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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1권 1부) (1/22)

어느 우성 오메가의 개인적인 우울 1부

프롤로그

※ 소설 내의 의학적 내용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제 현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한국 외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 한국법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인 경우가 종종 있다. 돌이켜 보면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하아, 역시 모자라네.”

유신은 몇 번이나 계좌 잔액과 필요한 금액을 맞춰 보았다.

각종 청구서에 다음 달 집세와 이번 달 생활비 등 돈이 샐 곳은 무궁무진했다. 반대로 돈이 들어올 곳은 딱 정해져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카페 아르바이트 비와 대학에서 받는 소소한 근로 수당뿐.

당장 다음 학기 대학 등록금부터 문제였다. 유신이 유학 중인 뉴욕대학교는 미국 내에서도 학비가 비싼 편이었다. 사정상 한국의 집에서는 더 이상 지원을 바랄 수 없다.

최악의 경우, 학비는 1년 휴학해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내야 할 돈부터 부족하다는 거지만. 다행히 일하는 데에 비자 문제는 없었다.

“일단은 알바를 좀 더 늘리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지금 알바도 겨우 구한 자린데.”

우성 오메가여서일까? 유신은 이상할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금방 잘리곤 했다.

길어야 두세 달, 최단 기록은 무려 3일이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카페는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여기는 주말 피크 타임에만 아르바이트를 썼다. 즉, 벌이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우성 오메가라도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유신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마르고 창백한 아시아계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에서 헝클어지고, 낡은 적갈색 스웨터와 빛바랜 청바지 차림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20대 남자다. 아니, 옷차림만 본다면 평균보다 조금 아래일지도 모른다.

“니카, 난 이제 어떡하지?”

유신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옆에 붙여 둔 두 장의 포스터로 시선을 향했다.

한 장은 긴 백금발을 복잡하게 땋아 올린 아름다운 옆얼굴이었다. 살짝 내리뜬 긴 속눈썹 아래 오묘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파랗게 반짝였다. 무대 공연 중에 찍은 듯 한껏 몰입한 순간의 긴장이 사진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얼핏 소녀로도 보이지만, 사진의 주인공은 소년이었다.

다른 한 장은 어두운 배경에 검은 양복을 입은 섹시한 젊은 남자였다. 맞춘 듯 몸에 잘 맞는 양복이 그의 늘씬하지만 근육이 잘 잡힌 몸을 세련되게 강조하고 있었다. 살짝 긴 듯한 백금발은 이마 뒤로 넘기고, 머리카락만큼 창백한 안색이 묘하게 퇴폐적이었다. 강하게 쏘아보는 눈동자에서는 푸른빛이 번뜩였다.

나이가 다르고 분위기도 달랐지만, 같은 사람인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소년 쪽 포스터가 훨씬 낡았다.

저 포스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유신은 가슴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그렇다. 그는 저 사진 속 알파의 팬이었다. 10년도 더 전,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덕질이었다.

“하아, 니카의 얼굴을 보고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유신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노트북 화면에 주의를 집중하려 했다. 계좌 잔액은 계속 신경 쓰이지만, 일단 지금은 쓰던 리포트부터 마무리해야 했다. 결국은 대학에서 무사히 학위를 따기 위해서인데 학점 관리를 실패하면 더 큰일이었다.

쓰던 문단을 마저 완성하던 중 추가로 더 필요한 내용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검색 사이트에 접속해 몇 가지 검색하는데, 한 사이트의 광고 배너가 유신의 시선을 붙잡았다.

【대리모 모집】

[최대 10만 달러까지 일시금 지불 가능]

[저희 코스모 대리모 센터는 항상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자격: 나이 20 – 39세, 신체 건강하고 임신 가능한 여성 혹은 오메가면 누구나]

[오메가 우대, 우성 오메가 추가 수당 있음]

하얀 배경에 깔끔한 파란 글씨는 그야말로 사무적이어서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다. 불법적인 느낌도 전혀 없었다.

10만 불이면 졸업까지 남은 등록금에 추가로 몇 달 치 생활비까지 모두 해결된다. 청구서와 계좌 잔액을 비교하며 고통받는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었다. 거기다 자신은 추가 수당이 가능하다는 우성 오메가다.

저 광고를 처음 본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유신도 사람인지라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아직도 자신이 실수로라도 지원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지원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지. 섹스 경험도 없는데, 대리모라니.”

25살이나 먹고 성 경험이 없다는 게 죄는 아니지만, 유신은 괜히 온몸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딱히 의지를 가지고 이렇게 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도 남들 정도의 성적 호기심과 욕구는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지 않은 것뿐이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오메가의 발정기인 히트는, 요즘 다들 그러듯 약으로 조절하고 있었다.

솔직히 경험이 많았다면 정말 지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금액이었다. 하지만 섹스도 한 적 없는데 다 건너뛰고 바로 아이를 가지다니, 그런 건 아무래도 너무.

“유신!”

다행히 유신의 생각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밀리가 문밖에서 자신을 불렀다. 그는 후다닥 웹 브라우저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리, 무슨 일이야?”

하우스메이트인 밀리가 어질러진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요리가 슬슬 완성돼서 불렀어. 휴식은 항상 중요하잖아. 자기 리포트는 잘돼 가?”

“솔직히 꽉 막혔어. 아, 냄새 좋다. 미트파이야?”

“응, 맛있겠지?”

2살 어린 밀리와는 유신이 학교로 돌아온 3년 전부터 주거 비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같이 살고 있었다. 시작은 대학 인트라넷 게시판의 하우스메이트 모집 글이었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의 본명은 에밀이었지만, 너무 촌스러워 싫다는 본인의 주장에 따라 다들 밀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20대 남자에게는 지나치게 귀여운 이름이긴 해도 체구가 작고 워낙 사랑스러운 성격이라 잘 어울렸다.

히스패닉과 흑인, 아시안 혼혈로 약간 어두운 피부에 검은색 곱슬머리였다. 크고 둥근 갈색 눈은 애교가 많고 입은 항상 웃고 있다.

참고로 밀리는 유신을 자기라고 불렀다. 처음에 유신은 낯간지럽다고 생각했지만, 에밀을 밀리로 부르라는 사람에게는 딱히 이상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애초에 밀리에게 세상의 모든 친구는 자기였다. 아니면 허니, 아니면 스위티 등등. 그런 점만 익숙해지고 보니 사람 사귀는 데 서툰 자신과도 잘 지내는 좋은 녀석이었다.

“자기야, 얼굴이 빨개. 열이라도 있어?”

“아냐, 괜찮아!”

방금 전 대리모 광고를 보고 얼굴에 오른 열이 아직 덜 내렸나 보다. 유신은 민망하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살짝 부채질을 했다.

“고민이 있으면 혼자 껴안지 말고, 나랑 의논해 주면 좋겠어. 우린 친구잖아.”

“고마워, 밀리. 아직은 괜찮아.”

“그리고 이번 달 월세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이번 달부터 인턴에서 정사원이 돼서 좀 여유가 있어.”

“밀리!”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유신은 당황해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왜? 난 자기를 돕고 싶은 것뿐이야.”

“안 돼! 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건 너무 과해. 네가 그렇게까지 부담할 필요는 없어. 곧 어떻게든 좋아질 거야. 내가 아르바이트를 늘린다거나, 장학금 펀딩을 구한다거나.”

현실적으로 두 가지 다 쉽지 않다는 사실은 유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응, 상황이 좋아지면 천천히 갚아.”

반쯤 횡설수설하는 유신에게 밀리가 괜찮다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유신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이번 달은 밀리가 대신 월세를 내 준다 치자. 다음 달은, 그다음 달은 또 어떡하지? 이 집은 매우 운 좋게 구한 덕분에 위치도 크기도 가격 대비 훌륭해서, 이사를 해서 월세를 줄일 수도 없었다.

“미안해, 유신. 내가 괜히 월세 이야기를 꺼내서 자기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어.”

“아냐, 밀리. 굳이 말하면 내가 너한테 폐를 끼치는 거지. 내 우울은 그저 돈 문제 때문이야. 정말 어디서 돈 떨어질 일 없을까?”

“댄스 관련된 일을 구하면 어때?”

“댄스는 좀.”

유신의 손이 반사적으로 제 오른쪽 다리로 갔다. 몇 년 전 교통사고 이후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좀 더 복잡한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자기가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연관되기 싫은 마음도 이해는 가니까.”

“아냐, 나야말로 너무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렇다고 불법적인 일은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하지!”

“난 자기가 항상 걱정이야. 그러다가 나쁜 알파한테 걸리면 어떡해.”

밀리의 한숨에 유신은 말도 안 된다며 웃었다.

“걱정할 거 없어. 아무리 형질이 우성이라도 나같이 수수한 오메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그저 그 매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야.”

