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60화 (60/96)

〈 60화 〉 하은이는 연기중 (1)

* * *

한아름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김기자를 만나러 간 것으로부터 1시간 전,

일정을 모두 마친 정하은과 그녀의 붐메이트 정시현도 공용샤워실에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자신의 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민주랑 지연이 내일봐~!"

"응, 시현쓰, 하은쓰 굿나잇~"

같은 새터반이지만 우리반 층이 나눠지도록 배치된 민주, 지연이에게도 잘자라고 인사를 하고 오늘부터 한학기동안 같은 방을 쓰게 된 하은이랑 우리 방으로 돌아간다.

"많이 피곤하지 하은아?"

"그러게, 내일도 열심히 즐기려면 빨리 자야겠다."

"너는 임시반장도 해서 중간에 뛰어다니고 애들 인솔도 한다고 2배로 힘들었을텐데,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줄게!"

"하하... 그렇게 까지 신경 안써줘도 괜찮아. 그래도 마음은 너무 고맙게 잘받을게."

"응! 도울 일 있으면 꼭 말해줘."

"그래."

정하은.

우리 또래의 이공계 진학을 생각하는 여자애들 중 그녀의 이름을 안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본인이 직접 알아보려 하지 않았어도 부모님께서

'재벌집 딸내미도 경영이 아니라 공학도가 돼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러는데 너는 더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냐.'

하는 말에 잘들 인용하시기에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간에 조금 공백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잦은 미디어 노출로 정확히는 아이돌이나 연기자와 같은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국민딸로 불리는 샐럽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 그녀.

실제로 만나보니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하은이랑 한학기 내내 같은 방을 쓰다니!

아, 재벌이라서 기숙사 등록만 해두고 쓰지는 않으려나...?'

"하은아...?"

"응? 왜?"

"새터 끝나도 기숙사 계속 쓸거야?

등록만 하고 안쓰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그냥 궁금해서... 미안 실례일까?"

"아냐 룸메끼리 궁금할 수도 있지 뭘.

그리고 아마 이번학기 동안은 계속 쓸 거 같은데?"

"아 진짜...?"

"응. 뭐 굳이 안쓸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기숙사에 없으면 너는 매일 혼자 자야되잖아."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답해주며 내 볼을 가볍게 꼬집어 당겼다.

솔직히 어릴 때 그녀의 이름을 처음 알게됐던 나는 그녀가 비호감으로 느껴졌다. 정확히는 질투에 가까웠겠지만,

나보다 모든 면에서 이미 이겼으면서 앞으로 공부까지 열심히 하겠다는 그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졌었는데...

그러다 고등학교 때 같은 입시시기를 준비하는 학생으로 그녀를 다시 보니 이전의 질투는 물에 설탕을 풀어놓은 듯 녹아 없어졌다.

감히 질투를 한 대상이 아니라 느껴질 정도로, 대단함과 경외감 까지 느껴지는 부류의 사람이 정하은이라는 학생이었다.

'나 때문에 계속 같이 있어준대...!'

그런 그녀가 혼자 있을 내 걱정에 같이 방을 써준다는 말만으로도 고마운데 방금의 행동은 또 뭐란 말인가.

같은 여자일텐데도 설렐뻔 했다.

그녀는 생얼도 엄청 착하게 예쁜데다 키도 크고 비율이 좋아서 멋진 언니같은 느낌을 자꾸 준다.

"고마워..."

하은이에 대한 딴생각을 하다가 고맙다고 답하면서 보니 복도 끝 우리방에 도착해있었다.

철컹.

방 문을 닫고 들어와 가져갔던 샤워도구들과 갈아입은 옷을 정리해서 집어넣는다.

"후..."

하은이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하은이도 많이 피곤했던걸까.

"기숙사는 인테리어도 딱딱하지만 방 문들이 다 두꺼운 철문이라서 방이 아니라 어디 격리된 것 같은 느낌이야. 넌 안그래 하은아?"

"음... 그럴지도."

아까보다 다정함이 덜 묻어나오는 것도 같지만 하은이도 많이 피곤해서 그렇겠지.

'하은이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처음에는 동경하던 사람이라도 사는 세계가 워낙 다르니까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먼저 말도 걸어주고 새터 처음에 반별 장기자랑 하는 것도 반 아이들이 힘들어하니까 먼저 나가줬다.

옷도 그 1반 대표였나 걔처럼 명품으로 떡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무난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수수함까지.

털털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하은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 새터반엔 없을 것이다.

"하은아 너는 연애해본 적 있어?"

질문이 내 입을 떠난 뒤 아차 싶은 말이었다.

하은이의 연애경험이면 언급 한마디 한마디에 이런저런 말이 많이 돌텐데.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하은이는 거의 바로 대답해주었다.

"아니, 시현이 너는?"

"나도... 그, 그럼 사랑은 해봤어...?"

그만둬야 했지만 쉽게 답해주는 하은이에게 한번 더 물어보고 싶었다.

"사랑은 해봤지. 중학생때?"

"호오..."

하은이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있구나.

저정도로 인싸면 사실 받기도 많이 받았겠..

