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1) (11/22)

제2부 제2장 (1)

사실 아이잭은 닉이 성실하게 영화를 찍고 스케줄에 협조하는 이상, 누구와 연애를 하든 딱히 상관없었다. 하지만 해외 스케줄로 출국하기 전날, 닉이 유신과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그 대리모와 결혼할 거라고!? 가볍게 사귄다, 이런 게 아니고?”

“아이도 생겼는데, 이왕이면 안정된 가정을 이루면 좋잖아.”

정작 닉은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태도였다.

“네가 그 오메가에게 푹 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맞아. 완전히 사랑에 빠졌어. 지금이라도 납치해 내 옆에 묶어 두고만 싶어.”

“닉, 그건 범죄야.”

“아쉽게도 그렇지. 범죄만 아니면 진짜 그렇게 했을 텐데 말야. 아이잭, 당신도 자신의 아이를 품은 오메가가 생기면 내 이런 맘을 이해할걸.”

아니, 전혀 이해할 생각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잭은 닉의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 현실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대리모와 결혼이라니, 알려지면 시끄러워지겠어.”

아이잭이 보기에 열애설 정도야 닉에게 딱히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그는 공식적으로 싱글이고, 다른 데이트 상대도 없었다. 애인이 끊긴 적이 없던 만큼 열애설조차 새로운 상대가 생겼다는 의미일 뿐, 달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상대의 임신도, 대리모로 아이를 가지는 것도 둘 다 아무 문제 없었다.

애초에 할리우드는 2세가 생긴다 해서 딱히 흠이 아니었다. 닉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미지 전환을 통해 배역 폭을 넓힐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도 곧 20대에서 벗어나니 슬슬 그럴 시기도 됐다.

대리모 역시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일반적인, 자녀 계획과 불임 대책 중 평범한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었다. 비용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닉에게는 어차피 죄다 푼돈이었다.

하지만 그 열애설의 상대가 이미 임신한 대리모라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금전이 오가는 계약의 상대방과 사귄다니 소문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다. 실제가 그런지 아닌지와 별개로 돈을 매개로 시작한 두 사람의 관계에, 강압적인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는 소리다.

물론 닉 정도 되는 위치에 있으면 처음에야 좀 시끄럽겠지만 영화 몇 편 개봉하다 보면 다들 잊어버릴 게다. 그렇다면 자신이 매니저로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아이잭이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 당신한테 미리 이야기하는 거잖아. 난 나의 유샤가 대리모라는 사실은 노출하지 않을 작정이야.”

알려지면 시끄럽겠다 했더니 아예 알리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너무도 터무니가 없어 아이잭은 저도 모르게 반박부터 해 버렸다.

“그게 가능하겠어? 뻔히 대리모 센터 쪽에 진료 기록이 있는데.”

“안 그래도 센터 쪽에 미리 물어봤는데 진료 기록을 지우는 것도 가능하다던데? 추가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더라.”

“뭐,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 원래 대리모 자체가 신원 기밀 보장이 원칙이잖아.”

하지만 듣고 보니 꽤나 그럴듯해, 아이잭은 저도 모르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것도 그런가?”

“난 불필요한 오해와 뒷말로 유샤가 스트레스받게 하고 싶지 않아. 가뜩이나 임신 중에는 좋은 이야기만 듣게 해도 모자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옆얼굴이 의외로 진지해, 도리어 아이잭 쪽이 감탄해 버렸다.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나 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근데 그럴 거면 굳이 결혼 발표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냥 공개 연애 정도로 해도 되잖아?”

“그렇지 않으면 도망가 버릴 테니까. 못 그러도록 꼭 잡아 놔야지. 괜히 어설프게 고백했다가 아기와 함께 사라져 버리기 전에, 선택지를 다 지워 버리고 어쩔 수 없이 나와 결혼하게 만들어야 해.”

여기서 아이잭은 닉이 유신에게 정식으로 청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고백이라도 제대로 했는지 불분명했다.

“잠깐, 닉. 지금 둘이 합의해서 결혼하는 게 아냐?”

“그런 합의가 가능하다면 제일 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야.”

“잠깐, 잠깐, 지금 둘이 사귀고는 있는 거지? 맨날 데이트도 하고 그러잖아?”

왜인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돌아온 대답은, 적어도 아이잭에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아이잭, 그건 당신이 내 유샤를 못 봐서 그래. 그건 절대 지금 상황에서 좋은 선택지가 아냐. 그렇게 하면 그 녀석은 ‘절대로’ 도망쳐 버릴걸.”

“닉, 지금 난 네 말이 좀 이해가 안 가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라고 넘기기엔 이미 사진이 안 찍혔을 리 없고, 아마 조만간 어느 황색 언론에서든 터트릴 게 분명해. 어차피 그럴 거면 우리 쪽에서도 이용해야지. 실은 우리가 쓸 사진사도 이미 구했어.”

“뭐?!”

갑자기 다른 화제로 튀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아이잭은 당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닉은 아이잭에게 논리적으로 따질 기회를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 내 걱정은 해외 스케줄 때문에 앞으로 2주간 뉴욕에서 떠나 있게 된다는 건데. 다른 대륙에 있으면 아무래도 연락도 늦어질 수밖에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사이 기사가 터질 것 같아서 말야.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해 보다가, 그동안은 아이잭에게 부탁하려고 이렇게 미리 이야기하는 거야.”

“부탁? 대체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우리 둘의 스캔들이 터지면 말이지, 제일 먼저 그 녀석을 여기 내 펜트하우스로 데리고 와 줘. 안 그러면 어디로 가 버릴지 모른단 말야. 아, 혹시 필요하면 나와 결혼해야 할 거라고 운을 좀 띄워도 좋아.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할 테니까, 거기까진 나서지 말고. 그리고 갈 때 올가도 꼭 같이 데려가는 게 좋을걸.”

갑자기 비서인 올가의 이름이 튀어나와 아이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그런 세세한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잭, 나 없는 사이에 기사가 터졌는데 돌아왔을 때 유샤가 여기 없으면, 내가 직접 찾으러 갈 거야. 그를 찾을 때까지 나 일 전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입술만으로 지긋이 웃고 있는 조각 같은 얼굴은 확실히 매력적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닉의 매니저로 지냈던 아이잭은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저렇게 말하면 진심이었다. 반드시 저 말대로 할 거다. 원래 제멋대로에 막무가내고 똘기가 있는 남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건 너무 심했다.

다행스럽게도 닉의 예상은 계속 빗나가, 그가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딱히 걱정할 일은 없지 않았냐고 아이잭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닉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노린 것처럼 기사가 터지자, 더 이상은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유신을 데리러 가는 거였다. 닉이 시킨 대로 올가를 옆에 붙인 채.

덕분에 오는 길에 그녀에게서 귀를 의심할 만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연말에 자신만 빼놓고 만난 적이 있다는데, 이 오메가의 히트 시기가 바로 연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쯤 닉도 휴가라며 며칠간 사라졌었는데.

마침 딱 크리스마스 즈음이라 미처 의심하지 못했다. 다시 보니 누가 봐도 의심쩍은 정황에, 아이잭은 이 일과 관련해 나중에 올가를 추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하튼 닉이 요구한 대로 일단 유신을 펜트하우스까지 데려왔을 때, 아이잭은 거의 성공했다고 겨우 안심했는데.

이제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너무 물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는 그러니까 대리모와 스캔들이 나면 곤란하니까, 그 사실을 지우자는 거로군요. 대리모 센터의 서류는 이미 다 조작해 놨다니 정말 대단해요. 근데 왜 결혼까지 해야 한다는 거죠?”

