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다시 대전으로 (2)
* * *
오랜만에 영어를 봤더니 어지럽다.
Draw the Lewis diagrams of CH4, XeF4, and SCl4, and state their molecular geometries. (6 pts)
(오도로 : 각 분자들의 분자 구조식을 그리고 분자 모양을 설명하는 문제입니다)
원래 전공은 전부 영어로 진행하긴 했지만...
과학고에서 내용을 다 한글로 배우고 대학을 오니 특히 기초 과목의 영어 용어 표현들이 약했다.
하지만 약간 당황했어도 이걸 못풀 정도는 아니니까..!
루이스 다이아그램, 아마 루이스 구조인 거 같은데
어...
CH4 면 사면체로... 음...
근데 이거 결합 안된 전자도 그리던가...?
밑에 Xe F4면... 제논이랑, 철이 네개.
제논이 결합을 하나?
철은 결합이 몇개짜리지...?
일단 대충하고 다음 문제로 가자.
Calculate the average distance (Å) of an electron from the nucleus in the
a) 1s orbital in a H atom
b) 2s orbital in a He+ atom
c) 2p orbital in a Be3+ atom
(오도로 : 핵에서 전자까지의 평균 거리를 구하는 문제입니다)
어 이건 기억이 난다.
그, 무슨 공식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모른다는 걸 정확히 알 것 같다.
아아... 대충은 다 한번씩 봤던 내용들인데 최근에 이걸 공부한 적이 없으니 정확하게 필요한 공식을 모르겠다.
이게 그냥 시험이면 패배를 받아들이고 낮은 점수와 그에 연결된 썩 좋지못한 학점으로 책임을 지면 되겠지만, 얘는 성적이 안좋으면 기초과목을 들어야...
'아닌가? 성적이 좋으면 면제를 시켜주는거니까 오히려 원래 수강을 하는게 더 정상적인 걸지도?'
스스로를 K 공대 2회차라고 생각하면 이수 평가 테스트 때문에 1학년 과목을 다시 들어야 되는게 조금 부끄럽지만
평범한, 아니 대다수의 학생들이 어차피 들어야 하는 과목이다.
아름이도 아마... 아마...
아 씨발.
'아름이가 이정도 문제를 못풀 것 같지는 않은데...'
중학생때 이미 일반물리학 일반화학을 혼자서 공부했니 마니 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아름이가 졸업한 서울과학고에서 1학년때 K 공대 캠프를 왔다는 것이 이미 그 학교에서 학년 상위 20명 이내였다는 이야기다.
나도 부산에 있는 과학고를 나오긴 했지만, 아름이는 영재학교 출신이니까 미리 학점 인정을 받고 왔을 수도 있고.
그럼 내가 오늘 시험에서 패스를 못하면 높은 확률로 나 혼자 다른 새내기들이랑 일반화학을...
[어머, 언니는 기초과목 들으셔야 되는군요...? 당연히 통과하실 줄 알았는데 제 기대가 너무 컸나보네요. 역시 머리도 아래도 허접이신가요...? 후훗...]
망상이 깊어지다보니까 상상 속 아름이가 나를 매도하는 것만 같다.
"한시간 남았습니다. 답안지 작성 완료하신 학생 분은 손 들고 계시면 조교가 가서 확인하고 제출하시면 됩니다."
한시간.
벌써라고 말하기엔 내가 딴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제의 유형이랑 흐름은 모두 훑어봤다.
최대한 아는 대로 답을 쓰면 통과할 정도는...!
그래. 게다가 다른 애들은 솔직히 면접 이후로 내내 놀았겠지만, 나는 한달 반 전까지는 그래도 현역 공대생이었으니까!
아자...!
...
...
...
"죽여줘..."
"어머, 언니 많이 힘드셨나요? 그새 수척해진 것 같으셔요."
"진짜 존나..."
잠깐.
아직 결과도 안나왔는데 개좆같이 못봤습니다.
나름 기초과목이라서 만만하게 들어갔는데 제대로 답도 못쓰고 어버버하다 나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내가 먼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안그래도 모자란 모습을 요즘 많이 보였는데 약점이 늘면 힘들어지니까.
"존나 쉬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라서 하하... 뭐 적당히 봤지."
"아하... 언니 말씀처럼 엄청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평이하던데요?"
"아, 응. 뭐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
이 정도면 꽤 자연스러웠다. 나이스.
"흐음... 언니는 그래도 통과될 정도는 되실거에요. 원래 건설환경공학 하셨다 하셨으니까 네."
"아아... 그,그게 사실 전공 안에서도 엄밀히 따지면 나는 구조공학..."
"환경화학도 하시고 상하수도 공학도 하셨으니까! 제가 놀려서 그렇지 언니는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구요."
내 마음도 모르고 아름이는 자기가 평소에 너무 매도한 것 때문에 내가 강제 겸손모드를 주입당한 줄 아는 것 같다.
