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1) (4/22)

제3장 (1)

“데이트 약속이 잡혔어!”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올가는 한껏 흥분한 닉을 맞아야 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들뜬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그 주어가 매사 귀찮음이 넘쳐 나는 제 고용주(회계적으로 정확히 하자면, 제 고용주인 아이잭의 담당 연예인)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놀랐다.

또, 뭔가 시작했구나. 올가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거실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거의 캐스팅이 확정된 영화의 수정 대본에, 새로 사인할 계약서 따위였다. 아이잭은 닉의 의욕이 돌아온 (아마도 극히 짧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새로운 광고와 명품 브랜드 홍보 대사 계약을 진행했다.

물론 그 용의주도한 흑인은 제 소중한 슈퍼스타가 당을 섭취하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 사인할 수 있도록, 간식거리를 준비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올가는 얼마 전 오픈해 대기가 기본 30분이 넘는 유명한 유기농 도넛 가게에 들러야 했다. 도넛이 유기농인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먹히는 세상이다.

일단 사인받을 서류의 세팅을 끝내고, 그녀는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살짝 나사가 풀린 저 우성 알파보다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다른 알파를 발견하고,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르노.”

“안녕, 올가!”

가브리엘이 소파에 늘어진 채 힘겹게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웬일로 평소와 달리 양복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화려했다. 주황색에 가까운 갈색 바지에 실크 블라우스, 연두색과 회색, 노란색이 섞인 니트 조끼를 입었다. 저리 보여도 조끼 한 장이 올가의 한 달 월급이 부끄러워질 가격의 고급 브랜드일 것이 분명했다.

“이건 또 무슨 소란인가요?”

올가는 흥분한 듯 거실을 서성대는 닉을 곁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니키가 드디어 주말에 그 오메가를 만나고 온 것 같아요.”

가브리엘이 아련하게 웃었다. 어지간히 시달렸는지 눈 밑이 퀭했다. 아침부터 웬일로 빨리 오라고 난리를 치더니, 계속 이런다며 그는 푸념했다.

“그럼, 데이트라는 건.”

“같이 밥 먹기로 했대요.”

“설마 유신, 그러니까 그 오메가하고요?”

믿기 힘들다며 올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응, 금요일에 본다던데요.”

“금요일.”

가브리엘의 대답을 올가는 의미심장하게 되풀이했다.

유신과 닉이 데이트하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그날 야근은 별로인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미 그 데이트에서 당연히 부려 먹힐 거라고 자연스럽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녀였다.

“도넛 먹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미스터 르노.”

가브리엘은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로 도넛을 집었다. 기본 크림 도넛이었다.

“여기 요새 유명하죠? 이 도넛 재료 중 일부를 우리 쪽에서 납품하거든요. 샘플은 먹어 봤지만, 실제 파는 것도 한 번 정도는 맛보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면 도넛 가게에서 가브리엘의 ‘가비스 오가닉 가든’ 로고 스티커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닉도 다가와 도넛을 하나 집었다. 진짜 레몬 조각이 올려진 레몬 크림 도넛이었다. 올가는 크림의 신맛을 떠올리고 코를 찡긋했다.

“미스터 메드, 사인할 계약서가 있어요. 미스터 심슨이 맡기신 건데.”

“좋아, 좋아. 내가 좀 있다가 할게.”

“내일 화보 촬영도 잊으시면 안 되세요.”

“물론 가야지.”

확실히 기분이 좋긴 한지, 올가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닉의 대답은 긍정적이기만 했다. 아이잭이 급하게 자신에게 서류를 들려 보낼 만했다고, 그녀는 그 늙은이의 수완에 내심 감탄했다.

이제 닉은 가브리엘의 옆에 걸터앉아 도넛을 먹고 있었다. 하얀 스웨트 셔츠에 밝은 회색의 조거 팬츠라는, 무난하다 못해 심심한 차림이었다. 총천연색을 온몸에 두른 가브와는 확연히 대조되었다.

