈을 빛내는 그를 향해 닉이 애매한 미소를 보냈다.

마침 올가가 유신의 앞에 김이 폴폴 나는 설렁탕을 내려놓았다. 음식을 앞에 둔 유신의 눈이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반짝반짝 빛났다. 왠지 지금이 더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요.”

신나서 먹기 시작하는 유신을 두고, 올가가 닉을 향해 기사를 봤다며 소곤거렸다.

“응, 뭐가?”

“전 유신이 그렇게 대단한 무용수인 줄 몰랐거든요.”

그녀의 설명에 닉이 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센터에서 보낸 프로필에 그의 수상 경력이 적혀 있었잖아. 콩쿠르 이름만 봐도 알지 않나?”

“상 목록은 봤지만, 그렇게 대단한 상인 줄 전혀 몰랐다구요. 유신도 항상 그냥 좀 했다는 식으로 넘겼으니까요. 절대 티를 안 내는데, 발레 잘 모르는 저 같은 일반인이 어떻게 알겠어요?”

올가로서는 조금 억울했다. 솔직히 그렇게 접근성이 좋은 영화 장르조차 아카데미 상 같은 유명한 상이나 다들 알지, 작은 영화제까지 다 아는 일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연극만 되어도 상 이름만 듣고서는 대단한지 아닌지 모르는 게 보통일 텐데, 발레에 대해 문외한인 자신이 상 이름만 보고 어떻게 알겠는가.

“뭐, 확실히 유신이 이상한 부분에서 겸손한 건 사실이긴 해.”

“유신의 발레 선생님이 유신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하시긴 했죠.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에게 길 안내를 했던 발레 팬분이 했던 인터뷰 때문이지만요. 어차피 인터뷰 내용 자체는 선생님이 팬분한테 한 말씀을 그대로 옮긴 거라면서요? 그 뒤로 유신에 대한 응원 글하고 칭찬 글로 온 인터넷이 도배되었잖아요.”

요는 평범하고 가난한 대학생보다는, 국제 콩쿠르 우승 경력도 있었지만 교통사고로 꿈을 접은 비운의 예술가이면서 가난한 대학생 쪽이, 대중들에게는 훨씬 더 먹혔다는 거다.

현역 시절의 각종 무대 영상이 동영상 사이트 쪽에 멀쩡하게 남아 있다 보니 더 그런 듯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잘하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대중이란 원래 그런 거야.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이용할 수 있으면 잘 묻어가야지.”

“당신 같은 인기 배우가 그렇게 말하니 너무 이상하네요, 미스터 메드.”

“나야말로 항상 대중에게 잘 묻어가려고 노력하는걸.”

“하하하, 그러시구나.”

“여하튼 덕분에 그 새끼 처벌이 확실해질 것 같아서 그거 하나는 다행이지.”

갑자기 닉이 험악한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물론 폴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자신이 죄를 다 자백한 데다, 여론이 부정적인 것도 있어 아마도 그는 당분간 감옥에서 나오기 힘들 터였다. 닉 또한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 그리고 비용을 아끼지 않고 그 납치범이 최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기도 했다.

이번 일로 대리모 센터도 직원의 관리 관련해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닉과 유신에게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닉은 약속이 잘 지켜지는지 끝까지 지켜볼 예정이었고, 만에 하나 불만족스러울 경우 그가 모든 수단을 다하여 큰 타격을 줄 거라는 사실을 센터 측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센터를 아예 망하게 만들고 싶은 닉이었다. 하지만 유신이 죠앤이나 데이브, 매튜 선생님 등 다른 직원들을 봐서라도 센터가 너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긋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쨌든 닉에게는 유신의 뜻이 제일 중요했다.

그렇게 유신이 설렁탕까지 다 먹은 뒤였다. 그 뒷정리까지 다 끝나고, 슬슬 가 봐야겠다며 올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미스터 심슨이 이번 일로 없는 머리가 더 빠질 지경이거든요. 어서 가서 좀 도와드려야죠.”

잔뜩 배가 불러 한껏 느긋해진 유신이 해맑게 감탄했다.

“그러고 보면 올가는 아이잭을 참 잘 챙기는 거 같아요.”

