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성 오메가의 개인적인 우울 2권
제3장 (2)
유신은 지금 커다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는 금요일 저녁, 닉과의 약속에 무엇을 입고 갈 것인가.
“어째 변변한 옷이 하나도 없네.”
그는 침대 위로 늘어놓은 옷가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입고 다니는 얼룩덜룩한 코트, 비슷비슷한 빨간 스웨터 몇 장, 빨간 카디건 몇 장, 조금 짙은 빨간색 스웨터. 거기에 어두운 남색 스웨터와, 꼬임이 들어간 회색 롱 니트 카디건. 여러 가지 색의 체크무늬 셔츠 따위.
모아 놓고 보니 의도는 아니지만, 새삼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디자인이 촌스러운 건 그렇다 치고, 죄다 꽤나 낡았다. 요 몇 년간 옷을 산 기억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떡하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로 지나치게 부드러운 앞머리가 사르르 이마 위에서 뒤엉켰다. 집에서만 입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는 그의 가느다란 목선을 강조했다. 그 위에 추위를 막기 위해 빨간색 체크무늬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것도 애용한 지 벌써 몇 년째라 팔꿈치가 동그랗게 닳았지만, 집에서만 입는 건데 뭐 어때 하고 그냥 입고 있었다. 어쨌든 밖에서 남에게 보일 만한 옷은 아니라는 의미다.
풍덩한 옷에 길고 마른 몸이 감싸인 듯한 모양새가 꽤나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데가 있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 딱히 자각은 없었다.
“역시 옷을 사야 하나.”
돈은 있었다. 대리모 관련 계약금이었다. 닉에게 받은 돈으로 닉을 만날 때 입을 옷을 사다니 어딘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데이트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닉은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비공식 프라이빗 팬 미팅 첫째 줄에 참석하는 일개 팬의 마음이랄까. 자신의 우상인 슈퍼스타와 비등하게 보이겠다는 목표 따위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너무 허접하게 하고 나갔다가 슈퍼스타에게 창피를 주면 안 된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말했듯 요 몇 년간 옷을 거의 안 사 버릇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제 어디 가서 옷을 사야 하는지도, 어떻게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산 거라고는 낡아서 버려야 하는 속옷과 양말을 추가로 구매한 것뿐이었다. 거기에 비슷하게 받쳐 입는 용도의 티셔츠 몇 개. 모두 대형 마트에서 구매했다.
물론 마트에서 겉옷도 판다. 하지만 거기서 산다면 지금 여기 있는 옷을 입고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정도는, 아무리 유신이라도 알았다.
그렇게 그가 이리저리 옷을 대 보며, 한창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유신!”
밀리가 노크를 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었다. 원래라면 좀 더 기다렸다가 대답을 확인했을 텐데, 왜인지 오늘은 거의 동시였다.
분명 일부러였다. 왜냐하면 방 안의 광경이 꽤나 의외일 텐데도, 놀라기보다 눈썹만 슬쩍 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 밀리! 이건, 그러니까…… 오해야.”
무엇보다 방 주인은 손에 옷을 든 채 거울 앞에 서 있고, 낡고 좁은 방의 침대 위로 이리저리 널려 있는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이라니.
유신의 부정에도 밀리의 동그란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데이트지?”
허둥지둥 옷들을 그러모아 옷장으로 욱여넣던 유신의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핵심을 지적당한 탓이었다.
“아냐, 우린 그냥 밥이나 한 끼.”
“자기야, 역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게 맞았구나. 같이 밥 먹으러 가기로 한 거야?”
이쯤 되면 계속 둘러대는 것도 의미 없다. 유신은 포기하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응, 금요일 저녁에.”
“와, 그럼 드디어 미인계를 써서 닉 메드를 잡아먹는 데 성공한 거야?”
“아직 아니야!”
하지만 밀리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에 당황해 큰 소리로 부정했다가, 유신은 제풀에 당황했다.
“어, 아니, 그게.”
이러면 자기 입으로 고백한 거나 다름없다. 당황하는 닉을 향해, 밀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일요일 저녁에 카페 루이에서 본 남자가 닉 메드 본인이 맞았어. 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남!”
밀리의 평소 행동반경을 생각했을 때, 그날 그의 눈에 띈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주말 저녁에는 그 근방을 쏘다니곤 했으니까.
“첨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을 리 없고 옷도 이상하길래 아주 닮은 다른 사람인가 했는데, 유신 자기가 웃는 얼굴이 너무 진심이길래 혹시나 했지.”
“하하, 그랬구나.”
하지만 닉의 정체를 정확히 들킨 데는 아무래도 제 탓이 큰 것 같았다. 유신은 좀 더 신중해야겠다고 내심 반성했다.
“지인짜 잘 생겼더라! 화면발 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물도 장난 아니야.”
“그치? 잘생겼지!”
그러나 닉의 외모에 대한 칭찬에 바로 넘어가, 상황도 잊고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아아, 자신은 바보다. 한 박자 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다행히 밀리는 세세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애초에 그 사람이 왜 뉴욕에 있어? 원래 LA에 사는 거 아니었어? 할리우드에?”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럼 어쩌다 밥은 같이 먹게 됐는데?”
“나랑 니카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고장이 나서 내가 도와줬거든. 그 보답으로 니카가 밥 사겠다고.”
