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44화 (44/96)

〈 44화 〉 새터 전날은 부산행 (4)

* * *

"선배, 좀 괜찮아지셨나요...?"

내 앞에 다가온 아름이가 나를 꼭 안아준다.

감정적으로 조금 지쳐있어서 아름이가 만들어내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잠깐 기대고 싶어졌다.

아름이의 어깨에 턱을 살짝 올리고 나도 그녀를 껴안는다.

"많이 우셨나보네요. 우리 선배."

내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엄지로 슥슥 문지르며 닦아주는 아름이.

"흡.. 아니. 별로 안울었는데 끅.."

"괜찮아요. 사람이 기쁘면 웃고 슬플 때는 울어야 더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대요.

쌓이는 감정을 잘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다나?"

"응..."

원래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도 더 작은 아름이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나 행동, 어찌보면 사람 자체가 나보다 크게 느껴진다.

이런걸 아우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존재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무튼 그녀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말보다 내 마음에 깊게 박히는 느낌이다.

"저희가 마무리하고 따라갈게요.

선배는 천천히 길따라 산책이라도 하셔요."

"아 괜찮은데..."

"아니에요. 저희도 괜찮으니까."

약간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한 두번 더 사양하려 했지만 어찌보면 이것 역시 내가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응... 먼저 천천히 가고 있을게."

"네 선배 금방 따라갈게요. 너무 오래 걸리면 중간에 벤치에서 기다리셔도 돼요."

아름이에게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싱긋 웃어보인다.

환한 미소로 답해주는 아름이를 뒤로 하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걷는다.

"후우... 무거웠던 뭔가가 풀린 느낌이긴 하네."

형용키 어렵지만 약간은 찝찝했던 가슴 속 무언가가 쏙 빠져나간 느낌.

처음 공원에 도착했을 때 약간 비가 올것 같은 먹구름이 보이던 것과는 다르게 어느새 깨끗하게 파랗게 변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내 마음도 딱 저런 상태 아니였을까.

실제로 비가 오지는 않지만 비가 올까봐 계속 걱정되는 상태에서 이제는 화창해진.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아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저 천천히 걸었다.

...

오늘 여기 오자고 했던 건 선배의 마음을 늘 무겁게 누르고 있던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해주려는 게 90%정도.

그리고 나머지 10%는 지금은 뵙지 못하게 된 선배의 부모님께 이렇게라도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을 정리하기 전 김실장님께 조금 더 혼자 있다가 치우겠다고 말을 전한 뒤 술을 한잔씩 더 올린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우선은 죄송해요. 선배에 대해서 이것저것..."

일반적으로 연인의 부모님을 뵙는 자리에서 죄송하다고 시작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선배에게도, 그리고 그런 선배의 부모님께도 죄송하다는 마음이 있었다.

내 뒤틀린 욕망과 검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선배에게 몹쓸 짓을 하긴 했으니까.

다시 그 상황에 놓인다면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다른 방법들을 조금 더 고려해보긴 할 것이다.

새로운 모습의 선배가 다시 깨어났던 날,

선배에게 자책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 것을 약속했지만 약간의 죄책감까지 전부 지울수는 없었다.

어찌보면 사람이 더 나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과거의 스스로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에서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테니 아주 부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에 대해서 이것저것 들었어요.

어린 시절의 선배에 대해서나 선배가 늘 해왔던 생각들도 들었고 무엇보다 오늘 두분에 대해 많이 들어서 여기로 가자고 말했네요.

감사해요. 선배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지금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어린 시절을 함께해 주셔서요.

선배는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선배 본인은 그런걸 자각하지 못하고 자꾸 자책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려운 순간들이 되게 많았는데도 티를 내지 않고 이겨내려고 본인의 속을 깎아가며 걸어온 사람.

물론 눈치가 좀 없고 사람이 너무 순한 면도 없지않아 있지만,

그런 선배가 저는 너무 좋아요.

처음 만나고 얼마 안됐을 때부터 이게 선배의 매력이다 하고 딱 짚어내기는 어렵지만 그런걸 고민하고 있을 때는 이미 선배가 제 마음에 가득 차버렸어요.