“친구라고 좋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런 거 아닌데.”

친구의 무조건적인 칭찬에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유신의 뺨이 붉어졌다. 밀리는 항상 신기할 정도로 자신을 추켜세워서 매번 쑥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띵!”

마침 요리용 타이머가 울렸다. 밀리는 오븐에서 잘 익은 파이를 꺼냈다.

“뜨거울 때 어서 한 조각 먹어. 자기는 좀 더 잘 먹어야 해. 너무 말랐어.”

실제로 유신은 아무리 맛있다고 생각한 음식도 정작 입에 넣으면 잘 삼키지 못했다. 사고 이후로 이렇게 됐으니 거기에 원인이 어느 정도 있겠지. 병원에 다녀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 외에도 병원 갈 일은 많기에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렸다.

대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밀리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항상 유신이 제대로 먹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유신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톰하고 먹으려고 만든 거지? 오늘 저녁 데이트랬잖아?”

“맞아! 톰이 좋아할까?”

“당연히 좋아하지.”

저렇게 사랑을 담아 만들었는데 싫어할 리 없다. 유신은 제 귀여운 친구가 애인 생각에 들뜨는 것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밀리는 베타 남성이지만 알파 남성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이 세계에서 성적 지향성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인 만큼 유신은 그 사실에 대해 별생각 없었다. 애초에 본인은 오메가 남성이니 밀리에게 연애 대상이 아니기도 했다.

“맞다. 자기한테 온 우편물이 많아. 거기 식탁 위에 있어.”

“고마워, 밀리.”

밀리가 조심스럽게 파이를 자르는 동안, 유신은 우편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거의 청구서와 광고지였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이건.”

코스모 대리모 센터. 맨 아래 있던 우편 봉투의 발신인에서 광고 배너로 하도 봐서 이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유신은 멈칫했다.

잘못 왔다기에는 유신의 영어 이름인 Yu Shin Lee가 수신처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본인 수신 요망’, ‘중요 서류 재중’이라는 커다란 빨간 도장도 봉투 한가운데 턱 하니 찍힌 채다.

혹시 어딘가에서 광고성 우편물 수신을 잘못 체크했나? 묘하게 불안한 기분을 억누르며 유신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하지만 내용물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유신, 왜 그래? 뭐 이상한 우편물이라도 왔어?”

“이상하다면 이상한데.”

“맞다. 그거 등기로 와서 내가 대신 사인했는데.”

“사인하면서 어디서 왔는지는 안 봤어?”

“아니, 그냥 자기 이름만 확인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밀리가 잘못한 건 없어. 나한테 온 건 맞아. 근데 이거 보낸 사람이 대리모 센터야.”

이제는 밀리도 당황했다. 그는 들고 있던 파이 접시를 내려놓고 급히 유신의 옆으로 왔다.

“대리모 센터가 자기한테 등기를 왜 보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거기다 이 내용에 따르면 나는 대리모에 지원했어.”

“말도 안 돼! 누군가 서류를 위조한 거 아니고?! 언제 지원했대?”

“일주일 전.”

유신과 밀리는 저도 모르게 서로 마주 보았다.

그날 유신은 중간고사가 끝났고, 집에서 혼자 보드카를 잘못 마시다 완전히 필름이 끊겨 버렸다. 집을 잔뜩 어질러 놓는 바람에 집에 돌아온 밀리가 매우 잔소리를 했었지.

필름이 끊긴 동안 뭘 했는지는 완전히 미스터리였다. 뭔가 책상에서 한참 앉아 있었는데, 대체 뭘 했는지 절대 기억이 안 났다. 인터넷을 쓴 흔적을 보니 동영상 사이트를 본 것 같긴 했는데, 다행히 문제가 될 만한 댓글은 남기지 않았길래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떠오르지 않던 어렴풋한 기억이 갑자기 유신의 머릿속에서 조각을 맞추었다.

영상을 본 것은 맞았다. 잊은 것은 영상을 보던 중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광고가 떴다는 것.

거기다 광고 맨 위에 적힌 그 커다란 금액. 현재의 금전적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바로 그 액수에 홀린 채, 뇌가 알코올에 완전히 절여진 오메가는 광고를 클릭한다.

“미친.”

유신은 자신이 술김에 대리모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아뇨, 오류가 있다구요. 신청은 정상적으로 들어간 거 맞는데요. 근데 그 신청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아뇨, 이미 신청 완료는 했고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상담원과의 대화는 계속 도돌이표다. 결국 유신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어야 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때, 자기야? 해결 안 된대?”

“방법을 찾아야지. 아무래도 전화로는 안 될 거 같고, 조만간 그 대리모 센터에 직접 방문해야 할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돈 받은 것도 없잖아. 결국 별문제 없이 취소 가능할 거야.”

“당연하지. 내가 안 한다는데 저쪽에서 어쩌겠어.”

“맞아, 자기야! 바로 그 기세야.”

밀리는 유신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든다며 박수를 쳤다.

여기는 두 사람의 낡은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찻집 겸 식당인 ‘카페 루이’였다. 유신이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낡고 비좁지만 아늑한 분위기에 가격도 저렴해 둘은 전부터 이곳의 단골이었다. 애초에 유신이 알바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자주 드나들면서 사장인 루이스와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손님이 몰리는 가게는 아니라 아르바이트 없이 거의 사장 혼자서 도맡아 일했는데, 유신은 주말 바쁜 시간에만 일을 거드는 형태로 채용되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는 유신의 전공 서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리포트가 잘 안 풀려서 도저히 못 참고 싸 들고 나온 참이다. 밀리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신은 사고로 전공을 바꾸면서 졸업이 늦어졌지만, 밀리는 지난 학기에 졸업해 이미 취직했다. 경사스럽게도 이번 달부터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무사히 전환되었다.

“밀리, 오늘 일찍 끝나니까 톰하고 데이트한댔었잖아?”

“데이트는 무슨, 곧 헤어질 거야. 아무래도 그 새끼 바람피우는 거 같아.”

“설마.”

“나도 설마면 좋겠어.”

밀리는 거칠게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이른 저녁 식사였다. 반대로 유신의 앞에 놓인 것은 커피뿐이었다. 오늘도 제대로 안 먹을 거냐는 밀리의 눈빛은 살짝 모른 체다.

연애란 뭘까? 며칠 전만 해도 손수 만든 미트파이를 가져다줄 정도로 러브러브 하더니, 그새 틀어져 헤어진다고 한다. 아직 아무와도 사귀어 본 적 없는 유신으로서는 저런 격렬한 심리 변화가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이 세계의 연애, 결혼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세상에는 두 가지 성별 구분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남성과 여성, 두 번째는 알파, 베타, 오메가다.

인류의 대다수 90%는 베타였다. 알파와 오메가는 10%에 불과했으며, 그중 6%가 알파, 오메가는 4%였다.

알파와 오메가 중에서도 월등하다고 여겨지는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는 통계를 내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인 유명인에 익숙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흔하게 여겨지는 것뿐. 그들이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이기에 유명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한, 일종의 심리적 오류였다.

남성과 여성의 경우, 임신은 여자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파와 오메가는 발정기에 섹스를 하는 경우, 알파는 여자라도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고, 오메가는 남자더라도 알파에 의해 임신이 가능했다.

정확한 의학적 용어는 따로 있지만, 보통 알파의 발정기를 러트, 오메가의 발정기를 히트라고 불렀다. 개인차가 있지만 발정기는 1~3개월에 한 번이었다. 현재는 발정기를 조절할 수 있는 억제제의 발달로, 일상생활에서 러트와 히트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방출하는데, 발정기 전후로 그 농도가 짙어졌다. 참고로 베타는 페로몬을 느낄 수 없다.

페로몬은 의지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했고, 경우에 따라 페로몬 제거용 항수나 비누, 패치 등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페로몬을 흩뿌리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여겨졌다.

알파는 베타보다 지능과 신체적 능력이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반대로 오메가는 감성적이고 아름답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실제로 알파와 오메가는 평균적으로 베타보다 외모가 출중했다.

국회의원이나 법조계, 경찰이나 회사 경영 등의 분야에서 알파는 쉽게 두각을 나타냈다. 경쟁적인 스포츠에서도 알파의 성과는 월등했다. 반대로 패션이나 예술계에서는 오메가가 환영받았다. 연예계에는 오메가도 많았지만, 하드한 업계라 그런지 알파의 비율이 더 높았다.

사실 유신도 우성 오메가답게 한때는 예술계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소수인 알파와 오메가가 사회 각 분야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연애, 결혼관도 크게 변화했다. 남자와 여자만 결혼한다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알파와 오메가는 물론, 베타들까지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끼리의 연애와 결혼에 편견 없이 자유로워졌다.