처음 닉의 은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껏 흥분하던 유신은 이제 훨씬 더 침착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차분해질수록 아이잭은 점점 더 난처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사진이나 프로필에서 느꼈던 이미지와 달랐다. 뭔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추궁당하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대답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아이잭은 핫! 하고 그런 자신에 놀랐다. 우성 알파는 상대방을 강압적으로 찍어 눌러 굴복하게 만들지만, 우성 오메가는 홀려서 알아서 갖다 바치게 만든다더니, 이게 바로 그건 듯했다. 애초에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생각도 없었는데.

유신은 빤히 아이잭을 보고 있었다. 안경 안쪽에서 별을 박은 듯한 초콜릿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가만히 그 눈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줄 수만 있다면 영혼까지 긁어 바치고 싶은 심정이 됐다.

괜히 찔려 아이잭은 큼큼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제길, 왜 아무도 이 우성 오메가가 ‘이렇’다고 자신에게 안 알려 준 거야? 옆에서 그 눈빛을 읽은 올가가 자신은 분명 이야기했다고,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이잭은 올가를 옆에 두는 게 좋을 거라고 닉이 이야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이런 상황이 올 걸 예상한 거다. 베타인 그녀조차 홀리게 만든 오메가를 앞에 두고, 알파인 자신이 평정을 완전한 유지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었겠지.

“아이잭, 아까도 말했지만 괜히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요. 역시나 그냥 당분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제가 어디 숨어 있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러다 보면 여론도 조용해지겠죠. 사람들은 어차피 이런 일 금방 잊으니까, 아이가 공개될 정도로 자랄 때쯤엔 다들…….”

“절대 안 돼!!”

“네?!”

하지만 갑자기 아이잭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유신은 살짝 놀랐다. 정작 아이잭 본인도 그런 제 목소리에 놀라고 있었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바로 도망칠 거라는 닉의 예상이 이렇게까지 들어맞은 점에는 역시 좀 놀랐다. 닉이 생각 이상으로 이 오메가에 대해 잘 읽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만큼, 아이잭은 결국 닉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나불나불 다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닉도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이미 둘의 사진이 찍혔잖나. 그중에 배경이 산부인과인 사진도 있고.”

“그건 그렇죠.”

“이미 아기가 생겼다는 걸 다들 아는데, 네가 사라지고 닉이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닉을 제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를 버린 그런 파렴치한 알파로 만들 셈이야? 결혼하겠다고 하는 편이 책임감 있어 보일 테잖아. 거기서 진짜 결혼하는 건 다른 문제라도 말야.”

영 못마땅해 보이는 유신의 표정에 당황해, 아이잭은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결혼은 안 한다는 건가요?”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던져 보자고. 나머지는 닉이 와서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 그렇고말고! 일단 결혼 발표만 하자고. 그 뒤에 적당히 연애하는 모습을 보여 주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적당한 시기를 봐서 헤어졌다고 발표하면 돼. 결혼한 커플도 그쯤 돼서 헤어지는 건 뭐, 흔히 있는 일이잖아? 결별 이유는, 그래! 무난하게 성격 차가 좋겠군.”

“네에.”

거기서 왜인지 유신이 푹 고개를 숙여, 아이잭은 자신이 또 무슨 말을 잘못했나 싶어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싫으면 물론 거절해도 돼. 근데 이미 기사가 다 퍼졌잖아. 할리우드 스타의 대리모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지는 것보다야, 차라리 잠시 사귄 상대가 되는 쪽이 너도 나을 거고. 그래, 아마 한국에 있는 자네 가족들도 다 알지 않았을까?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니까 말야.”

“아, 가족들.”

아이잭이 보기에 이 부분은 그래도 좀 설득력 있다 싶었다. 하지만 정작 유신은 더더욱 분위기가 어두워져 갈 뿐이었다.

“유신? 저기, 괜찮은 건가?”

아이잭은 자신이 뭔가 못 할 소리를 한 건가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왜 하필 이럴 때 닉은 여기 없는 건지? 왜 하필 기자 놈들은 닉이 없는, 그것도 일요일에 기사를 터트린 건지? (그거야 당연히 아이잭이 힘든 만큼 반대로 그쪽은 더 유리해져서 그런 거지만)

대체 어떻게 이 자리를 피하면 좋을지 아이잭이 고민할 때였다.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아이잭 심슨입니다. 뭐라고요?! 닉에 관한 그 기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 이번 열애설 때문에 걸려 온 전화였다. 딱히 그렇게까지 중요한 전화는 아니었지만, 아이잭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올가에게 알아서 뒷일을 부탁한다고 한껏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바로 다른 방으로 도망, 아니 이동했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나머지는 곧 뉴욕에 도착할 닉이 알아서 하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올가는 유신과 둘이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올가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눈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유신을 보니 왠지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괜찮아요, 유신? 놀랐죠?”

“아니에요. 왠지 이런 일이 생길 거 같긴 했어요.”

하지만 의외로 유신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본인의 말대로 지금의 이 상황 자체가 어느 정도는 그의 예상 범위 내라는 태도였다. 그러고 보면 아이잭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딱히 놀란 기색도 없긴 했다.

뭔가 김빠진 듯한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올가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 스캔들 기사가 악질인 게, 기사를 오늘 자정에 터트렸잖아요.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일요일요.”

“그니까요! 일요일은 쉬어야죠. 덕분에 휴일도 못 쉬고 이렇게 나와서 일하고 있다니까요. 요즘 기자들은 아주 예의가 없어!”

하지만 말하다 보니 점점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기자들에 대한 울분을 터트리는 그녀를 향해, 유신이 여전히 맥 빠진 반응을 보였다.

“네에.”

사실 그는 이 나라 사람들의 지극한 일요일 사랑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제풀에 흥분한 올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다 말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미스터 메드는 한창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오는 중이라고요. 기내 와이파이가 있는 비행기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제공하지 않는 항공편이라서요. 연락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상태죠.”

“일부러 노렸나 보네요. 대응이 늦어지게 해, 기사 노출 시간을 늘려 조회 수를 올리려고.”

“네, 바로 그거예요!”

올가는 너무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유신이 보기에 노리는 바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영리한 방식이었다. 자신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 보니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뿐이다.

“덕분에 열애설이 지금 전 세계 트렌드에 계속 랭크되는 중인데도 우리 측에서는 아직 공식 입장조차 제대로 못 내고 있어요. 확인 중이라는 공지만 나갔을 뿐이죠.”

“니카에게서 확인을 못 받아서요?”

“네, 그놈들이 노리는 대로.”

못마땅하다 못해 불쾌하다는 태도로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사실 아이잭이 말한 대로, 닉 메드쯤 되면 열애설 정도야 그렇게 큰일도 아니죠.”

“역시 그런가요?”

“애인이야 계속 있었고, 그걸로 타격받을 위치도 아니니까요. 영화 개봉에 맞춰 홍보 차원에서 일부러 스캔들을 낼 때도 있었던걸요.”

“진짜 그런 경우가 있긴 하군요.”

“그 경우엔 보통 데이트 사진부터 계획해서 찍어요. 파파라치 사진처럼 보이는 화보 사진으로요. 흠, 이번에도 그러려나? 뭐, 사진사도 따로 있으니.”

사실 유신도 팬으로서 지켜보며, 몇몇 열애설에 대해 왠지 모를 의도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근거 없는 의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다고 확인받으니 왠지 묘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자신 또한 방금 전 그의 소속사 사장으로부터 비슷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이번엔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었지만.

유신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올가가 괜찮다며 그를 위로했다.

