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새터, 시작~~~~하겠습니다~! (2)
* * *
다들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주변에서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야 쟤 입고 있는 옷 1000만원 짜리라는데?
미친.. 그럼 존나 금수저라는거 아니야?
고등학교 단톡방에서 남자애들이 그러는데, 시계도 개쩌는거래. 어중간한 롤O스 보다 저게 비쌀거라고 그랬어.
어떡하지? 빨리 친해져야 되나?
괜히 그랬다가 눈밖에 나면 피곤해지니까 거리 두는게 낫지 않나?.
오키오키.. 와 근데 개쩐다. 존나 부럽네...
그러게... 지금 걸친거만 세단 하나 돈이잖아.
'왜이리 남한테 신경을 많이 쓰는거야!!! 아악!!'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그래도 충분히 받고있는 시선을 두배로 받게 만들테니 그만뒀다.
사실 나같아도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올 시기에 새터에 갔는데 어떤 여학생이 명품 정장에 초고가의 시계를 차고왔다는 말이 돌면 눈길이 한번쯤 갔을 것이다.
'평생을 아싸로 살아서 이런 관심은 부담된다고...'
내가 살면서 받아본 눈빛은 내 사정을 아는 선생님들, 주변 어른들의 측은한 눈빛이나 같은 반 친구들의 독종이라며 질린다는 눈빛, 아니면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그런 친척 어른들의 귀찮은 짐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게 꽂히고 있는 시선에는 부러움, 놀라움, 신기함, 질투심, 호기심 등등 살면서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저런거에는 내성이 없어서 어디 숨고싶어진단 말이야...'
혼자 안절부절하는 내가 웃기는지 아름이는 옷소매로 입을 가린채 쿡쿡 웃고 있었다.
"...한아름...!"
"네~ 언니~"
"미워... 너무해... 나쁜 아름이..."
"헤헤... 그런 언니도 좋아요."
아름이에게 화났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볼에 바람을 넣고 노려봤지만 아름이는 그런 내맘을 모르는건지 신경쓰이지 않는건지 그저 나를 바라보며 내 볼을 조물조물 어루만지고 있었다.
화를 낼때는 내야 아름이가 내 기분을 알테니
이 손을 뿌리치고 엄하게...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아름인데...'
잔뜩 힘을 줬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고 볼에 채운 바람도 슉하고 빠져 금방 헤실헤실 웃고있는 표정으로 아름이의 손길에 볼을 맡기게 되었다.
"이, 이번만 봐주는 거니까...!"
"알았어요~ 음~ 선배 볼 부드럽다."
"부끄럽게 만들지마..."
"누가 그랬더라? 그런 모습까지 귀여워서 이러고 싶은거라고 누가 그랬는데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 아름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따끔하게 혼내야지...
'생각해보니 들어오기 전에 내가 한 행동때문에...? 아냐아냐 선물도 이 옷도 진작에 준비했을테니 우연히 겹친거지 나한테 이런 장난을 치려고 처음부터 생각해둔 걸거야.'
10시가 거의 다 되니 시끌시끌하던 강당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시작하나보네요. 언니."
"응 그런가보다."
중앙과 뒤쪽을 비추던 조명들이 전부 꺼지고 강당 앞 무대 위를 비추는 무대조명들만 남는다.
"안녕하십니끄아~~!!"
무대 끝에서 노란색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우렁찬 인사와 함께 등장한다.
"목소리가 너무 작습니다.
새내기들 안녕하십니끄아~~!"
안녕하세요~
"좋습니다. 이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보니 저도 새내기가 된것만 같네요 하하..."
방금 인사를 한 남자가 무대 중앙에서 뒤돌아서니 무대 양 끝에서 마찬가지로 노란색 후드티를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무대 중앙에 V자로 우리를 등지고 선다.
"우리가 누굴까~"
"누굴까~"
"우리는~"
"우리는~"
전형적인 레크레이션 톤의 무대위 학생들.
1학년용 프로그램 만드는 학생들을 매년 뽑았던것 같은데 단체명이 뭐더라.
"여러분의 재미난 1년을 책임질!"
제일 왼쪽 두명이 뒤돌아 점프하며 손을 앞으로 뻗는다.
'너무 옛날 예능 느낌 아닌가..'
"새내기!"
"프로그램!"
"디자이너!"
"줄여서!"
"새프디!"
"입니다!"
"니다!"
"박쑤!"
와아~!
2명씩 뒤돌아보면서 외치는 부분이 약간 유치한 면이 없지않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옆에 있는 아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재미있게 보고있었으니까.
'되게 좋아하네. 아름이가 기대하던 대학생활이 이런 감성일까.'
"...앗..!"
아름이는 자신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다시 진지한 표정을 하고 팔짱을 꼈다.
"아름아 이미 볼거 다봤는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거야 크크."
"..그,그치만... 아무래도 좀..."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것이 많은 아름이의 새 항목을 마음 속 노트에 적어놔야겠다.
[아름이가 부끄러워 하는 것들]
평범한 연인같은 행동
소녀같은 행동
본인을 엄청 귀여워하는 것
아이같은 행동을 한걸 들킨 것
아름이랑 조금 떠드는 사이 새프디들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처음 소리치던 인싸느낌의 남자 하나만 남아서 구석에 서있었다.
"잠깐만요~ 아, 됐다."
