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IBIZA에 놀러간 듯이~ (1)
* * *
"언니는 지금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아름이는 애인이랑 오고 에휴... 언니는 마지막으로 해본게 언젠지 모르겠다. 좋겠네 아름이는?"
'...?'
자기소개가 막 끝난 우리를 보며 아영 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영 언니, 아름이도 있는데 말 좀 예쁘게 해요!"
"응? 아름이도 이제 성인 아니야? 저번에 부가티 받았다더만,"
"그래도 완전 애기죠 아직..."
아영 언니의 멘트에 화들짝 놀라며 한마디 하는 수아언니.
(아름아 거미줄 친다는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길래 언니들끼리 저러는가 싶어서 옆에 있는 아름이에게 슬쩍 귓속말로 물어봤다.
(아... 소곤소곤...)
'아하...'
좀 야한 의미긴 한데 아름이 본모습을 보시면 저런 말씀 안하실텐데들...
순진한 척 입을 가리며 웃고 있는 아름이가 약간 가식적으로 느껴져 살짝 째려봤다.
"언니, 왜요?"
"아, 아무것도..."
개목걸이도 종류별로 준비해두고, 천천히 애태우듯 여기저기 만져주는 아름이를 다들 보셔야 되는데...
나만 당한 것 같아 억울한 느낌이다.
"쟤들도 할 거 다 하겠지, 피끓는 청춘인데. 안그러냐?"
아영 언니는 우리를 보고 왼손 검지와 엄지로 고리를 만들어 오른손 검지로 넣었다 뺐다 하는 제스쳐를 보여준다.
"언니! 그만해요 좀!"
"아, 니들은 이건가?"
옆에서 계속 말리는 수아 언니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리에 검지를 넣는 제스쳐를 양손 V자 사이를 비비는 동작으로 바꾸는 그녀.
"..."
"..."
아무 대답도 못하고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가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하기는 크크..."
저 언니 처음에는 너무 센 언니 이미지였는데 생각보다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아영이 언니 피어싱 다 빼셨네요."
"아 이거? 에효... 이거 생각하면 또 술이 안땡길 수가 없다 언니가."
듣고보니 귀와 입술에 작은 구멍 자국이 남아있는 것도 같다.
원래 꽤 피어싱을 많이 해두셨던 것 같은데...
썰을 풀기 전 생각만 하셔도 답답한지 아영언니는 언더락 잔에 양주를 가득 채우고 한번에 털어넘기셨다.
"와..."
"언니 과음하지 마셔요."
"어머, 아름이가 언니 걱정해주는거야? 아구 귀여워라~"
벌써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아영 언니는 아름이를 끌어안은 채로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 그래서 머냐, 지난달에 우리 현장에서 노가다 몇명 죽었잖아. 부산에 아파트 올라가는거."
"아 그랬었죠."
"그거 다 보상하고 법대로 벌금 내고 했는데 개돼지 새끼들이 자꾸 주제도 모르고 경영진 사과를 받아야 겠다고 짖어대니까 씨발..."
"에구. 우리 언니 고생 많으셨겠네."
'아...!'
한아영을 최근에 뉴스에서 봤던 것 같은데 방금 말한 건설 현장 사고때문에 공식 사과 같은걸로 나왔던 것 같다.
지금 언니 모습이랑 너무 이미지가 달라서 제대로 매치가 안됐네.
그때는 좀 더 포멀한 느낌이었으니까...
"나는 좆도 모르고 내 알 바도 아닌데 거기 현장이 내 관할로 되어있었는지 기자회견 나가야 된다고 하도 지랄을 하니까 피어싱 싹 빼고 카메라 앞에서 즙 좀 짜고 왔지."
"아하..."
"좆같은 새끼들. 옛날같았으면 용역깡패 쓰는 김에 입 잘못 놀리는 새끼들도 싹 다 콘크리트 안에 굳혀놨을텐데 에휴... 요새는 재벌이 피어싱하면 피어싱한다고 지랄. 깔끔하게 안입으면 양아치라고 지랄. 우리가 아주 봉이지 무슨, 정작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할 새끼들이."
