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14/22)

제2부 제4장

최근 인터넷에 이상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닉과 유신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목: 닉 메드와 그의 귀여운 오메가 약혼자에 대한 진실

두 사람은 알려진 것처럼 로맨틱한 관계가 아냐. 모든 것은 가짜다.

너희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한 알파와 오메가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잘 계획된 쇼를 보고 있는 것뿐이지.

굉장히 음흉한 일련의 계약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해.

그들이 정직하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조만간 내 쪽에서 먼저 폭로할 생각이야.」

그 수상쩍기 그지없는 협박 아닌 협박은, 올리고 금방 지우는 것을 반복해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새 영화 촬영을 시작한 닉으로서는 아무래도 대응이 쉽지 않았다. 입덧에 시달리며 겨우 학교 출석만 하고 있던 유신은 거의 인식도 하지 못했다.

만약 유신이 평소처럼 팬 사이트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면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그는 거의 인터넷을 못 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뭔가. 솔직히 집에 있을 때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있거나, 화장실에서 토하거나,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과제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다였다.

그 수상쩍은 글에 대한 인터넷 반응은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대부분 믿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댓글))

- 음흉한 일련의 계약이라니? 난 너의 이런 글이 더 음흉하다고 생각해.

- 증거는 있어?

- 지난번 시사회에서 두 사람은 정말로 완벽한 한 쌍이었어. 나는 네가 그들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가진 듯해서 정말 유감이다.

- 이런 글이 충분히 고소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니?

- 둘이 서로를 보는 눈빛을 봐. 그것이 거짓일 수는 없어.

- 닉의 약혼자는 지금 임신 중이야. 넌 임신도 모두 쇼=가짜라는 거야?

- 헤이, 또 나타났구나. 나는 네가 그냥 거짓말쟁이라는 걸 알아. 진실이었으면, 분명 이미 예전에 다 폭로했겠지.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닉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댓글))

- 새로운 오메가가 여태껏 닉이 사귀던 상대와 너무 다른 타입이라는 데에 의문을 느낀 사람이 정말 나뿐이야?

- 둘의 관계는 분명 로맨틱해 보이지만, 확실히 너무 갑작스러운 면이 있어. 살면서 수십 명의 애인과 짧은 교제만 계속하던 할리우드의 난봉꾼이, 임신한 애인에게 갑작스럽게 정착할 가능성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해. 현실적으로 스타 배우가 평범한 대학생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 이봐, 닉의 약혼자는 평범하지 않아. 그는 우성 오메가라고!

- 둘은 결혼하더라도 절대 오래 못 갈 거야.

└ 그걸 노리고 거짓으로 꾸몄을 가능성은? 실제로 둘이 지금 당장 헤어지더라도 아무도 의심 안 할걸.

└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쇼를 하기는 더 쉽겠네.

팬들 사이에서는 뜬구름 잡는 듯한 소문만 퍼져 가고 있었다. 의혹 글의 작성자가 그런 걸 노렸다면 확실히 성공이었다.

소문은 몰랐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현재 유신은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지난번 닉과 그렇게 카페 루이에서 헤어진 뒤로 만나지 못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말다툼을 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닉의 정체를 들켜 버렸다. 다행히 닉이 시선을 끌어 준 덕에 유신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둘 다 바빠서 한동안 못 만날 예정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렇게 급하게 데이트 사진을 뿌리고, 프러포즈를 진행하고, 바로 이어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석해 언론에 노출했던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몰아친 거였다.

유신은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침대에 드러누운 채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요 몇 년째 유신이 밀리와 함께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의 작고 낡은 침실이었다.

어차피 닉의 펜트하우스로 가도, 지금 한창 영화 촬영 중이라 그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닉도 유신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더 이상 별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제 쪽에서 먼저 뛰쳐나와 놓고 그 점이 괜히 섭섭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고집스레 뻗대는 부분도 없진 않았다.

돌아오고 처음 며칠간, 밀리는 꽤 진지하게 이사 이야기를 꺼냈지만, 정작 유신은 입덧 때문에 그런 걸 생각할 상태가 아니었다. 밀리도 어느 순간부터 더는 그 이야기는 안 하고 있었다.

물론 집이 낡고 좁긴 했다. 펜트하우스에서 지내다 왔더니 더 극단적으로 느껴졌다.

작은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유신은 좁은 방은 빼곡히 들어찼다. 별다른 물건 없이, 장식이라고는 벽에 붙여 둔 세 장의 포스터가 다였다. 세 장 다 닉의 포스터로, 나이 대는 각각 달랐다.

침대 머리맡에 붙여 둔 영화 포스터에는 하얀 셔츠 차림의 닉이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최근 사진이라 얼마 전 봤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머리만 조금 더 짧을 뿐.

저 포스터를 붙일 때만 해도 그와 결혼할 예정이 될 줄은 몰랐는데.

“가짜 결혼이지만.”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며, 유신은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손으로 감쌌다.

웃기는 건 저 때도 애를 낳을 건 이미 계약한 뒤였다는 거다. 아마 그 계약금으로 저 포스터를 샀었지. 그 와중에 돈거래를 하는 관계는 되기 싫다며 언젠가 돌려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모순이 유신을 더 괴롭혔다.

늘었던 잠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지만, 입덧은 아직 한창이었다. 책에 따르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했다. 앞으로 짧아도 2주, 아마도 한 달 이상 이렇게 울렁거릴 예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잠이 줄어들어서 더 힘들었다. 차라리 그냥 자는 게 나았다. 속이 안 좋아 대부분의 시간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당연히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만 늘지.

방금 전도 그랬지만, 역시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은 닉에 대해서였다. 아기한테 별로 안 좋다 싶으면서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배 속의 아기 때문에 더 그렇게 되는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저화질 영상에서 당시 니콜라이였던 닉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를 따라 참가한 국제 콩쿠르에서 멀리서나마 그를 보고 기뻐하던 때. 그가 무용계를 떠난다고 발표해서 슬펐을 때.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 수업도 빼먹고 나가려다 발레 선생님께 걸린 일.

자신이 닉의 아기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페 루이에 방문했던 날. 그와 함께 뉴욕의 공원에서 스케이트를 탄 기억. 그리고 히트 중에, 그가 자신에게로 왔던 것.

“그 뒤에 바로 튀어 버렸어야 했는데.”

유신은 낮게 혀를 찼다.

히트 중인 오메가와 러트 중인 알파가 관계를 가졌다. 임신했을 확률이 90% 이상일 텐데, 아기 낳을 때까지 도망쳐서 숨어 있을 걸 그랬다. 그냥 애 낳고 돌아오면 되는 건데.

한 학기 몇 달이나 된다고, 꾸역꾸역 학교 다니겠다고 여기 계속 있던 바람에 이런 상황에 처한 걸까? 거기다 이미 몇 주나 출석했기 때문에, 이젠 휴학하기가 더 아까워져 버렸다.

유신은 반사적으로 왼손 약지를 주물렀다. 지금은 거기 없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의 감각이, 남아 있을 리 없는 데도 괜스레 찌릿찌릿했다.

‘사진 찍어도 돼요’

‘악수해요!’

‘사인해 주세요!!’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닉은 열광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화보나 영화에서 보여 주던 우아한 미소를 입에 올린 채,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자아, 여러분. 저는 한 명뿐이니, 한 번에 한 가지씩 부탁드려요.’

유신의 눈에 비친 그는 온몸에 반짝반짝한 오라를 두른 것만 같았다.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익숙한 사람의 태도였다. 닉에게야 그들 한 명 한 명이 딱히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리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유신은 둘의 입장 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솔직히 밀리의 손에 이끌려 카페를 빠져나올 때는 오히려 아무 생각도 못 했다. 그만큼 당시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집까지 와서 변기를 붙잡고 (밀리가 화장실 청소를 공들여 하는 타입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먹은 게 없어 위액만 나오도록 한참 헛구역질을 한 뒤에야 그나마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아무 생각도 못 했기에 오히려 나중에 유신이 느낀 괴리감은 더 컸다.

애초에 닉은 유신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유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분을 드러낸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신에게는 자신과 닉의 차이만을 만끽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유신은 그날 닉이 씌워 준 코트는 아직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변명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게 아닌 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 그는 코트에 코를 박은 채 조금 훌쩍였다. 그 와중에 이러고 있으면 울렁거림이 덜하다는 게 제일 웃겼다.

정말이지 이런 생각에 빠져들 바에야 차라리 계속 자는 쪽이 건강에도 그렇고 더 생산적일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생각뿐이고, 한동안 엄청나게 자서 그런지 이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역시 닉이 보고 싶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유신은 괜스레 아랫배를 문질러 보았다.

평소보다 좀 나왔나? 원체 말라서 얇은 살갗 아래로 근육이 그대로 만져질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은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봤자 미묘한 정도였지만. 책을 봐도 어차피 아직은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배가 나올 시기는 아니라고 했다.

“콩알아.”

그때 닉과 같이 산부인과 검진을 다녀오면서, 초음파에서 본 콩알로밖에 보이지 않던 아기가 너무 인상 깊어 유신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닉은 모르는 것 같지만, 알 게 뭐야. 어차피 초음파 사진은 그쪽이 가져가 버렸다. 자신은 그때 너무 긴장해서 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그래 봤자 콩알이는 내가 품고 있다고, 흥.”

유신은 침대 옆에 널브러진 책을 눈으로 훑었다. 리포트 자료나 수업 교재 따위와 뒤섞여, 임신과 출산 관련 책도 한 권 있었다. 지난번에 죠앤과 데이브가 합심해서 보내 준 산같이 수많은 물품 중의 하나였다.

그 대부분은 입덧 때문에 박스 그대로, 꺼내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저 책은 제일 위쪽에 있어서 보는 중이었는데, 쓸모 있는 정보가 많아서 유용했다. 아직 반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요즘 유신은 메일도 제대로 확인 안 한 지 꽤 되었다. 수업 일정이나 과제에 관련된 부분만 겨우겨우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외 개인적으로 온 듯한 메일은 대부분 방치였다. 만에 하나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정말 미안한 노릇이지만, 도저히 거기까지 처리할 기력이 없었다.