“와, 자기야! 그게 뭐야? 진짜 영화처럼 로맨틱하다!”
왜인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밀리는 감탄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대리모에 대한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유신은 그저 답답했다.
“미안해, 밀리. 내가 지금은 자세히 이야기 못하지만, 나중에 괜찮아지게 되면 다 이야기해 줄게.”
“알겠어. 역시 뭔가 사정이 있는 거지? 진짜 나중 되면 다 이야기해 줄 거야?”
“그럴 수 있게 되는 대로, 바로.”
“그럼 기다려 줄게.”
밀리는 내심 무언가 짐작하고 있었던지, 어설픈 설명에도 의외로 쉽게 납득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유신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자기야, 설마 지난번 히트 때 닉 메드랑 같이 있었어?”
“그건 진짜 아니야.”
얼굴이 새빨개져서 유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난번 히트는 확실히 혼자 있었다. 혼자서, 닉의 정자로 인공 수정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데이트를 한다고?”
“진짜 데이트 아니야. 그냥 어쩌다 도와준 보답으로 밥 먹는 것뿐이라고.”
“후후, 알았어. 아직은 데이트 아니지.”
밀리는 새삼 알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다시 설명하려다 대리모 이야기로 연결되면 더 큰 일이었다. 유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발 물러섰다.
더 큰 일은 밀리가 자꾸 로맨틱하다고 흥분할 때마다, 제 심장도 같은 이유로 들뜬다는 점이었지만. 유신은 휩쓸리면 안 된다고,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자기야, 근데 이 넝마들은 뭐야?”
그때 밀리가 침대 위에 늘어놓은 유신의 옷을 보고 도끼눈을 떴다.
“넝마라니. 내 옷인데.”
“설마 이걸 닉 메드랑 데이트할 때 입고 간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나도 옷을 새로 사야 하나…….”
밀리는 유신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갔다.
“아, 이건 안 돼. 이것도, 이것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리고는 유신의 옷을 차례로 휙휙 던져 버렸다. 곧 침대 위에는 이불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럼 난 대체 뭘 입고 가라고, 밀리?”
갑자기 밀리가 방에서 뛰쳐나갔다. 뭘 하나 했더니, 금세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꽤 화려한 흰색 셔츠였다.
“이거 빌려줄게, 자기야.”
“이거 네가 이번에 새로 산 아끼는 옷이잖아, 밀리. 비싼 건데 세일 때 겨우 샀다고.”
“맞아. 데이트하면 입으려고 계속 넣어 뒀는데, 요새 한동안 나한테 그럴 만한 일이 없어서 말야.”
하지만 유신이 친구의 너그러움에 감동할 틈도 없이, 밀리는 재빨리 유신을 갈아입혔다.
“좀 작은 거 같은데.”
옷은 예쁘지만, 지나치게 끼는 느낌인 가슴과 허리 쪽을 살피며 유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대로 어깨 부분은 덧대어진 천 때문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말랐다지만, 키 차이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골격이 차이 나는 걸까.
“아냐, 이건 원래 이렇게 입는 거야. 이래야 알파를 꼬시…… 이렇게 입어야 매력적이라고!”
밀리는 제가 입으면 더 달라붙는다며, 딱 보기 좋다고 눈을 빛냈다. 유신이 보기에도 확실히 저의 다른 낡은 옷보다 훨씬 낫긴 했다.
“코트는 네 팔다리가 길어서 내 껀 빌려주지도 못할 거 같아. 집 근처에 중고 옷 가게 소개해 줄 테니까, 거기서 사자. 내가 같이 가서 골라 주면 저렴한 가격으로 쓸 만한 물건을 건질 수 있을 거야.”
밀리가 너무 흥분해 유신은 자신에게 새 코트를 살 만한 돈이 있다고 이야기할 타이밍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대리모에 관련된 계약금인 만큼, 그 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거들었다.
“좋아, 내일 당장 사러 가자고!”
밀리는 마치 자기 일처럼 신이 나서 외쳤다.
***
금요일 약속 시간에 맞춰, 반짝이는 신형 세단이 유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와, 저거 엑슬라 T6sX모델이잖아.”
창밖을 내다보며 밀리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유신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엑슬라, 티 뭐……?”
“엑슬라에서 이번에 새로 나온 최신형 고급차 말야. 줄여서 T 모델이라고 부르는 그거! 인기가 진짜 많아서 예약해도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대기해야 받을 수 있대.”
밀리가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냐며 들떠서 설명했다. 유신은 이번에 나왔는데 6개월을 기다린다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하튼 인기가 많은 자동차라는 사실은 이해했다.
“흠, 그렇구나.”
확실히 차체를 이루는 우아한 곡선이 괜찮아 보이긴 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차라는 의미다. 차체는 보라색이 도는 독특한 검은색이고, 특이하게 차창도 차체와 비슷할 정도로 진하게 선팅이 되어 있었다.
“이 동네에 저런 고급 차라니, 진짜 눈에 띈다.”
밀리의 말대로였다. 여기가 그렇게 험한 동네는 아니지만, 집세가 저렴해 대학생이 많이 사는 것도 있고, 중심가보다는 뒷골목에 더 가까웠다.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저 고급 세단을 흘끔거리며 눈으로 훑을 정도였다.
“자기야, 저런 차의 주인은 누굴까? 분명 멋진 부자 알파겠지?”