그만큼 개개인의 성적 지향성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밀리처럼 베타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연애 대상은 알파 남성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 없었다.

자녀에 대한 개념도 크게 변화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기증된 정자나 난자를 사용하는 것도, 대리모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것도 적법한 비용만 지불한다면 전혀 나쁠 것 없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대리모 센터가 인터넷 배너 광고를 할 정도로 활성화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더 나아가 인공 수정 기술의 발달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아이를 가지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입양은 언제나 장려되었다.

그렇게 느슨한 연애관에도 불구하고, 베타 중 다수는 이성애자였다. 그 외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 이상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베타 여자들은 알파 남성을 동경했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알파들은 보통 집안 좋고, 돈도 많고, 키도 크고 잘생겼다.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 95%가 알파 남성이라는 통계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베타가 인구의 90%인 세상에서 알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뿐. 거기다 대부분의 알파는 베타보다 오메가를 더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밀리는 확실히 대단했다. 유신이 아는 한 밀리가 여태껏 만난 애인들은 모두 알파 남자였다. 이번에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톰 역시 열성이긴 하지만 알파였다. 오메가인 자신도 알파와 데이트한 적이 없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유신은 알파는 물론, 베타나 오메가와도 데이트해 본 적 없었지만.

유신이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런 화제가 나올 때면 밀리는 항상, 자신이 눈이 너무 높아서 모두를 거절해 그런 거라며 영문 모를 이야기만 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침대 머리맡에 그런 포스터를 붙여 놓은 시점에서 자기는 이미 글렀어.”

“으, 으응? 니카의?!”

“그래, 닉 메드의 그 포스터들! 멋대로 자기만 아는 애칭으로 부르지도 말고.”

“그치만 니카는 니카인걸. 난 니카가 할리우드에 데뷔하기 전부터 알았기 때문에 그 애칭이 더 익숙하다고.”

닉 메드가 누구인가?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여하간에 지금 전 세계에서 최고로 인기 많은 알파다.

하지만 그는 할리우드에서 데뷔하기 전, 꽤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러시아 시절? 무슨 무슨 프- 어쩌고 하는 거였지?”

“수석 무용수. 내가 본격적으로 춤을 시작한 계기도 니카 덕분이었어.”

사실 닉 메드는 미국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었다. 본명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메드베데프. (밀리는 끝까지 그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그리고 ‘니카’는 니콜라이의 러시아식 애칭이었다.

할리우드로 오기 전 그는 러시아에서 발레를 했었는데, 10대 후반에 벌써 러시아 국립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유신이 벽에 붙여 둔 포스터 중 오래된 쪽이 바로 그 시절의 사진이었다.

유신도 현대 무용으로 전환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발레를 했었는데, 당시부터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이다.

“닉 메드는 이제 발레 댄서가 아니고, 할리우드 배우잖아. 그래도 자기는 여전히 그의 팬이야?”

“물론이지. 어차피 나도 지금은 춤은 그만둔걸.”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다고 해도 대체 자기는 대체 그 알파는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얼굴!”

아, 그렇군. 유신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밀리는 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반박할 수 없는 외모기는 했다.

“유신, 솔직히 말해 봐. 나랑 하우스메이트가 된 이후로 자기가 그 포스터의 주인보다 더 마음에 둔 알파가 있었어?”

“아하하, 밀리.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없지.”

유신은 자신이 언제부터 니카의 팬이었는데 무시하지 말라고 으스댔다. 밀리는 좋은 생각이 났다며 손뼉을 쳤다.

“그러면 차라리 작정하고 닉 메드에게 접근해 보면 어때? 그래도 일단은 자기는 우성 오메가잖아?”

“무슨 소리야, 밀리? 그러는 순간 더 이상 팬이 아니고 스토커야, 그거. 그리고 니카는 금발의 백인 미녀하고만 사귄다고. 여태껏 스캔들 상대는 죄다 그런 외모의 여자 베타나 여자 오메가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사람 플레이보이로 꽤 유명했던가. 아니, 자기 왜 그런 것까지 다 알아?”

“왜는? 팬이니까 당연히 체크하지.”

좋아하는 스타의 기사는 악의적인 거라도 모두 확인한다. 별개로 자신이 그와 사귈 생각은 없다는 산뜻한 표정까지.

“이해가 안 가! 내가 자기처럼 우성 오메가로 태어났다면, 맘에 드는 알파는 다 꼬시고 다닐 텐데.”

“꼬시고 다녀?”

“됐으니까. 지금이라도 닉 메드는 포기하고, 데이트할 생각 없어?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소개해 줄게.”

“아냐, 밀리. 난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어차피 학교 때문에 시간적 여유도 없는걸. 돈은 더 없고. 거기다 뭣보다, 어차피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고개를 떨구는 유신을 향해, 밀리는 새삼 어이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그래서 자길 좋아하긴 하지만.”

“응, 뭐라고?”

“유신, 난 자기가 좀 더 주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완전히 새롭게 보일걸.”

관심이란 역시 데이트를 말하는 거겠지? 유신은 괜히 민망해 리포트에 다시 집중하는 척을 했다. 밀리가 금방이라도 다시 그 화제를 이어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야 할 과제도 산더미였다.

딸랑.

마침 카페의 문이 열리고 작은 여자아이를 안은 남자가 들어왔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사장 루이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캣!”

“루 아빠!!”

루이스는 바로 카운터에서 나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아이를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함께 들어온 남자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어서 와, 짐. 캣이 오는 동안 말썽을 피우진 않았고?”

“그냥 유치원에서 데려오는 것뿐인데, 뭘.”

카페 루이의 사장인 루이스와 남편인 짐, 둘 사이의 딸인 캣이었다.

루이스와 짐은 둘 다 베타 남성이지만 결혼한 사이였다. 캣은 4년 전 그들이 대리모로 얻은 아이로, 생물학적으로도 둘 사이의 아이다.

“저 셋은 언제 봐도 참 사이가 좋네.”

“유신, 진지하게 난 오늘만은 저 모습에 웃을 수 없어.”

“저런.”

다정한 세 사람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는 유신의 옆에서, 밀리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곧 헤어질 예정인) 망할 남자 친구를 떠올린 것이었다.

“안녕, 유신! 안녕, 밀리!”

그사이 두 사람에게 다가온 캣이 까르르 웃었다.

“안녕, 캣!”

“캣! 스위티! 오늘은 나한테 너무나도 슬프고 힘든 날이야.”

“밀리, 슬퍼? 무슨 일이야? 캣이 위로해 줄까?”

“정말 고마워. 우리 스위티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과장되게 눈물을 훔치는 척하는 밀리의 모습에 유신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밀리가 과장하는 게 아니라 캣은 정말로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항상 빨간 리본으로 묶고 다니는 곱슬곱슬한 금발도, 오동통한 뺨과 팔다리도, 어디 할 것 없이 전부 사랑스러웠다. 말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항상 방실방실 웃어서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코스모 대리모 센터의 광고를 볼 때마다 유신이 혹했던 데는 아무래도 돈이 제일 큰 이유기는 했지만, 사랑스러운 캣의 존재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저런 천사 같은 아이라면 낳아 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버리게 된달까.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대리모를 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진짜, 항상 기운이 넘치는 밀리가 오늘 영 힘이 없네. 밥은 다 먹었지만.”

루이스가 어느새 싹 비워진 파스타 그릇을 치우며 말을 걸었다. 밀리는 입을 쑥 내민 채 툴툴거렸다.

“두 사람이 너무 러브러브 해서 그래.”

“나와 짐이? 우린 평소대로인데?”

“그게, 지금 밀리가 남자 친구랑 헤어질 위기거든요.”

유신이 난처한 듯 웃으며 상황을 설명하자, 루이스와 짐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캣만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리가 버럭 했다.

“헤어질 위기가 아니야. 완전 헤어질 거니까.”

“이봐, 밀리.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그 망할 놈이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구요!”

“그거 큰일이로군.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밀리는 헤어지고 나면 바로 다시 씩씩해질 테니까.”

“루, 그거 위로의 말 맞죠?”

“사실을 말하는 거지.”

루이스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근육질의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밀리는 항상 누군가와 사귀고 금세 헤어지고, 그러다 곧 다시 누군가와 사귀기는 했다. 덕분에 종종 일어나는 이별 소동은 밀리의 친구들에게는 딱히 놀라운 사건도 아니었다. 유신 정도나 진지하게 걱정해 준달까.

밀리도 본인의 그런 점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루이스에게 화를 내는 대신 후식 케이크를 추가로 주문했다. 실연을 미리 기념한다는 의미였다.

“그럼, 난 캣하고 집으로 갈 테니까. 퇴근하고 봐.”

“루 아빠도 같이 집에 가면 좋은데.”

“루는 아직 가게 일이 남았어. 내일 아침에 보자고 안녕 해야지, 캣.”