남들이랑 다른 걸 보고 평생을 다른 기분으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제게 남들처럼 사랑하는 법을, 행복하게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아까 한참을 울다가 내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눈물을 닦아내는 선배를 봐서 그런걸까.

나도 목이 좀 먹먹해지는게 느껴진다.

"선배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지난 날의 슬퍼했던 선배들이 모두 지금의 선배를 부러워할 만큼.

선배의 어둡고 불행했던 기억과 감정이 행복으로 가득 차서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그렇게 더 자주웃고 더 밝아진 선배를 매년 데려와서 보여드릴게요.

선배 걱정은 마시고 편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말을 끝낼 때 쯤 내 뒤에 서있던 김실장이 손수건을 건넨다.

"고마워요..."

눈물을 닦고 물을 조금 마시는 동안 김실장이 자리를 전부 정리했기에 같이 돌아가기로 한다.

"김실장님."

"네 아가씨."

"선배 부모님들이 계셨다면 저한테 뭐라고 하셨을까요?"

"음... 좀 어렵긴 하지만 아가씨를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치만 저는 선배에게 심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선배를 여자로 만들었기도 하고... 저를 좋아해주실 이유가 없는걸요."

"정확하게는 정연님을 응원하셨을 것 같기 때문에 정연님이 사랑하시는 아가씨도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게 부모님들의 마음이니까요."

내가 나라서가 아니라, 내가 선배의 사랑이라서 라는 이유.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선배가 앞으로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실장님은 어떻게 확신하셔요?"

"한번도 누군갈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적 없는 아가씨께서 처음 고른 연인 아니십니까, 아가씨께서는 똑똑하신 분이시니까 분명 최선의 답을 찾으실 겁니다."

"... 실장님이랑 대화하면 늘 편하네요. 고마워요."

"하하.. 아닙니다 아가씨."

더 물어볼 필요가 없겠다 싶을 즈음 벤치에 앉아있는 선배가 보였다.

"선배~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아냐아냐. 고생했어. 실장님도요."

다시 차에 타 선배의 손을 꼭 잡았다.

...

"이모! 여기 삽겹살 3인분이랑 소주 하나요~"

부산 도심의 어느 고기집.

아름이를 데려오기에는 너무 싸고 서민적인 곳이라 부끄럽다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부산에서 술을 마셨던 곳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대답해줄 기억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아름아, 다른데로 갈까? 여기 너무 시끄럽고 그렇지 않을까..?"

"선배만 괜찮으면 저는 다 괜찮아요 선배.

이런 곳을 자주 안오다 보니까 조금 신기한 부분도 있고, 또 선배가 와봤던 기억을 공유한다는 느낌이 좋네요."

"응... 다행이네... 혹시 불편하면 바로 말해줘..."

"네 선배."

추모공원에 들른 이후 아름이랑 휴대폰도 만들고 민증 신청도 하고 옷도 사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시간이 되게 빠르게 흘렀다.

'살짝 피곤한 상태에 삼쏘라니.

이정도면 나한테 과분할정도로 행복한 식사지.'

친구가 많았던 것은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 후 으레 다같이 한잔 마시자고 이야기하는 동기들 틈에 껴서 한번 와본 게 전부인 곳이었지만,

꽤 맛이 괜찮았기에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다.

"여기 삼겹살 3인분이랑 소주 한병~"

이모님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밑반찬들을 세팅해주신 뒤에 고기랑 소주를 주셨다.

"조심해요~ 불 들어가요~"

숯불까지 세팅이 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나.

"아름이 너한테 자신있게 선보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내 입에 되게 맛있었던 곳이니까... 맛있었으면 좋겠다."

"헤헤... 고작 밥집 소개에 너무 긴장하시네요 우리선배."

"그치만... 아름이 너한테는 최고만 보여주고 싶은걸..."

"괜찮아요, 술 따라드릴게요. 여기요."

"어, 응. 고마워, 나도.."

"네 우리 짠 하죠."

"그래 짠~"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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