“밀리, 네 알파 취향은 알겠지만, 인구 분포상 베타일 확률이 훨씬 높아.”
“금요일 저녁이잖아. 데이트 상대를 마중 온 건 아닐까?”
이런, 밀리 이 녀석. 또 자기만의 상상의 나래에 빠져 남의 이야길 안 듣고 있다. 그때 밀리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유신을 돌아보았다.
“혹시 닉 메드 아냐? 저 차 주인!”
유신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아직 시간이 좀 남았어.”
“자기야, 그래 봤자 10분 정도잖아! 충분히 가능성 있어.”
“니카는 오히려 좀 늦을걸. 바쁜 사람이라서.”
할리우드 슈퍼스타에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선택지는 없다며, 유신은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자기는 30분 전에 준비 다 끝내 놓고.”
“그거야 내가 바쁜 니카를 기다리게 만들면 안 되니까.”
“어후, 이 팬심.”
밀리가 어이없다며 손으로 이마를 짚을 때였다. 유신의 핸드폰이 울렸다.
“니카의 메시지다.”
“봐, 자기야. 내 말이 맞잖아!”
밀리가 예상한 대로 저 신형 엑슬라는 닉의 차가 맞았다. 그거 보라며, 밀리 쪽이 제 친구보다 더 흥분했다.
닉은 차가 안 막혀서 예상보다 좀 일찍 도착했다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내려오라고 했다.
하지만 제 우상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유신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집 앞까지 데리러 와야지. 밑에 차만 대고 오라 가라. 아무리 닉 메드지만 용서 못해.”
툴툴거리는 밀리를 보고 유신이 웃었다.
“니카가 여기 왔다고 광고할 일 있어? 눈에 안 띄려고 데리러 오게 한 건데, 그러면 의미가 없지.”
닉은 그저 유신을 편하게 오가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지만, 정작 유신은 여전히 이렇게 오해하는 중이었다.
“눈에 안 띄는 건 저 차를 끌고 온 시점에서 이미 글렀는데?”
“그렇네. 더 주목을 끌기 전에 빨리 가 봐야겠다.”
바로 나가려는 유신의 팔을 밀리가 붙들었다.
“잠깐만.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그러고는 유신의 옷차림을 가볍게 체크했다. 셔츠의 옷깃을 한 번 더 바로 하고, 코트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 준다.
오늘 유신은 밀리가 빌려준 티셔츠와,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깨끗한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 신발은 가지고 있던 어두운색의 캔버스화를 오늘을 위해 새로 세탁했다. 코트는 밀리와 함께 중고 옷 가게에서 고른 낙타색 롱 코트였다.
중고기는 했지만, 꽤 괜찮은 물건을 잘 골랐다. 캐시미어 함량도 높고, 품이 좁은 긴 옷자락과 옷소매가 유신의 날씬한 체격과 긴 팔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참고로 유신은 처음에 고등학생도 안 입을 법한 비둘기색 더플코트를 골라서, 밀리에게 혼이 날 뻔했다.
늘 헝클어지는 앞머리도 밀리가 직접 세팅해 주었다. 덕분에 예쁜 얼굴이 더 많이 드러났다.
“좋아, 내가 코디했지만 완벽해. 자기 오늘 닉 메드를 완전히 녹이고 오는 거야.”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어도 녹이고 와!”
해맑게 의욕 넘치는 밀리의 응원을 받으며, 유신은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약간 어색했다. 특히나 몇 년 만에 이런 식으로 손질한 머리가 낯설었다.
자신은 그저 예의에 벗어난다거나, 같이 있기 부끄럽지만 않으면 싶을 뿐이었는데. 너무 신경 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왠지 쑥스럽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반짝이는 신형 세단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진한 선팅 때문에 가까이 가도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정말 닉의 차가 맞을까? 게다가 새 차라 그런지, 손잡이가 처음 보는 형태였다.
“문손잡이가 좀 낯설지? 손잡이의 왼쪽 두꺼운 부분을 밀면 반대쪽이 튀어나올 거야. 그걸 잡고 당기면 돼.”
“아, 네.”
갑자기 차창이 내려가며 닉의 목소리가 들려와 유신은 조금 놀랐다. 그래도 이 차가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시킨 대로 하니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좋은 저녁입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조수석으로 앉았다. 밖에서와 달리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였다.
차 안은 왜인지 향기로운 꽃향기가 가득했다. 비싼 차라 그런지 안이 널찍하고 가죽 좌석도 편안했다. 이런 고급 차를 타는 건 정말 몇 년 만인 듯했다.
유신을 본 닉은 조금 놀란 듯 살짝 멈칫하더니, 곧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정작 유신은 그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그러는 것도 몰랐다.
오늘의 닉은 정말이지 멋있었다. 여태껏 두 번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그 두 번은 애초에 그가 정체를 가리려고 일부러 이상하게 입은 거니, 당연히 비교 불가능할 것이다. 솔직히 유신에게는 그때도 너무 잘생겨서 감당이 힘들었는데.
몸에 잘 맞는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에, 주름 하나 없는 흰 와이셔츠, 넥타이에 포켓치프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밝은 금발은 뒤로 넘겨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완전하게 드러나 있었고, 재킷 가슴 주머니에 꽂힌 포켓치프는 그의 눈동자와 같은 청록색이었다.
