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다시 대전으로 (1)
* * *
다음날 아침.
"언니 일어나셔요."
슬쩍 눈을 뜨니 어제 아름이랑 있었던 그 침실이 아닌 것 같다.
마지막에 잠들었던 방은 사방이 막혀있고 창문 대신 내 부끄러운 사진들이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반투명한 커튼에 막혔음에도 눈이 부시게 만들었다.
"으으응... 좀만 더... 아직 피곤한데..."
"오늘 기초과목 테스트 있어서 슬슬 일어나야 시간 맞아요."
"어?? 그거 오늘이야...?"
"네 알고 계셨던거 아니셔요? 어제 그거때매 예림이도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했었잖아요."
"그런가아..."
솔직히 어제 일이 그렇게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는다.
서울로 올라와서 아름이랑 저녁을 먹었다.
근데 마지막 디저트 안에 아름이가 제대로 고백하려고 넣어둔 반지가 있는 것도 모른 채 삼킬 뻔 해서 다 망쳐버렸지 음 음.
그 다음에는 가을 언니 생일 파티 때문에 라운지로 갔다가 TBS 멤버들이랑 크흠...
그 담에 어쩌다 가을 언니 방에서 그러고 있었더라...?
아무튼 약간 마음이 해이해져서 어제 그런 꼴을 본 것 같으니 앞으로는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가을 언니가 애기야 애기야 하다보니 편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될 줄은...
"그래도 일어나기 너무 힘든걸, 아름이가 안아주면 힘이 좀 날 것 같은데에~"
정말 피곤한 것도 있고 괜히 아름이랑 스킨쉽을 하고 싶어서 두 팔을 아름이 쪽으로 뻗는다.
"몰라요... 빨리 나가야 되니까 준비하셔요."
'흐음...'
뭔가 이상하다.
평소 아침에 나를 대하던 아름이가 아니야.
왠지 나를 피하는 듯한, 뭔가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 이 느낌.
정체를 바로 알 수는 없지만 묘한 위화감이 내 신경을 건드린다.
"오늘 무슨 일 있어?"
"그,그런거 없어요. 그냥 바쁘니까. 네 바쁘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아름이 말을 듣고 베개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켰지만 아직 시간은 9시.
정확한 시간은 기억하지 못해도 보통 새내기 전체가 쳐야하는 기초 필수 과목의 시험이니 오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 바쁜게 이유가 아닌거잖아.
게다가 아름이가 보통 나를 깨울때는 내가 더 자고 싶다고 침대에서 꼼지락 거리는 시간과 안아달라고 칭얼거리는 시간, 또 그러다가 눈이 맞아서 전날 했던 일의 2회차를 하는 경우까지 모두 고려해서 깨웠다.
그래서 일찍 깨웠으니 나도 그만큼 시간을 녹이려고 더 아름이랑 스킨쉽을 하는 것도 있었고.
'어제 일 때문에 그런가?'
아름이는 평소에 늘 해요도 아니고 하셔요체에 가까운 존대를 하던 아이다.
그런 아름이도 술이 많이 들어간 날은 평소에 많이 참고 눌러왔던 것의 반동인지 사람이 거침이 없어지고 반말로 툭툭 뱉듯이 말하게 된다.
저번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줬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아름이 스스로가 엄청 부끄러워 하는 것 같다.
'전날 주사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아름이 너무 귀엽잖아...!!!'
철두철미한 성격이지만 나랑 관련된 일에서 가끔 저렇게 허술한 빈틈을 보이는 것까지 완벽하다.
"아이구 우리 아름이 왜이렇게 귀엽게 굴까...♥"
내게 등을 돌린 채 침대 끝에 앉아있는 아름이.
특별히 해야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애꿎은 태블릿만 만지작거리는 아름이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팔을 둘러감는다.
"잡았다!"
"뭐하시는거에요 언니!"
"오늘은 어제처럼 반말 안해?"
"네? 제,제가 언제 그랬어요? 어제 그랬어요?"
태연하게 모른 척으로 넘어가려나보다.
어림도 없지 평소에 괴롭힌 만큼 잔뜩 뽕을 뽑겠어.
"언니는 계곡주 마실거니까 잔 없어도 돼 했던 기억 안나?"
"...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다 못 받아마시니까 저어기 책장 뒤로 데려가서 '우리의 알콩달콩 침실' 이라고 말했던 건?"
"언니이...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시면 반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어제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잘... 헤헤..."
내가 자기 웃음에 약한 걸 알아서 대놓고 날 바라보며 싱긋 웃는 아름이.
'이 여우같은 아름이를 봤나.'
"아까 말하는걸 보니 예림이랑 통화했던 내용은 다 기억하던데 선택적 기억상실이야 아름아?"
"...!"
본인도 아차 싶었는지 잠깐 움찔 한 것이 품 속에서 느껴졌다.
"하하..."
"아름아 왜 떨어. 무서워? 죽는게 무서운거야? 크크큭.."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이 톤을 흉내내며 아름이를 놀려준다.
"으..."
