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새빨간 아름이 (1)
* * *
...
정신을 가다듬고 옷을 챙겨 입은 나는 가을 언니가 말해준대로 5층 객실로 향했다.
어릴 때 자기 전용 방으로 받은 끝방에 지금도 틀어박혀서 울고 있을 아름이라...
전체적으로 나보다 정신연령이 배는 되는 것 같은 아름이지만 가끔은 어린 소녀같은 면이 있다.
뭐 혼자 운다는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인간적인 면이 있구나 싶어서 더 섬세하게 달래줘야 할 것 같달까...
첫마디를 어떻게 전할까.
사랑해?
미안해?
괜찮아?
어떤 말도 완벽히 마음에 쏙 들지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까의 잘못에 집중한 채 문제 해결을 하려는 사과 같아서 아름이의 감정을 풀어내기에는 부족한 것 같고.
사랑한다는 말은 내게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있을 아름이에게는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말이다.
마지막이 괜찮아 인데... 마찬가지로 나때문에 울고있는 아름이한테 괜찮냐니...
입안으로 여러번 말을 곱씹으며 걷다보니 벌써 복도가 끝나고 계단이 나온다.
마음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은 감정이 전혀 없진 않지만 가을 언니가 건네준 마스터키를 꼭 쥐고 문앞에서 천천히 숨을 쉰다.
"후우... 하아..."
역시 미안해가 좋겠지.
내 잘못이 분명하니까.
가을 언니 탓만 하고 싶지만, 또 그 향초 대문에 몽롱해져서라고 하고 싶지만 으으...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서 또 몽글몽글한 감정이 올라오려 하지만 미안하다고 시작하기로 정한다.
이제 이 문만 열면...
띵. 띠리릭!
...
...
그렇게 열심히 아름이에게 전할 말을 골랐던 것이 부질없게도 내가 처음 뱉은 말은 놀라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허억..!' 이었다.
저번에 부산에서 이용했던 객실보다도 두배는 큰 것 같은 접견실에는 딱 봐도 비싸보이는 양주와 와인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야 뭐... 내가 그렇게 놀랄 요소는 아니지.
내가 놀란 건 그 안쪽 방 욕조에 있던 아름이를 보고 나서였다.
물소리가 들리길래 취한 채로 샤워라도 하나 싶었던 아름이는 욕조에 앉은채로 천천히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름아...!"
"으응...? 앗, 정연이 언니다... 헤헤... 언니도 나 보고싶었구나...♥"
술에 취한 탓인지 따뜻한 욕조에 오래있어 피곤한건지 늘어지는 말투의 아름이와는 달리 꽤 많은 출혈량을 본 나는 그렇게 담담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소,손목이... 왜, 어쩌다.. 119 부를까.. 아니, 응급처치를 해야... 어어..."
"푸흐, 당황하는 언니 귀엽다...♥"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아름이 주사는 반말...? 아니 완전 직구가 된다는게 더 정확한가?
그것보다 나는 놀라서 미치고 팔짝뛰고 있는데 아름이는 너무 느긋하게 물을 끄고 욕조 마개를 뽑는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는데 이제보니 세면대 옆에는 붉은 혈흔이 묻어있는 잭나이프가 있었다.
검은 케이스 안의 흰색으로 빛나는 칼날에 묻은 피.
마치 늘 블랙 슈트를 즐겨입는 아름이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잭나이프가 있는 걸 보면 자기가 손목을 그은 것 같은데 왜 저런 일을...
"언니는 침대에 가있어. 나도 금방 나갈게."
"어.. 그... 으응..."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따른다.
...
아름이는 금방 물기를 닦은 후 새하얀 가운을 입고 나왔다.
원래 피부가 새하얘서 그런가 술에 취한 아름이는 핑크톤으로 얼굴빛이 올라오는게 더욱 도드라졌다.
웃고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찡그린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아름이는 내 옆에 다가와 앉는다.
"그.. 왜 자살하려고 한거야... 나때문이야...? 미안.. 아름아 정말 미안..."