하지만 잘 관리된 아름다운 몸은 사실 뭘 걸쳐도 보기 좋았다. 거기다 원래 하얀 편이라 흰색이 잘 어울렸다. 본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거기에 예술적인 얼굴이 덧붙여지자, 도넛을 먹는 모습조차 그림이 되었다. 딱히 맛을 음미한다기보다, 무심한 듯 깨무는 모습이 오히려 더 시선을 붙잡았다.

애초에 닉은 본인이 꼭 필요할 때 아니면 굳이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서서 그런지, 미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몸으로 이미 깨닫고 있다고나 할까.

확실히 외모 하나는 장난이 아니다. 그 와중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더 하얗고 깨끗하고 환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얼굴이 코앞에서 데이트를 권한다면야.”

아마도 유신도 저 외모에 홀려서 받아들였겠지. 솔직히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고, 올가도 내심 납득했다.

지금 닉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유신에 대한 파일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카페 루이를 발견한 그는 그 카페를 우연히 마주칠 장소로 찜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서 다음 약속을 잡고 연락처를 딸지,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시뮬레이션도 했다.

하지만 정작 만나기는 쉽지가 않았는데, 정확한 아르바이트 시간대를 몰랐던 탓이 컸다. 결국 그는 다섯 번째 방문에서야 겨우 유신과 마주칠 수 있었다.

덕분에 아닌 척해도 내심 꽤나 흥분해서, 꼴사납게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약속을 잡고 연락처도 교환했지만, 그 와중에 그만 비니를 떨어트리고 와 버렸다. 제일 우스운 부분은 그 사실을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점이다.

딱히 중요한 물건은 아니라 상관은 없었다. 그냥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대충 집어 든 거였다.

몇 주 만에 본 유신의 얼굴은 닉의 기억보다도 더 예뻤다.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는 얼굴이 마냥 사랑스러워, 닉은 마치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조금 이상한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딱 그런 마음이었다.

“확실히 기분이 좋으시긴 한가 봐요.”

계약서를 검토하는 닉을 향해 올가가 말했다. 실제로 그는 방금 전의 무표정이 거짓말처럼 입가가 느슨해져 있었다.

“내가?”

“흠, 자각이 없으시면 됐어요.”

하지만 닉이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녀는 곧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닉은 도넛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번엔 레몬 아이싱이 올려진 올드 패션드였다.

사실 닉이 기분이 좋은 데는 ‘밀리’에 대한 의문이 해결된 부분도 있었다. 파일에서는 유신에게 특별한 상대가 없다고 되어 있었지만,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닉은 그가 ‘같이 사는’ ‘밀리와’ 통화하는 장면을 분명히 보았다.

다정하고 친밀한 태도도 그렇지만, 밀리라는 귀여운 이름도 닉의 오해를 부추겼다. 하지만 이번에 만났을 때, 유신이 확실하게 밀리는 하우스메이트며 친구일 뿐이라고 땅땅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실없는 질투심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파일에는 성 경험에 관한 질문도 있었는데, ‘풍부함’ 쪽에 체크되어 있었던 탓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20대 중반에 경험이 없는 쪽이 더 이상했다. 자신 역시 굳이 따지자면 경험이 적은 축은 아니었고, 아니, 솔직히 많은 편이려나. 상대의 과거에 대해서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아는데. 알지만.

신경 쓰였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과거까지 모두 엎어 버리고, 그의 과거를 모두 독점하고 싶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집착이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다시 그런 생각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빠진 건 처음 보는걸.”

가브리엘이 소파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처음이긴 해.”

“니키, 너 혹시 이게 첫사랑인 거 아냐?”

농담 섞인 가브리엘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맞은편에 있던 올가의 표정이 썩었다. 하지만 닉은 그 표현이 바로 마음에 들었다.

