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달이 차오른다
* * *
치직..
하은은 한껏 올라온 고양감이 내려오기 전에 이 기분을 좀 더 길게 빼서 느끼고 싶어 시가형태의 막대 끝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후우..."
증기를 마실 때 마다 입안이 바싹 말라오고 청각, 촉각이 예민해지는게 느껴진다.
뜨겁게 달군 유리의 모양을 잡듯 한 손으로는 가슴을 주무르며 다른 손은 질구 주변을 어루만진다.
"아름아... 내 보지 만져주라..
아름아... 나한테 질투해줘.
좀 더 미워해주고...
그러다 도저히 못참을 것 같으면
나를 부숴줘..."
자신밖에 없는 방에서 전하는 외로운 속삭임이었지만, 지금의 하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은이 원하는 그녀가 지금 진짜로 자신 앞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
"하아하아...♥ "
아까 봉사를 받을 때에는 전혀 감흥이 없었는데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까 가볍게 클리토리스를 건드렸다가 손가락을 집어 넣는 것 만으로도 절정에 도달한다.
" 헤으읏...!! 하앙..♥"
흰자위를 드러내며 온몸을 들썩이는 하은.
하지만 너무나 쉽게 쾌감과 행복감을 얻은 반동은 그녀가 여운을 즐길 여유를 허락하지않았다.
방금 얻은 쾌락의 두배, 세배는 되는 우울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누른다.
비틀린 시야가 점점 돌아오면서 극심한 두통과 떨림, 답답함이 흥분이 남아있던 자리를 대신한다.
"갈수록 지속시간이 짧아지네..."
두통이 심한듯 인상을 찌푸린 하은은 머리맡에 있는 알약 한주먹을 입에 털어넣고 그 옆 테이블에 있는 위스키를 병째 들이켜 약을 넘긴다.
"후으..."
도수가 높은 위스키가 약과 함께 그녀의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식도와 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뜨거운 감각을 남기며 하은은 두통이 약간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하.. 크하핫..."
옆에 누군가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어리둥절 했을,
이상한 타이밍에 웃음이 멈추지 않는 하은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몸을 일으켜 창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달을 바라봤다.
"크흐... 크크..."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가운 하나만 걸친 하은을 비추는 가로등처럼 올곧은 빛을 내려준다.
아까 걷어올린 뒤로 계속 말려올라가 있던 가운의 왼쪽 팔 부분을 다시 내리려 하니 자신의 팔이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진다.
새하얗다 보다는 창백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한 자신의 팔.
팔꿈치 안쪽 주변은 약물을 넣기 위해 혈관에 주사를 꽃으면서 생긴 자국들이 가득했다.
"많이도 했네..
처음에는 훨씬 짜릿했는데 말야..."
박물관 전시품을 보듯 자신의 팔을 마저 훑어본다.
주사 자국 아래로 뼈대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팔과 가느다란 손이 만나는 부분.
그녀의 손목에는 가로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번 그어진 흉터들이 바코드처럼 새겨져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하은아...
푸흐흐..."
손목의 흉터 개수를 세듯 손톱으로 하나하나 그으며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금수저.
천재.
미녀.
스타.
모두 나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어려서부터 객관적으로 예쁘다 싶었던 얼굴에 늘씬하고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체형이라 모두들 부러워했다.
나름 똑똑하다고 말하는 또래 애들도 내게는 조금 영특한 침팬지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는 도구를 쓰는게 신기한 까마귀 정도.
물론 20살에 박사학위를 받거나 인류가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젊을 때 풀어내는 해외의 석학들이랑은 비교가 안될 정도겠지만,
최소한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 멍청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또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예쁘고 똑똑했다.
단지 그 뿐이었으면 그냥 지나가는 범생이년이라고 다들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돈도 많았다.
자신이 금수저라고 말하고 다니던 같은 반 아이들을 모두 합쳐도 나랑 게임이 안될만큼.
완벽한 유년기라고 다들 이야기하겠지만,
어쩌면 어린 소녀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을
나는 한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족의 사랑.
나는 눈엣가시였으니까.
증조할아버님께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시고 기업의 규모가 커져 할아버님, 아버님께 내려오기 까지 S 그룹의 승계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조선시대처럼 진짜 칼과 암살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숫자와 경제 논리로 돌아가고 치열한 법정에서의 싸움 끝에 할아버님도, 내 아버님도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밟고 일어섰다.
한 배에서 나와 같은 유년시절을 공유하고 같은 꿈을 꾸었지만 한 하늘에 태양이 두 개 뜰 수는 없는 법.
