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IBIZA에 놀러간 듯이~ (2)
* * *
...
물기에 젖어 아른아른거리는 시야에 새로운 인물이 잡힌다.
지금 들어온 걸로 봐서는 아마 저 사람이 한은정인 것 같은데...
"어머 머야, 못보던 애가 있네. 얘가 그 아름이 애인?"
"어 응. 정연이래."
테이블 위의 냅킨으로 바닥에 뿜은 술을 슬쩍 훔치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안녕하세요. 한정연이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려요 언니."
"어 그래. 나도 반가워. 되게 순하게 생겼다. 아름이랑 잘어울리네."
"은정 언니 뭘 또 그런 말씀을..."
옆에서 나를 걱정하던 아름이는 은정 언니의 말이 부끄러운지 또 눈을 피하며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언니들 앞이라고 너무 얌전한 막내 연기하는 거 아니야 아름아...?'
가슴 부분이 파인 터틀넥에 짧은 검정색 스커트를 입은 은정 언니는 앞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런지 섹시하게, 아니 정확하게는 야하게 보였다.
"늦어서 미안. 다들 시작했나보네. 오다가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 또 지나가던 남자랑 눈맞았어?"
"아영 언니는 나 볼 때 마다 그 소리 하더라. 나 그렇게 남자 안밝히거든요?"
"니 옷이나 보고 다시 그런 말 해보세요 자매님아."
"에휴... 아름아, 아영 언니가 언니 괴롭혀. 와서 위로해줘."
은정 언니는 아영언니랑 틱틱대다가 아름이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엔딩으로 끝났다.
생각했던 재벌들 노는 것보다 평범한 것도 같다.
베O랑이나 내O자들 같은거 보면 문란한 마약 파티나 어두운 접대, 불법적인 이야기들 같은게 있어서 혹시 아름이 언니들도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헀는데, 그냥 돈 좀 많은 대학생들 보는 것 같다.
사이사이 토크에 아까 기업 운영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방금 마시고 있던 술도 딱 보니 나같은 사람은 한병 구해보기도 어려운 고급품 같지만 이정도면 뭐...
"은정이도 왔으니까 우리 가을이 선물부터 줄까?"
아영 언니는 귀찮은 걸 빨리 해결하고 싶다는 듯 선물부터 주고 마저 이야기하자고 했다.
"에이 뭐 가져오지 말라니까 또 다들 준비한거야?"
"뭐래, 언니 이번에 선물 뭐 받을까 들떠서 비서 아저씨한테 몇번이나 그 얘기 했다던데."
"..."
조용히 있던 서윤 언니가 한마디 붙이니 가을언니는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언니 기대했구나...?"
"아니, 아무튼! 혹시 뭐 갖고왔으면 꺼내봐. 뭐, 엄청 기대한 건 아니고..."
수아 언니도 놀리듯 묻자 서둘러 주제를 돌리는 그녀.
"난 마지막에 할게. 음... 아영언니부터 순서대로 할까?"
자기 선물은 마지막에 공개하겠다며 씨익 웃는 은정언니는 섹시한 여우 같은 인상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야하게 느껴질 수가 있는지...
거의 침대 위에서 보는 아름이 만큼이나...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아름이 언니들이라고!'
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딱히 할말이 없어서 눈앞의 잔이나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는데 벌써 취기가 오르는지 생각이 아주 자유분방해졌다.
"뭐냐 나부터? 아... 나는 진짜 준비한 거 없는데... 다들 안가지고 오는 거 아니었어?"
'미친 아영언니 존나 쿨하네...'
처음부터 마이페이스 같았던 언니는 따로 선물 준비하지 말라고 예의상 했던 가을 언니의 말에 진짜로 따로 준비한게 없단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괜찮아 언니."
"아냐, 잠깐만 어디 보자..."
아영언니는 가죽자켓 주머니와 백을 이리저리 뒤지다 특별히 원하는게 나오지 않았는지 엉덩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무언가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이거 너 줄게. 얼마 안된거야. 한 5번 썼나?"
"이게 뭔데? 아니 언니, 이거 언니 차키잖아. 전에 물량이 안나와서 몇달이나 기다린 다음에 인도받았다고 했으면서..."
듣고보니 그렇게 생겼다.
검은색 길쭉한 플라스틱에 중간에 황소 마크 같은게 붙어있는데...
'저거 진짜 람보르기니 차킨가...?'
"그래 너 타. 야 그거 국내에 몇 대 없는거야 임마. 언니한테 감사하면서 몰아."
"그게.. 아. 으... 응... 고마워..."
가을 언니는 또 적잖게 당황한 듯 했지만 태연하게 선물로 줄 수 있다는 아영언니에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보다.
저 언니들 급이면 가격 때문에 놀란다기 보다는 진짜로 아영언니가 꽤 오래 기다려서 뽑았다는 것 같은데 그걸 저렇게 쉽게 선물하다니.
"아영언니가 처음부터 너무 쌘거 준거 아니야?"
"아니 뭐. 따로 줄게 없어서 하하..."
"그래도 내꺼가 더 마음에 들걸? 나는 사전조사까지 완벽하다구"
자신만만해하는 수아 언니가 선물한건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목걸이였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름이가 귀띔 해주기로는 원래부터 가을 언니가 좋아하던 쥬얼리 브랜드인데, VVIP들에게만 한정적으로 먼저 공개되는 제품 라인들.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는 구하기 힘든 걸 뉴월드 그룹에서 이번에 새로 명품 브랜드들 컨택하면서 받아냈다고 한다.
