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새터, 시작~~~~하겠습니다~! (3)
* * *
"자, 이제 대학 들어와서 첫 행사인데, 아무래도 나는 인싸 체질인거 같다 싶은 사람은 주저하지 말고, 일어나아~주쎄요~!"
무대 위에 올라가서 관객석 쪽을 바라보니 각 반마다 북적거리며 누가 나갈 건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 때도 이런게 있었던가? 뭐 있었어도 내가 일어났을 리는 없없을테니까 기억 못하는 걸지도...'
오오~!!
혼자 무대 위에 서있는게 뻘쭘해서 뒷짐진 채 바닥만 보고 있었는데 우리반 자리랑은 반대편 끝에 있던 반에서 박수와 함성이 들려왔다.
'뭐지 뭐지?'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이 같은 반 친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위로 올라오는데 어쩐지 낯익다.
정하은! 정하은!
뒤에서 부르는 학생들의 목소리도 그렇고, 무대 바로 아래 쯤 되니까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전 만난, 그리고 그것때문에 아름이한테 잔뜩 혼난 원인인 정하은.
아름이가 말하기로는, 아름이를 싫어해서 괴롭힌데다가 마약도 하고 뒷세계에서 온갖 문란한 사생활을 즐긴다는데.
하지만 나는 가까이서 봐도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재벌이면서 수수하게 입고다니고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위에 서있는 그녀는 인간적으로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어머, 언니 여기서 또 보네요."
"어... 응.. 그러게..."
"성함이... 한정연? 예쁜 이름이네요.
저는 새터 12반이에요. 잘부탁드려요."
자꾸 살갑게 구는 정하은이랑 거리를 둬야한다고 생각을 하지만서도 대놓고 웃는 얼굴에 꺼져라고 말할만큼 싫은소리를 잘하는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지금 무대 위에 서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으응..."
"아름이가 K공대 오는 건 알았는데 언니도 있을 줄이야. 재수? 아니면 말은 친척언니인데 동갑? 아름이는 요즘에도 선배라고 불러요? 아름이도 1반이에요?"
"그, 그게..."
뭐가 이렇게 신나는지 자꾸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그녀.
아름이가 이 모습을 보면 싫어할텐데...
빨리 진행이나 해줬으면 좋겠지만 다른 반들은 대표로 나서는 학생들이 적어서 아직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첫날부터 착장에 신경 좀 쓰셨나봐요? 역시 언니도 귀티가 나신다니까요. 아름이 픽인가요?"
"아, 일부러 이렇게 입은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게."
이런... 진짜 부자 앞에서 부자 코스프레를 해버렸네.
정하은은 내 대답도 제대로 다 안듣고 자꾸 다음 질문을 들이밀었다.
'ㅅㅂ... 걍 나한테 신경 꺼줬으면 좋겠다.'
아 얘는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모르니 그냥 아름이 친척이라 실제로 리치한 줄 아려나?
그러면 오히려 좀 덜 쪽팔릴것 같긴 하다.
'아름이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진짜.'
내가 전해들은 그녀와 실제 내 눈앞의 정하은의 괴리가 심하기도 했고, 시끄러운 그녀의 말에 일일이 호응해주기도 힘들어 우리반 쪽을 쳐다보면서 흘러들었다.
"언니 자꾸 저를 안보시고 저쪽 구석을 보시네요. 아름이가 저쪽에 있나요? 어, 저기 후드입은 우리 아름이가 저흴 보고 있네요 헤헤...♥"
아름이를 발견한 정하은은 무척 신나는 목소리로 아름이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자~ 이제 한 두 세 반만 나오면 될거 같은데요~ 부끄러워도 눈 딱 감고 오늘만 화이팅~"
거의 다 나온 것 같은데 빨리 정하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름이는 얘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말하던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흐음...'
휙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있던 내 어깨를 정하은의 팔이 휘감았다.
"뭐, 뭐하는건데 지금!"
"에이, 조금만 맞춰줘요 언니, 우리 아름이 좋아하는 것좀 봐, 너무 귀엽다...♥"
내 어깨에 팔을 걸어 어깨동무를 한 채 아름이 쪽으로 V자를 뻗는 정하은.
우리반 자리가 제일 앞쪽이었기에 여기서도 알아볼 수 있는 아름이의 표정은 무척 속상하고 분해보였다.
아름이의 표정에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나마 정하은을 밀어낸다.
"이, 이러지 말아줘. 12반이면 저, 저쪽에 서..."
"언니 아름이 때문에 그래요? 에이~ 우리가 뭐 저번처럼 키스한 것도 아니고 어깨동무 가지고."
"키스는 무슨..! 너가 갑자기 그러고 가서 얼마나 곤란했는데...!"
"헤에~ 아름이가 질투했구나~? 흐으~ 다행이네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정하은 얘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수수하고 모범적인 가면 속에 감춰진 끈적한? 혹은 뜨거운 감정이 나를, 정확하게는 나를 바라보며 떠올리는 아름이에게 향해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제 갈게요."
"으으..."
"언니, 언니는 제 볼에 뽀뽀 안해주시나요?"