“걱정 말아요, 유신. 병원에서 대리모 관련한 서류가 파기됐다고 계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약속된 금액은 문제없이 지급될 거예요.”

“아뇨, 그런 걱정은 딱히 안 하는데요.”

“그리고 차라리 잘됐지 않나요? 이걸 핑계로 둘이 정식으로 사귀어요! 어차피 비밀로 사귀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신이 난 그녀를, 유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예요? 전혀 아닌데요.”

“네, 아니라뇨?”

“아뇨, 우리는 연애하지 않아요. 그런 적 없어요.”

유신은 대답하고 말한 제 쪽이 더 상처받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올가가 대놓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요? 유신은 미스터 메드를 사랑하잖아요? 그래서 둘이 같이 발정기를 보낸 게 아니었어요?”

“네, 정말 사랑해요. 전 십 년도 넘게 그의 팬이었던 걸요.”

선을 긋는 듯한 유신의 말에, 올가는 마지막 단어를 되풀이했다.

“팬.”

“네, 니카도 그 사실을 알아요.”

유신은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오히려 올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째서? 그렇게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밀하면서?!”

“그거야 그냥 제가 니카를 오래 알아서 그런 것뿐이죠. 다시 말하지만 십 년도 넘게 팬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미스터 메드도 당신을 사랑하고요. 그도 요새 당신을 특별한 애칭으로 부르지 않나요?”

‘유샤.’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했다. 어차피 그렇게 불러 줄 사람은 지금 여기에 없는데. 유신은 뱃속 안쪽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애써 모른 척 누르며 일부러 명랑하게 대꾸했다.

“맞아요. 그렇게 부르고 싶어 해요. 나만 본인을 애칭으로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든대요.”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올가의 그 말에 유신은 반사적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뭐가 달라질까?

“알고 있어요.”

그 역시 닉이 자신에게 표시하는 호의를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 모를까? 그렇게 닿아 오는 손길이, 숨결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미소 짓는 입술이.

“알고 있으면서, 왜요?”

“지금 날 사랑한다고 미래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으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의 감정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계속 닉에게 강조해 왔다. 나와 당신은 돈으로 엮인 계약 관계일 뿐이라고. 아이를 낳아 주면 끝나게 되는 거라고.

그를 향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니카와 나의 입장 차를 생각하면 당연하잖아요. 기대했다가 실망할 바에야, 처음부터 포기하는 쪽이 편하다구요.”

“유신, 아닐 거예요.”

“올가, 당신도 제 프로필 보셨으면 아실 텐데, 저 사고 당해서 무용 포기했잖아요. 지금이야 진짜 아무렇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데까지 생각보다 힘들었다니까요.”

솔직히 너무 많이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이, 유신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부분도 있었을 게다.

어쩌면 조금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닉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전해 들어서. 그 말이 너무 달콤해서. 정작 그가 직접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면, 불안해서 이렇게 들뜨지도 못했을 것이다.

올가는 쉽게 답하지 못한 채, 이 얘기를 어디까지 자신의 상사들에게 전달할지를 고민했다.

***

아무래도 사무실이 아니라 대응에 한계가 있었는지, 곧 아이잭은 올가와 함께 다시 나갔다. 이것저것 챙겨 나가는 발길이 꽤나 부산했다.

덧붙여 그는 유신에게 기자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단 며칠이라도, 여기서 지내 달라 했다.

“뭐 더 필요한 게 있나? 말해주면 바로 올가에게 준비시키지.”

나가기 직전, 아이잭이 유신에게 물었다. 그 옆에서 올가가 맡겨 두라는 듯 가슴을 펴 보였다. 하지만 유신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방학이고 알바도 쉬는 중이라서요.”

“나중에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바로 연락하게.”

사실 유신이 지금 제일 원하는 건 닉과 전화하는 거였지만, 어차피 아직 비행기 안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밀리한테도 좀 있다 연락한다 해 놓고 아직 못했다. 또 걱정을 끼쳐 버렸겠구나. 일단 오늘은 못 들어간다고 연락부터 하고.

“하아.”

막상 혼자 남고 보니, 이 펜트하우스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넓은지 다시금 실감이 났다. 새삼스럽게 닉과 자신의 입장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대리모를 했다는 기록을 지웠다느니 어쩌니 이야기하는 거겠지. 지금 그들은 제가 대리모를 했던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어차피 유신도 순수하게 원해서 하게 된 일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술김에 시작해 흐름에 휩쓸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워 버리려는 태도가 유쾌할 리 없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잭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돈과 권력과 인맥을 가진, 저쪽 편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닉도 그렇겠지.

따지고 보면 지금 있는 장소부터가 명백한 그 증거의 하나였다. 거실의 높은 천장은 2층 높이. 터무니없이 넓은 공간. 아마 이 펜트하우스의 현관홀만 해도 유신이 밀리와 사는 작은 월셋집이 그대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 한 달 월세는 얼마나 될까? 자신이 1년 꼬박 벌어서 일주일 치 집세나 낼 수 있을까?

내려다보이는 뉴욕의 경치는 마치 전망대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유신이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단 한 번 올라갔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의 전망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자신은 예약하고도 기다려서 봤던 경치를, 이 사람들은 아무 감흥 없이 매일같이 보고 있었던 거다.

“하아.”

막연한 기분에 유신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커피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여기서 그 냄새까지 더해졌다면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틀림없이 토해 버렸을 거다.

그나저나 가족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솔직히 조금 찔끔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잠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물론 제 부모가 해외 연예인 뉴스까지 챙겨 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누군가가 그들에게 뉴스를 전달해 줄 가능성이 있었다. 끝까지 모르기란 불가능하고, 언제 알게 되느냐의 문제였다.

가족들 모두 유신이 닉 메드의 열성 팬이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사귄다는 소식에는 어쩌면 크게 놀라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리모라면 어떨까?

그의 부모는 가족들과 의논 하나 없이 그런 중요한 일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실망할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대리모를 고려하게 된 데에 별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돈, 그것도 생활비와 대학 등록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괜히 더 자책할 수도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신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침실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마스터 침실과 욕실, 거기에 이어진 드레스 룸까지.

아무래도 실제 생활하는 공간이라서 그럴까. 그곳에는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랑하는 알파의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물론 청소와 세탁은 제대로 되어 있는데도, 아직 남은 잔향이었다.

드레스 룸의 유리문을 보는 유신의 눈빛이 짙어졌다. 다음 순간 유신은 자연스럽게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야말로 닉의 페로몬이 제일 진하게 감도는 공간이었다. 러트 때가 아닌 평상시의 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신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옷가지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마스터 침실은 드레스 룸과 바로 연결된다. 유신은 끌어모은 옷가지들을 킹사이즈도 넘을 듯한 커다란 침대 위에 동그랗게 쌓아 올렸다.

부드러운 니트는 그렇다 치고, 잘 다림질된 셔츠와 양복이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대로 그 한가운데 꼬물꼬물 파고들자 닉의 옷이 마치 고치처럼 유신을 감쌌다.

“아, 좋다.”

그제야 유신은 자신이 오메가 둥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알든 모르든 너무 편해서 여기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옷이 다 세탁이 완료되어 전반적으로 향이 희미한 것만이 아쉬웠다. 세탁 전의 옷들을 깊이 원했다.

마침 밀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신은 반쯤 졸면서 별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유신이 채 한마디도 하기 전에 우다다다 질문이 쏟아졌다.

- 자기야! 메시지 이제 봤어. 괜찮은 거야?! 대체 무슨 소리야? 당분간 집에 안 오고, 니카네 집에서 지낸다니?

