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어어... 이러면 안되는데... (2)
* * *
'응? 방금 뭘 들은 거지?'
뭔지 몰라도 잘못 들은게 분명하다.
어우, 몸 바뀌고 나서 하도 바쁜 일도 많고 그 앞뒤로 고생했던 일들이 많은 탓인가보다.
그 뭐라더라. 아름이 책장에 있는 쉽게 읽는 정신의학 서적에 있었는데,
환각.. 영어로hallucination 이었나?
혈관을 핑핑 도는 알코올이 내 신경계를 단단히 흔들고 있나보다.
가을 언니가 나를 정훈이라고 할 리가 없으니까...
"정훈씨, 대답 안해주실 거에요?"
가을 언니는 내 셔츠 목부분을 조이고 있던 리본을 슬쩍 당겨 풀며 다시 물었다.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
"흐음~ 그렇게 나오시겠다...?"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순순히 이쪽의 패를 전부 공개하면 안될 것 같았다.
정확히는 복잡한 생각을 하기 힘들어 일단 아니라고 잡아뗀 것이긴 한데...
"부산과학고 조기 졸업에 K공대 18학번이던 00년생 이정훈씨... 뭔가 익숙하지 않으신지...?"
"..."
'아름아 빨리 와줘...'
눈을 꼭 감은 채로 속으로 기도하며 아름이가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보다 똑똑한 아름이라면, 멍청한 나 대신 늘 현명한 답을 대신해주는 아름이라면 이 상황을 헤쳐나갈 명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까 케이크랑 이것저것 가진다고 나갔으니 슬슬 돌아올 타이밍인데...
"아름이 기다리는 거면 무의미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가을 언니는 흠칫 놀라며 언니 품에서 몸을 떼어낸 내 볼을 어루만지며 말씀하셨다.
"정비서랑 적당히 시간좀 보내다 오기로 '가을 언니가 직접' 부탁한다고 전해놨으니까... 돌아올 때 까지 입 꾹 닫고 있기는 힘들 것 같은데..."
독심술이라도 쓰시는지 내 생각을 읽어낸 언니에게 더 뻐팅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호,혹시 제가 안다고 그러면 어,어떻게 하실건가요...?"
멍청한 질문이지만, 그래도 당장 물어볼만한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우리한테 제대로 얘기도 안해주고 여자인 척 속였으니까... 나는 넘어간다해도 아영언니는 쉽게 안넘어갈 것 같은데..."
꿀꺽.
아영언니라... 확실히 기분파에 자신을 언짢게 한 대상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는 스타일이셨다.
아까는 예뻐해 주셨지만, 22살 남자였던걸 숨기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화내실 것 같기도...
"그, 안넘어가시면 어떻게...?"
"음...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네... 최근에는 직접 손 쓴 일이 많이 없어서..."
'그러면 크게 문제는 안생길지도...?'
"아름이한테 듣지 않았니..? 아마 여기 예쁜 팔 하나는 잃게 되거나, 아양떤게 기분나쁘다고 그러면 앞으로 제대로 말 못하는 상태가 될지도...?"
'좆 됐네...'
아까 덥게 느껴지던 공기는 언니가 향초를 끈 영향인지, 내가 술이 점점 깨어가서 그런지 착잡했다.
"그건 정훈씨, 아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직은 우리 애기구나. 우리 애기가 얼마나 솔직하게 말해주냐에 달려있는거겠지?"
그 건물에서 아름이한테 잡혔던 기억이, 자살에 실패하고 아름이한테 사랑을 구걸했던 그날 밤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다른 언니들도 아름이랑 비슷한 분위기가 있지만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가을 언니가 가장 아름이와 닮아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턱 끝까지 물을 채워넣듯 나를 몰아세우는 것까지.
다행인 점은 이런 상황에서 어설프게 개겨도 애초에 내가 못이길 상대라는 것을 이번에는 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까 버티려고 했던 것도 아름이가 올때 까지였는데, 아름이가 당장 못 온다고 하니 서로, 아니 정확히는 내 힘을 뺄 필요가 없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요,용서 해주실 수 있나요...?"