“힝.”

그대로 짐과 캣이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 유신이 루이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 벌써 들어가요?”

“응, 짐이 퇴근하고 캣을 유치원에서 데려오면서 잠깐 들른 거라. 가게 끝나고 집에 가면 캣은 자고 있을 시간이라 얼굴을 못 보거든. 유신은 평일 이 시간에 잘 안 오니까 처음 보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의 얼굴은 어디로 봐도 영 아쉬워 보였다. 보다 못한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 제가 잠깐 카운터를 볼 테니, 오늘 하루만 두 사람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면 어때요?”

“아냐, 유신!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지금 바쁜 거 아냐?”

루이스는 눈으로 테이블에 널브러진 유신의 책과 노트 더미를 가리켰다.

“어차피 리포트도 막혀서 조금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요.”

“나도 같이 있을게요. 다녀와요, 루이스.”

케이크 가루를 입가에 묻힌 채 밀리가 손을 까딱했다.

“정말 그래도 될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루이스의 손은 이미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유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20, 아니 30분이면 다녀올 수 있을 거야. 나중에 1시간 시급 추가해 줄게.”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건 제가 그냥 호의로.”

“저녁밥 공짜로 주시면 돼요. 유신인 음식이 필요해요. 좀 더 먹여야 한다구요.”

밀리의 제안은 루이스의 마음에도 꼭 들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유신은 너무 말랐으니까. 돌아오는 대로 바로 푸짐하게 먹여 줄게.”

“전 진짜 괜찮은데.”

“아냐, 유신. 정말 고마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음식 주문이 들어오면 사장이 자리를 비워서 안 된다고 해.”

“그건 걱정 말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곧 루이스는 짐과 캣을 데리고 가게를 나갔다. 유신을 향해 밀리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자기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원래라면 공짜로 일할 거였는데, 덕분에 저녁밥 굳었잖아.”

“하하, 고마워.”

딱히 저녁을 먹을 생각이 없던 만큼 유신의 웃음은 어색했다. 밀리는 그 표정을 바로 읽어 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자기는 너무 물러! 당장 돈이 궁한데 또 공짜로 일해 주려 했지?”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유신은 카운터로 들어가 손부터 씻었다. 주말이 아닐 때 여기 서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는 몇 가지 체크를 한 뒤, 모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일단 의자에 앉았다.

사고 이후로 오래 서 있으면 조금 힘든데, 여기는 근무 시간 중에도 짬이 나면 중간중간 앉아도 신경 쓰지 않아서 고마웠다. 애초에 루이스 본인이 서 있는 걸 싫어해서 의자를 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유신을 보는 밀리는,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눈 호강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저 멍 때리고 있을 뿐인데도 마냥 사랑스럽다.

졸린 듯 긴 속눈썹이 안경 안쪽에서 느릿느릿 깜빡이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껴도 안쪽의 커다란 눈동자는 가릴 수 없다. 그럼에도 종종 안경이 콧잔등으로 흘러내릴 때마다, 렌즈로 가리지 않은 저 눈동자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발견하고는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 아래 예쁘게 뻗은 콧날과 촉촉해 보이는 입술. 머리카락은 워낙에 부드러워 세팅을 하지 않으면 이마 위에서 바로 흐트러져 버리지만, 그조차 나른한 매력을 더했다.

날씬한 몸은 신기할 정도로 팔다리가 길어, 어디로 봐도 아시아인의 체형이 아니었다. 이전 꽤 오랫동안 무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밀리가 바로 납득했을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무슨 동작을 해도 지독하게 우아한 것 또한 감탄스러웠다.

우성 오메가는 다 저럴까? 아니면, 저런 외모니까 우성 오메가인 걸까?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밀리는 유신과 처음 만난 순간 완전히 홀려 버렸다. 사실 그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나마 밀리는 성향상 연애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저 친구로서의 애정으로 끝났을 뿐.

저런 외모로 여태껏 애인은 고사하고 데이트조차 해 본 적 없다니. 처음 밀리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건 또 무슨 악질적인 농담일까 귀를 의심했었다. 물론 이제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여태껏 유신에게 대시하는 사람이 없었냐면, 절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밀리가 목격한 것만 해도 한 트럭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유신은 자신이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데, 그 이유란 바로.

딸랑.

마침 가게에 손님이 들어오며 밀리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아, 저 여자는.”

공교롭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몰랐지만, 분명 같은 대학을 다니는 알파다. 알파답게 여자치고는 큰 키에, 꽤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자는 카운터 뒤에 선 유신을 발견하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은 안 계신가요?!”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지금은 제가 카운터를 보고 있어요.”

“그, 그러시구나.”

지금 유신의 입가에는 사교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앞에 선 사람에게는 임팩트가 상당할 터였다.

유신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일 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미묘하게 살랑거리고, 그때마다 여자 알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누가 봐도 홀딱 빠진 알파의 태도였다.

결국 그녀는 뭔가를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밀리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알겠습니다. 카푸치노 한 잔, 테이크 아웃이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간단한 주문인데도 꽤 오래 걸린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보고 있는 밀리는 이미 다 눈치챈 것을, 정작 당사자인 유신은 모르는 듯했다.

딱하게도! 밀리는 속으로 그녀에게 애도를 보냈다. 이미 결말까지 다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음료는 금방 나왔다.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거 떨어트리셨더라구요.”

컵을 받아 드는 그녀에게 유신은 작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이 한순간에 완전히 새빨개졌다.

왜냐하면 그 쪽지는 그녀가 유신에게 용기를 내어 건넨 연락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신은 그녀가 그것을 흘렸다고만 생각하고, 펴 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무자각이라 악의가 없어서 더 무섭달까, 당하는 쪽은 오히려 더 충격적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당했다면 일주일은 외출 못 했을 거다. 밀리는 순간적으로 저 여자 알파가 진심으로 불쌍해졌다.

“죄, 죄송. 아니, 감사,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다음에 또 오세요.”

“네, 네, 다음에, 또.”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가게를 나갔다. 물론 손에는 방금 유신이 건넨 카푸치노 컵을 꼭 든 채였다.

어쩌면 루이스는 좋은 단골손님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렇게 차인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슬그머니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 상대가 고백을 깨닫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시 볼 용기를 주는 듯했다. 그렇다고 다시 고백해 오지는 않았지만.

“밀리, 왜 그래?”

드디어 친구의 열렬한 시선을 깨닫고, 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손에는 행주를 든 채 커다란 눈동자로 바라보는 모습 또한 너무도 사랑스러워, 밀리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져 버렸다.

“모르면 됐어, 유신. 난 진짜 자기의 그런 점이 너무 좋더라.”

“이상한 소릴 다 하네. 아, 어서 오세요!”

슬슬 손님들이 늘어날 시간이었다. 유신은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밀리도 얼마 남지 않은 케이크를 마저 해치웠다.

***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수많은 오메가와 베타들의 공공연한 이상형. 세계 최고로 인기 많은 알파, 닉 메드는 현재 대부분의 일을 중지한 채 뉴욕에 있었다.

뉴욕의 마천루가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의 최고층.

다섯 개의 침실과 다섯 개의 화장실, 두 개의 식당, 2층 높이의 천장에 파티가 가능할 정도로 넓은 거실과 작은 수영장이 딸린 옥상 테라스까지 갖춘, 호화롭기 그지없는 펜트하우스다.

세련되게 꾸며진 복도를 커다란 짐을 든 여자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다. 키가 크고 미인이지만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더티 블론드는 뒤로 당겨서 단정하게 하나로 틀어 올리고, 짙은 색 치마 정장을 입었다.

“네, 올가 노비코프입니다. 지금 도착했어요.”

그녀는 귀와 어깨 사이에 위태롭게 핸드폰을 끼우고 있었다.

“미스터 메드는 어디에…… 옥상 수영장이요?! 세상에! 벌써 10월이라고요.”

망할 러시아인! 올가는 목 안쪽에서 쉰 소리 같은 숨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거칠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곧바로 옥상으로 통하는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심슨. 말씀하신 물건들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대본들, 커피, 샌드위치, 팬들이 보낸 선물까지요.”

“올가, 고마워!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올가가 수영장 옆의 파라솔 테이블에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자, 양복 차림의 대머리 흑인 중년 남자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녀의 명목상 고용주인 아이잭 심슨이었다. 그는 급하게 뜨거운 커피부터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옥상은 춥네요.”

“응, 추워.”

몸을 웅크리며 재킷 위로 팔뚝을 쓰다듬는 올가에게 아이잭은 바로 동의했다.

얼마 전까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날씨에 익숙하던 두 사람에게 뉴욕의 가을은 너무도 차가웠다. 지금 수영장에서 튀는 물방울의 한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창 수영 중인 사람에게는 현재 온도가 딱 적당한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이런 수영장에 온수 옵션이 없을 리 없는데 본인의 변덕으로 굳이 껐을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됐어요?”

