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2/22)

 제1장

“안녕하세요. 여기가 미즈 스티븐슨의 사무실이 맞나요?”

유신은 가볍게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그란 안경을 낀 반백의 중년 여성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다가왔다.

“미스터 유신 리?”

“네.”

“당신일 줄 알았어요. 바로 알아봤다니까요!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죠앤 스티븐슨이에요. 죠앤이라고 불러요.”

눈앞에 한가득 떠오른 푸근한 미소에 유신은 순간 당황했다. 주고받던 이메일에서는 훨씬 딱딱한 인상이었는데. 덕분에 대리모 계약을 취소하러 왔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그는 얼결에 그녀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붙잡은 채 붕붕 크게 위아래로 흔들기까지 했다.

“앗, 저기, 죠앤?”

“네, 유신.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미즈 노비코프는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죠앤은 손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유신의 팔을 당겼다. 그제야 그는 반대편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쪽이 더 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방을 반 나누어 한쪽은 사무 공간, 한쪽은 손님맞이 공간으로 쓰는 듯했다. 창가에는 사무용 책상과 캐비닛, 책장 따위가, 반대편으로는 응접용 소파 세트가 있었다.

“미즈 노비코프! 당신이 기다리던 대리모 후보가 드디어 도착했어요.”

대리모라는 단어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자 유신은 괜히 얼굴이 더 붉어지는 듯했다.

죠앤 스티븐슨은 코스모 국제 대리모 센터의 베테랑 관리 직원이자, 유신의 담당자였다. 유신은 오늘 대리모 계약 때문에 그녀와 약속이 되어 있었고, 계약 상대방과 만날 수도 있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뇨, 저는.”

“반가워요. 올가 노비코프입니다.”

하지만 유신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나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 왔다. 깐깐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펜슬 스커트의 고급스러운 치마 정장에 검은색 단화, 금발을 단정하게 뒤로 틀어 올리고 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아이의 대리모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라기보다 업무 최전선을 뛰고 있는 비서처럼 보이기는 했다.

“유신 리입니다.”

이대로면 점점 더 거절의 말을 꺼내기 힘들어지는데. 난감하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일단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죠앤과 달리 이번 악수는 짧고 사무적이었다.

올가는 예리한 눈초리로 그런 유신을 위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값을 감정하는 것이리라. 그가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유신은 제 귀가 이제 아예 불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오늘 맨날 입던 카디건 말고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왔어야 했나 후회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나답고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제일 좋아하는 옷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비싸 보이는 옷에 비해 너무 낡았다.

어차피 요 몇 년간, 자신은 제대로 된 옷을 사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 여유가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바보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겠지.

좀 놀란 점은 당연히 부부가 함께 올 줄 알았는데 한쪽밖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저 여자가 대리모를 이용할 부부 중 부인일까? 왼손에 결혼반지는…… 없구나.

오메가는 아닌 듯하고, 알파? 아니,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베타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사실 요즘엔 페로몬을 공공연히 드러내거나, 알파 베타 오메가 정체성을 대놓고 묻는 것이 매우 실례였다.

“어머나, 두 분 다 왜 그렇게 서 계세요? 일단 편히 앉으세요.”

죠앤의 권유로 올가도 다시 자리에 앉고, 유신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살면서 쉽게 맞닥뜨리기 힘든 어색한 순간이다.

“뭐 마시겠어요? 다들 커피 괜찮죠?”

정작 방 주인은 명랑하게 웃으며 손님들에게 음료를 권했다. 커피라는 단어에 유신은 빈속이 괜히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저는 지금 커피는 좀 그래서.”

“그럼 주스 어떠세요? 사과주스가 있는데.”

“감사합니다.”

죠앤은 물을 끓이고, 사무실의 미니 냉장고에서 사과주스를 꺼냈다. 곧 향기로운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문득 유신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파일 몇 개가 들어왔다. 라벨에 적힌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어쩌면 두 여자는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이미 저런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선을 깨닫고, 올가가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유신 리, 남성이면서 우성 오메가, 맞죠?”

유신은 얼굴이 열이 오르는 듯했다. 초면인 사람에게서 이렇게 대놓고 오메가냐고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네, 맞습니다.”

저도 모르게 안경을 고쳐 쓰는 그를 왜인지 올가가 빤히 보고 있었다. 원래도 좋진 않았지만 점점 더 이 자리에 있기가 불편해진다.

문득 그녀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많이 나쁜가요?”

“원래는 좋은 편이었는데, 사고 이후 갑자기 나빠져서요. 사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서 안경을 안 껴도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합니다. 렌즈는 눈이 아파서 잘 안 끼고요.”

손끝으로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유신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가 대리모가 안경을 끼면 거절 사유가 되는 걸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니, 차라리 그래서 저쪽에서 거절해 준다면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렇군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올가는 그런 이유로 거절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는 (아마도 유신의 정보로 가득 차 있을) 파일을 손에 든 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아, 한국 출신이시네요. 이쪽에는 유학 오셨군요. 유학은 현대 무용으로 발레는 10대에 꽤 오랫동안. 경력을 보니 제법 잘 췄나 봐요.”

“나쁘지 않았어요.”

그 대답에 올가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어렸다. 유신은 그만둔 지 오래된 발레에 대해 그녀가 왜 굳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전공이 바뀌었죠?”

죠앤이 음료를 가져오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유신의 앞으로는 사과주스가 든 유리잔을, 그녀와 올가의 앞에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커피 잔은 잔 받침까지 딸린 고급스러운 도자기였다.

“네, 아무래도 사고 이후로 전처럼은 출 수 없어서요.”

“전공이 심리학과, 상담…….”

올가가 파일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유신은 주스를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에 당분이 들어가니 기분일 뿐이겠지만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다.

“네, 지금은 뉴욕 대학에서 심리학 학사를 따기 위해 공부 중이에요. 심리 상담 자격증도 함께요.”

“학비가 꽤 비쌀 텐데, 여기.”

“맞아요. 학비가 부족해요.”

고개를 숙인 유신의 시선에 낡은 카디건의 소맷단에 실밥이 하나 삐져나온 것이 보인다. 그는 괜히 옷소매만 당겼다.

항상 돈에 대해 고민하는 만큼,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를 충분히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지만 소리 내서 말하는 순간, 솔직히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왜 자꾸 제 이야기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예민하고 개인적인 내용에 대해, 배려 없이 정곡만 찔러 대면서.

그리고 유신은 깨달았다. 이것은 면접이었다. 지금 자신은 대리모를 하기에 적당한지를 평가받는 중인 것이다.

“아, 그래서 대리모를.”

올가가 납득했다는 얼굴을 했다.

“이유가 명확하니 더 좋네요. 솔직히 저희 측에서는 이렇게까지 조건에 부합하는 분을,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저희 측? 조건?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연속에 유신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지원한 것은 단순한 대리모가 아니었나?

하지만 마냥 그녀만 탓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왜 거절하지 못한 채 여기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 걸까?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올가의 비싸 보이는 옷차림을 보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를 잃은 것이다. 다음 학기 학비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다음 달 월세부터 어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제가, 그런가요.”

“네, 특히 발레를 했다는 부분이요. 제 고용주인 미스터 메드는, 그러니까 닉 메드는 이번 대리모 계약의 상대방이 발레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거든요.”

그렇구나. 고용주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거였어. 저 잘나 보이는 여자도 나름의 고충이 있는 거다.

“발레를 요구하다니 특이하네요.”

“그쵸? 상당히 특이해요. 사실 매번 저런 식이라 밑에서 일하기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이번만 해도 갑자기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올가는 갑자기 흥이 나서 빠른 말투로 떠들었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고용주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대충 상상이 갈 정도였다.

아니, 잠깐.

“방금, 누구요?”

문득 유신은 터무니없는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라뇨?”

“올가, 당신의 고용주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당신이 앞으로 낳을 아이의 아버지죠.”

올가의 대답은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다.

“당신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실 분 아니었나요?”

“제가요? 내가 미쳤다고 그런 막돼먹은 우성 알파 따위의. 앗,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비서입니다. 정확히는 소속사 사장님의 비서지만요.”

올가는 역시 비서가 맞았다. 처음부터 그런 인상이다 했지.

“일은 힘들지만 보수는 좋고, 계산도 항상 확실해요. 대리모 보수도 확실히 지급될 테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유신.”

“그거 다행이네요. 아니, 이게 아니라.”

돈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안심했다가 유신은 아직 자신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고용주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요? 그, 아기 아버지 되실.”

그리고 잘하면 그 아이를 낳는 건 자신이지. 그 생각을 하니 유신은 역시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올가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만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 달라고 제가 미즈 스티븐슨께 부탁드렸죠.”

“비밀로요?”

“네, 그러니까 아이 아버지가 닉 메드라는 거요.”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동시에 유신은 자신의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동명이인인 거죠?”

“동명이인이요?”

“그 이름이요.”

“그 이름?”

“그러니까요. 닉 메드라는 이름.”

올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달리 또 있겠어요? 당연히 할리우드 슈퍼스타인 닉 메드를 말하는 거죠. 아울라이트 시리즈와 스파이 러시아에서 굿바이의 바로 그 미남. 전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알파. 물론 팬 목록에서 전 반드시 빼 주세요.”

마지막 문장에서 올가는 정말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신은 좋아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며 수줍게 입 안으로 웅얼대기까지 한다. 마지막은 의식적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하여, 유신은 못 들은 척 넘기기로 했다.

“이 사실에 대해선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이미 비밀 유지 조항에 대한 서명은 끝났다고 하니, 걱정은 없겠지만요.”

“물론이에요, 미즈 노비코프. 유신이 대리모에 지원할 때 관련 서약서는 모두 제출되었답니다.”

죠앤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 그랬나?

애초에 유신은 신청할 때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자신이 뭘 체크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이후로는 취소할 생각이라 굳이 자세히 확인하지 않았고.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한 번은 훑어야 했다. 핑계를 대자면 리포트가 너무 밀려 있었다. 생활비 때문에 알바나 교내 근로도 빠질 수 없었다.

“오, 미즈 스티븐슨. 그러면 절대 새어 나갈 일 없겠네요. 위약금이 엄청날 테니까요.”

올가의 목소리가 점점 유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거의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대리모로 낳을 아이의 아버지가 닉 메드, 그러니까 ‘니카’라니.

물론 닉 메드는 할리우드 슈퍼스타고, 전 세계에서 최고로 인기 많은 알파다. 하지만 유신에게 닉은 그저 인기 스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10년도 넘게 줄곧 사랑해 온 우상이었다.

다시 말해 유신은 좋아하는 스타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죠앤도 올가도 유신의 이상을 눈치챘다. 죠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신,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뇨, 안 괜찮아요.”

유신은 너무 심하게 뛰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알겠지만 차마 괜찮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죠앤이 토닥였다.

“이런, 놀랐나 봐요. 주스 한 잔 더 갖다줄까요?”

유신은 대답 대신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스를 가지러 일어서는 죠앤에게 올가가 물었다.

“지금 뭐가 문제죠?”

“그래서 제가 미리 언질이라도 해야 한댔잖아요, 미즈 노비코프. 갑자기 할리우드 슈퍼스타의 아이를 낳게 됐다는데, 이 정도 반응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죠앤은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올가가 유신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닉 메드라는 이름이 일반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제가 좀 더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그냥 좀 놀란 것뿐이에요.”

유신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여전히 꽉 잠긴 목소리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였다. 올가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정말 미안해요.”