잠깐, 단순 저녁 식사를 위해서라기에는 지나치게 각 잡힌 정장이 아닌가? 뭔가 불안한데.
“좋은 저녁이야, 유신.”
약간의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척 안전띠를 매는 유신에게, 닉이 같은 인사를 되돌렸다. 유신이 아주 잘 아는 달콤한 목소리인 건 같았지만, 왜인지 말투가 약간 뻣뻣한 느낌이었다.
뭔가 불편한가 하고 유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뭐가 걸린 것처럼 닉이 몇 번 가볍게 기침을 했다.
“니카, 괜찮으세요?”
“음, 그러니까 뒷좌석에.”
그제야 유신은 뒷좌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차창이 내려지고 목소리가 들리던 순간부터, 유신의 주의는 줄곧 운전석에 앉은 단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에 탄 이후로 뒷좌석을 처음 봤다.
“세상에, 저게 뭐예요!”
다시 말하지만, 절대 작은 차가 아니다. 뒷좌석도 어른이 바로 편안히 누울 수 있을 만큼 널찍하다.
그 뒷좌석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흔히 아는 장미나 미니 국화 따위도 보였지만, 그 외 잘 모르는 여러 가지 꽃들이 보기 좋게 뒤섞여 있었다. 아이보리색과 진한 녹색의 종이로 싸여 있었고, 묶은 리본은 보라색 벨벳이었다.
어디서 꽃향기가 이렇게나 풍기나 했더니, 그 정체가 이거였나 보다. 하여튼 장미만 봐도 어린애 주먹만큼이나 송이가 크고 싱싱하다. 엄청나게 비싼 꽃다발이 분명했다.
“예뻐?”
“와, 엄청나네요. 어디서 받았어요?”
영화 관계자나 자신이 모르는 팬들의 조공일까? 최근엔 딱히 선물을 보낼 만한 일이 없었을 텐데. 거기다 팬들한테는 그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비공식 정보라, 이쪽으로는 대놓고 꽃을 보내지도 못할 터다.
“진짜 크네요. 저런 건 분류해서 꽃병에 꽂는 것도 일이겠어요. 꽃병만 해도 한두 개로 안 끝나겠는걸요? 니카는 어차피 가정부가 대신 해 주니까 상관없으려나.”
“……위한 거야.”
“네?”
기어들어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를 유신은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닉이 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풀 죽은 목소리였다.
“널 위한 거라고. 널 주려고 내가 샀어.”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유신은 당황해 입만 빠끔거렸다. 그 상태로 손으로 뒤의 꽃다발을 가리켰다가,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닉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이 겨우 되물었다.
“절 주려고요?”
“그래.”
“아, 감사합니다.”
유신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좋아요, 니카. 아주. 근데 저건.”
그의 시선이 뒷좌석을 채운 거대한 꽃다발을 한 번 더 훑었다.
“너무 커서 품에 들 수조차 없는걸요. 어차피 이 상태에서는 뒷좌석에서 꺼내는 것부터 일이겠네요.”
닉이 소리 없이 신음했다.
“확실히 그건 그렇겠어.”
그러고 보니 차는 이미 출발해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조용한 차였다.
“니카, 내가 꽃다발을 집에 두고 올 걸 그랬나요?”
“아냐.”
닉은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듯 뒷좌석을 곁눈으로 살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묻는 유신을 향해, 그건 아니라고 바로 부정했다.
“일단 옷부터 사러 가자, 유신.”
“옷이요?”
“지금부터 갈 레스토랑은 그 옷이랑은 조금 안 맞거든. 드레스 코드가 정장이야.”
솔직히 차려입은 닉의 양복을 처음 봤을 때부터 유신은 살짝 불안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쇼핑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전 지금 제 옷이 좋아요. 그렇게 별로예요?”
밀리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열심히 고민한 결과였다. 그 과정까지 무시당하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신의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느낀 듯 닉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아니, 완벽해. 처음 차에 탔을 때 평소와 다르게 너무 멋져서 깜짝 놀랐어. 아니, 넌 평소에도 완벽하지만.”
“완벽하다는 말 고마워요.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저도 제 옷 센스가 그렇게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어요.”
“아냐, 유신. 난 진짜로.”
“오늘 니카야말로 정말, 정말, 정말이지 완벽해요. 생눈으로 니카의 이런 풀 정장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라서 솔직히 감격했어요!”
“고, 고마워.”
말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팬심으로 흥분해서 닉을 몰아붙이고 말았다. 유신은 안 그랬던 척, 어느새 공손히 가슴 앞에 모인 양손을 슬그머니 바로 하며 진지하게 덧붙였다.
“어쨌든 옷은 안 살 거예요. 살 돈도 없구요.”
아니, 돈이 없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닉에게서 받은 대리모 관련 계약금이다.
하지만 그 돈은 어지간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다. 돌려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그와 돈을 주고받은 관계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급한 청구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부 쓰기는 했지만, 그 또한 가능하다면 나중에라도 어떻게든.
이번에 밀리의 도움으로 데이트 준비를 하면서 결심이 확실히 섰다. 최대한 그 돈을 안 쓰고 어떻게든 해 보는 거다.
“누가 너더러 사라고 했어. 내가 사 줄 거야.”
“그건 더더욱 안 돼요. 식사도 충분히 과한데, 저 꽃다발도 그렇고. 옷은 절대 못 받죠. 당신 기준으로 고르면 분명 엄청 비쌀 텐데.”
