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아름다운 밤 (2)
* * *
"후우..."
오늘 벌써 몇번째 씻는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샤워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원래도 시험기간에 공부하다 막히면 자주 물을 틀어놓고 샤워 멍을 때리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아까 구O에 검색해본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정신이 맑아진 효과가 아닐까 싶다.
'정신이 맑아져서 한게 더 변태적인 자위인게 에러였어... 흑...'
또 아까 실장님께서 보낸 카톡을 다시 확인해보니 아름이는 먼저 학교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뒷풀이 시간에는 늦지 않을거라는 말이 같이 적혀있었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니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비싼값에 배웠다.
"언니, 옷은 이걸로 해요."
아름이가 건넨 건 검은 후드티랑 하얀 면바지였다.
이미 아름이가 검은 바지에 햐안 후드티를 입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색을 거꾸로 입히려는 건가보다.
"응..."
'헉...'
완전 새옷인지 가격표가 붙어있어서 툭 뜯으며 숫자를 살짝 봤는데 또 0이 하나 더 붙어있는 줄 알았다.
이런 후드티 하나가 100만원이 넘다니... 여전히 현실감 없는 액수다.
나 따위가 이런걸 입어도 되나 싶지만...
이런걸로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면 아름이 입장에서도 피곤할테니 자연스럽게.
"크흠. 흠. 옷 예쁘다. 고마워 아름아."
'오 완전 이런거 자주 입어본 느낌, 자연스러웠어.!'
"하하. 네, 편하게 입으셔요."
"뒷풀이 장소가 어디었더라?"
"학교 쪽문으로 나가면 어은동 끝쪽에 있는 OO포차래요."
"아하..."
"언니는 자주 가보셨나요?"
"응? 아, 원래 학교 다닐때?"
"네, 그래도 4학년이셨으니까."
"음... OO포차면 오늘처럼 새터반이나 동아리들 회식으로 자주 가는 곳이라서...
나는 보통 혼자 마시니까 그런 분위기는 별로라... 흐으..."
꽤 로는 모자라서 매우 엄청 아주 아싸였던 원래의 내 캠퍼스 생활이 떠올라 급 우울해진다.
"괜히 물어봤네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이야... 그냥 아싸라서 못가봤다는거구만..."
"다른 년놈들이 언니랑 자주 못가봤다는 거잖아요. 헤헤..."
'그게 그렇게 되나?'
좀 의아하지만 대충 정리하고 둘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자, 1반. 3일동안 고생 많았고. 또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다같이 술마시고 해보고 싶었을텐데 새터 기간 내내 참는다고 힘들었던거 잘 참아줘서 고맙고.
오늘은 우리 새터반 활동비 나오니까, 술 안주 걱정하지말고 마음껏 마시자!"
와아~~!!!!
거의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한 우리가 자리에 앉으니, 우리만 오면 전부 모인 것이었는지 남자 프락터인 강진이 간단히 반에 이야기했다.
"또 우리 어제 미궁했던거 1등상으로 양주 한병 받았어! 이거는 2차때 마시자! 다들 억지로 마실 필요 없으니까 본인 페이스대로. 알겠지?"
지아선배는 오늘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보였는데, 어제 1등상으로 받은 양주 때문인가보다.
'지아선배 술 되게 좋아하나보구나...'
"자 자리에 앉고, 그래도 우리 새터 1반 첫 술자린데 건배 한번 하고 시작해야 될 것 같아서."
강진 선배가 진행을 하는 동안 지아 선배는 능숙하게 생맥주 3000CC에서 한 잔 분량을 따른 후 소주 병을 거꾸로 꽂아 소맥을 만들고 있었다.
"각자 앞에 잔들 채우고, 건배사는 우리 임시 반장 정연이가~"
한정연! 한정연!
강진 선배는 나를 가리키더니 박수를 유도했고, 내가 쭈뼛거리며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아름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손을 꼭 잡아준다.
"너무 부담 갖지마요... 언니 화이팅."