솔직히 유신은 그런 두 여자의 배려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이 놀라서 이러는 건 맞았지만 그 원인은 둘의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신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는 니카, 그러니까 닉 메드의 열렬한 팬이었다. 좋아한 세월만 10년 이상, 초등학교 꼬꼬마 시절부터의 사랑이다. 그런 우상의 애를 낳게 생겼으니 안 놀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눈치채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들켰다면 가난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끄러움에 그만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장이다)

곧 죠앤이 주스를 다시 가져왔다. 유신은 두 여자들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주스를 쭉 단숨에 들이켰다.

달콤한 액체가 기분 좋게 위장을 채운다. 덕분에 숨 쉬기도 한결 나아졌다.

“이거 맛있어요.”

“다행이에요, 유신.”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겠다며 죠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신은 지금 느긋하게 이런 거나 물을 때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닉의 오랜 팬으로서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어머니는 누군가요?”

싱글 알파가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난자 제공자가 아이의 유전적 모친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대리모와 아이는 유전적으로 상관이 없다.

유신이 알기로 현재 닉은 특정 애인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멋진 금발 미인들과 열애설이 터지던 그답지 않게 몇 달째 조용한 상황이었다. 그가 지금 주 활동지인 LA가 아니라 뉴욕에 와 있다는 카더라가 있었는데, 이 부분은 아직 팬들 사이에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대리모까지 써 가며 아이를 가지겠다는 심경의 변화에는 이런 상황도 영향을 끼쳤을까?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닉이 아픈 건 아니겠지? 아, 안 되겠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터질 것 같잖아.

“유신도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번 대리모 계약에서 난자 제공 옵션을 적용할 거예요.”

하지만 죠앤의 대답은 유신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난자 제공 옵션이요?!”

“네, 당신의 난자를 사용한다는 거죠.”

계속 말하지만 유신은 대리모로 지원할 때, 너무 취해서 신청서에 뭐라고 적었는지 하나도 기억을 못 했다. 애초에 신청 사실 자체도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을 정도다.

길고 긴 설문을 작성하며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 많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다. 대리모를 하는데 왜 학창 시절이나 학력, 가족 관계 등 개인적인 내용을 물어보는지, 인종과 머리 색, 눈동자 색, 키와 체중 등등을 적어야 하는지 이상했었다.

“유신이 난자 제공이 가능하다고 선택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네에.”

“덕분에 그 뒤로 이어지는 상세한 설문을 바탕으로, 우리 센터는 미스터 닉 메드가 요청한 난자 제공자의 조건에 당신이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작성하면서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 놓고, 왜 거기서 그만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실은 죄다 난자 제공자를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생물학적 모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겠지.

“즉, 아이의 어머니가 저라는 거군요.”

“맞아요. 그거죠.”

죠앤의 맞장구가 유신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까는 숨을 못 쉬겠다면 이젠 거의 공황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단순히 애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애 엄마까지 자신이란다. 사실 자신은 섹스를 해 본 적조차 없는데. 애인 없는 세월이 곧 나이였는데.

“이래서 10만 불인 건가?”

유신은 당황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실은 그저 최대 10만 달러를 일시급으로 준다던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광고가 떠오른 것뿐이었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한다면 10만 불 정도는 받아도 될지도. 하지만 왜인지 죠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나, 아니에요! 저희 센터는 과장 광고 방지법을 철저하게 준수한답니다.”

“과장 광고 방지요?”

“네, 최고 10만 불은 대리모 기준이에요. 난자 제공에 대한 비용은 따로 계산된답니다. 유신 같은 경우는 계약 상대방이 유명인이기도 하고 각종 옵션이 추가되기 때문에 그만큼 가산되구요. 우성 오메가라 추가 보너스 있고요. 거기에 몇 가지 비용을 더하고 특별 수당이랑 비밀 유지 수당 등등 모두 포함해서…….”

죠앤은 어딘가에서 계산기를 꺼내 한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경쾌한 손놀림을 유신은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뭘 계산하는지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대충 이 정도일까요? 물론 비용 별도로.”

“아.”

그리고 죠앤이 유신에게 계산기에 나타난 숫자를 보여 주었다. 모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에 유신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저 정도 돈이면 대학 졸업이 문제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없이 졸업 후 한 십 년 놀고먹어도 문제없을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저 정도 비용을 아무 생각 없이 지불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제일 신기했다. 팬인 만큼 닉이 부자인 건 알고 있지만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발 닿고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것이 새삼 실감되었다.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직접 대리모 신청을 하고, 난자 제공 옵션에도 체크하고, 건강 검진 결과까지 야무지게 첨부했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소리다.

허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현실을 앞에 두고 유신은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

솔직히 올가는 센터에서 보내 준 대리모 후보의 프로필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실망했다.

첨부된 흐릿한 사진에는 부스스한 앞머리와 두꺼운 뿔테 안경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마른 체격의 아시아계 남자였다.

첫인상은 이런 게 우성 오메가? 이걸 대체 닉에게 어떻게 보여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둘이 직접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닉이 말한 조건을 만족하는 지원자를 다시 구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운이 좋았다.

참고로 닉이 희망한 조건은, 무려 발레 경력. 검은 머리에 흰 피부의 동북 아시아계. 화려하지는 않지만 미인. 단, 키는 클 것. 성격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움. 우성 오메가이면서 남성.

다시 봐도 어이없다. 이걸 다 충족하는 인간이 존재하겠냐고!

하지만 이 중 서류로는 확인할 수 없는 성격을 제외하면 이번 후보자는 놀랍게도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이름은 유신 리. 25세. 남성이면서 우성 오메가.

동북아시아 국가 중 하나인 한국 출신으로 한국식 이름은 성이 앞에 와서 이유신. 부모는 둘 다 한국인으로 그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단, 본인은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나왔지만 출생지는 미국이었기에 미국 시민권도 가지고 있어서 비자나 그런 쪽의 문제는 없었다.

프로필 상의 키는 5피트 10인치(약 178cm)였는데 이 정도면 남자 오메가치고는 큰 편이었다. 25살이라는 나이도 너무 어리지 않고 딱 적당하다.

검은 머리에 피부색이 어지간한 서양인보다 더 하얗긴 했다. 일단 피부는 좋아 보이고, 아시아 쪽 얼굴은 쉽게 구별하지 못하니까 닉한테 미인이라고 우기면 먹힐지도.

제일 중요한 발레 경력에 관해서는 19살까지 발레를 꽤 전문적으로 했다. 이후 현대 무용으로 전환해 뉴욕으로 유학을 왔다. 제법 실력이 좋았는지 청소년 시절 상을 받은 경력도 있었다. 어쩌면 닉과는 발레를 하던 시절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프로필만 보면 왜 대리모를 하나 싶은데, 바로 아래에서 ‘교통사고’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바로 납득했다. 그 이후로 회복해 일상생활은 가능했지만 춤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전공도 바꾸고 하는 과정에서 장학금 문제 등으로 힘들어진 듯했다. 뉴욕의 물가가 워낙에 비싸다 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올가는 괴로운 과거사로 삐뚤어진, 예민한 성격의 오메가를 상상했다. 이상한 스웨터와 뿔테 안경은 덤이다.

할리우드에는 오메가 배우나 스텝이 드물지 않다. 닉과 관련해서 올가도 같이 일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연예계답게 다들 꽃처럼 화사한 외모였으나 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서 그런지 온갖 것에 예민했더랬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미즈 스티븐슨의 사무실이 맞나요?”

그런 올가에게, 센터에서 마주친 유신의 첫인상은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털 뭉치였다. 어디서 저렇게 지독한 카디건을 구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닉과 데이트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공 수정으로 아기만 만들 뿐이잖아. 우성 오메가에다 닉 메드의 유전자를 섞으면 아이는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이때까지만 해도 올가는 약간 남 일 보듯 냉소적으로 관찰하는 중이었다.

“유신 리입니다.”

하지만 그 오메가와 악수를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두꺼운 테에 비해 의외로 도수가 높지 않은 안경 안쪽에서 별을 박은 듯 반짝이는 초콜릿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올가는 여기 또 하나의 반짝이는 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우성이고 비슷하게 반짝였지만, 닉 같은 우성 알파와는 달랐다.

세상에, 이런 설탕 과자 같은 인간을 봤나? 특히나 긴장한 듯 안경을 고쳐 쓸 때는 얼마나 귀엽던지!

우성 오메가는 다 저럴까? 똑같이 매력적이고 눈을 뗄 수 없지만, 우성 알파는 그 이유가 그들에게 압도당해서다. 반대로 눈앞의 우성 오메가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올가는 이런 자리에서 시시각각 얼굴이 풀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은, 방금 전까지 칼날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굴던 센터 담당자 죠앤 스티븐슨 또한 자신과 비슷하게 저 사랑스러움에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랄까?

그렇다고 막 작고 아기자기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프로필상 5피트 10인치라더니, 확실히 작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필보다 큰 것 같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아담한 이미지지만, 누가 전직 댄서 아니랄까 봐 팔다리가 엄청 길었다.

솔직히 올가가 보기에 대리모가 아니라 결혼 정보 회사나 연애 어플에 등록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와의 하룻밤에 돈뭉치를 던질 사람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그래서 저쪽은 그런 방식이 싫을지도 모른다.

“일단 계약서입니다. 저희 쪽 법률 자문은 완료된 상황이고요.”

“네.”

유신은 올가가 내미는 서류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은 긍정적이야. 처음 닉의 이름을 듣고 놀라서 어쩔 줄 모를 때는 설마 안 할까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금액을 듣고 솔깃해하는 점이 인간적이었다. 확실히 쉽게 거절하기 불가능한 금액이기는 했다. 저쪽은 재정적으로 곤란한 상황이니 더더욱 와닿았을 것이다.

몇 년간 밑에서 일하며 알게 된 건데, 닉은 변덕은 심해도 한번 정해지면 책임감 있게 마무리까지 해냈다. 덕분에 그 지랄 같은 성격에도 영화판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대리모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닉은 예전보다는 덜 무기력했다. 덕분에 아이잭은 점점 더 이 터무니없는 계획에 진심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웃긴 건 자신도 눈앞에 유신을 두고 있으니 아이잭과 비슷한 기분에 젖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아직 수정조차 되기 전인) 둘 사이의 사랑스러운 주니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올가는 벌써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적극적으로 사랑의, 아니, 아기의 큐피드가 되어 줄 결심이 섰다. 아니, 이 경우는 큐피드가 아니라 대모나 예비 후견인인가.

죠앤 또한 올가와 딱히 다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눈앞의 우성 오메가에게 홀려 있었다. 베타인 올가와 달리 오메가인 그녀는 페로몬을 느끼는 만큼 오히려 더 크게 휘둘리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서 있어도 예쁘고, 앉아 있어도 예쁜 게 저런 걸까? 방금 올가가 건넨 서류를 살피는 모습도 더없이 사랑스럽다. 도톰한 아랫입술에 손끝을 가볍게 가져다 댄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서 한껏 집중하는 중이다.

유신의 페로몬은 시트러스 계열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산뜻한 레몬 향이 곁에 있기만 해도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저런 예쁜 오메가가 순수하게 금전적인 이유로 대리모를 하려고 하다니, 죠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좀 더 손쉽고 좀 더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나쁜 유혹이 산처럼 많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이겨 냈을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불법 매춘이 존재하고, 불법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수상한 벌이도 많았다. 솔직히 같이 커피만 마셔도 돈뭉치를 내놓을 호구도 구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닳고 닳은 늙은 오메가답게 이런 생각을 하는 죠앤이었다. 결혼 정보 회사나 연애 어플 정도를 떠올리는 올가가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면 아예 방향을 바꿔 모델 같은 선택지도 있었다. 물론 유신은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사진 찍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뭣보다 저 외모고.