“그냥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그냥 받으면 안 돼?”
“당신이 부자인 건 저도 아주 잘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남한테 비싼 물건을 마구 사 주고 그러지 말아요.”
닉은 허를 찔린 양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신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이걸 입고 식당에 갈 거예요.”
“유신, 난 그저.”
“니카, 제발요. 정장이 드레스 코드인 식당이라는 거죠? 제가 알기로 학생 신분이면 이 정도 복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텐데요? 바지도 청바지가 아니고, 신발도 끈이 있긴 하지만 일단 색은 짙으니까요. 정 아닌 거 같으면 식당을 취소해도 되고요. 근처에 어디 적당한 가게에 가서 먹어요. 아, 그건 당신이 불편할까요?”
유신은 완고했다. 결국 닉이 굽혔다.
“아니,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할 정도는 아냐.”
다행이라고 웃는 유신을 향해, 닉이 다시 뒷좌석을 흘끗 훑고서 덧붙였다.
“그리고 꽃다발은 나중에라도.”
“네?”
“아냐, 아니야.”
그렇게 두 사람은 약간 무거운 분위기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가게 입구에는 별을 떠올리는 육각 꽃무늬 3개가 그려진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호화롭다기보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어떤 의미로 닉과 닮았다고 유신은 생각했다.
드문드문 있는 손님들조차 신기할 정도로 레스토랑의 그런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모두 선남선녀로 묘하게 인물이 좋고, 보기 좋게 잘 차려입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웨이터에게 미리 예약해 놓은 안쪽 자리로 안내받으며, 유신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이런 가게에 처음 온 것도 아닌데.
물론 요 몇 년간 인연이 없기는 했다. 관련 기억은 대부분 그의 청소년기로 한정되어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자신이 이 저녁을 망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레스토랑 입구의 별 3개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맛있다!”
“그렇지?”
한 입 먹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신에게 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안심한 듯한 미소였다.
“여길 꼭 맛보여 주고 싶었어.”
유신은 새삼 그 얼굴에 또 홀렸다.
“응, 진짜 맛있어요.”
거기다 빈말도 아니었다. 음식에 관심이 적은 자신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원래 유신은 이렇게 각 잡은 프랑스 요리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자신은 휘리릭 볶아 낸 파스타나,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가 취향이라고 생각했고, 실은 그조차 거의 안 먹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맛있으면 취향 따위 상관없어진다.
그나저나 지난번 샌드위치 때도 그렇고, 닉과 함께 있을 때면 왜인지 평소보다 좀 더 쉽게 음식을 삼킬 수 있었다. 아마 그는 유신이 양이 좀 적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음식 섭취에 곤란을 겪는다는 사실까지는 모를 것이다.
무엇보다 유신은 닉의 앞에서는 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하고 있었다. 사실 목에서 안 넘어가더라도, 알리고 싶지 않아 그의 앞에서는 정상적인 척 먹었을 것이다. 그러다 분명 크게 탈이 나거나 했겠지. 하지만 지금 자신은 진심으로 맛있게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그렇게 전채를 먹을 때였다. 유신이 접시 한쪽으로 살짝 치워 둔 껍질을 튀긴 오리고기를 보고, 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신, 그거 맛없어?”
“아뇨, 맛있어요.”
“아니, 안 먹고 남겨 뒀길래.”
“한 조각 먹어 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제일 마지막에 먹으려고요.”
솔직한 유신의 대답에 닉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재밌네. 난 제일 맛있는 건 제일 먼저 먹는데.”
확실히 뭔가를 참거나, 견디거나, 기다리는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하지만 먹다가 배부르면, 그렇게 아끼다 못 먹는 일이 생긴다고.”
“맞아요. 요즘 종종 그러긴 해요.”
실제로 유신은 음식을 삼키기 힘들어진 이후, 제일 좋아하는 것을 못 먹고 싫어하는 것만 먹다 식사가 끝난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땐 지금처럼 먹는 게 힘들지 않았다. 아니, 그때는 오히려 식욕은 넘쳐 났지만, 발레 때문에 먹고 싶은 걸 제대로 못 먹어서 힘들었지.
“그럼 지금이라도 맛있는 걸 먼저 먹어.”
“그래도 아직 전채고 배부르려면 멀었으니까, 역시 이걸 맨 마지막에 먹을래요.”
“왜?”
“마지막에 제일 좋은 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잖아요.”
“그래서 결국 그걸 못 먹게 되면 어떡하고?”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에도, 맛있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두근거렸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잖아요.”
닉은 뭔가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난 그런 식으로 뭔가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사실 꼭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다가 정작 눈앞의 기쁨을 어이없이 놓치기도 하니까요.”
“반대로 나는 너무 눈앞의 일만 생각하다가, 뒷일을 놓친 적도 많은데.”
뭔가 이야기가 엇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 맞는 걸까? 유신은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으려나?
마침 웨이터가 샐러드를 가져왔다.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해 볼까? 샐러드를 보니 저런 걸 진짜 싫어하던 녀석이 생각났다. 다행히 그 화제는 무난하게 먹혔다.
“실은 그러다 동생이 제가 남겨 둔 걸 먹어 버린 적도 있어요. 제가 화를 내면, 싫어해서 남긴다고 생각해서 먹어 준 거라고 오히려 뻔뻔하게 나왔죠.”
