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본격적인 새터 (1)
* * *
'아아...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새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됐건만, 이미 심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또 사실 신입생들한테 자기소개를 시켜봤자 톡톡 튀는 몇명 말고는 다 비슷하게 대충대충 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 고등학교는 어디고 지금 생각하는 과는 어디고 취미 정도.
딱 정형화된걸 쭉 돌아가면서 시키는데 그게 재미있을리가.
근데 다른 애들은 별로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지 한명한명 소개가 끝날 때마다 고텐션으로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역시 젊은 애들은 달라.'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보니 어느덧 내 차례였다.
비교적 많은 아이들쪽을 볼 수 있도록 서서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오오~
확실히 아까 대강당에서 했던 일이 영향이 있긴 한가보다.
'안녕하세요' 만 했는데 벌써 반 아이들의 반응이 뜨겁다.
"저는 한정연이고, 학과는 딱히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
취미는 음... 밖에 나가는걸 별로 안좋아해서 방에서 할 수 있는거, 책 읽는거나 게임 좋아합니다. "
애들은 별로 안믿는 눈치지만 진짜인데 어떡해.
처음에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아름이 말고는 적당히 친한 몇명만 있으면 되는거지 원래의 나랑 완전히 다른 포지션의 인물이 되고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사람이 안하던 행동을 한번에 많이 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그래도 다들 빨리빨리 넘어가서 그런지 금방 반 전체 소개가 끝났다.
과학고 조기졸업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19살들도 꽤 있었다.
비율상 1:1 정도?
갑자기 새로운 이름들이 머리에 많이 들어와야해서 피곤했지만...
새내기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굳이 같은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려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 이름정도는 다 알아놔야지 했던 노력과는 별개로 조금 지나니 같이 이야기 하는 사람은 몇명으로 고정됐기도 했고,
그마저도 새내기 1년이 끝나니까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 K공대 첫 1년을 함께할 인연들이니까 더 자세한건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고,
이제 점심 전에 반별로 프락터가 진행하는 학교 소개랑 임시 반장을 한명씩 뽑아달라네? 지아야 뭐 아는거 있어?"
"아아, 아마 오후 미궁할 때 필요해서 한명씩 뽑아달라고 했던거 같다."
"음.. 학교 소개도 별로 안걸리니까, 반장부터 뽑고 하자.
아마 새터반 반장이랑 부반장, 총무는 첫 즐대생 할때 뽑을텐데, 이번꺼는 새터 동안만 하는 임시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싶은 사람?"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이 손을 든다.
"거기 예림이? 해볼래?"
"강진선배, 이거 추천도 괜찮아요?"
"어... 누구?"
"정연이요! 1반 대표는 딱 정연이인 느낌이라서요."
'아 씨발 좆같게 하네.'
대강당 일이 더 짜증날 수도 있었지만 아름이가 한 일이면 그정도는 조금 더 받아줄 수 있었다.
그 후에 아름이가 한 행동때문에 조금 서운했던거지, 그런 장난은 아름이가 원하면 진짜진짜 눈 꼭 감고 해볼만큼 아름이를 사랑하니까.
근데 이 예림이라는 애는 눈치가 없는건지 나를 일부러 엿먹이려는건지 조금 전 통성명을 해놓고 이지랄을 하시니...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이 나오는게 좋긴 한데... 정연이 말고 추천 말고 자기가 해보고 싶은 사람?"
조금은 웅성웅성하던 반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듯 무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강진이 약간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지아가 이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정연아, 혹시 반장 해줄 수 있어?
너가 너무 부담되면 하기 싫다고 말해줘도 괜찮아 진짜로.
새터 3일동안만 하는거라 크게 할 일도 없을거긴 한데..."
"...할게요."
"정연이가 후보한다는데 더 할사람? 아니면 반대하는 사람?
없으면 정연이가 새터 1반 임시반장인걸로 땅땅땅~!"
지아도 조금은 너무한게 보통은 저런식으로 말하면 거절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 멘트를 했을 것이다.
괜히 아름이한테 위로받고 싶어서 책상위에 올라와있는 아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잘했어요. 쓰담쓰담이에요."
보는 눈도 있고 약간은 그런것도 있고 해서 평소에 둘만 있을 때처럼 안아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것만 해도 괜찮았다.
"그럼 정연이가 새터동안 조금만 고생해줘 고맙다.
이제 학교 소개를 할건데 아까 OT에서 있었던거는 K공대 제도나 시스템 같은 이야기였고, 이번에는 학교 시설 소개를 하는 느낌인 것 같아.
여기 우리가 있는 곳이 E11 창의학습관이고, 기숙사가 N 19,N16,N14.
또 서쪽에 길게 뻗어있는 길이 엔드리스 로든데, 학교 옆에서 술마시고 들어오면 끝이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고 엔드리스 로드라고 했다는 설이 있어.
그리고 ..."
