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캣파이트...?
* * *
아름이가 입었던 옷이랑 침대 위의 아름이를 딸감으로 자위를 하던 중 들켰던게 엊그제인데.
왜 아름이는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오는지...
아무튼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모습에 대해 아름이한테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흐으읏...! 아, 아르마... 와써...? 흐아앙...!"
이미 몸은 잔뜩 예민해져서 뒤에서 가을 언니가 쿡쿡 찌를 때마다 문장이 끊기며 앙탈같은 신음이 나왔다.
"어라...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요...?"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찾는지 두리번 거리던 아름이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는다.
평소에는 왠만큼 화가 나도 입은 웃으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조소를 티내곤 했는데...
지금 표정을 보니 일이 보통 잘못 흘러가고 있는게 아닌...
"어머, 아름이 빨리 왔네."
"가을 언니, 언니가 설명해주시겠어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안돼서 말이에요."
사뭇 진지한 표정의 아름이와는 달리, 나를 뒤에서 안고 있던 가을 언니는 여유롭게 일어나 벽에 걸려있던 가운을 걸친다.
"음... 보는 대로인걸? 우리 막내 애인인 정연이가 피곤해해서 같이 누워있었지."
"장난치지 마셔요. 다른 언니들은 몰라도 가을 언니는 항상 믿었는데... 어떻게 저한테..."
최대한 차분한 톤을 유지하던 아름이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지 점점 목소리가 떨리고 그와 함께 작은 그녀의 손도 힘이 들어간 채 떨고 있었다.
놀랄 만도 하지. 애인이 자기 사촌 언니 품에서 헐벗은 상태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데.
나도 당황스럽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아까까지는 맨정신이었던것 같은데. 중간중간 충동적인 감정을 굳이 컨트롤 하려 하지 않다보니 지금 상황까지 와버렸다.
"아름이는 화내는 것도 너무 귀엽네. 얘, 정연아 아름이 자주 저러니...?"
뒤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다 긴장돼서 목이 바싹바싹 타는데, 가을 언니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오히려 나한테 아름이가 자주 저런 모습을 보이냐고 묻고 있다.
말로 대답을 하기에는 아름이 눈치가 보여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은정 언니께서 적당히 남자 아이돌 불러다가 문란하게 놀자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시면 될거를 왜 정연언니를 건드리시나요."
"건드리다니, 누가 들으면"
"닥치셔요."
'호오...'
가을 언니도 의외였는지 나를 보고 입모양으로 어머 라고 말했다.
"원래 안오려고 했는데 굳이 당일날 오라버니 통해서 꼭 와달라고 하셔놓고는, 고작 이런 짓 하시려고 그러신 거에요?"
떨리던 아름이의 목소리에서 떨림과 불안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는 확신과 분노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저한테 늘 잘해주시던것도 그냥 심심풀이 셨나요? 막내 막내 하면서 그 막내 애인을 재미로 건드릴 만큼 천박하신 분이셨나요? 겉으로는 저 위해주시는 척,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척 하시던 분이 속은 시꺼먼 위선자셨네요. 실망이에요."
상당히 표현이 거셌다.
그만큼 아름이가 지금 토해내는 감정도 검고 끈적이는 듯 했으니.
"할말은 그게 전부니?"
언제 앉았는지도 모르게 가을 언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름이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할 말은 다 한듯 했지만 여전히 씩씩거리는 아름이는 그런 언니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고.
"실망... 실망이라... 참 가슴아픈 말이야..."
아까 내게 보여주던 어설픈 연기 톤이 아닌 정말로 침울애하는 가을 언니.
"근데 그건 이 언니가 아름이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생각하면서 아름이를 바라보니 아름이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정연이가 원래 누군지, 아 사실 그건 상관없지. 정확하게는 이정훈일때 만난 얘를 지금 이렇게 만들기까지 있었던 일 그렇게 혼자 다 처리해도 되는 일이니?"
"... 아... 아니... 그걸 언니가 어떻게..."
한창 쏘아붙인 후 씩씩거리던 아름이의 표정이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도 더 심각하게 굳는다.
오히려 계속 담담하게 말하던 것이 아니라 속 안에 터져나오는 감정을 쏟아낸 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반동으로 충격이 배가 된 듯 했다.
"어떻게는 반말이고 아름아. 게다가 질문은 그게 아니잖아. 혼자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이냐고 말이야."
"어,언니랑은 관계 없는 일이에요. 정연 언니한테 한 일도, 그 과정에서 있었던 자잘한 일들도, 그리고 지금 정연언니랑 저의 관계도 말이에요."
"어떻게 관계가 없니, 너나 나나 다 H 그룹 아래에서 이렇게 잘먹고 잘 살고 있는데. 우리 아름이가 평범한 여자애였어봐.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니?"
"..."
"그런데 그룹에 영향이 갈만한 일을 혼자 그렇게 처리하면서 이 언니 한테는 말 한번 안해주고, 오히려 언니 입장에서 실망스럽지 않겠어? 그리고 정연이한테 너가 한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니? 지금도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 그래도..."
"이게 변명의 여지가 있나? 그렇게 당당하면, 또 그만큼 정연이가 소중하면 오늘부터 너가 가진거 다 내려놓고 둘이 나가서 살아. 제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단다 아름아."
"..."
뭔가를 말하려던 아름이는 딱히 대꾸할 말이 더 떠오르지 않는지 다시 침묵했다.
