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미궁탈출 (2)
* * *
"언니! 정수기 앞이 맞던가요?"
"어. 새프디가 있더라고. 또. 아 아니야. 자 카드."
굳이 아까의 일을 말해서 내게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기에 제일 앞 내자리로 돌아와서 강진, 아름과 함께 카드 내용이나 확인하기로 했다.
"이게 1번 문제에 넣으면 되는 암호인가봐. 강진선배. 여기요."
강진에게 카드를 건네자 강진은 미궁 웹사이트에 그대로 입력했고, 화면은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갔다.
...
당신은 작게 메모해둔 글귀가 의미하는 바를 눈치채고 암호를 알아냈다.
암호를 입력한 후 접속한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워드 파일 하나가 있었다.
당신이 열어본 워드파일은 특별할 것 없는 일기처럼 보였지만 끝까지 읽고난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일기의 주인은 1년 먼저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여 K공대에 입학했던 당신의 고등학교 친구인 현수의 것이었다.
작년 가을학기의 어느날 작성된 일기.
하지만 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의 친구였던 현수는 작년 봄에 실종되었던 인물이었기에.
[2번 문제]
...
실종된 줄 알았던 친구가 써놓은 일기라니.
뭔가 클래식한 느낌이지만 별로 불편할만한 것도 없는 설정인 것 같다.
사실 시나리오 보다는 내 옆에 앉아서 열정을 불태우는 아름이가 귀여워 그녀를 바라보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었다.
'앗 눈마주쳤다.'
"언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이런걸 좋아하면서 옆에서 보고있는 나를 의식하면 또 부끄러워하는 그 미묘한 중간온도가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게 한다는걸 그 똑똑한 아름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요소까지 고려한 어필일 수도 있겠지만.
"아름이는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
어차피 내 앞에서 문제를 읽어주고 있는 강진을 제외하면 다들 강의실 중앙쪽에 앉아있었기에 제일 왼쪽 앞인 우리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약간의 애정표현을 한다고 이상하게 보거나 꼽을 줄만한 사람은 없겠지.
"갑자기 왜그러시나요 언니."
"흐으~ 아름이는 아름이가 이렇게 매력적인 거 알아? 언니 앞이라서 일부러 그러는거야?"
"좋긴 해도 이해를 잘 못하겠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를 살짝 내쪽으로 당겨 안고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아앗.. 왜이러시나요 진짜."
길가에서 너무 예쁜 강아지가 있으면 쓰다듬어도 되냐고 주인한테 물어보고 싶게 되듯, 뭔가 말랑말랑한 마음이 자꾸 솟아났다.
"...그만..."
'헉..!'
아름이를 귀여워하다 싸늘한 목소리가 돌아왔기에 제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풀어준다.
"무슨 일 있었죠 또? 왜이러시는데요?"
"아냐... 그냥... 미안..."
아름이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까 정하은을 만나서 괜히 아름이한테 오버해버렸나?'
그걸 의식하고 하지는 않았지만 아까 솟아나던 말랑말랑한 마음에 내가 아름이를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내게 아름이밖에 없다는 것을 좀 보여줘야 된다는 생각이 있기는 했다.
괜히 오버해버렸네.
약간 머쓱해져서 그냥 문제나 보기로 한다.
...
언젠가 이 일기를 읽을 누군가에게.
아마 이 일기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읽고 있다면 나는 K 공대 캠퍼스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 일기를 읽고있는 사람이 내 친구 OO이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늘의 일과를 간단히 남긴다.
지금 내 모양은 어떤가.
오늘 아침 세종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나니 생기를 잃은 내 꼴이 퍽이나 우습다.
아침마다 교통 근로를 해야됐기에 정문까지 자전거를 타고갔다.
정문에서 캠퍼스로 들어오는 차들의 교통안내를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 9시 첫 강의를 들어야 할 시간이 된다.
이번학기 소재과 강의를 들어보기로 한 나는 소재열역학의 응용을 수강신청하여 듣고 있는데, 9시 강의인 부분만 뺴면 상당히 괜찮다.
아 문제가 하나 더 있구나.
응공동에서 강의를 듣고나서 영어를 바로 10시 반에 들어야 했기에 N4까지 15분만에 가야한다.
이것 때문에 자전거를 샀는데, 익숙해지면 그리 빡세진 않네.
영어가 끝나면 12시쯤 되니 다른 학생들처럼 K마루에서 밥을 먹었다.
학식이 편해서 자주 먹게 되는 듯 하다.
오후 2시에 파팔라도에서 건강검진을 예약해뒀기 때문에 사이 시간이 텅 비어 동기 한명이랑 노천극장 옆 코노에 들렀다.
학교 안에 코노가 있다는 점은 참 좋은 것 같다.
파팔라도에서 건강검진 내차례를 기다리며 이 일기를 쓴다.