“첫사랑? 그래, 살면서 이렇게까지 누가 좋았던 건 처음이야. 만약 이 감정에 꼭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이건 첫사랑이야.”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뿌듯해하는 닉이었다.

“난 내 친구가 나한테서 첫사랑을 느낀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참 섭섭하구만.”

가브리엘도 그런 닉의 등을 팡팡 때렸다. 연극적인 말투와 달리 표정은 그저 가벼웠다.

“윽, 아프거든!”

“진짜 우리 니키가 이러다 결혼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결혼이요?!”

생각도 못 한 단어에 올가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정작 가브리엘도 닉도 태연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서로 맞으면 결혼할 수도 있죠. 나랑 니키네 집안은 후계자 문제 때문에 원래 빨리 결혼하거든요. 우리는 둘 다 이미 늦었죠.”

“그 이야기는 그만, 가브. 듣기만 해도 벌써 성가셔.”

“올가, 그거 알아요? 원래 둘 중 한 명이 오메가였으면 얘랑 나랑 결혼할 뻔했다니까.”

“둘 다 알파로 발현해서 천만다행이었지.”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닉이 소름 돋는다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올가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깐만, 대체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할 뻔했다고?

“그래, 생각난 김에 지금 당장 유신한테 꽃을 보낼까? 초콜릿과 샴페인은 어때? 지금이라도 데이트 때 선물할 다이아몬드를 주문해야겠어.”

그러나 다음 순간, 닉이 눈이 하트가 돼서는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아뇨, 잠시만요, 미스터 메드.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갑작스런…….”

그 바람에 올가는 방금 들은 이야기의 충격을 어느새 잊어버렸다.

***

“이제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지, 유신?”

데이브의 질문은 느긋했다. 유신은 대리모 센터의 검진실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솔직히 그는 딱히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향해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간호사를 향해 최대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네, 그러면 돌아가요.”

오늘 자신은 임신 여부를 확인하러 여기 왔다.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했기에, 솔직히 매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검진실에 온 것도 오래간만이고, 데이브와 만나는 것도 간만이다.

“밥은 잘 먹고 있어? 어째 더 마른 거 같아.”

“하하, 그 정도는 아닌데.”

“봐, 여전히 손목이 한 줌이잖아.”

오늘도 밥을 제대로 안 먹고 온 만큼 유신은 데이브에게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냥 좀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유신은 딴청을 비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데이브를 만났던 날과 달리, 오늘은 구름도 없이 쾌청했다.

지난번엔 갑자기 비가 와서 유신은 안내 데스크 직원인 폴에게서 우산을 빌렸다. 물론 그 우산은 오늘 제대로 챙겨 왔지만, 가 보니 마침 폴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유신은 감사의 메모와 함께 우산을 놓고 왔다.

“매튜 선생님하고는 오늘 처음 진료 봤지? 선생님 좋으시지 않았어?”

데이브가 물었다. 매튜는 센터의 산부인과 의사로, 의사치고 흔치 않게도 오메가였다. 유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죠앤이 일부러 연결해 준 것이었다.

“네, 친절하시고.”

“맞아. 죠앤하고는 완전 다르지.”

유신은 죠앤도 충분히 친절하다고 생각했기에, 데이브의 그 말에 맞장구 대신 적당히 웃어 주었다. 데이브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운 듯 싱글싱글 웃으며 질문을 이었다.

“유신은 임신이면 좋겠어, 아니면 좋겠어?”

“어차피 아닐 건데요, 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유신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제야 데이브도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가 갑자기 눈치를 봐서 유신은 조금 미안해졌다.

오늘도 검진실에는 자신 외에 다른 환자는 없었다. 넓은 공간에 단둘뿐인 것이 처음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우리, 티비나 볼까?”

데이브도 어색했는지 대기실에 있던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그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다, 연예 가십을 다루는 시시껄렁한 프로그램에서 멈추었다.

“와, 닉 메드다!”