형제, 자매, 가족으로 포장하고 있던 관계는 결국 승자와 패자로 분명하게 나뉘는 세계.
그래서였을까. 큰오라버니가 태어날 때부터 아버님은 당신의 자식 세대에서는 같은 비극이 이뤄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 결과 큰 오라버니의 공은 기업의 공이며 밝은 미래였지만 작은 오라버니와 내가 하는 노력은 부질없는 짓을 하며 괜히 불안요소를 만드는 일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내가 진열장 속 바비인형처럼 멍청하게 예쁜 미소만 짓고 있기를 원했다.
적당히 자라고 적당히 놀면서 가끔 언론에 노출되어야 하면 기업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의 용모만 가꾸는 그런 인물.
나중에 큰 오라버니가 기업을 이어받게 되면 다시 언급정도는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는 그런 여자.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천재였다.
정량적인 자료가 그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철이 들 무렵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999명의 범인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는 1명의 사람.
나 스스로의 만족감과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도 있었겠지만, 어린 마음에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내게 기대하는 게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으니까.
처음에는 과학, 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칭찬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영이나 기업 지배에 뜻이 없다고 생각해서 안도감이 들었던 걸지도.
집에서도 꽤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똑똑한 정도로는 중학생이 대학 연구실 시설을 써서 연구에 참여할 수 있을리 없었지만 내 배경이 만들어주는 힘은 내가 원하는 바를 남들보다 몇배는 쉽게 이루게 해주었다.
내 성과에 대한 대답이 경멸과 다그침이 된 것은 나보다 12살이 많은 큰 오라버니가 무능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였다.
큰 오라버니는 멍청했다.
범재도 노력하면 게으른 천재를 이길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노력하면 성과를 이룰 수 있는 범재의 수준에조차도 들지 못하는 모자란 인간이 내 오라버니라는 사람이었다.
학위라는 건 돈만 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기에 그런 그도 기부입학 형태로 미국 명문대 유학을 다녀왔다.
다만 기업의 기술에 대한 이해, 경영에 대한 이해가 모두 부족했기에 학부 졸업 이후 도전해본 두개의 스타트업 모두 처참할 정도의 실패를 남긴 후에 소리소문없이 없어졌다.
그정도 실패로 가세가 기울지는 않지만,
주주와 친척들이 보는 시각은 무르지도 않았다.
지분을 나누고 직접 경영에서는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와, 후에 아버님이 은퇴하실 때 메인은 큰 오라버니가 하더라도 기술팀을 내가 이끌어 2인 체제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그 후론 뭐.
어머님께서는 내 편을 들어주셨기에 엄청난 벽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에 가족에게 미움을 받는 다는건 참 가슴아픈 일이라.
그럴수록 바보같이 더 학업에 몰두했다.
내가 엄청 뛰어나면 아버님이 다시 나를 예뻐해주시겠지.
큰 오라버니도 어릴 때 처럼 나를 칭찬해주시고 웃어주시겠지 하는 헛된 생각을 하며.
그럴수록 진짜 친구라는 것을 나는 만들지 못했다.
대부분의 또래 아이들은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나랑 어울릴만한 대화수준을 갖추지 못했거나, 좀 똑똑하다 싶은 아이들은 눈치도 빨라서 괜히 문제 생기기 싫어 나를 멀리했으니까.
그리고 재벌가의 또래들은 대부분 멍청했다.
숨만 쉬어도 평범한 사람이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을 돈을 갖고 태어나,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 위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결핍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의욕과 노력하는 법을 잊었다.
허세와 과시욕만 남은 껍데기들.
그러던 중 H 그룹과의 식사자리에서 만난 그녀는 그때까지 살면서 한번도 보지못한, 황홀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을 내게 전해줬다.
한아름.
H 그룹의 나와 동갑인 재벌 4세.
그 날도 속은 썩어갔지만 밖에서 티를 내는 건 내게 허용되지 않았기에 우을증 약을 먹고 기분이 나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라버니들과 어른들은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기에 별실에서 둘이서만 식사를 따로 했다.
중학교에서는 만나지 못한 나와 대화가 통하는 상대.
같은 재벌가 아이면서도 권태감과 나태함에 빠져있지 않은 그녀가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서 괜히 친해지려 잔뜩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평소 생활은 어떤지, 좋아하는 건 뭔지, 공부는 또 어떻게 하는지.
그녀 또한 학교생활이 썩 편하지는 않았는지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로부터 미움의 시선을 받은 이후로 2년만에 가장 즐거웠던 식사를 마치고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아름아.. 오늘 덕분에 너무 재밌었어.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가족이 주지 못하는 애정을, 이때까지는 없었던 새 친구가 주는 우정을 그녀에게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건넨 나의 말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음... 그건 힘들 것 같네요.
