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설레는 일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어 (2)
* * *
"후우... 죽을 뻔했네..."
"그걸 왜 한입에 먹어요!"
"아니... 아름이 너가 그렇게 추천할정도면 엄청 맛있을 것 같아서..."
"선배 때문에 다 망했어요! 몰라요. 큰일 안난건 정말 다행이지만..."
볼을 잔뜩 부풀린 아름이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원래도 초롱초롱하던 눈이지만, 눈가가 더 촉촉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실망? 할 일인가...?'
"이거랑 선배가 가지시던가 버리시던가 해요. 전 몰라요 흥...!"
아름이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자기 접시에서 작은 뭔가를 꺼내 툭 던졌다.
띠링~
작은 고리 3개가 묶여있는 형태의... 금속...
'반지...?'
"아..."
머리를 한대 맞은 것처럼 띵하다.
자세히 보니 내가 뱉어낸 갈색 덩어리 안에도 빛나는 무언가가 파묻혀있었다.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하여 꺼내보니 아름이가 던진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
아무래도 아름이가 이벤트를 하려고 준비했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린 것 같다.
"선배랑 서울 온 김에 예전부터 생각해뒀던 거라 맛있는 것도 먹고 마지막에 제대로 다시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아예 울먹이는 아름이.
'아 좆됐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꽉 채우는 좆됐다는 감각.
대놓고 싸웠을 때보다, 예전에 협박당할 때보다 오히려 이렇게 아름이를 속상하게 만든게 가장 마음이 불편했다.
망친 것도 망친거고, 아름이가 이렇게 나를 생각해줄 동안 나는 저런 이벤트를 해줄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기면 꼭 먼저 고백하라고 했던게 떠오른다.
나랑 아름이의 경우는 사실 평범한 연인들이랑은 다른 루트를 타버려서 정확히 언제부터 사귀었다는게 애매하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다시 고백할 성의 정도는 보일 수 있었을텐데,
'너 참 이기적이다 정연아...'
나는 쓰레기 병신이었다...
그래도 개쓰레기 머저리가 되기 전에 조금은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속상해하는 아름이한테 말을 건다.
"아름아..."
"왜요 선배."
"그,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이벤트를 망쳤으니까 이벤트로 갚아야겠지...?'
"내가 다시 멋지게 고백할게."
"제가 선배가 다시 할 걸 알아버렸는데요?"
"음... 아름이 너가 예상 못할 타이밍에 할게. 반년 안에!"
"흠... 반년... 반년이라..."
6개월 안에 어느 날 갑자기 고백하면 쉽게 예상하기 힘들겠지.
아름이도 나름 납득하는 듯한데...?
"안돼요."
"응...?"
"반년이나 선배가 제꺼라는 표시를 안하면 제가 불안해서 안돼요. 남들한테는 우정반지라고 해도 선배는 커플링인걸 자각하실테니 족쇄를 채워나야... 음... 두달로 해요."
"두달은 너무 짧은..."
"스읍...!"
"네, 두달로 하시죠."
"옳지옳지."
다행히 아름이는 적당히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웃으며 나를 쓰다듬어줬다.
조금 부끄럽긴 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쓰다듬 받는것도 좋은...
'근데 이건 애인이 아니라 강아지 아닌가...?'
뭐 서로 좋으니까 됐다.
"그럼 갈까...?"
"네, 덕분에 잘먹었어요 선배.
"아니, 뭐... 응... 나도 잘먹었어"
내가 긁는건 아니지만 아름이 나름대로 같이 먹어줘서 고맙다는 뜻이겠지 한다.
"후..."
"왜 아름아?"
다시 엘리베이터에 탄 아름이는 뭐가 긴장되는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아... 언니들 볼 생각에 조금 긴장돼서요..."
"언니들 많이 무서우셔...?"
"아니에요, 잘대해주실거에요..."
'그럼 뭐가 문제지...?'
아름이의 긴장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꼭대기 층에 멈춰서 문이 열리고 있었다.
...
...
아름이와 같이 도착한 라운지는 은은한 조명과 함께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
큰 연회장 같기도 한 라운지 중앙에는 여러 종류의 술병들이 전시되어있는 바가 있었고, 창가를 따라 테이블과 소파가 쭉 늘어져 있었다.
1층 로비와 아까 있었던 레스토랑을 반씩 섞어놓은 느낌의 공간.
조형물이나 장식같은 부분도 있고,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놓은 부분도 있다.
아름이가 오늘 한 층을 통째로 비워서 쓸 거라고 해서 그런지 이렇게 넓은 라운지에 사람이 몇 없었다.
그 몇 있는 사람들도 손님이라기보다는 스태프 같은 느낌.
"호오..."
"이제는 별로 안놀라시네요. 후후..."
"오늘 너무 많이 와... 하니까 바보 같아보일까봐..."
"아가씨 오셨습니까."
"어, 실장님!"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라운지 구석에 앉아계셨던 김실장님을 다시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보고싶었다구요 실장님..."
"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어떻게 저녁식사는 즐거우셨습니까?"
"..."
"..."
아름이랑 나는 둘 다 움찔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장님께서도 아름이의 이벤트를 알고 계셨던 모양인데 예상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적잖게 당황하신듯 했다.