정말 필요하면 전화하겠지. 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전화도 상황에 따라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닉의 메시지도 절반 정도는 씹고 있었는데, 이건 의도적이라기보다 대부분 유신이 답장을 어떻게 보낼지 망설이는 사이 닉이 계속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정 답답하면 메시지 말고 자기가 오든지 하겠지. 멋대로 생각하는 것과 별도로, 닉이 쉬는 날도 없이 촬영 중인 것은 유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자신 또한 수업을 빼고 촬영장 근처로 간다면 분명 그가 만나러 와 줄 걸 알면서도, 더 이상 수업을 빠지면 학점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러지 않는 것이다.

아니, 다 핑계였다. 자신은 그저 닉과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느꼈던, 그와 자신의 격차에 대해 어떻게 할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아.”

유신은 시계를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일어나 준비할 시간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전공과 관련해 보강이 있었다. 사실 출석을 다 했다면 안 가도 상관없는데, 이미 수업을 몇 번 빠져서 낙제할 작정이 아닌 이상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준비를 했다. 그래 봤자 낡은 스웨터를 뒤집어쓰고, 늘 입던 코트를 팔에 낀 것뿐이지만.

“윽, 얼굴이 지독하네.”

나가는 길에 거울을 보며 유신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눈 밑은 퀭하고 뺨은 핼쑥한 게 영 별로다. 멋대로 뻗친 머리를 연신 손바닥으로 몇 번 눌러 보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사실 그는 본인의 생각만큼 그렇게 끔찍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청순하다 못해 청초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지만 본인은 전혀 몰랐다.

나가기 직전, 유신은 냉장고에서 주스 팩을 하나 꺼냈다. 요즘 밀리가 주스를 종류별로 사서 냉장고에 채워 둬서 좋았다. 매일 먹고 싶은 종류가 달라져서 힘들었는데, 덕분에 잘 마시고 있다.

“나중에 밀리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늘 가지고 다니는 백 팩을 메고, 유신은 주스를 빨면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공용 현관 앞 우편함에서 아무런 표시도 없는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봉투를 우편함에서 꺼내 내용물을 확인하던 유신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안녕, 예쁜이.

당신 옆의 거짓말쟁이와는 언제 헤어진다고 발표하나요?

어서 빨리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내가 다 공개해 버리겠어요.

당신 옆에는 내가 더 어울리는걸.

- 사랑을 담아, P -」

편지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A4 인쇄용지에 흔한 글자체로 인쇄되어 있어, 발신자를 특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공용 현관에는 고전적인 자물쇠가 붙어 있었지만, 고장 난 지 오래라 열쇠 없이도 바깥에서 쉽게 열 수 있었다. 실제로 여기 거주하는 사람들도 공용 현관 열쇠는 두고, 집 현관 열쇠만 가지고 다녔다. 즉, 공용 현관까지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다는 거다.

“…….”

유신은 가만히 편지를 바라보다가, 구겨서 가방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

실은 그런 유신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좋아, 보내자. 오후 3시, 집을 나섬.”

링컨은 잽싸게 찍은 사진을 메시지로 발송했다. 사진의 장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덤이다.

“이거면 미스터 메드도 만족하시겠지?”

물론 사진의 수신자는 닉 메드였다. 지금 실질적으로 링컨에게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기도 했다.

유신이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닉은 링컨을 불러 유신이 외출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보내도록 했다. 물론 미행, 아니 호위는 당연했다. 닉은 유신이 외출하고 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자신이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오랜 파파라치 생활로 단련된 링컨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닉이 제시하는 보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뭣보다 유신은 한껏 예민한 할리우드 스타들과 다르게 미행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매우 편했다.

사실 닉에게 링컨의 존재는 유신의 고화질 사진을 받기 위한 덤이었다. 그 외에도 닉은 유신에게 정식으로 경호를 붙여 둔 상태였다. 당장 이사 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보안을 강화하자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유신에게는 당연히 비밀이었다.

닉이 유신에게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은 영화 촬영 때문에 곁에 있어 줄 수 없으니, 차라리 익숙한 장소에서 지내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완벽한 보안을 자랑하는 최신형 시스템을 갖춘 펜트하우스 쪽이 아무래도 더 안전하겠지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싸우기까지 한 지금 와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유신이 사는 다세대 건물은 공동 현관의 자물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데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아 모두를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신이 수상한 편지를 보낸 사람을 알고자 했다면, 보안 쪽에서는 바로 현관을 드나든 사람 중 의심스러운 목록을 추려 냈을 것이다. 경호의 존재를 모르는 유신이 그럴 일이 없기는 했지만.

물론 링컨도 보안업체도 바깥 한정이다. 닉은 집 안에서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 오늘 유신은 무가당 당근 주스를 먹었습니다. 멀리 유기농 슈퍼까지 가서 사다 놓은 보람이 있네요. 영수증은 따로 첨부합니다.

☞ 유신이 학교에 다녀올 때 말고는,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내는 모습이 안타까워요.

☞ 저까지 먹으라며 과일을 넉넉히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닉의 핸드폰으로 침대에 누워서 졸고 있는 유신을 멀리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일련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신의 한쪽 뒷머리가 살짝 뻗쳐 있는 것이 귀엽다.

물론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같이 사는 밀리다. 지난번 밀리가 닉을 카페로 불러낸 이후, 그들은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

☞ 근데 정말 유신한테는 당신이 과일 보냈다고 말하지 마요, 닉?

☜ 일단은.

닉은 밀리의 문자에 계속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질문에는 바로 제꺽 답장을 보냈다. 자신이 밀리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을 유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한다기보다 당분간 모르게 하고 싶달까. 괜히 알게 됐다가 그나마 여태껏 조금이나마 먹던 것도 거절하면 곤란했다.

닉은 바쁜 중에도 생각나는 대로 유신에게 이것저것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무래도 같이 사는 밀리가 마련하는 쪽이 더 빨랐다. 거기서 닉의 신용 카드가 큰 역할을 했다. 방금 유신이 먹은 주스도 바로 그 카드로 밀리가 사다 나른 거였다.

솔직히 닉은 밀리가 그 카드로 겸사 어느 정도 제 사리사욕을 채워도 딱히 뭐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밀리는 의외로 성실하게 매번 정확한 영수증을 첨부했다. 꼭 한마디씩 더 얹어서 점수를 깎아 먹긴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좋은 녀석이었다.

“10분 후에 바로 다음 촬영 들어갑니다.”

촬영 스태프가 조심스레 닉에게 알려 왔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촬영 중 짧은 휴식 시간이었다. 뉴욕 거리의 일부를 막은 세트장은 사용 허가 기간이 짧아, 촬영은 꽤나 빡빡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벌써 일주일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유신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싸운 것처럼 돼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 영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일까? 유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평소에 비해 영 답장이 느렸다. 전화를 걸어 볼까도 했지만, 만에 하나 받지 않는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망설이게 된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보러 갈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억지로 보러 가는 것도, 왠지 싸웠다고 땅땅 확정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링컨과 밀리가 매일 보내 주는 유신의 사진만이 그나마 바쁜 하루하루의 작은 위안이었다.

“여보세요, 아이잭?”

마치 지금이 쉬는 시간이라는 걸 꼭 아는 것처럼 아이잭이 딱 맞춰 전화를 걸어 왔다. 실제로 근처 스태프가 전해 주었을 확률이 높았다. 닉은 귀찮다는 걸 감출 생각도 없이 대꾸했다.

“무슨 일이야? 나 곧 다시 촬영 들어가야 해.”

- 그냥, 촬영 잘하고 있나 해서 말야.

“그것뿐일 리가 있나. 빨리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이미 다 읽고 있다는 듯한 닉의 대꾸에, 아이잭이 못 이긴다는 듯 마른 숨을 삼켰다.

- 닉, 또 그 글이 올라왔다가 지워졌어. 예의 그 협박 글.

그 이야기에 닉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얼마 전부터 닉과 유신의 관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글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라왔다 지워지는 중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제 닉의 소속사도 그 글에 대해 인지하고 예의 주시 중이었다. 하지만 교묘하게 흔적을 지워 의외로 작성자에 대한 추적은 지지부진했다.

죄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헛소리 같지만, 묘하게 다 맞는 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이잭은 작성자가 유신이 대리모 센터를 통해 닉과 연결됐다는 사실을 아는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닉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 이번에도 일단 내 선에서 처리하면 되겠지?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난 촬영장에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으니.”

- 유신에게는 역시.

“알리지 마, 아이잭.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 만에 하나 알리게 되더라도, 얼굴 보고 내가 직접 말하고 싶으니까.”

- 알겠어.

아이잭은 냉큼 동의했다. 지난번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닉이 연락 두절된 사이, 아이잭이 유신에게 결혼 이야기를 전달했던 일과 관련해 둘 다 좋은 기억이 없었다.

- 그러고 보니 조금만 더 참으면, 촬영 쉬는 날이로군.

“뭐, 그렇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닉에게 아이잭이 재미있다는 듯 덧붙였다.

- 얼마 되지도 않는 휴일을 꼭 유신의 산부인과 정기 검진일에 맞추겠다니,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냐, 닉?

“그게 어때서, 아이잭? 내 아이인데.”

하지만 닉이 마냥 당당한 바람에, 괜히 아이잭 쪽이 더 부끄러워했다.

- 그래, 네가 지금 지극정성인 걸 내가 깜박했군. 뭐, 검진은 오전이니까. 그날 저녁 라이브 토크 쇼 스케줄 잊으면 안 돼.

덤으로 아이잭은 잊으면 안 된다는 듯 가볍게 덧붙였다. 토크 쇼라는 단어에 닉이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귀찮아. 어떻게 날짜가 그렇게 딱 겹치지?”

- 그러지 마, 닉. 무려 코넬 쇼라고! 셀럽들이 다들 거기 나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난 빼 줘.”

- 이번에 개봉한 영화가 단기간에 역대 흥행 기록을 경신했잖아. 아마 그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게 될 거야.

“알았어. 알았어.”

아이잭도 닉이 왜 질색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간만의 휴일에 유신과 계속 같이 있기만 해도 모자란데 스케줄이 잡혔으니 싫을 만도 했다. 하지만 소속사 사장 겸 전직 매니저로서, 코넬 쇼 정도 되는 유명 토크 쇼를 그저 놀고 싶다는 이유로 포기하게 둘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친구로서도 마찬가지다.

“닉, 촬영 시작합니다.”