확실히 비슷한 점이 많긴 하지만,
그쪽도 텅 비어있잖아요.
저한테 색을 선물해주실 것 같지는 않고.
제가 애정결핍 치료제 자판기나
자존감 채워주는 보모는 아니니까.
저도 오늘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또 뵈어야 할 것 까지는..."
담담하게 나와 친구할 만큼은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이 속상해서 그 날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가질 수 없는 보물이 더 빛나는 법이라고 했나.
그녀의 거절을 받은 이후로 나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된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했기에 나는 대중들에게 더 빛나는 사람이 되어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 이후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도 늘 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예쁘고 천재인 재벌 4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관심에는 부러움과 질투 선망 등이 모두 담겨있었지만 대중은 무식한 법이라 서민적인 척, 수수한 척 몇번만 해주면 여론은 금방 호감으로 기울었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미워져서 생긴 남성혐오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주변에 티를 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한아름이 영재고에 입학해서 주변에 그녀가 자신의 배경을 모르는 학우들과 친해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H 그룹 부회장 딸이라는 정보를 건너건너 들어가도록 흘려넣었다.
그녀는 계속 고독한 외톨이.
나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빛나는 사람이 되어 그녀가 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려고 했는데...
미디어에서는 밝은 척 연기하고 주변에 풀지 못하는 검은 감정은 혼자 삼키기를 반복하자 더는 평소의 우울증 약으로는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렇게 우울감이 쌓여 망가져가더 시기, 해외 여름학교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친구가 한국에 올 일이 생겨서 만났고 그때 그녀가 권했던 약을 호기심에 해보았는데 그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미디어에서는 밝고 예쁘게 웃고 내가 지은 작은 성에서 한아름을 대신할만한 자극을 계속 채웠다.
남자 아이돌을 잡아다가 약물을 넣은 후 강간하기도 하고,
한아름과 닮은 년들을 데려와서 한아름인 척 연기를 시킨 뒤 섹스를 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망상으로만 했던 일들이 약을 한번 한 이후로는 리미트가 해제되었는지 행동에 거침이 없어졌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내 상황을 알고 있을 법 한데 터치하지 않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약물에 중독된 몇명이 쇼크사로 죽기도 했지만,
그 정도 일을 덮는 건 내겐 문제도 아니었다.
내게 처음 약을 권한 친구가 사실은 큰 오라버니쪽으로 연결되어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내가 뭔가를 할 힘도 없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감정을 죽이고 멍청하게 웃는것.
이제는 너무 쉽게 잘하니까.
...
...
"한아름... 한아름..."
그녀가 밉다.
그날 밤 그녀가 내게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괜히 그녀를 탓한다.
순수하게 미워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녀를 너무나 원한다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으면.
그녀가 원망스럽고 수치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내 보지를 핥았으면.
그녀가 나한테 약쟁이라고 놀리지만 결국 약물의 쾌락 앞에 굴복하고 내 아래에 깔려 색기 가득한 신음을 잔뜩 들려줬으면.
그녀도 나랑 같이 이 나락에 떨어져 잔뜩 망가졌으면...
"아름아 보고싶다...♥"
그녀가 우리 계열사인 S 백화점에 대해 문의를 했다길래 우연을 가장하여 그녀를 만나러 갔다.
경호가 빡세서 평소에 미행도 힘들고 가끔 큰 연회에서 멀리서 지켜보거나 했으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기에.
하지만 외톨이일 줄 알았던 그녀의 옆에 처음 보는 여성이 있었다.
게다가 아름이가 친척언니라고 소개한 여성.
"그런 뻥을 다 치고 말이야 크크..."
나한테 친척언니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그대로 믿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해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일 터.
아름이랑 다르게 수수한 매력이 있는 그 여성을 아름이는 선배라고 불렀다.
"근데 학교 선배 중에는 그런 얼굴이 또 없었단 말이지..."
그녀의 주변 인물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을텐데.
또 아름에게 모르는 게 하나 늘어 재미를 더해준다.
"그 년 잡아다가 아름이 앞에서 강간하면 아름이 표정이 어떨까..?
울면서 소리치려나?
화나서 노려보려나?
입술 깨물어서 피나는데도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소리 하나 안내려나?"
상상만 해도 보지가 젖어오는 것 같다.
"캠퍼스 라이프 너무 기대된다 아름아..."
달을 올려다 보며 한참을 중얼거리다 잠에드는 하은이었다.
* * *