"아, 아름이가... 다른 사람 품 안에서... 나한테 짓던 그런 표정 한다고 생각하면... 끄흑~ 푸흐흐..."
"그만하셔요."
"또 또 뭐있지? 글쎄... 내꺼가 알아서 망가지거나 남한테 넘어갈 걱정을 푸흐.... 하,하기 전에 자기 손으로 부숴 푸하하...!"
"그만."
"..."
혼자 들떠서 나한테 안긴 채로 고개 숙이고 있는 아름이를 잔뜩 놀리고 있던 나는 싸늘한 아름이의 목소리에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고 아가리를 여물기로 했다.
"..."
"다 하셨나요 언니?"
"..."
"대답이요."
"아, 아닙니다."
"다 못 놀리셨다는 건가요?"
"아 그,그게 아니고, 예 그 다했습니다 네."
"제가 한 게 있어서 여기서 넘어가드리는 거에요. 다음부터는 그냥 안넘어갈 줄 아셔요."
"우쒸... 그래도... 그래도... 아름이가 어제 잘못했잖아..."
"어어? 아직 정신 못차리셨네요 우리 언니. 허접 보지 주제에."
"뭐?"
"제가 틀린 말 했나요? 다시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허.접.보.지.♥"
분하다.
아름이 자기가 좋을대로 괴롭혀서 이런 몸으로 만들어놓고 놀리는 것도 분하고 어제는 자기 잘못이 더 컸으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걸로 마무리하는 것도 분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속에서 뭐가 올라오는 것 같은 이 기분은, 아름이 말에 마땅히 반박할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아름이 너는 맨날 내가 만지기 전에 이제 그만 잠들자고 하잖아! 너도 내가 제대로 일케 일케 만지면 꼼짝도 못할걸...?"
"푸흐, 그래요 우리 언니?"
분명 내가 우위에 있는 대화였는데 결국 아름이가 그렇냐면서 내 볼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끝난다.
"두고봐...! 다음에는 아름이가 정신도 못차릴만한 테크닉을 흐읍..!"
츄르릅 츄릅
앙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름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내밀어 내 입을 틀어막는다.
질척질척거리는 끈적하고도 축축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늘 제멋대로 이렇게...!'
평소에도 아름이는 자기가 꼴리면 내게 키스하자는 말도 없이 몸이 먼저 나서는 편이었다.
지금도 나는 한참 무섭지는 않은 공갈을 치고 있었는데 입술을 포개더니 입 깊은 곳까지 혀가,
혀가... 혀가아...
'어라...? 더 안들어오네?'
보통이었으면 이미 혀 위아래부터 시작해서 치열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아름이의 맛과 숨결로 내 입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치 혀가 두세개는 되는 것처럼 움직이는 아름이의 스킬에 나는 약간은 뻣뻣하게 있으면 금방 마사지해서 풀어주는 것처럼 기분좋게 되는데 오늘은 딱 입 조금 안까지만 들어오네.
츄릅.
"후우. 이제 가요."
"응...? 이게 끝이야?"
"왜요 언니. 더 바라는 거라도 있으신지...♥"
"아,아냐. 바라기는 무슨. 앞으로는 말하는 중에 끊지말라고 얘기하려 헀어."
"아하... 아쉽네요. 언니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오늘은 조금 부드럽게 했는데. 혹시 언니께서 원하시면 좀 더 사랑해드려도 괜찮고요."
"어어..."
"괜찮으신거죠? 나갈 준비 하시면..."
"해줘."
"잘 못들었는데요?"
"아잇! 자꾸 그러지 말구... 빨리...♥"
"푸흐... 밝히시기는..."
이후 메차쿠차 범해졌다.
아, 싸인 받아야 되는데.
...
...
"아씨... 갑자기 떨리네."
"언니 화이팅!"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테스트를 위해 창의학습관으로 갔다.
새터 이후로 적당히 놀던 아이들은 필수로 응시해야 되는 것이 귀찮은지 표정에서 짜증이 잔뜩 드러나 있었고 몇몇 학생들은 이번학기 고득점자의 경우 직접 수강하지 않더라도 학점 인정을 해준다는 메리트 때문인지 제법 공부해온 것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일반 화학I... 그래도 나름 환경공학이랑 상하수도공학도 들었던 몸인데 1학년 기초 과목 정도는...!"
사실 못치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이번학기 강의를 들으면 되는 거라 디메리트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떨려왔기 때문에 작은 혼잣말로 억지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자 학생분들 계산기 제외한 전자기기는 전부 가방에 넣어서 앞으로 내주세요."
"후우..."
묘하게 자신감이 차오른다.
'내가 그래도 건설환경공학과 4학년인데 일반화학 쯤!'
'아자 아자 한정연!'
어수선하던 교실이 금방 조용해진다.
답안지부터 나눠받은 뒤 학번 이름을 쓰고...
'아, 이거 옛날 학번인데 이런 실수를.'
아무튼 1번 문제를 본다.
(a) Draw the Lewis diagrams of CH4, XeF4, and SCl4, and state their molecular geometries. (6 pts)
"어...?"
이게 뭐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