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기분좋은 밤 술기운이 올라 (1)
* * *
"와~ 얼마만에 먹는 삼쏘야 이거, 벌써 기분좋네 아름아."
"많이 드셔요."
"응 너도."
숯불 향이 그윽하게 올라오는 삼겹살을 쌈장에 찍어 파채와 쌈을 싸먹은 뒤 아름이와 잔을 부딪히고 입안에 소주를 털어넣는다.
"크으~ 이거지. 이거거든!"
입안에 가득 찼던 채소 사이로 흘러나오는 육즙과 열기에 사르르 녹아 흘러든 지방의 고소한 맛이 여러 부재료들과 어우러져 혀를 압도한다.
씹을때마다 탱글 쫄깃한 식감의 고기와 아삭한 포인트를 더해주는 상추를 넘길때 쯔음 입에 털어넣은 소주가 남아있는 맛을 깔끔하게 씻어내며 목을 타고 내려간다.
"아... 너무좋아... 진짜진짜...♥"
"좋으신가요?"
"응... 사실 고깃집 자체를 엄청 오랜만에 오니까..."
"음...? 그러게요. 캠퍼스 주변에 무한리필이나 별로 안비싼 고깃집들이 꽤 있었을텐데 선배가 거의 안가신 것 같아요."
내가 평소에 어디서 무얼 먹는지 까지도 아름이가 한번씩 감시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지만 이제와서 별로 의미가 없는거 아닌가 싶어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자주 봤는지 슬쩍 물어본다.
"그... 내가 밖에 나갈 때 한번씩 미행시킨거야...?"
"아, 원래 선배요? 음... 촬영 자체는 거의 항상 돌리고 있었다고 보셔도 될걸요? 헤헤..."
"응...?"
'나는 한번도 느낀 적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둔한가?'
"선배 새내기 지나고서는 기숙사 항상 랜덤 룸메이트 배정 신청했는데 한번도 들어온 적 없었죠?"
"어... 그거 내가 운이 좋아서 그랬던게 아냐?"
"에이, 말이 되나요 선배. 제가 전산상으로 막아두거나 휴학할사람 정보로 방 배정 받아두고 퇴사한거죠."
같이 방을 쓸 룸메이트를 구하기 힘들어서 그냥 아무나랑 쓰려고 랜덤 신청을 했는데 결국 늘 혼자서 쓸 수 있었던 게 내 강운 덕분이 아니었다니 조금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낮은 확률이긴 했네.'
"그러면 항상 보고 있었던거야...?"
"아뇨, 저도 바빴으니까 기록만 남겨두고 다 보지는 못했죠. 가끔 궁금할 때 확인하는 정도?
아 선배 컴퓨터나 휴대폰 사용내역도 다 있긴 해요.
혹시나 선배가 성적 취향이 저랑 머실까봐 걱정돼서...
남자 좋아하거나 너무 어린애만 좋아하..."
"그만, 그만!"
내 사생활이라고 생각했던 혼자만의 시간들이 사실은 나 혼자만 알고있던 것이 아니라는 내용에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취기가 오른 건 아닐텐데 머리가 뜨겁다.
"왜그렇게 부끄러워하셔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선배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걸 살짝 엿본 정도...? 히히...♥"
"그게 별거야 아름아..."
"그런가요...?"
빨리 원래 주제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디까지 말했었지?"
"고깃집 오랜만에 오셨다고요."
"아... 그래. 그 내가 친구가 없는데, 고깃집은 혼밥 난이도가 너무 빡세서... 게다가 기숙사라 직접 구워먹지도 않으니까 이렇게 불판 앞에서 바로 구운 고기를 먹는게 되게 오랜만이야."
아름이가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럴려고 이야기한 건 아닌데.
내 볼을 천천히 쓰다듬는 아름이.
"이제 제가 있잖아요. 못해본 거 둘이서 잔뜩 하면 되죠."
"그치, 미안 괜히 분위기 다운시켰네, 짠이나 한번 더하자."
무안한 기분을 빨리 넘기고 싶어서 아름이에게 또 술잔을 내민다.
짠~
"키야~ 이 탁 때리는 소주 끝맛이 그리웠다니까."
생각해보니 아름이는 신경도 안쓰고 너무 혼자 고기랑 술을 잔뜩 먹고 있는건 아닌가 싶어 슬쩍 아름이를 살피니 역시 별로 먹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아름아, 입에 별로 안맞니? 다른데로 옮길까?"
"아뇨, 꽤 맛있네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만 한 것 같아요. 고기도 괜찮고."
"그런데 왜 많이 안먹어..?"
"선배가 오물오물 하다가 술마시고 싱긋 웃는게 너무 귀여워서요. 눈에 많이 담아두고 싶네요."
"아니~ 갑자기 그러면~ 아름이가 더 귀여운데..."
내가 귀여워서 보고있다가 덜 먹게 되었다는 아름이의 말.
애완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 아름이가 좋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내가 귀여워서 많이 못먹었다고 하니까 우리 아름이 쌈 싸줘야겠다~♥"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와서 그런가 평소보다 부끄러움이 좀 없어진 것도 같다.
'원래 소주 2병은 혼자 잘 마셨으니까 1병 반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서로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아름이에게 줄 쌈을 준비한다.