왜인지 올가와 닉이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에 유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올가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한 박자 늦게 깨달은 유신이 소리쳤다.

“둘이 사귀어요?”

거의 동시에 닉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올가의 얼굴은 거의 토마토였다. 원래 창백한 편이라 대조적으로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멋쩍게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사, 사, 사귀긴요. 나 혼자 일방적으로, 됐어. 그 사람은 모르는 게 나아요. 뭐, 원래 둔한 분이니까.”

“너무 혼자서 고민하지 마, 올가. 고백을 원하면 언제든지 말만 하라니까. 난 언제든 최선을 다해 협조할 준비가 돼 있다고.”

“협조라니! 미스터 메드,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게 가당키나 한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협조를 받을 바에야 그냥 저 혼자 하는 게 가능성이 훨씬 클걸요.”

“응? 내가 왜?”

여태껏 닉이 유신에게 했던 걸 생각하면, 올가의 판단은 타당했다. 유신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닉만 이해하지 못한 채 연신 의문을 표시할 따름이었다.

“그럼, 전 진짜 가 볼게요.”

그렇게 올가가 막 병실을 나서려는 때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마치 맞춘 듯 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선 사람은 날씬하고 키가 큰 동양인 여성이었다.

올가는 바로 그녀가 누군지를 알아보았다.

“저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요. 한진아 선생님이시죠?”

진아는 갑작스럽게 악수를 청하는 금발 여성에게 놀랐지만, 곧 할리우드 스타 닉 메드의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올가의 손을 웃으며 마주 잡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희야말로요. 미즈 한, 당신 덕분에 저희가 살았어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몰라요.”

올가는 여론이 바뀐 것에 진아의 덕이 컸다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실제로도 진아에게 길 안내를 했던 발레 올드팬이 유신에 대해 했던 인터뷰가 크게 퍼지면서, 여론이 좋아지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생각도 못 한 환대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진아는 이 정도야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미소를 보냈다. 올가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한 뒤에야 겨우 돌아갔다. 그제야 진아는 닉과 유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신아, 안녕. 안녕하세요, 니콜라이. 내가 늦은 건 아니죠?”

“아뇨, 딱 맞게 오셨습니다.”

어제 그녀와 닉이 미리 정한 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오늘 저녁 비행기로 귀국할 예정이라, 그 전에 유신과 만나려고 바쁜 일정 중에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었다.

“선생님!?”

하지만 진아가 온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유신은 꽤나 감격했다. 잠시 스승과 제자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닉은 살짝 뒤로 빠졌다.

그는 여태껏 진아가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유신과 함께 있으니 확실히 보호자로 보여서 신기했다. 아무래도 오래 가르친 상대다 보니 그런 듯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 때문에 걱정하셨죠. 거기다 제가 메일 확인을 제대로 안 하는 바람에, 선생님 오시는 것도 미처 모르고.”

“아냐, 덕분에 이리저리 재밌었는걸. 일 때문에 출장 온 거라 되게 지루할 줄 알았는데, 지루할 틈이 없고 아주 즐거웠지 뭐니.”

진아가 침대 앞의 보조 의자에 앉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대화는 한국어로 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은 모습이 너무나 다정해, 대부분의 프로 발레리나가 그렇듯 진아 또한 오메가라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닉은 심하게 질투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행기 시간 때문에 진아는 금방 가야만 했다. 나가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유신에게 물었다.

“부모님께 전화는 드렸니?”

여태까지 들뜬 기색으로 쉽게 쉽게 이야기를 이어 가던 유신이 처음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진아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유신의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고 선량한 보통의 베타 말이다.

그리고 그 점이 가장 문제였다.

대부분의 알파나 오메가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다못해 부모 중 한쪽이라도 알파나 오메가였다. 유신처럼 부모 양쪽에 형제까지 다 베타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진아 또한 알파와 오메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오메가였다. 그녀는 발레를 업으로 삼으며 여태껏 많은 오메가를 만났지만, 유신같이 베타밖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오메가는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물며 유신은 흔치 않은 우성 오메가였다.