“그건 너무했네.”
“그러니까요!”
치즈와 견과류가 곁들여진 샐러드는 매우 신선하고 맛있었지만, 포크로 먹기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맞은편의 남자에게 전혀 힘든 일이 아닌 듯했다.
레몬 파이 때도 느꼈는데, 닉의 포크 사용법은 어딘가 예술적인 데가 있었다. 그 우아한 손끝과, 깔끔하게 먹어 치우는 단정한 입술을 번갈아 보느라 유신은 정신이 쏙 빠졌다.
“나랑 블라다 누나는 둘 다 좋아하는 것부터 먹는 주의라서 그런 문제는 없었지. 대신이랄까, 누가 먼저 다 먹어 치우냐로 싸움이 났지.”
“니카가 누나와 싸운다니, 상상이 안 가요.”
유신은 그 미인 여장부의 얼굴을 알기에 한 이야기였지만, 닉은 그가 제 누이를 알 거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지 못했다.
“맞아. 사실 싸움도 아닌 게, 애초에 당시 나한테는 상대가 안 됐어. 누나는 나보다 네 살이나 위였고, 알파라서 여자지만 웬만한 또래 남자들보다 강했거든. 기본적으로 어린 남동생을 돌봐 주는 포지션이었지만, 한번 발끈하면 절대 봐주지 않았지. 거기다 내가 이래 봬도 어릴 때는.”
“알아요. 엄청 작고 귀여웠잖아요.”
닉이 놀라워했다.
“어떻게 그걸 알았어?”
“그, 인터넷에서 봤어요.”
유신의 대답은 반만 사실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건 맞았다. 문제는 닉이 아직 할리우드에서 데뷔하기 전에 봤다는 거지만.
어느 순간부터 검색 사이트에서 닉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사진과 정보는 신기할 정도로 다 지워지고 없었다. 정확히는 발레 은퇴 이전에 대한 것 전부다.
보아하니 당사자는 역시나 모르는 듯했다. 인터넷에서 본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는 그를 상상해 봤는데, 미칠 듯이 안 어울리긴 했다.
“그럼 머리 길렀던 것도 알겠구나. 어릴 때는 아주 길지는 않고, 이 정도로.”
닉은 제 어깨에서 좀 더 아래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으로 보니 살아 있는 천사더라구요.”
“맞아. 그때 내가 좀 귀엽긴 했어.”
점점 유신도 식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줄줄이 놓인 여러 개의 포크 나이프 중 어느 것을 집어야 하는지부터 헷갈렸다. 하지만 닉이 슬쩍 시범을 보여 주기도 하고, 하다 보니 예전에 알던 지식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 면접 보는 것도 아니고, 잘 먹기만 하면 되지. 포크 나이프 좀 잘못 쓴다고 큰일 날 것도 아니고.
닉이 구석진 자리로 예약한 만큼, 주변의 시선도 식사 중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마음 써 준 것이겠지.
게다가 음식은 너무 맛있어서,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오히려 납득 갈 정도였다. 이 정도로 맛있으니 닉이 함께 먹고 싶어 한 마음이 이해도 가고, 거기서 자신을 떠올려 준 부분이 또 고마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레스토랑은 역시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쨍강.
유신은 메인 고기 요리를 먹다 그만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실은 단순히 떨어트린 수준이 아니라, 다른 테이블 발치까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스테이크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부드러워서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그 즉시 능숙한 웨이터가 조용히 새 나이프를 가져다주었지만, 유신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신은 어차피 상관없었다. 닉의 분위기가 더 어두워져서 그게 신경 쓰였다.
그렇게, 맛있지만 역시나 뭔가 불편한 식사가 천천히 끝이 났다. 돌아가는 길도 당연하다는 듯 닉이 차로 바래다주었다.
두 번째라고 그새 차가 처음보다 훨씬 익숙해졌다. 뒷좌석의 꽃다발 덕분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차 안에 가득한 것도 기분 좋았다. 물론 그중 제일 좋은 건 그 사이에 옅게 섞인 닉의 베르가못과 시나몬 향이었다.
유신은 맛있는 음식으로 배도 부르고, 가죽 시트는 편하고, 그대로 녹는 기분이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레스토랑에서 좀 더 제대로 행동했다면 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어두워 보이는 닉이 신경 쓰였다. 그가 맘이 상했을까 걱정이다.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면, 그거야.
그래, 아기가 쉽게 생기려면 자신은 니카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잖아. 거기까지 떠올리고 유신은 내심 박수를 쳤다. 자신이 떠올린 핑계 아닌 핑계가 꽤나 마음에 든 것이다.
딱히 다른 꿍꿍이라거나, 니카와 개인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음침한 욕심으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라고. 누가 들을 것도 아닌데 그는 괜히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니카.”
운전 중이라 조금 미안했지만, 집 앞에 도착해 버리면 더 말 꺼내기가 힘들 것이다. 유신은 조심스럽게 운전석의 알파를 불렀다.
“응?”
“오늘은 미안했어요. 저 때문에 이것저것 불편했죠? 옷도 그렇고요. 제가 미리 드레스 코드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식당도요. 어떤 곳을 가는지 물어보고, 좀 더 테이블 매너를 예습했어야 했어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차가 길가에 섰다.
