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아름이는 열일중
* * *
캠퍼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건물, 꽤 규모가 있음에도 간판도, 입점업체도 없는 건물 지하로 아름과 김실장이 내려간다.
"오랜만에 다시 여기를 와보네요."
"..."
지하의 복도를 지나 두꺼운 철문을 밀어연다.
창문하나 없는 새하얀 방, 정훈이 처음 잡혀왔을 때 묶여있던 위치에 초췌해진 남성이 정신을 잃은채로 앉아있었다.
"깨워요."
아름의 말 한마디에 방 옆에 일렬로 서있던 검은 양복의 남성중 한명이 묶여있는 남자를 흔들어 깨운다.
"읍..! 읍읍..!"
눈을 뜨고 아름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그녀를 응시하며 뱉어내는 말들은 입에 물려진 천에 막혀 닿지 않았다.
"입에 저것도 치워주시고요."
"흐아... 아이고 턱이야. 너 한아름이지? H 그룹 부회장 딸.
이야~ 너에 대한건 어찌된게 기사를 한트럭을 써도 편집부가 꿈쩍도 안하더라?"
"그만."
그녀의 지시에 경호팀이 남성의 목을 쳐 발언을 강제로 끊어낸다.
"실장님, 저 인간 뭐하던건지 제가 직접 보게 자료만 주시고, 저 뒤에 데리고 가서 예절교육 좀 시켜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김실장과 경호팀 인원들이 버둥거리는 남성을 끌고 방 뒤의 공간으로 넘어간 동안 태블릿으로 자료를 확인한다.
"메이저 언론사 기자가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셨을까요..."
김병현, OO일보 기자.
저녁 식사 시간에 선배의 반응이 마음에 걸려 선배의 휴대폰 로그를 내 폰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알아보니 기분나쁜 기사를 보고 그랬던 것 같다.
대부분의 기사는 정하은이 포함되어서인지 우호적인 편이었고, 작은 찌라시 같은 인터넷 언론들만 이상한 소리를 써놓으면 내리도록 하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해당 기사에 있었던 기숙사 앞 사진. 통상적으로 행사 이후에 기자들이 대전의 캠퍼스에서까지 오래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 다들 돌아갔을텐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시를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진의 출처와 인터넷 기사의 소스제공자에 해당되는 김기자를 인근 모텔에서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작은 오라버니께서 하시는 것 처럼 그냥 담그면 되려나요..."
그가 조사하던 파일들을 보니 그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최근 이 건물 소유주가 바뀐 점, 매년 K 공대에 일정 수 이상의 입학생을 배출하던 내가 나온 영재고에서 올해는 1명만 K 공대에 진학한 점 등을 엮어 나에 대한 의혹들을 보도하려고 기획중이었던 것 같다.
"가끔 목숨 소중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리 아둥바둥 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료를 거의 다 확인할 즈음, 물에 젖어 헐떡이는 그가 경호팀에 붙들린 채로 끌려온다.
"끄윽.. 헉.. 크헉... 억..."
"고생하셨어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김기자가 조금은 진정할 수 있을 시간을 준다.
"이제 대화를 할 눈높이가 맞춰졌나요?"
"허억... 허업.. 흐억..."
"이 새끼가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데..!"
손이 먼저 나가려는 경호팀을 뒤로 물리고 어차피 그를 묶어놓았으니 다시 연락할 때 까지 김실장을 포함, 모두 나가있도록 했다.
"우리 시간 많아요~ 말씀하시고 싶어지면 그때 때 하시죠."
"...왜 이러는 거야..."
물과 충분히 친해질 시간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반말하는 그가 기분나빴지만 엄청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두기로 한다.
"본인이 더 잘 아실거 같은데요? 저한테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저는 이런 아저씨는 별론데..."
"너네 뒷조사 좀 했다고 잡아온거야? H 그룹 정도 되면 나같은 놈 한둘이 아닐텐데 그럴때마다 다 잡아서 고문하나?"
"에이, 의혹 좀 만들때마다 잡아오면 너무 잡아올 사람이 많잖아요. 사람들 적당히 씹을거리도 필요하고.
선만 안넘으면 터치 잘 안하는데 저희?
평소에 기름칠도 얼마나 하는데요. OO일보 이번에 성과급 올랐죠? 그거 다 저희 광고로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먹고사는거에요."
우습다. 이 상황에서도 허세가 안빠지는 건지 본인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자꾸 맞먹으려 하는게 가당찮다는 느낌을 넘어 우습게 느껴진다.
"자꾸 모른척 하시니까 제가 답을 알려드릴게요.
메이저 언론 기자라는 분이 몰래 대학생 사진이나 찍고, 커뮤니티 글이나 베껴가지고 기사 소스로 던져주고.