“시작한 지? 한 30분 됐나?”

“슬슬 나오겠네요.”

올가의 추측은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씬한 하얀 형체가 수영장에서 튀어나왔다.

작은 검은색 수영복 팬티 하나만 걸친 남자였다. 190에 가까운 큰 키부터 대단했지만, 놀랄 부분은 그쪽이 아니었다.

비현실적으로 긴 팔다리, 온몸을 감싸고 있는 잘 단련된 근육. 미술관의 조각상을 가져다 놓아도 이기지 못할 듯한 아름다운 육체였다. 윤곽으로 보아 수영복 팬티 안쪽도 꽤나 대단할 것이 분명했지만, 보는 사람이 감히 거기까지는 떠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어깨 위쪽은 더 대단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은 거의 흰색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 금발이었다. 남자는 젖은 채 얼굴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귀찮은 듯 뒤로 넘겼다. 푸른색과 녹색이 뒤섞인 눈동자가 우아한 얼굴 한가운데서 빛났다.

그윽한 눈매, 높은 콧날,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뒤섞인 턱선, 조금 얇은 듯한 입술까지. 그야말로 신이 공들여 빚은 예술 작품이었다.

“닉!”

아이잭이 다급히 남자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것을 받아 젖은 머리칼을 느긋하게 털어 냈다. 백금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햇볕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그렇다. 저 지나치게 아름다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 닉 메드였다.

온몸에 반짝반짝 오라를 둘렀다는 게 바로 저런 것일까? 벌써 몇 년째 저 연하의 할리우드 슈퍼스타 밑에서 일하면서도, 올가는 정면으로 마주칠 때마다 그의 비현실적인 미모에 움찔하곤 했다. 괜히 데뷔작이 영화관에 걸리자마자 전 세계 소녀들이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아이잭은 닉의 매니저이자 1인 소속사의 서류상 사장이었다. 올가는 그런 아이잭의 비서로, 실제 하는 일은 닉의 보조 매니저에 더 가까웠다.

물론 닉의 얼굴이 취향이 아닐 수는 있었다. 올가 역시 개인적 취향상 저렇게 반짝반짝한 외모는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외모가 대단히 우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일하면서 고생한 게 쌓이다 보니 이제는 저 얼굴만 보면 순간적으로 두근거리면서도 (이건 조건 반사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왠지 욱했다. 덕분에 저 얼굴에 대한 면역이 커져서 일하기는 쉬워졌지만.

“안녕, 올가 노비코바!”

“미스터 메드, 저는 올가 노비코프입니다. 전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매번 말씀드리잖아요. 제 조상 중에 러시아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 그저 러시아식 성을 가진 미국인이에요.”

닉은 올가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파라솔 그늘 아래 있는 선베드에 앉았다. 대충 어깨에 두른 커다란 수건 사이로 보기 좋은 어깨와 단단한 허벅지 한쪽이 적당히 드러나 보였다.

사실 그가 기분에 따라 그녀의 성을 틀리게 부르는 것은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올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러시아인에게 그녀의 이름은 뭔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지는 듯했다.

“그늘이 아니라 이 햇볕 쪽에 앉는 게 어떤가? 몸도 데워지고 말이야.”

아이잭은 차갑게 식은 닉의 몸을 걱정했다. 수영장 옆의 여러 선베드 중 굳이 그늘진 쪽에 앉은 것이 못마땅한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들고 있는 가운을 입히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듯했지만, 정작 상대방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이잭, 나는 자외선이 싫어.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해.”

얼핏 들으면 선탠에 목숨을 거는 할리우드의 다른 배우를 비난하는 듯한 발언이다. 실은 그저 햇볕에 닿기 싫다고 매니저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저런 외모로 태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올가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보통은 저 정도로 잘나지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나아지려 이것저것 하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선탠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고.

“또 그렇게 대충 넘기려고!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할리우드를 책임지는 배우잖나. 수많은 프로젝트가 너와 엮여 있어!”

“어차피 계약한 영화들은 다 촬영 끝났어.”

“촬영이 끝이 아니야. 곧 영화 홍보가 시작될 거다.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신경 써야지. 이런 계절에 냉수 수영이라니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시작은 매니저답게 일에 대해 걱정하는가 싶던 아이잭이었지만, 점점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모드로 변해 갔다. 처음 만났을 때 닉이 어렸다더니 지금도 보호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불쌍한 노인! 반항기를 훨씬 지난 손주는 어르신의 염려 따위 신경 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물론 아이잭은 아직 노인이라 부를 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왜? 난 이 정도로 차가운 물이 좋아, 아이잭.”

러시아인에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닉이 되물었다. 정작 그 러시아인은 완벽한 영국 상류층 억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닉은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본인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굳이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그 사실을 잘 몰랐다.

“개인의 호불호는 그렇다 쳐도 과연 의사나 전문가도 네 의견에 동의할까?”

“수영은 건강에 좋은 운동이야.”

“운동이라면 굳이 냉수 수영이 아니더라도 분명 여기 펜트하우스 내에 최신 시설이 갖춰진 운동실이 있을 텐데. 그렇지, 올가?”

“네, 물론입니다.”

갑자기 이름이 불려 올가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닉은 귀찮다는 듯 선베드 위로 늘어졌다.

“그런 거만 하면 지겨워. 가끔은 하늘도 보고 해야지.”

“애초에 이 수영장은 전문적으로 수영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라고!”

“사용하지도 않을 시설을 왜 만들어? 난 이 집을 계약했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어.”

“닉, 제발! 수영장 크기 좀 보라고. 이렇게 발이나 담가야 할 것 같은 쬐끄만 수영장에서 굳이 전력으로 헤엄칠 거라고 누가 상상하겠어?”

“왜? 깊이도 충분하고 괜찮았어. 길이가 짧아서 평소보다 두 배로 턴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거라고!”

“뭐 어때? 난 충분히 즐겼어.”

어느 모로 봐도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소년처럼 웃는 얼굴은 솔직히 매력적이다. 쓸데없이 반짝이는 저 생명체가 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지 납득하게 만든달까?

알파인 아이잭의 말에 따르면, 올가가 베타라서 그나마 이 정도로 그친 거란다. 닉의 페로몬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대단하다고. 그 귀하다는 우성 알파니 어련할까 싶기는 했다.

올가는 새삼 닉이 제 취향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족속은 엮이면 백 프로 피곤했다. 지금처럼 일로만 연관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다.

그런 자신조차 마음에 둔 남자가 없었다면 (그리고 일하는 중간중간 이렇게 욱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홀렸을지도 몰랐다. 제일 큰 문제는 벌써 몇 년이 지나도록 마음에 둔 남자와 그녀 사이에 전혀 진척이 없다는 점이지만.

아니, 지금은 그건 상관없고.

“미스터 메드, 알겠어요. 수영하고 싶으신 건 어쩔 수 없을 테니, 다음부터는 수영장 온수만 끄지 않도록 하시죠. 미스터 심슨의 혈압이 더 오르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말이죠.”

“이런, 그건 좀 고려해 볼 문젠데.”

아이잭의 건강 문제를 꺼내자 닉은 의외로 쉽게 납득했다. 올가는 속으로 됐다고 생각하며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제가 미스터 심슨의 부탁으로 가져온 것들을 좀 살펴보시면 어떨까요?”

“잘 이야기했어, 올가!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올가의 말에 아이잭이 반가워했다. 그는 일단 닉에게 가운을 입히는 건 포기하고, 대신 파라솔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내보였다.

커피, 샌드위치, 팬들이 보낸 선물, 그리고 제일 중요한 새로운 대본까지.

참고로 선물은 죄다 회사 쪽에서 이미 검증이 끝난 물건들이었다. 목록을 보자면, 사랑과 찬사가 가득한 긴 팬레터와 직접 편집하고 제본한 앨범, 그가 영화에서 입고 나온 의상과 똑같이 차려입은 테디 베어 따위였다.

나름 아이잭이 고심해서 고른 것들이지만 솔직히 올가가 보기에도 딱히 닉의 흥미를 끌 듯한 물건은 없었다. 예상대로 닉은 하나같이 흥미 없다는 얼굴이었다. 커피도 샌드위치도 딱히 그의 관심은 아니었다.

아이잭은 결국 몸이 단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닉, 이거 새로운 대본인데 말야.”

“아이잭, 난 지금 대본 안 보고 싶은데.”

“그래? 그럴 수 있어. 지금 꼭 보라는 게 아니야. 혹시 보고 싶어지면 보라는 거지. 일단 네 방에 둘 테니까. 아니, 카피가 있으니 언제라도 이야기하라고. 어디서든 바로 가져다줄게.”