조금씩이라는 표현은 취소해야겠다.
정하은 얘도 보통 미친년이 아닌게 확실하다.
아름이가 말한 포인트랑은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지만...
"얘가 뭐라는거야.. 꺼... 꺼져...!"
"오우, 그런 말도 하시는구나. 그럼 조만간 또 봐요.
그땐 아름이랑도 같이..♥
아름이랑 제 얘기 많이 해주시고요 흐흐.."
자기네 반 쪽으로 걸어가는 정하은.
마침 방금 막 마지막 반 대표가 무대위로 올라와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것 같다.
"후우... 벌써부터 너무 피곤하다...
새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정하은이 떠난 뒤로 우리반 쪽에서 무섭게 째려보는 시선 하나가 느껴지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화난 아름이는 무서운데...
일단은 이것부터 마치고 그 다음 아름이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지 고민해야겠다.
애초에 나는 잘못이 없다.
철벽을 잘 못치고 웃는 얼굴에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것 뿐.
아름이가 조심하라고 말해줬는데도 제대로 못밀어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거다.
"자~ 앞으로 1반부터 할 일이 많을테니까, 오늘은 25반부터 해봅시다!"
오오~!
"각 반 대표는 간단히 자기소개랑, 방금 잠깐 본 자기 새터반 친구들의 첫인상 한마디, 그리고 장기자랑 한가지씩을 해주시면 되겠씁니다~!"
와아~!!!!
새터 7반 화이팅~!!
'아... ㅈ됐네.'
애초에 무대에 올라와서 어떤 걸 해야하는지도 제대로 못 들은 상태에서 아름이가 빙빙 돌리는 이야기를 듣다가 일어서서 나오게 되었다.
장기자랑인 줄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 되더라도 나는 못한다고 말하고 다시 앉았을 것이다.
'존나 갑분싸 만든다고 욕좀 먹겠지만... 이 쪽팔림 보다는 나을 거 아니야.'
그리고 무난한 중간 순서도 아니고 제일 마지막에 내가 해야된다니!
나를 숨막혀 죽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가 계획한 것이 분명하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떨고 있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끝반부터 마이크를 받아들고 새프디가 시킨 내용들을 시작했다.
"어, 이거 유O브나 폰 연결 되나요?"
"당연히 됩니다. 휴대폰, 유O브, 멜O, 여기 앞에 방송팀 친구한테 말하면 다 준비해드립니다.
첫 순서는 어쩔수 없지만, 다음 사람부터는 자기 차례 오기전에 준비해서 말씀해주세요~"
"아 네, 오... 여기 올라오니까 되게 떨리네요.
저는 경기과학고에서 온 김재영입니다.
우리 새터 25반, 강당 들어오자마자 너무 똑똑하게 생긴 친구들이 앉아있어서 와 내가 진짜 K공대에 오긴 했구나 했습니다.
이런 친구들이랑 1년을 보낸다니 엄청 설렙니다.
그리고 장기자랑... 제가 오늘 이런걸 하게 될지 몰랐어가지고, 제 노래방 애창곡 하나 불러도 될까요? 하하..."
"좋죠~"
"아아,
후회~ 하고 있어요~"
...
...
처음이라 떨릴법도 한데, 25반 대표는 매우 무난하게 자신의 차례를 넘겼다.
25반도 그렇고 그 다음 24, 23반으로 한사람씩 자신의 차례가 되면 새프디가 시킨대로 자기소개와 반 첫인상, 그리고 장기자랑을 했다.
다들 25명 쯤 되는 새터반에서 그래도 대표로 나가겠다고 할 정도의 인싸력이 있는 학생들이라 그런지 고등학생때부터 친구도 많고 무리에서 중심이 되는 그런 사람들로 보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무척 많았던 나와는 다른, 외향적인 느낌의 친구들.
아까 25반 대표만 하더라도 과학고에 2,3명 정도 있을법한 점심시간에는 축구도 하고 대회도 친구들 모아서 참가하는 전형적인 모범 인싸였다.
게다가 발라드까지 잘부르던데.
차례가 하나하나 넘어올때마다 긴장과 불안감이 제곱이 되는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새터 12반에서 나온 정하은입니다!"
와아~!!
정하은! 정하은! 빛이난다! 정하은!
첫 문장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의 정하은이었다.
특히 새터 12반은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벌써 그녀의 팬클럽같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
"우리 새터 12반은요...
다들 멋지고, 귀엽고, 생기넘치고... 앗! 한마디로 해야되는데... 죄송해요...
그럼 으음... 매력만점..?"
신나서 자기 반을 자랑하다가 아차했다는 듯한 정하은이지만 아름이의 이야기도 들었고 직접 아까 모습을 봐서 그런지 저런 부분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영역이라고 느껴졌다.
그래도 다들 좋아하는 걸 보면 그만큼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아는 것 같다.
"제가 노래는 잘 못해서 춤으로 대신하려고 하는데 괜찮나요?"
네~!
"하하... 감사합니다."
