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41화 (41/96)

〈 41화 〉 새터 전날은 부산행 (1)

* * *

...

...

"정훈아!"

낯익은 목소리다.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바닥을 쳐다보고만 있던 나를 누군가가 부른다.

"정훈이 맞지? 이놈 자식아!"

낯익은 목소리의 남성은 내 뒤에서 다가와 머리에 꿀밤을 한대 놓았다.

"아야야..."

"왜 또 여기서 이러고 있어?"

원래도 훌쩍이고 있다가 겨우 그쳤건만,

뒤돌아보니 꿈인걸 알면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아, 아.. 아빠...!"

"아이구 이눔시키, 또 우네.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들어가자."

나는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같이 집으로 걸어갔다.

"정훈아,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더라.

너가 울면서 뛰쳐나갔다고.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엄마한테 혼나는 게 무서워서...

엄마가 소리칠 때 바로 나왔어요..."

"왜 혼나는데?"

"오늘 유치원에서 진우랑 싸웠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 전화로 들어서 다 알고계셨을 법 한데 내가 직접 내 입으로 이야기하게 하려고 모른 척 하셨던 것 같다.

"정훈아 이겼지?"

"걔가 항복이라고 했는데...

제가 먼저 울어서 제가 진거래요..."

"크크.. 그럴 수도 있지 짜식.

맞고다니지만 마라. 내 자식이 맞고다닌다 생각하면 아빠가 다 속상하니까."

"네..."

"진우랑은 왜싸웠는데?"

"... ...서요."

"응?"

"걔가 우리집 못산다고 전세라고 놀려서요."

"허허 참. 요즘 애들은 그런걸로도 놀리니?

우리 집 잘산다고 그래. 아빠 그렇게 무능하진 않다 정훈아?"

"엄마한테도 맨날 돈 못벌어온다고 혼나잖아요."

"크흠...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

엄마한테는 비밀인데 이번에 대박나면 우리 부자 되는거야."

"엄마가 아빠 서류봉투 안에 비상금 있는거 모르는 거처럼요?"

"아, 아니 아니 그거랑은 다른건데...

아무튼 싸나이들끼리의 비밀이다 정훈아?

약속!"

"네 약속."

어머니께 혼나서 놀이터에서 혼자 울고있다보면 노을때문에 하늘이 붉어질 즈음 퇴귿하신 아버지께서 꼭 달래주셨다.

완벽한 아버지는 아니셨어도 내게 친구같은 아빠가 되고싶으시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이정훈 이눔시키!

뭘 잘했다고 혼나다 말고 뛰어나가!

너 자꾸 버릇없게 굴래?"

"내가 들어오면서 따끔하게 혼냈으니까 오늘은 한번 봐주자."

"당신이 혼내기는, 항상 오냐오냐 하니까 애가 저렇게 마음이 여리지."

"그게 뭐 꼭 나쁜건가? 하하..."

"으휴 이 웬수들.."

평범해서 어디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없을 정도의 무난한 일상.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던 내 삶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바뀌었다.

...

"정훈이 있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유치원 선생님께서 날 찾으셔서 가방을 대충 챙겨 정문으로 나가니 검은색 정장을 입은 작은아버지랑 고모가 계셨다.

큰 병원을 내비로 찍고 가시길래 처음엔 부모님께서 많이 다친 일인줄로만 알았다.

아버지께서 그 날 지방 가실 일이 있어서 두분 같이 밤늦게 돌아오실거라고 아침에 말씀해주셨기에.

이 뒤는 하도 많이 떠올렸던 장면이라서 그런지 꿈에서도 금방 넘어갔다.

어리둥절한 나를 끌어안고 우는 친척들, 어머니 아버지 친구분들, 어머니 재산은 어떻게 해야하니,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니 하는 싸움들.

어머니께선 입버릇처럼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부잣집 도련님들이 모셔갔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혼내면서 놀릴 때 자주 하시던 말씀이라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부모님 짐을 정리하면서 찾은 옛날 앨범 속 어머니는 상당히 미인이셨으니까.

집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을 전공하신 어머니께서는 확실히 지금봐도 세련된 느낌이 있었다.

유학을 생각했지만 대학을 다니던 중 아버지와 사귀게 되면서 졸업 후 학원 강사를 시작하셨고, 나중에는 직접 학원을 열어 꽤나 잘나가셨던걸로 안다.

지금도 외삼촌이 세를 받고 있을 상가건물이 어머니께서 자수성가해서 만든 결실일테니.

그래도 어머니께서 그렇게 아버지를 꾸짖으실 때면 꼭 아버지께서 덧붙이는 말도 있었다.

"정훈아, 너네 엄마가 그렇게 대단한 여잔데, 그런 여자를 반하게 만든 아빠는 얼마나 멋진 남자였겠냐?"