“오늘은 일단 검토만 하고 확정은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뇨, 이왕 할 거 빨리 해 버리게요.”

제 쪽에서 서류를 줘 놓고 도리어 쩔쩔매는 올가를 앞에 두고, 유신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올가는 아닌 척했지만 얼굴은 이미 신이 났다.

“저희야 너무 좋죠.”

어쩌면 유신은 단순히 쿨한 성격일 뿐일지도 모른다. 죠앤은 자신이 오지랖을 부렸다고 살짝 반성했다. 어느새 유신이 계약서의 맨 아래까지 사인을 마쳤다.

급한 호출이 들어와, 올가는 먼저 돌아가 봐야 했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것도 아무나 못 할 짓이었다.

덕분에 계약과 관련된 설명을 해 준다는 핑계로 죠앤은 한동안 유신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히 그 작업을 수행했다. 유신은 혼자 붉어졌다 차분해졌다 하면서도 영리하게 계약에 대해 이해했다.

“그럼, 다음 약속 때 만나요, 유신.”

“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그를 죠앤은 문까지 배웅했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베이터가 뭐냐, 센터 출구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직 근무 중이다. 그녀는 제 안에서 솟구치는 말도 안 되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 냈다.

“폴?”

딱 문을 여는데, 마침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여기 층의 안내 데스크에서 잡무를 보는 직원인 폴 에반스였다. 키가 크고 허우대 멀쩡하지만 약간 썰렁한 분위기의 알파였다. 빨간 머리가 튀고, 코끝의 주근깨 때문에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미즈 스티븐슨! 안녕하세요. 과자 선물이 들어와서 나누는 중이었어요. 손님분 계신 거 같아서 문고리에 걸어 두려고 했는데.”

그리고 폴의 시선이 유신과 닿았다.

그의 동공이 놀라움으로 점점 커져 갔다. 앗, 이거 안 좋은데. 죠앤은 이게 바로 반하는 순간이로구나 깨달았다.

“그럼, 다음에 뵈어요.”

정작 유신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인사만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제 죠앤은 그가 살면서 어떻게 수많은 나쁜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저 오메가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매력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본인이 유혹을 눈치채지 못하니 유혹에 당할 일이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면조차 더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과연 저 무심한 우성 오메가의 마음을 차지할 사람은 누구일까?

유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고 나서야, 폴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고객? 엄청 예쁜데요!”

“폴, 지금은 근무 중인 거 잊지 마.”

죠앤은 일부러 쌀쌀맞게 받아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도 유신의 매력을 알아준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했다.

***

“안녕, 자기야. 나간 건 잘됐어? 벌이가 좋은 알바 면접 보러 갔다며.”

집에 돌아가자 이미 퇴근한 밀리가 유신을 반겼다. 망할 남자 친구 톰과 헤어진 이후, 밀리는 저녁 외출이 확 줄었다. 유신도 평소라면 빈집이 아니라는 사실에 쓸쓸하지 않다며 반가웠을 테지만 오늘만은 그와 마주치기가 조금 버거웠다.

“뭐, 그럭저럭.”

어떤 의미로 밀리의 말은 딱 들어맞아서 더 문제였다. 그래, 벌이가 좋은 아르바이트기는 하지. 지나칠 정도로, 대단히 벌이가 좋은 아르바이트.

유신은 가방 안에 얌전히 들어 있는 대리모 계약서를 떠올리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뱃속에 커다란 돌 하나가 콱 틀어박힌 느낌이다.

누가 할리우드 슈퍼스타 아니랄까 봐 계약서는 길고 길었고 조건이 구구절절했다. 올가는 찬찬히 읽어 본 뒤에 결정해도 된다고 했지만, 어차피 할 거 고민해 봤자 기력만 뺏긴다. 그래도 예의상 한번 훑어보기는 했다.

죠앤이 제시한 금액은 확실히 거절하기에는 지나치게 큰돈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돈 때문만이었다면, 한동안 고민이야 했겠지만 결국은 거절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받자마자 사인까지 끝내지는 않았겠지.

다 의미 없는 가정이다. 애초에 상대가 닉이라는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자신에게 거절은 불가능했다. 유신은 제 머릿속이 완전히 젤리처럼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밀리.”

“응, 자기야.”

“내가 니카의 팬인 거 알지?”

“자기 방 벽에 붙인 포스터의 그 사람?”

“맞아, 그 사람.”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할리우드 슈퍼스타인, 자기가 항상 니카라고 부르는, 엄청 잘나고 잘나고 잘나신 그 우성 알파 닉 메드 말야?”

밀리가 장난스레 빈정거려 유신은 반사적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오, 밀리.”

“알고말고. 자기가 그의 열렬한 팬이잖아.”

사실 벽에 대놓고 포스터를 두 장이나 붙여 둔 시점에서 이미 비밀은 아니었다. 유신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닉의 열성 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조차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을 향하는 밀리의 눈빛이 너무도 평소대로라서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유신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내가 니카의 아이를 가지면 어떨까?”

그것은 지금 유신에게 닥친 상황을 말 그대로, 사전적으로 표현한 문장이었다.

밀리의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제 친구를 살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신은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걸까 두려웠다.

“설마.”

다음 순간, 그가 놀랐다는 듯 숨을 들이켤 때는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다.

“밀리, 그게.”

“드디어 미인계로 닉 메드를 잡아먹기로 한 거야, 유신?”

하지만 밀리는 해맑게 되물었을 뿐이었다. 유신은 갑자기 얼굴이 뜨거운 기분에 괜히 얼굴 앞에서 손을 부쳤다.

“미인계라니 말도 안 돼. 가능할 리 없잖아.”

“겸손하긴. 근데 정말 뭐야? 갑자기 닉 메드의 애라니! 진짜 몸으로 유혹할 마음이 든 건 아닐 거고.”

“그냥 가정이야, 가정. 한번 상상해 보자는 거지.”

“근데 스캔들 내 보겠다 이런 것도 아니고, 어떻게 갑자기 애 이야기부터 튀어나와?”

섹스 경험도 없으면서 갑자기 너무 나간 거 아니냐고, 밀리는 의아해했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유신의 한숨을 밀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가져, 유신! 자기가 얼마나 예쁜데 그래.”

“하하, 고마워.”

밀리의 격려에 유신은 어색하게 웃는 게 다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죄다 농담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이쪽은 유신이 대리모 신청을 진작에 취소했다고 생각하는 만큼 지금 상황을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뭔가 눈치로 읽었는지 갑자기 밀리가 눈을 치떴다.

“유신, 자기야! 혼자 엉뚱한 일 벌이는 거 아니지?”

“아냐.”

유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벌이는 건 아니다. 이미 벌였을 뿐.

밀리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걱정이야. 내가 얼마나 자길 걱정하는지 자기만 모르지.”

그런 밀리를 보고 있으니, 유신은 문득 비밀 유지 조항이 걱정되었다.

지금이야 얼렁뚱땅 감춘다 해도, 배가 불러 오면 감추려야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비밀 유지가 성립이 가능할까? 아이 아버지가 닉인 것만 비밀로 숨기면 되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암담해진다. 유신은 마음이 무겁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나 피곤해서 좀 쉴게.”

괜히 찔리는 기분에 밀리와는 눈도 못 맞췄다. 불편한 다리가 스트레스로 더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먹은 거라곤 커피의 설탕과 우유, 그리고 주스 두 잔뿐인 위도 아픈 거 같고.

“유신.”

갑자기 진지하게 이름이 불려 유신은 흠칫 놀라서 멈추었다. 찔리는 게 하도 많다 보니 반응이 절로 과해졌다.

“으, 응?!”

“잠시 앉아 봐.”

밀리는 놀라지도 않고 손짓으로 유신을 불렀다. 그 손끝은 제가 앉은 식탁 맞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추궁이라도 하려나 염려하며 유신은 일단 앉았다.

하지만 밀리는 가스레인지 위의 커다란 냄비에 든 것을 한 그릇 듬뿍 퍼서는, 유신의 앞으로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이게, 뭐야?”

“닭고기 수프.”

“그건 나도 보면 알아.”

누가 봐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수프였다. 뽀얀 국물에 닭고기 살과 각종 야채, 파스타 따위가 듬뿍 들어 있다.

밀리는 유신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자기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아냐, 라떼도 설탕 넣고 먹었고, 주스도 두 잔이나 먹었는데.”

“악! 그게 농담이 아닌 게 더 끔찍해. 됐으니까 그거 다 비울 때까지 내 앞에서 못 일어날 줄 알아.”

제대로 먹는지 마는지 지켜보겠다는 밀리의 시선을 받으며 유신은 천천히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삼계탕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맛이 달랐다. 하루 종일 굶은 위장에 따뜻한 국물이 배 속에서 퍼지자 기분이 느긋해졌다.

“고마워.”

“뭘, 이걸 가지고. 내가 평소에 자기한테 하는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극히 일부라고.”

“응, 알고 있어.”

유신이 잠자코 고분고분 대답하자 밀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못 이기겠다는 표정이었다.

“알면 나한테 잘해.”

“응.”

역시 밀리에게는 (아이 아버지의 이름만은 비밀로 한다 해도) 조만간 이번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될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신은 아주 천천히 수프를 다 비웠다.

***

미안, 밀리. 혼자 엉뚱한 일 벌이지 말라고 했던 약속은 역시 못 지킬 거 같아.

주삿바늘이 팔뚝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유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꾹 눌러, 유신. 문지르면 안 돼.”

후덕한 체구의 흑인 남자 간호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유신의 팔에서 뽑은 혈액에 바로 라벨을 붙여 정리한다.

“데이브, 오늘은 그거면 되나요? 간단하네요.”

“무슨 실험실 모르모트 같은 이야기를 쉽게도 하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농담 섞인 유신의 말에 남자 간호사, 데이브가 아니라며 바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보는 유신의 시선에, 그는 곧 졌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지난번에 내가 좀 많이 뽑았지? 미안. 채혈도 검사도 오늘로 끝이야.”

지금 유신은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건강 검진실에 있었다. 쉽게 말해 검사실이다.

코스모 센터를 처음 방문한 것이 벌써 지난주, 날짜로 치면 거의 열흘이 지났다. 그새 검사실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센터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흰색의 청결한 공간으로, 프라이버시를 해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유신은 여기서 다른 방문객과 마주친 적이 전혀 없었다.

간단한 건강 검진은 물론, 호르몬 주기와 임신과 관련된 몇 가지 추가적인 검사도 했다. 현재까지는 다 문제없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어제 달러로 만 단위의 계약금이 유신의 계좌에 입금되었다. 솔직히 아직 써도 좋을지 마음의 결정은 하지 못한 주제에, 당장 급한 청구서 몇 개를 바로 지불해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

“한동안은 나랑 볼 일 없겠다. 나는 아쉽지만, 유신은 속 시원한 거 아냐?”

돈 생각에 순간 유신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데이브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베타치고 꽤나 세심한 성격이었다.

“하하, 아니에요.”

코스모 센터는 건강 검진실 이용자 간의 프라이버시뿐만 아니라, 각 직원들 사이의 정보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데이브는 유신의 대리모 계약 상대방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닉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했던 유신이었지만.