"고를 기회를 줄게. 정연이랑 사는 대신에 아름이 너가 갖고 있는거, 지금까지 누리던 것 다 포기하고 맨몸으로 나갈 수 있겠어?"
항상 나와 대화할 때는 나를 절벽 바로 앞까지 밀어내던 아름이가 저정도로 궁지에 몰린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저 마지막 질문은 너무 쉬운 것 아닌가?
인생의 이유이며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을 이야기해주던 아름이한테 저정도 질문이야 뭐... 당연히 가능하다 하겠지.
"..."
'어, 어라...?'
아름이가 긴장해서 대답이 조금 늦나보다.
아름이의 진심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금방 나를 고를 것이다.
"......"
"왜, 대답 못하겠어 아름아?"
휙
아름이는 대답을 피한채 다시 자기 등 뒤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아니 왜...
너무 쉬운 질문이었잖아 대체 왜...
상황이 이해가 잘 안되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나만 아름이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고 착각했던 건가?
더 당황스러운건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 나가던 아름이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걸 본 것 같았다.
오히려 울고 싶은 건 난데...
"가버렸네. 아직 아름이한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까."
"어.. 언니..."
"응? 왜 우리 애기."
가을 언니는 너무 태연했다.
아끼는 사촌 동생이 자신에게 화를 내다 오히려 울먹이며 나갔는데도.
"아름이 언니 잖아요. 가족이잖아요. 왜 그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거에요. 아름이가 한 일이 심하긴 했어도 저는 다 괜찮았는데..."
태연하던 가을 언니는 내가 뭐라고 하니 급 당황한 모습이었다.
"언니도 거물이잖아요. 아름이가 벌린 일이 크긴 했어도 덮어주실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서로 부족한 부분, 실수한 부분을 덮어주는게 가족 아니에요? 왜 아름이를 싫어하시는 거에요."
"애,애기야...? 일단 진정해볼래?"
씩.. 씩...
말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아름이를 대변하는 것처럼 되어 나도 감정이 올라왔다.
언니는 꽤 많이 당황스러우셨는지 침대 옆 테이블에 있던 컵에 물을 따라주시다가 바닥에 조금 흘렸다.
...
"진정됐니?"
"...네... 따지듯이 말씀드린건 죄송해요. 그치만..."
"언니가 먼저 얘기좀 할게. 일단 아름이를 왜 언니가 싫어하겠니. 애기 말대로 가족인데."
"그,그치만... 아까 말씀하시던건."
"언니로써 그래도 아름이가 조금 더 바르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악역을 자처하는 거랄까? 정연이 네 말대로 언니가 덮어줄 수 있지. 사실은 아름이가 이미 뒷처리도 잘 해놔서 나처럼 내부에 있는 사람 아니었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면 안혼내셔도 되는 거 아니셨어요?"
"이제 막 20살 된 아름이가 어린 마음에 엇나가지는 않는지, 충동적인 결정으로 너무 많은 손해를 보는 건 아닐지 걱정되니까."
"아아..."
내가 언니한테 뭐라고 했던 게 머쓱할 정도로 제대로 된 참언니 같은 이야기였다.
"또 사실은 오늘 둘 다 부른 이유는 정연이 너가 아름이한테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종속돼서 끌려다니는 건 아닐까 해서 였는데... 지금 말하는 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네... 아름이가 잘해줘요."
"마지막에 다 포기하고 너를 고를 수 있냐고 하니까 망설이던데?"
"그, 그건... 으으..."
"아름이도 생각이 많을거야. 시작부터 평범한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정연이 너도 속상한 부분이 많겠지만 아까 저 부분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네..."
"이제 좀 이 언니 마음도 알겠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해서 죄송해요."
"너가 죄송할게 뭐있니. 오히려 방금도 이용한 셈이 되버렸네. 그래도 다행이야 아름이랑 서로 좋은 감정이라서."
"혹시 제가 끌려다니는 거였으면 풀어주시려고 하셨나요?"
"어... 안듣는게 낫지 않을까...?"
"?"
"가지고 놀면 안되는 장난감을 사촌동생이 갖고 다니면 사촌언니가 보통 어떻게 할 것 같니?"
"혼내고 버리죠...? 아...!"
편안하게 얘기하다가 다시 소름이 쭉 돋는다.
이야기를 잘해서 망정이지 괜한 소리를 했으면 아마 지금...
"우리 애기는 겁이 참 많네. 만약은 만약이니까. 그치?"
"네 그,그쵸. 만약, IF 네. 하하..."
"애기랑 더 놀고 싶었는데 슬슬 보내줘야겠다."
"어디로요...?"
"아름이 달래주러 가야지?"
"저도 가고 싶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걸요..."
"아마 5층 끝방에 있을거야. 아름이가 어릴 때 전용 방이라고 키를 줬었거든.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가끔 우울한 날에 혼자 틀어박혀서 있다 가더라고."
"그래도 가을 언니랑 싸운거라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요...?"
"속는셈 치고 슬쩍 갔다와봐. 음 뭐라고 하지... 여자의 감?"
여자의 감이란걸 믿지는 않지만, 일단 가보기로 한다.
여기서 내려가려면 복도 쪽으로...
"어머, 애기야 옷은 입고 가야지. 그러고 가려고?"
미친. 호텔 H 속옷녀 될 뻔 했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