저번에는 아름이가 먼저 이런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었었는데, 오늘은 걱정하는 투로 말하는게 좀 이상하다.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장난치던 친구가 진짜로 정색 하니까 그 이후로는 조심조심하는 그런 느낌.
내가 아름이한테 막 심하게 화낸 적은 없을텐데, 모르겠다. 엊그제 쪼금 화내긴 했으니 아름이도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어... 우리반! 이제 대학 처음 와서 만나게 된 동기들인데, 그 3일동안 고생 많았고, 앞으로도 다들 잘지냈으면 좋겠고. 내가 어제 일정은 또 제대로 참가를 못했지만 나 대신에 우리반이..."
에이~~
반장님, 팔 떨어질 것 같아요~~
반 아이들이 너무 지루한 건배사였는지 장난 섞인 야유를 보냈다.
진심으로 욕하려는 게 아닌 걸 아니까 기분이 나쁘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정연아... 짧게, 짧게..!"
옆테이블에 있는 지아 선배와 눈이 마주치자 입모양으로 짧게 해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 건배사는 짧고 굵게 였나...? 으으... 아씨. 이런거 못하는데.'
대충 아무렇게나 뱉기로 한다.
새내기들이니까 K뽕에 뭐라고 얘기하든 웃고 떠들겠지.
"다시 하겠습니다. 1반! 우리 섹시하고 스스럼 없는 1년이 됩시다! 제가 1반! 하면 섹스! 해주세요."
머리가 하얘져서 이럴때는 야한 드립이 잘먹힌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글이 떠올라 무리수를 던진다.
"1반!"
섹스!!
와 우리 반장 최고다!
미친 1반..!!
건배!
아이들은 술집 전체에 울릴 정도로 섹스라는 후창을 해준 뒤 저마다 테이블의 아이들과 잔을 부딪히고 방금의 상황이 웃긴지 금방 웃고 떠들었다.
'호오...'
"정연이 일부러 준비해온거야? 부끄러웠을텐데 분위기 완전 살렸네."
어느새 내 옆자리로 다가온 지아선배가 싱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아... 머리가 하얘져서... 죄송해요. 너무 무리수였죠?"
"아냐아냐, 다들 성인, 아 조기졸업도 있으니까, 아무튼 다들 대학생인데 뭘. 잘했어. 정연이 인싸기질이 아주 반짝반짝 한데?"
과고 다니던 시절 머리가 하얘졌을때 이런 식으로 대충 뱉으면 아주 그냥 갑분싸였는데...
오늘은 꽤 잘먹힌다. 뭐가 다른거지, 대학생이라서?
"언니. 잘하셨어요, 저도 쓰담쓰담..."
아름이도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은 뒤 옆자리를 툭툭 친다.
나름 태연한 척 건배사를 했지만, 부끄러움이 뒤늦게 올라와 얼굴이 빨개지려 했기에 아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아닌척 웃어넘겼다.
"옛날에 이렇게 하면 다들 미친놈처럼 보던데..."
"음... 아. 그때는 변태남이고, 지금은 스스럼 없고 유쾌한 여자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아..."
확실히. 남고생, 남자 공대생이 섹스! 라던가 다른 이상한 개소리를 하면 그대로 또라이지만, 지금은 꽤 미인... 맞겠지? 적당히 반반하게 생겨서 잘 먹히나보다.
"자 한잔씩 했으면 술게임 하자! 못 마시겠으면 안마셔도 괜찮아. 오히려 너무 과음하다가 죽으면 우리 기숙사까지 데리고 가기 힘드니까, 적당히 마시자 제발!"
네~
어림도 없지 진규 술찌 바로 그냥 죽여버리기!
어허... 어디 알쓰가 겸상을 하려고. 형님이 오늘 주도를 가르쳐주마.
형님, 지랄이 심하시옵니다.
대체적으로 남자애들이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나 새내기때도 새터 술자리는 보통 남자애들이 주도했던 것 같긴 하네.
"우리 어제 반 대항 프로그램 할 때 다들 술게임 종류별로 쭉 훑었지? 바로 들어간다! 시작은 지아부터."
"아 왜 나부터야."