자신을 그렇게 낮춰서 생각하지 말라며 눈을 보고 응원도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름이.
아름이가 쓰담쓰담해주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정연, 아름! 이 뒤에 일정 있어?"
기숙사로 가던 중 뒤에서 우리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건넨다.
"어, 예림이구나. 안녕?"
"너희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 멀리서부터 보고 불렀는데 답을 안하더라."
"언니가 시험 못봤을까봐 걱정하길래 괜찮다고 하고 있었어."
'아름이가 예림이한테는 말을 놓는구나. 아니 오히려 동기인데 존대를 하면 그게 이상한건가? 그래도 왠지 어색해...'
"에이, 못치면 또 어때 그냥 들으면 되는건데 안그래?"
"글치 하하..."
"그래서 이 뒤에 뭐 있어?"
"없지...?"
끝을 살짝 올려 의문문으로 만들고 아름이 눈치를 본다.
엄청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지만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괜찮다는 의미인가보다.
"이 옆에 S 백화점 새로 생겼다는데 구경가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아... S 백화점...?"
"응. 어제 오픈했다더라. 우리 이제 학기 시작하면 저녁먹으러는 그렇게 자주 못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럴까?"
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오히려 아름이가 먼저 그러자고 해서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
정식 오픈일은 어제였구나, 저번에 갔을 때도 매장이랑 직원들이 다 들어와있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비어있는 느낌이 조금은 있었으니까.
S 백화점... 쇼핑할 때 까지는 조금 어색하긴 해도 괜찮았었는데 정하은 때문에 아주 큰일날 뻔한 기억이 있다.
그건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찔리는 부분도 있고.
"그럼 차아아아가 없으니까 택시타고 가야겠네..!"
당연하게 실장님이나 아름이 차를 타려다가 둘 다 보통 비싼 차가 아니라 예림이한테 너무 부담스럽거나 금수저 이미지로 보일까봐 다들 하듯 택시로 가기로 한다.
이미 새터 떄 입었던 조합들 때문에 에타에서 전설처럼 돌고 있던 나라서 조금 조심스러운 감이 있으니.
'아까도 시험치러 들어가고 나올 때 자꾸 주변에서 힐끔힐끔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관심이란 좋은 것이다.
원래의 지난 20년 이상을 모쏠아다아싸로 살아온 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간혹 사람 자체를 만나기 싫어한다는 사람들, 혼자가 편하고 좋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높은 확률로 인싸가 기만을 하는 멘트이거나 본인이 아싸인 걸 티내기 싫어서 자발적으로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척을 하는 쿨찐일 것이다.
누가 매일 혼자 밥먹고 매일 혼자 놀고 혼자 공부하는 그런 캠퍼스 라이프를 원하겠는가.
그런데 나의 경우는 쪼금, 아니 사실은 많이 투머치인 것 같다.
10 정도만 받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10만정도의 관심을 받는 느낌?
게다가 나는 그렇게 영앤리치 금수저도 아닌데 괜한 오해가 생기는 것도 곤란하다.
물론 에타에서 오해하고 있는 그런 정보들이 아름이한테는 상당수 들어맞는 얘기들이었다.
뭐 소문에 서울에 빌딩을 갖고 있니,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재벌가 딸이니, 학교 주차장에 교수들 차는 아닌 것 같은 하이엔드 세단이 요즘 부쩍 많이 보이는데 그게 내 차가 아니냐는 그런 글들이 에타 익명 게시판에 심심하면 한번씩 올라오고 있었다.
나한테는 다 해당되지 않지만, 아름이 얘기로 생각하면 다 맞는 말이니까 응.
"정연아, 정연...?"
"어, 응."
"방금 들은거야?"
"아.. 응. 어."
"뭐라고 했는데 내가?"
"음... 그... 어..."
"멍때렸구나?"
"미안..."
기숙사로 걸으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예림이가 뭔가를 말했었나보다.
"씻고 준비해서 40분 뒤에 1층에서 보자고."
"아 오케이. 알았어."
...
방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씻을 준비를 한다.
"언니, 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셔요?"
"아냐,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자꾸 한번씩 멍해지네."
"치, 그게 아닌 거 다 아는데. 거짓말이나 하시고."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답하는 아름이.
"그게, 괜히 주변에서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봐 좀 신경이 쓰여서."
"그렇게 라고 하시면...?"
"음, 그러게 표현이 애매한데 금수저? 부자? 그런 오해가 요즘 좀 있잖아?"
"그쵸. 비게에도 심심하면 한번씩 올라오고요."
"근데 나는 이런게 익숙치도 않고, 또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기도 하고. 근데 그걸 또 아닙니다 하고 어디에 써서 올릴수도 없고 해서 신경이 자꾸 쓰이네."
"흐음..."
아름이도 상당히 고민이 되는 문제인가보다.
하긴 어릴 때 아름이도 이런 문제로 많이 속상했다고 했으니까.
내 고민을 털어놔서 아름이까지 신경쓰이는게 옮아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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