"얘들 오늘 우리 호텔에서 밥 잘먹고 올라왔는데 섬뜩한 얘기하면 애기들 겁먹어."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면서 크크..."
처음에는 끌어안겨 있던 아름이는 어느새 아영 언니 무릎베개 위에 누워있었다.
사나운 호랑이 같던 아름이가 여기서는 완전 아기고양이 포지션인게 어색하면서도 귀엽다.
"어이 새로온 애!"
"... 아, 네!"
"막내 애인이니까 맏언니 술 한잔 따라주라."
"네 넵!"
아영 언니 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드렸다.
"옳지. 애가 적당히 눈치는 있네."
"감사합니다..."
"너도 이 언니 뉴스 나온 거 봤어?"
"아 넵..."
"무슨 생각 들었어?"
"아... 음... 고생이 많으시겠다고"
"지랄."
"..."
"아름아."
아영언니는 내 대답이 마음에 안드셨는지 자기 무릎을 베고 있던 아름이 턱을 잡았다.
"네 언니."
"니 여친이 언니한테 거짓말 한다."
"죄송해요..."
"언니가 너무 속상한데 오늘 확 뒤집어 엎을까?"
"언니 왜자꾸 애기들한테 그래요. 가을이 언니 생일날에..."
조금 전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어디가고 내가 따라가지 못하겠는 흐름에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기가 뺨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저 언니는 분조장인가...? 조울증...?'
모르긴 몰라도 감정기복이 심하신 것 같다.
"아름이가 이쁜짓 해주면 언니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해드릴까여...?"
"우리 아름이 자주 하던거 있잖아."
"그건 좀... 언니 저도 이제 어른인데..."
"스읍..! 언니가 오늘 분위기 씹창 한번 내줘?"
"...할게요..."
아름이는 내 쪽을 슬쩍 돌아봤다가 다시 결심을 굳힌 듯 아영 언니쪽을 보고 일어섰다.
'뭘 하려고...'
"고양이 소릴 내봐 같이 먀먀먀먀먀~"
...
...
"끝이에요......"
"푸흐흐, 이렇게 잘하면서 왜 안한다고 그랬어 아름아."
고양이 노래가 아마 2년 전쯤에 유행했던거 같은데 언니들이 아름이한테 자주 시켰던건지 능숙하게 임무를 마친 아름이는 얼굴이 새빨개져 살짝 건드리면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 언니 미워요..."
"정연아 이거봐봐. 아름이가 너 앞이라고 엄청 부끄러워한다. 너무 귀엽지 않니?"
"하하.. 네..."
아름이가 나한테 부끄러운 짓들을 시켰던걸 일시불로 갚는 느낌이라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다만 여기서 너무 대놓고 웃어버리면 나중에 뒷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고 속으로만 대굴대굴 구르고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해보면 아름이가 나한테 강아지니 고양이니 하는걸 많이 시켰었는데, 친척언니들한테 당한걸 나한테 푸는게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름이가 좀 괘씸한데...
그래도 아름이의 부끄러움과 바꿔서 아영이 언니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별로 화도 안났는데 정색해서 아름이한테 저걸 시키려고 한건 아닐까?
어찌됐든 윈윈인걸로...
"이제 놀만큼 논 것 같은데 다같이 건배 할까?"
옆에서 같이 웃던 가을이 언니는 시계를 슬쩍 보더니 슬슬 시작해야 될 것 같다는 투로 말했다.
"어, 가을 언니, 은정이 언니는 안온대요?"
"그러게, 은정 언니도 시작하기 전까지는 온다 그랬는데..."
수아 언니가 아직 안온 언니 얘기를 하자 서윤 언니도 거들었다.
서윤 언니 목소리를 여기 와서 처음 들어본 것 같다.
뉴튜브에서는 완전 생기발랄 스타일이었는데 실제로는 엄청 차분한 편인 것 같다.