그리고 데이브의 외침처럼, 거짓말같이 닉이 딱 화면 한가운데 나타났다.

예전에 찍어 둔 인터뷰였다. 그러니까 그가 아직 LA에 있던 시절. 물론 유신은 동영상 사이트로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내용이었다.

“유신, 나 요전에 저…… 앗, 아니야.”

데이브는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꺼내다, 당황하며 말을 돌렸다. 여전히 화면의 닉에게선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유신은 어쩌면 그가 센터에서 닉을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환자의 개인 정보를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니 언급을 피한 것이었다.

문득 유신은 자신의 대리모 계약 상대방이 닉인 것을 알면, 데이브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유신은 여기서도 닉이 갑자기 튀어나와 어쩔 줄을 몰랐다. 검사 결과 때문이라도 그 할리우드 스타에 대해 잠시 잊고 싶은데, 텔레비전까지 돕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유신, 이거 줄게.”

그때 데이브가 유신에게 사탕을 하나 건넸다. 노랑과 흰색 줄무늬 포장지에 싸인 레몬 맛 사탕이었다. 자신이 꽤나 지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싶어, 유신은 얌전히 그 사탕을 받았다.

동시에 지난번 닉과 먹었던 레몬 파이를 떠올리고, 기분이 묘해졌다. 파이가 문제가 아니라, 고작 그걸로 굳이 닉을 떠올리는 제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입에 넣고 굴리자 설탕 맛과 함께 엷은 신맛이 입 안에 번졌다. 레몬 파이의 강렬한 단맛과는 완전히 달랐다. 유신은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최대한 깨물지 않고 혀로 빨아 먹었다.

입 안에서 사탕이 다 사라지고도 조금 더 지나서야, 진료실 안쪽에서 유신의 이름이 불렸다.

“검사 결과는 임신이 아니야.”

닥터 매튜 테일러는 허허허 너털웃음이 친근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친절한 할아버지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늘 여유롭던 죠앤이 그의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나 보통 사람은 아닐 터였다.

“표정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구만.”

“네, 임신 테스트기로 집에서 혼자 확인해서.”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뭔가 쑥스러워 유신은 괜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걱정 말게나. 원래 억제제 휴약하고 첫 번째 히트는 임신 확률이 낮으니까.”

“맞아요. 유신은 건강하고, 산전 검사 결과 자궁도 아주 튼튼했으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매튜의 옆에서 죠앤도 끼어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바람에, 유신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뭣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쓸데없이 직접적이었다.

늙은 의사는 재밌다는 듯 그런 죠앤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첨 보는구만, 죠앤 스티븐슨.”

“어머, 매튜 선생님. 무슨 이야기세요? 저는 모든 고객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한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갑구만. 앞으로 다른 환자에 대해서도 기대하겠네.”

“호호호.”

죠앤은 매튜의 마지막 말에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매튜가 다시 유신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네는 이번이 첫 번째 인공 수정이었지? 다음번 히트까지는 마찬가지로 인공 수정으로 진행할 거고, 그때도 실패하면 시험관으로 바꿔서 진행할 걸세.”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의례적인 설명이었다. 유신은 최대한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걱정이 안 됐다면 거짓말이었다.

“임신을 위해서 오메가에게 제일 좋고 효과적인 건 역시나 상대 알파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거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고.”

매튜는 유신에 대한 파일을 팔랑팔랑 넘겼다. 아마도 유신이 대리모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가능하다면 알파 쪽에 연락해 둥지의 재료를 미리 확보해. 곁에 두기만 해도 해당 알파의 페로몬 덕에 한결 좋을 거야.”

“저, 그렇게까지는.”

아직 임신도 안 했는데. 갑자기 닉에게 연락해 오메가 둥지를 만들게 입은 옷가지 따위를 달라고 요구하다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우물쭈물하는 유신의 태도에, 매튜는 금방 그 난처한 입장을 이해한 듯했다.