알고 보니 데이브는 그를 사연 많고 돈에 팔려 온 불쌍한 오메가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처음에 고등학생이라고 착각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이제는 데이브도 유신이 20대 중반의 훌륭한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강렬한 첫인상의 영향이 쉽게 가시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닉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만큼 오해를 풀기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자신이 돈에 팔려 온 것과 다름없는 신세인 것도 사실이고.

“유신은 밥을 좀 더 잘 먹어야 해. 피를 뽑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하는지 알아?”

데이브가 가는 팔뚝을 가리켜, 유신은 피를 뽑기 위해 걷어 올린 옷소매를 급히 내렸다. 그 팔은 신기할 정도로 가늘면서 동시에 근육이 완벽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대체 평소에 뭘 하는 거냐고 데이브의 의심을 더 부채질하기도 했지만.

“신경 쓸게요. 고마워요.”

난처하다. 보통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다니다 보니 이 정도로 마른 줄은 주변에서 잘 몰랐다. 하지만 음식이 잘 안 먹히는 걸 어떡하겠어.

그래도 피 뽑은 날은 잘 먹으려고 신경 쓰고 있다. 지난번엔 거의 한 컵을 뽑아 가는 바람에 이건 진짜 오늘 제대로 안 먹으면 죽겠구나 걱정했더랬지.

그래서 그날 저녁에 자신이 뭘 먹었더라? 왜 또 뭘 먹은 기억이 없지. 설마 이날도 뭘 안 먹었나.

“끝나고 미즈 스티븐슨의 사무실로 가?”

“네, 죠앤과 약속이 잡혀 있어요.”

데이브가 갑자기 눈을 흘겼다.

“네 담당인 그 여자, 무섭지? 일은 잘하지만 인간미가 없어서.”

“아뇨? 정말 친절하시지 않나요?”

그야 메일을 주고받을 때까지는 유신도 사무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고 보니 굉장히 살가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푸근한 눈웃음이나 만날 때마다 뭔가를 자꾸 먹이고 싶어 하는 부분은 하우스메이트인 밀리와도 닮았다.

“그래, 그래. 네가 좋다면 상관없지.”

유신의 어깨를 데이브가 가볍게 토닥였다.

마침 창가에서 바람이 불어 블라인드가 서로 부딪치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이브가 속삭였다.

“맞다. 오늘 일기 예보에서 비 온다더라.”

“정말요? 저 오늘 우산 없는데.”

“끝나면 최대한 빨리 집에 가. 본격적으로 내리면 우산 없이는 안 된대. 유신은 몸이 약해서 비 맞으면 큰일이야.”

데이브의 시선이 스웨터 아래로 보이는 유신의 마른 팔목을 향했다. 스웨터에 받쳐 입은 셔츠의 소매를 아래로 당기며, 유신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안 약해요.”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평균보다 센 쪽이라고 생각하지만. 왜인지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메가가 체력이 약할 거라고들 생각하는데 그것은 편견이다. 실제로도 남자 베타와 남자 오메가의 근력을 비교했을 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고 했다. 물론 알파와 비교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중앙 엘리베이터 말인데, 좀 이상해서 점검한다니까 잘 보고 타, 유신.”

“정말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거 말고도 데이브는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했다. 유신은 웃으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검사실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유신은 죠앤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

“대리모 하면 보통 시험관 시술을 떠올리는데, 유신 같은 경우는 난자 제공도 하는 만큼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죠앤의 설명에 유신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네에.”

“아무래도 인공적으로 난자 채취를 하게 되면 모체가 아주 힘드니까요. 특히나 남성 오메가의 경우 임신 자체로도 신체에 부담이 큰 만큼 가능한 피하는 추세랍니다. 그래야 임신 후 경과도 좋고요.”

이상한 화제는 아니었다. 필요한 검사가 끝났으니 향후 일정에 관해 설명을 듣는 것뿐. 하지만 아직 섹스 미경험자인 유신은 난자라거나 임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냥 부끄러웠다.

“그러면, 어떻게.”

“보통은 오메가의 히트에 맞춰 2회 정도 인공 수정을 시도해 보고, 실패하는 경우에만 시험관 시술로 넘어가요.”

“그렇군요.”

유신도 그사이 조금은 조사를 해서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여성은 배란기에, 오메가의 경우 발정기인 히트에 배란이 일어나고, 이때가 임신이 가능한 가임기가 된다. 이 시기에 맞춰 정자를 자궁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 ‘인공 수정’이었다.

‘시험관 시술’의 정식 명칭은 ‘체외 수정 및 배아 이식’이다. 오메가에게서 난자를 채취하여 알파의 정자와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수정란을, 일정 시간 성장시킨 후 오메가의 자궁에 이식하는 기술이었다.

“문제는 오메가의 경우에는 히트 기간 중에 인공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인데요. 따라서 본인의 희망 여부에 따라, 인공 수정은 집에서 직접 해도 상관없어요. 히트 기간 중에 병원으로 이동하다 보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내용은 인터넷에는 없었다.

“직접 한다구요?”

“네, 자궁 안쪽까지 닿는 특수 주사기를 사용하면 가능해요. 간단하답니다.”

“간단.”

당황해 중얼거리는 유신을 향해, 죠앤은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어차피 병원에서 해도 자궁이 열리기 전까지는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알파 오메가 관계의 경우 오메가의 성적인 흥분이 높을수록 임신 확률이 올라가다 보니, 자칫 꽤나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거든요.”

“음, 집에서가 좋겠네요.”

하지만 이어지는 낯 뜨거운 설명에 유신은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지만 굉장히 부끄러운 활동이라는 것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오메가들이 집에서 직접 시술하는 방식을 선호하긴 해요. 특히 억제제 중지 후 첫 번째 히트의 경우는요. 그쪽이 임신 확률도 높아 저희 센터에서도 추천하고요. 만약 파트너가 따로 존재한다면, 도움을 받아도 상관없어요.”

“도, 도움요?”

“네, 성적인 흥분을 돋울 수 있도록요. 물론 태어난 아이는 필수로 친자 검사를 하도록 되어 있어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아무래도 센터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니까요.”

“설마 그 사고라는 게.”

“네, 가끔 있거든요.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다른 경우가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신을 향해 죠앤이 후후 웃었다. 사실 지금 그녀의 발언은 대리모가 아니라 평범한 커플이나 부부의 케이스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굳이 거기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의외로 세상에는 별일이 많다.

하지만 이번 케이스처럼 유명인이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 것도, 그 대리모가 난자 제공자와 같은 사람인 경우도 처음이었다. 유명인일수록 아이의 생물학적 모친으로 다른 유명인이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애초에 유신 같은 우성 오메가가 대리모까지 하는 케이스 자체가 드물었다. 덕분에 엄청난 수수료가 오가는 만큼 코스모 센터는 이번 일을 어떻게든 성사시킬 작정이었다. 그것과 별도로 죠앤이 이 사랑스러운 우성 오메가에 푹 빠져 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유신의 경우에는 지금 특별히 다른 파트너는 없다고 했으니 그럴 일은 없겠네요.”

“네! 그러니까, 아니, 없어요.”

유신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죠앤은 테이블에 놓인 쿠키 접시만 유신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밀어 주었다. 어떻게 봐도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유신은 차마 과자로 손을 가져가지 못하고, 손끝만 괜스레 접시 테두리를 두드렸다. 죠앤이 시선이 눈앞의 헐렁한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로 향했다.

“억제제는 끊었죠?”

“네.”

유신은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애매하게 웃었다.

원래 알파-오메가의 모든 임신 준비는 억제제를 끊는 데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약으로 억제되던 호르몬이 활성화되며, 목덜미의 호르몬샘에서 풍기는 향이 짙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처방받은 향기 패치를 사용하니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현재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가 발정기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데는 역시나 억제제의 상용화 덕이 컸다. 시판 중인 발정기 억제제는 비타민보다 부작용이 적다고 알려져 있고, 반대로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알파도 오메가도 모두 일상적으로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원래 알파와 오메가의 발정기는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한 달에서 석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왔다. 길면 한 번에 5일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억제제를 먹으면 알파와 오메가 모두 발정기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페로몬 향도 옅어지고, 오메가의 경우에는 피임 효과도 있었다.

단,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 최대 3년에 한 번의 휴약기가 필요했다. 그 시기에는 원래보다 훨씬 가벼운 발정기가 찾아오고, 낮은 확률이지만 임신도 가능했다. 이에 맞춰 자녀 계획을 세우는 부부나 커플도 많았다. 좀 더 오래 약을 끊으면, 둘째 달부터는 임신 확률도 다시 높아졌다.

시간을 맞춰서 먹는 것이 원칙이지만, 요즘 나오는 약은 효과가 좋아서 어느 정도 시간이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거 믿고 약을 대충 챙겨 먹다가 사고가 많이 난다는 점이다.

요즘 세상의 대부분의 젊은 오메가가 그렇듯, 유신은 제대로 된 히트를 겪은 적이 없었다. 발현 때는 징조만 보여도 주변에서 긴급 억제제를 투여했고, 휴약기는 병원과 상의 후에 이루어졌다.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남자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고민할 만한 거리라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남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고, 자신도 페로몬이 나오며, 매일 알약 하나씩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베타와 다르다는 인식 없이 살아왔다.

“순조롭네요. 이 정도면 굳이 히트 유도제는 먹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다음 달 이후로 두 번째 발정기에 대해서는 주기에 따라 고려해 봐야겠지만요. 앞으로도 매일 아침 체온 재서 센터 어플에 입력하시는 거 잊지 말아요.”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죠앤은 유신의 차트를 팔랑팔랑 넘기며 확인했다.

“지금 추세면 일주일 뒤에 첫 번째 히트가 올 거예요, 유신.”

“이번과 다음번까지 인공 수정이고, 그다음이 시험관이라는 거죠?”

“맞아요. 이왕이면 인공 수정으로 성공하면 제일 좋고요.”

“그렇긴 하겠네요. 아무래도 그편이 덜 힘들다고 하니까.”

어차피 억제제 휴약 후 첫 번째 히트는 딱히 낯설 것도 없었다. 하지만 최종 목표가 임신인 이상, 이전과 각오가 같을 수는 없었다.

“말했죠? 오메가는 성적 흥분이 높아져야, 임신 확률이 올라가요.”

덕분에 갑자기 죠앤이 저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동요를 감추기 힘들었다. 유신은 괜히 소파 위에서 엉덩이를 꿈지럭거렸다.

“그렇다면서요?”

“유신은 히트 때 섹스해 본 적 있어요?”

“없는데요.”

히트 때가 문제가 아니라, 섹스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울고 싶은 유신의 마음과 달리, 죠앤은 단순하게 그 좋은 걸 안 해 봤냐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이번엔 확실히 굉-장하겠네요.”

유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는 ‘굉장’이라는 단어에 묘한 강세를 주며 뒤를 길게 늘였다. 굳이 따지면 ‘괴앵장’에 가깝달까?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뒤쪽 캐비닛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그것은 어른의 장난감이었다. 아니, 의료 기기인가?

솔직히 이런 물건들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는 유신으로서는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했다. 유신은 하나하나 물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봐도 딜도로 보이는 크고, 중간에다, 작은 크기의 실리콘 막대가 세 개, 각각 포장 상자에 든 채. 콘돔 박스가 하나. 러브 젤 여러 통.

그중 제일 작은 딜도 박스와 콘돔 박스에는 하얀 바탕에 파란 고딕체로 ‘코스모 대리모 센터’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들 포장이 심플했다. 흔히 야한 물품 하면 떠오르는 유치한 빨강이나 화려한 금색의 흘림체 따위는 없었다.