또 눈치없이 올라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내려보내고 해야만 하는 말을 겨우 전한다.
"응...? 아 이거 자살하려고 한 거 아니야. 자해지 자해."
아름이는 여전히 흐르고 있어 이불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재밌다는듯 보여주었다.
"언니한테는, 아니지 김실장 아저씨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한건데... 나 이거 꽤 자주한다...?"
본인 취미를 가르쳐주듯 베시시 웃으며 자해를 해왔다고 말하는 아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틀에 박힌 그런건 나쁜거야 하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상한걸...
"왜...왜 그러는거야..."
"심심해서... 따분해서...? 음... 답답해서가 제일 맞겠다."
"그, 그렇다고 자기 몸을..."
아름이는 여전히 웃으며 내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간다.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듯 탱글대는 아름이의 가슴.
"느껴져 언니?"
"뭐가...?"
"내 심장이 뛰는 거 말이야."
무슨 이유로 저런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아름이의 말을 듣고 손에 감각을 집중하니 일정한 주기의 박동이 아름이의 가슴 속에서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탱글한 곡선과 가운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놓고 있는 아름이의 핑크빛 유두만 해도 이미 나를 흥분시키기 충분한데...
나를 보고 웃고있는 야한 아름이의 눈을 마주보니 벌써부터 아래가 젖어오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야하게 웃어주면... 아,아냐, 내가 이상한건가..? 서,설마...'
"으응..."
딴생각을 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아까 질문에 답한다.
"나는 그렇게 잘 안느껴진단 말이지..."
아름이는 살짝 어지러운지 벽면을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서랍에서 붕대를 꺼내 손목에 감는다.
지혈을 위한 압박도 왼팔을 고정한 채 혼자 잘 조여서 감는 것을 보면 정말 한두번 해본 것이 아닌 듯 한데...
"살아있다는 건 뭘까. 언니한테 말해줬듯이 나는 여기가 좀 고장난 것 같아. 아주 옛날부터..."
아름이는 검지로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분명히 살아있는데, 세상은 다채로운 색깔의 조합일텐데, 나는 뜨거운 뭔가를 못느끼니까..."
"어어...!"
아름이가 아까 세면대 옆에 있던 잭나이프를 꺼내 손목에 긋는 시늉을 한다. 다행히 붕대 위를 가볍게 문지르는 수준이었지만, 방금의 출혈량을 본 내게는 너무 섬뜩하게 느껴지는 장난일 뿐...
"그럴때 슥 하고 긋는거야. 그러면 손목이 시큰해지면서 점점 나른해지는거지."
"..."
사는게 재미가 없어서 손목을 긋는다는 그녀에게 가식적인 위로조차 시도해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분명 무의미할 테니까.
"손목을 그은채로 두면 피가 흐르면서 손목이 시큰하던게 팔꿈치, 어깨를 타고 올라가 좌반신이 저릿저릿하고 의식은 흐릿해져가. 그런데 웃긴건 흐릿한 의식 속에서 또렷하게 뭔가가 자꾸 반짝이는 거지. 심장 박동에 맞춰서 꿀렁이는 피가 말이야."
아름이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고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때 느껴져. 아... 난 살아있구나. 나무토막이 아니라, 인형이 아니라, 뜨겁고 붉은게 흐르는 생명이구나 하는게...♥ 언니가 내게 색을 줬다고 하는건 반만 맞는 말이야."
"응...?"
"얘도 칠해주긴 하거든. 손목을 긋고 새빨갛게 끈적이는 피로 내가 보는 세상이 잠시지만 물들면, 돈 명예 권력 때문에 아둥바둥 사는 나약한 사람들이 그렇게 우스워보일 수가 없어 크크..."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재벌 4세가 오히려 평범을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는 저번에 들었지만 저렇게 뒤틀린 이야기가 남아있을 줄은...
"언니를, 선배였던 언니를 만나고 다시는 이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흉터도 전부 지웠는데..."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자기 얘기를 풀어주던 아름이의 분위기가 바뀐다.