"말하는 것만 봐도 벌써 답 나온 것 같은데, 지금 언니랑 간보는거야...?"
"죄송해요오...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흐읍.. 흑..."
이러기 정말 싫은데 또 눈물이 자꾸 차오른다.
아니 내가 일부러 이렇게 되고 싶어서 지금 상황이 된 것도 아니고.
평범하고 행복, 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무난하게 살고 있던 나를 아름이가 먼저 납치해서 이렇게 된건데...
오늘 생일파티라고 온 것도 갑자기 아름이가 연락 받더니 오늘 서울로 오게 된건데...
여자가 되고 나서 이게 호르몬 탓인지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요소가 많아진다.
저번에 아름이랑 싸웠던 것도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평소의 나보다 괜히 감정적으로 아름이한테 받아쳐서 그랬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니 더 억울하다.
문제는 그 억울함을 논리정연하게 풀어낼 능력이 없어서 나는 병신같이 울먹이나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저, 흡... 네, 그 정훈 맞는데... 일부러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고..."
"다 아는데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설명 안해도 괜찮아."
"흑... 흐윽.. 어,언니... 아, 아니지 누나인가..? 그게.. 아..."
"편한대로 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추궁하던 언니는 울음에 젖어 겨우 답을 전하는 내게 그만하면 됐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푸흐흐... 아 너무 겁줬나? 울지마 울지마. 안잡아먹어. 애기가 왜이렇게 마음이 여리니."
언니는 천천히 내 셔츠 단추를 풀어 손을 집어 넣었다.
따뜻한 열기가가슴 사이에 차있던 젖가슴이 차가운 언니 손을 만나니 움찔하며 유두가 순간적으로 빳빳해진다.
"몸이 너무 야한거 아니야? 푸흐...♥"
이상하다.
감정을 표현하는 여러 단어가 있곘지만 지금 기분은 이상하다는 말 말고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내가 두려움에 떨고 불안해하던 감정들이 전부 가을 언니 탓에 솟아났지만, 내가 정훈이 맞다는 말을 전하자 다시 웃어주는 언니가.
이렇게 내 감정이 눈에 훤히 보인다는 듯 손바닥 위에서 갖고 노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도,
그런데도 결국 나는 절대 이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하며 오히려 용서에서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결말도.
마지막으로 씨익 웃어주는 그녀때문에 다른 불안함이 씻겨내려가는 듯한 저 미소까지도 아름이와 너무 닮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간질간질한 이상한 기분이...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울음을 그칠 수 없었기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던 나를 가을 언니가 또 확 끌어당겨 눕히고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쪽
멍하니 언니를 올려다보던 내 볼에 진하게 입술을 맞추는 그녀.
당황해서 아무 저항도 안하고 있으니 점점 더 질척한 소리를 내며 내 볼을 빨아먹듯 입술을 꾹 누르는 언니였다.
"이, 이건..."
"아, 심심풀이? 너무 깨끗하게 예쁜 애기같아서 키스 마크 하나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해서"
"눈빛이나 평소에 다리 벌리고 앉는거나 말투, 손짓까지. 남자였던거 알고 보면 꽤 티나는 부분 많다 애기야?"
"아... 의식을 안해서... 네..."
그럼 가을 언니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다른 언니들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처음 언니가 겁줄 때 했던 말처럼 아영 언니가 진짜 담그려고 하면...
"너무 겁먹지마. 다른 애들은 아직 몰라. 나만큼 너한테 관심있지도 않고."
"네..."
언니는 다시 침대 옆 향초를 켜고 서랍 가장 윗칸에서 시가 같이 말려있는 무언가를 입에 물었다.
"정.. 음... 정연이로 하자. 의심이 진짜인지 궁금했던 거지 지금 그걸 따질 건 아니니까 그치?"
"네. 감사합니다..."
"담배 안피지? 원래도 안 폈어? 아름이가 싫어해서 지금은 안필거같고."
"저어는... 원래 안폈습니다."
"그럼 언니 불만 붙여주라. 라이터 저기 문 옆 테이블에 있어."
"네."
언니가 입에 문 막대 끝에 불을 붙여드리자 깊게 한모금 빨아들인 후 옆쪽으로 연기를 뱉는다.