내 삶은 어떤가.
내 꼴이 어떤가 네가 옆에 있다면 묻고싶다.
...
"길기도 하네."
암호화된 질문과 답 단 두줄로 이루어졌던 1번문제와 달리 2번은 꽤 긴 일기형태의 문제였다.
"강진선배, 이건 답 타입이 뭐에요?"
"음.. 바로 입력하면 되는 거긴 한데 I cannot tell you the answer type 라고 되어있네."
"뭘까..."
답이 딱 나오는 형태라는 건데...문제가 정확히 뭐지?
일기 마지막에 나오는 내 꼴이 어떤가 저건가?
강진선배, 저 알겠어요.
뒤에서 남자애 하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어, 진규야 설명해줄래?"
"네, 일기를 보니까, 세종관에 사는데 8시부터 교통근로, 9시부터 소재열역학, 10시반에는 인사동에서 영어, 2시에는 파팔이잖아요?"
"그렇지?"
"답은 빡셈 아닐까요? 영어로 답안 타입을 못가르쳐준다고 했으니까 Hard? mean? tight?"
"흠..."
강진은 일단은 그렇게 답안 칸에 입력해보지만 역시 정답일리 만무했다.
"아닌 것 같네. 다른 게 또 생각나면 말해줘 진규야."
"네."
그는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간다.
와 저거 진짜 하네 미친새끼.
쟤 완전 또라이라니까 ㅋㅋ.
진규 직감 지렸다 레알
그도 별로 엄청 진지하게 고민해서 말한 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반별프로그램이 다같이 답만을 추구해야하는 시험도 아니고, 반별로 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일텐데 저런 부분도 이 프로그램의 순기능 안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2번 문제의 답이 저런식으로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갈 수 있는 표현이 아닐 것 같다.
20개가 넘는 반이 다 같은 사이트에서 같은 문제를 푸는 형태인데 누구는 빡세다고 하고 누구는 할만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접근보다는 객관적인...
음...
저 편지 작성자의 삶이 어떤지 써야되는 것 같긴 한데...
"아름아 혹시 알겠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또 뭔가를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슬쩍 물어본다.
"모르겠어요. 저 문장들만 가지고 뭔가 하나의 답으로 깔끔하게 도달하는게 없는것 같은데..."
아름이도 이번엔 잘 모르겠나보다.
'힌트가 어딘가에 있을거란 말이지...'
1번 문제도 딸랑 그것만 주고 풀기에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키보드 자판으로 암호를 입력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1번에 배치된 것도 있을테고.
건물별 특징을 적용한다 하기에는 이 문제를 푸는 대부분은 이제 K 공대에 온 새내기들인데...
프락터들만 풀 수 있도록 문제를 만들었을 리도 없고.
일기... 일기가 키워드인가?
아니면 실종?
분명히 우리에게 이미 문제를 풀 수 있는 키를 줬다고 판단되니까 이렇게 앞부분에 배치된 문제로 내부 검토가 끝난 것일텐데...
'아.. 너무 빡대가리라서 하나도 모르겠다...'
내 꼴...
내 삶...
'문제 낸 사람들 갑자기 새벽감성 돋았나 왜저렇게 철학적인 느낌이야.'
문제를 다시 천천히 읽어본다.
교통근로를 정문에서도 하던가?
보통 자전거 정리나 행사 있을때는 도서관 쪽에서 많이 했는데,
세종관도 근데 새내기가 쓰는 건물은 아니잖아?
새내기 남학생이면 소망관이나 사랑관에...
뭔가 찝찝한 느낌.
문제 속 인물의 활동에 뭔가 앞뒤가 조금 안맞는 위화감이 든다.
'근데 이런건 내가 학교를 3년 다녔으니까 아는 정보잖아.'
이 위화감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키로 연결될 리는 없다.
다시 마음을 새내기라고 생각해본다.
'내가 새내기라면, 내가 오늘 처음 K 공대에 왔다면...'
지난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새하얀 도화지에 새롭게 정보가 들어갔다면 이 문제가 어떻게 보일지 다시 고민한다.
대전이란 곳에 처음 와서, 아침에 대강당.
오티를 듣고 새프디들 안내도 받고.
각 반별로 한명씩 무대 위에서 장기자랑도 하고.
처음 만난 동기들이랑 점심식사 후에 지금 강의실에 앉아있는 거잖아.
그런데 이걸 어떻게 푸는거지?
대강당 갔다가. 점심.
아?
강진선배, 이번엔 진짜로 알겠어요!
뭔가 감이 올듯한 타이밍에 뒤에서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소리친다.
"오 진규 또 새로운 접근이야?"
"아 믿어주십쇼, 이번엔 거의 확실합니다."
진규는 화이트 보드 앞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풀이를 설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