마침 아까 촬영 스태프가 다시 찾아와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렸다. 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해, 아이잭. 나 지금 촬영 들어가야 해.”

- 그래. 뭔가 변화가 생기면 다시 연락하지.

양쪽 다 할 이야기는 대충 끝낸 만큼,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

“오늘은 어떻게 혼자 왔네.”

검진을 끝내고 나오는데 데이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놓고 닉을 찾는 눈빛에, 유신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만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지난번에 같이 온 게 신기한 일이었어요. 알다시피 워낙에 바쁜 사람이잖아요.”

“그렇긴 하겠다.”

동시에 데이브의 시선이 유신의 왼쪽 약지를 슬쩍 훑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8억을 아무렇지 않게 손에 끼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당당하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거슬려, 유신은 괜히 멋쩍게 웃었다.

검진 결과는 아무 이상 없었다. 몇 주 새 좀 더 사람에 가까워진 콩알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제 슬슬 안정기로 들어서고 있는 만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좀 더 활동을 늘려도 상관없단다.

만약 오늘 닉이 왔으면 우리 애기 태명이 콩알이라고 알려 주려고 했는데, 이제 어림도 없지.

확실히 아까 링거를 한 통 맞아서 그런지, 지금 유신은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무엇보다 울렁거림이 덜해서 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앞으로도 종종 맞으러 와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결국 안 왔네.”

계속 온다던 닉은 결국 검진을 끝내고 나오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말다툼이 아무래도 불편했던 걸까, 데이트 사진은 언론에 다 풀었으니 이제 상관없다는 걸까. 유신은 역시 안 올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은 하려던 이야기도 있었다. 오늘 만나면 직접 얼굴 보고 말하려고, 가방에 챙겨 왔다.

그 뒤로도 수상한 익명의 편지는 두 번 더 왔다. 인쇄한 A4 용지가 든 흰 봉투 총 세 통. 문장이나 수식어는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거의 같았다. ‘P’라는 이니셜만 적힌 발신인도 모두 같았다.

닉이 안 왔으니 어차피 못 말하게 됐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거려 봐도, 역시나 아무 연락은 없었다. 사실 요즘 닉에게서 메시지가 예전보다 뜸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유신이 답장을 잘 하지 않다 보니 주고받는 간격이 점차 늘어지고 있달까.

닉 혼자 계속 말 거는 데에도 아무래도 한계가 있겠지. 유신도 이 부분은 제 잘못이 크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어도 역시나 지금은 닉에게 답장을 보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메일도 엄청 쌓였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간만에 메일 앱을 클릭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메일 체크를 안 한 지도 제법 됐다. 뭐, 대부분 스팸 광고 메일이겠지만.

“진아 선생님?”

하지만 그중 생각도 못 한 이름을 발견하고, 유신은 멈칫했다. 한진아는 유신이 아직 한국에서 발레를 전공하던 시절 그의 발레 선생님으로, 지난번 부모님과 통화할 때 조만간 미국에 올 거라고 하긴 했었다.

그래도 메일을 보낸 줄은 몰랐다. 그것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답장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당황한 유신이 바로 메일 내용을 확인하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안녕.”

아는 목소리에 유신은 흠칫 몸을 굳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의 시야에 빨간 머리가 들어왔다. 코끝에 주근깨를 단 어려 보이는 얼굴이 씨익 미소 지었다.

“오늘도 예쁘네요.”

***

닉이 유신에게 붙여 둔 경호원들은 병원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병원 측에서 미리 허가된 사람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상관없지, 뭐. 어차피 우리 계약 조건 자체가 외부 경호잖아.”

“거기다 이 정도로 보안에 신경 쓰는 건물이면 괜찮지 않을까?”

“맞아, 맞아.”

“근데 우리 고용주는 왜 아직이지? 원래라면 진작에 왔어야 하지 않나?”

“일정이 좀 늦어지려나 봐. 아무 연락은 없지만.”

계약 조건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책임한 것도 사실이긴 했다.

“넵, 미리 신청돼 있을 겁니다요. 예약자 동행? 뭐, 이런 걸로요.”

단, 링컨만은 병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가능하면 병원 내에 같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찍어 달라는 아이잭의 제안 덕분이었다. 하지만 닉이 늦어 버리는 바람에 너무 지체되었다.

안 되면 유신 혼자 있는 모습이라도 사진으로 찍어 둬야겠다는 생각에, 링컨은 일단 미리 등록된 정보를 활용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슬슬 유신의 진료가 끝나 갈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먼저 들어와서 유신이 혼자 접수하는 모습이라도 찍어 둘걸 하고 뒤늦게 살짝 아쉽긴 했다.

“이야, 삐까번쩍하네.”

지난번에는 병원 입구에서 거절당했던 만큼 링컨은 신이 났다.

주로 부자들이 프라이빗하게 이용하는 병원이라 그런지 멋지게 잘 꾸며져 있었다. 비싸 보이는 물건들로 요란스럽게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잘 관리된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시장 통인 일반 병원과는 확실히 분위기부터 달랐다.

다들 고급스러운 가운데, 몇몇 환자들과 링컨만이 비슷비슷한 서민의 분위기를 풍겼다. 문득 링컨은 그들 대부분이 혼자 진료를 받으러 온 임산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벽에 붙은 표지판 한쪽의 ‘코스모 대리모 센터’라는 글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지금 임신 중인 닉 메드의 약혼자도 평소엔 딱 저런 느낌의 옷차림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링컨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애초에 그 정도 외모면 뭘 입는지는 딱히 의미가 없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아니까 딱히 옷에 신경을 안 쓰는 거겠지. 프러포즈나 시사회 등 꼭 필요한 경우에는 맞춰서 비싼 옷으로 차려입잖아?

지금 눈앞의 저 ‘대리모’라는 단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케이스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 정도 되는 우성 오메가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럼, 말도 안 되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링컨은 아닌 척 소매에 숨겨 둔 카메라로 병원 내부 사진을 몰래 찍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번 일은 보수가 너무 좋다. 하지만 그들도 원하는 게 있으니 그런 돈을 지불하는 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막 대해 봐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다른 사진까지 죄다 풀어 버릴 테니.

물론 지금 대우만 유지해 준다면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의뢰인을 배신한다는 자체가 앞으로 사진 일은 그만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입으로는 매일같이 사진 같은 거 때려치운다고 불평하지만, 링컨은 적어도 당분간은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서 빨리 유신부터 찾고, 받은 돈값을 할 수 있을 만한 사진이나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

“아, 안녕하세요.”

유신은 한 박자 늦게 폴을 향해 인사했다.

몇 번 마주친 적 있고, 비 오는 날 자신에게 우산을 빌려주었던 안내 데스크의 친절한 직원. 아, 화장실에 두고 갔던 쇼핑백을 찾아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표면적인 이미지만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유신이 평소랑 똑같은 차림이라서 바로 알아봤어요. 만약에 기사 사진처럼 명품으로 빼입고 왔으면 어색해서 누군지 몰라봤을지도요.”

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유신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아, 그래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하필이면 지금 복도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 복도에 폴과 자신, 단둘뿐.

“평소보다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까 맞은 링거가 제법 잘 들었나 봐요.”

“네에, 괜찮은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잘됐네요.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는데. 잘 듣는 산모분들은 주기적으로 맞으러 오기도 하더라구요.”

“그, 그렇군요.”

유신은 폴이 어떻게 자신이 링거를 맞았는지를 알고 있나 궁금해졌다. 같은 병원 직원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기기에는, 단순한 안내 데스크 직원이 거기까지 다 알고 있는 게 과연 평범한 일이 맞을까?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만, 문이 열리고 유신은 오히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걸 타도 좋을지 순간 망설이는데, 폴이 끼어들었다.

“1층 로비로 가시는 거죠? 제가 눌러 드릴게요.”

“네, 네에.”

어깨를 굳힌 채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신을, 폴은 빤히 바라보며 휙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빨간 머리칼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유신은 가방으로 손을 뻗어, 늘 가지고 다니는 알파 퇴치 스프레이를 손에 쥐었다. 여차하는 순간, 잽싸게 폴을 향해 뿌릴 셈이었다.

하지만 폴은 로비 층을 가리키는 L 버튼을 누르고서 바로 몸을 뒤로 뺐다.

“저 오늘은 안 내려가요.”

크게 떠진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희번득 광택이 돌았다가 사라졌다. 어느새 유신은 반쯤 떠밀리듯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오늘은.

유신은 혼란스러워졌다. 전에 자신과 폴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상대가 아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벽에 붙은 손잡이를 붙들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1층까지는 금방이었지만, 유신에게는 1초 1초가 마치 1분 1시간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니카?!”

“유샤?”

하지만 익숙한 가슴팍에 그대로 고개를 박을 뻔하자,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당황해 이름을 불렀다. 놀란 것은 닉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슨 일이야? 검진은 벌써 끝났어? 왜? 아기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닉으로서는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마치고 내려온 유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으니 당연하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물론 유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지만, 이미 조금 삐뚤어진 마음에 유신은 닉이 자신이 아니라 아기부터 걱정하는 것 같아 반발심부터 들었다.

“아니.”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유신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방금 했던 말을 좀 더 풀어서 반복했다.

“아뇨, 아니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

닉이 걱정스레 자신을 살피는 시선에 뺨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간만에 만난 그는 기억보다 더 멋지고 달콤하고 제 취향으로 아름다워서,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신이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 젖은 금발이 이마 뒤로 넘어가 있었다. 닉이 평소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화려한 이목구비 한가운데, 어딘가 심각한 듯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미모에 분위기를 더했다.

유신은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닉의 가슴에 고개를 처박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의 페로몬을 흠뻑 들이마셔 버린다면, 자신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질 거였다. 지금도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매달리고만 싶어 온몸이 움찔대고 있는데.

“다행이야.”

닉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유신의 양손을 끌어와 손끝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닿아 있는 손끝과 손끝 사이로 느껴지는 열기에 유신은 몸을 떨었다.

“니카.”

“늦어서 정말 미안해. 촬영이 생각 이상으로 지체되는 바람에 너무 더러워서 샤워만 하고 바로 온다는 게. 마침 핸드폰도 배터리가 끊긴 데다 보조 배터리도 안 보이는 바람에, 혼자서 서둘러 차를 몰고 오느라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했어.”