제일 작은 딜도는 손가락 하나보다 조금 굵은, 얇은 막대 형태였다. 표면은 전체적으로 맨질맨질하고 색은 회색이다. 가늘지만 길이가 길고, 끝으로 갈수록 더욱 가늘어졌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정체 모를 버튼이 대단히 수상해 보인다.

중간 크기의 딜도는 굵기는 손가락 세 개를 합친 정도에 표면이 구슬처럼 올록볼록했다. 선명한 파란색이 어울리지 않게 경쾌하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센터 마크와 색이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일 큰 딜도였다. 형태는 발기한 남자의 성기를 그대로 본떴고, 거의 어린애 팔뚝만큼이나 굵고 컸다. 거기에 색상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찬란한 형광 핑크색이었다.

셋 중 유일하게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들어 있어 표면에 불거진 핏줄 형태까지 선명하게 잘 보였다. 군데군데 울퉁불퉁하게 돌기가 붙어 있고 손잡이 쪽에 이어진 전선 끝에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버튼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도 오늘이 히트 전 마지막 만남일 것 같으니 여기서 간단히 설명해 드릴게요. 물론 매뉴얼은 메일로 보내겠지만요, 사실 그런 문서는 크게 도움이 안 되잖아요. 이런 건 사용법보다 느낌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죠앤은 유신을 앞에 둔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딘가 신이 나 보였다.

“일단 히트 중에 흥분으로 자궁 입구가 열리도록 하는 게 먼저예요. 그다음 이걸 이용해서…….”

그녀가 집어 든 것이 그나마 제일 작은 딜도 상자라는 사실에 유신은 순간적으로 안심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이 매우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자가 자궁에 들어가게 하는 거죠. 이건 그러기 위해 특수 제작한 물품이고요. 여기 버튼을 누르면 안쪽이 열려서 정자가 든 시험관을 넣을 수 있어요. 두 번째 버튼을 누르면 이 끝에서 주사기처럼 뿜어져 나오게 돼요.”

죠앤은 능숙하게 박스에서 비닐이 붙은 부분을 통해 보이는 딜도의 각 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해 나갔다. 유신은 제 귀를 의심하며 얼어붙었다.

잠깐, 지금 자신더러 뭘 하라고? 어디다 뭘 들어가게 하는데, 거기에 대체 뭘 끼워!?

“그게 가능해요?”

“물론이죠. 생각보다 간단하고,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유신.”

정작 죠앤은 빵에 잼이라도 발라 먹으면 된다는 듯한, 전혀 별일 아니라는 태도였다.

요약하자면 히트 때 혼자 저걸로 자위를 해서 흥분한 다음, 딜도에 붙은 일종의 주사기 같은 장치로 직접 자궁에 정자를 넣으라는 의미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사기가 내장된 딜도가 셋 중 제일 가느다랗다는 사실이었다. 저 정도면 잘하면 엉덩이에 들어갈 것도 같은데.

아니,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이야? 유신은 제풀에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엉덩이에는 좌약보다 큰 걸 넣어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어느새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니, 얼굴만일까? 상상만으로 가는 허리와 엉덩이 안쪽이 움찔대는 기분이었다.

“처음도 아니잖아요? 경험이 꽤 풍부한 걸로 알고 있는데.”

죠앤은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코스모 센터에 다녀오자마자, 유신은 제일 먼저 자신이 제출한 대리모 지원서부터 살펴보았다. 솔직히 보는 내내 몇 번이나 한숨을 토했는지 모른다.

난자 제공을 신청한 건 그렇다 치자. 아무리 술기운에 작성했다지만, 성 경험 유무에 ‘풍부함’이라고 당당하게 체크해 놓았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제 입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경험이 없다고 정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요! 풍부하고말고요.”

사실은 자위도 잘 안 하거든요? 그냥 가끔 오른손의 신세를 지는 정도가 다거든요?

콘돔조차 살 일 없이 살아왔건만, 갑자기 대·중·소 딜도 3개라니.

덧붙여 그럴 만한 상대가 없다고 에둘러 말했더니, 지금 고정된 애인이 없다고 알아들은 듯했다. 더 깊게 이야기하기도 그래서, 딱히 그 오해를 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사춘기 때 발레만 하느라 그런 쪽에 늦되다 해도, 유신도 보통 사람 정도의 성적 호기심은 있었다. 어느새 시선이 가장 큰 딜도를 향하고 있었다.

물론 딜도의 압도적인 크기와 쓸데없이 정교한 모양부터가 눈길을 끌기는 했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는 점은 역시 저 색깔이었다. 절대 놓치기 힘든 형광 분홍색.

하필이면 얘 혼자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들어 있어서 더했다. 근데 이렇게 큰 게 사람 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맞나?

“이거 너무 큰 거 아닌가요?”

“이왕 즐기려면 이 정도는 돼야죠.”

죠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유신은 반사적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어떻게 봐도 이 정도 사이즈가 보통이라는 표정이다. 설마 모르는 사이에 저게 세상 남자 성기의 평균 크기가 된 걸까? 자신은 오메가라서 평균보다 작은 거고?

하지만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 남자 목욕탕에서 봤던 다른 어른들의 거시기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자신의 성기도 한국인 평균 크기는 된다고 알고 있었다.

설마 한국인 평균으로 생각해서 그런가? 유신은 형광 핑크의 거대 딜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저 크기가 세상 평균이면 참으로 좋겠지만, 알파로 한정해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형광 핑크 딜도는 평균 크기를 보기 좋게 웃돌고 있다. 죠앤은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실은 그녀는 유신에게 필요한 물품들과 함께 자신이 최근 구매한 딜도를 잘못 꺼냈다. 미사용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마침 포장도 요란한 붉은색이나 천박한 금색이 아니라 깔끔한 투명 케이스였다.

덕분에 의료 기기 사이에 껴 있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물건 자체가 그로테스크하게 튀고 있을 뿐.

정말로 순수한 실수였다. 절대 사심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수줍어하는 유신을 보고 있으려니 잘한 건가 순간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좀 부끄러운 것은 덤이다.

그래, 솔직히 이제는 인정하자. 죠앤은 이 예쁜 오메가를 ‘보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오늘 만난다는 약속에 들떠서 어제 퇴근길에 제과점에 직접 들러 쿠키를 사 놨다는 것을 동료들이 알면 분명 놀릴 게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정작 유신은 오늘은 영 생각이 없는지, 입에 가져가는 대신 접시만 만지작거려 안쓰러웠다.

그래도 저 빨간 스웨터는 끔찍하다. 오늘 입은 빨강, 노랑과 녹색이 뒤섞인 체크무늬 코트도 마찬가지다. 지난번 입었던 카디건도 그렇고, 어디서 저런 걸 구해 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저건 무슨 변장일 수도 있다. 본인의 압도적인 사랑스러움 오라를 숨기기 위한.

그리고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실패했다. 거적때기를 입는다 해도 이 오메가는 사랑스러울 테니까. 아니, 그렇다고 저 스웨터가 거적때기보다 낫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인공 수정에 대해 설명할 때 하나하나 뺨을 붉히는 것도 귀여웠다. 지원서에 성 경험이 ‘풍부하다’라고 체크했지만, 그런 것치고 반응이 순진했다. 어쩌면 얌전한 섹스만 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애인이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고.

분명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멋진 알파들하고만 사귀었을 거야. 사실 성적인 화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도 이미지에 안 맞긴 했다. 지금 이 정도의 반응이 딱 그답고 좋달까.

실제로 유신은 취기에 거짓으로 ‘성 경험이 풍부하다’라고 체크했을 뿐, 실은 섹스를 해 본 적이 (앞도 뒤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 죠앤의 눈은 꽤 정확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저 이 사랑스러운 오메가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핑크 딜도를 꺼낸 것은 실수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 있을까. 아마도 저 딜도가 그의 밤에 꽤나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줄 텐데.

“이걸 다 저한테요?”

“네, 그래요.”

죠앤은 테이블 위의 성인 용품들을 차례로 챙겨 쇼핑백에 담아 유신에게 건넸다. 물론 문제의 핑크 딜도 포함이다. 맨 위에 센터의 홍보물인 휴대용 티슈를 몇 개 올려서 내용물을 가리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꼭 히트 때만 쓸 필요는 없어요. 요즘 고정된 데이트 상대가 없다고 했잖아요? 이번 일 때문에라도 한동안 새로 만나지 못할 텐데, 그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편하게 사용하세요.”

“감사합니다.”

유신은 얌전히 받아 들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숙인 목덜미와 귓가의 하얀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에 죠앤은 좋은 일을 했다고 자신의 선행에 만족했다.

“매일 아침 어플에 체온 및 정보 입력하는 거 잊지 말고요.”

“네.”

“히트 때 인공 수정 시도 후에는 관련 보고서를 올려 주세요. 어플 메뉴 아래쪽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다 유신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반짝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저기, 임신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바로 확인할 수 있나요?”

“임신 여부는 착상 이후 페로몬 변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보통 1~2주 정도 걸려요. 히트 중에는 알 수 없어요.”

“아, 그렇구나.”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름 임신에 대한 부담이 있는 듯했다.

어차피 억제제를 끊고 찾아오는 첫 번째 히트는 아직 피임 효과가 남아 있어 임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굳이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해서 의욕을 떨어트릴 필요는 없겠지. (정작 당사자가 지금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인공 수정에 사용할 정자는 오늘내일 중으로 확보할 거라고 들었어요. 히트가 시작하기 전날 집으로 전달할 테니, 수령 후에는 꼭 연락 주세요.”

사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자의 주인은 닉 메드였다. 그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의 얼굴이라도 떠올린 듯, 유신의 가는 어깨가 움찔했다.

“네.”

짧게 대답하는 예쁜 얼굴이, 어딘가 목이 타는 것 같아 보인다고 죠앤은 생각했다.

***

닉은 지금 병원에 있었다. 정확히는 종합 병원 부속 시설인 ‘코스모 대리모 센터’였다.

“정자 채취?”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무리 그라도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면 대리모로 아이를 가지기로 한 이상 당연히 해야 할 절차였다.

올가는 의사를 펜트하우스로 부르겠다고 했지만, 닉이 제가 직접 간다고 했다. 그 문제의 센터를 직접 눈으로 봐 두고 싶어서였다. 지난번 올가가 코스모 센터에 다녀온 이후로 영 기색이 수상한데, 무슨 꿍꿍이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정작 그런 것치고 올가가 준비한 대리모 후보에 대한 파일은 열어 보지도 않고 던져둔 채지만. 그런 만큼 당연히, 그 대리모 후보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올가의 기분이 들떴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녀와.”

당연히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잭이 선선히 동의하는 데는 조금 놀랐다. 그는 닉이 조금이라도 의욕이 생겼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배우 은퇴보다는 애 딸린 배우 쪽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고나 할까.

“닉, 대신 시간 나면 대본도 좀 보고.”

“네에, 네에.”

“그리고 병원엔 내가 매니저로 따라갈 거야.”

“윽, 역시.”

그나마 가브리엘의 귀에 이야기가 안 들어가 다행이었다. 알면 너무도 재미있어하면서 따라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잭은 항상 가브리엘에게 약했기에 둘 다 함께 오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닉은 오늘 여기 혼자 왔다. 아이잭이 뉴욕의 교통 정체에 휘말려 한 시간째 꼼짝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뛰어서라도 오겠다고 했지만, 나이를 생각해서 건강을 챙기라고 닉이 말렸다.