“물론 싫으면 굳이 안 그래도 돼. 임신이든, 건강이든,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니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밥 잘 먹고 컨디션 잘 관리하면, 예쁜 아기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진료는 끝이 났다. 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수납이 남았다. 그 뒤에는 처방전을 들고 약국도 들러야 했다.

수납은 1층에서 했고, 그 앞에 의자 여러 줄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검진실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면 뭐 하나, 여기서 다 보이는데. 아니, 진짜 VIP들은 진료만 본인이 직접 받고, 성가신 뒤처리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하려나.

“오래 걸리네.”

교대 시간을 잘못 맞춰 온 건지, 번호표가 줄지를 않았다. 유신은 뭔가 모를 초조함에 딱딱 발을 굴리다, 충동적으로 코트 바깥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그 안에 뭘 넣어 두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손끝에 걸리는 부드러운 감촉에 유신의 눈가가 느슨해졌다.

그것은 닉이 며칠 전 집 앞에 떨어트리고 간 노란색 비니였다. 장시간 머리에 직접 쓰고 있었던 만큼, 은은하게 그의 알파 페로몬이 배어 있었다.

처음 주웠을 때는 유신도 당연히 세탁해 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도 모르게 그 위에 얼굴을 박고 킁킁거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돌려주기도 민망한 노릇이다. 물론 그래도 정말 돌려주려고 했다면 방법은 없지 않았을 터다. 대신 유신은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불안할 때마다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오메가가 알파의 물건으로 둥지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일종의 미니 둥지라고나 할까. 아까 매튜 선생이 한 이야기를 자신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끄응.”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유신은 의자 뒤의 벽으로 콩 하고 몸을 기댔다. 양손으로는 여전히 비니를 꼭 쥔 채였다.

자각 없이 무방비한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것을 본인만 몰랐다. 힘들어 자가 회복 중인 그를,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배려해 약간 빙 둘러 지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다음 히트 때도 실패하면 시험관.”

유신은 노란 비니에 코를 묻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온 후각 신경을 모아 어렴풋이 남은 베르가못 향을 쫓는 중이다.

“시험관까지 가지 말고, 꼭 임신을 해야 할 텐데.”

그가 이렇게 조급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범한 임신이 아니니 동네방네 소문낼 일도 아니고, 배가 불러 오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대학을 휴학할 예정이었다. 이번에 임신했어도 내년 여름에야 낳는다. 다음 달까지는 임신을 해야 아슬아슬하게 가을 학기부터 복학이 가능할 터였다.

만약 더 늦게 되면 무조건 한 학기를 더 쉬어야 했다. 그만큼 졸업이 더 늦어진다고 생각하면, 유신은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뭣보다 다음 달이 지나면, 시험관 시작이다. 난자 채취부터 수고가 배는 더 든다고 하고, 힘든 건 다섯 배, 민망함은 열 배 더해질 텐데.

거기다 시험관을 한다고 임신 확률이 100%도 아니다. 히트도 매달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시험관을 여러 번 한다면 대체 얼마나 더 늘어지게 될까? 가능한 거기까지는 가지 않으면 싶었다.

새삼 가슴이 답답해,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좀 더 맹렬히 비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핸드폰이 윙 하고 울렸다. 아까 진료 들어가면서 진동으로 바꿔 두었더랬다.

밀리는 아직 회사에서 바쁠 시간이고, 뭐지?

“아.”

하지만 핸드폰을 확인한 유신의 뺨이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닉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 뭐해?

닉은 막 유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두근두근하면서 잠시 핸드폰 화면을 지켜보았지만, 다른 일로 바쁜지 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 난 지금 화보 촬영 중이야. 대기가 길어서 지겨워.

“카메라 세팅 끝났습니다.”

“조명 확인해 주세요.”

“거기 소품 이상한데? 누가 담당자야?”

느긋한 닉과 달리, 주변은 촬영을 위한 막바지 준비로 한껏 소란했다. 그중 서넛이 닉에게 달라붙어 옷 주름 방향을 세심하게 손질 중이었다.