거짓말로는 보이지 않았다. 겨우 메이크업만 털어 내고 왔다면,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도 그걸로 설명이 된다.

유신은 괜한 이야기를 지껄여 버릴 것만 같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응?”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닉이 되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가 느슨해지는 것이 괜히 초조해, 유신은 애매한 미소를 보냈다.

“걱정 말아요. 아이는 잘 크고 있다니까.”

“다행이야.”

닉은 유신의 뺨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컨디션이 좀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하지만 유신은 저도 모르게 그 손길을 쳐 내고 말았다. 솔직히 얼마 만에 만난 건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간 보지 못한 사이 오래 묵은 심술이, 그의 지각에 대한 불만과 함께 툭 터져 나와 버렸다.

“뒤늦게 괜히 덧붙이지 말아요. 어차피 딱히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오지 않아서 섭섭했다. 검진 때 올 거라고 당신이 먼저 말해 놓고는,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실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서운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겹치고, 보지 못한 시간만큼 속상함이 넘쳐, 마음과 다른 이야기만 멋대로 튀어나온다.

원래라면 유신은 간만에 만난 것을 반가워한 뒤, 분위기를 봐서 닉에게 우편함에 들어 있던 이상한 편지에 관해 이야기할 작정이었다. 가능하다면 방금 전 폴의 수상쩍은 기색에 대해서도 함께 알리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구구절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계속 생각해 오던 다정한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쉬울 리 없었다.

“유샤,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나도 오늘 쉽게 온 거 아냐.”

물론 닉도 유신이 이렇게 나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스케줄을 비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무리를 했는데. 물론 꼭 보답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행동은 아니지만.

솔직히 섭섭했다. 자신도 같이 정기 검진에 들어가고 싶었다. 유신이야말로 조금 기다려 줄 수도 있던 거 아닌가? 예약 시간이 되자마자 꼭 그렇게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어야 했나?

핸드폰으로 자신과 연락할 시도는 해 봤을까. 간다고 했는데, 믿고 좀 더 기다려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그때 갑자기 옆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둘은 멈칫해 고개를 돌렸다. 플래시는 한 사람의 실수였지만,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을 향해 핸드폰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었다.

로비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이곳이 공개된 장소라는 사실을 둘 다 잠시 망각한 탓이었다.

“할리우드 배우인 닉 메드 맞죠? 사인해 주세요.”

그중 제일 열성적으로 앞에 선 젊은 여성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 지난번 카페 루이에서 본 듯한 광경에 유신은 어깨를 굳혔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엔 왜인지 제안한 사람 쪽이 멈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제 등 뒤에 서 있어 유신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닉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던 탓이었다.

“개인적인 시간입니다. 죄송합니다.”

싸늘하게 속삭이고, 닉은 유신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유샤.”

닿은 손목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뜨거웠다. 유신은 얌전히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

- 너희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전화기 반대편에서는 아이잭이 한껏 흥분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유신에게도 다 들렸다.

차를 운전하며 스피커 모드로 전화를 받은 닉이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유신은 아이잭이 충분히 화를 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미 비슷하게, 아니 더 화가 난 닉이 그대로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은? 우린 그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그 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우릴 촬영한 거지. 거기다 그걸 SNS에 올려서 퍼트리다니, 그거야말로 사생활 침해 아닌가? 우리 쪽에서 고소해도 할 말 없을 거 같은데?”

- 닉, 네가 유명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되지. 평소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부분만은 잘 넘기더니, 오늘따라 갑자기 왜 그래?

유신이 보기에도 영 이상하긴 했다. 닉은 지난번 카페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심하게 들이닥쳐도 능숙하게 팬 서비스까지 하며 진정시켰다. 그 와중에 유신을 밀리와 같이 먼저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별스럽게 더 초조해 보인다.

“몰라! 나라고 항상 모든 사람들을 웃으며 대할 수는 없다고.”

자동차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닉이 휴대폰을 향해 항의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아이잭 쪽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 하! 만에 하나 그럴 수 있다 치자. 평소엔 잘하다가 왜 하필이면 그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런 거냐고.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 우리 쪽으로 다들 모여들어서 그렇지.”

- 모여들겠지. 너 같은 슈퍼스타가 거기서 그러고 있는데. 남들 다 보는 데서 유신과 싸우면 어떡해? 이래서야 결혼 발표를 한 의미가 없어.

유신은 보지 않아도 아이잭이 머리를 짚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조금 멈칫하고 말았다.

- 안 그래도 너와 유신 사이에 자꾸 이상한 이야기가 돌아서 걱정인데.

“뭐, 어때? 다 사실인데.”

- 사실이니까 하는 말이잖아. 마치 사정을 꼭 다 아는 것같이.

거기서 유신이 제게 온 수상한 편지를 떠올린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 편지의 작성자도 자신이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주절대고 있었다. 왠지 연결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묘하게 불길했다.

「안녕, 예쁜이.」

저도 모르게 편지의 제일 첫 문구를 떠올리고, 유신은 소름이 돋아 팔을 쓰다듬으며 몸을 웅크렸다.

“알면 뭐 어떡할 건데? 이미 결혼 발표도 다 했는데.”

닉이 그런 유신의 초조한 기색을 눈치챈 듯 흘끔 돌아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거기서 분명 걱정스럽게 뭐라고 물어봤을 텐데, 오늘따라 아무 말도 없었다.

사실 병원에서 나온 뒤로 줄곧, 아이잭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 둘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까 말다툼의 영향이 아직 남은 탓이었다. 유신도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로 했다.

- 오오, 닉! 이미 결혼 발표를 했으니까 더 곤란한 거잖아. 아니, 됐으니까 일단 지금 사무실로 와. 얼굴 보고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지금? 사무실로? 싫어. 오늘이 어떻게 얻은 휴일인데. 난 지금부터 나의 유샤와…….”

- 역시, 유신도 옆에 같이 있는 거로군.

“하하, 안녕하세요, 아이잭.”

갑자기 제 이름이 나와, 유신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아이잭이 스피커 모드인 줄 모르는 듯해서 알려 줄 겸이었다.

- 뭐야? 지금 유신 목소리 맞지?

“당연하지.”

- 아니, 유신한테도 내 목소리가 다 들리냐고!

“지금 운전 중이니까, 당연하지. 아니면 어떻게 전화하는 줄 알았어?”

유신의 의심대로, 역시나 미처 생각 못 한 듯 아이잭이 깜짝 놀랐다. 그는 닉의 노골적인 핀잔에 잠시 당황해했지만, 곧 회복해서는 오히려 세게 나왔다.

- 뭐, 잘됐어. 유신도 같이 데려와. 그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저한테요?”

“아이잭, 말했잖아. 안 간다니까. 오늘 저녁까지 난 휴가야. 그때까진 네가 아무리 요청해도 절대 안 돼.”

- 닉, 제발! 지금 휴일 챙길 때야? 그렇게 쉬고 싶었으면 아까 그러지 말았어야지. 점심은 가브리엘에게 가져다 달라면 되니까, 밥 같은 핑계는 대지 말고.

“지금 내가 안 간다고 했을 텐데.”

- 빨리 와, 닉. 와서 이야기해.

닉도 꽤나 고집스러웠지만, 아이잭 또한 마찬가지로 매우 막무가내였다. 유신은 끼어들 생각도 들지 않아, 한발 물러선 채 두 사람의 분위기만 살폈다.

“아이잭!”

결국 참지 못한 닉이 소리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정체로 서행 중이라 속도가 느렸기에 사고는 나지 않았다.

유신은 세게 앞뒤로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차량 시트를 꼭 붙들어야 했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살피며 닉이 혀를 찼다. 아이잭도 놀라 물었다.

- 괜찮아?! 별문제 없어?

“걱정 말아요, 아이잭. 우린 괜찮아요. 그냥 급정거한 것뿐이에요.”

“일단은 그렇다는군.”

입으로는 유신의 말에 동의하고 있지만, 닉의 분위기는 이제 살벌할 지경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는지, 결국 아이잭이 한발 물러섰다.

- 좋아. 그럼 일단 안 와도 돼. 대신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래, 해.”

- 아니, 우리 둘이서 해야 해. 유신 빼고.

이번엔 유신이 마음 상할 차례였다. 닉도 살짝 당황한 듯했다.

“그걸 꼭 그렇게, 지금 당장?”

- 최대한 빠를수록 좋아.

하지만 아이잭의 단호한 말투에 뭔가 느낀 듯, 닉은 슬쩍 유신의 눈치를 보며 차를 돌렸다.

“알았어.”

닉은 적당히 근처에 차를 대고 핸드폰을 일반 모드로 바꾸었다.

이미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잭 쪽에서 한번 양보했기 때문에, 더 세게 나가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 같았으면 닉은 여기서 좀 더 다정하게 유신의 입장을 생각하며 달래 주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걸 핑계로 어중간하게 말을 거는 것도 싫었다. 저렇게 비밀로 하고 싶다는데 굳이 들을 생각도 없어, 유신은 모른 척 차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짙은 선팅에 세상이 실제보다 더 어둑어둑하게 느껴졌다.

“……알았어. 그 부분은 내가 잘 이야기하지.”

생각 외로 통화 분위기는 심각했다. 저도 모르게 자꾸 귀가 쫑긋 서는 것을 애써 누르며, 유신은 볼 것도 없으면서 바쁜 척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걱정 마, 아이잭. 안 잊어버렸어. 코넬 쇼 출연 시간엔 안 늦어.”

그러고 보니 오늘 밤, 닉은 유명 토크 쇼인 코넬 쇼에 라이브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유신은 지금도 그의 스케줄 정보를 다 체크하고 있었다. 하도 오랜 버릇이라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사실 오늘도 늦게 보강 수업이 있는데, 끝나고 바로 돌아오면 토크 쇼 시간과도 딱 맞았다. 원래라면 당연히 방송을 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볼지 안 볼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화면에 나오는 닉을 보는 건 역시나 좋고. 아니, 그렇다고 다른 때는 싫다는 건 아니지만.

유신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SNS에서 자신과 닉이 산부인과 로비에서 싸우는 사진을 발견했다.

벌써 여기까지 퍼지다니. 인터넷에서 소문이 빠른 건 알았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고 보니 웃기 힘들었다. 아이잭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댓글에는 각종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애가 이미 잘못됐다는 둥, 누구 한쪽이 중절하라고 해서 저런다는 둥, 실은 애초에 닉 메드의 애가 아니라는 둥.