물론 왜 헬기를 타지 않았느냐고 비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교통 정체를 피해 홀로 지하철을 탔다. (아이잭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위험한 짓 좀 하지 말라고 발끈했다)

솔직히 내려서 오르막을 제법 걸어야 했을 때는 귀찮음에 조금 후회했다. 혹시라도 다음에 올 일이 생긴다면, 기다리더라도 아이잭의 차를 얻어 타거나, 리무진 택시를 부르거나, 직접 운전을 해서 와야지, 원.

코스모 대리모 센터는 하얗고 밝고 청결했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깔끔한 인상이었다. 닉은 올가가 꽤 괜찮은 센터를 골랐다고 만족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녀가 그렇게까지 목맬 만한 요소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있다 보면 느낌이 오겠지. 약속 시간도 아직 여유가 있고, 사실 꼭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닉은 느긋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1월이라 벌써 코트 차림인 사람들도 많았다. 평소라면 자신도 얇은 캐시미어 코트를 골랐을 것이다.

닉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상한 보라색 비니, 얼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잠자리 선글라스, 검은색 마스크, 온통 검은색의 옷차림.

다시 봐도 꽤나 웃긴 꼴이었다. 나름 변장이다. 덕분에 지하철을 타고 ‘여기까지 오도록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세도 일부러 평소보다 구부정하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평범함을 연기한다고나 할까? 화사한 금발을 가리고 아무렇게나 입은 채 이러고 있으면, 의외로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더라도 꽤 닮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스크린 안이나 대중 매체 앞에서 평소 그가 보여 주는 꼿꼿한 자세가 눈에 익어서 더 그런 듯했다. 물론 지금처럼 얼굴과 머리칼을 가린다는 가정하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조금만 방심하면 발레를 하던 때의 버릇이 나와 정자세로 서게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꼴을 하고 있어도 확실히 꽤 멋지단 말야. 닉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제 모습에 은근히 만족했다.

그때 문득 동양인 남자 하나가 옆에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일 먼저 닉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빨강, 노랑, 녹색이 뒤섞인 체크무늬 코트였다. 거기에 두꺼운 안경을 끼고, 긴 앞머리가 헝클어져 이마를 덮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닉은 그 검은 머리 안경의 마른 얼굴이 꽤나 하얗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흴지도 모르는데, 이는 흔치 않았다.

뭣보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닉은 점점 더 골똘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관찰하는데도 안경은 닉의 시선을 깨닫지 못한 채 무심하게 엘리베이터의 층 표시만 보고 있었다. 분명 평범해 보이는데, 마치 자신처럼. 아니, 어떤 면에서는 자신 이상으로 남의 시선에 익숙해 보이는 부분이 신기했다.

어느새 본인도 깨닫지 못한 사이, 닉은 깊이 빨려 가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유신은, 자신을 보는 수상쩍은 시선을 깨달았다.

길쭉하고 커다란 남자였다. 검은 옷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머리카락은 보라색 비니로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피부가 매우 흰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비니 끝에 살짝 삐져나온 머리색도 매우 밝은 색이었다. 선글라스 렌즈 사이로 얼핏 보이는 눈동자는 닉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청록색이다. 키도 거의 닉만큼이나 커 보였다.

참고로 닉의 프로필상 키는 6피트 2인치(약 188cm)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반 인치 정도 더 크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저 남자도 똑바로 서면 189cm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곁에 서면 유신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자신도 180이 조금 안 되는 정도라 남자치고 절대 작은 키가 아니고, 한국에서는 오히려 큰 축이었는데.

체구도 단순히 말랐다기보다는 늘씬하다는 단어가 더 잘 어울렸다. 어깨도 넓고 긴 팔다리에, 허리는 꽉 조여져 있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구부정한 자세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멋지게 느껴졌을 것이다.

위이잉. 위이이잉.

마침 핸드폰이 진동해, 유신은 어느샌가 자신도 그 남자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안 그런 척 자세를 바로 했다.

자신이 이렇게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일이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라는 자각은 아직 없었다.

“밀리! 무슨 일이야?”

전화는 하우스메이트인 밀리에게서 온 것이었다.

유신이 전화를 받자, 왜인지 남자가 움찔했다. 너무 시끄러웠나 싶어 유신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줄였다.

“미안. 메시지 온 거 못 봤어. 어디냐고? 병원. 검사 때문에.”

밀리에게 차마 대리모 센터라고 할 수는 없어, 대충 병원이라고 둘러댔다. 다리 문제도 있고 병원은 자주 다니는 편이라 딱히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종합 병원 부속 시설이니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밀리는 레몬 스퀴저를 찾고 있었다. 얼마 전에 유신이 마지막으로 썼는데, 안 보인단다.

“부엌 찬장에 있을 텐데. 없어? 미안. 내가 집에 가서 다시 찾아볼게.”

잠시 전화기 반대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어? 다행이다. 그럼 집에서 봐.”

통화가 다 끝나도록 남자는 여전히 유신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집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꺼먼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도 느껴질 정도로 그 시선은 열렬했다.

유신은 멋쩍게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다가, 손에 아직도 수납처에서 받은 처방전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방약은 임산부용 영양제와 억제제를 끊었을 때 페로몬 향 조절을 돕는 향기 패치, 다음 주에 예정대로 발정기가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히트 유도제 따위였다.

설마 내용이 보이진 않았겠지? 임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외치는 듯한 처방 목록이 괜히 쑥스러웠다. 유신은 처방전도 슬그머니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이유가 이유라 더더욱 그랬다. 아까 죠앤에게서 받은 (어른의 장난감이 가득한) 문제의 쇼핑백을 화장실 선반에 두고 온 것이다. 다행히 위에 티슈 따위를 올려 뒀으니 안에 내용물이 바로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어서 빨리 가져오지 않으면 누군가 안내 데스크에 맡길지도 몰랐다. 데스크에서 내용물을 설명할 상상을 하니 참으로 아득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그렇게라도 찾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당장 다음 주 히트 때 꼭 사용해야 하는 만큼, 완전히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죠앤에게 연락해 새로 받아야만 했다.

윽, 상상해 보니 그쪽이 더 부끄러워, 유신은 차라리 안내 데스크에 가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서 빨리 찾으러 가야지!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의외로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고, 새로 타는 사람도 그 남자와 자신, 단둘뿐이었다.

순간 유신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탈까도 생각했지만, 쇼핑백을 어서 찾아야만 한다는 수치심이 이겼다. 내리는 층은 자신이 한 층 아래였다. 유신은 남자와 대각선으로 최대한 떨어져 섰다.

그때 어디선가 톡 쏘는 듯한 달콤한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오렌지 계열에 희미한 시나몬 향이 섞여 있었다. 동시에 제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리며 조여드는 느낌이 든다. 향수?

아니, 페로몬이다. 알았다. 저 사람 알파구나.

유신은 흘끗 선글라스의 남자를 살폈다. 저쪽이 일부러 흩뿌렸다기보다 유신이 억제제를 끊은 상태라 예민해져 있어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몸 안이 근질거리는데도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향기라고 생각해 버렸다.

어쩌면 상대도 자신의 페로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유신은 자신이 지금 억제제를 안 먹는 중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제 목덜미의 페로몬 샘에 향기 패치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해 본다.

안 그래도 죠앤에게 들었던 인공 수정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은근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야 그저 앞으로 할 일에 관해 설명했을 뿐이었지만, 경험이 없는 유신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이었다.

저 남자는 어떨까? 적어도 자신처럼 고작 그런 이야기에 흥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유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다리 사이를 향하다,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멈칫했다.

헉, 미쳤나 봐. 그는 가방에 비상용으로 항상 들고 다니는 ‘알파 퇴치 스프레이’로 헐레벌떡 손을 가져갔다. 물론 창피하니까 꺼내지는 않고, 가방 안에서 가만히 쥐고만 있었다.

사실 이 스프레이는 자신에게 발정하는 알파에게 사용하는 용도니, 지금 같은 경우는 차라리 ‘오메가 스프레이’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런 게 실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제일 억울한 건 제풀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뭘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아니, 아니라고!

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쇼핑백을 찾고, 집에 가야지. 어서 밀리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그의 느긋한 베타적 감각에 취하는 거야.

그나저나 기분 탓인지 이상하게 엘리베이터가 느렸다. 중간에 한 번도 안 섰는데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근데 저 알파, 아까보다 뭔가 멋있어 보인다. 어색하게 구부정하던 자세를 반듯하게 바로 해서 그럴까? 봐, 똑바로 서니까 역시 190에 가깝잖아. 확실히 닉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다.

아니, 잠깐. 확실히 저 정도로 긴 팔다리에 완벽한 비율은 흔하지 않다. 게다가 저렇게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이유는 보통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니까, 설마.

“니카?!”

저도 모르게 유신은 소리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덜컹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팟 하고 전등이 꺼지자, 암흑이다.

제 손끝도 알아볼 수 없는 어둠에 유신은 순간 당황했지만, 금세 보조 전력으로 비상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희미하게 빛이 보이자 한결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주변을 밝힌 다음, 비상 버튼을 눌러 구조를 요청했다.

「금방 다시 작동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행이었다. 짧은 통화가 끝나고, 유신은 별일이 다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아까 간호사 데이브가 중앙 엘리베이터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해 준 것이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걸 그랬다.

솔직히 살면서 워낙에 별일을 다 겪다 보니, 이 정도는 딱히 걱정도 안 됐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누가 쇼핑백을 줍지나 않을까, 그쪽이 더 걱정이었다.

“으.”

그때 뒤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맞다. 지금 자신은 여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 짐작이 맞는다면 저 키 큰 남자는 틀림없이!

유신은 서둘렀다. 무엇보다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라면, 사고로 멈춰 서고 전기도 끊긴, 이 어둡고 좁은 엘리베이터는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공간일 테니까. 유신은 급히 핸드폰의 불빛에 의지해 남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백금발을 양손으로 쥐어뜯는 채. 비니와 선글라스는 어느새 벗겨지고, 마스크도 흘러내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유신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귀까지 단번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니카, 당신이었군요!”

역시 예상대로 남자는 닉 메드였다. 할리우드의 슈퍼스타이자,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그리고 유신의 우상이었다.

어떡하지. 실물 잘생겼어. 괴로워하는 얼굴도 빛이 나.

유신은 온몸을 벌벌 떨면서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까 죠앤이 오늘내일 중으로 정자를 채취한다더니, 설마 닉이 여기에 온다는 뜻일 줄이야!

하지만 같은 장소에 있었어도 원래라면 마주칠 일은 없었다. 죠앤이 준 쇼핑백을 두고 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대로 어긋나 버렸을 테니까. 아니, 마주쳤다 해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쳐 버렸을 게 틀림없었다.

혹시 닉이 아까 자신을 흘끗 보던 건 알아봐서일까? 일단 자신은 그의 대리모로 계약했으니까. 자신이 닉의 아이를 낳…… 게 됐다는 건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지만.

근데 느낌상 누군지 알고 보는 거 같지는 않았는데. 대체 뭐지? 설마 닉은 자신이 그의 대리모인 줄을 모르나? 몰라보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모를 수가 있는 건가?

아니다. 그의 평소 행동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열애설 상대의 이름도 (관심이 없어서) 종종 헷갈려 했으니까. (자신이 팬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닉의 대사 외우는 속도만 봐도 객관적으로 기억력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다.)

“으으.”

그때 닉이 다시 신음해, 유신은 헐레벌떡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눈앞의 니카부터 챙기자.”