☞ 와, 무슨 화보예요?

드디어 유신에게서 답장이 왔다. 스태프들이 제 옷 주름으로 한창 바쁘든 말든, 닉은 눈앞의 핸드폰에 집중했다.

☜ 패션 잡지

오늘 촬영은 콧대 높은 유명 패션지와 명품 브랜드의 콜라보 촬영이었다. 잡지에서도 제일 신경 쓰고 있는 화보 작업으로, 지금 닉이 몸에 두른 것만 해도 가뿐히 몇십만 달러는 넘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할리우드의 그 닉 메드에게는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이런 각 잡힌 화보 촬영을 성가셔하곤 했다.

그나마 요 며칠 유신 때문에 기분이 들뜬 덕에, 오늘 촬영에 대해서는 평소보다 적극적인 편이었다. 덕분에 아이잭의 입이 귀에 걸렸다. 덧붙여 오늘은 중요한 촬영이라 사장인 그가 직접 매니저로 왔다.

스태프들 사이에는 해당 잡지의 편집장인 제릭의 모습도 보였다. 백발의 장발이 인상적인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 오메가다. 안 그래도 방금 전 닉과 인사도 나눴다.

제릭은 원래라면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쓸 정도로 바쁜 사람이지만, 닉의 화보 촬영이 보고 싶다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뉴욕에서 닉 메드의 화보를 촬영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이 나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촬영 준비를 마친 닉은 정말이지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다. 사진사라면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미모, 그야말로 천상의 피사체라고나 할까.

☞ 기대된다.

☞ 뉴욕에서 촬영은 처음이죠?

톡톡 유신에게서 돌아오는 답장에 닉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유명한 카리스마 편집장의 찬사보다, 유신 한 사람의 메시지 답장이 지금의 닉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자각도 없이 닉에게서 알파 페로몬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 철저하게 페로몬을 관리하는 그로서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주변을 압도하는 매력이 흘러넘쳤다.

촬영장에서의 닉은 예의 바르지만 까다로운 데가 있고,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잭이나 올가처럼 오래 알고 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스타일리스트조차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러트가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촬영장의 일부 스태프들은 생각했다. 원래 알파와 오메가는 발정기가 다가오면 페로몬 향이 평소보다 짙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드디어 닉이 누구와 핸드폰을 하는지 눈치채고 아이잭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정작 닉은 유신과 메시지를 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 아니,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보통 LA에 있었으니까요.

한편, 유신은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닉이 뉴욕에서 패션 잡지 촬영을 하는 게 처음인 것은, 팬이 아니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신은 제가 너무 나간 게 아닐까 살짝 반성하고, 황급히 위와 같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물론 닉은 신경도 안 썼다.

☜ 사진 보내 줄까?

그런 매력적인 제안을 유신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잡지 화보 촬영 스포일러라니, 웃돈을 주고도 구하고 싶은 정보다. 하지만 팬으로서, 촬영장 사진을 유출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쉽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닉!”

정작 유신의 대답이 오기도 전에 신이 나서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 어플을 켜는 닉의 어깨를, 아이잭이 붙들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내는 제 연예인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잡지가 나오기 전까지 화보 컨셉은 유출하면 안 돼.”

“그랬어? 왜 아무도 나한테 이야기 안 했지?”

“내가 했어. 예에에에전에 네가 처음으로 화보 촬영할 때 말야.”

그게 몇 년 전 일이냐고, 닉은 입 안으로 툴툴거렸다. 솔직히 아이잭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이야? 여태껏 몇 년간 뭘 촬영하든 관심도 없었잖아.”

“내가 잡지 화보 촬영한다니까, 유신이 기대된다잖아. 무슨 컨셉일지 궁금해할까 했지.”

“그건 즉, 요청받은 것도 아니란 거로군.”

아이잭은 어이없어했다.