오히려 시크한 모범생 같던 수아언니가 이리저리 잘챙겨주는 착한 언니같고...
"아까 얼마 안남았다고 했었는데 연락이 자꾸 안되네... 우리끼리 시작해야 될 것 같은데...?"
"은정이도 엄청 기분파라... 올라오는 길에 남자랑 눈맞아서 파티 재낀거 아니야?"
"에이, 은정 언니가 그럴 분은 아니셔요."
"아름이 너가 잘 몰라서 그래. 은정이 걔가 얼마나 밝히는데. 오늘도 2차 호빠로 가자는걸 아름이 너 온다고 겨우 바꾼건데."
"그거 진짜에요 언니들?"
"..."
아영 언니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다른 언니들한테 물어보는 아름이.
수아, 서윤 언니는 물론이고 가을 언니도 아름이 눈을 피한다.
"이 언니가 요즘 좀 그런 것도 있고, 너 온다고 바꿔서 그렇지 쟤들도 다 은정이한테 찬성했어."
"이것도 진짜에요 언니들?"
"..."
다시 룸에 내려앉는 몇 초간의 정적.
"...실망이에요."
"아니~ 찬성했다기 보다는, 내 생일이니까 은정이가 기분 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반대는 안한거지... 니들도 안그래?"
"그, 그쵸! 에이 아름아, 은정이 언니가 나랑 서연이보다 언닌데 언니들이 괜찮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반대를 하겠어..."
멘트에 거침이 없고 사람 이미지가 그래서 그렇지 은근 아영 언니가 가장 맏언니 답게 참사람인 것도 같다.
건설 현장 근로자 사고 때문에 좆같다는 이야기 할때는 가식적이고 어두운 재벌의 면을 본 것도 같지만...
생각해보면 현장 사고가 어떻게 온전히 경영진 잘못이겠는가.
더군다나 아직 젊어서 기업 승계 전에 이름만 올려둔 상태로 놀러다니는 걸텐데
'아 이거 너무 재벌식 마인드가 아름이한테 옮았나,,,?'
아무튼, 언니들은 머쓱한 지 잠시 다른 얘기를 하다 다시 건배를 준비했다.
"오늘 밤새 마셔야 되니까 첫 잔은 가볍게. 아름이 오렌지 쥬스 줄까?"
"저도 이제 술 먹어요...!"
"하하.. 알았어 알았어."
"아름이가 마신다니까 이거 까야지."
아영 언니는 어린아이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남색 양주 병 봉인을 열었다.
"와... 언니 이거 왜이렇게 많이 갖고 있어요. 몇병 남았어요?"
"음... 한 2병 남았나? 더 살걸 그랬어. "
화려한 금색 장식이 있는 병에서 짙은 색깔의 액체가 흘러나온다.
"자, 가을이 생일이니까 첫 잔은 원샷!"
"언니!"
"하하.. 괜찮아 다들 신경쓰지 말고, 내 생일에 이렇게 와줘서 고맙고. 올해도 행복하자 짠~"
짠~!
술이 넘치도록 세게 잔을 부딪힌 후 아까 아영이 언니가 마신 것처럼 나도 입안에 술을 털어넣는다.
나는 샷잔이니까 이정도는 거뜬...
"푸흑... 크윽...."
"정연 언니 괜찮으셔요...?"
'미친... 뭐가 이렇게 빡세...?'
첫 맛은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꿀떡 삼켰는데 강렬한 쓴맛과 단맛,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향이 목에서 다시 올라온다.
그래도 꾹 참으려고 했는데 코랑 목에 간질간질한게 올라와 바닥에 조금 뿜었다.
이제 보니 다른 언니들은 다 조금씩 맛만 보는 정도로 먹은 것 같은데 나만 병신이었던 것도 같고...
"으으... 쓰읍..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것 까지야..."
그때, 당황한 언니들 뒤로 소리없이 스르륵 열리는 두꺼운 문.
"어..."
"이 몸 등장! 다들 왜 서있어? 아직 시작 안했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