이미 유명하기도 유명한 사람이었고, 여러 방송 출연경험에서 나오는 짬바가 있는건지 여자 아이돌 노래에 맞춰 안무를 따라하는 그녀는 진짜 연예인같은 모습이었다.
인싸들은 언제든지 꺼내쓸 수 있게 평소에도 준비를 해두는건지 다들 각자의 장기자랑용 무기가 하나씩 있었다.
여러 장르에 걸쳐서 노래하는 애들도 많았고, 정하은 외에도 몇명은 아이돌 댄스를 준비해뒀었다.
비트박스나 새프디가 제시어를 던져주면 프리스타일 랩을 한 학생도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코에 동전넣기랑 팔꿈치 등 뒤에서 붙이기가 되는 대표가 하나 있었는데 반응이 엄청 좋아서 놀랐다.
'하여튼 인싸 감성은 이해할 수가 없어...'
인싸 인싸 거리는 것이 아싸 특징이라던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2반에서 나온..."
감탄하고 있던 사이에 내 직전 차례까지 나왔다.
다른건 대충 넘긴다고 쳐도 장기자랑 할만한게 없는데...
아이돌 댄스는 외우는 것도 몇 없을 뿐더러 내가 알만한 곡은 이미 앞에서 다 했다.
평소에 힙찔이였기에 힙합 곡이라도 하나 할까 했지만 이미 앞에서 너무 많이 했기도 하고 여자가 된 뒤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안될 확률이 더 높았다.
마술을 준비해온 대표도 있었고 성대모사가 기가막힌 대표도 있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고...
'아아... 나도 평소에 좀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살았어야 했는데...'
아름이한테 잡혀가기 전에는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고 사람목소리라고는 인방 보면서 스트리머들 말하는 것 말고는 거의 안들으니 사람과의 교류가 있을리 없었다.
인방 말고 진짜로 사람을 만났어야...
어..?
인방...?
아름이한테 잡혀가기 직전에 막 유행했던 제O투 댄스가 아직도 유행하고 있던데, 긴생머리에 꽤 반반하게 생긴 지금이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1반 학생분, 뭐하실거에요?"
마침 방송팀 담당 새프디가 내 차례가 곧이라며 뭐할지를 물어왔다.
'이거밖에 없겠는데?'
"저... 제O투 댄스 음악 되나요?"
"오오..! 그거 하시게요? 당연히 되죠!"
모르면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었는데 다행이다.
그에게 음악을 부탁하자마자 앞사람의 차례가 끝났다.
쿵 쿵 쿵
내 심장소리가 내게도 너무 잘 들릴 정도로 긴장한 나.
"자~ 드디어 마지막! 1반 대푭니다. 모두 박쑤~!"
짝짝!
"아.. 어... 아, 안녕하세요오...?"
긴장을 너무한 탓일까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다.
"저는 이, 아 아니고, 그 한정연인데요오.. 1반 대표고.. 우리반은 그 뭐랄까.. 다들 있어보이고... 또 어 음.. 그.."
박수쳐줄때까지만해도 달아올라있었던 분위기가 나 때문에 싸늘하게 식어가는게 느껴진다.
'아아... 갑분싸는 안돼. 갑분싸는...
에라 모르겠다.'
"긴장해서 죄송합니다!
닥치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으, 음악 주세요!!"
♪~♬~♪~
오오!!!!!!!
와아!!!!
전주가 흘러 나오자 싸늘하게 식던 분위기는 어디가고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대부분이 남학생들인 것 같기는 하지만, 갑분싸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직접 춰본적은 없지만 영상으로는 수십, 수백번을 본 나다.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겠지.
♪~♪~
음악에 맞춰서 골반을 튕길때마다 술렁거리는 반응들이 무대 앞에서는 너무 잘보였다.
'아아 이거 너무 쪽팔린데, 그래도 아까 실수를 만회하려면...!'
정장 자켓 속 흰 티셔츠에 정장바지는 너무 수수한 것 같아서 고민하던 찰나, 아까 크롭티를 입고 춤을 추던 다른 반 학생이 떠올랐다.
'배꼽까지는 괜찮겠지.'
골반은 리듬에 맞게 계속 튕기면서 눈은 질끈 감고 양 손을 교차해 티셔츠를 조금씩 올린다.
와아!!!!!!
오우 쉩~!!!
다행이다 반응이 썩 괜찮은 것 같다.
미친...!
이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어?
무대 바로 앞의 남학생들 반응이 생각보다 더 격한 것 같은데...
쪽팔린 마음에 감았던 두 눈을 뜨니까 나는 마이크랑 시계에 티셔츠가 걸려올라가 브라 아랫쪽까지 조금 드러난 채로 제O투 댄스를 계속 추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재빨리 옷을 다시 내린다.
"이.. 이상입니다..."
와!!!!!
앞의 누구보다도 큰 남학생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뿌듯하거나 한 기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새프디가 빨리 내려가도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씨발씨발씨발씨발...
뭐가 걸리는 느낌은 조금 있었는데 당연히 재킷인줄 알았지...
ㅈ됐네...
진짜 ㅈ됐다 씨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