거기까지 보고 유신은 핸드폰 화면을 꺼 버렸다. 안 봤어야 했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사실 자신은 딱히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흐릿하게 찍힌 사진에서조차 잘 차려입은 닉과 낡은 코트 차림의 자신이 지독하게 안 어울려 보여 슬펐다. 뭣보다 자신은 또 왜, 이런 걸 스스로 찾아보고 고통받는 건지.

“유샤.”

어느새 전화를 끊은 닉이 저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묘하게 어둡고 무겁다. 유신은 어깨를 굳히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역시 네가 휴학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아.”

뜬금없는 소리에 유신은 울컥 기분이 상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죠?”

열애설이 터졌을 때 숨어 있겠다는 사람을 굳이 붙잡아, 억지로 결혼 발표까지 하게 만든 건 그쪽이다. 그런데 이제는 또 휴학하고 대학을 다니지 말란다. 유신으로서는 기분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닉은 매우 심각했다. 또한 강경하기도 했다.

“부탁이야. 널 위해서야.”

“대체 이유가 뭔데요?”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상황이 조금만 나아지면 다 설명할 테니까.”

물론 저런 뜬구름 잡는 설명으로 유신이 납득할 수 있을 리 없다. 겉으로는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다는데, 느낌으로는 오히려 무시한다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유신도 밀리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밀리도 대충 눈치챈 상태에서 굳이 말하기 뭐해서 둘러댄 것뿐이다.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가뜩이나 입덧 때문에 힘들어서 출석만 겨우겨우 하며 버티는 중이었다. 이대로면 역시 휴학을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건 섭섭하다. 유신은 되레 오기가 생겼다.

“이유는 말 못 하고, 다짜고짜 날 위해서라고 하면,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냐, 이건 진짜 사정이 있어서.”

대답하는 닉이 정말로 난처해 보여서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따지면 자신도 심란한 편지를 받은 참이었다. 오늘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자신도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걸로 내가 납득할 수 있겠냐구요?!”

욱. 흥분해서일까? 유신은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맞은 링거가 드디어 효력이 다했나 보다. 아니면 그저 상태가 더 나빠져서, 링거로는 부족해졌는지도 모른다.

“유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유신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힘없이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닉은 이제 와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어디 들어가서 쉴까? 좌석을 뒤로 눕힐까? 누우면 좀 괜찮겠어?”

“집에, 집에 데려다줘요.”

유신은 울컥한 기분에 열이 받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집에 갈 거야. 당신도 없는 그 터무니없이 커다란 펜트하우스 말고. 밀리랑 사는 내 집에 데려다줘요, 니카.”

새파랗게 질린 유신이 울먹이며 그렇게 속삭이자, 닉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묵묵히 차를 출발시켰다.

다행히 가는 길에 유신의 울렁거림은 조금 진정되었다. 그는 혼자 가겠다 했지만, 닉이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봐야겠다며 부축했다. 어차피 서 있기도 힘들어서 유신도 얌전히 도움을 받았다.

닉은 능숙하게 열쇠를 열고, 유신을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평일이라 밀리는 회사에 출근하고 없었다.

자연스럽게 유신을 침대에 눕히고, 셔츠 깃을 느슨하게 해 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몸과 몸이 가까워지며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그의 페로몬이 유신은 기분 좋았다.

본인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를 빤히 보는 닉의 뒤통수가 왠지 낯이 익다. 그 익숙한 태도에서 유신은 그가 여기 온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당분간 학교는 쉬어, 유샤. 필요하면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까.”

닉은 속으로 여기 건물 안까지 유신에게 경호를 붙이려면 집주인과 어떻게 담판을 지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느라, 방심해 반응이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유신에게 손목을 끌어 잡혀, 다음 순간 닉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유신의 베개 위로 흩어졌다.

“……유샤?!”

그런 그의 허리 위로 유신이 올라탔다.

“니카, 우리 해요.”

유신이 지금 닉에게 조르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섹스였다.

닉 역시 그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순진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유샤, 우리 지금 이럴 때가.”

하지만 이 상황을 끊으려는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두 사람의 얼굴과 얼굴이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유신이 울먹였다.

“그럼 둘이서 뭘 해야 한다는 거죠? 카메라 앞에서 웃거나 키스하는 건 괜찮고, 단둘이서는 안 된단 건가요? 그렇게 나랑 섹스하기 싫어요?”

“싫을 리 없잖아. 그저 난 단지 그게 지금 같은 때는 아니라고.”

“그럼 언제면 되는데요? 난 지금 하고 싶어.”

닉을 올려다보는 초콜릿색 눈동자는 열기로 들떠 있었다.

간질간질 달콤한 페로몬이 두 사람의 목덜미에서 짙어졌다. 둘 다 상대방을 간절히 원하는 채, 본능이 대놓고 서로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진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닉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휩쓸리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반대로 유신은 닉과 자신의 관계에서 확실한 건 몸과 몸이 이어지는 것뿐이라며 집착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지난번 히트 때 섹스한 이후로, 둘 사이에서 그런 행위는 전혀 없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부터 유신은 계속 너무 졸리고 컨디션이 별로라 전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고, 닉도 그런 유신을 배려해 굳이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지 않았다. 둘 다 유신의 임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사이 닉에게 다른 상대가 생긴 낌새는 없었다. 원래 상대가 끊이지 않던 알파인 만큼, 본인은 자각이 없다 하더라도 분명 욕구가 꽤나 쌓였을 터다. 지금 제 아이를 밴 사랑스러운 오메가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맞닿은 하반신에서 서로의 단단하고 뜨거운 열기를 둘 다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닉의 위에서 유신의 엉덩이가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여전히 시선을 닉에게로 고정한 채, 유신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니카, 나를.”

숙인 고개를 타고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를 닉이 천천히 뒤로 넘겨 주었다.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손길이었다.

사랑하는 알파의 손끝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유신이 바르작대며 몸을 떨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듯 닉의 가슴팍에 손을 짚은 채, 그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나는.”

대답 없이 닉은 유신의 안경을 벗겼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안경이 침대 옆 협탁에 올려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둘의 입술이 맞대어졌다.

쪽. 시작은 깃털처럼 가벼운 키스였다.

닉의 손이 유신의 섬세한 턱과 뺨의 곡선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유신의 양팔이 상대의 목을 껴안았다.

입술이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시 겹쳐졌다. 닉은 제 입술로 유신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뗐다.

“흣.”

그 짧은 자극에 반응하듯 유신이 짧은 숨을 들이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닉을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왔다. 닉은 다시 유신에게 입 맞추며 이번에는 혀를 내밀어 핥았다.

반복해 입술이 겹칠 때마다 점점 진해지는 입맞춤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혀가 뒤섞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고 싶다는 듯 격렬한 기세로 둘은 거칠게 서로의 입 안을 탐했다.

자연스럽게 유신의 니트 스웨터 아래로 닉의 손이 들어갔다. 마른 허리에 바지가 헐렁하게 남아서 쉽게 손이 쑥 들어갔다. 닉은 유신의 옆구리를 지분거리며, 좀 더 살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흥분에 따라 서로의 페로몬이 확 짙어지자, 떨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에서 유신이 낮게 끙끙댔다.

닉이 손으로 훑어 내릴 때마다 유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맨살 위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얇은 살갗 아래 골반뼈가 그대로 느껴졌다. 살이라고는 없는 아랫배는 오히려 잘 단련된 근육만이 장기를 감싸고 있었다.

겨우 떨어지는 입술에 유신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가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는 없었다.

닉이 자연스럽게 유신과 제 바지의 버클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한껏 흥분한 성기는 속옷 고무줄을 내리자 바로 튕겨 나왔다.

나란히 두자 크기 차이가 제법 두드러졌다. 한껏 발기해도 제 물건의 삼분의 이가 될 듯 말 듯 한 유신의 성기가 너무 귀여워 닉은 더 흥분했다.

유신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도 한국인 평균 정도는 충분히 넘었는데, 닉이 지나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대로 닉은 유신의 손을 끌어당기고, 성기 둘을 한꺼번에 겹쳐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자신들이 둘 다 흥분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너무.”

마치 예의상 거부한다는 것처럼 유신이 속삭였다, 하지만 닉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그래 봤자 의미 없었다. 부끄러움과 흥분이 뒤섞여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좋다고?”

대답 대신 닉의 손안에서 유신의 성기가 좀 더 커졌다. 유신이 서로 좀 더 만지기 쉽도록 엉덩이를 움직여 자세를 고치자, 이번에는 닉도 더 흥분하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성기를 훑기 시작했다. 맞닿은 서로의 성기가 뜨겁고, 맞닿은 어깨로 느껴지는 체온이, 서로의 목덜미로 닿아 오는 숨결이, 민감한 감각을 부채질했다.

어차피 쌓인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몇 번 맞잡고 쓸지 않아도 성기는 앞쪽을 적시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진해지는 페로몬이 서로를 좀 더 부추겼다. 닉의 손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랄 것 없이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프리컴이 윤활제처럼 그 움직임을 도왔다.

“니카, 니카, 나.”

유신은 말을 잊기라도 한 듯 겨우 닉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다였다. 닉의 손이 한껏 민감해진 그의 귀두를 자극했다.

“아, 니카.”

“읏.”

간만의 사정은 둘 다 허무할 정도로 빨랐다. 둘이 거의 동시였다.

닉은 낮은 신음을 토하며 제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정액으로 젖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유신은 한 번 사정하고도 쉽게 진정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열에 들뜨는 듯했다.

촉촉이 젖은 입술이 뜨거운 숨을 토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아름다운 눈동자는 더 깊은 쾌락을 원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행위도 충분히 기분 좋았지만, 몸이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더 깊은 행위를 원하는 것이었다.

제 엉덩이가 안쪽부터 젖어 들자 유신이 움찔 뺨을 붉혔다. 닉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안긴 채 올려다본 닉의 아름다운 얼굴 또한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다. 보석 같은 청록색 눈동자는 욕망에 젖어 있고, 쉬이 떨어지지 못한 채 제 허리와 엉덩이 근처를 지분거리는 그의 손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 듯했다.

열에 들뜬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유신은 목구멍 안쪽이 마른 듯한 갈증에 입술을 달싹였다.