닉은 어둡고 좁은 장소에 약했다. 운이 나쁘면 공황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팬이라면 대부분 닉에게 폐소 공포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나 자동차도 잘 타고 터널을 다니는 데도 문제가 없어서 다들 그냥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정도로 극단적으로 좁으면서 동시에 이렇게까지 어둡지 않으면 괜찮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폐소 공포증의 증세와 그 정확한 원인을 아는 건 닉이 러시아에서 수석 무용수이던 시절부터 좋아하는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발레 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에피소드였지만, 할리우드로 넘어오면서 신기할 정도로 묻혔다.

분명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이었다. 검색 사이트에서 닉의 발레 시절 기록 대부분을 삭제하게 만든 것처럼.

“으, 으으.”

웅크린 채 신음하는 그를 보자, 유신은 새삼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신의 스타가 괴롭지 않았으면 하는 순수한 팬의 마음이었다.

역시나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다. 원래 어린 시절의 상처란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니카.”

유신은 안타까움에 닉을 향해 몸을 숙였다. 지금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뭘까? 마음은 이 엘리베이터를 꽉 채우고도 남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고작 이 정도.

“괜찮아요.”

유신은 조심스럽게 닉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여기는 러시아가 아니에요. 미국 뉴욕이라고요! 당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커다란 어른이구요. 음,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괜찮, 아? 어떻게?”

닉이 천천히 그런 유신의 손길에 반응했다. 삐걱거리며 돌아보자, 자연스럽게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눈이 어느새 어둠에 많이 익숙해져 그의 얼굴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유신은 어두운데 눈이 부신 기분에 순간 멈칫했다.

느리게 눈이 깜박일 때마다 연한 금빛의 속눈썹이 함께 아래위로 움직인다. 거기에 맞춰 유신의 심장도 위로 올랐다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어떻게 아냐구요? 알고말고요. 니카, 나는 당신에 대해서 뭐든 알아요.”

여전히 등을 두드리는 채, 유신은 뿌듯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하지, 자신은 그의 엄청난 열성 팬이니까! 한국의 집에는 외국 신문에서 오려 둔 기사 스크랩만 몇 권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숨을 들이켜고, 내쉬고. 들이켜고, 내쉬고.”

어릴 때 상상한 적이 있다. 만약 내 앞에 닉이 나타났는데 그가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그를 위로해 주겠다고. 하지만 정말 써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놀랍게도 이 방법은 효과를 발휘해, 닉의 호흡이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본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유신의 눈에는 뭔가 너무 현실성이 없다 못해 마치 영화 컷을 보는 듯했다.

“아, 불이 켜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

망했다! 대체 누가 가져간 거지?!

아까 분명 여기 화장실 선반에 둔 쇼핑백이 보이지 않았다. 유신은 하늘이 무너진 기분으로 화장실 안을 두리번거리고, 칸막이 하나하나를 살폈지만 역시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 없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너무 싫지만) 일단 안내 데스크에 들러 분실물 들어온 것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거기에도 없으면 죠앤에게 메시지를 보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지. 어느 쪽도 전혀 내키지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유신은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난, 바보야.”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닉과 같이 갇혀 놓고도, 사진 한 장 찍지 못하다니. 팬 실격이다.

그치만 엘리베이터에 불이 켜지고 드디어 겨우 다시 움직인다 했더니, 거의 바로 문이 열렸던 것이다. 큰 사고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열린 엘리베이터 앞에는 무슨 일 있냐고 이쪽에서 되레 묻고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유신은 화들짝 놀라 대충 핑계를 대고 도망쳐 버렸다.

단둘일 때야 다른 보는 눈도 없고, 오히려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더구나 닉은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다면? 꼭 자신이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대리모 계약의 당사자인 자신을 닉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의외다 싶을 정도로 딱히 불만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내심 알아보지 않았으면 싶은 것 같기도 했다. 팬으로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수많은 팬 중 한 사람에 머무르는 쪽이 더 편했다.

한때는 그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무대를 목표로 한다고 믿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 애가 타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둘 다 완전히 연관성 없는 인생을 살게 된 지금, 그런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바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원치 않는 쪽이었다.

“그래도 사진은 한 장 찍을 걸 그랬나? 아니면 악수라도. 어차피 쇼핑백은 못 찾는 거였는데, 뭘 그렇게 서둘러 왔을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것만이 아쉬웠다.

어쨌든 일단 쇼핑백을 찾을 시도는 해 봐야지. 유신은 너무 싫어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안내 데스크로 갔다. 하아, 안에 든 게 뭐냐고 물으면 대체 뭐라고 대답하지?

“분실물이요?”

데스크 직원은 키가 크고 썰렁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빨간 머리에 잘 그은 얼굴은 코끝의 주근깨 때문에 어려 보였다. 그는 유신을 보자마자 얼굴 한가득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네, 화장실에 쇼핑백을 두고 왔는데, 다시 찾으러 갔더니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도 직원이 친절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어색하게 용건을 꺼냈다.

미미하게 떠도는 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알파인 듯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향인지까지는 구분해 낼 수 없었다. 역시 닉 같은 우성 알파는 다르다고, 유신은 전혀 상관도 없으면서, 팬심으로 괜히 뿌듯해했다.

“어떤 쇼핑백이죠?”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고, 여기 센터 로고가 그려진 하얀 쇼핑백이에요. 안에는 휴대용 티슈가 맨 위에 들었고요.”

음, 티슈보다 더 아래에 든 걸 설명하라고 안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 이건가요?”

다행히 직원은 유신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책상 아래서 무언가를 꺼냈다. 놀랍게도 바로 유신이 잃어버린 그 쇼핑백이었다.

“와! 네, 맞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유신은 아무 생각 없이 양손을 내밀어 쇼핑백을 받으려다가, 멈칫했다.

“저기, 안에 내용물은.”

“걱정 마세요. 불필요하게 남의 짐을 보거나 하지는 않아요.”

직원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말은 즉, 휴대용 티슈 아래에 있는 딜도나 러브 젤, 콘돔 따위를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유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잃어버리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네,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하지만 유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분실물이 들어오면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당연히 내용물부터 확인부터 하는 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대로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서는 뭐가 들었는지 몰라서는 안 됐다. 직원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근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에 미즈 스티븐슨의 방 앞에서 마주쳤었는데.”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쇼핑백을 무사히 찾아 기분이 좋은 상태로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차마 여기서 열어서 확인해 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부피나 무게를 보면 딱히 없어진 건 없는 듯했다.

“폴이에요. 미즈 스티븐슨의 손님이시면 당분간 저희 센터에 계속 오실 텐데, 우리 인사는 하고 지내요.”

“아, 네. 유신입니다.”

직원, 아니 폴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좋은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유신도 마주 웃었다.

“맞다. 유신, 우산 빌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밖에 날씨도 좋은데.”

그렇게 대답하는데, 마침 밖에 천둥 번개가 쳤다.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아니네요. 엄청 내리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데이브가 비 이야기도 했었다. 엘리베이터도 그렇더니, 딱 들어맞았다. 확실히 저건 우산 없이는 안 될 비였다.

“우산 없으시면 제가 빌려드릴게요.”

“아니에요. 그러면 폴은 어떡하고요.”

“어차피 여분이 많아요. 누군가 우산을 잃어버리면 다 여기로 모이거든요.”

폴의 이야기는 유신이 잃어버린 쇼핑백을 여기서 찾은 것처럼, 누군가 놓고 간 우산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그럼 하나 빌릴까요?”

“물론이죠, 유신. 다음번에 오실 때 돌려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다음번에 꼭 가져올게요.”

실제로 폴의 자리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우산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신에게 그런 낡은 우산을 빌려줄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제 우산을 유신에게 주고, 자신은 낡은 분실물 우산 중에서 하나를 골라 쓸 생각이었다. 어차피 돌려받으면서 말이라도 한 마디 더 걸 구실로 빌려주는 건데, 더 좋은 우산이 아닌 것이 안타까웠다.

“네, 다음번에 가져다주시면 돼요.”

물론 유신은 그런 꿍꿍이는 당연히 몰랐다. 죠앤도 그렇고, 폴도 그렇고, 여기 센터에는 친절한 사람이 많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데이브도 친절하지만, 그쪽은 약간 참견쟁이고 나머지 둘과는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가끔씩 막 혼내기도 하고. 하지만 그도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닉은 예외인지도.

이런, 안 좋아. 조금만 방심하면 생각이 그를 향해 흘러가 버린다.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유신이 건물을 나설 즈음 비는 아까보다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중이었다. 어쨌든 우산을 빌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센터를 빠져나왔다. 물론 쇼핑백이 젖지 않도록 품에 끌어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정체가 탄로 나면 곤란하신 거잖아요.’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안경 안쪽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일 때마다, 닉의 심장도 함께 위로 올랐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에 다시 비니를 눌러 씌우고, 바닥에 떨어진 선글라스도 씌워 주었다.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제 등을 토닥이던 바로 그 손이었다. 단, 마스크는 깜박 잊은 듯했다.

그제야 닉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정체? 하고 생각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뒤로는 그저 혼돈, 혼란. 어떻게 그 소동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검은 머리 안경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연락처가 뭐야, 이름조차 묻지 못했다.

하지만 쉽게 연락처를 묻기도 그런 게,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는 기혼자였다. 적어도 그에 준하는 상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안경이 손에 들고 있던 처방전의 내용을 일부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중 ‘임산부용 영양제’와 ‘히트 유도제’라는 글자가 눈에 딱 들어왔다.

꼭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눈에 들어왔달까. 시력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였다. 그 와중에도 이름 부분은 절묘하게 접혀 있어서 볼 수 없었다.

어디를 봐도 임신을 준비하는 오메가를 위한 처방전이었다. 남성 오메가는 흔하지 않지만, 희귀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여기가 어디던가? 이 빌딩에는 대리모 센터와 불임 클리닉이 있었고, 일부는 산부인과가 사용했다. 그야말로 아기를 낳기 위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부터가 여기에 인공 수정에 사용할 정자를 채취하기 위해 온 것이다.

‘밀리? 무슨 일이야?’

닉이 동요하는데, 마침 안경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분위기는 꽤나 친밀했다.

‘……다행이다. 그럼 집에서 봐.’

그리고 아마도 같이 사는 상대인 듯했다. 만약 아이를 가질 예정이라면, 상대는 전화 반대편의 인물일까?

그리고 단둘이 타게 된 엘리베이터에서 닉은 희미하게 산뜻한 향기를 느꼈다. 아마도 저 오메가의 페로몬이 배어 나온 듯했다.

레몬과 민트가 뒤섞인 상쾌한 향은 맡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허락도 없이 남의 페로몬에 대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닉은 저도 모르게 게걸스레 그 향을 탐하고 있었다.

아, 곤란한데. 아무래도 느껴 버릴 것 같다.

그는 이성의 힘으로 간신히 본능을 억눌렀다. 무자각 중에 방심해 자세가 평소처럼 바르게 펴지고 있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유신이 자신을 멋지다고 생각해 버린 것도, 오랜 열성팬의 촉으로 자신의 정체를 간파해 버렸다는 사실은 물론.

‘니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간만이었다. 러시아에서도 가족들이 주로 부르던 애칭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상대에게 불리는데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혀 안에 굴리는 것 같은 발음이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저 애칭이 저렇게 달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래 봤자 안경에게는 이미 다른 알파가 있을 텐데, 임신도 계획할 만큼 깊은 관계인.

