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본격적인 새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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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이랑 밥도 다 먹었고 시간도 남아서 걷다가 들어가기로 하는데 또 익숙한 실루엣이 매점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내 눈에 걸린다.
"아름아, 지금 저기 김실장님 아니야?"
"어디 말씀하신건가요 언니?"
"지금 매점에서 담배 계산하시는 분."
"어, 진짜네요. 김실장님이셔요."
검은 정장 수트와 김실장님 특유의 피지컬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보고 손 흔드시는데? 머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이쪽으로 오신다."
"앗, 우리 점심 때문에..."
"아가씨~! 정연님!"
실장님께서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건지 우리를 알아보고는 다급하게 뛰어오셨다.
"아이고, 아가씨 왜 이런걸 드시려고 하십니까, 어쩐지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실건지 여쭤봐도 답을 안주시더니, 또 컵라면 드시려고 하신겁니까.!"
'아... 아름이가 이런거 먹는거 실장님한테는 비밀이었구나...'
"아니 그게... 언니가 먹자고 그래서... 저는 요즘 잘 안먹었잖아요..."
나를 팔다니.
실제로 내가 먹자고 했던 메뉴가 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가 근처에 괜찮은 곳 대관이라도 해보겠습니다. 드시지 마시고... 아..."
놀라서 속사포처럼 말씀하시던 김실장님은 이미 국물까지 깨끗하게 먹은 컵라면 용기 안을 이제야 확인하시고 새하얗게 질려버리셨다.
"이미... 드신거군요..."
다 틀렸다는 듯이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 실장님은 공허한 눈으로 내 옆에 앉으셨다.
"새터 첫날부터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우시도록 케어를 못해드렸네요..."
"실장님, 언니가 먹자고 한거지만 거기에 넘어간 저도 잘못했어요..."
"오늘은 못봐드립니다. 저도 저지만, 아가씨께서 또 제대로 식사를 안하시고 인스턴트로 때우셨다고 부회장님이랑 도련님께도 말씀드릴겁니다."
실장님은 아름이한테 완전히 복종하는 로봇같은 느낌이신 줄 알았는데, 오늘은 깐깐하게 아름이를 몰아붙이셨다.
'실장님 엄하시네.'
"오라버니들이랑 아버님꼐 말씀드릴 것 까지는 없잖아요~! 그냥 한번만 봐주시면 안되셔요 실장님?"
"이번에 봐드리면 또 다음에 저 안볼때 이러실 거 아닙니까.
셰프님도 대전까지 모셔왔고, 말씀만 하시면 제가 바로 가게 전체를 빌려서 따로 식사하실 수 있게 준비할텐데 왜 컵라면을 드시는겁니까."
"우웅...."
아름이가 내게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말하는듯한 눈빛을 계속 보내왔지만 내가 끼어들 수 있는 판이 아닌 것 같아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본다.
'미안 아름아, 실장님은 나도 좀...'
"중학생이실때 제가 봐드린게 몇번인데, 그때마다 성인 되시면 컵라면 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오늘 정기보고할 때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름이의 완패인 것 같은 느낌으로 대화가 끝이 났다.
조금은 봐주실 만 한데도 아름이가 먹는 음식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으셨다.
"으... 아! 담배! 실장님 담배 다시 피신다고 아저씨한테 말씀드릴거에요!"
뒤돌아서서 나가시던 실장님께서 움찔하시며 다시 이쪽을 뒤돌아보신다.
"아가씨, 제, 제가 언제 그, 담배를 폈습니까?"
"방금 여기 매점에서 사시는 거 봤어요! 제가 담배연기 싫다고 한 뒤로 끊겠다고 말씀하셔놓고, 다시 피시려는 거잖아요. 아저씨한테 저도 다 일러바칠 거에요."
"아,아니...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 까지야..."
"실장님도 아버님이랑 오라버니들께 말씀드린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전혀 나서지 않고 이 대화를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살짝 바뀌고 있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대학 첫 새터를 들어가셨다고 하니까. 왠지 좀 가슴이 먹먹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 일단 사기만 한 거 아닙니까, 인스턴트 못드시게 하는 거는 또 아가씨께서 잘 자라셨으면 하는 마음에..."
"언니, 들으셨죠! 실장님께서 제가 컵라면 좀 먹었다고 잘못 자랐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흑... 흐흑..."
아름이는 갑자기 울먹이면서 내 옆자리로 와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흡..! 언니, 저는 잘못 자란 아인가요?
세상에 쓸모없는 사회부적응자인가요?
언니랑 실장님은 항상 제편인줄 알았는데, 실장님이 저렇게 말씀하시고.. 흑..."
'조금 억지스러운 것 같은데...'
급발진을 하는 아름이를 일단은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준다.
"또 왜그러십니까 아가씨~"
실장님은 무척 당황하셔서 선채로 안절부절하고 계셨다.