“임신 초기만 지나면, 삽입 섹스도 무리해서, 깊게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충동적으로 속삭였지만, 역시 부끄러워 유신은 말하자마자 얼굴을 팔꿈치로 가려 버렸다.

임신·출산 관련 책에서 본 거였다. 안 그래도 오늘 검진에서 매튜 선생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그 순간만은 닉이 옆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나도 알아. 찾아봤어.”

닉에게서 돌아온 무뚝뚝한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찾아봤다니, 어떻게? 그가 자신처럼 책으로 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요즘 닉은 대부분의 시간을 촬영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촬영용 메이크업과 분장을 한 채, 잠시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그런 내용을 검색하는 그를 상상하자 지독하게 안 어울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닉이 자신을 가볍게 들어 올려, 유신의 생각은 끊겼다. 다음 순간,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벗겨졌다. 이미 버클이 풀어 헤쳐진 채라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다시 발기한 닉의 성기가 유신의 허벅지에 닿아 왔다.

“유샤.”

단단하고 뜨거운 감각에 절로 내벽이 조여드는 듯했다. 닉의 손가락이 구멍을 지분거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헐렁한 스웨터는 이미 가슴까지 끌어 올려진 채였다. 차가운 공기와 흥분이 뒤섞여 유두는 이미 바짝 끝을 세운 채 일어서 있었다.

유신의 마른 가슴은 아직 판판했다. 임신했다 해도 남성 오메가는 대부분 가슴 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한다 하더라도 임신 말기, 젖이 돈 이후의 잠시 동안이고, 그조차 아닌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쾌감은 별개다. 닉의 혀가 유륜 근처를 핥아 왔지만, 유두까지 입에 물지는 않았다. 감질나는 감각에 유신의 허리가 절로 떨렸다.

두 사람분의 정액으로 젖은 닉의 손가락이 애액으로 축축해진 구멍을 조심스럽게 파고들고 있었다. 거의 처음에 가까운 구멍은 흠뻑 젖었지만 빡빡하게 손가락을 조여 왔다.

“응, 거기.”

하지만 유신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녹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허벅지가 벌어지고, 두 사람의 간격이 더욱 가까워졌다.

“어서, 넣어 줘요.”

닉이 낮게 혀를 찬다 싶더니 갑자기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아까부터 감출 생각도 없었던 대로, 그 역시 꽤나 급한 상태였다. 그대로 귀두가 구멍 근처로 밀어붙여 왔다.

시간을 들여서 풀지도 않은 데다, 히트가 아닌 만큼 유신의 내벽은 빠듯하게 닉의 성기를 물었다.

우성 알파답게 그의 물건은 크기도 굵기도 평균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욱신욱신한 통증과 강한 압박감이 아래 연결된 부분부터 퍼져 갔다. 하지만 그만큼 깊게 연결된 감각이 충족감을 불러일으켰다.

닉의 새콤달콤한 베르가못 향에 유신은 자신이 절여지는 것만 같았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페로몬을 느끼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괜찮지? 움직인다.”

하지만 귓가에서 닉이 이렇게 속삭이자, 유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직.”

아직 그의 성기가 제 안에 다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 보자면 삼분의 일 정도일까? 완전히 넣었을 때와 비교하면 입구에만 가볍게 걸쳐진 수준이었다.

“난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유샤.”

하지만 닉은 제 성기를 좀 더 삽입하는 대신, 이렇게 속삭이며 유신의 귓가에 가볍게 입 맞추었을 뿐이었다.

거기서 유신은 닉이 왜 어중간하게 삽입을 멈추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 임신 3개월인, 제 아이를 가진 자신을 배려해서 조심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성기는 워낙에 크고 굵어서, 이것만으로도 유신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불안해서 깊이까지 넣는 것은 아직 약간 거부감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다 해도 닉은 부족하지 않을까? 유신은 머뭇머뭇 눈앞의 아름다운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판단하기보다 먼저 닉이 그의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이어져 있을 때도 좋았지만,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긁어 오자 절로 몸이 달아올랐다.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그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며 달콤하게 신음했다.

“응, 으흥.”

“좋아?”

“좋아요, 흣.”

“나도 좋아, 유샤.”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힌 채, 미미하게 붉어진 닉의 얼굴은 정말 본인의 말대로 충분히 기분 좋아 보였다. 몸 안의 성기가 맥박 치듯 좀 더 뜨거워졌다.

유신은 그가 자신에 의해 착실히 흥분하는 것이 왠지 기뻤다.

“앗, 아아.”

자궁 입구에 닉의 성기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신중하게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허리를 흔들었다. 뜨겁고 달콤한 공기가 둘의 주위를 감쌌다.

한창 허리를 움직이는 가운데, 닉의 손이 조심스럽게 유신의 아랫배를 감쌌다. 유신도 자연스럽게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연하다는 듯 입술이 겹쳐졌다.

아래와 달리 입 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부드러운 허리 짓과 대조적으로 잡아먹을 듯이 거칠게, 닉이 유신의 입 안을 빨아 당겼다.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한 격렬한 입맞춤에 왠지 들뜨며 유신이 닉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래의 연결된 부분도 착실하게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이성에 져서 깊이 박아 넣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

닿아 있는 입술 덕에 절정에 닿았을 때, 유신은 목 안쪽에서 가쁜 숨소리를 내뱉는 것이 다였다.

유신이 먼저 도달하고, 닉이 그의 안에서 성기를 빼서 가볍게 손으로 훑어 내렸다. 두 번째지만 첫 번째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양의 정액이 유신의 가슴과 배로 튀었다. 일부는 아직 입고 있는 스웨터를 더럽혔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낡아서 대충 세탁기에 돌리면 되는 옷이다. 유신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닉의 뜨거운 숨이 뺨에 닿는 감각이 왠지 지릿지릿했다. 방금까지 그를 머금고 있던 구멍이 아직 채 맞물리지 못하고 아쉬운 듯 빠끔거리고 있었다.

신체적 욕구는 충족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두 번이나 사정했는데도, 유신은 이상할 정도로 뭔가가 허무했다.

***

“그럼, 갈게.”

“네, 잘 가요, 니카.”

영 가기 싫다는 듯 엉덩이를 미적대는 닉을 향해 유신은 산뜻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닉은 이제 코트까지 다시 챙겨 입었고, 유신은 몸을 바로 편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바로 하는 것만으로 방금 전 두 사람의 사이의 행위는 꼭 없던 일만 같았다.

유신의 스웨터에 생긴 작은 얼룩만 모른 척한다면 감쪽같았다. 그리고 구겨진 닉의 바지 주름과, 아직 상기된 기색이 남은 유신의 뺨 또한.

자신의 쌀쌀맞은 반응에 대놓고 어깨를 꿈지럭대는 닉을 향해, 유신이 보란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아쉬운 표정이에요, 니카. 코넬 쇼 스케줄을 잡은 건 제가 아니라구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잭이 밀어붙이긴 했지만, 결국 그 스케줄을 받아들인 쪽은 닉 자신이었다. 그는 원래도 내키지 않았지만 새삼스럽게, 역시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대신이라면 이상하지만, 닉은 한 가지 확인을 받고 싶었다.

“진짜 방송 볼 거지, 유샤?”

“네, 볼게요. 안 그래도 볼까 하던 중이었어요.”

“볼까, 정도로는 안 돼. 꼭 봐야 돼.”

몇 번이고 확인을 구하는 닉을 향해 유신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서 가요.”

대놓고 밀어 대는 것은 섭섭했지만, 스케줄을 펑크 낼 생각이 아니라면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닉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유신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떠났다.

표정만은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닉 또한 뿜뿜 뿜어내는 페로몬만큼 온몸에서 나른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중이었다. 지금 누군가 그를 본다면 방금 전 뭘 했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방을 떠나서 계단을 따라 현관까지 가는 사이 닉은 제 몸에 남은 여운을 털어 내고 원래 상태로 돌아갈 게 틀림없다.

“하아아.”

닉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유신은 침대로 늘어졌다. 한숨 같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유신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하반신이 나른했다.

고작 그걸 했다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작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원색적인 기억에 유신이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힐 때였다.

위이이잉. 핸드폰이 진동을 흘렸다.

밀리였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여기서 안 받는 것도 뭔가 지는 느낌이라, 유신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결국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니, 그냥. 자기 오늘 병원 정기 검진 간 거, 잘하고 왔나 싶어서.

유신이 지금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밀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렇게 중얼댔다. 유신은 그가 답지 않게 말을 고른다고 느꼈다.

인터넷에 올라온 자신과 닉이 병원에서 다투는 사진을 본 걸까? 밀리가 이유 없이 전화하는 타입은 아니니, 아무래도 봤으니까 전화를 했을 것이다. 자신이 걱정되어서.

“난 괜찮아.”

그 마음을 아는 만큼 유신은 일부러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갑자기 툭 눈물이 쏟아졌다. 아닌 척 바로 숨을 들이켰지만, 당연히 밀리에게는 이미 들킨 다음이었다.

- 유신? 자기야? 지금 울어?! 무슨 일 있었어? 설마 아기한테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거야?

밀리는 바로 난리가 났다. 아까 닉도 그렇고, 이 와중에도 다들 아기의 안전부터 걱정하는 것이 유신은 좀 웃기고 슬펐다.

어쨌든 질문에 대답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신부터가 제 눈물에 당황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왜 우는지 본인도 잘 몰랐다. 그냥 좀 마음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아냐, 아기는 매우 건강하게 잘 크고 있대. 이제 더 이상 콩알도 아냐.”

- 그건 진짜 다행이다. 그럼 진짜 왜 우는 거야? 역시 그 사진대로 싸웠어? 내가 닉 메드한테 대신 따져 줄까?

봐, 역시 사진 봤잖아. 유신은 상대에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러지 마.”

- 자기야, 진짜 괜찮은 거지?

“난 정말 밀리 네가 있어서 너무 좋아.”

- 당연하지! 난 네 친구잖아.

흔치 않은 유신의 과한 칭찬에 밀리가 대놓고 수줍어했다.

- 자기야, 오늘 병원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이만 푹 쉬어.

하지만 유신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냐, 밀리. 나 오늘도 학교에 보강 수업 들으러 가야 해.”

- 오늘? 그냥 아프다고 말하고 쉬어!