***
유신이 오늘 저녁 차에 처음 탔을 때, 그가 얼마나 완벽해 보였는지를 떠올리면 닉은 그저 가슴이 뛸 뿐이었다.
솔직히 늘 입던 이상한 빨간 스웨터 차림이었어도 닉은 딱히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이 사랑스러운 오메가에게 새 정장을 사 줄 작정이었다. 이미 테일러샵도 수배해 연락해 놓았다. 샵 매니저는 유신의 사이즈로 여러 벌의 추천 정장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수석에 앉아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오메가는 기억보다 말쑥했다. 원래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여전한 채, 훨씬 더 멋있었다.
카멜색 롱 코트는 취향이 좋았다. 그의 긴 팔다리와 날씬한 체격을 보기 좋게 강조했고, 무엇보다 따뜻해 보였다. 안에 입은 셔츠는 조금 달라붙어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게 또 매력적이기도 했다.
늘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볍게 세팅해 그의 예쁜 이마가 살짝 들여다보였다. 살짝 흘러내린 안경 위쪽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반짝이는 초콜릿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닉은 순간 말문을 잃을 뻔했다.
무엇보다 유신도 제 정장 차림을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좋았던 것은 여기까지. 이후로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꽃다발은 너무 컸다. 애초에 뒷좌석에 넣을 때부터 좀 크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어떻게 꺼낼지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했어야 했다.
올가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그녀는 계획을 듣자마자 꽃다발이 너무 크다고 기겁했다. 저와 가브리엘은 완벽하다고 자신했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유신은 꽃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꽃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건 자신의 생각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상대의 취향을 고려 못 한 것은 그저 제 잘못이다.
머릿속에서는 유신이 꽃다발을 품에 한가득 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거부감은 옷 이야기를 꺼냈을 때 최고조였다. 이쪽은 백 프로 닉의 잘못인 게, 분위기가 안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옷을 사 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미리 샵 매니저에 말해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저 유신에게 뭔가 사 주고 싶은 마음이 컸던 탓이었다.
하지만 유신의 고집스러운 반대에 부딪쳐, 이쪽이야말로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말을 안 꺼내니만 못한 결과였다.
다이아몬드는 언급도 못 했다.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남자용 백금 팔찌로, 유신의 가느다란 손목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골랐다.
그러고 보니 올가는 다이아몬드도 오버라고 말렸다. 처음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보석 선물은 너무 나갔다고. 꽃다발에 대한 반응을 보니 백번 옳은 말이었다.
참고로 보석 케이스는 꽃다발 아래, 좌석 시트 사이에 숨겨 두었다. 꽃다발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만에 하나 유신이 원했어도 줄 수 있었을 리 없다.
돌이켜 보면 차 문부터 제가 잘못했다. 유신이 내려오는 걸 보자마자 바로 차에서 내려서 직접 문을 열어 줬어야 했다.
항상 남들이 자신을 뒤쫓아 오는 입장으로, 제 쪽에서 움직여야 하는 관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몰랐다. 미처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레스토랑에서도 유신은 줄곧 불편해 보였다. 음식은 맛있다고 해 줬고, 실제로도 평소처럼 맛있기는 했지만.
유신은 아시아인이고, 정통 프랑스 요리가 입에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음식을 앞에 두고야 생각이 났다. 그저 자신이 뉴욕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한 레스토랑을 전세 내고 통째로 빌린 걸로 뿌듯해하고 만 것이 잘못이었다. 그 가게가 미슐랭 3 스타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잘 모르지만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유신에게 설명해 주며 우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멋지다고 눈을 빛내 줄 거라 내심 기대했는지도.
하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스럽고, 차분하고, 익숙지 않은 음식과 상황에 한껏 날이 섰을 뿐이었다.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물론, 근처 다른 손님들도 모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했지만 그 탓에 분위기는 더 경직됐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겨우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닉은 언제 자신의 잘못에 관해 이야기할지 계속 생각하는 중이었다.
“니카, 오늘은 미안했어요.”
그때 유신이 사과했다. 닉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이것저것 불편했죠? 옷도 그렇고요. 제가 미리 드레스 코드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식당도요. 어떤 곳을 가는지 물어보고, 좀 더 테이블 매너를 예습했어야 했어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왜 유신이 저렇게 말하는지 닉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차부터 세웠다. 그리고 다급히, 조수석에 앉은 사랑스러운 오메가를 돌아보았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거지, 유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이다. 유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래, 이런 못난 제 초대에 진심으로 응해 준 것뿐이리라. 그러다 결국 그가 먼저 사과하게 만들다니 닉은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았다.
“제가 서툴게 행동해 식사 내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었잖아요?”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다는 듯 유신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반한 상대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한 것이다. 닉은 그런 자신이 새삼 참담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불편했던 건 맞지만, 그건 모두 나 자신 때문이었어.”
“당신 자신?”
“그래, 내가 너무 부족해서,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그랬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솔직하게 사과하지 못해서 결국 네가 먼저 나에게 사과하게 만들었구나.”
닉은 진심으로 후회 중이었다.
유신이 그런 그와 눈을 맞춰 왔다. 안경 안쪽 별을 박은 듯한 눈동자가 반짝이는 모습이, 살짝 넘긴 앞머리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잘 드러났다.
“내가 드레스 코드에 대해 고집부리고 식사 중에 나이프를 날려 버렸어도요?”
