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아름다운 밤 (3)
* * *
"아......"
(정연이 주사가 섹드립인가본대...?)
(아까 건배사 할 때부터 내숭 없는 스타일 같긴 했는데..."
(미친... 방금 뭘 들은거냐 내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술에 약해서 이정도 마셨으면 얼굴이 빨갛게 오를 만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 쪽팔리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자살이 몹시 마려워진다.
"후우... 죄송합, 아닌가, 으아... 이씨... 으에끅!"
사과를 해야하는 건지, 해명을 해야하는 건지...
지아 선배는 웃음을 참는 건지 당황한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언니... 그게..."
"정연아 많이 마셨니...? 아까 술게임 할 때 많이 걸리긴 하던데, 힘들면 말해 언니랑 들어가자."
"아뇨, 많이 마신 건 아닌데..."
"그럼 방금 한 얘기는?"
"그건.. 그, 어 소설. 아름이한테 소설 대사 얘기하고 있었어요."
"어.. 어.. 그래... 적당히 마시렴! 하핫..."
지아 선배 안에서 내 이미지가 아주 제대로 곱창이 난 것 같다.
선배는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은 채 마시던 잔을 들고 옆 테이블로 가서 다른 아이들과 또 술을 마저 마신다.
"아름아... 어떡해 히잉..."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내 잘못인데, 요즘 내 잘못으로 꼬이는게 너무 많아서 이제 억울해할 기력조차 없다.
"언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같이 갈까?"
"아니에요. 앉아서 좀 쉬고 계셔요"
안그래도 힘들텐데 그냥 앉아있어라는 듯 아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너 뭐야?"
머리가 아파오는 탓에 혼자있고 싶어서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바닥만 보고 있는 내게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지아 선배가 떠나고 아름이도 잠깐 일어난 지금 감자기 누가...?
"너 뭐냐고, 왤케 나대? 대학 오니까 찐따 티 좀 벗고 싶어서 그래?"
이건 뭘까.
나는 워낙 교우관계가 활발하지 않아서 중학교 때 소위 일진 이라 불리는 좀 노는 애들한테 관심조차 받지 않았고, 과학고에서는 적당히 잡담을 할 정도의 겜돌이, 오타쿠 친구들 몇명이랑만 지냈다.
그래서 시비가 걸릴 일이, 정확하게는 시비가 걸리기 전의 그 최소한의 관심조차 받을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러시면...
'기출유형에 없던 일이라 당황스럽네...'
"어머, 대답도 안하는거야?"
"그 저기 친구야... 이름이... 유... 유진이였나...?
"뻔히 알면서 어설픈 연기 하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하시지?"
'유진이 맞구나 다행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내가 이런 경험이 잘 없어서... 어.. 좀 너가 보기에 별로였던 부분이 있으면 내가 고쳐볼게..?"
"와... 지금 내가 나쁜년이다 이거야? 정연아, 왜이래. 우리 둘 밖에 없는데도 그렇게 가식적으로 연기해야해?"
'나쁜 년 맞지 않나? 원하는 대답이 내가 고치겠습니다가 아닌가?"
"아니.. 진짜 모르겠어서... 혹시 반장 하고 싶었는데 내가 눈치없이 거절 안해서 그래?"
"너 진짜 대단한 년이구나. 내 입으로 다 말해줘야해?"
여기서 응 이라고 하면 좆될거 같긴 한데 진짜 모르겠는걸 어떻게 해야 할지...
새터반 반장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면, 음...
음...
첫날에 반 대표로 장기자랑 하고, 임시반장 하고, 그 뒤에는... 뭐가 없는데?
"응, 말해주라. 진짜 모르겠어."
"너, 새터 첫날부터 명품으로 쫙 바르고 왔잖아. 그게 학생 신분에 맞는 일이야? 뭐 여기 부자들 사립고야? 그렇게 잘 사는 척을 꼭 하고 싶니? 돈 아니면 자존감 채울게 없어서 그래?"
'어라...?'
"좆도 아닌 년이 관심 끌려고 위화감 조성이나 하고, 애초에 그거 짭이라며? 쪽팔린 줄은 알아서 이틀째부턴 안입더라?"
"그거 짭 아닌데.. 아 아닌가? 짭일 수도 있나...? 아니 아니지 싶은데..."
"됐고. 그건 그냥 특이한 년인가보다 하고 넘어가주려니까 강당에서 브라 보여주면서 춤추고, 그 덕에 남자새끼들 또 좋다고 박수치니까 임시 반장이라고 또 설치잖아. 적당히란걸 모르니?
그리고 어제는 뭐하다가 임시반장이라는 년이 새터 프로그램 땡땡이 치고 방금 그 천박한 건배사 하며 실수 인 척 남자애들 다 들리게 섹스 섹스!
넌 공부보다 남자 꼬시는데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왜 K공대에 왔어? 그냥 돈 많으면 호빠나 가, 분위기 흐리지 말고."
유진이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듣고보니 저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건 보이는 거고 그걸 가지고 나한테 왜 화가 나는거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미래의 공학도에게 내가 너무 안좋은 환경을 만든거야?
일진들이 찐따 괴롭히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없다고 하긴 했는데, 얘는 말하는 거 보면 일관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고...
"언니, 무슨 일이에요?"
"응? 아름아~!"
취기가 올라서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그래도 싫은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도 축축 처지던 내게 아름이가 돌아온 건 굉장한 든든함을 주었다.