어느 과가 어디에 있는지 식당은 어디고 학생회관이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가르쳐줬는데 내게는 크게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미 프락터들만큼 학교에 익숙했기 때문에 엎드려서 멍때리며 또 이시간이 지나가기를 속으로 빌며 기다린다.
...
"여기까지 끝~! 우리 이제 밥먹으러 가자.
음.. 꼭 같이 먹을 필요는 없는데 같이 학식 먹으러 갈사람은 북측 K마루로 가고,
각자 시간 보내다가 1시까지 다시 여기로."
네~
"흐아암~"
"언니 많이 피곤하신가보네요."
"응~ 너무 피곤해~"
아름이도 어느새 아까의 섭섭하고 딱딱했던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화해하는거냐고 물어볼까도 했지만, 괜히 그런식으로 아까의 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별로 안좋은 일일수도 있으니 그만두기로 했다.
새터1반의 다른 아이들이 프락터를 따라 나가는동안 아름이랑 같이 앉아서 기다렸다.
'사람 많은건 너무 피곤해, 아름이랑 둘만 있고 싶은데.'
"정연아, 학식먹으러 안가?"
아까의 예림이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다 내게 묻는다.
'하... 그냥 쟤들따라 가지.'
"어.. 응. 먼저 가. 난 괜찮아서."
굳이 아름이랑 둘이 있고 싶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따로 먹겠다고 언급할 필요도 없으니 그냥 가라고만 하면 대충 알아듣겠지.
"응! 나중에 보자~"
예림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다가 다른 애들과 너무 멀어지기 전에 무리를 따라갔다.
사람 자체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껄끄러운 느낌.
"후..."
"쟤 좀 언니가 피곤해할 스타일이네요."
"어? 응... 애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쟤 때문에 임시반장도 하고 자꾸 저러네."
"흠... 저도 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어서..."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름이랑 밥이나 먹기로 한다.
"학식 별로 안좋아하신댔죠?"
"응. 가격도 엄청 착한 것도 아닌데, 맛도 그닥이라. 가격이 크긴 해."
K공대의 시스템이나 기숙사 제도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지만, 학식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종합대학들보다 한 학년에 800명 밖에 없는 적은 학생수.
적은 학생 수때문에 식수가 적어 같은 메뉴라도 단가를 낮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게 업체의 입장인데, 가성비가 썩 훌륭하지 않다보니 더 식수가 줄고, 적은 식수에서 더 안나오는 학식 이용 인원탓에 단가는 더 싸게 내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이라고 한다.
"돈이 문제시면 걱정 안하셔도 괜찮은데..."
아름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동정과 연민이 담긴 듯하다.
"아냐아냐, 그렇게 불쌍하게 보지말라구...
이번엔 별로 안좋아해서 안가는거야...."
"그럼 뭐드시려고요? 캠퍼스 안에 빵집이나 O데리아가 있긴 하던데."
"아름이 너가 못먹어봤을 메뉴로 하자. 따라와."
궁금한 표정의 아름이지만 서프라이즈를 위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캠퍼스 안에서 내가 애용하는 필살 메뉴!
...
...
"...제가 못먹어봤을 메뉴가 이거에요...?"
"어... 응... 그런데...?"
"푸흐, 푸하핫..."
아름이는 잠깐 당황하더니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듯 내 앞에서 크게 웃었다.
'뭐지? 왜 웃는거지?'
아름이에게 자신있게 선보였던 필살메뉴는 K공대 매점에서 파는 밥버거랑 컵라면이었다.
아름이가 재벌 4세라서 안먹어봤을 것 같은 메뉴중에 내가 애용하던 메뉴로 선보인것이다.
원래는 밥버거가 2000원 정도 하니까 돈을 아끼고 싶을 때는 밥버거만 먹거나 컵라면에 밥을 먹긴 하는데, 아름이랑 있으니까 굳이 따지면 약간의 FLEX?
"하하.. 아.. 너무 웃었네. 저 컵라면 되게 자주 먹었어요."
"응? 왜? 어째서?"
이해가 안됐다. 아름이는 항상 실장님도 데리고 다니고 셰프님도 따로 계신데 왜?
"셰프님이랑 실장님이 계시잖아?"
"아 그게 문제였어요.
중학생때 오라버니들 안계시면 그냥 방에서 게임하다가 혼자 간단히 먹고 싶은데,
저때문에 실장님이나 셰프님 부르기가 좀 그런것도 있고, 귀찮고.
준비시키는 동안 라면 하나 먹으면 빠르기도 하고요.. 게다가 먹을만 하니까..."
"아..."
아름이가 웃을만했다.
아름이가 부자라고 당연히 안먹어봤을거라 자신했으니...
"그래도 여기 밥버거는 처음 먹는거니까 먹어보죠.
언니의 필살기니까..."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그래도 아름이가 괜찮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아름이랑 점심을 간단히 먹고 학교 주변을 조금 걷다 들어가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