“그럼, 손 사진 정도는 괜찮지?”

겨우 아이잭의 동의를 받고, 정확히는 동의도 하기 전이지만 별다른 반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닉은 몇 개나 되는 굵은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클로즈업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로 유신에게 메시지로 보내 버렸다.

☜ (사진)

☜ 미안. 화보 컨셉은 공개하면 안 된대.

하지만 사진을 보내고도 한동안 답장이 없어, 닉은 핸드폰을 든 채로 조금 실망했다.

사실 닉과 유신은 연락처를 교환한 날 밤부터 바로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시작은 닉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면서였다.

그 뒤로도 제법 대화를 주고받아, 이미 서로 간에 꽤나 익숙해진 상태였다.

덧붙여 그 사진은 가브리엘이나 올가에게도 실컷 자랑했다. 참다못한 아이잭이 이미 만 번은 본 거 같다고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드디어 유신에게서 답장이 왔다. 자신이 보낸 사진에 대한 감상인가 싶어 급히 핸드폰을 확인한 닉은, 예상외의 문장에 당황했다.

☞ 니카, 저 지금 병원인데요.

☜ 어디 아파? 무슨 일인데?

다행히 닉의 심장이 이상을 일으키기 전에, 다음 메시지가 금방 도착했다.

☞ 아뇨, 센터 병원이요.

그러고 보면 오늘 대리모 센터에 간다고 했었다. 그 이유는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 유신은 지난번 히트 때 자신의 정자로 인공 수정을 했었다. 임신했다면 자신과 유신의 아이였다.

☞ 임신 아니래요.

억제제를 끊고 첫 번째 히트는 원래 임신이 쉽지 않다고 들었다. 예상했던 결과에 닉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 괜찮아. 다음번에는 임신 성공할 거야.

물론 나름대로 유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 우선, 그냥 우울한 듯하니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사실 닉의 머릿속은 그저 금요일에 유신을 다시 만날 생각으로 가득했다.

☜ 어서 빨리 금요일이 오면 좋겠다.

그날 저녁 닉은 유신에게 밥을 사기로 했다. 명목은 엘리베이터에서 유신이 닉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

솔직히 닉은 이 약속을 데이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신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고, 올가도 아이잭도 너무 티 내지 말라고 매번 뭐라 할 정도였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는 그를 포함 주변의 모두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신이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그렇게 마음을 표현해 오는 사람들을 하도 많이 겪어, 그게 호감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뿐이다. 이 약속이 성사된 이유가 그저 자신에 대한 유신의 호감, 정확히는 팬심 때문인 것은 더더욱 몰랐다. 애초에 유신이 감춘 덕분에 그가 자신의 팬인 것도 닉은 알지 못했다.

☞ 저도요.

잠시 화보와 관련해 사진사가 말을 거는 바람에, 유신의 대답이 묘하게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닉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대신 그저 신이 나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 그날 내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유신.

☞ 괜찮은데.

☜ 내가 중간에 만나기 애매해서 그래.

유신은 온라인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항상 주변의 넘치는 호의를 사양하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는 닉이 유명한 할리우드 슈퍼스타라는 사실에는 약했다.

☞ 아, 유명인이니까.

☞ 알겠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역시 귀엽다니까! 어느새 닉은 대놓고 웃고 있었다. 그 뒤에서 아이잭이 이마에 손을 짚고 싶다는 얼굴로 그런 닉을 살폈다.

곧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어, 메시지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차피 크게 용건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각자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닉은 촬영이 늘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슈퍼스타 모델의 그런 취향을 반영하여, 모든 과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닉이 기분이 좋아 협조적이기도 했고, 촬영은 순조롭게 예상보다도 더 빨리 끝이 났다.

돌아가는 길은 가브리엘도 함께였다. 잡지사와 식당 사이의 협찬 계약 때문에 들렀다고 했지만, 실제는 닉이 촬영을 한다는 이야기에 일부러 시간을 맞춘 쪽에 가까웠다.