“안 돼. 나 결석이 많아서 오늘 안 가면 낙제야. 그리고 곧 중간고사라서, 이번만 다녀오면 보강은 마지막이야.”

유신의 설명에 얼마 전까지 같은 대학의 학생이었던 밀리는 바로 납득했다.

-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조심해서 다녀와, 자기야.

“응, 밀리.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유신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 중간고사가 코앞인 학생 신분에, 마음이 좀 힘들고 속이 좀 울렁댄다고 마냥 팔자 좋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신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자신은 그냥 그대로 집에 있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

코넬 쇼의 대기실, 닉은 아직 조금 멍한 상태였다.

아직 섹스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손끝에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줄곧 유신과 다음 섹스를 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신이 그렇게 직접 원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끌어안은 손길만큼 마음이 멀어진 듯한 이 기분은 뭘까?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자꾸 가라며 떠밀던 손길이기 때문일까?

“닉,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갑자기 뒤에서 아이잭이 말을 걸어 닉은 눈을 깜박였다. 아이잭은 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짜고짜 계속 물었다.

“그래서, 어때? 유신은 대학을 휴학한대?”

그로서는 꽤나 급한 듯했지만, 사실 닉은 그 화제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모르겠는데.”

“아니, 그럼 대체 여태까지 뭘 하다 온 거야?!”

물론 ‘섹스’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닉이 잠시 머릿속으로 대답을 고르는데, 올가가 놀란 낯으로 끼어들었다.

“유신이 휴학을 해요?”

“그를 위해서야. 이제 곧 배도 불러 올 텐데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

“하지만, 미스터 심슨. 애초에 유신은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대리모를 선택한걸요. 학비 때문에요.”

아이잭의 설명에도 올가는 영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닉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여태껏 유신을 만난 것만으로 마냥 기뻐, 대리모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아직 코넬 쇼가 시작하려면 제법 남았지만, 거의 방송 시간에 육박하는 긴 리허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방송인 만큼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웬일로 아이잭과 올가 양쪽 다 현장에 나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중요한 스케줄에다 생방송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상은 닉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도 직전까지 펑크 내고 불참할 생각에 계속 고민하던 닉이었다. 아이잭과 올가도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째서 둘 다 여기 있냐는 닉의 표정에, 아이잭은 네가 불안하게 굴어서 그렇다고 입을 삐죽였더랬다.

“그래서 지금 유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어, 닉?”

“일단 내가 그의 집에 데려다줬어.”

“학교 근처의? 오늘은 계속 집에 있겠지?”

“아마도?”

아이잭의 질문에 닉은 무심하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경이 영 다른 곳으로 쏠린 듯한 태도였다. 마치 지금 집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물론 그 상대가 달리 있을 리 없었다. 유신의 손길, 그의 입술, 마지막에 멋쩍은 듯이 웃던 미소.

아니, 정확히는 어서 가라고 자신을 밀어 내던 기억이 마지막이지만. 아마도 지금쯤 집에서 잘 쉬고 있겠지.

공교롭게도 닉은 유신이 오늘 오후에 수업 때문에 외출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스터 메드, 이거 오늘 토크 쇼 대본이에요. 미리 메일로 전달했는데 첨부 파일 열어 보지도 않았죠?”

올가가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얇은 A4 용지 몇 장을 건넸다. 닉이 슬쩍 넘겨 보니 대본이었다.

올가는 오늘 토크쇼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뭘 할 예정인지를 간단히 알려 주었다. 별 영양가 없는 적당한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제 될 만한 질문은 우리 측에서 모두 커트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펴는 올가를 향해 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그런 프로 아니잖아?”

“당신쯤 되면 어딜 가도 함부로 대해질 레벨은 아니죠. 적당히 영화 홍보만 하다 오시면 돼요.”

닉은 재미없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심하다 못해 무미건조할 지경이야. 유신이 보다가 졸겠어.”

“유신도 코넬 쇼를 본다고 했어요? 라이브로?”

“아마 그럴걸. 내가 꼭 보라고 이야기도 했고.”

올가는 슬쩍 아이잭을 살피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미스터 메드, 이야기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뭔데?”

“처음 열애설 터진 날 기억하세요? 당신이 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던 날이요. 그날 펜트하우스에서 유신이 저한테 한 이야긴데요. 유신은 아무렇지 않다 했지만, 전 아무래도 맘에 걸려서 말이죠.”

닉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집중했다. 올가는 조용히 유신이 했던 말을 최대한 기억 그대로 닉에게 전했다.

지금 닉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미래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것. 하지만 그와 자신의 입장 차를 생각하면 그게 당연하다고 한 것. 기대했다가 실망할 바에야 처음부터 포기하는 쪽이 편하다던 것.

그리고 사고로 무용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분명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정말 괜찮아질 때까지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 것.

“전 마지막 말이 꽤나 의외였어요. 유신이 그렇게까지 춤에 진심인 줄은 몰랐거든요. 사고에 대해서 항상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이야기하곤 해서요.”

“그럴 리 없지. 그는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겨루고, 입상했을 정도의 실력자야. 그 정도 되는 댄서가 인생을 걸었던 춤을 포기하는 것이, 지금 좀 괜찮아 보인다고 쉬웠을 리 없지.”

무슨 당연한 이야기냐는 듯 닉이 대꾸했다. 불만이라기보다, 그냥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태도였다.

반대로 올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의외였다. 하지만 그 사실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닉이 너무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자신만만하고 제멋대로이던 자신의 고용주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

“저기, 미스터 메드?”

“그렇군. 난 여태껏 내 입장만 밀어붙였던 거야.”

“자각이 없으셨던 거예요? 전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더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더 낫다고 판단했던 건 맞아. 하지만 유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는 올가에게 들고 있던 토크쇼 대본을 넘기며 물었다.

“올가, 내가 이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토크쇼에서 해도 괜찮을까?”

그건 유신에 대해선가요? 닉의 얼굴에는 이미 그렇다고 쓰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올가 역시 굳이 소리 내어 질문해 그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물론이죠. 당신 정도 되면, 충분히 가능해요.”

대신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

그 남자는 어두운 방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휑한 공간은 익숙한 구조였다. 좁은 현관에서 바로 이어진 부엌 겸 거실, 두 개의 독립된 작은 방. 길고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 또한 낯이 익었다.

당연하다. 유신과 밀리의 집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조금 고도가 높아진 것뿐이니까.

여기는 유신과 밀리의 바로 윗집이었다. 전체 7층 건물 중 6층이었지만, 7층은 반만 천장이 있고 반은 옥상으로 되어 있어, 이쪽은 여기가 최고층이었다.

구조는 완전히 같았지만 관리에 따라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대놓고 보여 주는 듯했다. 낡고 먼지투성이인 것은 그렇다 치고, 거실 쪽 천장이 조금 부서져 비가 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로 이 방은 계속 비어 있었다. 건물 자체가 워낙 낡았다 보니 집주인이 무심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덕분에 이 건물 전체가 주변에 비해 월등히 집세가 싸기도 했다.

렌트도 주지 않은 빈집 현관이 마침 열려 있던 것은 있을 법한 실수였지만, 남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사실 이 건물 내부에는 CCTV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아무도 관심 없는 이 구석진 집에 새로 열쇠를 달고 자리를 잡는 동안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실제 남자가 사는 집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택시를 타면 금방이고,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남자는 방 한구석에 놓아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바라보았다. 저 캐리어도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성인 남자도 몸을 굽히면 족히 들어갈 정도로 컸다. 아니, 과장이 아니라 분명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어쨌든 닉 메드가 본격적으로 경비를 강화하기 전에 여길 발견해 다행이었다. 그 뒤 자신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분명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부터 드나들던 그는, 외부에서 보면 번듯한 입주인 중 한 명이었다.

얇은 바닥에 조용히 귀를 대고 있으면, 아랫집에서 뭘 하는지 죄다 들리는 듯했다. 적어도 지금 집에 있는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어느 방에 있는지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섹스하는 소리는 물론이었다. 감추려고 소리를 죽인다면 들리지 않을 테지만, 자기 집에서 그렇게 조심스런 경우는 별로 없다. 오늘만 해도.

“칫.”

거기까지 생각하고 남자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지금 핸드폰으로 오늘 오전에 유신과 닉이 산부인과에서 싸우는 사진을 보던 중이었다. 사진이 얼마나 많은지,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었다.

그중 유신의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에서, 그는 손을 멈추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역시 놈에게 이 오메가는 과분해.”

병원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싸우다니 저 알파는 역시 최악이다. 남자는 출근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일부러 휴가를 쓰고 바로 퇴근했다. 최근 들어 휴가를 남발해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길게 다닐 예정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데려와야겠어. 나 같은 알파가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남자는 사진 한쪽에 찍힌 닉을 벅벅 손톱으로 긁었다. 액정에 붙여 둔 필름에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인쇄물이었다면 빡빡 찢어 버릴 기세였다.

“유신도 나와 함께인 것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될 거야.”

창을 통해 길게 안으로 늘어진 오후 햇살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붉은 머리는 부스스했고, 창백한 코끝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들면 돼, 예쁜이.”

***

유신은 보강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요즘은 오가며 언제 토하러 화장실로 달려갈지 몰라 최대한 여유 있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만약 문제없이 일찍 도착하면 과제를 하면 됐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면 아슬아슬하게 닉의 토크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아까 밀리와 전화하면서 울기도 했고, 과연 자신이 그 방송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결국 그 시간이 되면 자신은 얌전히 텔레비전 앞에 앉고 있겠지.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유신은 그런 제 모습이 빤히 보이는 듯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우편물.”

공동 현관 앞에는 세대별 우편함이 있었다. 몇 번 정체 모를 흰 봉투를 받은 이후로 유신은 우편함을 보면 좀 긴장이 되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괜찮았다.

웬일로 빼곡한 우편물은 대부분 청구서나 광고 전단이었다. 그러고 보면 대리모 센터에 등록했다는 것도 우편물로 알았더랬다. 겨우 몇 달 전의 일인데 벌써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우편물을 꺼내던 유신은, 외국 소인이 찍힌 국제 우편을 발견했다.

“응? 이건.”