"왜 나를 배신했어? 왜 내가 시킨대로 못했어? 왜... 언니가 왜...!"
딱딱하게 차분하던 아름이의 목소리는 고작 한두문장만에 날카로운 분노로 바뀐다.
"평생 곁에 있어준다며.. 잔뜩 사랑해준다며... 그럼 나만의 언니여야지. 정하은 그 씨발년도, 다른 숫캐새끼들도, 가을 언니도 아닌 나... 한아름의 언니여야 되는거 아니야?"
"아름아.. 나,나는..."
"닥쳐."
아름이는 경멸이 담긴 한마디로 내 말을 끊고는 내게 다가온다.
분명 나보다 작고 여린 아름이일텐데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금씩 몸을 뒤로 물리고 있는 나였다.
"으읍..."
턱이나 볼을 부드럽게 잡은 채 하는 키스가 아닌 나를 벌주려는 것 같은 키스. 아름이의 손은 내 볼도 어깨도 아닌 목을 가볍게 조르고 있었다.
아름이가 나를 강하게 원할 때의 키스는 거칠긴 했어도 내 혀와 입안을 맛보고 싶어하는 탐식과도 같았다.
지금의 아름이의 혀는 그것과는 다른... 마치 뭔가를 찾고 싶어하는 딱딱한 혀놀림이다.
예민한 혀가 받는 물리적 자극 때문에 기분좋아지려는 입구 까지는 가지만 결국 무거운 마음에 가라앉는다.
아름이의 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어질 즈음 아름이는 내 목을 조금 더 강하게 쥐며 나를 밀어냈다.
"크흑.."
순간적으로 조이는 기도 탓에 급하게 숨을 뱉어내는 나를 아름이는 여전히 싸늘하게 보고 있었다.
"다른 맛은 안나네... 그래도 천박하게 입술을 내어주지는 않았나봐?"
"내가 발정난 암캐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할 리..."
짝!
내 말이 신경을 긁었는지 아름이는 내 문장을 다 듣지도 않고 내 뺨을 때린다.
"어...?"
사건이 일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 사고.
'지금 아름이한테 뺨맞은건가...?'
서운하면 육체적으로 괴롭히긴 했어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었는데...
"뺨에 키스마크나 지우고 말해. 이게 봐주니까 기어오르고 있네."
"..."
아까 심심풀이라며 뺨을 빨아내던 가을 언니가 너무 밉다.
"흐으읏..."
"우리 언니 잘 느끼는거 봐. 너무 사랑스럽다...♥"
"으읏...!"
아름이는 내 바지를 내린 뒤 예고도 없이 바로 검지와 중지를 입을 꾹 닫고 있던 보지 속으로 밀어넣었다.
"잔뜩 젖었네...♥"
움찔하며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아름이의 어깨를 잡은 나는 아름이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 질 때 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아름이의 목 뒤에 깍지를 낀 채로 겨우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
찔꺽 찔꺽 찔꺽찔꺽 찔꺽 찔꺽찔꺽
"아... 아르마... 나.. 가아..! 헤읏... 갈 것같아...!"
아까 충분히 예민해져 있었지만 가벼운 절정만 겪어서 그런지 입만 닫고 있었지 안쪽은 이미 침을 흘리며 준비되어 있던 내 보지는 금방 절정의 문을 두드렸다.
"으흣.. 가, 갑자기 그러면.. 히끅..!"
골반을 위아래로 한껏 튕기며 천박하게 절정에 도달한 걸 티낸 나는 아름이가 그래도 만족했겠지 싶어 어리광을 부리며 안기려 했다.
찔꺽 찔꺽찔꺽 찔꺽 찔꺽찔꺽 찔꺽 찔꺽
"아..! 아흣..! 아,아름아... 나.. 갓,갔는데..! 끄흑..!"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로 절정에 도달하며 허리 아래 근육이 전부 늘어졌건만, 아름이의 손가락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