직접 쓰기엔 쪽팔린거 아시는지 아는 사람한테 돌려서 대신 올렸네요.
숨만 쉬셔도 저희같은 사람들한테서 콩고물 떨어지는걸로 가늘고 길게 사실만한 분이 왜 사서 제 심기를 건드리셨을까요."
정연 선배에 대한 내용을 다뤘기에 여기 이자리에서 보게 된 것이지만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인간에게 말해줄 의무는 없었기에 본인이 왜 죽는지 정도만 알려주기로 한다.
"응? 그게 다야?
K공대 금수저 학교라고 욕먹은게 그렇게 억울할 일인가?
그 새터 소개 마지막에 춤춘 애는 좀 발랑까진 것 같긴 하던데 내가 아름씨 내용으로 쓴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사진은 아름씨 꺼를 쓰긴 했는데, 그건 그 여자애도 옆에 있길래 그냥 한거고~
나같은 기레기가 아름씨 기사 써봤자 편집부가 끄떡도 안해~
오히려 나 죽이면 피곤해진다?
한번만 살려주라~
아니, 살려주십쇼 아름씨."
능글거리며 대답하는 그의 말 중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말이 있어 귀를 의심했다.
'개미새끼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선배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하찮은 사회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부품따위가 내 전부와도 같은 선배를, 정연 언니를 욕하다니.
단순히 선배 기분을 좆같게 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죄였기에 이 곳에 잡아온 순간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하며 지하로 내려왔는데 상상 그 이상의 경험을 시켜주는 그에게 어떻게 내 대답을 들려줘야 할 지 모르겠다.
화를 참아내기 힘들어 조금씩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옆 방에 있을 김실장에게 전화를 건다.
"실장님..."
네 아가씨.
"경호팀들 다 보내고 실장님만 들어와주세요..."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
몇분 뒤 김실장이 물이 담긴 크리스탈 잔과 함께 흰 방으로 들어온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인지 잘 모릅니다만 물이라도 한잔 드시고..."
쨍그랑!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로 아파오게 화가 나 내게 물을 건네는 김실장의 손을 뿌리친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 잔은 바닥에 닿은 부분부터 그대로 깨지며 조각을 퍼트린다.
"...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가씨, 어디 안다치셨습니까."
"...네 괜찮아요."
머리를 옆으로 넘겨 정리하며 김기자를 어떻게 할 지 고민한다.
본인이 살 것이라 확신하는지 능청스러운 웃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보이는 그.
김실장에게 다가가 셔츠 안주머니의 잭나이프를 꺼낸다.
"아, 아가씨 그건 갑자기 왜.. 위험합니다."
말리려는 그를 뿌리치고 날을 세워 김기자 옆에 선다.
"왜? 또 협박하려고 아가씨?"
슥
그의 오른팔 팔꿈치 조금 위를 칼로 긋는다.
"아악!! 아프잖아...!"
묶인채로 소리지르는 그를 무시한 채 왼팔과 양쪽 허벅지도 한번씩 칼로 그은 후 다시 날을 넣어 김실장에게 돌려준다.
"실장님."
"네 아가씨."
"원래 죽일려고 헀는데 저 인간이 자꾸 살려달라고 그래서 소원대로 해주려고 해요."
"..."
"팔다리에 표시해놨으니까 저기까지 자르고 살려만 놓은 상태로 제발 죽여달라고 그러면 저 불러주세요.
조금만 쉬고 있을게요."
"... 네 그렇게 해두겠습니다 아가씨."
"아니 그게 무슨 소리 읍.! 읍..!!"
김실장이 몸부림 치는 그의 얼굴을 꽉 쥔 채로 다시 벽 뒤의 공간으로 끌고간다.
그가 간 뒤 벽이 다시 닫힌 걸 확인하고 흰 방 옆에있는 침실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한달 전 선배와 일주일을 보냈던 침실.
혼자 이곳에 있는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으면 옅은 선배의 향이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선배는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그걸 방해하는 년놈들은 제가 다 치워드릴테니까...
제 모든걸 바쳐서라도 선배를 슬프게 만든 것들은 그 죗값을 치르게 만들테니까...
안 본지 몇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보고싶네요 선배...
내일 선배가 깨기전에 돌아갈테니 꿈에서라도 저를 잔뜩 안고계셔요..."
선배가 오늘 밤부터 못참겠다고 조르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을 했었지만 피곤해하는 선배의 모습에 빨리 재워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그 덕분에 별다른 핑계없이 지금 나와있을 수 있는 거기도 하지만...
곤히 잠든 귀여운 선배를 떠올리며 실장님이 돌아올 때 까지 잠시만 눈을 붙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