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다시 대전으로 (3)
* * *
살짝 고민하던 아름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언니도 알고계시겠지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잖아요...?"
"어, 글치."
"그래서 어릴 때, 특히 학교 다닐 때 그런 부분이 많이 신경쓰이긴 했었어요."
아름이가 나를 처음 납치한 후 서로 얘기를 좀 해보자고 할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재벌로 태어난다는 것.
평범한 금수저로 태어나도 주변에서 위화감을 많이 느끼고 거리를 두려할텐데, 또 어린 마음에 어찌보면 왕따랑은 다르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마음의 벽 때문에 외로울 것 같다.
게다가 아름이는 보통 금수저도 아니었으니...
"언니의 경우에는 사실 100퍼센트 언니한테 해당되는 이야기들만 오가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시선을 받는게 불편하다는 거 맞아요?"
"으으... 음... 뭐랄까 형용키 어려운... 음... 그래도 맞는 것 같다."
"저는 그래서 저랑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랑 어울려보려고 했는데 다들 뭔가 조금씩 엇나가있는 것 같은 애들이라..."
"아하..."
아름이도 게임을 켰는데 풀템 풀골드인 상황이면 무슨 재미겠냐고 했었지.
연예인들이 마약을 하는 것도 인기와 돈이 모두 채워지니 평범한 것으로는 짜릿한 쾌락을 느끼기 힘들어서 많이들 한다는 칼럼을 봤다.
아름이 말로는 다른 재벌집 또래들도 비슷하다는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정하은도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이미지랑 실상이 많이 다르다는 투로 이야기했었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어떻게 해야 이 불편한게 좀 없어질까 아름아."
"저는 답을 못찾았어요."
"응...?"
상담사가 아 그러셨구나 한 이후에 이제 나가보세요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보통 이 타이밍에 나름의 답을 주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요. 근데 저는 혼자서 못이겨냈는걸요. 그래서 방에서 틀어박혀서 책보고 게임하고... 가끔 맛있는거 먹으러 나가면 좀 기분이 괜찮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방구석 히키코모리처럼..."
급 시무룩해지는 아름이.
똘똘하게 얘기를 하다가 우울했던 부분이 떠올라서 그런지 아름이가 약간 작아진것만 같다.
"그래도 언니를 만났으니까요!"
"아...아...?"
"말씀드린대로 혼자서는 극복을 못했지만 캠프에서 언니를 본 이후로 그딴건 다 상관없어졌어요."
"그,그렇구나."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내껄로 만들지. 혹시 너무 저항하면 어떡하지. 내가 언니 마음에 안들면 어떡하지. 또 예전부터 언니가 갖고싶었는데 마음을 꺾은 다음에 물어봤을때 그건 좀 그렇다고 하면 다시..."
그때 생각을 하면 또 기분이 좋은지 아름이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당시의 계획들을 말해줬다.
"나 때문에 남들이 상관없어져서 그거에 별로 스트레스를 안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지?"
"그렇죠. 그러니까 언니도 옆에 제가 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쓸 필요 없다는 거에요."
적당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름이도 아름이대로 뭔가 엇나가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뭐.
"혹시, 내가 아름이 너를 사랑은 하지만 이렇게 여자가 되는건 좀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생각해보면 그 때는 다른 생각은 전혀 못했던 것 같다.
원래의 내가 죽은 것으로 처리되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그날.
경찰서에서도 나보고 장난치지 말라며 오히려 혼났고 나중에는 자살시도를 했지만 다리 아래에 흐르는 강물을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서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아름이에게 사랑해달라고 제발 인간으로 살아숨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으니...
"음... 처음 생각할 때는 언니가, 그러니까 선배가 언니가 되어준다고 해줄 때 까지 다시 진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했는데...?"
"막상 선배랑 하고 나니까 너무 좋아서...♥"
"하하..."
"만약 싫다고 했으면 그것대로 괜찮다고 헀을 거에요. 물건이 너무 아까워서 그건 그것대로 또 따로... 아차차..!"
아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이야기하려다 화들짝 놀라며 말을 얼버무린다.
"방금 마지막에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리 씻으러 가죠."
"어..."
...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1층을 통해 백화점에 들어갔다.
"오... 뭔가 반짝반짝한 느낌이다..."
예림이도 가오픈때 처음 왔었던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저게 일반적인 대학생의 반응이지. 아름이가 너무 이런거에 무뎌서 반응이 밋밋했던거라고.'
"우리 오늘 사려고 봐둔 건 있어?"
아름이가 예림이한테 먼저 말을 건넨다.
"어... 사실 명품관은 그냥 구경하는 느낌이고 밑에 식품관이랑 나중에 밥 먹으려고. 아, 오픈하는 시기니까 속옷 사갈까? 너무 올드한가 히힛..."
들떠보이는 예림이는 놀리공원에 들어온 어린이마냥 들떠보였다.