"아, 이거 아름이한테는 비밀이다? 일부러 냄새도 제일 안나는 고급품으로 피는데, 아름이는 되게 싫어해서..."
"넵..."
아까보다는 조금 얌전한 눈빛의 언니는 천천히 나를 훑어보셨다.
뱀 앞에 얼어붙은 쥐처럼, 헐벗고 있는 언니 앞에 앉아있는 나는 재킷부터 셔츠, 바지 전부 입고 있었음에도 발가벗겨진 채로 언니앞에 전시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애기는 참 예쁘네... 작은 강아지 같아. 아름이도 귀엽긴 한데 아름이는 좀 새끼 여우 같은 느낌이잖아 그치?"
"네 그렇죠... 아름이도 강아지라고 많이 그래요..."
"옷 좀 벗어봐."
"갑자기요...?"
"언니는 두번 말하는거 싫어하는데... 다시 설명해줘야해?"
"아닙니다..."
다시 싸늘한 그녀의 눈빛을 보는 것은 심장에 영 좋지 않았기에 서둘러 옷을 벗는다.
속옷까지 벗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일단은 속옷은 그대로 둔 채로 벗은 옷을 옆에 걸어둔 채 어닌 앞에 서니 옆자리를 툭툭 치셔서 침대에 올라가 언니 옆에 누웠다.
"진짜 같네... 기록에 배양 후 이식으로 거의 다 새로 만든 거라는데 이렇게 티가 안날 수가 있나?"
"저는 정확히 몰라서..."
"그렇겠지. 그냥 혼잣말 한거야."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면 어때? 막 불끈불끈 하던게 없어져서 허전해?"
"허전하다기 보다는... 애가 타는? 그런 느낌이라서 막 간질간질하고..."
"어떻게? 갑자기 성인 여성 몸이 되면 감도도 높고 그런가?"
가을 언니는 호기심이 돋았는지 피우던 시가형의 무언가를 대충 침대 옆 재떨이에 비벼 끄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저 향초 효과가 확실히 있지? 몸에 해로운 건 아닌데, 기분을 붕 뜨게 해주고 음.. 좀 천박하게 말하자면 발정나게 만드는 거거든."
"..."
이 방에 들어오고부터 계속 머리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물들었던 게 저 증기 때문이었나보다.
효과라...
확실히 아까 잠시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남성기에 손을 갖다댈 뻔했다.
"애기야, 아름이 말고 언니꺼 하자...♥"
아까보다 풀려있는 눈빛의 언니가 그러자고 하시니 또 거절하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름이보다 좋게 해줄게. 많이 아껴주고. 밤에는 잔뜩 귀여워해주고...♥"
저 향초의 효과를 듣고 의식하니 더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 나는 의식을 집중하려 했지만 저런 치트키 같은 거 앞에서는 의미 없으니까.
내가 나쁜게 아니라, 내가 야한게 아니라, 저런 나쁜 약물이랑 눈 앞에 있는 가을 언니가 강제로 그렇게 만드는 거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언니의 손가락은 내 가슴을 주무르다 스르륵 내려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던 내 보지를 건드렸다.
일부러 애태우듯 클리토리스는 꾹꾹 누르기만 하고 소음순을 따라 천천히 선을 긋는 언니.
"거기 말고... 언니... 흐응...!"
"우리 애기 원래 이렇게 야한거야?"
"언니가 저런 나쁜 향초랑, 야한 눈빛 하시니까.. 꺄하앙...! 저는 싫은데 어, 언니가...!"
"그래 그래 우리 애기는 착하니까, 다 언니 탓 하면서 예쁘게 울어주면 되는거야...♥"
언니가 가슴이나 보지 주변을 만져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언니에게 쓰다듬 받는 것에서 뭔가가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 이랑은 조금 다른, 선을 긋이 애매한 좋은 감정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이라 자기합리화 하며 언니의 손에 신음을 흐느끼던 그때, 절정에 도달하려던 나를 일부러 놀라게 하려는 듯 문이 열린다.
쾅 쾅 쾅!
철컬 띠리릭!
"늦어서 죄송해요. 정연 언니, 얌전히 계셨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