인구 비율상으로는 10명 중 1명이 알파나 오메가라지만, 알파는 알파끼리 모이고, 알파와 오메가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이끌렸다. 직종 또한 알파나 오메가가 많은 직종이 어느 정도 구분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평범한 베타는 평생 가도록 알파나 오메가를 만날 일이 없었다. 만나더라도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 알파나 오메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머리로는 어떻게 차이가 있다는 지식이 있어도, 정작 그 사실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거다.

진아도 우성 오메가인 유신과 평범한 베타인 그의 부모님 사이에 갈등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어떤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양쪽 다 아는 만큼 사랑하는 제자의 짐을 어떻게든 덜어 주고 싶었지마는, 참 쉽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마. 너희 부모님께는 내가 대신 안부 인사 전해 주면 되지. 유신이는 건강해 보였고, 배 속의 애기도 건강하게 잘 크고 있고, 애기 아빠하고도 사이좋다고. 너희 부모님 걱정 안 하시도록 잘.”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 김치 잘 먹었다고도 전해 주세요. 이야기 안 하면 또 섭섭해하실 테니까요. 실제로 입덧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그럼, 물론이지. 내가 가져왔잖니. 그 부분도 전혀 걱정 안 하시도록 잘 말씀드릴게.”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

왜인지 유신이 진아의 소매를 붙잡았다. 제자의 답지 않은 행동에 진아는 내심 놀랐지만, 일부러 더 명랑하게 대꾸했다.

“응, 유신아. 왜?”

“저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거기까지 말하고 유신은 잠시 망설이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솔직히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시선이 흘끗 닉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창가에 선 채, 안 듣는 척 등을 돌리고 서 있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유신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한국어로 말하는 거라 저쪽은 못 알아들을 텐데.

“저, 결혼하려고요.”

그 한마디에 진아는 어머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축하해.”

다시 슬쩍 살펴본 닉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유신은 얼굴이 괜히 빨개졌다.

“자세한 건 아직 미정이라서요. 일단 결혼하는 거만 정한 거라서. 그렇게 급하게 진행되진 않을 거고, 날짜나 이런 건 확정되는 대로 알려 드릴 거라고 전해 주시면 돼요.”

거기까지 단숨에 말하고서, 그는 제풀에 어색해 얼버무리듯 덧붙였다.

“그게, 지난번에 엄마가 결혼 같은 중요한 일을 뉴스 보고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안 그래도 지난번 통화했을 때부터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물론 그들도 제 아들이 상대방과 의논한다는 순서를 건너뛰고 자신들에게 먼저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응, 알겠어. 전해 드릴게. 결혼 상대는 물론 니콜라이지?”

“당연하죠! 이제 와서 다른 상대랑 할 리 없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신을 향해, 진아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쿡쿡 웃었다.

“미안해.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유신은 진아가 더 캐묻지나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 더는 그렇지 않았다. 유신은 그 사실이 괜히 고마웠다.

부모님과의 문제는 자신이 서서히 풀어야만 할 숙제였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만큼 닉과의 관계가 안정되며 느낀 감정의 효과가 크다고도 할 수 있었다.

“우리 제자, 그럼 결혼식 날 보자.”

진아가 마지막에 장난스럽게 이렇게 덧붙여, 유신은 새삼 새빨개지고 말았다. 한국어니까 닉은 당연히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알아도, 뭔가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 다 눈치채고 일부러 저러시는 게 분명해.”

그녀가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유신은 괜히 쑥스러워서 손으로 얼굴만 부쳤다.

역시 너무 오버한 걸까? 확실히 부모님과 전화 중에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닉의 동의 없이 멋대로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결혼 이야기는 그쪽이 먼저 꺼냈더랬다. 이제 와서 맘 바뀐 게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 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하지. 갑자기 걱정이 돼 유신이 슬그머니 닉을 돌아볼 때였다.

“니카?!”

기척도 없이 코앞에 있는 닉의 얼굴에 유신은 화들짝 놀랐다. 너무도 제 취향인 아름다운 눈 코 입에 당황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그의 어깨를 닉이 붙들었다.

“방금 전에.”

“네?”

“너희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유샤 네가.”

“뭐, 뭐가요?”