두껍고 고급스러운 봉투는 일반 편지 봉투보다 조금 컸다. 받은 사람에는 유신의 이름과 이곳 주소가 영어로 적혀 있었지만, 보내는 사람에 적힌 글씨는 영어가 아니었다. 알파벳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휘어지고 곡선이 많은 인쇄체는, 동유럽에서 주로 쓰는 키릴 문자였다.

“초대장?”

영문을 알 수 없어 유신은 봉투를 뒤집어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바람에 등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여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나풀나풀 갈대보다도 더 가볍게 작은 바람에도 바로 방향을 바꿔 버린다.

토크쇼의 리허설을 끝내고 나온 닉은 아이잭과 올가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핸드폰 좀.”

그는 꼭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핸드폰을 요청했다.

“닉, 이제 곧 본방송 시작할 텐데, 지금 굳이 핸드폰이 필요할까? 방송 다 끝나고 보는 게 어때?”

“그래요. 미스터 심슨의 말씀이 맞아요.”

둘의 반응은 어떤 의미로 닉의 예상대로였다. 차라리 아니길 바랐건만.

닉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서, 흘낏흘낏 저를 살피는 시선은 단순히 할리우드 유명 배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에 익숙한 닉인 만큼 더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어서 핸드폰 주고. 무슨 일인지 요약해서 이야기해.”

턱 하니 손을 내밀며 닉은 거만하게 명령했다. 허튼소리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싸늘한 눈빛에 아이잭도 올가도 바로 꼬리를 내렸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짠 듯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스크롤 하는 닉의 표정은 어두웠다.

“요는, 그 망할 협박범 새끼가 나랑 나의 유샤에 관해서 깨작깨작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지웠다 난리를 치다가, 결국 내 회사로 협박장까지 보낸다 했더니, 드디어 한 건 터트렸다는 거로군.”

“닉,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아. 단어 순화. 단어 순화.”

“어차피 이미 다 욕하고 난리 났는데, 이제 와서 이미지 관리해서 뭘 해?”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잭은 그냥 둔 채, 닉은 툭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껏 날카로워진 분위기 덕에 그런 단순한 동작도 멋들어졌다. 호기심 가득 찬 시선으로 흘낏거리던 사람들에게서조차 감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닉의 이야기대로였다. 지금 인터넷에는 닉과 유신에 대한 비난과 욕이 넘쳐 나고 있었다. 간 보듯 글을 올렸다 지웠다 하던 협박범이 드디어 유신과 닉의 관계에 대해 까발린 긴 글을 올린 거였다. 이번엔 끝장을 보겠다는 작정인지 더 이상 지우지조차 않았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유신이 닉의 대리모라는 사실을 폭로했고, 둘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은 전혀 없으며, 닉이 돈으로 유신을 협박해 어쩔 수 없이 약혼자인 척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지저분한 저속한 단어가 넘치는 폭로문만 보면 닉과 유신의 관계는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둘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던 인터넷 여론이, 단번에 180도 바뀌어 물어뜯기 시작했다.

((댓글))

- 그럴 줄 알았어. 오전에 둘이 싸우는 사진 보는데, 왠지 쎄하더라.

- 항상 둘이 같이 있는 사진 보면 어색해 보인다 했어.

- 닉의 약혼자가 평소에 약혼반지를 안 낀다더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 사립 대학 학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돈에 탐이 났던 걸까?

오늘 오전, 산부인과 로비에서 싸우던 사진이 왜인지 협박범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 병원이 불임 클리닉과 대리모 센터를 대규모로 운영한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더했다.

닉과 유신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 원색적으로 대놓고 비난하는 쪽도 그들이었다.

((댓글))

- 두 사람을 진짜 응원했는데, 배신감을 느껴.

- 완전히 거짓말쟁이야.

이 정도는 개중 정말로 점잖은 축이었다. 정도를 모르고 선을 넘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등장하고 있었다.

“유샤는? 그는 뭐라고 하지?”

유신이 혹시 안 좋은 댓글을 본 건 아닐까, 닉은 그것부터 걱정이었다. 아이잭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실은 일부러 연락 안 했어. 네가 집에 있을 거라고도 했고. 아직 아무 연락도 없는 거 보면, 뉴스를 못 봤을 가능성도 있잖아. 괜히 자극해서 놀라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올가도 그런 아이잭에게 맞장구를 쳤다.

“제 생각에도 집에만 있다면 차라리 그쪽이 괜찮을 거 같아요. 건물 외부에 경호도 붙어 있잖아요.”

“확실히 집에만 있는다면.”

닉도 일단 동의했다. 그러고 보면 링컨 쪽에서 아무 연락도 없다는 것은 유신이 집에서 나온 적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

“닉, 일단 코넬 쇼는 끝내고 와. 그동안 내가 대책을 알아보고 있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쇼인 만큼 아이잭의 이야기가 합리적이긴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닉이 망설일 때였다.

“모두 박수로 오늘의 특별 게스트를 환영해 주십시오. 여러분,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닉 메드입니다!”

간만에 듣는 낯간지러운 수식어에 닉은 멈칫했다. 라이브가 시작된 것이었다. 카메라는 이미 자신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닉!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코넬 쇼의 진행자인 제임스 코넬이 우아하게 웃으면서 눈을 맞춰 왔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가 다수이자 중요한 위치를 대부분 독점한 작금의 연예계에서, 흔치 않게 베타로서 단독 토크 쇼를 진행할 정도로 거물의 위치에 오른 남자였다. 체구도 작고 웃는 낯은 마냥 사람 좋은 중년 아저씨로만 보이지만, 그 실체는 전혀 달랐다.

덧붙여 실은 알파나 오메가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성향에 전형적인 우성 알파인 닉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저 화제성에 따라 섭외가 들어간 것뿐.

그 와중에 이쪽에서는 질문을 거르고 걸러서 알맹이는 다 빼고 쭉정이만 남겨 두었으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얼마나 못마땅했을까? 오늘 일이 터지자 오히려 신이 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닉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더욱 바로 카메라를 돌려 버린 거였다.

물론 닉이 호락호락 당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지만, 걸린 시비를 마냥 당해 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제임스, 그럴 리가요.”

닉은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성에 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그는 제임스가 앉은 메인 스튜디오로 천천히 발길을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발레로 무대에 오른 경험으로, 닉은 어떻게 몸을 쓰면 가장 시선을 모을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는 주변을 압도했다. 반짝반짝하는 효과가 자동으로 겹치는 것만 같다.

코넬은 허를 찌를 작정이었지만, 지금의 닉은 오히려 스튜디오 전체를 사로잡고 있었다.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 또한 그에게 빨려 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입니다. 늘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방금 전 동요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실수 하나 없이 무난하고 완벽한 닉의 대답에 코넬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 닉에게 코넬은 전혀 신경 쓰이는 요소가 아니었다. 그저 어서 빨리 이 토크 쇼를 끝내고, 유신을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인터넷의 쓸데없는 댓글에 괜한 상처를 받은 건 아닌지 너무도 걱정이었다.

“맞다. 약혼자분과 만남의 계기에 대해 아까부터 인터넷상에서 시끄럽던데.”

그리고 마치 닉의 마음속 불안을 읽은 듯 코넬이 승부수를 던졌다.

카메라의 바깥에서는 이건 예상 질문지에 없던 내용이라며 아이잭이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생방송인데 함부로 끊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닉은 올가가 건넨 질문지를 보자마자, 저 능구렁이 코넬이 절대 이대로 할 리 없다고 짐작했었다. 아이잭은 가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이 너무 강하다 못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평소라면 코넬도 이보다는 점잖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조차 닉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지금 유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정확히는 재회죠.”

“재회요?”

생각도 못 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코넬을 향해,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그 전부터 알던 사이였거든요. 제가 배우로 데뷔하기도 전의 일이죠.”

“그렇게 예전에요?”

“네, 제가 지금과 전혀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죠.”

코넬은 전혀 안 믿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닉으로서는 어차피 상관없었다. 적어도 유신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테니까. 부디 사랑하는 오메가에게 이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는 천천히 카메라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보냈다.

“그래서 나의 유샤를 대리모 센터의 파일에서 발견했을 때, 신이 도왔다고, 내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정말 운명이로구나, 하고.”

응?

그때, 뭔가 모를 불길한 감각에 닉은 저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방송 중에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하는 슈퍼스타를 향해 스튜디오의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닉은 더 이상 그런 주변 사람들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 유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

「그래서 나의 유사를 대리모 센터의 파일에서 발견했을 때, 신이 도왔다고, 내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정말 운명이로구나, 하고.」

운명이라니, 개소리를 잘도 한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짜증을 내며 텔레비전을 껐다.

“흥, 쇼를 하는군.”

아까의 휑한 방과는 대조적으로 복잡할 정도로 물건들이 가득 찬 공간이었다. 책과 박스, 넝마에 플라스틱 물병 따위가 집이 터져 나가도록 빼곡히 쌓여 있었다.

여기가 거실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남자가 앉은 의자가 빛바랜 꽃무늬 소파 세트의 일부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의 소형 텔레비전은 중고 가게에서 주워 온 듯 낡아 보였다.

그의 할머니 때부터 살아오던, 이 동네에 흔치 않은 단독 주택이었다. 좁긴 하지만 마당도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죽고 없어, 이 작은 집에는 그 혼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닐 것이다. 남자의 눈동자가 제 발치를 향했다. 거기에는 아까의 커다란 캐리어 가방이 눕혀져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까부터 계속 꿈틀대는 중이었다. 흔들흔들 떨리면서, 읍 읍 하는 가느다란 신음도 흘러나왔다.

“이제 슬슬 일어났나 봐.”

마침 토크쇼도 꺼 버린 참이고,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남자는 끙차 하는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즘 통 운동을 안 했더니 갈수록 몸이 무거운 느낌이다. 그는 삐걱대며 천천히 캐리어의 지퍼를 내리고 크게 펼쳤다.

“안녕, 예쁜이.”

그 안에는 유신이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입은 테이프로 막히고, 손목과 발목은 각각 하나로 모아서 테이프로 둘둘 감긴 채였다. 갑자기 밝아지는 주변에 자극당한 듯, 안경 안쪽 초콜릿색 눈동자에 촉촉이 물기가 어렸다.

“후웁.”

입이 테이프로 막힌 채, 유신은 버둥거렸다.

남자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누운 유신을 아래위로 훑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오메가가 직접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맞아. 폴. 그게 내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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