“너에게 드레스 코드에 대해 미리 설명하지 않은 것도 나고, 네가 말한 대로 학생은 그 정도 옷차림이면 충분히 허용되는 것도 사실이야. 네가 그런 식당에 익숙하지 않아서 긴장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도 나고.”
“맞아요. 나 사실 원래라면 그것보다는 능숙하다구요. 음, 아마도?”
“응.”
닉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로 늘어진 유신의 왼손 옆으로 제 오른손을 내려놓았다. 조금만 더 옆으로 간다면 손과 손이 겹쳐질 만큼 가까웠지만, 실제 움직이는 데에는 거리보다 훨씬 큰 용기가 필요했다.
“네가 꽃을 좋아하는지, 필요한지 아닌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멋대로 너무 커다란 꽃다발을 준비한 것도 미안해. 네가 처음 집 앞으로 나왔을 때, 내가 바로 차에서 내려 너에게 차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것도.”
여기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실은 그 레스토랑은 오늘 저녁 전세 냈었다는 점. 웨이터 등 직원들도 모두 이미 사정을 알고 있으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손님들도 모두 자신이 고용한 배우들이라는 사실.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마도 유신을 더 긴장하게 만든 것이 분명한 현악 5중주 라이브 팀도, 원래 레스토랑 소속이 아니라 자신이 일부러 부른 것이다.
그리고 꽃다발 아래 숨겨져 있지만 아마 당분간 건네줄 수 없을 듯한, 유신을 위해 자신이 특별히 준비한 다이아몬드 팔찌까지.
그것들은 끝까지 비밀로 남겨 두었다. 지금 말해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이해한 쪽에 가까웠다.
“모두 내 잘못이야. 미안해.”
하지만 닉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유신에게서는 한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역시 화가 많이 났나? 설마 나한테 질렸나? 반응이 안 좋다는 생각에 닉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마음을 담아 사과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갑자기 유신이 끄응 하는 이상한 신음을 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온몸을 웅크렸다. 돌발 행동에 놀란 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신?”
겨우 뺨에서 양손을 떼며, 유신이 곤란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아뇨, 좀 놀라서. 그 니카가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니!”
닉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어이없어 같이 소리쳤다.
“나도 잘못하면 사과 정도는 한다고!”
“아, 죄송해요. 왠지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서.”
유신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시선을 피하는 척 딴청을 피웠다.
가끔 그가 이렇게 자신에 대해 예상과 다르다는 식으로 말할 때면 닉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 내용이 대중이나 팬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그대로라 더더욱 그랬다.
이렇게 옆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멀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적어도 오늘처럼 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래 봬도 자신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잘 사과한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잘 안 들 뿐이다.
닉은 유신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래서, 용서해 줄 거야?”
유신은 여전히 아닌 척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굳이 몸을 뒤로 빼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로 일종의 답이었다.
“나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유신.”
닉은 한 번 더 속삭였다. 드디어 고개가 돌아오고 사랑스러운 초콜릿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닉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싫어?”
“들어 봐요, 니카.”
유신의 입술이 천천히, 느슨하게 양쪽으로 호를 그렸다. 닉은 저 표정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읽어 내려고 애썼다.
“다른 사람을 식사에 초대할 때에 그 사람이 기뻐해 주길 원한다면, 상대의 취향이 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먼저 물어보는 거예요.”
“그건, 나한테 다시 기회를 준단 거지?”
하지만 닉은 마음이 급해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 우선 결론을 재촉하고 말았다. 유신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만으로도 한껏 가라앉아 있던 닉의 기분이 덩달아 들떴다.
“좋아요. 우리 다시 밥을 같이 먹어요. 오늘은 너무 비싼 걸 먹었으니까, 다음엔 좀 더 저렴한 걸로.”
그것은 다시 기회를 준다는 허락이었다. 닉은 유신이 천사같이 자비롭고 너그럽다고 생각했다. 감동해 잠시 대답을 잊은 그를 향해 유신이 물었다.
“니카, 일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다행히 그 시간은 비어 있었다.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응, 괜찮아.”
“카페 루이로 와요. 어딘진 알죠?”
“물론, 몇 번 갔었으니까.”
“몇 번?”
“아니, 지난번에 갔었다고.”
실은 닉이 유신을 만나고 싶어, 그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카페 루이에 몰래 들른 것이 벌써 다섯 번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왠지 쑥스러워 닉은 그 사실을 없는 일인 척했다.
“이번에도 닉 메드와 꼭 닮았다는 ‘미스터 닉’으로서. 루이스에게 파스타를 만들어 달라고 하죠.”
“그거 멋진데.”
“우린 분명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좋아.”
“단, 쓸데없는 거 가져오지 말구요. 알바 끝나기 전까진 가게에서 못 나가니까 미리 데리러 올 필요도 전혀 없어요. 아, 멋진 자동차도 그날은 필요 없어요. 우린 걸어 다닐 거니까. 그리고 밥도 내가 살 거예요.”
오늘 먹은 밥은 너무 비쌌으니까, 유신은 과한 걸 받은 만큼 이번엔 자신이 밥을 산다고 했다.
그리고 닉은 그렇게 슥슥 약속을 정하는 유신이 너무도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반짝이는 상대와 하다못해 친구용 키스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타이밍을 놓치자 쉽지 않았다.
“알았어.”
그는 어떻게든 다음번에는 유신에게 키스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