곤란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닉은 그답지 않게 난처해 보였다.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아, 유신이 얼빠지게 되물을 때였다.

“너, 나랑 결혼하겠다고.”

그리고 이어진 닉의 한마디에 이제 새빨개질 쪽은 유신이었다. 그는 당황해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한참 지나서야 더듬더듬 되물었다.

“하, 한국어 어, 어떻게 알아들었어요?!”

“전에 말한 적 없던가? 나 요새 한국어 공부하잖아.”

“아뇨, 전혀 없거든요!”

당당하게 쏘아붙이고 보니 유신은 왠지 자신이 없어졌다. 정말로 닉이 말한 적이 없던가? 제 기억이 완벽하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아니, 지금 와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닉이 진아와의 대화를 알아들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한껏 빨개졌다가 점점 창백해지는 유신에게, 닉이 머뭇머뭇 변명처럼 덧붙였다.

“다는 못 알아들었어. 간단한 문장만. 근데 진짜 나와 결혼할 거야, 유샤?”

그러나 그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바로 다시 이렇게 물었다. 유신은 뭔가 부끄러워져서 괜히 버럭 했다.

“하기로 했잖아요!”

“조건부 말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진짜 결혼 말야.”

“아아아아아! 난 몰라요. 모르는 일이라구요.”

유신은 당황해 빽 소리를 지르고는, 새빨개진 채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반대로 닉은 이제 완전히 신이 났다. 그는 너무 좋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괜히 짓궂게 유신에게 치근덕거렸다.

“유샤, 언제 너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까? 그러고 보면 나도 어서 우리 부모님께 널 소개해 드려야 하는데. 일단 지금 찍고 있는 영화 촬영이 끝난 직후는 어때? 그쯤이면 네 대학도 방학이고, 임신도 안정기일 테니까.”

“아아아, 난 모른다고 했어요.”

닉이 그런 유신을 시트째 껴안았다. 그의 알파 페로몬이 노글노글 품 안의 오메가를 녹였다. 유신은 뱃속 깊은 곳부터 기쁨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닉이 물었다.

“유샤, 부모님과 사이 안 좋지?”

닉의 품에 끌어안긴 채, 유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트 한 장에 가려진 정도로 닉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가 되물었다.

“기억 못 해? 지난번 네가 부모님과 전화할 때 나도 옆에 있었잖아. 눈치 못 채면 그게 이상하지.”

“니카, 난.”

유신으로서는 간신히 닉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다였다. 정작 그는 시트째 유신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괜찮아. 나도 그렇다는 거 대충 알고 있잖아. 말했지? 여기 건너온 뒤로 한 번도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문득 단편적인 조각들이 유신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닉은 방금 전 자신의 부모님께 저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한 거다. 유신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유신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해지자.”

닉이 시트 위에서 유신의 어깨에 입 맞추었다. 끌어안은 채 쓰다듬는 손길은 마냥 다정했다.

유신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댐이라도 터진 듯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흐느끼느라 가늘게 떠는 그를 닉이 천천히 시트 안에서 발굴해 냈다.

보석 같은 청록색 눈동자가 자신과 시선을 맞춰 오는 것에, 유신은 뭔가 창피하고 맥이 풀려 괜히 틱틱댔다.

“나 원래 이렇게 안 울거든요. 이거 죄다 호르몬 탓이라고요. 이, 임신해서 감정이 널을 뛰는 것뿐이에요.”

크게 틀린 말도 아닐 터였다. 납치당했을 때조차 조금 눈시울이 붉어지긴 했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마냥 당당했던 그였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붉어졌던 것마저 닉이 토크 쇼에서 했던 말에 감격해서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닉은 그저 유신의 젖은 뺨을 양손으로 감싸 왔다. 눈을 맞추자 시야 한가득 사랑하는 알파만이 가득 차, 유신은 이제 다른 것은 세상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응, 응, 그래요.”

울며 고개를 끄덕이며 유신은 닉의 목에 팔을 감았다. 유신의 젖은 눈가에 닉이 몇 번이고 입 맞추었다.

“너와, 나와, 우리 아기는 함께 행복해질 거야.”

-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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