유신은 이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바로 후회했다. 설명하려니 매우 난감했기 때문이다.

“음, 그게 그렇게 됐어.”

유신은 그냥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물론 밀리가 그걸로 넘어갈 리 없었다.

- 지금 그게 답이야? 그래서 어디 있는 건데? 진짜로 닉 메드의 집?! 닉이랑 같이 있어?

“니카는 지금 해외 스케줄 끝내고, 뉴욕으로 날아오는 중이라서 아직 없어.”

- 그럼, 누가 널 거기까지 데려갔는데?

“아이잭? 닉의 소속사 사장님.”

유신은 꾸물꾸물 닉의 옷에 더 파고들었다. 아, 위험해. 이거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슬슬 눈이 감기는 게,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 닉의 사장님이 너희 사이를 인정한 거야?

“인정하고 뭐고, 하암.”

- 차라리 잘됐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사귄다고 발표해 버려. 이미 배 속에 두 사람 애기도 있잖아.

“응, 아마 그렇게 될 거 같아.”

아이잭은 교제 말고, 결혼 발표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연신 터지는 하품을 간신히 참으며 유신이 별생각 없이 대답하는데, 밀리가 전화기 반대편에서 빽 소리를 질렀다.

- 뭐, 정말? 진짜 둘이 사귀어?

“아니지, 알잖아. 나랑 니카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 자기야, 지금 졸려서 좀 정신없는 거 같은데, 난 네가 닉 메드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거다.

밀리가 말하는 건 물론 대리모에 대해서다. 유신은 아차 했다.

“맞다. 그랬지.”

- 정신 바짝 차려. 나보다 자기가 더 큰일이네.

“지금 좀 머리가 복잡해서 그래. 졸려서 그런가?”

- 그래, 피곤하긴 하겠다. 일단 한숨 자. 일어나서 밥 잘 챙겨 먹고. 뭐 갖다줄 건 없어?

“아직 모르겠어.”

- 필요하면 부담 가지지 말고 부탁해. 겸사 나도 그 멋지다는 펜트하우스 좀 구경해 보자고, 자기야.

마지막 말은 유신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 덧붙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유신은 웃으며, 보이지 않을 텐데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고마워.”

- 좋아! 이왕 그렇게 된 거 같이 살면서 닉을 완전히 휘어잡아 버렷!

“밀리,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며, 유신은 자신이 지금 닉의 니트 집업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화하면서 저도 모르게 팔을 낀 듯했다. 닉은 늘씬한 타입이었지만 키와 체격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유신은 그의 옷에 폭 감싸여 버렸다.

“하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유신은 닉의 옷가지 사이에 쏙 숨어든 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

공항에 도착하고 핸드폰의 비행기 모드를 끄는 순간, 엄청난 양의 메시지 폭탄이 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 터진 열애설 때문이었다. 자신이 뉴욕에 없는 사이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치사하게 비행기를 타느라 연락이 끊긴 사이 터트린 건 좀 예상 이상이었다. 닉은 기자들 중에도 머리를 쓰는 사람이 없진 않다고, 그 부분만은 인정해 주기로 했다.

메시지의 내용은 대부분 그의 예상 범위 내였지만, 일부 예상 밖인 부분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아이잭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 네 말뜻을 이제 이해했어. 모든 게 다 네 짐작대로였다고. 바로 도망칠 생각부터 하더군. 너의 유샤는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어.

전화를 받자마자 흥분해 소리치는 아이잭을 향해, 닉은 나른하게 대꾸했다.

“봐,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그리고, 아이잭. 그 애칭은 나만 쓰는 거야.”

묘한 소유욕을 눈치채고 아이잭이 핸드폰 맞은편에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는 유샤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닉은 유신이 지금 자신의 펜트하우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만족했다. 하지만 아이잭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데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알겠어, 아이잭.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요점만 확인하고 그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이제부터 바빠질 예정이었다.

유신에게도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쪽은 답장이 없었다. 요즈음 이러면 대부분 자고 있었기에 닉은 굳이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직원을 재촉해 지금 유신이 있다는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서둘러 향했을 뿐이다.

자신이 부른 거지만, 유신이 그 큰 집에 혼자 있다고 상상하니 안타까움에 마음이 급해졌다. 어쨌든 열애설 때문이라도 못해도 며칠은 거기서 지내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같이 있어 줄 수도 없고, 친구인 밀리라도 데려와 둘이 놀게 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방학 중인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인 밀리는 출근을 해야 했다.

별개로 닉은 유신이 어서 그 월셋집에서 이사했으면 싶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보안이 너무 안 좋았다. 몇 번 몸으로 밀면 바로 문이 뜯어질 정도라니.

러트 중이던 당시 자신의 완력이 터무니없었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저 계속 거기서 지내게 하기는 불안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닉은 현재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현재 유신이 무사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솔직히 지난번 히트를 앞뒀을 때가 불안하기는 더 불안했다.

현관을 지나 거실까지 들어가도록 의외로 유신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의 잠을 깨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닉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마스터 침실에 도착하고, 닉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이런, 유샤!”

첫눈에 보이는 것은 침대 위에 동그랗게 쌓인 옷 더미였다. 죄다 제 옷인 것은 슬쩍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옷 더미 안에 포옥 싸인, 새근새근 잠든 하얀 얼굴.

유신이 오메가 둥지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닉의 아이를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꽤 영향을 끼친 듯했다.

묘한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개념은 닉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천지 차이였다. 그것도 자신의 오메가가 제 옷으로 만든 둥지를 보는 감상은 남달랐다.

너무 달게 자서 깨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까이서 보지 않고는 못 참겠다는 마음이 닉의 안에서 교차했다. 솔직히 고민은 순간이었고, 다음 순간 그는 유신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으응.”

닉의 기척을 느낀 건지, 페로몬에 반응했는지, 유신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곧 눈이 반짝 떠지고, 별을 박은 듯한 커다란 초콜릿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니카다.”

제 앞에 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 큰 눈이 반으로 접히며 예쁘게 웃었다. 유신과 닉,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껴안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응, 나야. 집에 돌아왔어, 유샤.”

“어서 와요.”

닉을 껴안은 채 유신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칭얼거렸다. 실물을 눈앞에 두자, 둥지 따위 바로 잊은 듯했다. 닉이 냉큼 그런 제 오메가를 안아 들자, 자연스럽게 뺨과 뺨이 서로 맞닿았다.

동시에 닉은 유신이 자신의 웃옷을 껴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팔 길이 때문에 손목까지 다 가려진 채였다. 거기다 원래도 말랐는데, 아무리 봐도 그새 더 마른 것 같다.

“몸은 괜찮아? 밥은 먹었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유신을 번쩍 들어 옮기면서, 닉은 호들갑스럽게 걱정했다. 이제야 완전히 잠이 깬 유신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니카, 내려 줘요. 나도 걸을 수 있어요.”

“싫어. 내가 떨어지기 싫은걸.”

닉은 일부러 더 꼬옥 껴안았다가, 그를 거실 소파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굳이 여기로 데려온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방금 도착했어요? 안 피곤해요?”

아직 겉옷도 벗지 않은 닉을 향해 유신이 다정하게 물었다. 닉은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유신에게 덮어씌웠다.

“피곤했는데, 널 보니 괜찮아졌어.”

코트의 옷깃에는 방금까지 입고 있던 우성 알파의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코를 묻고 향을 들이켜다,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뺨을 붉혔다.

“니카, 창피한 소리는 그쯤 해요.”

닉을 향한 투덜거림은 반쯤은 ‘창피한’ 짓을 한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닉이 그 부드러운 하얀 뺨에 쪽 입 맞추었다.