“그래,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하지만 두 사람 다 닉이 이미 몇 달간 새 작품에 관해 관심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 몇 달 수많은 대본들이 표지조차 펼쳐진 적 없이 어딘가로 처박혀 버린 것도.

“닉, 부탁이야! 팬들은 네가 어서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길 원할 거라고.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은퇴할 셈이야?”

“어차피 금방 또 새로운 스타로 갈아타지 않을까?”

“오, 닉.”

아이잭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닉이 괜히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저택을 두고 뉴욕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뉴욕의 이 펜트하우스도 충분히 호화스럽기는 했지만.

닉 정도의 위치면 작품을 쉬고 있을 때도 모델이나 다른 활동은 이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이미 계약된 활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사양하는 중이었다.

워낙에 계약해 둔 일이 많다 보니 아직까지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업계에도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찍어 둔 작품이 세 개나 되니, 그게 다 개봉할 때까지는 어찌어찌 활동이 이어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저대로 더 이상 작품을 찍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서 올가는 문제를 깨달았다. 만약 저대로 닉이 할리우드에서 은퇴한다면, 자신은 실업자다.

대부분의 월급쟁이가 그렇듯 그녀는 이 직장이 마냥 좋지는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일하다 매일 욱했고, 소소한 불만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의 월급을 사랑했다. 이 정도로 급여가 좋은 직장은 쉽게 구하기 힘들다.

사실 닉은 금전적으로는 이미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배우로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그런 레벨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의 집안은 막대한 부자였다. 올가가 아는 것만으로도 살면서 쓰고 써도 다 쓰지 못할 재산이 그의 명의였다. 채 써 버리기도 전에 추가로 돈이 쌓이는 형국이었다.

닉은 잘생겼고 부자니, 영화배우를 그만두더라도 잘살 거다. 아이잭이야 어차피 슬슬 은퇴를 생각할 나이고.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노인이라 불릴 나이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어떨까? 여기 정도의 직장을 다시 구할 수 있을까? 애매한 나이에다 평범한 베타에, 여기 외에는 별다른 경력도 없는 자신이?

솔직히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닉이 배우를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사실 닉의 커리어는 할리우드 내에서도 꽤나 독보적이었다.

그의 데뷔작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울라이트 사가’ 3부작이다. 운명의 비밀을 감추고 인간인 척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귀한 혈통의 흡혈귀 알파가, 평범한 미국 베타 여고생과 사랑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였다. 닉은 시리즈의 남자 주인공인 매혹적인 흡혈귀 크리스토퍼 역을 맡았다.

당시 닉은 23살. 젊은 신인 배우가 바로 주연을 맡는 경우가 영화계에서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보통은 단역이라도 연기 경험이 있거나, 공개 오디션 정도는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닉은 감독에게 전화 한 통을 거는 것으로 배역을 따냈다.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유명한 캐스팅 비화다.

원작이 인기에 비해 작품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고, 그래서 오히려 영화화에 대한 기대감은 낮았다. 대충 만들어도 어지간하면 히트 칠 거라고 다들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중요한 것이 남자 주인공의 캐스팅이었다. 애초에 소설 자체가 남자 주인공의 매력만으로 허술한 스토리를 끌고 가는 형태였다. 감독과 제작사 모두 신선한 신인 배우를 원했고, 전 세계적인 규모의 오디션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화 한 통으로 캐스팅이 확정되었단다. 아니, 오히려 감독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지만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러시아 국적에 연기 경험이라고는 없는 초짜 신인이 전 세계적인 커다란 프로젝트에서 오디션도 없이 주연을 맡은 것이었다. 당연히 시리즈의 팬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던 배우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습게도 촬영 현장 파파라치 컷이 뜨는 동시에 논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흐릿한 화질로도 닉의 미모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외모와 연기는 별개라는 의견이 나왔다. 예고 컷에서조차 대사가 거의 없자 불안은 증폭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스크린 관에 걸리고 1회 상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왜 감독이 닉의 전화를 받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깨달았다. 그야말로 소녀들을 홀리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흡혈귀가 거기 있었다.

딱히 연기란 것을 펼칠 만한 역은 아니었으나, 소녀들은 그의 완벽한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 흡혈귀다운 창백한 안색에 바로 사로잡혔다. 그 알파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그들은 감탄했고, 한마디 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는 당연하게도 3편까지 모두 대히트를 쳤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왜 데뷔작으로 그 역할을 택했냐는 질문을 받고, 닉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내가 제일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전 세계 소녀들은 그 답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영화로 닉은 바로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10대 한정 인기였다.

할리우드의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닉 메드는 차기작으로 의외의 선택을 했다. 무려 유명 스파이 영화 시리즈의 악역이었다. 촬영은 전작의 2편과 3편 사이에 이루어졌고, 3편이 극장에서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이어 개봉했다.

‘스파이 위기일발 - 러시아에서 굿바이’에서 닉이 맡은 역할은 사연 많은 러시아 마피아인 알파 이반이었다.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연기력이 필요한 역은 아니지만 그는 꽤나 그럴듯하게 화면을 장악했다. 사실 어차피 다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미모였다.

영화는 완성도 높은 엔터테인먼트로 호평받으며 대박을 쳤고, 관객들은 커다란 화면에서 닉을 실컷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창백한 안색, 거의 하얗게 빛나는 백금발과 신비로운 청록색 눈동자에 사람들은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왜 10대들이 닉 메드라면 그렇게 환장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닉이 그 역할을 맡지 않았더라도 대중들은 결국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뭘 하더라도 그리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애초에 창백한 피부부터가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딱히 선호되지 않는 요소였다. 하지만 닉은 예외라며 사람들은 그 부분에 더 열광했다. 대중의 트렌드를 뛰어넘는 매력이 바로 그의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닉 메드는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고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출연작들을 성공시켰다. 필모그래피가 쌓여 가며 어느 순간 연기력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올가가 아이잭의 아래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대충 이즈음부터였다.

이제 닉 메드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많고 많았다.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수많은 오메가와 베타들의 공공연한 이상형. 세계 최고로 인기 많은 알파. 할리우드의 플레이보이. 금발 성애자.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파파라치에 의해 기사화되고, 그가 먹고 마시고 사용한 물건들을 팬들은 열성적으로 소비했다.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인간 광고판이었다.

그럼에도 몇몇 열성적인 팬을 제외한다면 그의 과거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올가도 몇 년간 일하면서 알음알음 주워들은 것이 다였다.

닉 메드라는 이름은 물론 예명이었다. 러시아인이 그런 이름일 수는 없다.

본명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메드베데프. 러시아 사업가이자 우성 알파인 아버지와, 러시아 국립 발레단의 전설적인 발레리나로 우성 오메가인 어머니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러시아 마피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설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메드베데프라는 성 자체는 러시아에서 흔한 성이기 때문에 이름만 보면 귀족 출신일 리 없지만, 중간에 성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 쪽이 엄청나게 부자라는 점이다. 러시아 마피아라는 설도 이 때문에 나온 듯했다. 가업은 일찌감치 네 살 연상이자 알파인 그의 누이가 물려받기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발레를 배웠다. 재능은 타고났는지 10대 후반에 이미 어머니가 활약했던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무슨 이유로 오랫동안 하던 발레를 그만두고 갑자기 배우로 전향했는지는 불분명했다. 검색 사이트에도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관련 내용은 백지였다.

여하튼 어릴 때부터 시작해 제법 경지에 오른 발레도 미련 없이 그만두고 배우가 된 남자다. 배우 역시 언제 그만두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아카데미 시즌은 솔직히 닉에게 너무했다. 연기력도 작품성도 흥행 성적까지 빠지지 않아, 거의 맡겨 놓았던 남우 주연상을 전혀 엉뚱한 배우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다들 닉이 아직 너무 젊고 미국인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입을 모았다.

정작 당사자는 수상 실패에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이잭도 올가도 닉이 내심 크게 실망했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 좋지 않아. 진심 망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배우 일에 의욕을 잃은 닉이 이대로 배우를 그만둔다는 미래가 그럴듯해 보이는 게 기분 탓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는 백수 확정?!

그렇게 올가의 머릿속 미래 예상도가 점점 어두워져 가고만 있을 때였다.

“안녕, 여러분!”

화려한 맞춤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옥상 테라스를 가로질러 선베드로 다가왔다.

갈색 머리, 녹색과 갈색이 뒤섞인 헤이즐 아이, 보기 좋게 그은 피부와 잘 단련된 몸을 한 미남이었다. 얼핏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동시에 그 미끈한 얼굴에는 누가 감히 나에게 참견하냐는 자신만만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말만 고급 아파트지 보안이 형편없잖아. 저런 외부인을 무단으로 들여보내고.”

남자를 발견한 닉이 대놓고 성가시다는 얼굴을 했다.