'확실히 아름이한테 약하시긴 하시구나.'
"죄송합니다. 그 도련님들이랑 부회장님께도 말씀 안드릴테니 진정하십쇼 아가씨..."
아까의 엄한 실장님은 어디가시고 풀죽은 곰같이 느껴지는 지금의 실장님은 안쓰러워보이기까지 했다.
"진짜죠..?"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화 푸십쇼 아가씨."
"언니 들으셨죠?"
"어, 응..."
"헤헤... 그럼 됐어요. 고마워요 실장님, 언니."
내 품에서 울먹이던 아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발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옆으로 끌어안는다.
실장님은 또 당했다는 표정이셨지만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발걸음을 돌리셨다.
"실장님 너무 괴롭히는거 아니야 아름아?"
"그치만... 실장님이 먼저 아버님이랑 오라버니들로 협박했다구요..."
"그래도 너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이잖아..."
"괜찮아요. 실장님도 결국 제가 누구 말대로 하는 사람 아니라는 걸 아시니까."
실장님도 고생이 참 많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이거 치우지 말고 잠깐만 있어. 내가 갔다와서 치울게."
"제가 해도 괜찮아요. 천천히 다녀오셔요."
아름이에게 그렇게 말해두고 화장실을 가는 척 옆쪽 문으로 실장님을 따라나간다.
매점 뒤쪽 흡연부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놀라시는 실장님.
"앗, 정연님! 그, 이건..."
"네 아름이한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그래도 너무 많이 피우진 마시고요."
"하하... 예."
"고생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고생이라고는 생각 안합니다."
"그래도 죄송해요. 제가 아름이가 그런거 안먹어봤을 줄 알고 한번쯤 먹어보자고 꼬드겨서."
"아가씨께서 드신건데 정연님께서 사과하실게 뭐 있습니까."
실장님께서는 입에 무셨던 담배를 일단 버리고 내게 말씀하신다.
"정연님, 이번에 파드린 계좌는 아가씨께 설명 들으셨죠?"
"네.. 그 아름이가 용돈처럼 매달 들어올거라고..."
"예 그건 정연님 쓰시고 싶은 용도로 따로 쓰시고... 이건 제가 따로..."
실장님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와 건네지는 검은색 카드.
"이건 저희 회사 카드인데, 이걸로 긁으시면 저희팀에서 알아서 적당한 명목으로 전표 쳐서 비용처리 해드릴겁니다. 아가씨 비서실 쪽으로 잡혀있는 예산도 많고, 적당히 판관비로 묶어서 처리해도 되니까요."
"네... 근데 이걸 왜...?"
"아가씨께 필요한 거 없으신가 여쭤봐도 정연님 관련된 거 아니면 요즘 별로 원하시는 게 없으셔서... 정연님께서 아가씨께 필요해 보이는 거나 두분 지내시면서 쓰실 일 있으시면 이걸로 좀 챙겨주실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아..."
"그걸로 빌딩이라도 사지 않는 이상, 세단도 아마 긁어질 겁니다.
제발... 진짜 제발 아가씨 컵라면 다시 안드시게 해주시고, 뭐 필요없다고 하셔도 꼭 좀 잘 챙겨주시고... 제가 비밀번호랑 관련 정보는 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상사나 보스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말괄량이 딸을 둔 아빠같다는 생각이 드는 실장님이셨다.
"네, 제가 옆에서 잘 챙길게요."
"감사합니다 정연님."
"저도 좋아서 할건데요 뭘."
"그래도 감사합니다. 업무처리 때문에 잠깐 사무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십쇼."
"네 다녀오세요."
걱정기 가득하던 실장님 얼굴이 마지막엔 그래도 조금은 미소를 띠신 상태로 끝났다.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너무 오래 이야기를 나눴네.'
아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서둘러 돌아갔다.
...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아름이랑 적당히 느긋하게 걸어오니 딱 1시가 되었다.
"스물 둘, 스물 셋, 스물 넷... 정연이 이제 왔고... 지아 있고...
오케이, 다 온것 같네.
1반! 아까 말했듯이 오후 프로그램은 K공대 새내기 미궁이래.
새프디가 만든 웹페이지에 답을 입력하고 중간에 나가서 뭐 하는 것도 있다는데, 우리 집단지성으로 빠르게 깨보자."
"이거 빨리 깨면 새터 끝날 때 상 준대!"
오~!!
임시반장이라고 제일 앞 왼쪽 화이트 보드 옆에 앉아서 오후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옆에 앉은 아름이도 눈에 열정이 타오르는 듯, 기대 가득한 표정이다.
'우리때는 이런거 안했던 것 같은데, 재밌겠다.'
"1시네, 들어간다~"
컴퓨터 시게가 1시가 되는 순간, 새터 첫 반별 협동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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