“대신 같이 뭐 좀 먹자. 또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아닌데. 요새 진짜 잘 먹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으로 뭘 먹었는데.”

“그게, 저…… 오트밀?”

어딘가 미적지근한 유신의 대답에 닉의 눈썹이 축 처졌다. 저 태도로 봐서는 아마 반 그릇도 안 먹었을 게 뻔했다. 다녀오기 전보다 말라 보이는 게 아무래도 기분 탓이 아니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일단 밥부터 먹여야 할 것 같았다. 닉은 거실에 연결된 간이 주방으로 갔다. 실은 여기로 유신을 데려온 이유기도 했다.

“점심때도 한참 지났는데, 잔다고 아직 못 먹었지?”

손을 씻고 냉장고를 열며, 닉이 다시 물었다.

“아, 괜찮아요.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요. 배도 별로 안 고프고.”

“내가 배고파서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간단한 건 여기 다 있고, 필요하면 주문하면 돼.”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굳이 거절하기도 뭐할 것이다. 하지만 식욕이 없다는 말은 정말인지 유신의 고민은 꽤나 신중하고 길었다.

“음…… 토마토?”

겨우 나온 요청은 솔직히 살짝 당황스러웠다. 딸기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토마토지?

닉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일단 시킨 대로 야채 칸에서 제일 빨갛고 예쁜 토마토를 한 알 꺼냈다. 그리고 깨끗이 씻으면서 잠시 망설인 끝에, 일단 잘게 자르기로 했다. 제 몫으로는 적당히 샌드위치를 골라잡았다.

음료는 주스를 종류별로 꺼냈다. 여태껏 메시지를 주고받은 데에 따르면, 요즘 유신은 향이 강한 커피나 차 종류는 전혀 못 마신다고 했다. 그 와중에 또, 주스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마시고 싶은 게 전혀 달랐다.

유신은 누가 목구멍을 체로 거르고 있다는 표정을 지은 채, 포크로 토마토를 찍어 한 조각씩 입에 넣고 오래도록 씹었다. 닉은 잘게 자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 몫의 샌드위치는 진작에 다 먹었다.

유신의 등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에게 기대진 것이 사랑스러웠다. 아까 둥지를 만들어 자고 있던 것도 그렇고, 임신한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아버지인 알파의 페로몬에 안정감을 느낀다던데 이런 건가 싶었다.

계속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나마 유신이 일할 때의 제 모습을 좋아해 주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당분간 다른 스케줄은 추가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계약한 건들만 일단락되면 계속 같이 있어야지.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유신을 옆에 붙잡아 두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분명 저를 좋아하는 것이 온몸으로 빤한데, 왜 신뢰할 생각은 전혀 없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한눈팔면 도망갈 궁리밖에 없다는 것은 아까 아이잭에게서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신은 겨우 반 먹은 접시는 옆으로 밀어 놓고, 이제 야금야금 주스를 마시는 중이었다. 오늘은 자몽 주스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닉은 그가 최대한 먹을 수 있도록 느긋하게 기다렸다. 솔직히 성격상 꽤나 좀이 쑤셨지만, 말라서 부러질 듯 안쓰러운 팔목을 보고 몰래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오늘 놀랐지, 유샤? 갑자기 기사가 떠서.”

닉의 질문에 유신은 다 마신 잔을 내려놓고,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처음엔 물론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까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겠더라고요. 찍힌 사진만 봐도 그동안 우리가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고, 반성했어요.”

“뭐, 확실히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해.”

유신은 이미 닉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대충 안다는 표정이었다. 닉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잭의 한 말에 대해선데.”

유신은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아이잭의 이름을 듣자 눈가가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닉과 자신의 결혼에 대해 떠올린 것이었다.

“아, 아뇨. 처음엔 좀 당황하긴 했지만. 뭐, 그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아이잭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거 내 생각이라고.”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대리모 센터에서 만난 우리가, 어떻게 갑자기 결혼을…… 저, 니카? 지금 뭐라고?!”

건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가다 말고, 유신은 한 박자 늦게 닉이 한 말을 이해하고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닉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유신을 양팔 안에 가두었다.

“유샤, 난 너와 결혼하고 싶어. 넌 싫어?”

이제 유신은 닉의 아래에서 그에게 거의 끌어안긴 듯한 상태였다. 고개를 들면 곧장 닉과 시선이 마주칠 게 뻔했다. 당황한 듯 유신의 시선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대리모와 계약자 관계일 뿐이고.”

“뭐 어때? 만난 계기야 그렇긴 하지만, 발정기도 같이 보낸 사이잖아. 이미 아기도 생겼고, 어차피 기사도 났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거야 발정기에 옆에 있다 본능에 이끌려서 그렇게 된 거고요. 뭣보다 당신은 할리우드 슈퍼스타고, 난 그냥 대학생이라 입장도 다른데.”

“그래, 물론 네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돼, 유샤.”

닉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정말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유신은 왜인지 그의 마지막 말에 제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곤란한 듯 크게 떠진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내가, 싫을 리 없잖아요.”

싫을 리 없었다. 싫지 않았다.

사실 갑자기 닉의 아기를 낳으라고, 처음 대리모가 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싫지는 않았다. 닉과 관련된 일을 자신이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몰랐다.

“니카, 진짜로 결혼하자는 건 아닌 게 맞죠?”

“응?”

“아이잭이 그랬어요. 아이도 생겼으니 결혼한다고 발표하는 쪽이 당신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 그 뒤에 적당히 연애하는 모습을 보여 주다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적당히 핑계를 대고 헤어졌다고 발표하면 된다고요.”

유신은 여전히 닉과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긴 속눈썹이 안경 아래에서 쉴 새 없이 깜박이는 것이 애처로우면서도 예쁘다.

닉은 아이잭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저걸로 유신이 쉽게 납득할 수 있다면 나쁘진 않다고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지금은 진짜로 결혼하자고 해 봤자, 오히려 놀라 도망갈 것이 뻔했다. 거기다 무엇보다 지금 제 아래에서 고민하는 유신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물론이지.”

‘일단은’이라는 단어를 닉은 마음속에만 묻어 두었다. 대신 그는 양팔로 유신을 끌어안은 채, 예쁘게 뻗은 콧날에 살짝 입 맞추었다. 뭘 상상했는지 유신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깃털처럼 콧대에 뭔가 닿는 느낌에 놀라 파르작 몸을 떨었다.

“그럼 결혼하기로 하는 거다.”

“하는 척이요.”

“그래,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내 옆에 있는 거야, 나의 유샤.”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유신이 반짝 눈을 뜨고 닉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닉이 빙글빙글 미소 짓고 있었다.

***

열애설이 터진 바로 다음 날이 유신의 산부인과 정기 검진일이었다. 이 난리 통에 유신은 당연히 날짜를 미룰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기 검진에는 당연히 나도 가야지! 왜 내가 오늘 맞춰서 부랴부랴 귀국했는데.”

왜인지 당연히 자신도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닉을 말리며 유신이 난감해했다.

“말도 안 돼요. 동네방네 당신이 애 아빠라고 소문낼 일 있어요? 그냥 예약을 며칠 미뤘다가, 나중에 상황 봐서 나 혼자 살짝 다녀올게요.”

“왜? 난 오히려 소문내고 싶은 쪽인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구요. 봐요, 아이잭! 니카가 억지를 부려요. 좀 같이 말려 주세요.”

하지만 아이잭은 유신의 도움 요청을 듣고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기회라며 부추겼다.

“왜? 둘이 같이 가는 거 나도 괜찮은 거 같구만.”