(아름아 저거는 얼마정도 하는거야...?)
(가격 자체는 10억 좀 안할 거 같은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에 몇개 없을거라 저건...)
(아하...)
확실히 람보르기니랑 가격적으로는 비슷해도 정성? 같은 무언가가 더 들어간 것 같다.
다들 선물에 10억씩이라니 너무 어렵네.
잠깐 저정도 금액의 선물이면 양도세를 물어야 되는거 아닌지 생각했지만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다시 쏙 들어간다.
"나는 직접 못가져오는 선물이라, 가을언니 자 봐바."
서윤 언니는 휴대폰을 들고 가을 언니 옆자리로 가 사진을 몇장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언니 다다음달에 갤러리 전시 한다고 그랬잖아. 이번에 김병현 작가님 작품 몇점 더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것도 생각해주고 언니가 감동했다 서윤아."
직접 못가져 왔다는 이야기에 방금 나눈 대화를 합쳐보면 서윤 언니는 그림? 같은 걸 선물했나보다.
근데 생각해보니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어떡하지.
또 옆에 아름이를 쿡쿡 찔러본다.
(왜요 언니.)
(그.. 나는 어떻게 해야돼..?)
(뭘요?)
(가을 언니 선물 말이야)
(아... 제가 언니랑 같이 준비했다고 할게요.)
(응.)
아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했을테니 나는 얌전히 있기로 한다.
사실 내가 여기서 뭘 하겠는가.
오늘 처음 본 언니들이고, 아름이한테 껴서 온건데.
가을 언니가 다른 선물들도 꽤 좋아했어서 아름이 선물이 뭔지 궁금해진다.
"이제 은정이 차례인가?"
"저희꺼 먼저 드릴게요. 여기요. 생일 축하드려요 가을언니."
"아이 귀여워라. 아름이도 준비했어? 언니는 아름이만 있으면 되는데."
가방에서 작은 책 같은걸 꺼내서 가을언니한테 건넨 아름이는 오히려 아름이가 선물이라는 듯 끌어안는 가을 언니 탓에 뒤에서 안겨있는 자세가 되었다.
"아니 언니, 저 말고 선물을 보셔야..."
"그치만 아름이가 더 좋은걸...?"
능청스럽게 웃으며 아름이 볼에 얼굴을 부비는 가을 언니랑 당황하는 아름이를 보고 있으니 내가 아름이한테 당하는 모습과 꼭 닮아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태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가져가는 건 아름이 친척 언니들이랑 닮아있었구나.
"그래서 이게 뭐야?"
"앨범이에요. 언니 유학 가시기 전에 저랑 찍은 사진들, 그중에서도 정연이 언니랑 같이 몇 장 골라왔어요."
"이야 정연이도?"
가을 언니는 놀랍고 대견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잠깐 당황했지만 아까 아름이가 해준 얘기도 있고 아름이가 찌릿 하고 쳐다봤기에 금방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네, 네... 잘 모르지만 그래도 좀 잘나온걸로... 하핫..."
"뒤쪽은 비워뒀어요. 이제 한국에 계시니까 만날때 마다 한페이지씩 채워나가면 될 것 같아서..."
"어머, 선물이 너무 귀엽다 아름아."
"말 나온 김에 언니들 다같이 한장 찍으셔요."
"아 우리도?"
"자주 보기 힘든 언니들이시잖아요."
"아영 언니가 좀 바쁘긴 해."
아름이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도 준비해뒀는지 백에서 꺼내서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름이 백이 그렇게 큰 사이즈가 아닌데 어떻게 저기서 물건이 많이 나오는지...
여자 백은 신비의 공간이라던데 진짜 4차원 주머니 같다.
즉석 사진을 새 페이지에 붙이고 가을언니는 잠시 놓아주었던 아름이를 다시 껴안았다.
"아름아 너무 고마워. 정연이도."
"언니니까요..."
"언니 아름이 부끄러워 하는 것 좀 봐."
"크흠흠... 이제 내 선물을 공개할 때가 된건가?"
"아 은정이 꺼 아직 안봤구나?"
"야 넌 뭘 준비했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냐?"
"하하.. 언니들 모두를 만족시킬 엄청난 걸 준비했지. 파티하면 이 한은정 아니겠어?"
"언니 저번에도 같이 클럽갔다가 필름 끊겼잖아."
"어허 쓰읍! 그날은 컨디션이 안좋았어. 아, 맞다 아름아 너 성인 맞지?"
"네."
"어후, 큰일날 뻔했네. 아니다 오히려 괜찮나? 아무튼 짜잔~"
자리에서 일어난 은정 언니가 마치 마술을 하듯 큰 동작으로 등 뒤의 문을 가리키자 두꺼운 문이 다시 스르륵 열린다.
"둘셋"
[안녕하세요 탐방소년단입니다!]
"음방도 아니고 그렇게 안해도 돼. 자자 저기 안쪽에 수트 입은 언니랑 가죽 자켓 입은 언니 옆부터 앉아"
"아 넵."
탐방소년단.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인기 남자 아이돌이었다.
뭐 내가 알 정도니 이미 이야기 끝이긴 한데...
왜 여기에...?
"아니 이게 무슨..."
"은정아 이건 또 뭐..."
다른 언니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