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43화 (43/96)

〈 43화 〉 새터 전날은 부산행 (3)

* * *

"...선배."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익숙한 목소리

"도착했어요 선배."

아름이는 잠들었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며 나를 깨웠다.

"으어... 흐억..!"

눈을 뜨자 내 얼굴 바로 앞에 있던 아름이에게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움찔했다.

"어..? 도착? 응?"

아름이가 건네준 물을 마시면서 정신을 차린다.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제가 너무 급하게 내려가자고 해버린건가요..."

아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를 걱정했다.

"잠은 충분했던 거 같은데. 몸이 피곤한건가... 음.. 어제.. 앗.."

"어제요..?"

어제 침실에서 사랑을 나눴던 장면들이,

특히 몸이 달아올라서 아름이에게 애원했던 내 대사들이 떠올라 급 부끄러워진다.

"선배? 얼굴이 빨개지셨는데요?

열도 좀 있는 것 같고.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아니, 괜찮아. 빨리 가볼까~"

괜히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 하니 과장된 톤이 되어 영 어색했다.

"컨디션 안좋으시면 말씀해주셔야해요..."

"응."

차 문을 열고 나서니 어릴 때 몇번 와봤던 곳이었다.

부산의 한 추모공원.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직접 오지는 않고 인터넷으로 여기구나 하는 것만 기억했었다.

"선배, 어느 쪽에 모셨는지 아셔요?"

"어..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어디더라... 되게 넓어서 헷갈리네...'

가슴 속으로 원망만 했지 묘 위치도 제대로 기억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죄스럽게 느껴져서 마음에 어두운 기분이 내려앉는다.

'나란 인간도 참 쓰레기구나...'

내가 기억을 더듬어보려는 듯 하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있어서 그런지 내 왼손을 깍지껴 잡아주는 아름이.

"어릴 때 일이라고 하셨으니 잘 기억 안날 수도 있죠. 관리사무소 쪽에 물어보면 찾을 수 있을거에요."

"아..."

다행히 기억을 못해서 여기까지 와놓고 묘에 못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똑같았지만 내가 우울해하면 아름이가 신경쓰일테니 최대한 티를 안내야겠지.

"응 가서 물어볼게."

주차장을 가로질러 관리사무소에 들어서니 직원 몇 분이 앉아계셨다.

부모님의 인적사항을 작성하고 잠시 기다리니 안내도에 위치를 표시해서 가르쳐주셨다.

"감사합니다~"

추모공원이 꽤 커서 걸어가면 15분 정도 걸리니 옆쪽 주차장까지 차로 가는게 편할거라 말씀하셨지만, 생각도 기분도 복잡해서 아름이랑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저벅 저벅

아름이랑 손을 잡은채로 앞서 걸으면 거리를 유지하며 김실장님이 뒤에서 짐을 챙겨 따라오셨다.

"여기오면 뭔가 후련해질 것 같았는데 계속 기분이 복잡하네..."

"선배가 혼자 고민했던 시간이 길어서 그럴거에요. 괜찮아요."

걸어가는 중에도 손이 조금씩 떨리는게 티가 난걸까.

아름이가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줬다.

"과거의 나를 직접 마주하는 것 같아서,

내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어린 정훈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죠.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선배지만 그걸 후회하고 반성하는 지금의 선배도 선배인걸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안다는 듯 신경쓰이는 부분을 콕 하고 찔러서 풀어주려는 그녀.

"그런데도 자꾸 똑같은 생각이 머리에서, 어. 여긴가..?"

직원 분께서 약도에 표시해준 곳까지 온 것 같아서 하던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지도로는 맞는 것 같네요 선배."

어릴 때 본 것 같은 위치의 가족묘.

어머니 아버지 두분이 같이 돌아가셔서 같이 모셨었는데 여기가 맞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돌에 새겨진 글귀를 확인하니 부모님이 맞았다.

"아름아 여기 맞아."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부모님 묘는 자주 관리되지는 못했는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래되어 색이 많이 빠진 조화꽃과 많이 자라있는 풀들.

비가 많이 온 날 쓸려내려갔는지 살짝 파여있는 흙.

"어..."

"여기 있습니다 정연님."

우리를 따라오셔서 이제 도착한 김실장님은 가져온 큰 가방에서 조화를 꺼내 내게 주셨다.

"감사합니다..."

오래된 조화들을 꺼내고 새 꽃을 반씩 나눠 꽂았다.

내가 조화를 바꾸는 동안 실장님께서는 낫이랑 빗자루, 수건 등을 꺼내고 계셨다.

나는 내가 혼자해도 괜찮다고 여러번 말했지만 자신들이 거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같이 빨리하고 인사드리자는 아름이와 실장님의 말에 같이 조금이나마 청소하고 정리했다.

"나 혼자 해도 되는데 정말로..."