“네에?!”

“역시, 아이잭도 내 의견에 동의할 줄 알았어.”

물론 그들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사진이요?”

“그래, 유신. 안 그래도 열애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데이트 사진을 풀 생각이었거든.”

“데이트요? 누구랑 누가요?”

“당연히 너와 닉이지. 마침 방문 장소가 산부인과라니, 더할 나위 없지!”

유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닉과의 동행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미 협찬사와 이야기가 끝났다고 했다. 무슨 소리냐고 유신이 되묻기도 전에, 유명 명품 브랜드 C사의 직원들이 몇 개나 되는 이동식 행거를 밀며 등장했다. 행거에 걸려 있는 옷들은 죄다 이번 시즌의 신상품이었다.

“저게 뭐예요?”

“내일 입을 의상.”

당황하는 유신을 향해 아이잭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와, 슈퍼스타는 사진을 찍을 때는 데이트 때 저런 명품으로 차려입어야 하는구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슬쩍 자리를 피하려는 유신을 아이잭이 붙들었다.

“어딜 가? 네가 입을 옷을 골라야지.”

놀랍게도 유신도 거기 포함이었다. 익숙하게 고갯짓 몇 번으로 작업을 끝낸 닉과 달리, 처음인 유신은 잔뜩 휘둘리고 말았다. 특히 닉이 아니라, 유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가 제일 열성적이었다.

“하, 피곤해.”

겨우 선택이 끝나고 직원들이 우르르 돌아가자, 유신은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듯이 지쳐 소파로 늘어져 버렸다. 덧붙여 아이잭은 추가 광고와 관련해 브랜드 담당자와 의논해야 한다며 닉을 끌고 간 참이었다.

“놀랐죠? 그래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요, 올가. 익숙해질 만큼 반복할 일도 없을 텐데요, 뭘.”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올가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유신은 괜히 불안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비용 건이요.”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한마디에, 유신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설마 저 옷값을 제가 지불해야 하는 건가요?”

가격표는 없지만, 셔츠 한 장만 해도 자신이 평소 사는 옷과 0의 단위가 다를 것이 뻔했다. 어쩌면 그 0은 두 개 이상. 아니, 어쩌면 세 개일지도.

“설마요. 당신은 그냥 얌전히 입었다가, 그대로 반납하면 돼요.”

그건 설마 얼룩이라도 만들면 자신이 배상해야 한다는 걸까? 올가의 괜찮다는 설명에도, 유신의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그녀는 세세한 건 신경 쓰지 않으며, 대신 그에게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한 비용이란, 당신이 이번 결혼과 관련하여 받게 될 금액에 대한 거예요. 이전의 대리모 계약과 별개로요.”

그 한마디에 유신의 표정이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굳었다.

“올가, 전 돈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협찬과 간접 광고로 받게 될 돈은 저희로서도 드릴 수밖에 없는걸요.”

“협찬과 간접 광고요?”

하지만 생각도 못 한 단어에 유신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올가가 흥분했다.

“그럼요. 방금 C사에서 왜 일부러 나와 줬겠어요? 미스터 닉 메드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고요! 열애설 인정 후 처음으로 공개되는 로맨틱한 데이트 파파라치에서 그가 입은 의상의 광고 효과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말하는 올가는 어딘가 뿌듯해 보였다. 유신도 닉의 열성 팬답게 광고 효과에 대해서는 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공식 석상은 물론, SNS 셀카에 입은 의상 정보도 다 공유되고 있긴 하죠.”

근데 ‘로맨틱한 데이트 파파라치’라니? 데이트라는 단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맨틱이라. 산부인과 정기 검진에 가는 것뿐인데? 그리고 사진이란 게 파파라치였어?

“그리고 아세요? 광고 효과는 그 열애 상대도 꽤나 높다구요.”

거기서 올가가 자신을 가리켜, 유신은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랐다.

“아, 설마, 저요?”

“그럼요, 유신. 아니면 누구겠어요.”

해당 브랜드의 옷을 입기만 하면 준다는 금액은 유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일반인의 감각으로서는 당최 이해하기 힘들었다. 뭐, 올가의 말대로 그런 브랜드들이 바보도 아니고, 다 줄만 해서 주는 거겠지만 말이지.

“어차피 옷은 입어야 하고, 브랜드에서 나서서 돈을 준다는데, 굳이 공짜로 해 줄 필요는 없잖아요?”

올가의 설명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유신은 이번에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대로 어차피 할 건데 굳이 계속 거부하고 있을 이유가 없긴 했다.

“여하튼 의상은 정해졌으니, 내일은 이제 사진사만 제대로 일을 해 주면 되겠네요.”

“올가, 설마 진짜 파파라치를 고용한 건 아니죠?”

“아뇨, 고용했어요.”

“그래도 돼요?”

“닉이 그 사람의 사진을 마음에 들어 했어요. 인물 사진을 잘 찍는다나?”

유신은 놀라다 말고 바로 납득했다.

“아, 닉이 또 멋대로 했군요.”

“실력은 괜찮은 거 같더라고요. 이름이 무슨 옛날 대통령 이름 중 하나였는데, 뭐였더라.”

“케네디? 루스벨트?”

“둘 다 아니에요. 아, 그 사진사는 당신이 닉과 대리모 사이로 만난 걸 모르고 진짜 사귀는 줄로만 알고 있으니까요. 이야기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올가의 당부에, 유신은 잠시 망설이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최고급 대형 세단은 보란 듯이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주차장에 섰다. 아니, 오늘의 목적지는 대리모 센터가 아니라 산부인과 쪽이다. 주로 사용하는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미리 비워 둔 정문 앞 야외 주차장이었다.

이건 뭐, 마치 대놓고 사진을 찍으라는 것 같잖아. 유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닉이 열어 준 조수석 문으로 내렸다.

피부에 느껴지는 각 맞춰 다림질된 천의 사각사각한 감촉이 괜히 낯설었다. 늘 헐렁하게 껴입던 평소와 달리 사이즈가 꼭 맞았다.

“유샤, 너 오늘 아주 멋져.”

닉이 유신을 에스코트하듯 나란히 서며 속삭였다. 유신은 대답 대신 살짝 눈을 흘겼다.

지금 그는 스타일리스트가 어제 미리 골라 준 대로 입고 있었다. 코트에서부터 구두와 양말까지 죄다, C사의 이번 시즌 신제품을 협찬받은 것이었다. 완전 정장은 아니고 세련된 세미 캐주얼이었다.

참고로 닉도 같은 브랜드다. 단, 유신은 그대로 반납해야 했지만, 닉은 아예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늘씬하게 팔다리가 긴 그의 사이즈에 맞춰 수선이 완료된 상태였다.

항상 입던 빨간색 체크무늬 코트가 아니라 그런지 유신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는 유신에게 푸른색이나 남색 계열을 입히고 싶어 했다. 그로서는 절대 고를 일 없는 색 조합이었다.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유신은 빨간색 옷을 좋아했다. 파랑은 닉의 눈동자 색이고 (정확히는 청록색이지만), 옷은 따뜻해 보이는 색이 좋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냥 취향이다.

고집을 피우기에는 자신의 센스가 딱히 대단찮다는 자각은 있어 시킨 대로 입었지만, 영 어색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올해 유행이 몸에 붙지 않는 스타일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옷차림 중 단 한 가지,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세트로 맞춰 쓴 모자였다.

동그란 술이 달린 전통적인 형태의 털모자다. 얼마 전 유신은 닉에게 생일 선물로 제 모자와 세트인 같은 모자를 선물했다. 유신이 직접 써 보고, 나름 무난하게 괜찮다고 생각해 일부러 색만 다른 같은 걸로 샀었다.