매니저로 따라온 아이잭이 운전대를 잡고, 가브리엘은 자연스럽게 뒷좌석 닉의 옆자리로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아이잭이 닉을 나무랐다.

“닉, 연애하는 건 좋지만, 일하는 중에 너무 핸드폰만 붙들고 있지는 마. 그런 태도는 자칫 성의 없어 보일 수 있어.”

닉은 의외로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아이잭. 대기하는 게 너무 지루했어. 하지만 그 점은 앞으로 신경 쓸게. 그런데 한 가지 말해 둘게, 나는 유신과 아직 사귀는 게 아냐.”

“뭐야?! 난 둘이 이미 결혼한 줄!”

가브리엘이 재미있다며 낄낄 웃었다. 닉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러면 좋겠지만, 우린 아직 첫 데이트도 전이라.”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식사지?”

“최고의 저녁을 만들고 싶어. 이래 봬도 꽤나 긴장 중이라고.”

평소 스캔들 난 상대방의 이름도 모르던 것과 대조적으로, 진지하게 결의를 표현하는 닉이었다. 아이잭이 끼어들었다.

“장소 예약은 끝났어. 보안 문제도 있고, 네 의견대로 역시 그냥 레스토랑 하나를 대절하기로 했어.”

“직원들과 이야기는 끝났겠지?”

“매니저나 웨이터 등 직원은 물론이고, 그날 거기 있을 다른 손님들도, 모두 우리가 섭외한 배우들이야.”

믿음직하다는 듯 닉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가브리엘이 아쉬워했다.

“니키! 그런 재밌는 걸 할 거면, 우리 가게 중 한 군데서 하지.”

“사양할게, 가브. 진짜로 그랬다가는 온갖 방향에서 나노 단위로 녹화당하고 네가 계속 놀려 댈 거 같으니까.”

“니키도 참.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망할 친구 가브리엘 르노.”

“하하, 물론 녹화야 할 테지만, 나노 단위로 볼 생각은 전혀 없다고.”

운전석에서 아이잭이 물었다.

“그래서 일단 그날은 그 오메가의 집으로 데리러 간댔지? 직접 운전해서?”

“응, 새로 산 세단을 타고 갈 거야. 그날 쓰려고 급히 계약했지.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야.”

실은 주문이 반년 이상 밀린 인기 차종이라, 아이잭이 웃돈을 주고 넘겨받았다. 하지만 둘 다 그 사실은 모르쇠였다.

“닉, 꽃다발 주문 말인데.”

“꽃이라면 역시 커야죠!”

아이잭의 말에 가브리엘이 끼어들었다. 닉도 바로 동의했다.

“그래, 가브의 말대로 큰 게 좋겠지? 최대한 크고 화려한 걸로 해.”

아이잭이 다시 물었다.

“다이아몬드는 어떻게?”

“최대한 크고 비싼 걸로 해야죠.”

이번에도 가브리엘이 참견했다.

“좋아. 그때 본 걸로.”

어차피 같은 생각이었기에 이번에도 닉은 동의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현악 5중주 라이브 하는 거 말야, 닉.”

“샘플 들었어, 아이잭. 그 팀이면 될 거 같아.”

“니키, 필요하면 내가 피아노 쳐 줄게.”

“거절하지, 가브. 아니, 애초에 그날 넌 레스토랑 근처에 오는 것도 금지야.”

“왜애?!”

“부정 타면 안 돼.”

그것 외에도 금요일 저녁을 위해 아이잭이 닉에게 확인할 사항은 한가득이었다.

아이잭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가브리엘이 기름을 붓듯 부추기고, 닉이 문제의식 없이 동의했다. 덕분에 단순한 저녁 약속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나마 현실 감각이 있는 올가라도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을 세 알파 다 몰랐다.

“금요일이 정말 기대돼.”

닉은 완전히 들떴다.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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