정작 상대방은 그런 닉의 태도가 익숙한지 오히려 즐거워했다. 아니, 아예 한술 더 떠서 윙크까지 한다.

“오, 친구! 반갑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할 필요는 없어.”

“내가 이럴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했던 건데.”

“쑥스러워하지 마, 니키. 우리 사이에 이런 걸로 서로 사양할 필요 없다고.”

옷차림부터 몸가짐까지 딱 봐도 좋은 집안의 도련님이다. 그의 영어는 프랑스 억양이 진했다.

한 박자 늦게 남자를 알아본 올가와 아이잭이 인사를 건넸다.

“미스터 르노? 안녕하세요.”

“올가, 가브라고 부르라니까요!”

“오래간만이야, 가브리엘. 여기는 어쩐 일이지?”

“내 친구가 간만에 뉴욕에 왔다는데, 뉴욕에 사는 내가 찾아오지 않을 수 없잖아요, 아이잭.”

가브리엘 르노는 프랑스 자산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닉과는 부모들 사이의 친분으로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소꿉친구였다.

올가가 닉의 과거에 대해 주워들은 것 대부분은 가브리엘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듯 보여도 중요한 부분에는 입이 무거워, 정말 궁금한 부분은 절대 알려 주지 않았다.

가브리엘 역시 닉과 같은 알파였다. 외모부터가 전형적인 알파의 분위기를 풍겼다.

원래 알파오메가와 베타의 비율은 1:9 정도지만, 사회 지도층으로 갈수록 베타의 비율이 감소했다. 연예계는 평균적으로 1:1 정도였다. 특히 알파는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이 짙어서 알파의 주변에 알파인 친구가 많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여기만 해도 모인 4명 중, 베타인 올가를 제외한 3명이 모두 알파였다. 그녀가 10대 소녀였다면 눈이 돌아갈 상황일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나이는 이미 10년도 더 지났다. 그녀는 빨리 평화로운 사무실로 돌아가 캐러멜시럽을 잔뜩 친 마끼아또나 먹고 싶을 뿐이었다.

“니키, 대체 무슨 바람이야?”

“뭐가?”

가브리엘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닉의 맞은편 선베드에 앉아 있었다.

아이잭이 겨우 뭔가를 걸칠 기분이 든 닉에게 잽싸게 여태 계속 들고 있던 가운을 입혔다. 올가가 보아하니 젖은 머리도 드라이로 말려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으로 캘리포니아의 저택을 두고 여기 뉴욕까지 왔냐는 거지.”

“그냥 장소를 바꿔 보고 싶었을 뿐이야. 거기 계속 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차기작을 물어봐서 귀찮으니까.”

“확실히 그런 건 있지.”

나란히 있는 선베드에 엇비슷하게 키가 큰 알파 둘이 앉은 모습은 그 자체로 꽤나 압박감이 있었다. 닉처럼 우성 알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브리엘의 알파 수치도 꽤나 높았다. 그들에 비하면 아이잭은 거의 베타나 다름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공간에는 서로 경쟁하는 알파의 페로몬이 꽤나 짙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잭은 아까보다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올가는 자신이 베타라서 이럴 때는 편하다고 생각했다.

“내 얘기는 됐어. 가브, 네 사업은 어때? 여전히 유기농 식품 사업이던가? 그것 때문에 뉴욕에 장기간 머무르고 있는 거지?”

“맞아! 요즘 엄청나게 잘되고 있지. 이제껏 내가 손대는 일 중에 잘 안 된 게 있어?”

허세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가브리엘이 운영 중인 ‘가비스 오가닉 가든’은 지금 한창 핫한 브랜드였다. 원래는 뉴욕 뒷골목의 작은 가게에 불과했으나 몇 년 사이에 뉴욕을 본사로 하는 전 세계 규모의 유기농 푸드&레스토랑 체인으로 성장했다.

물론 거기에 가브리엘의 가문인 르노가의 자본이 큰 역할을 안 했다고는 말 못 한다. 그래도 짧은 기간에 사업을 그 규모로 키운 것은 가브리엘의 능력이었다. 그는 가벼워 보여도 자기 일은 확실히 하는 알파였다.

“안 그래도 곧 있으면 큰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거든. 당분간은 시간 여유도 많으니 내가 매일 같이 찾아와서 같이 놀아 줄게.”

“사양할게.”

“니키, 부끄러워하지 말라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둘을 보며 올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롭구나 생각했다. 아이잭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가브리엘! 당신 친구의 무기력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닉은 지금 몇 달째 차기작도 알아보지 않고 있다니까.”

“그냥 귀찮아져서 잠시 쉬는 것뿐이야.”

“뭐라고요? 니키가 차기작이 없다고요, 아이잭? 그러면 안 되지! 니키의 연기력을 썩히면 되나!”

닉 본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흥분하는 가브리엘에게, 아이잭이 이때다 싶었는지 과장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뭔가 좋은 방법 없을까?”

“의욕을 되살려야 한다는 거죠?”

“맞아, 맞아.”

가브리엘이 당연하다는 듯 결론을 냈다.

“그거라면 좋은 방법이 있죠. 역시 연애를 해야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질색하는 닉에게 가브리엘이 다시 윙크를 했다.

“왜? 원래 사랑을 하면 활력이 생긴다고들 하잖아. 무기력해진 네게 딱 어울리는 솔루션 아냐?”

“애인 없는 너한테선 정말이지 듣기 싫은데, 가브.”

“니키, 걱정 마. 난 애인이 없어도 활력이 넘치거든. 물론 언제나 애인을 절찬 모집 중이지만 말야.”

아이잭이 바로 흥분하며 나섰다.

“난 가브리엘의 말에 찬성이야. 지금 당장 사람들을 모아서 파티를 열자고! 너와 연애할 만한 오메가 미인들을 잔뜩 부르는 거야.”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지 모른다. 금방이라도 사방에 전화를 돌릴 기세인 매니저와 달리, 당사자인 닉은 심드렁했다.

“난 내 쪽에서 나서서 누구 만나는 거 좀 별론데.”

그리고 그 한마디에 거기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뒤집어졌다.

“네가?”

“당신이요?”

“쿨럭, 쿨럭, 쿨럭!”

놀라서 되묻는 가브리엘과 올가의 옆에서, 아이잭이 침을 삼키다 혼자 사레가 걸려 커다랗게 기침을 해 댔다. 닉이 하품을 했다.

“뭘 그렇게 놀라.”

“지금 안 놀라게 됐어요? 할리우드의 플레이보이로 불리며 차례로 애인을 갈아 치우던 당신이? 20대 초반의 금발하고만 사귀어서 금발 성애자라는 악명을 듣는 당신이?”

올가는 억울할 지경이었다. 여태껏 그와 금발들 사이의 치정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아이잭과 자신이 그 뒤처리를 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정작 본인은 상대방의 이름도 제대로 못 외워서 더더욱 큰일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닉이 웃으며 올가와 시선을 맞추었다. 청록색의 오묘한 눈동자가 별 의도도 없으면서 상대를 홀리도록 반짝였다.

“뭐, 뭐가요.”

“이 기회에 말하는데, 난 금발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지도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어두운 게 더 좋을까?”

“네, 에?”

“머리카락 말야.”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자, 아직 젖은 백금발이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졌다. 손끝이 단정한 아름다운 손가락이 귀찮다는 듯 그 주변을 털어 낸다.

올가는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치만 여태껏 당신이 데이트했던 상대는 죄다 금발이었잖아요?”

“그거야 그런 애들이 나한테 데이트를 신청해 왔으니 말이지.”

자신은 거절하지 않은 것뿐, 이라며 닉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시작은 그거 같아. 요란하게 기사가 났던 첫 데이트 상대가 금발이었잖아. 그 뒤로 다들 내 취향을 오해한 거겠지. 이상하게 원래 흑발이던 애도 굳이 금발로 물들이더라.”

여태껏 닉이 데이트를 했던 상대들은 모두 외모에 공통점이 있었다. 금발에 그은 피부를 가진 20대 초반의 글래머 여자들. 베타 혹은 오메가.

자연스럽게 닉이 어린 금발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본인도 딱히 부정하지 않자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딱히 긍정한 적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한 이야기대로라면 죄다 주변의 착각일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데이트 상대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이름도 못 외우던 것도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앞뒤가 들어맞는다. 물론 그렇다고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데이트 상대 중 누구에게도 딱히 집착하진 않았었지. 당시만 해도 그저 바람둥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올가는 닉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왜?

“어째서 그들을 거절하지 않았던 거죠?”

“나한테 계속 접근해 오는 걸 내가 어쩌겠어. 그중 하나와 데이트라도 해야 그나마 좀 조용해지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생각해 봐. 올가는 이 얼굴을 가만둘 수 있어?”