하지만 비싼 옷 사이에 놓고 보니 확실히 싼 티가 나서 살짝 부끄러웠다. 그러나 닉은 유샤의 선물이니까 오늘 꼭 같이 쓰고 가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스타일리스트도 좋은 생각이라고 부추겼다.

나중 일이지만, 이후 그 모자는 유신이 손수 떠서 닉에게 선물한 모자로 SNS에서 한동안 화제가 된다. 물론 곧 기성품이라는 진실이 밝혀지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관심에서 멀어져 잘못 안 채로 넘어간 사람이 더 많았다.

닉은 자신이 선물한 팔찌도 하자고 했지만, 유신이 그건 단칼에 거절했다.

“집에 두고 와서 안 돼요. 난 그때 도서관 가는 길이었다고요.”

도서관 가는 길에 값비싼 다이아몬드 팔찌를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모자야 늘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추우면 쓰곤 했지만.

“부탁해서 집에서 가져오면 되지.”

“병원에서 액세서리하고 있으면 불편해요.”

닉은 아쉬워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예약 시간에 딱 맞춰 진료실에 도착한 유신을 맞은 사람은, 물론 담당 의사인 매튜와 담당 간호사인 데이브였다. 둘 다 이미 병원 쪽에서 무슨 이야기를 미리 들었는지, 유신의 뒤에 찰싹 붙은 닉을 보고도 눈썹 한 올도 들썩이지 않았다.

“자아, 이제 슬슬 5, 6주 차지? 오늘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 심장 소리를 들려주려나?”

매튜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유신을 간이침대에 눕도록 했다.

“아주 건강한 것 같군. 아무 문제 없이 잘 크고 있어.”

유신도 닉도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는 감격해 버렸다.

콩딱. 콩딱.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꼭 껴안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냥 동그란 점 같은데 저게 아기란다. 그 모습에 매튜가 흐뭇해했다.

“그래, 아직은 잘 모르겠지?”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있나, 유신. 처음이니 당연히 모르지.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 가면 돼. 뭐 불편한 건 없고?”

“특별히 없어요.”

“있지, 사람이 밥을 영 못 먹는데 괜찮은 건가? 어제도 밥 먹자니까 토마토랑 주스만 먹었다고. 그것도 토마토는 반 개를 겨우! 벌써 입덧할 시기는 아니지 않나?”

아무 문제 없다는 유신을 두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닉이 끼어들었다.

지난번과 비교해 말투가 한결 편안해진 것은 아마도 옆에 있는 저 오메가 때문이겠지. 매튜로서는 이쪽이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져 딱히 불만은 없었다.

“슬슬 그럴 때이긴 합니다.”

“아, 그래? 벌써?”

매튜는 닉에게 빙그레 웃어 주고는, 유신에게 추가로 설명했다.

“억지로 먹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영양 보충은 중요하니까 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잘 챙겨 먹도록 해. 과식도 안 좋지만…… 그럴 염려는 없을 거 같고. 너무 심하면 약도 있으니까, 참지 말고 나한테 연락하고.”

“네, 알겠습니다.”

유신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닉에게 예전에도 지금보다 딱히 많이 먹지는 않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요즘 들어 그나마 식욕이 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살짝 반성했다.

“자아, 이건 누굴 주면 될까?”

유신은 옷을 제대로 입는데 제 옷이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말았다. 그사이 매튜가 출력한 아직 콩알 같은 아기의 초음파 사진은 냉큼 닉이 챙겼다.

그나저나 여기 제 아랫배 안에 심장이 하나 더 뛰고 있다니 유신은 그저 신기했다. 저 동그란 점이 팔다리가 생기고 점점 사람이 된다니, 정말 인체의 신비다.

별다른 이상이 없어 진료는 그걸로 끝이었다.

“2주나 기다린 거치고 간단하네. 그렇지, 유샤?”

“니카, 이상이 없는 게 제일 좋은 거예요.”

닉과 유신이 사이좋게 아옹다옹하며 막 진료실을 나서려는 때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매튜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오, 이거 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의 오메가가 유신이었을 줄이야.”

하긴, 우성 오메가의 상대가 아무나일 리 없다. 생각해 보면 힌트는 충분했는데 깨닫는 게 늦었다며, 매튜가 웅얼거릴 때였다.

혼잣말을 할 작정이었는데, 의외로 목소리가 컸던 걸까? 아니면 목소리는 충분히 작았지만, 그저 유신이 그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을 뿐일 수도 있다.

“니콜라이라니! 러시아에서의 니카를 아시나요?”

닉의 본명을 들은 유신이 눈을 빛냈다. 예상치 못한 열렬한 반응에 매튜는 멈칫했지만, 곧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유럽에서 지낼 때 잠깐 인연이 있었지. 벌써 이십 년이 다 돼 가는 이야기야.”

“그럼, 어릴 때 니카를 보신 거네요.”

“당시만 해도 발레 댄서를 희망하던 꽃 같던 미소년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커다랗게 성장해서 미국에서 배우를 하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야.”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간만에 발레를 하던 시절의 닉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유신이 저도 모르게 흥분해 대답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기 직전, 그런 둘 사이로 닉이 슥 끼어들었다.

“둘 다, 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그쯤 이야기하지. 쑥스러우니까.”

하지만 닉의 표정은 쑥스럽다는 말과 전혀 맞지 않았다. 유신의 뒤에서 더 이야기할 생각 따위 없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매튜는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아기 아빠가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걸.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듣도록 해, 유신.”

“하지만 물어봐도 이야기 안 해 줄 걸요.”

유신이 아쉬워하며 돌아보자, 닉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오만하고 성질을 감출 생각도 없는 알파가, 제가 마음에 둔 오메가를 향해서만 얌전을 떨고 있는 상황이 노골적이었다. 손바닥을 뒤집듯 극명한 변화는 그래서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왜? 난 언제든 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럼 매튜 선생님하고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해 줘요.”

“글쎄, 그건 좀 있다 나중에.”

“봐요, 이럴 줄 알았어.”

두 사람은 알콩달콩 끌어안은 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진료실을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매튜가 중얼거렸다.

“뭐, 적어도 도련님 혼자 푹 빠진 건 아니니 상관없으려나? 혼자 열 올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더니.”

하지만 매튜는 다 눈치채고서도 그 사실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기로 했다.

솔직히 그의 나이쯤 되면 웬만한 건 다 귀엽게 보이는 법이다. 대신 그는 재빨리 유신의 차트에 오늘 진료에 대해 입력했다.

***

“고마워요, 데이브.”

“뭘, 앞으로도 계속 볼 거잖아. 잘 부탁해.”

간호사와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는 유신을 닉이 한 발 떨어진 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예쁘게 차려입고 저렇게 웃고 있으니 더더욱 신경 쓰인다.

유신은 빈틈이 없는 거 같으면서도, 또 동시에 빈틈이 철철 넘쳤다. 무엇보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긴 했지만, 애초에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따랐다. 물론 닉은 유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성인 한 명 정도는 거뜬히 바닥으로 패대기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그런 것과는 별개였다.

데이브는 지난번 닉이 여기 센터에 들렀을 때 응대해 준 간호사기도 했다. 베타라서 위협이 잘 통하지 않기도 하고 유신이 싫어할까 봐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만약 알파였다면 진작에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사탕 받았어요. 먹을래요?”