"아 그래, 둘이 친척이랬나? 너희 언니 간수 좀 잘 하자?"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
이제 막 자리에 온 아름이는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의아한 표정으로 유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고,
유진이는 그런 아름이에게 방금처럼 내 행동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아름이에게도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따졌다.
...
"아... 네. 확실히 바른 대학생 답지는 않은 행동들이네요..."
"그래 너는 좀 말이 통하네, 너네 언니 안나대게 너가 잘 좀 해."
"아니아니, 그렇다고 너가 그렇게 우리 언니를 씹을 건 아니지."
"어?"
"어?"
아름이가 저렇게 딱딱한 말투로 다른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본 나는 속으로 엄청 놀랐다.
옛날에 나한테 화났을 때도 존대를 유지한 살태로 섬뜩한 말을 했었던 아름이인데, 반말이라니...
계속 네, 네, 하면서 듣던 아름이가 반말로 따진게 놀라웠던 건 유진이도 마찬가지인지 나랑 같이 짧은 소리를 낸 뒤 여전히 말을 못잇고 있었다.
"왜? 갑자기 반말해서 놀랐어? 동갑이잖아. 응? 유진아."
'너가 그래서 내가 다 놀랐어 아름아...'
"아니, 그.. 그래서 너네 언니 행동이 잘했다는 거냐고!"
"잘못했지. 근데 그게 너한테 그런 개소리를 들어야 될 일이냐고 물으면... 글쎄...?
너 솔직히 공부고 학생다움이고 다 핑계잖아. 그냥 우리 언니가 부럽다고 말해. 지금 엄청 추하니까."
"뭐.. 뭐?! 부럽긴 뭐가 부러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갑자기."
"부럽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귀티가 흐르는 데다가 반 대표로 앞에 가서 당당하게 장기자랑도 해, 에타에서 완전 연예인인거 너도 알거 아니야.
잘 사는거 같은데 반 애들도 좋아해서 반장은 당연히 언니가 하게 됐고. 예쁜데 내숭도 없고 누구처럼 속으로 자격지심도 없는걸?
학생다움? 너가 뭔데 그걸 따져.
또 너 티나게 성형수술 한건 학생다운 거야? 싼티 나니까 고3들 말고는 그런 병원에서 할 일 없긴 하겠네. 학생답다 유진아."
...
"씨이.. 아니 그.. 아씨... 몰라. 둘 다 끼리끼리 잘 논다."
아름이가 몇마디 더 되받아 치면서 유진이를 깔아뭉게는 듯 말하니까 유진이는 제 분에 못이겨 혼자 씩씩대다가 결국 자기 원래 테이블로 돌아갔다.
"별 이상한 년이 다 있네요 언니."
"어.. 다시 존대 모드야...?"
"그거 때문에 그렇게 놀란 표정 하고 있었어요? 동갑인데 반말도 하죠 저도."
"보통은 안했잖아...?"
"그건 사람 대우를 해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 얘기고. 저건 그냥 자기가 부족한 자존감을 남을 까내려서 찾는 개돼지잖아요.
저한테 좀 무례하게 구는 것도 짜증나지만, 저런 년이 언니한테 개소리하는 거 저는 못참아요. 보는 눈만 없었으면 저렇게 멀쩡하게 안돌려 보냈을텐데"
"그렇구나..."
아름이가 하는 말들은 빈 말 같지가 않아서 더 섬뜩하다.
"저런 년은 무시하셔요. 거기에 감정소모하는 언니의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고마워.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저러는 거지 않을까 싶어서..."
"언니는 사람을 잘 못쳐내서 큰일이에요. 아싸셨으면서 왜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허! 아름이 나쁜말 멈춰!"
"팩트잖아요 헤헤..."
웃는 얼굴로 씁쓸한 소리를 한 아름이 입을 검지 손가락으로 툭 쳐서 막는다.
키스를 하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러고보니 테이블에 둘만 남았네."
"언니가 아까 섹스 쎆쓰! 하신 이후로 애들이 안오는 거 같아요."
"그런건 잊어 좀...!"
"둘이 짠 할까요?"
"아름이 잘마셔? 오늘 언니 폼 꽤 좋은데?"
...
"우리 이제 일어날까?"
"네 그러죠. 슬 정리하는 분위기네요 다른 테이블들도."
"우리 새터반 카드로 긁을게, 다들 짐 두고 가는 거 없는지만 잘 확인해."
네~
프락터들의 인솔 하에 기숙사까지 걸어들어가려나보다.
"으으.. 걷는거 싫어..."
"차타고 가셔요. 제가 말해둘게요 나가서 옆으로 한블록 가시면 돼요."
"응? 실장님 오셨어?"
"네, 먼저 가셔요."
여기서 기숙사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려나? 근데 그것도 맨정신일 때의 일이고 지금은 피곤에 술기운까지 겹쳐서 다같이 걷다보면 30분은 훨씬 넘길 것이다.
처음에는 괜히 찡찡거린거지만, 정말로 차가 있으면 당연히 차를 타야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공손하게 새터반 친구들한테 인사를 하고 들뜬 마음으로 옆 블록으로 간다.
"차차차~ 차를 타고 돌아갑시다~"
"정연님, 뒷풀이는 즐거우셨습니까."
"와아~ 실장님! 얼마만이야 이게, 너무 반갑네요 하하하핳!"
"허허.. 많이 드셨나 보네요. 차에 타 계시죠. 서계시면 춥습니다."
"넵! 알곘씁니닷!"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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