(아름아, 오픈하는 날에 속옷 사간다는 건 무슨 얘기야?)
(백화점 오픈일에 빨간 속옷을 사가면 행운이 온다는 그런게 있어요.)
(호오...)
"명품관부터 구경하자! 여기 브랜드들 대박 많이 들어왔다던데..."
"어. 그래."
...
예림이도 엄청 말라보이는데 어떻게 체력이 저렇게 좋은지.
쉬지도 않고 옷을 구경하러 다닌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부터 시작해서 평소에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던 브랜드들이 정말 한가득이었다.
여자들은 다 저런 명품 브랜드들에 빠삭한건가?
어떻게 브랜드들마다 이번에 새로나온게 뭐가 있는지 알고 찾는 건지.
"정연쓰, 피곤해?"
20번째를 훌쩍 넘긴 매장을 구경하고 온 예림이가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내 옆에 앉는다.
"어, 다봤어? 아니면 다음 층으로 갈까?"
1층에서 시작해서 여성의류, 아우터, 악세사리를 오가며 벌써 4층까지 왔다.
"아냐, 볼 거 다봤어. 이거 팔찌도 하나 샀다? 어때 잘 어울려?"
너무 반짝이지 않는 금속재의 팔찌. 엄청 비싸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로 보이지도 않는, 딱 적당하게 예쁜 것 같다.
"오 잘어울린다. 예쁜데?"
"그치! 이제 속옷 사고 밥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응."
예림이랑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느새 아름이도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아름아 왔어?"
"네. 잠깐 실장님이랑 통화할 일이 있어서 다녀왔어요. 예림이는 뭐래요? 팔찌 같이 골라주고 잠시 전화하러 갔다온거라."
"볼 거 다 봤대. 속옷사고 가자던데?"
"그럼 같이 5층 갔다가 위에 올라가서 밥먹으면 되겠네요."
"응 그러자."
"예림아 가자."
"응!"
"한 층이니까 에스컬레이터로 가죠. 이 옆인데."
...
"와..."
5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우리 눈에 보인 건 새빨갛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공간.
이벤트 관을 전부 빨간색 속옷들이 채우고 있으니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원래 이렇게 많이 갖다놓고 파는거야...?"
"아무래도 오픈 시즌에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또 여기 S 백화점이 생겨서 대전 뿐만 아니라 충북, 충남 주변에서도 많이들 오니까요..."
"근데 진짜 많긴 많다. 나도 이런건 처음봐."
새빨갛게 비쳐보이는 빛에 눈이 부담스러워 살짝 찌푸리며 아름, 예림이랑 같이 이벤트관 중간에서 맞는 사이즈를 찾는다.
"내 사이즈가 어떻게 되더라...?"
"언니 자기 사이즈도 몰라요?"
"아니... 맨날 너가 사주는 옷만 입으니까..."
저번에 한번 속옷 택 뒤를 확인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렇네요. 언니 75, 아 아니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설픈 연기를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아름이.
"바,방금 말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왜 모르겠다고 하는거야?"
"쉿...♥ 예림이는 저쪽에서 보고 있으니까 옆 매장 피팅룸에서 확인해봐요...♥"
내 손을 잡아끄는 아름이한테서 저항하려 했지만 너무나 당당하게 나를 슬쩍 처다본 뒤 다시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걷는 아름이를 보니 반항하려던 마음이 다시 쑥 들어간다.
여러종류의 속옷과 슬립, 기타 여성의류를 취급하는 매장에 아름이가 나를 밀어넣는다.
"여기요~"
"네, 어서오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이 앞에 이벤트관에 있는 상품이랑 여기 매장이랑 같이 입어봐도 되나요?"
"네 물론이죠. 여기 두칸 까지는 저희 상품이라서 같이 시착해보시고 결제 진행도 여기서도 도와드리고 있어요."
"잘됐다 언니. 입어보면 되겠는데?"
옆 쪽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도 같이 집어든 아름이는 매장에 들어올 때처럼 나를 피팅룸으로 밀어넣는다.
"그, 아, 이게..."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혼자 하겠다고 해야하는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아름이의 눈을 보니 말로 엮어내려던 숨이 금방 흩어진다.
결국 둘이서 피팅 룸에 들어와 문을 닫는다.
다행이라면 꽤 고급 브랜드라서 그런건지 커튼만 닫는 것이 아니라 문 형태로 되어있었고, 옷을 갈아입는 공간도 여유롭다는 부분.
그걸 감안해도 둘이서 들어온건 왠지 모르게 부끄럽지만.
"벗어요 언니."
"으응...?"
"옷 갈아입어야죠. 아니면 다른 기대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름이니까.
항상 나를 살짝살짝 괴롭히는걸 즐기던 아름이라서 당연히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는데...
"아,아니 그러면 옷만 갈아입을건데 왜 같이 들어온거야..! 당황했잖아..."
"그런 생각을 한 건 맞네요. 변태...♥"
억울하다.
심히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