"모르겠고, 랜덤게임 랜덤게임~"
'어... 술게임이 뭐가 있더라, 어제 자버려서... 좆 됐다...'
...
♪두부 두부 두부 으쌰으쌰으쌰으쌰~♪
두부 두부 두부으쌰으쌰으쌰으쌰~♪
"(쿵 짝) 두부 다섯 모!"
"(쿵 짝) 두부 네 모!"
'앗, 네 모면 난데,'
"으, 어 두부 세모!"
와아~!
두부는 네모! 네모네모네모!
"아아... 이씨!"
두부 게임은 자기 자리를 3 으로 왼쪽 1 2 오른쪽 45 에게 계속 지목해서 차례를 넘기는 게임, 세 모는 자기 자리기 때문에 걸리게 되는 거였는데...
"하하... 언니 되게 못하시네요..."
옆에서 놀리는 아름이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내 앞의 소맥을 들이킨다.
꿀꺽 꿀꺽 턱!
"크으~!"
오~ 우리 반장 잘마신다~
"아름이 너는 너 차례 되면 꼭 나한테 넘기더라?"
"에이, 기분 탓이겠죠. 푸흐..."
"그보다 왜 이렇게 잘하는거야, 어제 같이 안간거 맞아?"
"대학 오면 꼭 해보고 싶어서 미리 공부했는걸요."
"후우... 너도 대단하다..."
[랜덤 게임~ 랜덤 게임~ 정연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
그렇게 몇 바퀴를 더 돌리고 나서야 술게임은 끝이 났다.
"1반! 더 하면 너무 시끄러우니까, 각자 테이블 별로 마시거나 술게임 하거나 하자. 테이블 별로 계산 안시키니까 적당히 왔다갔다 하면서 마셔도 되고."
네~
"끄윽... 어우, 너무 많이 마셨어..."
"언니 괜찮으셔요?"
"이씨...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마셨는데... 괜찮으셔요? 몰라, 삐졌어."
"하하... 그러면 오늘 밤도 얌전히 잘까요?"
"딸꾹!"
능청스럽게 웃던 아름이에게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수같은 한마디가 날아와 꽂힌다.
"아,아니... 우리 그건 뒷풀이 끝나면 꼭 해주기로 했잖아...!"
"저야 그러고 싶은데~ 언니가~"
"뭐야, 뭐야. 뒷풀이 끝나고 뭐 해?"
갑자기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누군가.
'아씨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구야?'
"정연쓰, 아름쓰, 응?"
"아 예림이구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다리 마사지 해드리려고요. 룸메니까."
"아하... 사이좋네."
예림이는 우리 말에 대답하면서도 건너건너 테이블을 슬쩍슬쩍 엿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 있잖아... 혹시 너희들 진규 어떻게 생각해...?"
"진규?"
"진규요...?"
"응, 저번에 미궁 할 때도 그렇고 아까 조금 얘기해봤는데 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딱 내스타일인거 같아서... 혹시 도와줄 수 있나 싶어서 말이야..."
'아씨 꺼져 씨발년아!! 지금 오늘 밤 섹스가 달려있는데 네년 연애상담이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하고 싶지만 대충 대답하고 돌려보낸다.
...
"아름아..."
"네 언니, 말씀하셔요."
"슬슬 한계치인거 같은데... 우리 일어날까?"
"술 때문에 그런거 맞으셔요? 그것 보다는 이후가 기대돼서 그러신 것 아니고요?"
"아니... 아 몰라..."
아름이는 너무 날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잘 들어주지만, 굳이 항상 한번씩 놀리는게 가끔은 너무하다 싶다.
"그래! 섹스 하고 싶다 섹스! 존나 섹스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됐냐? 응? 섹스! 씨발 쎆쓰!!!"
가끔은 이렇게 강하게 나가줘야 아름이가 나를 안놀려 먹겠지.
술기운이 올라서 그런가 평소에는 잘 못할 말인데 오늘은 술술 나오네. 대단하다 알코올!
그런데 주변이 갑자기 왜이렇게 조용하지?
"..."
......
"아. 씨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