"너 나랑 친해지고 싶어?"

적당히 부드럽던 방의 공기를 깨뜨리며 뾰족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질문.

"어? 그, 어.. 친해지고 싶은 건 맞는데.. 뭐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또 친해지려고 억지로 뭘 하려는 건 아니.."

"정시현."

성을 붙여 나를 부르는 그녀의 바뀐 분위기에 소름돋는 느낌이 든다.

"아버지는 S 자동차 다니시고, 어머니는 S 카드에 계시네? 동생은 우리 고등학교 1학년..."

그녀는 우리 가족에 대한 정보를 쭉 불러주었다.

부모님 두분 모두 S 그룹 회사에 다니시고 동생까지 이번에 S그룹에서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사립고에 합격하면서 S그룹 가족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했었는데 그녀가 이를 알고 있다니.

"제일 부담없는 장난감으로 골라달라고 했는데, 이런게 걸리네. 나도 참 운이 좋나봐."

'장난감...?'

좀전에 복도를 걸어오며 보았던 다정한 하은이랑은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려한다.

하은이는 자기 책상 앞 의자에 다리를 꼰채 앉아 태블릿과 나를 번갈아보며 웃고 있지만 나는 가짜로라도 입고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 시현이는 K공대 들어올 정도면 똑똑하니까 내가 시현이한테 서운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굳이 설명 안해줘도 괜찮지?"

"..."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일 그 이상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로 들려 머리가 생각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온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식은땀을 흐르게 두며 바싹 말라가는 입 안의 침을 삼키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답."

"예, 자, 잘 아,압니다..."

그녀는 떨면서 대답하는 내가 우스운지 피식 웃고는 그녀 옆 자신의 침대를 가리키며 내게 눈짓한다.

'자기 옆에 앉아라는 거겠지?'

약간 우물쭈물했지만 그녀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싶지 않아 빨리 그녀 옆에 앉는다.

"옳지. 착하다 우리 시현이."

훈련을 잘 따라한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였지만 나는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몸의 근육 하나도 마음편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현아, 왜이렇게 굳었어. 아까처럼 하은아~ 해도 되는데.

내가 가족 이야기해서 겁먹은거야?

에이,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그리고 시대가 어느 시댄데.

내가 기분 좀 나쁘다고 막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잘 생각해봐.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기분 좋으면 또 성과급이니 인사고과니, 발령이니 하는걸로 시현이네가 행복해질 수도 있잖아."

딱딱한 분위기에서 또 결이 바뀐 그녀.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는 그녀에게서 음흉하고 검은 무언가가 새어나오는 것만 같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름돋는다.

"아까 시현이가 긴장해서 제대로 못알아들었는데, 시현이도 나랑 친해지고 싶다며?

나도 시현이랑 너~무 친해지고 싶은데..."

웃음기를 계속 머금은채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은 우정 따위를 말하는 눈이 아니었다.

노예를 보는 주인 같은, 애완동물을 바라보는 주인 같은 눈.

아까부터 올라오는 그녀의 끈적한 눈빛이 자꾸 나를 좀먹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문쪽으로 뛰어간다.

철컥철컥. 철컥철컥.

분명 안에서 잠그는 형태의 문인데,

방 내부에서 잠금장치를 건드린 기억이 없는데도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철문.

무의식 적으로 해버린 최후의 저항이 너무나 쉽게 가로막힌 나는 차마 뒤돌아서 정하은을 다시 바라볼 용기가 없었기에 그대로 주저않아 눈물을 흘렸다.

"어머, 시현아. 나는 친해지고 싶다고만 했는데 도망치려고 한 거야?

아까는 친해지고 싶다고 그랬잖아.

나만 시현이랑 친구인 줄 알았네...?

시현이는 나를 친구로 안보고 있었는데 그치?"

등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뒤돌아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친구가 아니니까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겠다. 맞지...?

내가 머리가 좋아서 고마운 것도 안 잊지만, 서운한건 진짜 절대 안잊거든.

특히 무슨 일이 있어도 되갚아주는 건 내 진심을 안받아준 부류.

나는 너무~ 좋아하는데 자기는 내가 필요없다면서 거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사람은 진짜 도저히 못참겠더라."

한참을 이야기한 그녀가 철문 앞에 주저앉아있는 내 곁에 다가온다.

내 고개를 억지로 돌리거나 하지 않은 채로 부드럽게 볼과 턱을 어루만지는 정하은.

"시현아."

"..."

"대답."

"네..."

"내가 사과를 받아야 되겠는데 시현이 너한테 받으면 될까, 너 말고 나머지 가족 셋한테 받아야할까?"

"..."

머리가 하얘져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그녀에게 사과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어떻게 사과해야 그녀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릴지에 대해서.

내가 마음이 편해져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면 다음 날 가족 넷이 다같이 길거리에 나앉게 만드는 것도 망상이 아닌 것이 그녀와 나의 위치였다.

문 바로 앞은 신발을 벗는 공간이었기에 옆에 오늘 신었던 신발들과 먼지가 가득했지만 그녀의 앞에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엎드린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주제를 모르고 선을 넘었습니다. 뭐든 할테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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