하고 말이다.

그래도 참 유쾌하신 분이셨다.

초등학교도 안들어간 나를 데리고 참 많은 이야기를 하셨고.

"아빠는 너네 엄마가 첫 여잔데 정훈이 너는 못해도 6명은 사귄 다음에 결혼해라."

"어른 되면 첫 술은 꼭 아빠랑 같이 먹는거다."

"여친 생기면 아빠한테 먼저 소개해줘서 엄마가 마음에 들어할지 의논하자."

"아빠가 돈 열심히 벌어서 우리 정훈이는 외제차 타게 해줄게."

"아빠는 젊을때 못가봐서 나중에 클럽가면 꼭 후기 말해주기야."

대여섯살 어린애한테 할 말인가 싶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은 분이셨다.

적어도 똑똑하셨던 젊은 날의 어머니께서 유학을 포기하고 인생을 함께 걷기를 선택할 만큼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분이셨을 것이다.

꿈은 늘 그렇듯 똑같은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나랑 같이 했던 약속들은 뭐냐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면 억울하지도 않냐고.

이렇게 나만 두고 가면 거기서는 편하실 수 있냐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외침을 거듭하는 사이 주변은 점점 어두워진다.

내가 자존감이 조금만 낮아지면 환경탓을 하며 핑계를 대던 대상.

내가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애초에 출발선이 달랐다고 원망하는 대상.

내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지금에 와서는 내 목을 조이는 죄책감이 되어 가위에 눌린듯 꿈 속에서도 답답함을 느낀다.

"으흑흑.. 흑..."

...

...

답답함 속에서 눈을 뜬다.

아직 어두운 방.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겨우 앞을 보니 아름이가 날 바라보고 있다.

"어... 굿모닝?"

눈가에 고인 눈물과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훔쳐냈지만 아름이가 슬픈 표정으로 내 볼을 쓰다듬는 것을 보니 자면서 울면서 잠꼬대를 했나보다.

"아~ 시시한 악몽이었어,

괜히 놀라서 잠꼬대 했나보네.

아무일도 아니야 아름아.

우리 오늘 뭐하려..."

와락

아름이는 내가 쥐어짜낸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안하면 아름이가 걱정할텐데.

빨리 어떻게든 변명을 더 생각해내야.'

아름이가 나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싫었다.

슬픈 얼굴의 아름이를 보는 것은 안좋은 일이었고, 그 슬픈 얼굴을 짓게 한 원인이 나라는 것은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괜찮아요.

아무 말씀 하지 마시고

지금은 제 품에 계셔요."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데.

진짜 별 일 없었다고 해야하는데.

너가 괜히 오해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야 아무 생각 없이 변명을 지어냈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아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또 싫어서.

나는 그냥 얌전히 그녀 품에 안긴다.

"...응..."

꽃향기 같은 향에 크림같이 달달한 느낌이 얹혀있는 아름이의 향기.

따로 향수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바디워시나 샴푸도 같은 것을 사용할텐데, 아름이의 향기는 기분좋아지는 무언가가 있다.

밤에는 조금 흥분되기도 하고.

아무튼 아름이에게 안긴채로 눈을 감아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콩닥콩닥 뛰고있는 이 심장소리가 내 심장인지 아름이 심장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하나가 된 느낌.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내가 마음이 좀 가라앉은 것 같아 그녀를 떼어냈다.

"괜찮아지셨어요?"

"응... 고마워..."

"왜 그랬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셔요?

잠결에 말씀하시는 걸 듣긴 했지만...

많이 힘드시면 안하셔도 괜찮아요."

아름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냐 그동안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는데,

아름이 너라면 다 말할 수 있어."

누워서 아름이와 손깍지를 끼고 같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가 꿨던 악몽들, 내가 자라오면서 겪은 일들, 내가 해왔던 생각들을 말해주었다.

시설에 처음 잡혀갔을 때랑 아름이에게 사랑해달라고 애원할 때 어느정도는 이야기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기회는 없었으니까.

내 자격지심.

내 트라우마.

내 콤플렉스.

아름이에게 잡혀 시설에서 고문당하던 때에 부모님 생각이 나더라 하는 그런 내용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름이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 아름아 이제는 다 괜찮아.

워낙 옛날 일이고, 나도 이제 완전 어른이고 응.

너무 신경 안써도 돼..."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 생각은 달랐나보다.

"오늘까지도 죄책감에 악몽을 꾸는데 어떻게 괜찮아요.

우리 오늘 개강하면 필요한 물건들 사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루고 선배 부모님 뵈러 가요.

어디 모셨는지는 아셔요?"

"응..."

"그럼 씻고 나오셔요. 실장님 부를게요."

"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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