닉이 제 얼굴을 가리키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자연스러운 표정이 아닌 카메라용 미소였다. 실제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공연용 미소인데도,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역시나 홀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윽, 이 나르시시스트가! 올가는 속으로 신음했다.

“전 알맹이를 아니까, 거절할게요.”

“하하, 올가! 그래서 내가 몇 년째 당신을 고용하고 있는 거라니까.”

왜인지 닉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그럼 연애는 텄다는 거네.”

가브리엘은 영 아쉬운 듯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어때, 니키? 아니면 식물이라도.”

“이만 포기하세요, 미스터 르노. 미스터 메드는 뭔가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세요.”

“으음, 올가.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투는 상처받는데.”

“맞아. 니키가 이래 봬도 예전에 우리 별장에 왔을 때, 어린 여동생하고 얼마나 잘 놀아 줬는데. 동물이나 식물은 몰라도 자기 애는 잘 키울걸.”

“하하, 그렇군요.”

매번 티격태격하면서도 어떻게 이럴 때만 죽이 잘 맞는 걸 보면 확실히 친구는 친구다. 그 와중에 닉이 가브리엘의 마지막 말에 갑자기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애는 잘 키운다라.”

“아냐? 난 네가 부모가 되면 꽤 다정한 아빠가 될 것 같은데.”

“그래?”

보석 같은 청록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올가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저 눈빛이 보이면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니키?”

놀랍게도 가브리엘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다들 어느 정도 각오를 했음에도, 이어진 닉의 이야기는 모두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나 아무래도 자식을 가져야겠어.”

아이잭이 입을 쩍 벌리고, 올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가브리엘은 대놓고 혼란스러워했다.

“니키, 결혼하려고? 오오, 축하해. 근데 누구랑?”

“아니, 상대는 없는데.”

“그럼 어떻게 애를? 설마 네가 낳는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재밌겠지만, 내가 알파인데 그게 되겠어? 뭐, 어떻게 보면 비슷한 방법이긴 하지. 요즘 세상에 싱글 알파가 혼자서 자식을 만들려 한다면 말이야.”

설명하라는 듯 닉의 시선이 올가를 향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독신주의자 알파가 인공 수정과 대리모를 통해 자식을 얻는 경우가 드물진 않죠. 나름의 비용은 필요하지만요.”

사실 올가도 나중에 여차하면 이 방법으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었기에 그에 대해 잘 알았다. 물론 실행은 좀 더 미래의 일이다. 베타 여자인 그녀의 경우에는 대리모와 계약하는 대신 정자만 사면 되니 비용이 훨씬 저렴해진다.

그나저나 닉의 아이라니, 성격은 몰라도 외모 하나는 엄청나게 귀엽긴 하겠다. 닉과 똑같은 얼굴을 한 작은 천사를 상상하자 올가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아니, 잠깐만. 생각해 보니 닉에게 아이가 있다고, 비서인 자신에게 나쁠 건 없다. 애 때문에 그가 더 열심히 배우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었고, 만에 하나 배우를 그만두더라도 애를 돌봐 준다는 핑계로 계속 일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지금 하는 일도 보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은 아이를 좋아했다.

“생각 있으시면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미스터 메드?”

올가는 충동적으로 닉에게 이렇게 물었다.

분명 얼마 전 알아본 대리모 센터가 꽤 괜찮았었다. 큰 병원 부속으로 역사도 오래됐고, 후기도 좋았었지. 분명 이름이 코스…… 어쩌고였는데.

“정말 하려고? 그럼 내가 삼촌이 되는 건가? 그거 엄청 괜찮은데!”

“일단 뭐든 의욕이 생긴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로군.”

의외로 가브리엘도 아이잭도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올가, 내가 해야 할 게 있을까?”

“글쎄요. 일단 저도 지금부터 알아볼 거라.”

“역시나 애 어머니가 될 상대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가브리엘이 이상하게 흥이 오른 채 끼어들었다. 어머니라면 생물학적인 모친인 난자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 하고, 올가는 사무적으로 생각했다.

“맞아, 가브. 그게 제일 중요하지.”

“니키, 희망 사항은 있어?”

“난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내 아이의 엄마라면 발레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수준급 이상으로.”

“그거 너답다. 외모는 역시 금발 미녀?”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난 어두운 머리색이 좋아. 대신 얼굴은 희고.”

“아, 뭔지 알지, 알지.”

아니 왜 갑자기 대화가 저런 식으로 흘러가는 건지, 올가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자동적으로 고용주의 의견을 핸드폰에 메모하고 있었다.

“꼭 백인일 필요는 없어. 아니, 아예 아시안이 좋겠다. 동북아시아 쪽은 하얀 사람은 정말 희잖아. 거기다 어딘가 가냘프면서, 키는 작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예쁜 사람이 좋겠어.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형질은, 그래, 이왕이면 우성 오메가로 할까?”

“잠시만요. 지금 발레 전공인데, 아시아계 미인에, 우성 오메가라고요?”

하지만 그쯤 되자 아무리 올가라도 잠자코 적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나하나도 흔치 않을 거 같은데 이걸 한꺼번에 만족하는 인간이 존재하겠냐고.

그러나 닉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아, 그리고 여자는 많이 만나 봤는데 나랑은 뭔가 안 맞더라고. 성별은 남자가 좋겠다.”

이제 올가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애초에 저 제멋대로인 알파가 진짜로 자식을 원해서 저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절대 불가능하도록 아무 조건이나 마구 던지고 있는 거지.

“미스터 메드, 이건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 아니에요. 이상형이나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나도 알아.”

의외로 닉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달콤한 웃음은 여전히 사람을 홀리지만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것같이도 보였다. 웬일로 카메라용 미소가 아니었다.

“아시면 다행이구요.”

올가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 핸드폰에 기록한 메모만 한 번 더 훑었다.

발레 경력. 검은 머리에 흰 피부. (동북) 아시아계. 키도 크고, 화려하지 않으나 미인. 다정하고 사랑스러움. 우성 오메가. 거기다 남성.

다시 봐도 역시나 절대 한꺼번에 성립할 리 없는 조건들이었다. 역시 이 알파, 진심으로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지. 그녀는 자신도 이 일에 너무 진심이 되진 말고 적당히 장단만 맞춰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형이냐는 제 지적을 닉이 마지막까지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

“결국 여기 오고야 말았구나.”

유신은 눈앞의 새하얀 건물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코스모 대리모 센터는 커다란 종합 병원의 부속 시설이었다.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나 묘하게 언덕 위에 있었다. 택시를 탔으면 바로 입구까지 갔겠지만, 그럴 여유가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덕분에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오른쪽 다리가 새삼 아파 오는 듯했다. 정확히는 오른쪽 골반과 무릎. 특히 무릎은 연골이 거의 닳아 버린 수준이라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됐다. 달리거나 점프는 금물이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한에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가능했다. 무엇보다 여기서 근육이 빠지면 그건 또 그것대로 힘들어지기 때문에, 근육을 유지하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정작 본인은 댄서 시절의 경험으로 그런 노력이 일반인들에게는 힘든 거라는 자각이 없었다.

센터에서 첫 번째 우편물을 받은 지 근 2주. 술김에 실수로 대리모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물론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문하지 않고서 취소는 불가능했고, 대학 수업과 과제를 핑계로 어영부영 미루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동안 별다른 연락이 없길래 어쩌면 이대로 별일 없이 끝날 수도 있겠다고 내심 기대도 했건만. 세상일 그렇게 만만할 리 없지. 며칠 전 갑자기 대리모 계약을 원하는 상대와 매칭이 됐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어떻게 건강 검사 하나 없이 바로 매칭이냐고 당황한 유신이지만, 다시 보니 얼마 전 학교에서 받았던 건강 검진 결과를 신청서에 야무지게 첨부했더랬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

참고로 밀리는 유신이 진작에 제대로 거절한 걸로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도 그럴 작정이긴 했는데 말야.

“으, 위가 아픈 느낌이야.”

마침 비어 있던 엘리베이터에 혼자 올라타고, 유신은 엘리베이터 벽으로 고개를 박았다.

오늘 아침부터 먹은 거라곤 커피에 든 설탕과 우유 정도일까. 아무리 식욕이 없어도 이런 날은 제대로 식사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엘리베이터의 한쪽 벽면은 전체가 거울처럼 되어 있어, 유신은 싫어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빨간 카디건에 청바지, 부스스한 앞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평소의 자신이 거기 있었다. 낡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묘하게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고. 취소를 위해서든 뭐든 어쨌든 한 번은 직접 와야 했잖아.

“지금부터 사정을 잘 설명하고, 제대로 거절하면 돼.”

소리 내어 중얼거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유신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흰색의 길고 청결한 복도가 보인다. 목적한 방은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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