"아, 음... 안으로 드시지요. 은정 아가씨께서는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셨고, 다른 분들은 다 와계십니다."
"하하... 네..."
아름이 언니들이 총 다섯 명이라고 했으니 네 명은 이미 와있다는 얘기였다.
"후..."
"언니도 긴장돼요?"
"으응..."
아까는 3인칭으로 언니를 쓸 때 헷갈린다고 선배로 가더니 지금은 다시 언니로 돌아왔다.
좀 제멋대로인 면이 있지만 아름이가 지금 제일 편하게 부르는 게 언니라는 소리겠지...
김실장님께서 라운지 옆 쪽의 두꺼운 철문을 열어주셨다.
밖과는 다른 분위기의 복도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전까지 있던 곳이 전형적인 호텔식 인테리어였다면, 석재로 마감된 복도의 바깥쪽 부분을 따라 물이 흐르는 이곳은 지하 비밀시설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 벽 너머에 아름이 언니들이...
...
...
방 안은 생각보다도 더 넓었다.
사람 20명은 빙 둘러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소파와 중앙의 큰 테이블이 위치한 방.
게다가 우리가 들어온 문 말고도 작은 문도 두 개 있었다.
"언니들 오랜만이에요."
"아,안녕하세요."
아름이가 언니들한테 인사를 하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인사했다.
"뭐야? 아름이도 불렀어?"
"내가 불렀지~ 와아~! 아름이다~!"
제일 상석에 앉아있던 늘씬한 여성이 우리를 보자마자 뛰어나와 아름이를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아름이 잘 지냈어? 힘든 일은 없었고?"
사촌동생 보다는 조카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껴안긴채로 마구 쓰다듬과 뽀뽀를 받는 아름이는 적당히 아둥바둥하다가 옆에서 보고 있는 나만 느낄수 있을 정도의 피곤함을 뿜어냈다.
'저래서 언니들 보기 부담스러워했구나...'
"아름이 많이 컸네? 언니 나와봐 나도 좀 안아보자."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언니가 조금만 더 귀여워 하고 줄게. 아름아 저녁은 맛있게 먹었니? 우리 아름이가 먹을거라서 언니가 잘부탁드린다고 얘기도 해놨는데"
"으읍.... 으으음읍..."
저 언니 가슴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괜찮았다는 이야기인가보다.
"여기 이쁜이는 누구...? 너가 그 아름이 애인이야...?"
아름이 배정 순위에서 밀린 언니가 나를 보고 물었다.
"넵! 아름이랑 만나고 있는 한정연이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려요 언니."
"응 그래. 오자마자 너무 정신없게 해서 미안. 가을이 언니가 아름이를 워낙 좋아해서..."
"하하... 네..."
가을 언니가 아름이를 충분히 즐기신 뒤에야 우리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언니들, 이쪽은 정연이 언니에요. 저랑 사귀고 있는...♥"
"아, 안녕하세요..."
아까는 나름 자연스럽게 한 것 같은데 아름이 애인으로 소개되려니까 적잖게 부담스러웠다.
"또 정연 언니, 이쪽은 우리 사촌, 친척 언니들이셔요. 제일 왼쪽부터..."
...
직접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만 대부분은 미디어에서 한번씩은 스쳐서 봤던 것 같다.
정하은 만큼 연예인스러운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재벌이라는 건, 특히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으니까.
왼쪽부터 H 물산의 한아영.
새까만 가죽 자켓을 걸친 그녀는 스트릿 패션과 별개로도 상당히 쌘 언니 같은 이미지였다.
실제로 나이도 여기서 가장 많은 29세.
원래 거의 미디어 노출이 없는 편이었다가 최근에 뉴스에서 한번 봤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난다.
'무서워 보이니까 안건드리는 쪽으로...'
그 옆이 아까 아름이를 잔뜩 귀여워했던 호텔 H의 한가을 언니였다.
원버튼 자켓을 입은 우리랑은 다르게 더블 버튼 자켓을 걸친 그녀는 정감이 가는 부드러운 큰언니 같은 느낌이었다.
아영 언니보다 1살 어린 28세.
몇년 전부터 호텔 H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학파 경영자로 공적인 보도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인터뷰나 행사 영상에서는 차도녀 느낌이 진하게 났었는데 아름이 앞에서는 사르르 녹는 느낌.
그 옆의 25살 뉴월드그룹 수아 언니는 아버지이신 뉴월드 그룹 부회장이 워낙 방송에 많이 나와서 같이 출연도 자주 했었다.
실제로 보니 방송 이미지랑 거의 비슷한 깔끔한 모범생 같은 언니네...
마지막 JC 그룹의 서윤 언니는 애초에 본인이 머기업 스트리머 겸 뉴튜버셔서...
여기 사람들 중 유일하게 오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여기 온 건 오늘 확정 됐지만, 서윤 언니 뉴튜브 구독중이라 친척언니 생일 때문에 휴방할 일이 생긴다는 영상을 봤다.
...
"언니들 앞으로 잘부탁드려요..."
아름이가 여자 애인을 데리고 와서 놀라며 경멸의 눈빛을 받는다거나 나는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감히 끼냐는 대답이 혹시, 정말 혹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다들 좋아해주시는 분위기...
"아 씨발 좆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