뭐가 잘 안되는지 리모콘을 몇번 만지작 거리던 그는 프로젝터에서 PPT 화면이 제대로 나오자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 새터를 총괄 기획한 새프디 정경훈이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짝짝~
"에..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 K공대는 몇년 전부터 술 없는 새터를 원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아~
"예예. 이제 막 대학도 들어왔고, 동기들도 만났고 했는데 술을 마실 수 없는 그 슬픔 잘 압니다.
그렇지만!
원칙은 원칙!
자랑스러운 K공대생이라면, 불미스러운 일로 대학생활 시작과 동시에 학생생활처에서 같이 뵙는 일이 안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학교는 OT나 새터에서 죽을 때 까지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 학교는 2박3일 새터기간 동안은 술을 절대 금지 시켰었다.
아마 내가 처음 입학했던 것보다도 몇년 전에 술마시고 사고가 한번 있었어서 그 이후로 이렇게 쭉 내려온 것 같은데.
'아름이가 이거 때문에 일부러 술마시자 그런건가?'
"아름아."
"네, 말씀하셔요."
"3일동안 술 못마시니까 어제 마시자고 한거야?"
"아... 뭐 그것까지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새터 전이라 술마시고 싶었다기 보다는 술 좀 들어가면 언니가 어제처럼...히히...♥"
말을 하다 말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 그녀.
"어제? 필름 끊겼었는데 너 뭐 했어?"
"제가 아니라 언니가, 아, 아니에요. 그냥 필름 끊긴 선, 아니 언니가 귀여워서 보고싶었다고요. 네 그거요."
"흐음..."
분명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아름이가 말해줄 생각이 없어보이니 내가 더 물어본다고 뭐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내가 술에 꼴아서 토하거나 한 것을 아름이가 모른 척 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굳이 더 알려고 하지 말자.
"자~ 그러면, 신입생들을 위한 좋은 말씀들이랑 딱딱한 이야기들은 앞에 교무처장님과 학생생활처장님께서 잘 해주셨으니, 저는 가볍고 빠르게 일정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간 PPT에는 2박 3일 동안의 일정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많기도 하다..."
아름이는 아까처럼 두근두근한 표정이었다.
너무 오래 쳐다보면 또 부담스러워할테니 그만 봐야지.
"3일동안 여러분들이 서로 친해지고, K공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저희 새프디들이 몇날며칠을 고민해서 짜왔으니 부디 기대해주시길 바라면서!
먼저 첫날 오리엔테이션은 했고, 지금 새터 Intro 라고 써있는 시간입니다.
11시까지 새터 소개가 끝나면, 다들 방에 들렀다가 프락터들 인솔하에..."
어?
그러고보니 1학년은 다들 기숙사를 쓸텐데.
입사 신청을 한 기억도, 새 방에 짐을 푼 기억도 없다.
보통 새내기들은 타지역에서 오는 경우가 많으니 새터 전날, 그러니까 어제 부모님과 대전에 짐을 들고 와서 짐을 정리하고 기숙사 입사 절차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사는건가?'
"아름아?"
"네, 언니."
"우리 기숙사 안쓰고 거기서 살면 되는거야?"
"기숙사 쓰면 돼요. 제가 신청하고 짐 옮겨 놨어요."
"아... 그럼 이거 끝나고 소망관 가면 되니?"
"소망관은 남자 기숙사잖아요."
"어 그러게. 그러면."
"아름관 써야죠."
생각해보니 K공대 여자 기숙사 이름이 아름관이었는데 혹시...?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아름이가 질렸다는 듯 말한다.
"언니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는데 말이 안되잖아요. 그게 생긴지가 언젠데."
"아... 그렇지..? 혹시나 해서 하하.."
"그러면~ 반별 활동을 하러 가기 전에!
각 반 한명씩 화끈하게 분위기를 띄울..."
"언니."
"어? 응. 왜?"
"그게 있잖아요 저기... 생각해보니까 우리 부산을 다녀왔었잖아요? 언니를 그 시설에 데려갈 때는 같이 이렇게 부산을 다녀올 지 몰랐는데 부산에 가니까 또 언니가 좋아하는 고깃집도 갔었고, 그러고보니 뷰도 되게 괜찮았었는데..."
아름이는 갑자기 주제 없이 이야기를 빙빙 돌렸다.
얘가 왜이러는거지?
아름이가 아무 이유없이 이럴 리가 없는데.
"앗! 선배, 저 반지가 선배 의자 밑에 떨어졌나봐요. 잠시만 일어서주시겠어요?"
"어, 그래."
놀라듯 말하는 아름이 때문에 아무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주었다.
"오, 정..연이? 정연이가 할래?"
내게 대단하다는듯 말을 거는 남자 프락터.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잘 안된다.
"와우! 1반은 벌써 정해졌나 보네요!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새프디가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영문을 몰라 아름이를 쳐다보니 혀를 베 내밀고 손을 V자로 만든 채 웃고있는 아름이.
"아... 당했다."
"언니 대단해요! 조심히 다녀오셔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미 내게 기대하고 있는 표정의 프락터와 반 동기들한테 실수로 일어난 거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으아아아.... 망했다... 첫날부터 망했어.'
나는 새터 시작부터 무난무난한 캠퍼스 라이프는 이미 물건너갔다는 직감을 억지로 무시하며 무대위로 올라갔다.
"에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