이야기가 끝났는지 유신이 닉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웃으며 노랑과 흰색의 줄무늬 포장지에 싸인 사탕 몇 개를 보여 주었다. 닉은 유신이 남에게 받은 물건 따위, 솔직히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가만 보면 사람들은 항상 저한테 뭔가 먹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뭐어.”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닉도 ‘유신에게 뭔가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 포함이었다.

“아, 무슨 이야길 했냐면요. 데이브가 갑자기 모르는 척해서 좀 놀랐는데, 그냥 조심한 것뿐이래요. 옷이 멋지다고도 칭찬했어요.”

“그런 건 일일이 안 전달해도 돼.”

닉은 뚱하게 대답했다. 예쁜 건 자신도 눈이 있으니 봐서 잘 알고 있다.

사실 유신은 닉 덕분에 입은 옷을 칭찬받았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요, 원래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절대 이야기가 새어 나갈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더라고요. 대단하죠?”

“그게 일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가?”

유신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로 사탕을 혀에서 도르르 굴리다,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댔다.

“이거 레몬 맛이에요.”

평범하게 입 안에서 사탕을 녹이며 먹는 별거 아닌 행동이 이상하게 야해, 닉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남자가 준 사탕을 저리 먹는 것이 괜히 짜증 났다.

물론 유신은 아무 문제 없고, 제 쪽이 지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닉도 모르지 않았다.

“유샤, 그냥 나도 하나 줘.”

저걸 오래 가지고 있는 것도 싫으니, 빨리 먹어 치워서 없애 버리자.

“봐요, 어차피 먹을 거면서 왜 아니라고 했어요. 니카, 실은 레몬 좋아하죠?”

“별로 안 좋아해.”

네 페로몬이 떠올라서 좋아한다는 말은 왠지 쑥스러워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다.

“에이, 좋아하면서.”

유신은 웃으면서 닉에게도 사탕을 하나 건넸다. 우습게도 새콤달콤한 사탕을 빨고 있으려니, 사탕을 달라고 했던 목적과 다르게 짜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왜 그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뭔가 신경 쓰이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유신의 모습에 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뇨, 안내 데스크가.”

유신은 오늘도 폴과 마주치면 한마디 해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여기 층에서 일하지는 않지만, 갑자기 불쑥 나타나도 놀랍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여기까지 오도록 그의 빨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폴은 자신이 죠앤과 함께 있는 것을 봤으니, 대리모로 고용되었던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그도 여기 직원인 만큼 회사에서 입막음 당했으려나.

“아니에요. 뭘 좀 헷갈렸어요. 이제 괜찮아요.”

그런 거면 차라리 이젠 괜찮을지도 몰라. 유신은 고개를 저으며 방긋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돌아가는 길은 코앞에 있는 주차장을 일부러 빙 둘러 갔다. 병원 건물을 둘러싸고 작은 오솔길이 산책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봄이나 여름이면 꽤 분위기가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겨울 특유의 앙상한 나뭇가지 탓에 오히려 스산했다. 실은 이 중간에서 사진을 찍을 예정이었다.

오솔길에 들어서자마자, 닉이 유신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짧게 입술에 닿는 깃털 같은 입맞춤이었다. 부드럽게 턱 끝을 스치는 손길이 대놓고 달았다.

유신은 미간에 작게 주름을 만들며, 자신에게 추근대는 알파를 살짝 밀어 냈다.

“그만둬요, 니카. 이미 촬영을 시작했을 거라고요.”

“그래서 하는 거야. 보여 줘야지.”

하지만 닉의 손은 되레 유신의 가는 허리를 감아 왔다. 촬영이 아니더라도 그는 원래 이런 행동을 즐겼다. 평소라면 기꺼이 마주 껴안아 주던 유신이 괜히 의식해 딱딱하게 구는 바람에, 도리어 심통이 났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유신이 밀어 내는 팔에 힘은 들어 있지 않았다. 살짝 숙인 목덜미와 귓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닉이 허리를 좀 더 안아 오자, 유신은 포기했다며 닉의 어깨에 제 뺨을 기댔다.

실은 유신도 사진사를 이미 만났다. 어제 닉이 연락을 하자마자, 허겁지겁 나타났었다.

‘안녕하십니까? 채드 링컨입니다.’

오메가라고 미리 듣지 못했으면 분명 베타로 여겼을 것이다. 열성이라 페로몬이 거의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뒷골목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오메가의 이미지와 영 동떨어져 있었다.

유신은 그를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싶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헷갈린 거겠지. 꽤 흔한 인상이고.

아이잭이 좀 더 자세한 소개를 했다.

‘링컨은 원래는 파파라치지만, 지금은 우리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한 카메라맨이야. 앞으로 우리를 위해, 각종 사진을 촬영해 줄 예정이야.’

‘맡겨만 두십쇼! 그걸 위해 많은 돈을 받았으니,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해 드려야죠.’

유신은 저 ‘각종 사진’이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내일 자신의 파파라치 사진을 찍을 사진사와 이렇게 악수를 하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안녕하세요, 유신 리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링컨은 유신을 보고 뺨을 붉혔다. 알파도 아니니 페로몬의 영향은 아닐 거고.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유신은 이 열성 오메가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사진사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가 처음 자신을 보고서 살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 지금 긴장하고 있는 줄도 당연히 몰랐다.

‘닉이 당신 사진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기대할게요.’

‘넵, 최선을 다하겠슴다.’

‘사진이 별로였으면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카메라를 부숴 버렸을걸. 지난번에 병원에서 말이야.’

닉이 빈정대며 끼어들었다. 지금은 손을 뗐지만, 악수가 은근이 길어 거슬리던 참이었다. 카메라맨이 오메가가 아니었으면 바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에 유신은 자신이 링컨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알겠다! 그때 병원에서 나랑 부딪쳤던.’

‘하하, 기억하시네요.’

맞는지 링컨이 쑥스러워했다. 유신은 이제야 궁금하던 부분이 해소되어 속이 시원해졌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사진이나 제대로 찍어.’

‘넵, 미스터 메드! 맡겨만 두십쇼. 두 분 다 피사체가 훌륭해서 제 의욕이 아주 샘솟아요.’

어제 링컨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실제는 어떨까?

분명 지금이면 한창 촬영 중일 것이다. 과연 잘 찍고 있을지, 그 카메라에 비친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일단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유신은 갑자기 불안해 견딜 수가 없어졌다.

지금 자신은 입고 있는 옷도 빌린 거고, 상황 자체도 일부러 만든 것에 가까웠다.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사진에 어색하게 드러나 버리면 어떡하지? 유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불편해졌다.

허리를 감은 닉의 팔은 여전히 단단히 자신을 껴안은 채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신은 예술가가 인생을 바친 조각 같은 섬세한 이목구비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역시, 이 얼굴이 좋아.

“이왕 찍힌다면 이런 게 더 좋겠죠?”

그는 닉의 목에 팔을 감으며 좀 더 진하게 키스를 했다.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고 가볍게 빨자, 안쪽에서 맞이하듯 혀가 얽혔다. 그렇게 잠시 진득하게 서로의 타액을 섞다, 닉이 문득 고개를 뒤로 뺐다.

“유샤, 키스에서 레몬 맛이 나.”

“둘 다 방금 레몬 맛 사탕을 먹었으니 당연하죠.”

“다른 사람이 네게 준 거라서 싫어.”

“무슨 이상한 소릴.”

유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둘은 다시 한번 더 입 맞추었다. 이번 키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닉 메드는 열애설을 인정했고, 그가 다정한 모습으로 열애설의 상대인 우성 오메가와 함께 산부인과를 방문하는 파파라치 사진이 떴다. 모든 것이 닉과 소속사가 설계한 대로였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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