"선배 체력도 별로 안좋으시잖아요. 같이 하고 절올려요."

"응..."

셋이 하니 정말로 꽤 금방 마무리 되었기에 또 실장님이 가져온 가방에서 술과 음식들을 꺼내 상을 차린다.

"나는 너무 준비한 것도 하는 것도 없네..."

"제가 오자고 했으니까 준비도 해와야죠.

너무 신경쓰지 마셔요."

듣고보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오는 길에 뭐를 챙겨야 할지 고민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푹 자고 일어나니 도착했던 부분은 신경이 안쓰일 수 없었다.

간단하게 상을 차려 준비한 다음 나, 아름이, 실장님 순서로 절을 올린다.

중간에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끝까지 버텼다.

"...아름아.. 그, 잠시만."

"아, 네. 저희는 잠깐 근처 걷다 올게요.

별로 안 머니까 다 끝나시면 말씀해주셔요."

말을 건넬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알았다는 듯한 아름이.

혼자 남아 상 앞 돗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내 앞 작은 상에도 잔을 놓고 술을 한잔 따른다.

"아버지, 어머니.. 아 아니다."

평소에는 2인칭, 3인칭으로 떠올릴 때 아버지 어머니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아빠 엄마라 불러서 그런지 아버지 어머니라 이야기하는 게 어색했다.

"아빠, 엄마. 저 정훈이에요. 생각해보니까 모습이 이래서 절 올릴때 누군지 못알아보셨을 수도 있겠다 그쵸."

겨우 참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고 목소리도 울먹이며 겨우 말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남았기에 계속 말을 이어간다.

"이제야 와서 죄송해요. 맨날 바쁘다고 스스로 핑계나 대고...

사실 오려면 올 수 있었는데, 흡.. 흑.. 그, 괜히 엄마 아빠가 밉다고 생각해서.."

내가 생각했던 감정을 직접 뱉으려니 더 어려웠다.

"끄윽. 윽. 사실 내가 못난건데, 어, 엄마 아빠가 없으니까 내가 피해봤다고 생각하고 흐읍..."

내 앞에 놓인 술을 입에 털어넣고 잔을 내려놓는다.

원래 음복은 이런 건 아니겠지만 우리 엄마 아빠니까 봐주실거라 믿는다.

"흑.. 아빠는 저랑 나중에 하자고 한 것도 많으면서, 엄마 몰래 약속한 것도 많으면서 먼저 그렇게 가시고... 끅..

엄마도, 아, 아빠때문에 유학도 안가고, 그, 그렇게 고생하셨으면서 흐흑... 저 크는 것도 못보고.. 으헝..."

시야를 조금씩 일그러뜨리던 눈물이 결국 눈가에 고여있지 못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억울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저만 두고.. 흡.."

어릴 때 여러번 원망하며 말했던 말들.

이제와서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리가 없지만 혹시나 전해질까 싶어 자꾸만 묻는다.

"얘기하자면 긴데, 방금 같이 온 애랑 사귀고 있어요.

이름은 아름이에요. 한아름.

우연히 만났다가 다시 만났을 때 여러 우여곡절도 있었는데, 지금 되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어요. 아름이 언니가 되어주고 싶어서 이렇게 여자가 될 만큼..."

처음 여친을 만들면 아빠한테 먼저 이야기해달라고 했던 어릴 적의 일이 생각나서 또 울컥한다.

"흡.. 그, 엄마가 마음에 안들어할 수도 있다고 압, 여친 생기면 아빠가 먼저 봐준다고 그랬었는데 끅. 흑..."

말을 잇기 힘들어 또 술을 한잔 털어넣는다.

어릴 때 있었던 일, 대학 진학 후에 생겼던 일, 등등 마음에 쌓아뒀던 이야기들이 강을 막아둔 댐이 부서지는 것처럼 흘러나온다.

"후.. 아무튼, 아들, 아 이제 딸인가?

그,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엄마 아빠 원망도 안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찾고 이제 행복하게 살 거예요.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주신 분들인데 괜히 마음 힘들때 핑계거리로 써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못해도 1년에 2번씩은 꼭 올게요.

거기서는 제 걱정 하지 말고 편하게 쉬시고.

제가 생각해도 제가 너무 한심하지만.. 그래도 용서해주실 수 있으시면 용서해주세요.

끅.. 흑.. 사랑해요..."

할 말이 뭐가 그렇게 많았는지 한참을 떠든 것 같다.

내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알았는지 아름이랑 실장님은 공원을 크게 돌았다가 이제야 마지막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내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해서 지나쳐 갈까봐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든다.

"아, 울고 있어서 아름이가 걱정하겠다. 휴지가..."

가방에서 휴지를 찾아 얼굴을 대충 닦고 있으니 아름이 목소리가 들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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