상추 위에 파채를 살짝 올리고 명이나물이랑 잘 익은 삼겹살을 한조각 올린다.
불판 바깥쪽에서 익은 마늘을 안 탔는지 확인하고 쌈장을 찍어 올린 후 상추를 덮어 쌈을 완성한다.
"선배 너무 커진거 아니에요?"
"아름이 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고기도 크고 잘 익은거로 넣고 하다보니.. 하핫..."
너무 큰가 싶기도 한데 이미 아름이가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아름아 아~"
아름이의 입안을 가득 채우는 쌈
작은 입이 꼭 닫힌 채로 열심히 오물오물거리는 모습이 다람쥐 같아서 귀엽다.
'아름이가 나한테 한 말이 저런 뜻이었겠구나.'
"아름아 짠~"
거의 다 삼켜갈 때 쯤 잔을 내민다.
청아한 소리를 내며 다시 잔이 부딪히고 나는 술로 입을 씻어낸다.
"흐으~ 어때 괜찮았어?"
"맛있었어요. 근데 선배꺼 너무 커서...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목 안까지 찌르는 느낌인데 즙이 자꾸 새어나오니까...♥"
키득키득 웃으면서 상황을 묘사하는 그녀.
"아니 아름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그냥 쌈이잖아.
옆 테이블에서 내가 이상한 사람인줄 알겠다."
"그쵸. 선배가 저를 생각해서 잔뜩 모아서 싸주셨잖아요... 저한테 먹이려고요.
흐읏...선배가 싸주신게 입안에 가득...
하아... 이제는 제 뱃속에 있겠네요...♥"
"..."
내 반응을 보며 즐기는 아름이가 너무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 새하얀 볼이 핑크색으로 살짝 물든 아름이가 사랑스럽게 보여서 더 너무했다.
목이 타는데 물을 하나 더 달라고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또 소주를 한잔 털어넣었다.
'이제 1병 조금 넘어가니까. 멀었지 머.'
배도 슬슬 불러오는데 이 병까지만 마시고 일어나자고 해야겠다.
물이 다떨어져 이모를 여러번 불렀지만 사람으로 꽉 찬 가게에서 내 말이 닿지 않았는지 여러번 지나가셨다.
"물 좀 가져올게, 잠깐만."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
몸이 기우뚱 하면서 시야가 다시 테이블 위로 돌아온다.
"어...?"
"선배, 많이 취하셨나요."
"아니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테이블에 닿아있는 얼굴이 쉽게 떼어지지가 않는다.
"근데 왜이렇게 졸리지..."
아직 한병 반도 안넘겼는데.
조금 피곤한 걸 감안해도 주량보다 많이 넉넉한데...
온몸의 근육이 풀린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의식도 몽롱해질 때 쯤 수마가 몸을 덮쳐 눈을 완전히 가려버린다.
...
...
낯선 천장이다.
내 이름은 한정훈. 평범한 K공대생이다. 아니 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상태창]!
"야레야레, 역시 이 세계에선 안되는건가."
"선배 뭐라고 중얼거리시는 거에요?"
"아, 아무것도 아냐..."
옛날부터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취기를 핑계로 슬쩍 해보았는데 딱 타이밍 안좋게 아름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방에 창 밖으로 달이 비치는 밤바다가 보이는 걸 보니 아름이가 고급 호텔로 데려왔나보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고깃집이었을텐데.
고깃집에서 목이 너무 말라서 이모를 부르다가 이모가 내 말을 못들어서 내가 가지러 가려고 일어서는...
그 즈음부터 기억이 흐릿하다.
지금도 정신이 몽롱하고 몸도 좀 뜨거운 것 같고.
무엇보다 내 슈트는 어디가고 셔츠만 입고있는 건지 모르겠다.
태연하게 들어와 내 다리 사이에 손을 갖다대는 아름이.
"아이 귀여워라."
내 속옷 위로 둔덕을 스윽스윽 쓰다듬는 아름이의 손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온다.
'잠만 내 자켓이랑 바지는 어디가고 이거만 입고있대?
애초에 나 오늘 셔츠가 아니라 티셔츠 입었잖아?'
"아름아...?"
"네 선배."
"나 무슨 일 있었니? 왜 이러고 있지?"
"아주 큰일이었어요..."
"왜 내가 뭐 실수라도 했어?"
"쓰러져있는 선배가 너무 예뻐서...
도저히 그냥 올라갈 수가 없지 뭐에요.
그래서 제가 여기 데려다가 씻기고 벗긴 다음에 새 속옷이랑 셔츠만 딱 입혀놨어요. 잘했죠?"
"후우... 근데 계속 만지고 있을거니?"
"네 선배 보지 말랑말랑해서 기분좋은걸요..♥"
아무튼 정신을 잃은 사이에 큰일은 없었나보다.
"분명히 주량보다 적게 먹었는데 뭐지..."
"선배 원래 주량이면 지금 이렇게 되기 전이잖아요."
"아..!"
술에 취해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까먹었던 나.
남자였을 때보다 훨씬 마른 여자 몸이 된 내가 원래의 나만큼 마시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꽤 빨리 뻗어서 정신도 금방 차린게 다행이다.
"흐읏... 아름아 그만...♥"
"싫어요. 선배 깰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내일이 새터건만,
오늘 밤은 꽤 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