닉은 자각도 없이 얼굴도 모르는 그 알파(오메가의 상대이니 아마도 알파라고 지레짐작했다)에 대해 질투를 느꼈다. 지금 자신의 그런 의식의 흐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였다.

“하아.”

연거푸 한숨을 쉬는 그에게 아이잭이 투덜거렸다.

“닉, 벌써 한숨만 몇만 번째라고.”

“몇만 번째라니! 아니야, 아이잭. 겨우 열두 번째라고.”

“닉, 정액 채취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돌아가도 돼. 계약은 했지만, 지금이라면 계약금을 위약금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 없어.”

물론 아이잭도 상대방이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닉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아닌데.”

“그럼 후딱 끝내고 돌아가자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스톤버그 감독 대본이 진짜 죽여줘. 돌아가면 그것부터 어서 검토하지.”

자신이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진작 아이잭에게도 들어간 듯했다. 이런 눈치 하나는 쓸데없이 빠르다고, 닉은 괜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굳이 문제라면 말야.”

“응?”

아이잭의 눈썹이 불길함에 꿈틀거렸다.

“아이잭, 이 건물에 용건이 있는 오메가라면, 역시 알파가 있는 거겠지?”

“무조건은 아니지. 그냥 병문안일 수도 있고, 여기 직원일 수도 있는 거고.”

“임산부용 처방전을 들고 있으면서,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친밀한 누군가가 있다면?”

닉은 귀찮은 듯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이마에 흘러내린 백금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눈앞의 늙은 흑인과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웃기는 비니와 커다란 선글라스를 치워 버린 자신의 외모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상대를 어떻게 동요시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닉, 불륜만은 안 돼. 내가 다른 건 다 막아 줘도, 그건 못 막아.”

아이잭이 발끈했다. 양복을 차려입은 그의 한쪽 어깨가 젖은 것을 닉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밖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서둘러 온다고 아이잭이 꽤나 고생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진짜 놀란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농담이라도 혼자 다니지 말라는 잔소리도 들었지만, 십 대도 아니고 그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당분간만 좀 조심하는 척할 생각이었다.

“불륜이라니,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래, 그렇지, 닉? 쓸데없이 오해하게 말하지 마. 놀랐잖아.”

그냥 좀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은, 늙은이를 놀라게 하면 안 되니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반쯤은 자신이 굳이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말해 버리면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자신 정도 되는 알파가 굳이 가능성이 없는 상대에게 억지로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이미 특정 상대가 있는 오메가라면 더더욱. 이런 안 어울리는 감상은 그만두자.

닉은 무심한 듯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어 보니, 그치려면 아직 한참이었다.

검은 머리 안경은 아직 이 건물 안에 있을까? 아니면 처방전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갔을까? 우산도 없어 보이던데, 괜찮을지.

하지만 생각은 의식도 없이 다시 누군가를 향해 뻗어 나갔다. 내리깐 금빛 속눈썹이 눈두덩이에 우아한 그늘을 드리우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순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바뀌었다.

“미스터 메드.”

다행히 아이잭이 불순함을 깨닫기 전에 간호사가 다가왔다. 데이브라는 이름의 후덕한 체구의 흑인 간호사였다.

원래는 검사실 담당인데, 센터 측에서 닉이 불편하지 않도록 남자이자 베타인 간호사를 일부러 불렀다고 방금 전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

데이브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어딘가 들떠 있었다. 어떤 의미로 닉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신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저런 반응이 보통이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설명드린 대로 다른 방으로 이동할 겁니다. 필요한 도구는 그쪽에 다 준비되어 있고요.”

“그거 좋군. 어서 가자고!”

아이잭이 반가워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반대로 닉은 묘하게 미적거렸다. 그는 귀찮은지 아닌지 모호한 표정으로 그들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림이 되었다.

“일단 저희 센터 쪽에서 미스터 메드의 취향을 고려해 준비는 해 놓기는 했는데요. 혹시 추가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창문이 없고, 조금 좁다는 점을 제외하면 고급스러운 호텔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아마도 일부러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제대로 시트가 깔린 침대도 있고, 커다란 리클라이너 소파와, 컴퓨터 모니터와 연동되는 대형 텔레비전도 있었다.

단, 리클라이너 소파 옆의 협탁에 센터의 로고가 붙은 깔끔한 흰 상자가 있었다. 정액 채취용 키트였다. 일부러 부담스럽지 않도록 이런 형태로 만들었다고, 데이브가 사용법과 함께 한 번 더 설명했다.

“오, 꽤 취향이 좋군.”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아이잭이 방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는 텔레비전 화면에 떠오른 동영상 목록을 향해서였다. 섬네일은 죄다 금발에 잘 그은 피부를 가진 헐벗은 미녀들이었다.

물론 영상의 목적은 뻔했다. 비슷한 여자들이 나오는 사진 잡지들도 한쪽에 쌓여 있었다. 잡지를 슬쩍 손으로 들춰 보고, 닉은 어이없다는 듯 다시 던져 버렸다.

“아이잭, 이런 거 좋아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혹시 영상이나 사진으로 부족하고, 사람이 필요한 거면 누구 불러 줄까?”

“됐으니까 어서 나가기나 해. 굳이 구경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닉은 겉옷을 벗고, 보란 듯이 바지 벨트로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아이잭이 가슴 앞에 양손을 들어 올렸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그렇게 아이잭도 나가고, 드디어 닉은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리저리 주절주절 설명이 길었지만, 요약하면 자신더러 자위를 하라는 의미였다. 정액 채취용 키트에서 제일 중요한 물건도 결국은 정액을 무사히 보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콘돔과 보관 용기였다.

“가브가 따라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같이 왔으면 십 년 놀림감이야. 아이잭이 녀석한테 상세한 이야기를 안 해야 할 텐데.”

난감하긴 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요 몇 년간 상대가 아쉬울 일이 없었기에, 그는 혼자서 뺄 일이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데이트를 안 했으니 쌓였다면 쌓였을 게다. 기분만 동하면 바로 뺄 수 있을 거 같은데.

“으음.”

닉은 눈앞의 커다란 화면에 보이는 헐벗은 금발 여자들의 섬네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시 다시 봐도 딱히 동하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시작은 해 봐야지. 그는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벨트는 아까 이미 풀어 놓은 채였다.

몸에 잘 맞는 검은색 드로즈에서 성기를 꺼낸다. 팬티 안에 있을 때도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던 그의 물건은, 꺼내니 한층 크기가 대단했다.

그는 준비된 콘돔 중 제일 큰 사이즈를 골라 능숙하게 제 성기에 씌웠다. 다행히 사이즈가 미리 언질이 된 건지, 여기가 그저 준비성이 좋은 건지, 그의 성기에도 충분히 맞는 특대형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신축성도 충분해서 넣다가 찢어지지도 않았고, 발기 후에 맞춰 늘어나는 데도 문제없어 보였다.

솔직히 닉은 제 남성기에 대해 떠벌릴 생각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크다는 사실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알파들은 평균적으로 베타나 오메가보다 성기가 큰 편이었고, 우성 알파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자신도 그런 경향을 따라갈 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가끔 촬영 의상 안에 잘 갈무리해야 할 때는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당연히 작은 것보다야 큰 쪽이 나은 만큼 크게 불만은 없었다.

사실 발기 전인 지금이야 그냥 좀 큰 성기 정도지만, 완전히 발기하면 아주 큰 성기가 되었다. 우성 알파는 거시기 크기로 정하는 거냐고, 누군가 놀랐던 적이 있다.

근데 그게 누구더라. 앤이던가? 아니, 안나였나? 기억이 잘 안 난다. 확실한 건 걔도 금발이었을 거다. 눈앞에 보이는 섬네일에서 헤프게 웃고 있는 금발 여자들처럼.

역시 아무리 봐도 저 영상들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살아 있고 웃어 주는 인간일 때는, 꼭 취향이 아니더라도 흥분하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영상이나 사진은 역시나, 좀 다르달까? 기분 문제라고나 할까?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자신의 취향은 좀 더 하얗고, 날씬하고, 부드럽고, 어두운 머리칼에 짙고 촉촉한 눈동자의.

그리고 기억은 자연스럽게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 안경을 떠올렸다. 안경 안에서 천천히 깜박이던 눈꺼풀과.

엷게 붉은빛이 섞인, 별이 박힌 듯한 커다란 초콜릿색 눈동자. 짙은 밤색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보이고 곧잘 이마 위에서 뒤엉킨다. 어지간한 유럽인보다도 흰 얼굴, 부드러운 뺨, 웃으면 가늘어지는 눈, 사랑스러운 미소.

‘니카.’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이 분명하던 달콤한 목소리. 제 머리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

문득 레몬과 민트가 뒤섞인 상큼한 향이 훅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물론 실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떠올린 향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여태껏 영 힘을 쓰지 못하던 성기에 바로 힘이 들어갔다.

닉은 본능적으로 오른손 바닥 전체로 성기를 감싸 뿌리부터 선단까지 단숨에 쓸었다.

“하아.”

얇은 콘돔에 감싸여 있어도, 그 감촉은 쾌감을 좇기에 충분했다. 기분 좋은 한숨이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왔다.

머릿속이 상상으로 그 오메가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상쾌한 향과 부드러운 손길, 다디단 목소리.

닉은 갑자기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성기를 감싸 쥔 제 오른손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콘돔과 손바닥이 쓸려 젖은 소리가 울렸다. 반대편 손으로 음낭을 주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음낭은 커다란 음경에 잘 어울리게 마찬가지로 큼직했다.

상상 속에서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닉의 성기를 물었다.

“흣.”

점막이 감싸는 촉촉하고 따뜻한 감각을 상상하자, 그것만으로도 성기가 완전히 빳빳해졌다. 입술은 도톰해도 얼굴도 작고 입도 작으니, 분명 입 안도 좁을 것이다. 분명 뺨 위로 성기 끝이 불룩하게 튀어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은 수줍어하면서 머뭇머뭇 머금다가, 결심한 듯 단번에 입에 물겠지. 하지만 입이 작고 목구멍은 열 줄 몰라서, 반도 제대로 넣지 못하지 않을까. 빠는 솜씨는 서툴지만 열심히 혀를 움직이면 그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서.

“그래, 좋아.”

점점 에스컬레이트 되는 상상과 함께 성기를 훑는 손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기억에 남은 레몬 향을 정신없이 쫓는다. 딱히 섹시할 것도 없는 향인데, 떠올리는 것만으로 왜 이렇게나 흥분이 되는지 모르겠다.

깊게 숙인 작고 하얀 얼굴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행위에 방해가 되는지 하얀 손이 그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쓸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넘기기에는 머리카락이 짧았지만, 어차피 상상이니 딱히 상관없는지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애초에 저 입술이 성기를 빨고 있는 상황부터가 비현실의 끝판왕이었다.

“하, 하아.”

닉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그의 성기를 여전히 입에 문 채, 사랑스러운 오메가는 눈만 들어 올렸다. 안경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고, 눈에 별을 박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채 지긋이 그를 응시했다.

‘니카, 나는 당신에 대해 뭐든 알아요.’

그것은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닉이 실제로 들은 말이었다. 단어도 문구도 실제와 같았지만, 뉘앙스도 색기도 달콤함도 훨씬 짙어져 있었다.

입에 성기를 문 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잠시 그냥 넘기자.

반칙이야.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름조차.

넌 뭐든 알고 있다는 건. 너무 안타깝고, 답답하고, 분해서.

“칫!”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닉의 성기의 끝에서 정액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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